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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blog.naver.com/uyamahiroto/90194237495
2. http://daesan.or.kr/webzine_read.html?uid=1757&h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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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
정지용
고향·향수… 민족의 눈물을 노래한 한국 현대詩의 선구자
▲ photo 정운영 |
정지용(鄭芝溶)은 ‘향수’ ‘고향’ ‘백록담’ 등 한국인이 읊어온 애송시를 쓴 국민 시인이다. 그는 ‘천재 시인’ 이상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박목월·박두진을 추천으로 등단시키기도 했다.
지용과 함께 우리 문단을 풍미했던 김기림은 지용이 “조선 신시사상(新詩史上)에 새로운 시기를 그은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꽃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머언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바로 이 ‘고향’은 지용이 1932년 7월 동방평론 4호에 발표한 시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채동선이 이 시로 작곡해 더욱 널리 애송되었으나, 6·25전쟁 후 ‘고향’은 사라졌다. 대신 노산 이은상의 ‘그리워’로, 혹은 박화목의 ‘망향’이란 가사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지용이 오랜 기간 월북작가로 누명을 써왔던 때문이었다.
정지용은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대상을 선명히 묘사하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소월과 지용은 동갑이지만, 그들의 시를 보면 100년의 차이가 난다”고 했다. “소월이 한국의 한(恨)의 정서를 바탕으로 전통적이고 잠재적인 모국어를 구사했다면, 지용은 시적 대상의 적확한 묘사력과 언어조탁, 시적 기법의 혁신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星座)”라고 극찬한다.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 정씨 정태국(鄭泰國)과 하동 정씨 정미하(鄭美河) 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다.
모친이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어, 본명도 이 음을 따서 지용으로 지었다. 그뒤 지용(芝溶)은 그의 아호이자 필명이 되었다.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원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홍수의 피해를 크게 입어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졌다. 원래 연일 정씨들이 집단촌을 이뤄 살던 곳은 충북 수북리 꾀꼴마을이었으나,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가로 이사했다. 그때 부친은 처가 친척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정지용은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회고한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 어린 그는 불행했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문재 발휘
고향에 복원된 정지용의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툇간 구조이다. 주거용의 ‘ㄱ’자 집은 부엌 뒤로 방 한 칸을 더 내어 ‘ㄱ’자를 이루는 특이한 구조이다. 옛날 반가에서는 옥상옥처럼 담장 안에 담을 만들어 내외벽을 쌓았는데, 그것은 여인들을 배려한 특별한 공간이었으며 안사람에 대한 예의를 중시했던 우리의 풍습이었다. 방과 방 사이의 소통로는 이러한 연유를 담고 있는 듯하다.
정지용은 9세 때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며, 3년 뒤 동갑인 은진 송(宋)씨 재숙(在淑)과 결혼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4년간 한문을 배우다가 17세 때 휘문고보에 입학한다. 성적이 우수하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장학생이 되며, 졸업 후에도 유학비용을 받는다. 휘문고보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그는 동인지 ‘요람’의 산파역을 맡아 습작활동을 한다. 그는 ‘요람’에 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 2학년 때는 ‘서광(曙光)’지에 ‘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발휘한다.
정지용은 학생자치회와 동문회를 연합한 재학생과 졸업한 동문 모임인 ‘문우회’의 학예부장이 되어 휘문고보 교지 ‘휘문’ 창간호도 발간한다. 여기에 그의 최초의 번역물 ‘퍼스포니와 수선화’ ‘여명의 여신 오로아’ ‘기탄젤리’도 실었다. 당시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인도는 물론 전 세계가 신화적 인물로 주목한 타고르의 노벨상 수상작인 ‘기탄젤리’를 무명의 고보생이 번역을 시도한 사실에서 지용의 원대한 시적 포부를 읽게 된다. 당시 문단의 중진이었던 김억이 ‘기탄젤리’를 완역한 것이 1923년 4월인데, 지용은 이보다 조금 앞서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예활동도 이처럼 활발하게 하여 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가 2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으며, 학교마다 휴교 사태가 발생했다. 휘문고보생들도 많이 검거되었으며, 뒤어어 벌인 동맹휴학 사건을 지용은 이선근(문교부 장관 역임)과 함께 주동하여, 무기정학을 당하나 선배들이 구제에 나서 무사히 졸업한다.
“그 학교 문예부 ‘요람’지를 선후배들이랑 하구 그랬잖아요? 그 뭐 요람지가 전부 학생들한테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선생님한테도 다 가구 그러거든요. 그 교지를 보구 다들 ‘이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이다’, 그 칭찬이 대단한 거죠.… 5년제 졸업을 하고 교주한테 인사를 하러 가니까 ‘넌 그래 졸업을 했으니 어떡할 거냐’,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으나 가정형편이 도저히 용서를 안 하고, 어디 취직을 해서 돈벌이를 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아버지를 도와주는 수밖에 없죠’ 하니까 교주가 하는 말이 ‘내 말대로 하면 너 유학을 보내주마’. 귀가 번쩍 뜨일 거 아닙니까. 유학꺼정 보내준다는데. 그 조건이 뭐냐고 물으니까 ‘유학을 보내 줄 테니까 졸업하고 와서는 모교 교사로서 봉사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맏아들 구관씨, 생전의 ‘옥천신문’과의 인터뷰)
한국·일본 문단서 함께 데뷔
그는 졸업과 동시에 휘문 장학금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영문과에 다니면서 한국 문단과 일본 문단에 함께 데뷔한다. 1926년 6월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의 시와 시조 및 동요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어서 ‘조선지광(朝鮮之光)’ ‘신민(新民)’에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한다.
‘근대풍경’의 편집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는 유학 시절의 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친 일본 문단의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기타하라는 ‘근대풍경’을 창간하기 이전에 이미 10개의 잡지를 간행한 경험이 있으며, 1930년에 18권의 전집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용이 일찍부터 시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어(詩語)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기타하라와의 만남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 당시 지용에게 영향을 준 시인으로 윌리엄 블레이크를 들 수 있다. 정지용의 졸업 논문 주제가 ‘윌리엄 블레이크 시 연구’였다.
정지용은 1929년 3월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9월에 모교 영어교사로 취임한다. 이때 분가하여 종로에 살림집을 차린다. 기나긴 타국에서의 타향살이 끝에 마침내 가정이라는 안정된 보금자리를 꾸민 것이다. 이듬해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하면서 문단의 중심권에 자리잡는다.
‘시문학’의 출발은 김영랑과 박용철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정지용은 용아(龍兒) 박용철이 ‘시문학’에 이어 발간한 잡지 ‘문예월간’과 ‘문학’에 계속 작품을 발표하며, 이런 인연으로 용아는 지용의 첫 시집 발간을 주선하여 시문학사에서 ‘정지용시집’이 발간된다. 1932년에는 신생, 동방평론, 문예월간지에 ‘고향’ ‘열차’ 등 10편의 시를 발표한다.
정지용은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으며, 여기에 많은 신앙시를 발표한다. 8월에는 반(反)카프카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표방하고 이종명·김유영이 발기한 ‘9인회’의 창립회원이 된다. 이태준·이무영·유치진·김기림·조용만 등이 함께했다. 정지용과 상허 이태준이 주도하면서 휘문 동문인 박필양과 김유정을 끌어들인다.
정지용은 1938년 동아일보·조선일보·삼천리문학·여성·조광·소년·삼천리·청색지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 우상’ ‘비로봉’, 평론 ‘시와 감상’, 그 외 수필 등 30여편을 발표하며, 블레이크와 휘트먼의 시를 번역하여 최재서 편의 ‘해외서정시집’에 수록한다. 한편 천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는 등 문필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이희승의 호 ‘일석’도 지용의 작품
이듬해 정지용은 ‘문장’지의 시부문 고선위원이 되면서 19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문장’지는 김연만이 출자하고 상허가 편집을 맡은 문예지였는데, 이 잡지를 시발로 한국 문단의 추천제가 정착된다. 엄격하고 권위가 있다는 정평이 난 추천분야는 셋으로, 지용이 시를, 상허가 소설을, 가람 이병기가 시조를 맡았다. 여기서 정지용은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의 청록파 시인을 비롯하여 이한직·김종한·김수돈·황민·박남수 등의 시인을 추천한다. 그는 추천을 하고 나서 꼭 추천사를 썼다. 이 추천사가 당시 추천을 받으려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으로 정지용의 아류가 양산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지용이 무명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을 발굴하여 그의 시집까지 내 준 사연은 매우 애틋하다. 명동의 어느 문둥이 거지가 지녔던 원고 뭉치를 잡지기자에게서 받아든 정지용은 그것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아, 이건 참 시인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클 수 있는 사람이다.”
지용은 당장 발문(跋文)을 써줬다. 당시에는 어떤 시인이 자기 시집을 내고 발문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시인 등단 여부가 결정났던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성은 뭐고 이름은 뭐냐고 하니까 원고를 주고 갈 때 당신 이름을 좀 밝히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니까 ‘한가요’ 하고 가더래요.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대요. 그래 지용이 ‘그 이름 없어도 좋아. 이름은 내가 지어주면 돼’ 그래서 어찌 하(何)자, 구름 운(雲)자, 어느 곳을 떠돌아댕기는 구름이냐. 그렇게 한하운이란 시인의 이름을 지용 시인이 지어준 거예요.”(구관씨)
그렇게 정지용이 아호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꽤 많다. 국문학자 이희승 교수의 아호도 정지용의 작품이다. 동년배에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이희승 선생님에게 ‘호가 무엇입니까?’ ‘나 호 없어요’ 해요. ‘그럼 선생님 내가 하나 지어드리죠, 하고 일석(一石)이라고 그 자리에서 붓으로 써 줬어요. 그래 그 양반 평생 그걸 호로 썼어요.”(구관씨)
한편 죽산 조봉암의 딸 호정에게는 이름을 턱 보더니 조봉암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호강(상하이에 있는 강 이름)에서 맺은 사랑이었구나”라고 호정이라는 이름을 애틋하게 풀어줬다고 한다. 지용이 이화여대 교수시절 학생들 이름을 친근하게 다루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는 시어(詩語)를 고르고 다듬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고어(古語)나 방언을 시어로 폭넓게 활용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만의 시어로 개발했다. 1920년대 소월(素月)이 자아표출을 통하여 자기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한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다면, 정지용은 대상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대상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명징한 모더니즘·이미지즘의 시세계를 보인 것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
▲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손자 운영씨.
정지용은 서구의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답게 형태주의적 기법을 시도한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였다. 김우창은 정지용이 “감각과 언어를 거의 가톨릭적 금욕주의의 엄격함으로 단련하여 ‘백록담’에 이르면, 감각의 단련을 ‘무욕(無慾)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경지에 이른다”고 보았다. 최동호도 “서구 추구적인 아류의 이미지즘이나 유행적인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순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1940년에 정지용은 여성·태양·문장·동아일보·삼천리지에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과 서평 및 시선후평과 수필, 시 ‘천주당’ 등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문장 22호 특집으로 ‘조찬’ ‘진달래’ 등 10편의 시가 특집으로 실리며, 둘째 시집 ‘백록담’이 문장사에서 발간된다.
“그분은 주로 한복을 많이 입었어요. 겨울에는 명주 두루마기 까맣게 물들여서 입고, 구두 신고 출근하고 다녔지요. 제자들이나 아이들이 양복을 입으시라고 해도 꿈쩍을 안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최소한도로 조선 사람이라는 표시는 한복을 입는 것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학교 가면 가르칠 때 일본말을 해야 하고, 이거 아니고는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인정하겠느냐, 표시하겠느냐. 그래서 그렇게 입고 다녔다는 것이지요.”(구관씨)
정지용은 1944년에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나가 천주교성당 건축일을 도우면서 생계를 꾸려간다. 월급날 월급을 타가지고 서울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건네 주려고 기차에서 내렸을 때 대합실에서 어느 여인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그는 노잣돈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딱한 하소연을 듣고 월급 봉투를 그대로 내주면서 집에 돌아가는 대로 빨리 갚으라고 당부했다. 며칠째 기다리다 월급을 통째 떼인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순진한 시인의 아내임을 탄식했다고 한다.
1945년 광복 후 정지용은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국어와 라틴어를 가르친다. 이듬해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노기남 주교의 천거로 주간직을 맡으며, 경향신문에 ‘청춘과 소년’ 등과 7편의 역시(휘트먼 원작) 등을 발표한다.
1980년대 문화계서 복권 운동
1948년 정지용은 이화여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녹번리(현재 서울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서예를 하며 소일한다. 이때 어느 잡지에서 정지용이 월북했다는 허위기사를 보도한다. 정지용은 그 잡지를 가지고 당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를 찾아가 대책을 협의한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지용은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며, 정인택·김기림·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전쟁 당시 납북이냐, 월북이냐에 대한 시각 차이로 인해 한국 현대시사에서 금지된 이름으로 남게 된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공인되어온 그의 시는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며, 학술논문에서조차 그를 언급해야 할 때는 ‘정용’으로 흉물스럽게 인용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급기야 한국 현대시에서 정지용을 살려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정지용의 장남인 정구관씨가 있었다. 그가 발로 뛰어 받은 문화계 인사들이 서명한 해금탄원서와 납북 당시의 증언들이 기재되어 있는 각종 문헌들의 조사 자료, 당국에 조사 의뢰하여 받은 납북 행적 자료 등이 제출되었다. 마침내 1988년 도서출판 깊은샘에서 발행한 ‘정지용의 시와 산문’ 작품집에 대해 납본필증이 교부되었다.
정지용은 송재숙과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다. 정지용의 복권을 위해 눈물을 글썽이며 문단의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던 장남 구관씨는 2004년에 작고했으며, 차남 구익씨는 6·25전쟁 때 작고했다. 3남 구인씨는 부친을 찾아 나섰다가 북한에 생존해 있으며, 외딸 구원(77)씨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구관씨는 2남2녀를 두었다. 지용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구관씨의 장남 운영(52·하이덱스스토리지 대표)씨와 차남 문영(49·운수업)씨와 장녀 수영(44·주부), 차녀 란영(41·주부)씨가 있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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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 읽는 우리 근대문학]
연애보다 담배를 먼저 배웠다
정지용
소래섭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는 고뇌의 증거다. 문인의 깊은 고뇌는 한 모금 담배연기와 함께 하늘로 흩어진다.
예술과 담배 사이에는 ‘건강’이라는 척도로 판단할 수 없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시 ‘향수’ ‘유리창’ 등을 남긴 서정시인 정지용.
그는 스물하나, 일본 유학 떠나던 길에 처음으로 담배를 배웠다고 고백했다.
다시 담배가 이슈다. 최근 건강보험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에 최대 3326억 원에 달하는 흡연피해 소송을 제기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대해 한국담배협회는 이번 소송이 궁극적으로는 담뱃값 인상만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아마도 담뱃값 인상에 가장 민감한 것은 작가가 아닐까. 몇 해 전 담뱃값 인상안이 발표되자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는 “창작의 유일한 벗인 담뱃값을 올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작가들이 직접 나서서 ‘담배는 창작활동의 원동력이며 예술가들에게 담배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부’라는 고정관념을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이러한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공초(空超) 오상순이다. 하루에 담배를 10갑 이상 피웠을 정도로 니코틴 중독이었던 그는 ‘나와 시와 담배’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와 시와 담배는
이음동곡(異音同曲)의 삼위일체
나와 내 시혼은
곤곤히 샘솟는 연기
끝없이 곡선의 선율을 타고
영원히 푸른 하늘 품속으로
각각(刻刻) 물들어 스며든다.
-오상순, ‘나와 시와 담배’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상순의 시는 그저 니코틴 중독자의 변명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담배의 강렬한 유혹을 약물 중독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관점은 유독 예술가들이 담배에 중독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뇌과학’이 ‘시혼(詩魂)’과 같은 영역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물학적 진실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무력하다.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담배가 유럽에 전래된 이래, 문학과 담배는 서로 뗄 수 없게 밀접하다. 특히 작가들에게 담배는 그저 기호품에 그치지 않고 창작을 위한 도구이자 시적이고 신성한 대상으로 여겨져왔다.
또한 담배는 서로 갈등하는 여러 담론이 마주치는 지점이기도 했다. 최초에 약으로 소개됐던 담배는 ‘위생담론’과 ‘건강담론’이 파급되면서 점차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지목됐다. 옹호론과 비판론이 첨예하게 맞섰지만, 그럴수록 담배 소비는 늘었다. 담배가 현재로서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쾌락’을 제공하며, 근대적 합리성이나 과학기술의 논리와는 대치되는 ‘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가 주는 신비로운 쾌락
시인 공초 오상순. 그의 오른손에 담배가 쥐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을 정도로 애연가였다.
프랑스문학 연구자인 리처드 클라인은 담배의 유혹을 미학적 측면에서 해명했다. 그는 담배가 조장하는 미(美)의 독특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칸트가 말한 ‘숭고’라고 분석했다. 그는 담배의 심미적 매력, 즉 담배가 흡연가의 삶에 가져다주는 숭고하고도 어두운 미적 쾌락을 보장해주는 것은 ‘담배의 무익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담배는 이롭기 때문이 아니라 해롭기 때문에 오히려 강렬한 매혹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이 담배에 매혹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리처드 클라인은 보들레르를 예로 들어 근대 예술의 출발점이 된 ‘댄디즘’의 목표가 ‘진정한 흡연가’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지적한다. 흡연은 마치 칸트적인 예술작품처럼, 어떤 목적성을 지니지 않으며 자신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목표도 없다. 또한 흡연은 예술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두 가지 모순된 상태를 창조해낸다. 즉 체념을 통해 자아가 강화되면서 ‘집중’하게 되고, 신비적 팽창 속에서 자아가 상실돼 ‘증발’의 상태가 된다는 것.
흔히 담배를 ‘백해무익’이라고 규정하지만, 리처드 클라인에 따르자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담배는 정신적 고통을 완화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촉진한다. 또한 여성의 손에 들린 담배가 그러하듯이, 때로 담배는 성적·정치적 자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표현한다. 오히려 리처드 클라인은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유일한 가치판단 기준인 ‘건강’에 부여된 가치는 무엇이냐고.
리처드 클라인은 건강을 모든 판단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것을 비판하면서 ‘흡연의 효용성’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흡연마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술과 담배 사이에는 건강이라는 척도로 판단할 수 없는 모종의 관계가 있으며, 한국의 근대문학 또한 담배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모두 골초인가
1920~30년대의 작가들 중 실제 흡연자는 얼마나 됐을까. 1937년 월간지 ‘조광’에 실린 ‘담배 피는 사람’이라는 글은 당대 작가들의 흡연 경향을 소개한다. 이 글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애연가는 탐정소설가 김래성이었다. 그는 하루에 열 갑을 피웠다고 한다. 당시에는 열 개비가 한 갑이었으므로 하루에 100개비를 피웠다는 것인데, 오상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적은 양도 아니다.
월탄 박종화는 하루에 40개비를 피웠고 하루에 30개비를 피우는 사람으로는 서광재, 김진섭, 서항석, 임화 등이 있었다. 10개비를 피우는 작가로는 박태원, 김광섭, 이헌구, 엄흥섭 등이 있었고, 채만식은 파이프로 40대 정도를 피웠다.
반면 안회남은 하루에 한 개비만 피우는 ‘괴벽’이 있었고, 이태준, 김상용, 주요섭, 김환태, 박용철, 윤기정, 유치진, 김남천 등은 전혀 담배를 못 피우는 ‘무연파(無煙派)’였다.
담배를 끊은 ‘금연파(禁煙派)’로는 양주동과 박영희 등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당시에도 작가라고 해서 모두 흡연자였던 것은 아니다. 담배를 전혀 못 피우거나 담배를 끊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실 당대에는 남녀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담배를 즐겼다.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인의 흡연 경향은 놀라울 정도였다.
독일인 에손 시드 씨는 1902년 ‘조선왕국 이야기: 100년 전 유럽인이 유럽에 전한’에 실린 글에서 “대한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 년 일생 동안 피우는 담배 연기만으로 베를린의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 남자들은 모두가 괄괄하고 건강하게만 보인다”라고 썼다.
흡연율 증가에 비례해, 금연운동도 만만치 않은 기세로 확장됐다. 개화기부터 전국에서 단연(斷煙)·금연(禁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최초로 금연운동을 벌인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청교도적이었던 그들은 담배를 악으로 규정하고 금연을 독려했다. 선교사들의 금연운동에 힘을 더한 것은 1907년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었다. ‘국채보상취지문’은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연초를 끊고 한 달에 20전씩 모은다면 1300만 원이 될 터이니 국채 갚는 것이 어찌 걱정이랴”라는 셈법을 내놓았다. 1300만 원은 대한제국의 1년 예산 규모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단연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금연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된 것은 역으로 금연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는 반증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예술가는 모두 골초’라는 고정관념은 적어도 1920~30년대에는 통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20년대 후반부터 문인의 아지트로 자리 잡은 다방이 ‘담배 연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묘사되면서 고정관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동인 “담배는 百利”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서울 상수동 ‘제비다방’에서.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상.
당시에는 담배가 건강을 위협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지 않았다. 20세기 초 ‘니코틴’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담배의 해독성이 대두되긴 했지만 담배가 온갖 질병의 원인일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오히려 담배의 해로움을 지적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유용한 면이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심지어 김동인은 “백리(百利)가 있고도 일해(一害)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담배라며, 담배를 멀리하는 사람을 “가련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식후의 제일미(第一味), 용변시의 제일미, 기침의 제일미 쯤은 너무도 상식적이매 거듭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소위 제일미라는 것은 심신의 상쾌를 의미하는 것으로, 심신의 상쾌가 보건상 큰 영향을 주는 것도 거듭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이 막혔을 때에 한 모금의 연초는 막힌 생각을 트게 하는 것은 흡연가가 다 아는 바다.
근심이 있을 때에 한 모금 흡연은 그 근심을 반감케 한다.
권태를 느낄 때에 한 모금 흡연은 그 능률을 올리게 한다.
피곤할 때에 한 모금 흡연은 그 피곤을 사라지게 한다.
더울 때의 흡연은 그에게 양미(凉味)를 주고 추울 때의 흡연은 온미(溫味)를 주고 우중에 떠오르는 연초 연기는 시인에게 시를 줄 것이며 암중(暗中) 연초는 공상가에게 철리(哲理)를 줄 것이며 꼽아내려 가자면 연초의 효용이라는 점은 수없이 많고 또 이 많은 조건이 결합해 인체에 끼치는 좋은 영향은 능히 사람의 수명에까지 좋은 결과를 줄 터이니, 연초는 가히 예찬할 자이지 금할 자가 아니다."
-김동인, ‘연초의 효용’
김동인의 글에는 지금껏 애연가들이 담배의 유용성으로 주장하는 모든 논리가 담겨 있다. 식후, 용변 시, 기상 시 등에 피우는 담배가 가장 맛있다는 것은 흡연자들의 오랜 증언이다. 또 근심과 피곤을 덜고 일의 능률을 올리며 창작이나 공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담배 예찬론자들의 한결같은 논리다.
김동인은 한 술 더 떠 담배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먼저 담배 맛부터 변하기 때문에 조기에 질병을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배에 입문하는 나이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엷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담배에 대한 규제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담배에 ‘입문’하는 시기도 지금보다 훨씬 일렀다. 1949년 잡지 ‘신천지’는 저명인사들의 ‘애연지(愛煙志)’를 연재했다. 필자로 참여한 계용묵, 홍기문, 김용준, 김동명, 서천순, 손우성, 안종화 등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들이 처음 담배를 접한 것은 이르면 7~8세 때였고, 늦어도 중등학교 때를 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어른들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고 회고하지만, 당시에는 남성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담배를 접했다.
소파 방정환이 1930년 신문지상에 발표한 ‘담배갑’이라는 동화에서도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 동화는 서울 어느 소학교에서 담배 피는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몸 검사를 실시하다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교사들이 담배를 소지한 학생들을 적발해낸다.
몇몇 학생이 적발되자 누군가 다급한 나머지 담뱃갑을 버렸고, 그것을 발견한 교장 선생은 그 범인이 자수할 때까지 두 시간 넘게 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워놓는다. 교장 선생의 지루한 훈화가 이어지고 쓰러져가는 학생들이 생겨날 때쯤 한 학생이 자신이 담뱃갑을 버린 범인이라고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학생은 괴로워하는 동료들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었고, 사정을 알게 된 교장 선생은 그 학생의 희생정신을 치하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 동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희생정신을 길러야 한다는 것과 소학교 학생들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 두 가지인 셈이다.
1930년대 들어서는 담배가 특히 미성년자에게 해롭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성년자들의 흡연을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자 총독부는 1938년에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금주·금연법을 제정한다. 일본에서 이 법이 제정된 것은 1900년이었다. 이 법에 따라 미성년자의 흡연과 음주가 금지되었고, 흡연을 묵인한 부모나 판매자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법에서 규정한 미성년자란 만 12세 미만을 의미했으므로 사실상 규제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만 12세 이상인 경우에도 중학교 등에서는 흡연을 금지했지만, 지금처럼 학교 화장실은 항상 흡연자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정지용의 ‘선취(船醉)’라는 시다.
배 난간에 기대서서 휘파람을 날리나니
새까만 등솔기에 팔월달 햇살이 따가워라.
금단추 다섯 개 달은 자랑스러움, 내처 시달품.
아리랑 쪼라도 찾어 볼가, 그 전날 부르던,
아리랑 쪼 그도 저도 다 잊었습네, 인제는 버얼서,
금단추 다섯 개를 삐우고 가자, 파아란 바다 우에.
담배도 못 피우는, 수탉 같은 머언 사랑을
홀로 피우며 가노니, 늬긋 늬긋 흔들 흔들리면서.
-정지용, ‘선취’
이 시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선상에서, 일본 대학의 교복을 입은 식민지 청년의 자괴감을 담은 작품이다. 화자는 식민지 지식인의 상징인 ‘금단추 다섯 개’를 단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금단추를 뜯어 바다에 던져 버린다. 이어 화자는 식민지 조국에 대한 애정과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담배도 못 피우는, 수탉 같은 머언 사랑”이라는 말로 드러낸다.
청춘의 상징
당시 학생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어릴 적부터 담배를 피웠고, 그것은 모방심리의 소산이자 청소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반항심리의 표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담배도 못 피운다는 한탄은 그만한 치기조차 없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다.
정지용은 유학길에 나서던 때의 모습을 담은 ‘다시 해협’이란 시에서도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라고 썼다. 이렇듯 정지용의 시에서 담배는 연애와 더불어 청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담배와 연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는 이런 노래가 나온다.
“연인들의 달콤한 이야기, 달콤한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은 담배연기라네!/
그들의 희열, 그들의 희열, 그리고 그들의 맹세/
이 모든 것들은 담배연기라네./
담배연기가 허공으로 떠도는 것을 우린 바라본다네.”
담배와 연애 모두 농도 짙은 쾌락을 선사한 뒤에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또한 두 가지 모두 쾌락만큼이나 강렬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춘 시절에는 그러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 정지용이 34세에 쓴 ‘다시 해협’에서야 비로소 담배와 연애를 동렬에 놓을 수 있었던 것도, 연애가 담배 연기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끝)
소래섭
● 1973년 전북 익산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 저서 : ‘백석의 맛’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시는 노래처럼’ 등
/ 신동아
흡연율 OECD 2위 '골초 한국' 담배 이야기
장병들 일발 장전 '화랑' 32년 최장수
'신탄진' 표지엔 "이디오피아 황제 만세"
“50분 훈련하고 10분 쉴 때 피우는 ‘화랑’ 담배 한 대는 정말 꿀맛 같았지.”
1970년대 군 복무를 했던 박영배(57)씨에게 ‘화랑’ 담배는 군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이름이다.
49년 국군 창설 기념으로 나온 담배 화랑은 81년까지 무려 32년간 군부대에 저가에 공급됐던 국내 최장수 브랜드다. 쉬는 시간, 훈련 조교는 “담배 일발 장전”을 외치고 장병들은 구호에 맞춰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금쪽같은 휴식시간을 만끽했다. 당시 군에서는 1인당 매달 15갑을 공짜로 나눠줬다.
하지만 2008년 ‘디스’를 마지막으로 군 면세 담배가 사라지면서 장병들도 제값 주고 담배를 사게 됐다. 담뱃값을 4500원으로 인상하겠다는 정부안이 현실화할 경우 이등병 월급(11만2500원)으로는 담뱃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2500원이던 담뱃값을 4500원으로 80% 인상하겠다는 정부 방안이 발표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정부안대로라면 담뱃값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62%에서 74%로 올라간다.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연간 121만원의 세금을 내는 셈이 된다. 실질적인 서민 증세라는 비난이 일자 부총리가 나서 “담뱃값 인상은 세수 목적이 아닌 국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나섰다.
이에 화답하듯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프랑스의 경우 2003년 담배 가격을 40% 올린 뒤 1년 뒤 판매가 33.5%나 줄었다는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때마침 질병관리본부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담배를 많이 피우고, 남성 흡연자 2명 중 한 명은 1년 동안 금연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5명 중 한 명은 1개월 내 금연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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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담배를 군대에서 처음 배웠다.
"담배 일발 장전" 때문에.
지금도 피운다.보통 3일에 한갑정도... 그런데 열불나면 몇 시간만에 한갑도 불지른다.
담배값? 5000원? 좋지.
대개 외국의 경우 담배값이 오르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피아다. 원래 유럽의 마피아 주 수입원이 담배와 술의 밀수다. 프랑스가 담배값 올려서 흡연자가 줄었다는 걸 믿는 사람은 정부관료 밖에 없다. 유럽에서 프랑스가 흡연율이 제일 높다.
오천원하면 밀수담배가 들어올 확율이 아마 높을거다.
밀수담배 피우면 적발하고 형사처벌하겠다고 하면 "유신정권" 부활이라고 난리날걸?
김유정원문 (0) | 2015.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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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 Wikipedia (0) | 2015.09.20 |
봄봄/ 김유정 (0) | 2015.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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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오입쟁이 李箱(이상)도 연정에는 서툰 소년”
⊙ ‘고독한 이방인’ 시인 李箱의 遺稿(유고) 속에 당대 문인들의 삶 담겨
⊙ 박태원의 소설 <애욕>의 주인공은 李箱이 실제 모델
⊙ “돌아오지 않는 ‘제비(이상의 다방 상호)’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金起林)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맨 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1930년대에 카프식(式) 경향문학에 맞선 걸출한 문우(文友)들이 여럿 있었다. 시인 이상(李箱·본명 金海卿·1910~1937)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소설가 박태원(朴泰遠)과 김유정(金裕貞) 등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했던 ‘구인회(九人會)’ 멤버이기도 한 이들 사이에 남은 교우록(交友錄)은, 일찍 타개한 이상의 유고(遺稿)와 문우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고독한 이방인(異邦人)’이라 불린 이상은 당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조되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모더니즘 문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인물. 3년 과정의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나와 21세 때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수로 취직한 그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에 당선되는가 하면 <이상(異常)한 반역반응(反逆反應)>이란 낯선 시로 당대 문단을 경악시켰다. 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자신의 초상화를 출품, 입선될 정도로 문예(文藝)에 다재다능했다.
이상이 1934년 4월 17일 향년 28세를 일기로 동경제대부속병원에서 요절하고 2년 뒤인 1939년 5월호 《청색지(靑色紙)》에 이상의 유고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이 실렸다.
글 도입부에 이상은 ‘앞으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에 대한 글도 쓸 계획’임을 밝혔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글은 한 편밖에 없다.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는 문우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起林· 泰遠· 芝溶· 裕貞
이상은 시인 김기림에 대해 ‘암만해도 성을 안 낼뿐더러 누구를 대하든 늘 좋은 낯으로 대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見本)’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태원에 대해선 비슷하지만 다르게 묘사한다.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敵)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p89,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 《청색지》, 1939년 5월)
이상이 보기에 정지용은 김기림, 박태원과 또 다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짓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서 “여! 어디 덤벼봐라”고 할 줄 아는, 그러나 그저 그럴 줄 알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고 마는, 코밑에 수염을 저축(貯蓄)한 정지용이었다.…>(p89)
반면 김유정은 속으로 부글부글 삼키는 부류가 아닌 진정한 ‘투사’로 묘사된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때기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稀有)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p89)
이상은 ‘이들이 무슨 경우에 어떤 얼굴을 했댔자 기실, 그 교만(驕慢)에서 산출된 표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분들’이라 재미있게 표현한다.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不肖) 이상이 보니까 여상(如上)의 성격이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 되겠다.…>(p90)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날 김유정이 B군, S군과 함께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이상을 찾아왔다.
“김형!(김해경) 이 유정이가 오늘, 술 좀 먹었습니다. 김형, 우리 또 한잔 합시다.”
이상 왈(曰) “그럽시다 그려.”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은 술이 들어가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강원도아리랑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를 내뽑곤 했다. 이상이 듣기에 유정의 목소리는 ‘천하일품’. 하지만 취중 문학담은 곧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B군이 술에 취해 5합들이 술병을 거꾸로 쥐고 육모방망이 돌리듯 휘두르며 “너, 유정이 덤벼라”고 외쳤다. 유정과 S군이 함께 맞서 B군을 공격했지만 B군은 S군의 불두덩이를 걷어찼다. 노발대발한 S군은 B군을 향하여 맹렬한 일축(一蹴)을 결행한다.
<…이러면 B군은 또 선수(船首)를 돌려 유정을 겨누어 거룩한 일축을 발사한다. 김유정은 S군을, S군은 B군을, B군은 유정을, 유정은 S군을, S군은… 대체 누가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p93)
仇甫의 소설 <애욕>에 등장한 李箱
이상이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친필 축하 메시지.
“結婚(결혼)은 卽(즉) 慢畵(만화)에 틀님업고(틀림없고)”로 시작하는 글이 눈에 띈다.
1939년 5월 《여성》지에는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이 쓴 추모글인 <이상(李箱)의 비련(秘戀)>이 실렸다. 그는 이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난하고 불결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지만, 코르덴 양복에 해진 셔츠, 세수는 사흘에 한번 할까 말까 하고, 잡지 일로 《조선일보》 출판부 같은 곳에 나타나서 불결한 손으로 눈을 비벼 눈곱을 떼고 하품을 하고 그러면서도 곧잘, 그의 독특한 화술을 농(弄)하여 사람을 웃겼던 것이나, 그러한 곳에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일종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었다.…>(p76, <이상의 비련>, 《여성》, 1939년 5월호)
구보의 집은 서울 광교 천변에 있었는데 이상이 종로1가에서 운영했던 다방과 가까웠다고 한다. 다방 ‘제비’는 이상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객혈로 건축과 기수직을 포기하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으로 휴양을 떠나 그곳에서 기생 금홍(錦紅)이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한 뒤 상경(上京), 호구책으로 시작했었다. 영업이 신통치 않아 ‘제비’가 결국 문을 닫았고 뒤이어 카페 ‘쓰루’ ‘씩스 나인’, 다방 ‘무기’를 열었으나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다.
구보는 이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 <애욕(愛慾)>을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러나 3~4회 연재하다 중단했다고 한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젊은 화가 하웅(河雄). 하웅은 종로에서 다방을 경영하는데 아내를 다방 마담으로 내세웠다. 아내는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떠나버리고 하웅은 우연히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정지용의 시를 암송한다. 그러나 소녀 주위에는 여러 사내가 있어 하웅을 거짓사랑으로 농락할 뿐이다. 그런 하웅을 친구인 구보가 나무라지만 하웅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태원은 <이상의 비련>이란 글에서 자신의 소설 <애욕>을 소개하며 소설 속 하웅의 모델이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수(面手·면도와 세수)를 게을리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머리카락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다.…>(p74)
소설이 연재되고 친구들이 이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모던 걸’하고 요새도 자주 만나시오?”
그러면 이상은 이렇게 답했다.
“무어? <애욕> 말씀이구려.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구보 얘기지요. 하웅이라는 것이 실상은 구보요, 하웅을 나무라는 자가 실상은 나 이상이오.”
그러면 문우들이 다시 박태원에게 물었다.
“이상이 이처럼 말하는데 진상은 어찌된 것이오?”
그때마다 박태원은 이렇게 언명(言明)했다.
“그건 괜한 말이오. 하웅은 역시 이상임이 틀림없소.”
박태원은 요절한 벗을 그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웅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중략) 당시 나와 이상은 서로 각기 다른 조그만 로맨스를 가졌었다.
이상의 정인(情人)이 어느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과, 나의 상대가 모(某) 지방 명사(?)의 딸이었다는 고만한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의 소녀나 한 가지로 상당히 방종성(放縱性)을 띠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되었다.…>(p74~75)
“매일같이 gloomy sunday”
다방 ‘제비’에 모인 이상, 박태원, 김소운(왼쪽부터).
이상의 실제 연애담은 훗날 여러 문인의 기억을 통해 회자됐다. 다방이 문을 닫고 아내 금홍이 바람이 난 뒤 카페의 일본 여급 ‘마유미’와 어지간히 사귀기도 했다.
어느 날 이상이 치정관계로 건달에게 칼침을 맞고 입원한 ‘마유미’를 보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尹柄魯의 <고독한 이방인> 참조).
“나는 떠나야겠어. 서울을, 이렇게 있다가는 썩어버릴 것만 같아, 매일같이 구루미 선데이야. 어두운 일요일이 날마다 계속이야. 아, 나는 죽을 것만 같아.”
<이상의 비련>에 박태원과 이상이 나누었던 생전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상과 나(박태원)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똥 묻은 개였다. 내가 이상을 향하여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정열(情熱)이 너무 아깝소”라고 충고하면, 이상은 또한 박태원을 향해 이렇게 똑같이 받아쳤다.
“여보, 그까짓 계집을 무어라고 그토록 소중히 안고 사랑을 하느니 어쩌니 그러오? 당신의 열정이 너무 아깝소.”
두 사람은, 서로 마음속으로 ‘이상이 그리 미쳤단 말인가?’ ‘구보가 아무래도 성치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벗을 위해 서로 슬퍼하고 못마땅해했다.…>(p75)
박태원은 “당당한 오입쟁이였던 이상도 몸과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는 연정(戀情)에는 스스로 소년과 같이 수줍고 애탔다”고 기억했다.
<…언젠가 다방 ‘금강산’에서 이상이 한 여성을 향해 구애한 일이 있었다. 구석진 탁자에 한잔의 가배차(커피-편집자)를 앞에 두고 여인과 마주앉은 이상은 다시 소년과 같이 가슴을 태우고 마음이 수줍은 나머지,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탁자 한가운데 놓은 각설탕 그릇에 담긴 모당을 손으로 만졌다.
사랑을 받아주기 원하는 여인 앞에 이상의 손이 불결한 것은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슬픈 사실이다. 그가 만진 모당은 그대로 꺼멓게 때가 묻었다. 여인은, 이상의 열정보다도 한 개, 두 개, 손때가 까맣게 묻어가는 각설탕에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은 물론 그런 것에 미처 생각이 들 턱이 없다. (중략) 평소 그처럼 능변(能辯)인 그가 말조차 더듬어 가며 자기의 진정을 애인에게 알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러나 마침내 시중드는 아이가 참다못해 그들 탁자로 다가와 이상의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갔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 고개를 들고 그곳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멸(侮蔑) 가득한 눈초리에 어처구니없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77)
1939년 6월호 《여성》에는 이상이 생전(生前) 시인 김기림에게 보냈던 편지 4편이 <이상서간(李箱書簡)>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편지에는 사랑에, 정에 굶주렸던 고독한 시인의 마음이 잘 묻어 있다.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러워서? 이 편지를 보았을 때 형(김기림)은 아마 뒤이어 <기상도(氣象圖)>의 교정을 보아야 될 것 같소. 형이 여기 있고 마음맞은 친구끼리 모여 조용한 ‘기상도의 밤’을 가지고 싶은 것이 퍽 유감(遺憾)되게 되었구려. 우리 여름에 할까?
여보! 편지나 좀 하구려! 내 고독과 정적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굿바이…>
(p83, <이상서간>, 《여성》, 1939년 6월호)
이상이 요절한 뒤 김기림은 박태원에게 쓴 편지(《여성》 1939년 5월호에 게재됐다)에 이상을 그리며 “봄이 오니 형(박태원)도 ‘제비(다방 상호)’가 그리우신가 보오. 돌아오지 않는 ‘제비’의 임자는 얼마나 야속한 사람이겠소? 동경(東京)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오”라고 썼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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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단의 등뼈, 동인 4
1930년대의 문제성
한국 근대문학은 계몽적·집단적·운동적 성격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문학의 집단적·운동적 성격은 한국 근대문학이 작가 개인의 노력과 역량만이 아니라 동인지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창작집이 아니라 주로 문예지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이러한 문예 동인과 문예지는 제도에 안착한 기성의 안정성에 도전하는 차이화 전략의 일환이므로, 한국 근대문학의 매 시기에는 항상 해당 시기를 대표하는 동인 또는 문예지가 있었다. 이 글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구인회’ 《문장》 《인문평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것들은 사실상 1930년대 한국문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과 성취를 살피는 일은 곧 1930년대 문학의 그것을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위상은 각별하다. 1930년대의 한국은 대륙침략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은 일본 때문에 온전히 전쟁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어지는 이 전쟁의 시대에 한국문학은 한편으로는 열악한 정치적 현실로 인해 인위적인 단절을 경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 시기에 비해 한층 다양하고 성숙한 단계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 ‘성숙’의 의미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왜냐하면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문학인들 가운데 일부가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근대’ 자체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선의 상당 부분은 제국 일본의 시선을 차용한 결과였기에 국내의 현실과 연동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이러한 한계는 또한 모더니즘에도 있었다. 한국문학의 전통성을 애써 부정하거나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근대 이후의 한국문학은 일본을 통해 수입된 외래적인 것의 영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고, 그때마다 외래적인 것과 한국의 문학 현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1930년대는 ‘카프’가 주도한 1920년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이 시기 일본은 3·1 운동 이후에 취해 오던 문화통치를 무단통치로 전환했고, 그에 따라 1920년대 문학의 핵심이었던 카프(KAPF)와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현저히 축소되었다. 카프의 리얼리즘이 퇴조기에 접어들 무렵 문단에는 ‘구인회’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적 동력이 약했던 ‘구인회’는 불과 2~3년 만에 사실상의 해체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모임의 회원 중 일부가 1930년대 후반에 《문장》을 창간했다. 1930년대 후반의 문학을 사실상 양분했던 《문장》의 전통주의 담론과 《인문평론》의 근대(비판) 담론으로 인해 이 시기 한국문학은 ‘담론’을 통해 급박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아래에서는 이들 동인 집단과 문예동인지의 탄생 배경과 그들이 내세운 문학적 이념을 중심으로 그 문학사적 가능성과 한계를 타진해보려 한다.
‘구인회’와 모더니즘의 등장
‘구인회’는 1933년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 등이 창립한 예술 모임이다. 결성 당시 이 모임은 “회원 간의 친목 도모”와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창립 목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구인회는 결성된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새로 가입했으며, 그 이후에도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하는 등 회원에서 변화를 보였다. 흔히 ‘구인회’는 회원 수가 늘 9명을 유지했다고 오해되고 있지만, 1935년 6월 30일 《조선문단》 좌담회에서 정지용은 회원 수를 묻는 이석훈의 질문에 “13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이들의 집단적 활동은 몇 번의 합평회, 집단적인 칼럼 연재, 두 차례의 문학 강연회, 그리고 1936년 3월 기관지 《시와 소설》을 발행한 것 등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인회’는 1933년 8월에 결성되어 1936년 10월 무렵에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는 ‘구인회’와 카프의 관계, ‘구인회’의 결성 과정과 구체적 성격,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회원들의 공통적인 지향 등을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해왔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의식적인 예술적 지향을 함께하기 위해 ‘구인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특히 현재까지 ‘구인회’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가 회고, 조용만의 회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데, 실제로 여러 지면을 통해 확인되는 ‘구인회’에 관한 정보들은 상충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구인회’의 결성 계기는 무엇이었고, 결성 과정은 어떠했으며, 어떤 이유로 활동을 멈추었을까? 많은 연구자가 이 문제에 천착했으나 여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구인회’는 창립 일자부터가 논란의 대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구인회’의 창립 일자는 1933년 8월 15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25일 자에 실린 ‘시와 소설의 밤’ 광고 기사 때문이다. 이 기사에는 1934년 6월 30일에 개최될 ‘시와 소설의 밤’ 행사가 구인회가 주최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가 후원한다는 내용과, “구인회는 작년 8월 15일에 창립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효석, 조벽암, 이종명, 이태준 11씨(氏)의 작가 단체”라는 단체 소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인회’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을 제공했고 그 자신 ‘구인회’의 일원이기도 했던 조용만은 1957년 회고(〈구인회의 기억〉 《현대문학》 1957년 1월호)에서 창립일을 “7월 그믐께이던가 팔월 초생”이라고 밝혔고, 소설집 《구인회 만들 무렵》(정음사, 1984)에서는 “칠월 스무날 께, 이효석도 서울로 올라오고 아홉 사람 전 회원이 모여서 저녁 여섯 시에 광교 큰길에 있는 조그만 양식집에서 발회식을 가졌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구인회’의 창립일은 1933년 8월 26일일 가능성이 높다.
첫째,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31일 자 ‘문단인 소식―구인회 조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좌기(左記)의 문인 구씨(九氏)는 이십육일 오후 팔시(八時)에 시내 황금정 아서원에서 회합하야 순문학 연구단체 구인회를 조직하얏다는데 00한 조선문학에 신기축을 짓고자 함이 그 목적이라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회합을 한다고……”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둘째, 〈동아일보〉 1933년 9월 1일 자 3면 ‘문단 풍문’에 “구인회 창립.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한 사교적 클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셋째, 〈조선일보〉 1933년 8월 30일 학예면에 ‘소식―구인회 창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넷째, 잡지 《삼천리》 1933년 9월호 ‘문인의 신단체’에 “소필(蕭苾)한 추풍(秋風)이 불자, 최근에 문단에 희소식이 들린다. 이종명, 김유영, 이태준, 이효석, 김기림, 이무영, 조용만 외 제씨의 발기로, 신흥문예단체가 결성되야 크게 활약하리라는데, 결사의 주지는, 문인상호 간의 친목과 자유스러운 입장에 서서 예술운동을 이르킴에 잇다 하는데, 아무튼 금후의 활약이 기대된다.”라는 내용이 실렸다. 조용만의 회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증거들이 ‘구인회’의 창립일이 8월 26일이라는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를 뒷받침하고 있고, 구체적인 모임 장소 또한 조용만의 기억과 달리 “광교 큰길에 있는 조그만 양식집”이 아니라 황금정에 있던 중화요리점인 아서원(雅廻園)이었다. 아서원은 1907년 산동성 복산현(福山縣) 출신의 서광빈(徐光賓)이라는 사람이 설립하여 1970년 폐점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서울의 대표적인 중화요릿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구인회’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반대하는 순수예술을 위해 결성되었다는 기존의 평가도 사후적으로 구성된 시선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구인회의 범(凡)모더니즘 문학은 확실히 대립·경쟁적 관계로 포착되기 쉽다. 실제로 기관지 《시와 소설》의 편집후기에 등장하는 이상의 진술(“구인회처럼 탈 많을 수 참 없다. 그러나 한 번도 대꾸를 한 일이 없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대꾸 일일이 하느니 할 일이 따로 많으니까다. 일후라도 묵묵부답 채 지날 게다.”)을 살펴보면 ‘구인회’를 겨냥한 카프의 비판이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구인회’에 소속된 인물들의 문학적 경향을 살펴보면 이들의 모임 결성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반감, 즉 1920년대 문학의 주류적 경향과는 다른 성격의 문학을 추구하려던 의지가 짙게 투영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가 곧 대타적인 의식의 발로를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으니, ‘구인회’는 넓은 의미에서 비슷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던 일군의 시인·소설가들이 순수한 문학적 목적으로 결성―정지용은 ‘구인회’를 글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며 계획이나 강령은 없다고 밝혔다―한 모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바로 이 점이 또한 그들의 결속을 느슨하게 만드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 듯하다.
우리는 회원의 사상을 강제하지 안는다. 어느 단체에 끼여 어떤 사상행동을 하거나 어떤 경향을 작품에 강조하거나 절대 자유다. 다만 구인회 그것을 자기가 이용하려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런 야심이 생기면 벌써 우의에 불순이 생기기 때문에 불가불 남이 될 수박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이미 남 되어 주기를 요구바든 회원도 잇섯다. 그럼으로 구인회 그 자체에게 어떤 정치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구인회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인회원인 작가가 개인으로나, 혹은 다른 단체에 끼어선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되 구인회로서는 〈글공부〉 그 이상에 나서지 못한다. 그러타고 그것이 구인회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못맛당해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업다. 애초에 붓으로 맨 것은 글을 쓰는 것으로 맛당하고 비로 맨 것은 마당을 쓰는 것만으로 맛당한 것이다.
이태준이 〈조선중앙일보〉 1835년 8월 11일 자에 “구인회에 대한 난해 기타”라는 제목으로 쓴 글 일부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구인회’가 회원들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 구인회 자체를 특정한 정치적 성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것, 구인회의 활동과 성격은 오직 ‘문학’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 단호한 반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무영을 탈회시킨 것이다. 1935년 6월 30일 《조선문단》 좌담회에서 김남천과 김광섭이 이무영과 조벽암의 탈회, 특히 그 자리에 참석한 이무영에게 구인회 탈퇴의 이유를 묻지만 이무영은 “글로는 발표할 수 있는 성격이지만 여기선 말할 수 없읍니다.”라고 침묵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구인회’는 실제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1934년 6월 17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11회에 걸쳐 연속 게재된 〈격(檄)!!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획에는 총 6명의 필자가 참여했는데, 처음 두 번의 칼럼을 집필한 임린을 제외한 5명(이무영, 이종명, 박태원, 조용만, 김기림)이 모두 구인회 멤버였다. 이들은 각각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주요한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비판 대상자 명단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자가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카프와 구인회의 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인회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후원으로 1934년 6월 30일에는 ‘시와 소설의 밤’을, 1935년 2월 18~22일에는 ‘조선신문예강좌’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1935년 4월에 창간호가 출판된 기관지 《시와 소설》 발행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상은 다방을 집어치우고 구본웅 화백이 경영하는 창문사라는 인쇄소에 들어가서 교정을 보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구 화백의 호의로 그 이듬 이듬해 1935년 4월에 《시와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구인회 기관지가 나왔다. 오륙십 장의 얇다란 잡지로서 구보와 김유정이 단편을 썼고, 편집은 이상이가 맡아 하였다. 정가는 십전(拾錢)으로 기억되는데 잘 팔리지 않았는지 한 번밖에 못 내고 말았다.”(〈구인회의 기억〉 《현대문학》 1957년 1월호)라는 조용만의 회고와 다음과 같은 이상의 편집후기를 참고할 수 있다.
전부터 몇 번 궁리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그럭저럭 해 오든 일이 이번에 이렇게 탁방이 나서 회원들은 모두 기뻐한다. 위선 화우(畵友) 구본웅 씨에게 마음으로 치사해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책을랑 내 만들어 주마 해서 세상에 흔이 있는 별별 글탄 하나 격지 않고 깨끗이 탄생했다. 일후도 딴 걱정 없을 것은 물론이다. 깨끗하다니 말이지 겉표지에서 뒷표지까지 예서 더 할 수 있으랴 보면 알 게다.
— 《시와 소설》(1935. 4) 창간호 편집후기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시와 소설》의 발간 과정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시인 이상이 다방 ‘제비’를 폐업한 후 구본웅이 경영하던 인쇄소인 창문사에 들어갔고, ‘구인회’의 기관지인 《시와 소설》은 구본웅의 지원을 받아 이상이 편집을 맡아 출간되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이상은 기관지를 출간한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차차 페이지도 늘일 작정이다. 회원밖의 분도 물론 실닌다. 지면 벨으는 것은 의논껏하고 편집만 인쇄소 관계상 이상이 맡아보기로 한다.”처럼 이 기관지가 번창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약 1년 후 일본에 간 김기림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에서 이상은 “구인회는 그 후로 모이지 않았소이다.” “《시와 소설》은 회원들이 모두 게을러서 글렀소이다. 그래 폐간하고 그만둘 심산이오. 2호는 회사 쪽에 내 면목이 없으니까 내 독력으로 내 취미 잡지를 하나 만들 작정입니다.” “구인회는 인간 최대의 태만에서 부침중이오. 팔양이 탈회했소―. 잡지 2호는 흐지부지요. 게을러서 다 틀려먹은 것 같소.”처럼 ‘구인회’ 회원들의 게으름 때문에 두 번째 호를 발간하지 못하는 상황에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구인회 회원들의 문학 활동이 미약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만 기관지 《시와 소설》을 포함한 집단적 활동에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듯하다. 이상에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한 회원들의 이 게으름은 실제로 구인회의 응집력이 그만큼 미약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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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sky-Korsakov: Scheherazade - op.35 The Sea and Sinbad's Ship
바다와 신바드의 배 세헤라자데- op.35 /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Andreevich ~ (1844-1908) ((러시아의 작곡가))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여성>
이 시 또한 李箱이상을 기리며 쓴 시로 이해된다.
하얀 피부에 나비수염 백구두를 신고
주피터가 된 이상,
까마귀가 된 이상,
산 오뚝이가 된 이상,
나비가 된 이상
이상은 흰나비가 되여 쫒기 듯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이상의 작품 속에는 여러 번 나비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의미하는 바는
烏瞰圖 詩第十號 오감도시제10호 "나비"에서 보면
“나비”의 상징은 “조국의 독립 의지를 펼치는 임시정부 레지스탕스”를 이르는 말로 그려지고 있다.
“나비”의 상징은 이상과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등이 공유한 Allegory알레고리이다.
김기림은 이상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상의 멘토Mentor이기도 했다.
이상의 재능을 보고 프랑스로 같이 유학을 가자고 권유하기도 했고 이상 사후 가장 애석해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독립투쟁, 레지스탕스 활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상이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행동파 독립군이 되어 윤봉길처럼 의거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활동 내용은 그의 작품 “종생기” “파첩” “봉별기” “날개” “실화” “황소와 도깨비”등등의 작품 속에 우거지 쓰레기처럼 기록해놓았다.
소설 "날개"속에는 그 계획을 알리는 통지문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독립군 본진에서 작전취소를 통보한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계획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만다.
배신자가 있었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여성>-
그의 작전 개시일은 1937년 3월 3일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1937년 2월 12일 사상불온자로 경찰에 구속된다.
일경이 어떤 제보도 없이 무작위 불심검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이 비밀을 제보한 것일까?
꿈도 펼치지 못 한 체 3월 16일 죽음 일보직전에 새파란 초생달이 되어 풀려나왔다.
3월 새파란 초생달
병상의 이상을 마지막 방문한 친구도 김기림이었다.
혹? 이상의 허리에 새파란 고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상의 애처로운 사연을 김기림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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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까마귀 소리에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주인공은 작가다. 친구의 별장 바깥채 작은 사랑을 빌려 기거하게 됐다.
방 가까운 데에서 '까르르……' 하고 GA 아래 R 발음의 까마귀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근처에는 돼지 기르는 데가 있어 까마귀가 떠나지 않는다.
개울 건너에 산다는 폐병 환자인 젊은 여인이 이곳 별장 정원으로 가끔 산책을 온다.
날이 갈수록 더 창백해진 그 가엾은 여인은 그간 두어 번 각혈을 했다고 한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여자는 죽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깨우쳐 주는 것 같아 까마귀가 싫다고 했다.
연민을 느끼게 되었으나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애인은 사랑한다는 증거로 각혈을 한 피를 반 컵이나 마신 사람이라고 했다.
여인은 까마귀 뱃속에 귀신이 들어있는 것처럼 무섭다면서 자기는 살고 싶은 의욕이 떠난 지 오래라 말한다.
그는 여인이 간 뒤, 활을 만들어 까마귀를 잡는다.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여인이 오면 까마귀를 해부해서 단순한 내장이 들어 있을 뿐이란 것을 증명해 보이리라.
그러나 정원에 눈이 녹고 까마귀 시체도 해부하기 알맞게 녹을 때까지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개울 건너 넓은 마당에 영구차가 있는 것을 본다.
전나무 꼭대기에서는 까마귀가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죽었다.
영구차에 여인의 애인이 오르고는 서서히 떠나갔다.
함박눈이 내렸다.
까마귀는 이따금씩 그저 까악― 까악―거리다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며 울었다.
작가 이태준이 1936년 1월 -조광-에 발표한 단편 <까마귀>이다.
까마귀
까마귀의 의미는 일본제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런 일련의 항일 저항 세력을 총칭하는 말이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친일파다.
작품 속의 가엾은 패병환자 여인은 언젠가는 패망에 이를 일제 침략주의자들을 이르는 말이며
여인의 각혈한 피를 들이마신 여인의 애인은 살육의 피를 좋아하는 일본 침략 군부를 이르는 말이다.
친일파 들은 일제에 잘 보이려고 그들의 사냥개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들은 일제 경시청의 프락치fraktsiya 노릇을 하고 있다.
여인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연한 까마귀를 활로 쏘아 죽이듯이.....
독립의지를 가진 의로운 사람들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1936년 9월 5일 손기정 선수 일장기 사태를 계기로 강력한 언론탄압이 시도된다.
까마귀들은 이날 저녁에도 별다른 소리는 없이 그저 까악― 까악―거리다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곤 하였다.
GA 아래 R GA 아래 R GA 아래 R
가 아래 라! 가아래라! 가래라! 일본놈들 가래라!
1936년 1월 단편 -조광-
까마귀와 오감도鳥瞰圖 - 1936년 이상과 이태준의 처지
李箱이상은 1934년 7월 본 소설 “까마귀”의 작가인 상허 이태준의 추천으로 조선중앙일보에 烏監圖詩오감도시 15편을 개재한다.
烏오: 까마귀 오
이상과 이태준은 문학가 모임인 九人會구인회 일원 이었다.
구인회는 당시 카프 문학의 정치성과 계급문학에 반대한 유일한 순수문학 동인들의 모임이다.
다른 학파들은 구인회가 자유주의파요, 無意志派무의지파 라며 자연 소멸 될 것이고 언젠가는 반일저항세력이 될 것이라 우려를 나타낸다.
1932년 이후 일제의 탄압의 강도는 높아지고 특히나 언론탄압과 친일파 전향으로 인하여 순수문학파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뭔가에 쫒기 듯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직장을 버려야했고 사업은 실패하고 살림살이는 곤궁해져 간다.
지혜로운 까마귀 고조선 때부터 숭상의 대상이던 까마귀
이상의 시 오감도는 까마귀가 내려다 본 조선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까마귀라는 詩語시어는 구인회와 이상과 절친한 동지들간에 통용되는 암호와도 같다.
까마귀 = 항일 저항운동가
원문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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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 소설을 읽으면 마치 시인 이상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36년 1월 이상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상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까마귀는 까마귀 오 烏監圖 오감도의 모체다.
까마귀; 이상과 이태준이 공유한 알래고리다.
아니 九人會구인회에서 부르던 이상의 별명?
이 소설의 발표시기는 1936년 1월. ( 조광)
작자 이태준은 시인 이상의 맨토로써 절친한 사이였다.
이상은 "종생기"에서 독자들은 이 글을 읽고 간담이 서늘할 것이라고 말한다.
종생기"를 읽고 간담이 서늘해진 독자는 과연 몇이니 될까?
수필 " 지팽이 역사"에서 기차 바닥 구멍에 담배재를 터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지팽이 역사"를 읽고 소름이 돋은 독자가 있는가?
이상의 문학은 모두 재해석 되어야 한다.
1933년 총독부 사직후 부터 1937죽는 날까지 4년 동안
이상에게는 요시찰 원숭이가 따라다녔다.
살어름판을 걷는 삶이었다.
그러나 굽힘 없이 의연했다.
이제 그의 삶을 하나 하나 풀어가 보자 !
원문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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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라
노라 저자: 나혜석 |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착한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착한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주고
높은 장벽을 열고 깊은 규문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아버지의 딸이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천부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비쳤네.
노라 Nora: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인형의 집
[ Et dukkehjem, 人形─ ]
요약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3막 희곡.
1879년 작품. 그해에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초연되어 작가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작품이다.
변호사 헬마의 아내 노라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며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남편은 새해에 은행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그 기쁨이 겹친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노라는 신혼 무렵, 남편이 앓아 전지요양을 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을 위서(僞書)하여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남편을 살렸다. 그 악질 고리대금업자 크로그쉬타는 지금 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내용을 모르는 헬마는 행장 취임을 계기로 그를 해임하려 하나 상대방은 그 위서사건을 내세워 남편을 실각시키겠다고 노라를 위협한다. 드디어 그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지자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며 욕을 퍼붓는다. 지금까지 자기는 단순히 인형으로 취급되어 귀여움을 받은 데 불과하다고 생각한 노라는, 사건이 해결되고 남편이 다시 결합할 것을 원하지만, 아내가 되기 이전에 책임 있는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하여 집을 뛰쳐나간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노라는 신여성의 대명사가 되었고, 여성해방 운동이 각처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입센의 가장 뛰어난 대표작임은 물론 세계 근대극의 대표작이다. 한국에서는 1925년 조선배우학교에서 맨 처음 공연되었다. 입센의 육필원고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2. 이혼 고백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setId=1192&position=0
삼천리 기고문
1 | 개벽 제18호 | 1921-12-01 | 藝術界의 回顧 一年間 | 曉鍾 | 논설 | 원문제공 |
2 | 동광 제29호 | 1931-12-27 |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公選, 萬一 朝鮮文 3新聞이 다 解消하고 一大理想 新聞이 出現한다면... | 설문 | 원문제공 | |
3 | 동광 제35호 | 1932-07-03 | 混迷低調의 朝鮮美術展覽會를 批判함 | 美術家諸氏 | 문예평론 | 원문제공 |
4 | 별건곤 제26호 | 1930-02-01 | 金雨英氏 夫人 羅蕙錫氏, 訪問 가서 感心한 婦人 | 金起田 | 소식 | 원문제공 |
5 | 별건곤 제30호 | 1930-07-01 | 弟九回 朝鮮美展 | 金周經 | 문예평론 | 원문제공 |
6 | 삼천리 제4호 | 1930-01-11 | 雜談室 | 잡저 | 원문제공 | |
7 | 삼천리 제6호 | 1930-05-01 | 諸氏의 聲明 | 설문 | 원문제공 | |
8 | 삼천리 제6호 | 1930-05-01 | 喫煙室 | 잡저 | 원문제공 | |
9 | 삼천리 제6호 | 1930-05-01 | 新兩性道德의 提唱 | 尹聖相, 黃信德, 羅惠錫, 鄭錫泰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10 | 삼천리 제8호 | 1930-09-01 | 名流婦人과 産兒制限 | 설문 | 원문제공 | |
11 | 삼천리 제16호 | 1931-06-01 | 新女性總觀(2) 百花爛漫의 己未女人群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
12 | 삼천리 제3권 제11호 | 1931-11-01 | 나를 잇지 안는 幸福, 帝展入選後感想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13 | 삼천리 제4권 제1호 | 1932-01-01 |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후의 나 | 在東京 羅蕙錫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14 | 삼천리 제4권 제3호 | 1932-03-01 |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 | 東京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15 | 삼천리 제4권 제4호 | 1932-04-01 | 巴里畵家生活, 巴里의 모델과 畵家生活 | 在東京 羅蕙錫 | 논설 | 원문제공 |
16 | 삼천리 제4권 제7호 | 1932-05-15 | 佳人春秋 | 소식 | 원문제공 | |
17 | 삼천리 제4권 제7호 | 1932-07-01 | 朝鮮美術展覽會 西洋畵總評 | 羅蕙錫 | 문예평론 | 원문제공 |
18 | 삼천리 제4권 제12호 | 1932-12-01 | 쏘비엣露西亞行, 歐米遊記의 其一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19 | 삼천리 제5권 제1호 | 1933-01-01 | 半島에 幾多人材를 내인 英·美·露·日 留學史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
20 | 삼천리 제5권 제1호 | 1933-01-01 | CCCP, 歐米遊記의 第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21 |
삼천리 제5권 제3호 | 1933-03-01 | 伯林과 巴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22 | 삼천리 제5권 제3호 | 1933-03-01 | 畵室의 開放, 巴里에서 도라온 羅蕙錫女史 女子美術學舍 | 婦人記者 | 소식 | 원문제공 |
23 | 삼천리 제5권 제4호 | 1933-04-01 | 作家日記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
24 | 삼천리 제5권 제9호 | 1933-09-01 | 그랫스면 集 | 잡저 | 원문제공 | |
25 | 삼천리 제5권 제9호 | 1933-09-01 | 伯林에서 倫敦까지, 歐美遊記의 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26 | 삼천리 제5권 제10호 | 1933-10-01 | 滿州國行의 廉想涉氏 | 소식 | 원문제공 | |
27 | 삼천리 제5권 제10호 | 1933-10-01 | 晩婚打開 座談會, 아아, 靑春이 아가워라!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
28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朝鮮에 태여 난 것이 幸福한가 不幸한가 | 羅蕙錫 | 설문 | 원문제공 |
29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三千里人生案內 | 소식 | 원문제공 | |
30 | 삼천리 제6권 제5호 | 1934-05-01 | 熱情의 西班牙行(世界一周記 續) | 羅蕙錫 | 기행문 | 원문제공 |
31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人生揭示板 | 소식 | 원문제공 | |
32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내가 서울 女市長된다면? | 羅蕙錫 | 설문 | 원문제공 |
33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春園 出家放浪記, 朝鮮日報 副社長 辭任 內面과 山水放浪의 前後 事情記 | 소식 | 원문제공 | |
34 | 삼천리 제6권 제7호 | 1934-06-01 | 女人獨居記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5 | 삼천리 제6권 제8호 | 1934-08-01 | 離婚告白狀, 靑邱氏에게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6 | 삼천리 제7권 제1호 | 1935-01-01 | 女流名士의 男便調査狀 | 잡저 | 원문제공 | |
37 | 삼천리 제7권 제1호 | 1935-01-01 | 新生活에 들면서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8 | 삼천리 제7권 제2호 | 1935-02-01 | 新生活에 들면서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39 | 삼천리 제7권 제3호 | 1935-03-01 | 三千里機密室(The Korean Black Chamber) | 소식 | 원문제공 | |
40 | 삼천리 제7권 제3호 | 1935-03-01 | 靑春을 앗기는 佳人哀詞 |
41 | 삼천리 제7권 제5호 | 1935-06-01 | 異性間의 友情論 아름다운 男妹의 記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42 | 삼천리 제7권 제5호 | 1935-06-01 | 조선녀성의게, 歐米女性을 보고 半島女性에게 | 羅蕙錫 | 논설 | 원문제공 |
43 | 삼천리 제7권 제5호 | 1935-06-01 | 李光洙, 許英肅兩氏間 戀愛書翰集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
44 | 삼천리 제7권 제6호 | 1935-07-01 | 나의 女敎員時代 | 羅蕙錫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45 | 삼천리 제7권 제9호 | 1935-10-01 | 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 | 소식 | 원문제공 | |
46 | 삼천리 제7권 제9호 | 1935-10-01 | 獨身女性의 貞操論 | 羅蕙錫 | 문예기타 | 원문제공 |
47 | 삼천리 제7권 제10호 | 1935-11-01 | (戱曲) 巴里의 그 女子 | 羅蕙錫 | 희곡·시나리오 | 원문제공 |
48 | 삼천리 제8권 제1호 | 1936-01-01 | 英米婦人參政權運動者 會見記 | 羅蕙錫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49 | 삼천리 제8권 제1호 | 1936-01-01 | 十萬圓의 朝鮮舘經營하는 金珊瑚珠女士(女社長을 차저)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
50 | 삼천리 제8권 제4호 | 1936-04-01 | 倫敦救世軍托兒所를 尋訪하고 | 羅蕙錫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51 | 삼천리 제8권 제11호 | 1936-11-01 | 三千里 機密室 | 소식 | 원문제공 | |
52 | 삼천리 제8권 제12호 | 1936-12-01 | 玄淑 | 羅蕙錫 | 소설 | 원문제공 |
53 | 삼천리 제10권 제5호 | 1938-05-01 | 나의 東京女子美術學校 時代 | 羅蕙錫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54 | 삼천리 제10권 제5호 | 1938-05-01 | 戀愛觀 批判, 毛允淑·羅蕙錫씨의 | 安德根 | 논설 | 원문제공 |
55 | 삼천리 제10권 제5호 | 1938-05-01 | 女流 文士의 『戀愛 問題』會議 | 대담·좌담 | 원문제공 | |
56 | 만국부인 제1호 | 1932-10-01 | 萬國婦人싸론 | 회고·수기 | 원문제공 | |
57 | 동명 제18호 | 1923-01-01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58 | 동명 제19호 | 1923-01-07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59 | 동명 제20호 | 1923-01-14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
60 | 동명 제21호 | 1923-01-21 | 母된 感想記 | 羅蕙錫 | 목차제공 |
61 | 동명 제23호 | 1923-02-04 | 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보고- | 百結生 | 목차제공 | |
62 | 동명 제24호 | 1923-02-11 | 觀念의 襤褸를 벗은 悲哀-羅蕙錫女史의 ‘母된 感想記’를 읽고- | 百結生 | 목차제공 | |
63 | 동명 제29호 | 1923-03-18 | 百結生에게 答함 | 羅蕙錫 | 목차제공 | |
64 | 서광 제6호 | 1920-07-05 | 婦人問題의 一端 | 羅蕙錫女史 | 목차제공 | |
65 | 여자계 | 목차제공 | ||||
66 | 학지광 제3호 | 1914-12-03 | 理想的 婦人 | 羅蕙錫 孃 | 목차제공 |
第一篇 三·一運動 關係 新聞報道
2. 國外新聞 論說 記事
뉴욕 타임스
나혜석 (도덕수업용) (0) | 2016.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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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0) | 2016.01.10 |
한국독립운동사 (0) | 2015.07.09 |
나는 말한다 - 내게 금지된 것을 (0) | 2015.04.25 |
이혼 고백장 離婚 告白狀 중에서 (0) | 2015.04.11 |
임종국 평전/ 보림재 (0) | 2016.0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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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심는 사람 임종국! 큰아들 임지택 교수 인터뷰 (0) | 2016.01.04 |
임종국 과업 이어 11일 만에 5억원 모금 (0) | 2015.11.17 |
임종국평전 (0) | 2015.10.14 |
생시의 김삿갓 임종국 (0) | 2015.09.20 |
임종국(林鍾國, 1929 ~ 1989)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겸 역사학자이다
임종국의 생애
http://cafe.naver.com/sun1374/8854
http://www.minjok.or.kr/ minjok@minjok.or.kr
http://blog.ohmynews.com/jeongwh59/326275
http://blog.ohmynews.com/jeongwh59/search/임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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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평전/ 보림재 (0) | 2016.0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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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심는 사람 임종국! 큰아들 임지택 교수 인터뷰 (0) | 2016.01.04 |
임종국 과업 이어 11일 만에 5억원 모금 (0) | 2015.11.17 |
임종국평전 (0) | 2015.10.14 |
임종국 李箱이상 전집 발간 (0) | 2015.09.21 |
http://airzine.egloos.com/1033030
[스크랩] ③ 이상·김유정·박태원·김기림 /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0) | 2015.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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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는 일본제국침략자들
금붕어
김기림
금붕어는 어항 밖 대기(大氣)를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이라 생각한다.
금붕어는 어느새 금빛 비늘을 입었다 빨간 꽃이파리 같은
꼬랑지를 폈다. 눈이 가락지처럼 삐어져 나왔다.
인젠 금붕어의 엄마도 화장한 따님을 몰라 볼 게다.
금붕어는 아침마다 말숙한 찬물을 뒤집어쓴다 떡가루를
흰손을 천사의 날개라 생각한다. 금붕어의 행복은
어항 속에 있으리라는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도 있다.
금붕어는 유리벽에 부딪혀 머리를 부수는 일이 없다.
얌전한 수염은 어느새 국경(國境)임을 느끼고는 아담하게
꼬리를 젓고 돌아선다. 지느러미는 칼날의 흉내를 내서도
항아리를 끊는 일이 없다.
아침에 책상 위에 옮겨 놓으면 창문으로 비스듬히 햇볕을 녹이는
붉은 바다를 흘겨본다. 꿈이라 가르쳐진
그 바다는 넓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금붕어는 아롱진 거리를 지나 어항 밖 대기(大氣)를 건너서 지나해(支那海)의
한류(寒流)를 끊고 헤엄쳐 가고 싶다.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고 싶다. 옥도(沃度)빛 해초의 산림 속을 검푸른 비늘을 입고
상어에게 쫓겨다녀 보고도 싶다.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 배설물의 침전처럼 어항 밑에는
금붕어의 연령만 쌓여 간다.
금붕어는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보다도 더 먼 바다를
자꾸만 돌아가야만 할 고향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오늘부터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기 시작했다.
* 쓴 매개: 맛 없는 먹이, 거친 먹이*
구인회와 모더니즘의 등장 (0) | 2015.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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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패션은 대모테와 갑빠인데, 대모테는 거북의 일종인 대모()의 견고한 등판으로 가공한 안경테로 당시 일본에서는 이 재질로 가공한 공예품을 '별갑'이라 했습니다. 갑빠는 일본 민속에 나오는 삿갓처럼 생긴 요상스런 동물인데, 하동()들의 머리처럼 일자로 고른 헤어 스타일로 역시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습니다.
변동림은 구보의 계모 변동숙의 동생으로 나이차가 20여년이나 납니다. 구본웅의 조카 구광모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자매간의 사이가 나빠 변동림이 변씨 성을 버리고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이 운명한 후 김환기와의 재혼을 위해 과거를 정리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정인택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사망했으며 구보의 차남인 박재영 선생님의 종합적 고증에 의하면 구보에게 아내인 권영희와 두 딸(정태선, 정태은)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정인택의 미망인 권순옥(당시 권영희로 개명)과의 구보의 재혼은 1956년입니다.
구보의 사망년도는 1985년이 아니고 1986년 7월 10일입니다.
게재된 사진은 1936년 이상이 구본웅의 도움으로 맡은 인쇄 출판업 창문사이며 사진 뒤에 붙은 포스타는 당시 김소운이 관계했던 아동문학지의 작품모집 광고입니다. 그 속에 바래지 않은 소녀의 함박웃음이 하얗게 살아 숨 쉬는군요.
액자는 이상이 선전에서 입상했다는 '자화상'인데 제비를 폐업하고 떼온 것이 확실합니다.
이상은 맬빵에다 넥타이를 짧게 매었고, 김소운은 와이셔츠 위에 라운드 셔츠를 입은 스포티한 차림으로 구보는 역시 대모테 안경에 노타이 차림인데, 셋 다 70년 전의 패션치고 상당히 세련된 모던보이형 차림입니다.
어느날 '날개'를 적시는 지성의 각혈속으로 불나비가 된 모더니스트들, 때론 만보객의 노스탈지어와 고현학의 지성으로, 함부로 시험했던 운명의 덫에 인생의 반을 걸어버린 젊은 문학의 초상들이었지요.
건필을 기원하며, 강나루가 실례했습니다.
제 블로그는 http://kr.blog.yahoo.com/fish20017 이고, 저는 경북 경주에 살며,
제 이름은 이대일입니다.
박재영 선생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anielpak20 의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을 제 블로그에다 발췌 게재했었습니다.
아마 원용진 교수님께서 저를 박재영 선생님으로 알고 계신 듯하여, 알려 드립니다.
저는 오얏나무()이고, 박재영 선생님은 후박나무()입니다.
수원의 초원다방과는 전혀 이 없으니...
이것이 인연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에 계신 듯한데, 건투를 빕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에 대한 글이 <강나루> 이대일님을 통해 소개되고 또 이렇게
원선생님을 통해서 더 알차고 멋있게 많은 분에게 알려지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원선생님께서 아버님 구보에 대하여 사랑해 주셔서
고맙구요, 6월 2일에는 경희대학교에서 오후 1시에서 부터 네번째
<구보 학회>가 있어서 여러 교수님들이 논문 발표도 있고, 저도 그
사이 수집한 것도 그 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님께서도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
니다. 구보 박태원의 둘째자 박재영 다니엘 드림. 참고로 제 손전
화는 017-320-5486 입니다. 전화통화 한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울대 농대 63 학번 이지만, 서강대학 하면, 우선 현직에 계신 김영수
교수님(정치외교학과)과는 이멜도 교환하고 두번이나 학교를 방문하여 뵈
웠고, 또 현재 김형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는 서강대 출신 고성학이
하고는 20 여년전에 여의도 종합무역상사에서 함께 근무하였기 때문에 지
금도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고, 또 현재 박사 코스를 밟고 계시며 강의도
하시는 윤직홍님은 형님하고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동기 동창이시고 옛
무역회사 사장님이시기도 하죠. 아마 아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솔대
성당 맞은 편이면이시라면, <한일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것 같군요.
한일 아파트라면, 현재 한겨레신문의 문학전문기자 최재봉기자님이
계셔서 거의 매주 광교산 등산하시면서 제 커피샵에 들르시곤하죠.
네 가서 잘 보았습니다. 우선 만나기 전에 전화 통화 한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서울대 농대 63 학번 이지만, 서강대학 하면, 우선 현직에 계신 김영수
교수님(정치외교학과)과는 이멜도 교환하고 두번이나 학교를 방문하여 뵈
웠고, 또 현재 김형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는 서강대 출신 고성학이
하고는 20 여년전에 여의도 종합무역상사에서 함께 근무하였기 때문에 지
금도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고, 또 현재 박사 코스를 밟고 계시며 강의도
하시는 윤직홍님은 형님하고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동기 동창이시고 옛
무역회사 사장님이시기도 하죠. 아마 아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솔대
성당 맞은 편이면이시라면, <한일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것 같군요.
한일 아파트라면, 현재 한겨레신문의 문학전문기자 최재봉기자님이
계셔서 거의 매주 광교산 등산하시면서 제 커피샵에 들르시곤하죠.
비공개
박선생님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