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1. 4월 그믐날 밤
2. 귀먹은 집오리
3. 만년 셔츠
4. 까치의 옷
5. 막보의 큰 장사
6. 삼태성
7. 제일 짧은 동화
8. 양초 귀신
9. 어린이 찬미
10. 시골 쥐의 서울 구경
11. 노래주머니
12. 느티나무 신세 이야기
13. 미련이 나라
14. 꼬부랑 할머니
15. 겁쟁이 도둑
16. 삼 부자의 곰 잡기
17. 잘 먹은 값
18. 세숫물
19. 공중의 귀신 신호
20. 난파선
21. 하멜린의 주 난리
22. 두더지의 혼인
23. 이십 년 전 학교 이야기
24. 선물 아닌 선물
25. 방귀 출신 최 덜렁
26. 무서운 두꺼비
27. 과거 시험 문제
28. 셈치르기
29. 설떡, 술떡
30. 옹깃셈
31. 벚꽃 이야기
32. 나비의 꿈
33. 눈어둔 포수

34. 눈물의노래

 

소설[편집]

수필[편집]

희곡[편집]

소파 방정환 선생은 왜 33세에 요절했을까

 

색동회 www.saekdong.or.kr

 

 

 

 

방정환 [方定煥, 1899.11.9~1931.7.23]

  • 1899년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주동) 출생
  • 선린상업학교를 다니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둠
  • 잠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 베끼는 일을 함
  • 손병희의 딸과 결혼함
  • 총독부 일을 그만두고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남
  • 일본 아동문학가인 암곡소파를 만나 큰 영향을 받음
  •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 창간
  • 1924년 최초의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 조직
  •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
  • 1931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
  • 1978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 1980년 건국훈장 추서

 

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아버지

방정환 선생님은 동화작가로서뿐 아니라 어린이날을 만들어내고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인권향상을 위해 평생을 몸바친 어린이 문화운동가, 사회활동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지를 만들어 세계 어린이 문학을 번역·소개하고, 이원수, 윤석중 같은 소년작가를 길러 내기도 했으며, 이태준이라는 천재작가를 취직시켜 작품활동을 돕기도 했다. 투고된 원고가 없을 때는 스스로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여러 이야기를 직접 쓰기도 했다. 근대적 의미의 '어린이 문학'이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우리 어린이 문학의 씨앗을 뿌린 매우 귀한 분이라 할 수 있다.

방정환 선생님이 쓴 <만년샤쓰> <양초귀신> 등은 초등학교 읽기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만년샤쓰>는 제목이 참 특이하다. 내용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인 창남이와 창남이 어머니는 자신도 입을 옷이 없지만 불이 난 이웃을 위해 자기 옷을 벗어준다. 창남이는 그것도 모자라 추위에 떠는 어머니를 위해 자기 셔츠를 벗어드리고 학교에 온다. 추운 겨울에 저고리만 입고 학교에 온 창남이. 그런데 체육시간에 선생님은 체력을 키우자며 저고리를 모두 벗게 한다. 결국 창남이의 맨살이 드러났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뒤늦게 창남이의 사정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작품에서 '만년샤쓰'란 맨몸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살갗은 평생 동안 우리의 셔츠가 되지 않던가.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현대의 아이들은 창남이의 뜻깊은 행동을 보고 감동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문학작품을 읽고 감동하는 것은 어른들처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며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름다운 인물에 대해 감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정환 선생님의 동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어린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방정환 선생님의 작품집 중 <사랑의 선물 1>은 주로 선생님의 창작동화나 옛이야기가 실려있고, <사랑의 선물 2>는 창작동화보다는 외국동화를 번안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방정환 선생님은 뛰어난 동화구연가이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처럼 볼 것이 별로 없던 시절 방정환의 이야기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렇듯 재주 많고 할 일 많았던 방정환 선생님은 33살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방정환 선생님의 못다한 일들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어받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작품에 감동받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또다시 그 일을 이어받을 것이다.

소파 방정환은 3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어린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은 애국지사로, 위대한 교육자인 동시에 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를 떠나서 한국의 아동문화, 아동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어른의 소유뮬로만 취급받아온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 눈물, 용기, 기쁨을 키워주기 위한 동화, 소설, 시 등 아동문학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소파는 1899년 서울 야주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9세 때 종조부의 사업실패로 그의 집이 파산을 맞게 되어 견디기 힘든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 학생인 10세 때 소년 입지회라는 소년회를 조직하여 토론, 연설의 수련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1914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만에 그만두고 열여섯 나이에 벌써 '청춘' 지에 글을 투고했다.

19세에 천도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비로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도요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아동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한편 세계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내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어린이날 운동을 범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어린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는 분명치 않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방정환 번역시의 장르소개 명칭으로 처음 소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각종 대회, 강연회, 강습회를 주관하면서도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글을 발표하였다.

소년운동이 좌익세력에 의해 자기의 참뜻과 차츰 달라진 192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오로지 잡지와 동화순례 강연으로 자기 길을 걸었다. 그의 동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있는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눈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서른세살의 나이로 그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초지일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방정환의 활동

♧ 아동잡지 <어린이>
-- 1923년 창간되어 1934년 7월에 통권 122호로 일단 중지된 아동잡지였다.
-- 옛날이야기식 동화나 창가조의 동요에서 탈피하여 창작동화와 동요를 적극 보급하였다.
-- 방정환은 <어린이>를 통해 짓눌리고 가난하고 웃음을 잃은 어린이에게 슬픔을 달래주고 슬픔을 함께하며, 역경을 극복하는 슬기를 가르쳤다.
-- 이원수, 마해송 같은 아동문학가들을 배출하였다.

♧ 외국동화의 소개

-- 1922년 <안데르센 동화>, <그림 동화>, <아라비안나이트> 중에서 선정한 몇몇 작품들을 초역하여 세계명작 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 출간하였다. 이 동화집이 우리말로 씌어진 첫 동화집이며 창작동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방정환의 작품세계

-- 그의 유명한 수필 <어린이 찬미>(1924)에서는 어린이를 "죄많은 세상에서 죄를 모르고 더러운 세상에 나서 더러움을 모르고 부처보다도 예수보다도 하늘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소위 '동심천사주의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하의 냉혹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 <형제별>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비운을 별 삼형제로 의인화하여 비극성을 더한 작품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동요이다. 이는 어린이에게 감성해방의 길을 열어 주려한 소파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 대표동요 <귀뚜라미>, <가을밤>, <늙은 잠자리> 등에서는 뛰어난 시세계를 보여주는데, 특히 〈가을밤〉은 현대동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소설 <만년셔츠>는 가난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준 작품이다.

방정환 문학에 대해 영웅주의와 눈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비판하였지만 그는 우리 아동문학의 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아동문학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많은 작가를 길러냈다. 비록 33세의 짧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방정환과 깊은 인연을 맺고 방정환의 뒤를 이어 방정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해낸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출처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243388976&qb=7J207YOc7KSA67Cp7KCV7ZmY&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xCYMdoRR0ossvsgjICssssssuK-054356&sid=t1I7xjI3GfQvUUoVDlqT/A%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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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왜정인물 1권
 
方定煥  민족구분    한국인
           이명          牧星, 小波
          생년월일     1899-10-99
          출신지       京城府 堅志洞 118(원적)
          현주소       京城府 敦義洞 83
          학력          渼洞公立普通學校 졸업
                          1921년 東京硏修英語學校에 들어감
                          후에 東洋大學 졸업                  
         경력및활동
                          故 孫秉熙 손녀 濬嬅의 남편으로서 항상 천도교의 중요 임무를 전담함
                          1920년 동경에서 천도교 지부를 설립하여 孫秉熙 사후 이례적으로 그 상속인이 된 자임
         계통 소속단체 : 천도교계
         재산자산     약 3천엔 정도를 가지고 있음
 
        인물평외모    키 5척 2촌
                           둥근 얼굴형에 까만 피부. 비만임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
참고문헌       왜정시대인물사료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한국방정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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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술의 오솔길
글쓴이 : 오솔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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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  박인환 詩   낭송 :박인희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뭘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턴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단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출처 : 예술의 오솔길
글쓴이 : 목련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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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로문예운동의 선구자, 榮光의 朝鮮先驅者들

삼천리 제2호  
발행일 1929년 09월01일  
기사제목 문예(2) 조선프로문예운동의 선구자, 榮光의 朝鮮先驅者들!!  
필자 金基鎭  
기사형태 논설  

문예
金基鎭
「三千里」에서 「朝鮮先驅者號」를 낸다 한다. 그리고 나더러 朝鮮 프로레타리아문예의 선구자 중의 3,4인에 대한 논평을 하야달라 한다. 나는 重任을 감당할 준비가 업슴으로 처음부터 사퇴하얏다. 그러나 巴人兄은 긔어코 나로 하야금 이 붓을 잡게 하얏다.
朝鮮프로레타리아 문예의 선구자는 朝鮮프로레타리아 藝術同盟 외에 또 업다. 즉 선구자는 우리들 중에 잇다. 우리는 藝術同盟 中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프로문예운동의 확립을 위하야 문장으로 또는 실천으로 노력하야 오고 항상 그 운동의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안는 朴英熙君과 역량잇는 작가로서 崔鶴松李箕永 兩君과 시인으로 林和 辛夕汀 등 諸君을 발견한다.

 

이 사람들의 존재는 藝術同盟體 중에서 光輝잇는―적어도 光輝잇게 하여가는―존재임에 틀림업다.
朴英熙군의 사상적 전환은 1923년부터 시작되엇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그전부터 親友로 또는 현재의 동지로서의 내가 그와가티 보앗다하는 것일 뿐이니 혹은 그전부터 스스로 전환하고 잇섯든 것을 내가 늣기지 못하얏는지 그것은 알 수 업다. 하여간 1923년이라 하면 朝鮮의 문학사회에 잇서서 전혀 프로문예의 존재가 업섯든 때이다. 사회운동에 잇서서 뿌르조아적 民族主義運動으로부터 分裂對立하야 무산계급의 운동이 수립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직전부터이엇슴으로 문예에 잇서서도 1923년은 그 孕胎期이엇다고 보는 것이 可하다. 그럼으로 朴군의 사상적 전환은 朝鮮프로文藝의 역사에서도 중요시되지 안흘 수 업다.
君은 본래는 시인이다. 셀리!와 빠이론의 詩를 조화하고 볘르레ㄴ, 믓세, 랑보-등의 詩를 愛誦하고 그 중에서도 샬르, 뽀-드려-詩를 또는 에드가, 알란, 포-의 詩를 가장 사랑하얏다. 그는 象徵派로부터 들어가지고 가장 極端을 대표하는 떼가당으로부터 달음질하엿든 것이다. 그의 취미, 감정, 사상의 경향은 1923년까지 이와 갓햇다. 그러나 無價値의 철학 허무적 사상(당시까지의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사상은 이것을 토대로 하고 잇섯다고 본다) 퇴폐적 감정은 한번 그가 맑스적 唯物史觀에 의한 현사회의 비판의 눈을 엇게 되자 전환되지 아니할 수 업섯다. 유물사관에 의한 비판의 방법은 그로 하야금 자기자신의 사상 감정의 動機 그 물질적 원인까지 究明하게 하얏든 것이다. 그는 당시 예술지상주의자들의 同人雜誌(白潮)에서 탈퇴하야가지고 새로운 생활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얏다. 1925년 「開闢」 新年號에서 발표된 「상양개」는 그가 최초로 세상에 내노흔 프로레타리아문예적 소설이엇다. 그리고 2월(?)에 그는 曙海, 箕永, 宋影, 星海, 抱石, 承一, 永八, 筆者 등의 작품의 경향을 분석하고 종합하야 이것을 新傾向派하고 명명하얏섯다. 오늘날 문단에서 新傾向派라고 쓰는 용어는 실로 君이 비로소 쓰기 시작한 말이다. 1925년 7월에 프로레타리아 藝術同盟이<18> 처음으로 성립되엇슬 때도 君의 힘이 적지 아니 하얏섯다. 그러나 동맹은 7월에 성립되엇섯슬 뿐이오 26년 겨울까지 그 존재를 들어내지 못하얏섯스니 대개 그때의 盟員諸君들에게는 맑스주의적 의식이 缺如하얏섯다고 말하야도 과언이 아니라 할만 하엿든 까닭이다. 그러고 이 말온 필자 자신에게도 부합되는 것임에 틀림업다. 그러나 1926년에 이르러서는 일반 정세의 변화 와 또는 맑스주의적 사상의 심화에 인하야 藝術同盟은 再發起되어가지고 실로 「일하는 단체」가 되엇다. 君은 그 이래로 지금까지 同盟의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직접 지도에 종사하며 잇다.
그의 성격은 침울한 편이오 강직하다기 보다는 굴절이 만코 정열보다는 이성의 冷氣가 더 강한 터이다. 그럼으로 그는 容易히저 사람을 사랑하지도 안흘 뿐더러 저사람의 사랑도 밧지 못한다. 그의 의심하고 따지는 성질은 간혹 그로 하야금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하고 는 일을 그르치게 하는 수도 잇다. 이 점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朴君은 넘우 偏狹하다」는 비난을 밧는 점이라. 그러나 모난 곳이 업시 사람이 넘우 원만하야도 결국은 「好人」박게는 되지 안흘 것이니 올케나 글흐거나 한번 자기의 主見을 세웟거든 끗까지 그 의견을 고집하야 가다가 정말로 뉘우치는 때에는 처음서부터 거러온 길을 다시 밟어나가게 되는 한이 잇슬지라도 일관하야 動치 안는 성격이 든든하기는 든든하다 할 것이다. 영리하지 못하니까 그와 가티 多大한 손실을 하얏다고 말할 수 잇겟지만은 넘우 민첩하야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적지 안흔 것을 생각할 때에 「固執不通」의 인물도 필요를 크게 늣긴다. 그런데 朴君은 다른 사람이 보는 바와 가티 그다지 심한 「固執不通」도 아니다.
朴君은 소설도 쓰고 평론도 쓴다. 어느 편이 朴君의 장기이냐고 한다면 아무리해도 평론이 그의 「得意의 것」이라 할 것 갓다. 그의 소설은 「산양개」 이후로 「徹夜」 「地獄巡體」 「出家者의 편지」기타 4,5편의 단편작이 잇지만 나의 기억에 의하면 프로 작품으로서 호평을 바든 것이라고는 「出家者의 편지」박게는 업는 듯 십다. 「산양개」도 그의 최초의 작품이오 또는 新傾向派 최초의 産物이엇든 까닭으로 주목의 초점이 되어서 깍고, 치키는 두 가지의 비평을 바든 일이 잇스나 사실을 말하자면 잘된 작품은 아니엇다.
그가 평론을 힘써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이삼년간이라 「鬪爭期에 처한 비평가의 태도」 「新傾向派文學과 無産派文學」(?) 文藝運動의 방향전환」 「無産文藝의 意識過程」(?)등 1927년 「朝鮮之光」 新年號 紙上부터 연속하야 발표한 이상의 諸論文과 諸評論은 당시에 우리들의 藝術運動에 잇서서 적지 아니한 임무를 다한 文字이엇다. 지금와서 우리들의 藝術運動 過去過程을 알러고 하는 사람은 이때의 君의 諸論文을 보지 안코서는 이해할 수 업게 되엇고 지금으로부터의 우리의 운동을 어떠케 인도하얏스면 조켓다는 이론을 끄집어 내려고 할지라도 역시 君의 前記 諸論文의 비판이 압스지 안코는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런 까닭으로 君은 작가이라(35頁에)기보다는<19>(제19頁에서) 理論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러케 말하는 이유는 비단 이 사실뿐만이 아니다. 그의 小說은 「描寫」가 아니고 「論文」이 되어 버리는 것도 큰 이유이라 할 것이라. 그런데 과거에 잇서서 그의 小說도 그러하엿거니와 현재에 잇서서 그의 論文도 뒤에서 쪼처오는 사람이나 잇는 것처름 밧브게 쓰는 탓으로 동이 안닷는 대문이 적지 안타는 말을 나는 항상 듯는다. 들을 뿐만 아니라 내 自身도 「센렌스」의 構成이 非文法的으로 된 것을 君의 論文 가운대서 屢屢히 발견한다. 이런 것은 조금 주의하야 주면 조흘 것이라고 밋는다.
하여간 君은 藝術同盟의 組織者요, 현재 指導分子요, 朝鮮프로文藝運動의 先驅者의 一人이다. 지금 녯날의 雜誌가 手中에 업서서 君의 論文이나 作品을 참고하야 구체적으로 소개할수 업는 우에 또는 시간의 餘裕가 업서서 이러케나마 충실히 그를 紹介, 批評하지 못하고 마럿다. 作家로서의 曙海, 箕永, 林和, 夕汀 등 諸君을 또한 소개하지 못한 것도 유감이다. (京元車中에서- 끗)<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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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유영(金幽影)[1908. 9. 22 ~ 1940. 1. 4] 구인회

2012.11.0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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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9. 22 경북 선산~1940. 1. 4서울.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영화이론가.

 

 

 

    [김유영]

 

본명은 영득으로 김철이라고도 한다.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보성중학을 졸업한 후 1927년에 세워진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연구부에서 영화수업을 받았다. 조선 프로 예술가 동맹(KAPF) 영화인들이 장악한 이 협회의 첫 작품인 〈유랑〉(1928)과 〈혼가 昏街〉(1928) 그리고 분열된 카프 영화진영의 서울 키노에서 〈화륜 火輪〉(1931)의 감독을 맡았다. 이무렵 〈영화가에 입하야〉(1929)·〈세계프로영화발달사〉(1930)·〈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1932) 등의 영화운동론·영화평론을 발표했다.

 

 

그가 연출한 작품으로 일제의 식민지정책 때문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상황을 그린 〈유랑〉, 고향을 떠나온 고학생·노동자·화부 등 세 청년이 미국에서 겪는 생활을 묘사한 〈혼가〉, 출옥한 지사의 공장투쟁을 그린 〈화륜〉 등이 있다. 그밖에 영화평론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주의의 투쟁노선을 견지한 내용을 주로 썼다. 그러나 카프 영화부의 임화·윤기정 등의 치열한 비판과 흥행의 실패 등으로, 1932년 서광제와 더불어 일본에 영화연수를 다녀온 후 1933년에는 카프에 맞섰던 순수지향의 구인회에 참가해 방향전환을 했다. 1934년에는 카프 영화부에 합류했으나 같은 해 카프 2차 검거로 피검되었다. 카프 문예운동이 막을 내린 1935년 이후에는 도쿄유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 영화부에서 활동했다. 문 닫을 지경에 놓인 아버지의 학교를 구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신식여성을 그린 〈애련송 愛戀頌〉(1939)과 젊은 과부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그린 〈수선화〉(1940)를 유작으로 남겼다.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의 선구자로서 나운규 이후 이규환과 쌍벽을 이루는 영화작가로 평가받았다.

 

[김유영 대략 연보]

1908년 9월 22일, 경북 선산 출생. 본명 김영득. 김철로도 불림.
1916년 구미 보통학교 입학.
1920년 동 졸업.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입학.
1921년 경성보성고보로 전학.
1925년 보성고보 졸업. '여명'지(숙부 김승묵 발행)에 소설 <꽃다운 청춘>발표.
1926년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안종화, 이유, 이경손, 김을한 창립)의 연구부에서 영화 수업받음.
            8월,KAPF 영화부 가입.
1928년 1월, 최초의 카프 영화 '유랑(流浪)'을촬영.
           원작:이종명/각색:김영팔/감독:김유영/촬영:한창섭
           출연:이영진 역:임화/김순이 역:조경희/순이의 父:차남곤/강병조 역:강경희
           계급투쟁적영화라서 흥행 실패.
           4월 1일, 유랑 단성사에서 개봉.
           [상층:대인 50전, 학생 30전/하층:대인 30전, 학생 20전]
           10월,영화 '혼가(昏街)' 촬영
1929년 2월 10일, '혼가' 개봉. '서울키노'의 제1회작. 카프 영화. 임화 주연.
           검열로 일부 삭제됨. 유랑보다는 나으나 역시 흥행 실패.
           동경과 교토 영화촬영소 견학.
           영화운동론 <영화가에 입하야> 발표.
           신흥영화예술가동맹 결성(윤기정 등)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카프 영화부로 흡수할 것이냐의 문제에대한 이견.
1930년 <세계프로영화발달사> 발표.
           중외일보(7월 5일~9. 2)에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 김유영 4인이 연작으로 시나리오 <화륜> 연재.
           최정희와 동거
           10월 10일, 화륜 촬영 개시
1931년 영화 '화륜(火輪)' 촬영 계속. 서광제 각색,이효석 각색 및 편집. 김유영 감독,민우양 촬영, 백하로 김정숙 김연실 출

           연, 제작사 서울키노.
           2월 29일~4월 1일, 이효석 원작, 김유영 스틸의 씨나리오 <출범시대>연재
           3월 11일,조선극장에서 '화륜' 개봉.
           '서울키노' 제2회작. 역시 카프영화로 일제에의해검열로 일부 삭제되고 흥행 실패함.
           9월,무산대중잡지 '시대공론' 발행을 주도. 발행인 숙부인 김현묵
           11월,가을에 조직한 '移動式小型劇場' 단체 제1회 공연
           (프롤레타리아의 참된 연극을 일반 대중에게 알림.)
           (1932년 5월까지 원산, 함흥, 洪原, 京城 등공연.)
           1932년 1월, <이동식소형극장 공연을 앞두고><시대공론, 1932. 1)
           '화륜' 실패 후 서광제(徐光제)와 함께일본으로 영화 연수 떠남. 이 영화 '화륜'을 끝으로 일제 강점기 하의 카프의 영

           화시대는 막을 내린다.

           교토의 '日活촬영소'에서 연수.
           평론 <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 발표
1933년 귀국 후 장사동 193번지에 기거함.
           (함북 경성의 이효석이 하휴로 서울 오거나 구인회 발회 전과 발회일에 김유영의 집에서 묵음.)
           이종명, 이태준, 정지용 등과 구인회 발기 회원으로 참여했으나 곧 탈퇴.
           10월, 부인 최정희와 서린동 324번지로 이사.
1934년 카프에 복귀했으나 전주사건으로 곧 '카프 2차 검거' 때에 피검.
1935년 동경유학파 주축 '극예술연구회' 영화부에 가입.
1936년
1937년

1938년 조선 최초의 '조선일보영화제' 발의 개최.
           '화륜' 이후 7년 만에 '애련송'으로 매가폰 잡음.
           1939년 카프의 계급투쟁을 지양하고 탐미적 영화 <애련송(愛戀頌)> 촬영. 崔琴桐 원작의동아일보 신춘문예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 당선작인 <환무곡>을 이효석이 각색. 감독:김유영/제작:서항석/각본:최금동/출연:김신재, 이백영

           주연, 제작사:극연회 영화부
           신극운동 단체 '극예술연구회' 핵심회원인 서항석, 유치진, 이해랑 등 출연. 9월,개봉관 '명치좌'

[한 여인이 같은 마을에 사는 잘생긴 음악학도를 사랑한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음악학도는 음악을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가난한 그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기 위해 부모에게 순종하며 부모가 권하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음악학도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은 마침 그녀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예식장으로 정신없이 달려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남자는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방황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애정 어린 설득에 남자는 마음을 잡고 귀국 음악발표회를 연다. 음악발표회장 객석에 앉아 슬프게 우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가 사랑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1939년
          10월,영화 <수선화(水仙花)> 촬영. 의정부 부근에서 로케.
          10월 24일, 조선영화회사의 '수선화' 세트 촬영 들어감. 신년 설날에 개봉예정.
                          감독:김유영/제작:최남주/각본:이익/주연:남승민, 문예봉/촬영, 편집:황운조/제작사:조선영화사


[혼기가 지난 유씨는 나이가 열세 살인 어린 소년에게 시집을 간다. 그런데 혼인을 한 지 채 3년이 못 되어 신랑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20년이 지난 후 유씨는 친척집에서 동길이를 입양하여 아들로 삼는다. 유씨가 가진 재산이 탐난 동길이의 형제들은 온 동네에 유씨가 같은 마을에 사는 글방 선생과 불륜의 관계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이에 유씨는 마을 호수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인다. 유씨가 남긴 유서는 마을 글방 선생에게 전해지고 글방 선생은 억울하게 죽은 유씨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영원한 처녀의 순정을 기리는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워준다.]

1940년 1월 4일, 지병인 신장염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타계.

            수선화 유작이됨. 제작사 조감독 민정식에 의해 수선화 완성.

[주]김유영은 카프 영화인들에 제작된 6편의 영화 '유랑(1928, 김유영)', '혼가(1929, 김유영)', '암로(1929, 강호), '약혼(1929, 김영환), '화륜(1931, 김유영)', '지하촌(1931, 강호) 중 3편에 감독으로 참여했음. <애련송>, <수선화>는 카프 해산 이후의 작품임.
(유현목, <카프계열 작품 대두>, '한국영화발달사', 한진출판사, 1980, 102~106쪽) 


***

경상북도 구미 출생. 보성()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영화계에 투신하여 나운규(윤백남(안종화(김상진(이규환() 등과 같이 무성영화시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한국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영화 《유랑()》을 처음으로 감독하였고, 1929년 《혼가()》, 1931년 《화륜()》을 연출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그의 예술영화 지향과 대중의 호흡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조선일보영화제’를 개최하고, 1939년에는 최금동()의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 《애련송()》을 감독하여 재기하였다. 무성영화 《아리랑》《임자 없는 나룻배》, 발성영화심청전》《오몽녀》 등이 입상하였다. 1940년 자신이 감독한 《수선화》의 개봉을 앞두고 죽었다.


한국 영화의 기초를 닦은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한국 최초의 ‘조선일보영화제'를개최하고 무성영화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 발성영화 《심청전》, 《오몽녀》 등이 입상하였다.
주요작품 《애련송()》《아리랑》《오몽녀》

[도움글]

초기 조선 영화의 대략

   한국에서는 1903년경부터 외국영화가 공개되었으나 필름이 사용된 첫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년 신극좌(新劇座) 김도산(金陶山) 일행의 연쇄극(連鎖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와 그 때 함께 공개된 실사영화(實寫映畵) 《경성(京城) 전시(全市)의 경(景)》이었다. 이것은 모두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2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영화인 윤백남(尹白南)의 《월하(月下)의 맹세》가 발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계몽영화였으나 한국인 감독과 배역에 의한 최초의 극영화라는 점에서 한국영화는 이로부터 무성영화시대의 막이 오른 것으로 본다. 초기에는 일본 제작자와 기술진에 의한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이에 자극받아 민족자본에 의한 《장화홍련전》(24)이 박승필(朴承弼)에 의해 제작되었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영화사 윤백남 프로덕션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사들이 출현했으나 단명(短命)했고, 기업적으로 토대를 굳히지 못한 채 한국영화의 무성영화시대는 나운규(羅雲奎)의 등장으로 예술적인 개화(開花)를 보게 된다. 배우로 데뷔한 나운규는 《아리랑》(26)에서 민족적인 저항의식을 통해 한국영화예술의 새경지를 이룩하였다. 이어 《풍운아(風雲兒)》(26) 등의 문제작과 여러 편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각본을 쓰고 출연하는 등 영화작가(映畵作家)다운 의지로 전력투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기의 작품들은 《아리랑》과 같은 힘을 잃고 있었고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五夢女)》(37)에서는 인간의 원색적인 본능을 추구하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 했으나 35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37). 나운규의 영화정신은 이규환(李圭煥)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임자없는 나룻배》(32) 《나그네》(37) 등에서 서정적이며 향토색 짙은 사실주의를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 말에는 좌익사상의 경향파(傾向派) 영화들이 등장했으나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935년 이필우(李弼雨)의 기술에 의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영화는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경손(李慶孫) 안종화(安鍾和) 윤봉춘(尹逢春) 김유영(金幽影) 방한준(方漢駿) 등이 활약했고 이월화(李月華)를 비롯하여 이금룡(李錦龍)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우들이 한국영화를 수놓았다. 그러나 영화사는 여전히 영세자본과 협소한 시장으로 인해 기업적인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의 심한 탄압, 즉 영화사의 강제 통합 및 영화인의 등록강요 등으로 통제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설치, 영화제작자를 묶어놓고 영화인들로 하여금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전의(戰意)를 고취하는 어용영화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는 친일영화를 제작케 하여 한국영화는 질식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인규(崔寅奎)의 《수업료》(40), 이병일(李炳逸)의 《반도(半島)의 봄》(41)이 마지막으로 주목을 끌었다. 뜻있는 영화인들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암흑기를 보내야만 되었다.
(
http://kr.blog.yahoo.com/dw2613/24
*
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33]( 1990.7.20. 한겨레신문 연재, 안정숙 글)

 

영화인 김유영(1908~1940)

 

“거리는 아직도 어둠에 잠겨있어 / 산 해골의 그림자가 오며 가며 춤춘다. / 거리는 언제나 밝아지려 하느냐. / 울고만 지낼 수 없는 무리도 있다니...”(영화 <혼가> 주제곡, 김유영 감독, 1928년 작)

“거리는 언제 밝아오려나...”

 

   영화 <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난 세 사람의 청년, 부상당해 해고당한 노동자와 퇴학당한 고학생, 역마차의 화부를 통해 “일제치하 조선 노동자계급의 비극적 운명과 해방을 위한 투쟁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전의 영화들이 단 한편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혼가>도 예외는 아니다. 시나리오조차 전해지지 않는 이 영화를 당시 언론의 눈으로 어림해본다면 “신감각적”영상이 형식적 특징을 이루고 있고,“세 젊은 삶(주인공)이 걸어온 발자취는 조선의 한 귀퉁이를 넉넉히 엿볼 수 있게 한다.”

   감독 김유영은 이 영화에 출연한 임화, 추용호 등과 함께 27년 창립된 朝鮮映畵藝術協會(影藝) 연구부에서 영화를 익힌 이였다. 당시 영화계의 중진인 이경로, 안종화, 이우, 조선일보 기자이던 김을한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영예에는 영화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KAPF)의 성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김유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영예는...유능한 신인을 양성해보자는 뜻에서 연구부를 신설하고 신인을 모집했는 바, 1백여명의 지원자가 쇄도함에 그 중 20명을 선발해서 연구생(1년과정)으로 삼았다. ...이때 영화계에 나온 사람이 김유영, 임화, 추영호, 서광제, 조경희 등 20여명이었다”고 안종화는 <한국영화측면비사>(1962·춘추각 펴냄)에서 돌아보았다. 그는 또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으나 연구생의 대부분이 카프에 가입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뒷날 카프 영화부장으로 활약한 윤기정이 영예에 창립 때부터 참여하고 있었고, 역시 카프 영화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강호가 영예 연구생으로 영화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므로 이곳은 프롤레타리아 영화활동의 묘판이었던 셈이다.

   연구부에서도 남다른 영화적 재능을 인정받은 이는 김유영이었다. 안종화가 연구생들을 총출연시켜 제작하려던 영화 <이리떼>의 연출보로 김유영을 지목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기성영화인인 안종화를 축출한 젊은 영화인들이 조선영화예술협회 첫 작품으로 내놓은 영화 <유랑>에서 김유영은 감독을 맡게 된다.

 

‘유랑’으로 첫 메가폰

 

   첫 작품 <유랑>은 일제 식민정책의 결과,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되는 당시의 상황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연구가 변재란씨는 “<아리랑>에서 다소 소박하던 조선 농촌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더욱 예리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층 진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영화자료 분석결과를 밝히고 있다. 영예는 이 영화 한편을 내놓고 나서 제작비의 곤란 등으로 해산된다.

   김유영은 29년 말 “현단계에 있어서 계급의식을 파악한 예술운동의 일부문인 영화운동”을 표방하며 창립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나타난다.△신흥영화이론의 확립 △엄정한 입장에서 모든 영화의 비평 △영화기술의 연마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영화인의 결집 △계급적 이해를 대표한 영화제작을 강령으로 내건 신흥영화동맹은“대중의 생활에 부합되는 예술관에 입각한 영화인의 집단”의 최초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 제작을 위해 만든 영화사 서울 키노에서 김유영은 두 번째 영화 <혼가>의 메가폰을 든다.

   한편으로 그는 신파와 통속영화로 민족의식의 분출을 무마하는 영화계를 향하여 일갈하는 글들을 왕성하게 쏟아냈다. “과연 우리에게 영화계라고 지목할만한 무엇이 있는가? 그럿타! 우리에게는 영화계가 업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 씨네아스트(영화인)의 임무는 위선 우리의 이론을 확립하야....눈물 폭풍우의 그 가운데서 돗아난 새싹을 위하야 간단업는 활동을 하여야 할 것이다..”(<조선지광> 1929년 제10권 11호) 그는 영화가 타예술에 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특수성을 지닌 예술인 이상 영화제작은 대중을 지도교화하는 내용의 영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신작품”을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프로영화 ‘화륜’감독

 

   김유영의 세 번째 영화 <화륜>은 도시노동자의 생활과 노동쟁의를 소재로 하고 있다.

<화륜>은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 김유영이 모인 조선씨나리오작가협회가 중외일보 지상에 발표한 연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영화로서 통영의 삼광영화사 제작, 김유영 감독, 이효석·서광제의 편집으로 만들었다. 월북예술인 안막이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운동 약사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영화”로 지칭한 이 영화는 관객동원의 부진과 카프쪽의 혹평이라는 이중의 실패를 겪었다.

   카프와 김유영의 불편한 관계는 30년 4월 카프의 조직개편으로 기술부 안에 문학부 외에 영화, 연극, 음악부가 신설되면서 시작됐다. 대표 윤기정, 부원 김남천, 임화, 강호로 구성된 카프 영화부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金幽影, 서광제, 羅雄, 尹기정, 林和, 白河路, 朴完植등이 결성)의 해산을 종용하고, 카프 영화부로의 가입을 권고했으나 신흥영화동맹은 영화인 전문 집단으로서의 위치를 고수할 셈이었다.
   서광제는 “조선의 현정세에 있어서 매개단체로서 신흥영화동맹을 생존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광제와 함께 김유영은 영화운동의 당면 임무를 “당의 사상적 정치적 영향을 확보·확대하여 당의 슬로건을 대중화시키기 위한 광범한 선전선동 사업”으로 보고, 이를 위해 프로영화인들이 카프 영화부에 결집해야 한다는 카프 안의 요구와 비판에 부닥쳐야 했다.
   김유영과 서광제는 신흥영화동맹을 보전하는 방안을 택하기로 하고 카프를 탈퇴했다.그러나 곧 카프 안의 비판여론에 밀려 신흥을 해체하게 된다. 대립하였던 찬영회에게 대하여 解體를 勸誘하고 마지막에는 테러 행동까지 일어나게 된 것은 조선영화계의 初有한 事變이었다.
   <화륜>은 신흥해체 직후 부활시킨 서울키노를 통해 만든 영화였다.

   <화륜>역시 영화예술의 볼세비키화 임무에 충실치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김유영은 “그러한 내용과 영화적 전개의 필요성은 인정한다”는 전제를 깔고 “그것이 과연 조선 내에서 검열을 거쳐 상영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반론을 폈다. 조선총독부의 강화되어 가는 검열, 제작비 조달이라는 경제적 부담을 등에 진 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나기 위하여 어떠한 현실적인 통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화륜>과 같은 시기에 카프 영화부에서 만든 영화 <지하촌>(강호 감독)이 필름압수, 제작자금 지원자의 이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상영공간을 얻지 못했던 데 비해 <화륜>은 상영의 관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몇 겹의 자기검열과 총독부의 가위질로 필름은 원작의 본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화륜>이 관객동원에 실패한 까닭으로 김유영은 첫째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꼽고 있었다.

 

카프와 불화...34년 복귀

 

   그가 제작비를 기금모집으로 충당하고, 소형영화를 제작하여 경비를 절감하며, 기존 영화관 밖에서 독자적인 상영공간을 확보하자는 방안을 제시하고 나온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강화되는 일제의 식민통치는 새로운 실천방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봉쇄해가고 있었다.
   1932년 서광제와 함께 일본 경도의 일활키네마에 영화연수를 다녀온김융영은 1934년 2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카프 제2차 검거 때 80여명의 피검거인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유랑>에서 시작된 김유영의 영화 제1기는 그렇게 끝난다.

   1939년 서항석 등 동경유학파를 주축으로 한 신극운동단체 극예술연구회가 영화부를 두고 영화제작에 나섰다. 감독은 오랜만에 영화현장에 다시 나타난 김유영. 폐쇄직전인 아버지의 학교를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돈많은 사람과 결혼하는‘신식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애련송>에는 서항석, 유치진, 이해랑, 이진순 등 극연회의 회원들이 대거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37년 동아일보사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 당선작 최금동의 <환무곡>을 이효석이 촬영용 대본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였다.

   ‘조선영화의 실제 제작태도에 있어서 가장 사회의식적 관심을 가진 젊은 영화인“(박완식·중외일보 30. 3. 12) 김유영이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젊은 음악도와 나른한 카페 그리고 <유랑>의 순이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없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멜러영화의 감독으로 변모하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37년 8월, 한국청년의 강제집집을 위한 지원병 제도가 선포되는 등 일제의 군국주의 탄압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영화에 대한 탄압 역시 급격하게 강화됐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다.

 

이규환과 당대 쌍벽 이뤄

 

   김유영의 영화계 복귀는 자못 화려한 것이었다. “그는 영화에는 천재적인 소질이 다분히 엿보이는 사람이었다”던 안종화는 “처녀작 <유랑> 이후로 비록 두드러진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다”며 프로영화경력을 폄하하면서도 “임종 직전에 만든 <애련송>과 <수선화>는 확실히 가작으로 손꼽을만 했다”고 술회했었다.

   이따금 서울 청진동 하숙으로 김유영을 찾아가 영화 콘티를 짜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는 <애련송>의 원작자 최금동씨는 “나운규씨가 세상을 뜬 뒤 김유영 선생은 이규환 감독과 함께 당대 영화계의 1인자로 불렸다”고 말했다. ‘김유영’이라는 이름이 이미 선전효과를 지니고 있어서 제작팀은 촬영용 차에 그의 이름을 유독 크게 써 붙이고 종로와 충무로를 누비고 다녔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이 안락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극도의 가난과 폭음으로 이어진 정신적 방황은 그의 육체적 건강을 허물어놓고 있었고, 마지막 영화 <수선화>의 촬영 현장에서는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되어 수레에 실려나와 “레디 고”를 외치기도 했다, 기동이 불가능해지고 나서야 입원한 세브란스의전 병원에서 그가 숨을 거두었을 때, <수선화>는 몇 장면의 촬영을 남겨놓고 있었다. 40년 8월 13일, 서울 성보극장에서는 그의 유작 <수선화>의 시사회가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수선화’ 촬영중 33살 요절

 

   김유영에 대한 애도는 곧 한국영화 자체에 대한 만가로 이어질 참이었다. 40년 10월, 총독부가 급조한 관제단체 조선영화인협회(회장 안종화)는 기능증명서 없이는 영화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영화인등록제를 시작했다. 그것은 일제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를 외치는 영화전선에 영화인들을 직접 동원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분단 이후, 김유영의 초기작업은 20·30년대 프로영화인들의 성과와 함께 남한의 영화사에서 지워지거나 축소되어 왔다. 반면, 후기 영화의 성과들은 여기에 수습되어 남아 있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새로운 한국영화사 서술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김유영의 발굴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도 “김유영은 통일된 민족영화사를 위한 남북영화의 의미있는 접점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유영의 개인사는 선산 소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보성고보를 졸업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지고 있다. 그는 또 33년 카프에 대항하던 순수·모더니즘 문학모임 구인회의 발기인이라고 문학사에 기록돼 있으나, 그가 얼마 안돼 탈퇴한 그 모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20·30년대를 통틀어 각종 활자매체에서 그의 문학작품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http://blog.naver.com/ltk20/130016679107

***

최정희(崔貞熙.1906∼1990.12.21)

1906년 함북 성진(城津)군 예도에서 최재연씨와 조덕선씨의 4남매 중 장녀로 출생.
호 담인(淡人).
1920년 함난 단천으로 이사.
-보통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친구 千金이를 따라 가출.
1924년 상경, 18세에 동덕여학교에 1학년 2학기로 편입학.
1925년 숙명여고보 2학년 편입학.
1928년 숙명여고보 19회졸업.
중앙보육(中央保育)학교 입학.
-학창시절음악과 무용 등 예능 방면에 소질을 보임.
-전수린에게 노래 사사받음.
-박팔양의 도움으로 라디오에 노래 데뷰.
1929년 중앙보육학교 졸업.
경남 함안유치원 보모 근무.
1930년 도일, 동경 三河 유치원 보모로 근무.
-극작가 김진수를 만나 학생 극예술좌 참여.
-유치진, 김동원 등과 습작 연극 공연.
1931년 귀국.
연극배우 오디션에서 연출가 김유영을 만나 동거.
-김유영의문화공론 잡지사 사무실에서 생활하면서불화를 빚음.
-서영은의 전기소설 최정희-강물의 끝」(문학사상, 1984)최정희의
「젊은 날의 증언」(육민사, 1962)에서
당시김유영 최정희 부부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으며 생활고와 남편의 폭력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고 함.
잡지 삼천리(三千里))사 여기자로 활동.
단편 <정당한 스파이> 삼천리에 발표.
1932년 장남 홍조 출생
1934년 5월, 전주사건에 연루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름.
-1932년 8월에 카프의 프로 극단으로 결성된신건설사는 창립공연을 1933년
11월 23~4일에 서울연예관에서 했는데 작품은 독일 소설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
로 일본인 연출가 무라야마가 각색했다. 공연의 성공으로 전국순회를 하
게됐는데, 전주지방 공연시 일경이 연극 선전 전단의 불온성을 시비삼아 공연
의중단과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카프2차 검거사태 또는 신건
설사 사건 약칭 '전주사건'이라 일컫기도 한다.
-당시 카프 산하 신건설사 단원이었던 김유영이 전주에서 검거되었는데 심
문 중 아내 최정희란 이름이 나오자 함께 검거되었다. 당시 부부는 헤어진 상태
였다(앞의 책).
1935년12월 9일, 전주사건의 1심 판결에서 전주지법 우에노 판사는 박영희 등 19인에게
검사 구형량을 그대로 언도하고 사상전향을 참작하여 집행유예 3년을 언도했으
면 최정희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조선일보 출판부 입사(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이은상의 도움으로).
1937년 흉가를 조광에 발표.
1939년 김유영 사망
경기도 양주 덕소로 이사
1940년 인맥(문장)
1941년 천맥(삼천리)
1942년 장녀 지원 출생
1947년 점례(문화), 풍류 잡히는 마을(백민)
1948년 단편집 천맥을 수선사에서 간행
1949년 창작집 풍류 잡히는 마을을 아문각에서 간행
1950년 1.4 후퇴 시 대구 피난. 남편 김동환 납북
1951년 종군작가단의 종군기자로 활약
대구에서 문인극 참여
1953년 장편 녹색의 문 서울신문에 연재
1954년 동화집 장다리꽃 필 때를 학원사에서 간행
장편녹색의 문(정음사)
서울시 문화위원
1955년 창작집 바람 속에서(인간사)
1956년 중편 데드 마스크의 비극(평화신문)
찬란한 대낮(문학예술)
1958년 장편 인생찬가로 제8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장편 끝 없는 낭만(동학사)
1960년 장편 인간사를 사상계에 연재하다 중단.
현대문학 추천 심사위원
1962년 장편 별을 헤는 소녀들(학원사)
1964년 장편 인간사를 신사조사에서 간행
장편 인간사로 제1회 여류문학상 수상
장편 강물은 또 몇 천리 제1부 현대문학에 2년 간 연재
1965년 중국 방문
1967년 단편 제2여자의 풍경, 제3여자의 풍경
종군작가단장으로 베트남 방문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협회장 피선
1970년 단편 바다(월간문학)
단편 205 병실(현대문학)
예술원회원에 피선
1972년 한국예술원 본상 수상
1976년 찬란한 대낮(문학과 지성), 탑돌이(범우소설문고)
1977년 최정희 문집(명서원)
천맥(성바오로 출판사)
1980년 단편 화투기(현대문학)
1982년 3.1문화상 수상
1990년 정릉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


***강나루 정리

 http://blog.naver.com/fish20017/10151385139

 

 

 


카프 연극부의 조직 변천에 관한 연구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박영정 / 건국대 강사

                                 목         차
      
1. 머리말
2.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
3. 카프 연극부의 조직 변천 과정
  1) 카프 연극부와 극단 청복극장
  2)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 극단 메가폰
  3) 극단 신건설과 카프 연극부
4. 맺음말

 

1. 머리말

한국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은 1930년대 전반기가 그 전성기에 해당한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연극부’가 설치된 1930년 4월에서부터 극단 신건설(新建設)이 이른바 ‘신건설사건’으로 인해 활동을 중지한 1934년 6월 이전까지의 시기가 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프로연극운동을 표방하고 나타난 극단들은 평양의 마치극장, 명일극단(明日劇團), 신세기극단(新世紀劇團), 대구의 가두극장(街頭劇場), 개성의 대중극장(大衆劇場), 해주의 연극공장(演劇工場), 원산의 조선연극공장(朝鮮演劇工場), 서울의 이동식소형극장(移動式小型劇場), 청복극장(靑服劇場), 메가폰, 신건설(新建設) 등 대략 10여 단체에 이른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극단들이 조직되었음에도 서울의 몇몇 극단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못한 채 창립과 해산을 거듭하였을 뿐이다. 물론 일제 당국의 프로연극에 대한 검열이나 프롤레타리아 극단에 대한 탄압을 고려하면 거듭되는 창립과 해산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계속적인 재조직’이야말로 프로연극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효는 이러한 극단의 재조직 과정을, 카프 연극이 객관적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취했던 하나의 ‘전술’로서 받아들이고, 나아가 당시 프로연극인들의 ‘백절불굴의 투지’를 말해 주는 것이라며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효, ?조선 연극사 개요?, 국립출판사, 1956, 297~298면.
 그렇지만 프로극단의 부침을 단지 객관적 상황의 작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을까. 거기에는 주체적 역량의 문제를 비롯하여, 프로연극계 내부의 각 극단 또는 세력 사이의 노선 대립이나 조직론적 갈등의 작용도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0여 개의 프로극단 가운데 실제로 공연 활동을 전개한 극단을 꼽아 보면 조선연극공장과 이동식소형극장, 극단 메가폰, 극단 신건설 등 모두 네 단체에 불과하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객관적 상황을 어느 정도 동일한 조건으로 보았을 때, 소수 극단만이 공연을 했다는 것은 일제의 탄압이라고 하는 객관적 상황 못지 않게 개별 극단의 주관적 역량의 문제가 프로극단들의 공연 활동에 크게 작용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4월에 발족한 카프 연극부는 프로연극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각지의 프로극단과 조직적 연계를 구축하거나 나아가 그들의 활동에 대한 지도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프로연극운동의 전국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각 극단의 개별적 역량 여하에 의존하여 그 활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1930년대에 등장한 각각의 프로극단들이 단일한 조직적 대오를 갖추고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1934년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프로극단들과의 연계를 통해 ‘전국적 통일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 카프 연극부의 최우선의 조직 과제로 제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역으로 당시의 프로연극운동이 분산적으로 전개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당시의 프로극단들이 분산적인 활동만을 전개했던 것은 아니다. 카프 연극부를 통한 전국적인 지도․통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각 극단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면밀하게 추적하여 보면 그 내부에 조직적 친소관계 혹은 계보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카프 연극부와 각 개별 극단들의 관계, 특히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의 관계를 규명하여 보면, 1930년대 프로극단이 몇 가지 계열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1930년대 전반기의 프로연극운동 진영을 형성하였던 각 극단들의 조직적 관계를 고찰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그 큰 줄기를 말하면 ‘카프 연극부’와 여러 프로극단들 사이의 조직적 관계를 검토하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카프 연극부와 극단 ‘이동식소형극장’의 관계를 따져 보는 가운데, 1930년대 전반기 한국 프로연극운동에 조직적으로 두 개의 계열이 존재하였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각 프로극단들의 부침 과정을 일정한 조직론적 맥락 위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동식소형극장이 당시의 여러 프로극단 가운데서도 카프 연극부와 ‘의도적 거리’를 유지한 극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극단은 1930년 4월 프로영화 부문에서 ‘카프 영화부’와 대립한 바 있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1929.12)에 조직적 뿌리가 닿아 있다. 즉, 이동식소형극장은 출발부터 카프 연극부와의 조직적 대립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의 조직적 관계를 밝히는 것을 주 목표로 하되, 그를 위해 먼저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과의 관계를 밝히는 순서를 취했다.
카프 연극부 및 그 주변의 프로연극운동에 대해서 상당한 연구의 진전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효, 앞의 책.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역사문제연구소 문학사연구모임, ?카프문학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89.
   정호순, 「한국 초창기 프롤레타리아 연극 연구」, 단국대 석사논문, 1991.
   양승국, ?한국근대연극비평사 연구?, 태학사, 1996.
 본고는 이러한 기존 연구에서 밝혀지지 않은 아주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기존 연구의 성과들을 수렴하여 재정리해 놓은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을 중심으로 조직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살펴본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연구가 소홀히 지나친 조직 문제에 천착하여 재정리함으로써 프로연극운동 진영을 무조건 뭉뚱그려 취급하던 프로극단 사이의 조직적 관계를 보다 뚜렷이 밝혀 줄 것이다.

2.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대립과 갈등의 전반적 흐름에 대해서는 이효인, ?한국영화역사강의1?, 이론과실천, 1992, 93~131면 참조.


1927년 이른바 ‘제1차 방향전환’을 통해 조직을 정비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지역 지부의 설치와 ‘문호개방’을 통해 ‘정치적 대중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역 지부의 경우 비예술가들이 다수 가입하여 한때 160명 가까운 대조직으로 번창하기도 한다. 김기진,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과거와 현재」, ?사상월보?, 1932.10. ; 임규찬 한기형 편, ?카프시대에 대한 회고와 문학사?, 태학사, 1989, 100면.
 그러다가 1930년 4월 20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안막(安漠)․권환(權煥) 등을 새로운 중앙위원으로 선임하고, 부서 개편을 단행하여 기술부 산하에 전문부서로 문학부․영화부․연극부․미술부의 4부를 설치한다. ?조선일보?, 1930.4.29.


四. 技術部 委員 設置의 件
▲技術部 權煥(常任)
▲文學部 權煥(常任) 李箕永 韓雪野 朴英熙 宋影
▲映畵部 尹基鼎(常任) 林和 金孝植 李應鍾 朴完植
▲演劇部 金基鎭(常任) 崔承一 安漠 韓澤鎬 申英
▲美術部 李相大(常任) 安夕影 鄭河善 姜湖
▲書記 洪宰植(增選)

이처럼 기술부(장르별 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부서)가 신설되었다는 것은 카프의 성격이 정치적 대중조직에서 예술운동 조직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문학부문에 한정되어 있던 기존의 활동이 전 예술 분야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문제연구소 문학사연구모임, 앞의 책, 242면.

그런데 신설된 기술부에는 영화부의 임화와 김남천을 비롯하여 연극부의 안막과 한택호, 문학부 및 기술부 상임 위원의 권환 등 동경의 ‘무산자사(無産者社)’ 출신이 상당수에 이른다. 조선프로예맹 동경지부(1927.10)의 조직 형태가 창립 당시부터 전문부 아래 ‘문학부․연극부․미술부․음악부’를 두었던 것을 고려하면 부서별 재편이 이들 동경 출신 활동가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 1927.10.10.
 특히 동경에서는 문학 이외에 연극 분야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편이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의 ‘프롤레타리아극장’, 무산자사의 ‘무산자극장’의 활동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박영정, 「일제강점기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3, 태동, 1993 참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0년 4월 기술부 설치의 조직 개편이 동경의 무산자사 출신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으며, 이후 이들이 카프의 주도권을 쥐고서 ‘문예운동의 볼세비키화’를 적극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카프 영화부’가 설치되며, 종래 자생적으로 발전해 오던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은 이제 카프의 지도 아래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카프 영화부에서는 당시의 프로영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단체 및 영화인들을 모두 카프 영화부의 조직적 지도 아래 편입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카프 영화부 설치 무렵의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은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카프 영화부는 창설 직후 프로영화운동의 주도권을 쥐고자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이하 신흥영맹)의 해산을 권고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오던 신흥영맹 측에서 카프 영화부의 권고를 거부함으로써 프로영화운동 진영 내부의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중앙에 기술부를 설치하여 각 장르별 예술운동의 주도권을 쥐고자 한 카프 중앙과 기존의 자생적 예술운동 단체 사이에 생긴 갈등으로서, 단지 영화 부문의 내분에 그치지 않고 이후 연극․미술 분야에까지 그 파장이 미치게 된다는 점에서 카프 조직 연구에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잠깐 1930년 이전의 프로영화운동에 대해 개관해 보기로 하자.
1925년 조선프로예맹 출범 이후 1930년에 이르기까지는 문학부문을 제외한 프로예술운동은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연극부문에 있어서는 김복진(金復鎭)․김기진․안석영(安夕影)․박영희(朴英熙) 등 카프 맹원들이 참여하여 조직한 ‘불개미극단’(1927.1) ?조선일보?, 1927.1.25, ?동아일보?, 1927.1.28.
이 그 흔적을 보일 뿐이고, 미술이나 음악 부문의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영화부문에서는 김영팔(金永八), 최승일, 윤기정, 임화, 김유영(金幽影), 김기진, 안석영 등이 참여한 ‘조선영화예술협회(朝鮮映畵藝術協會)’(1927.7) ?조선일보?, 1927.7.6.
 이후 타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물론 조선영화예술협회 자체는 결코 경향적인 성향을 가진 단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기에 참여한 젊은 영화인들의 대부분이 뒤에 프로영화운동을 주도해 나가게 되며, 임화와 윤기정의 경우처럼 카프 전체를 리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단체이다. 불개미극단이 단체 결성에 그치고 무대에서 사라진 반면, 이 조선영화예술협회 출신의 경향적 영화인들은 <유랑>의 제작 이후 독자적으로 ‘서울키노’(京城映畵工場, 1928.5) ?동아일보?, 1928.5.27.
를 조직하여 임화와 추적양(秋赤陽) 등이 출연하고 김유영이 감독한 <혼가(昏街)> 제작에 들어가는 등 프로영화운동을 계속 전개한다.
한편 함흥에서 ‘신흥영화공장(新興映畵工場)’(1929.2) ?조선일보?, 1929.2.12.
을 설립한 김태진(金兌鎭)과 ‘동북영화제작소(東北映畵製作所)’(1929.11) ?조선일보?, 1929.11.19
에서 활동하던 김형용(金形容) 등이 가세하여 1929년 12월 김태진․김형용․윤기정․임화․김유영 등의 발기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 ?조선일보?, 1929.12.12, 1929.12.17, ?동아일보?, 1929.12.12.
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계급의식을 파악한 예술운동의 일 부문으로서의 영화운동’을 표방한 신흥영맹의 간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中央執行委員 金幽影 羅雄 林華 尹曉峰
常務執行委員 金幽影 白河路
部署  庶務部 白河路
      撮影部 金幽影
      硏究部 羅雄 石一良
      出版部 尹曉峰 崔星兒 ?조선일보?, 1929.12.17.


이들은 대부분 조선프로예맹의 회원들로서, 이후 1930년대 프로영화와 프로연극 분야에서 중심 멤버로 활약하게 된다. 이들은 회원 김태진을 파견하여 평양에 그 지부(1930.2) ?조선일보?, 1930.2.7, 1930.2.14.
를 설치하는 등 조직 확대에 들어간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1930년 4월의 카프 조직 개편을 만나게 되며, 신설된 ‘카프 영화부’로부터 갑자기 해산 권고를 받게 된 것이다. 4월 20일에 열린 카프 중앙위원회에서 ‘신흥영화예술동맹’ 해체 권고의 건을 공식 논의하였다.(?조선일보?, 1930.4.22.)
 이에 신흥영맹에서는 4월 21일 위원회를 열어 카프 영화부의 상임 위원인 윤기정을 자퇴 형식을 빌어 신흥영맹에서 탈퇴시키고, 신흥영맹의 주도자인 김유영과 서광제(徐光霽)도 자퇴 형식을 밟아 카프에서 탈퇴함으로써 카프측의 해산 권고를 거부한다. 이 날의 위원회에서 결정된 부서 위원들을 보면 서무부 석일량, 출판부 서광제, 촬영부 김유영, 연구부 나웅으로 되어 있다. ?조선일보?, 1930.4.23.
 신흥영맹의 간부 가운데 카프 영화부의 위원이 된 자는 임화와 윤기정의 2인이지만, 이 무렵 임화는 동경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윤기정 1인만 신흥영맹에서 빠져 나와 카프 영화부로 옮긴 셈이 되었던 것이다. 윤기정에 김남천과 박완식이 결합하여 카프 영화부를 구성했던 것이며, 서울키노에서 활동을 같이하던 강호도 카프 미술부에 소속되어 있긴 했지만 카프 영화부의 활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프 영화부 설치와 함께 프로영화운동을 카프 지도 아래 전개하고자 했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거꾸로 프로 영화 진영의 분열로 치닫게 된다. 결과적으로 카프 영화부에서 윤기정․김남천 등이 중심이 되어 신흥영맹에 집중적 공격을 가함으로써, 김유영 등이 리드하던 신흥영맹이 자진 해산하게 되지만, 신흥영맹이 해산되었다고 해서 프로영화 진영의 내분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신흥영맹 해체 이후에도 김유영 일파의 활동은 카프 영화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신흥영맹의 해체 직후 김유영과 서광제의 주도로 ‘서울키노’(1930.4)가 부활 ?조선일보?, 1930.4.28.
되고, 평양에서도 ‘평양키노’(1930.7) ?조선일보?, 1930.7.17.
를 다시 세우게 된다. 부활된 서울키노에서는 김유영 감독, 이효석(李孝石)․서광제 편집, 김연실(金蓮實)․석금성(石金星)․석일량(石一良)․이엽(李葉)․추적양 등의 출연으로 <화륜(火輪)>을 제작하는 등 독자적인 영화 제작 활동을 전개한다.
이리하여 서울키노계(구 신흥영맹계)와 카프 영화부의 조직적 결합은 더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카프 영화부의 지도 강호,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우리들의 금후 활동을 위하야」(3), ?조선중앙일보?, 1933.4.9.
하에 서울키노와는 별개로 ‘청복(靑服)키노’(1930.11) ?조선일보?, 1930.11.29.
가 창립됨으로써 프로영화운동 진영은 정식으로 양분을 겪게 된다. 이 청복키노의 주요 멤버는 신응식(申應植-문학부), 강호(姜湖-미술부), 박완식(朴完植-영화부), 신영(申英-연극부), 정하보(鄭河普-미술부) 등 주로 카프 기술부 위원들이었다. 이들은 창립 직후 신응식 원작 <느러가는 무리>(후에 <지하촌>으로 개제)를 강호의 감독으로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 3월 서울키노의 <화륜>이 상영 ?조선일보?, 1931.3.11.
에 들어간 시점에 청복키노에서는 <지하촌>의 촬영 완료 ?조선일보?, 1931.3.11.
를 하게 된다.
바로 이 무렵 임화는 서울키노가 만든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을 내세워, 구 신흥영맹 계열의 서울키노와 그 주도 멤버인 김유영․서광제에 대해 “계급적 영화운동의 유일의 조직〔카프 영화부를 가리킴-인용자〕을 배반한 탈주자” 임화, 「서울키노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 ?조선일보?, 1931.3.25.
라며 공격을 가한다. 반면 서광제는 이에 대한 반박을 하면서도 분규가 있던 1930년 4월에는 임화가 동경에 있었기 때문에 사정을 잘 몰랐을 것이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자신은 “조직적 영화운동의 유일의 조직을 위반한 탈주자도 아니며 임군의 말과 같이 카프에서 방출당한 사실도 없으며 어디까지 무산계급 예술운동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투쟁할 역원이며 우리의 조직체는 카프인 것을 말하여 둔다.” 서광제, 「영화화된 화륜과 <화륜>의 원작자로서」(상), ?조선일보?, 1931.4.11.
며 입장을 얼버무리고 있다. 이리하여 더이상 조직 문제에 대한 논의로 비화되지는 않았지만, 신흥영맹계(서울키노)와 카프 영화부(청복키노)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어 각기 양분된 채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신흥계의 서울키노에서는 1931년 6월 조직을 혁신하여 ‘농촌영화부’․‘가두영화부’․‘기록영화부’의 3개 제작부를 두고, ‘이동영사대(移動映寫隊)’를 조직하여 도시 농촌을 순회 상영하기로 하고, 농촌영화부에서는 <낙동강>(조명희 원작, 추적양, 김해웅 공동감독)을, 가두영화부에서는 <어머니>(고리키 원작, 석일량, 황렬 공동감독)을 제작하기로 하는 등 ?동아일보?, 1931.6.12.
, 독자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간다. 그에 비해 카프계인 청복키노의 활동은 1931년 여름의 ‘제1차 카프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갈라져 있던 영화운동의 두 흐름이 단일 조직으로 재편되는 것은 1932년 12월에 창립된 ‘동방(東方)키노’에 이르러서 비로소 실현된다.

脚本部 金兌鎭 秋赤陽
監督部 姜湖
撮影部 閔又洋 金容泰
出演部 李圭卨 南宮雲 羅雄 趙希勅 金海棠 李銀淑(이하 략)
美術部 河北卿 黃一鉉 金海岩
宣傳部 李圭卨 李葉
庶務部 金兌鎭 秋赤陽 姜湖 ?조선일보?, 1932.12.9.


그 구성원으로 보면 김유영과 서광제가 배제되어 있을 뿐, 프로영화 진영의 총집결체라 할 수 있겠다. 이 ‘동방키노’의 사무소가 ‘장사동(長沙洞) 198번지’로 당시 극단 ‘신건설(新建設)’의 사무소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극단 신건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방키노는 기관지 ?영화부대(映畵部隊)?를 발간 ?조선일보?, 1932.12.27, 1933.3.1.
하면서 프로영화운동에 대한 주도권을 더욱 강화하여 나간다. 이로써 1930년 4월 카프 영화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된 프로 영화진영의 갈등이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강호의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우리들의 금후 활동을 위하야」 ?조선중앙일보?, 1933.4.7~17.
는 이러한 조직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제시된 것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결성의 촉진을 통해 카프 재조직, 즉 ‘조선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의 결성으로 나가기 위해 카프 영화부가 기술적 전문단체로서 독립적 조직체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과, 부원의 다수 획득을 위해 부원 자격에 있어서 의식 수준을 너무 과중하게 요구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카프의 조직 방향은 1934년 2월의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를 거쳐 공식적 방침으로 제시된다. 카프 서기국, 「카프중앙집행위원회 결의문」, ?우리들?, 1934.3.
 그렇지만 이 때는 이미 프로영화 진영이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그 구체적 실현을 보지 못하고 1934년의 ‘신건설사 사건’으로 인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3. 카프 연극부의 조직 변천 과정

1) 카프 연극부와 극단 청복극장

앞에서도 보았듯이 ‘카프 연극부’는 1930년 4월 카프에 기술부를 신설하면서 그 산하 부서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상임 위원 김기진을 비롯 최승일, 안막, 한택호, 신영의 5인이 그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가운데 안막과 한택호가 동경 ‘무산자극장’ 출신이다. 이들의 존재는 카프에 연극부가 설치되는 과정에 동경의 무산자극장의 영향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무산자극장이 국내 프로연극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은 그 전신인 조선프로예맹 동경지부 연극부 ‘프롤레타리아극장’이 1929년 여름 국내 순회 공연을 시도하던 때부터이다. 이들은 경성․평양․개성․수원․원산․함흥․대구 등을 순회하면서 루 메르덴의 <탄갱부>, 뮐러의 <하차>, 촌산지의(村山知義)의 <전선(폭력단기 개제)>, 고전보(高田保)의 <어머니를 구하라> 등의 레퍼터리로 공연을 할 예정이었지만, 각본 검열 때문에 실제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동아일보?, 1929.7.24, 1929.7.26, ?조선일보?, 1929.7.16, 1929.7.24, 1929.7.25, 1929.7.26, 1929.7.30, 1929.8.15, 1929.8.23.
 그러나 그 순회 공연이 각 지방의 프로연극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역사문제연구소 문학사연구모임, 앞의 책, 212면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 구체적 예가 되는 것이 평양의 경우이다. 조선프로예맹 평양지부에서는 동경지부 ‘프롤레타리아극장’의 국내 순회 공연을 계기로 자체의 극단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즉, 평양지부에서는 1929년 9월 8, 9일 백선행기념관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맹원 가운데서 연극에 출연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집하였다. 단순한 공연 기획이 아니라 공연단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곧 국내 프로극단의 조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과정에 동경지부의 한택호(평양 출신)가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記事, 「平壤에서 푸로劇 開演-藝盟支部 主催」, ?朝鮮日報?, 1929.7.30.
   푸로藝術同盟 平壤支部에서는 去二十七日 午後 十時부터 平壤 靑年同盟會舘內에서 푸로레타리아劇 上演에 關한 件을 討議키 爲하야 第三回 執行委員會를 開催하고 左記와 如히 委員을 定한 後 九月 八日 夜부터 同九日 夜지 平壤 白善行紀念舘內에서 開催하기로 하고 同十一時半에 閉會하엿다는데 支部 盟員中 出演코저 하는 사람은 來八月 十五日內로 來議하여 주기를 바란다더라(平壤)
   ◇任員
  脚本選擇委員 푸로레타리아東京支部員 韓在德
  俳優選定委員 黃萬鳳
  經費負擔委員 李寬燁
  社交委員 朴英華
  設備委員 張景涉
 이 공연에 관한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동경지부의 국내 순회공연이 국내 프로연극에 미친 한 단초를 보여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카프 연극부가 설치되기 한 달 전인 1930년 3월 23일 평양에서 ‘마치극장’이 창립되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앞서 1929년 여름 평양에서 극단을 조직하려다 실패한 한택호(당시 무산자극장 멤버)가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하여 재조직한 극단이 바로 마치극장이다. ?조선일보?, 1930.3.28.
  한재덕, ?김일성을 고발한다?, 공산권문제연구소, 1965, 38면.
 이 극단은 ‘노동자의 행진’을 연상시키는 극단 명칭이나 “마치극장은 푸로레타리아극장이다. 이것이 우리의 성질을 그리고 방향을 말하는 일체이다.” ?조선일보?, 앞의 기사.
라는 극단의 창립선언에서 드러나듯 국내에서는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표방하고 창립한 연극 단체인 셈이다. 유민영, 앞의 책, 758면.
 이처럼 국내 최초의 프로극단이 무산자극장의 영향 아래 조직되었다는 것은 다른 지역 프로극단의 창립의 계기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동경의 무산자극장이 지방의 프로극단의 출범에 영향을 끼친 것도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카프 연극부’의 조직과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즉, 무산자극장의 영향을 받은 지방의 프로극단이라면 카프 연극부와도 일정한 연계가 있는 극단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극장을 제외한 지방 프로극단이 모두 카프 연극부가 설치된 지 6개월이 지난 이후에 창립되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창립대회 장소가 다름 아닌 신흥영맹 평양지회관이었다. 이는 그 때만 해도 카프측과 신흥영맹측의 갈등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치극장 창립에 관여했던 한택호가 ‘카프 연극부’ 신설과 함께 그 위원이 되고, 그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맹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한택호 자신이 카프 연극부의 위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카프 영화부의 김남천과는 고교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동경에서도 무산자사의 활동을 함께했던 점 한재덕, 앞의 책, 36면.
을 고려해 보면,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맹의 갈등에서 한택호가 어떠한 입장을 취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카프 중앙위원회에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해산 권고안을 결의한 이후, 5월 16일 동경의 무산자극장에서도 임시총회를 열어 “카프의 연극부와 영화부를 절대 지지하며, 조선신흥영화예술동맹을 박멸할 것”을 결의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무산자극장 출신 한택호가 신흥영맹에 대해 취한 태도는 보다 분명해진다.(?조선일보?, 1930.5.24)
 애초에 <고개>(<荷車>의 다른 제목), <탄갱부(炭坑夫)> 등의 레퍼터리로 제1회 공연(4월 하순 예정)을 준비 ?조선일보?, 1930.4.5.
하였던 ‘마치극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공연도 하지 못하고, 또 극단마저 소리 없이 사라진 것도 이러한 조직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신흥영맹이 영화인 조직이었던 만큼 카프 연극부와 직접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신흥영맹에 비견할 만한 연극계 조직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프로연극 진영에서는 프로영화 진영과 같은 조직적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카프 영화부 및 청복키노의 활동이 미약했듯이, 카프 연극부도 1930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 주지는 못하였다. 부서만 설치되었을 뿐 실제적 활동 역량은 아직 미약하였던 것이다. 1930년 9월 카프 연극부 위원 최승일의 연출로 ‘미나도좌’에서 루 메르덴의 <탄갱부>를 <산>이라 개제하여 상연하는 등 ?조선일보?, 1930.9.18.
, <하차> ?중외일보?, 1930.9.11.
․<이층의 사나이>(업톤 씽클레어 원작, 李白水 번역) 등 일련의 경향극 각본을 상연한 것이 그 활동의 전부였다. 이 공연이 프로연극의 한 발전 과정인지 아닌지를 놓고 뒤에 평자들간에 논전이 벌어지지만, 공연 활동이 아닌 조직 활동의 차원에 본다면 이 해의 카프 연극부의 활동은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연극운동의 새로운 기치를 들고 나선 것이 대구의 ‘가두극장(街頭劇場, 1930.11)’ ?조선일보?, 1930.12.3.
이다. 가두극장은 연극을 무기로 하여 무산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하며, 일체의 부르주아 연극을 실천적으로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조직적 생산을 계획한다는 강령 아래, 대공연․이동공연 등 다양한 공연 형태를 통해 노동자 농민 대중 속에 연극을 가지고 들어갈 뿐 아니라 ‘이동극장(移動劇場)’을 확충 강화하며, 카프의 재조직을 촉진하여 연극운동을 전국적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등의 활동 방침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는 이 단체가 카프를 각 부문 동맹들간의 협의체로 만들고자 했던 1930년 4월 이래의 ‘카프 재조직’ 논의와 ‘예술의 볼세비키화’의 연장선에서 출발한 극단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때문에 카프 연극부와의 조직적 연계 하에서 창립된 극단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이상춘(李相春)이나 신고송(申鼓頌) 등이 이후 카프 연극부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가두극장과 카프 연극부는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단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 개성에서는 카프에서 발행하던 노동자 농민용 대중 잡지 ?군기(群旗)?사의 극부(劇部)로 ‘대중극장(大衆劇場, 1930.12)’ ?조선일보?, 1931.1.3.
이라는 극단이 창립되었는데, 이 극단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 기관’이 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창립 경과로 보면 이 극단의 창립 과정에 카프 연극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중극장은 비록 지방인 개성에서 창립되었지만 카프 연극부의 직계에 속하는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중극장은 1931년 3월 송영(宋影)의 <일체면회 거절>, 씽클레어의 <이층의 사나이> 등으로 제1회 공연을 준비중이었지만, 세칭 ‘?군기? 사건’으로 카프 중앙과 대중극장(또는 카프 개성지부)의 주도 멤버인 민병휘(閔丙徽)․양창준(梁昌俊) 등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중지되고 만다.
‘?군기? 사건’은 1930년 9월의 미나도좌 공연을 놓고 벌어진 박영희와 민병휘간의 논전에서 발단된다. 박영희, 「1930년 조선프로예술운동-극히 간단한 보고로서」, ?조선지광?, 1931.1. 6면.
    민병휘, 「박씨의 프로극관과 포빙씨의 <어진 거울>」, ?조선일보?, 1931.2.11~12.
    이 논쟁의 전개 과정 및 그 연극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양승국, 앞의 책, 87~93면 참조.
 박영희가 미나도좌 공연을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첫행진’이라 고평하자, 민병휘는 이러한 박영희의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카프 중앙에 대한 공격으로 논의를 확대하게 된다. 이동극장 형식의 연극 활동을 강조한 민병휘의 입론은 카프 중앙과는 별개로 카프 재조직을 추진하고자 했던 개성지부 양창준(?군기?의 발행인)의 주장으로 연결되면서 ‘반카프 음모’의 ‘?군기?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 개요는 카프 개성지부 멤버들이 카프에서 발행하는 ?군기?라는 잡지를 이용하여 카프 중앙에 대한 ‘기만적 역선전’을 통해 ‘전조선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를 결성하려고 하다가 카프 서기국에 의해 적발된 사건을 말한다. ?조선일보?, 1931.4.28.
 사실 민병휘가 박영희의 견해를 비판한 것은 애초 대중극장의 창립 취지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카프 중앙의 소장파들(임화, 안막, 권환 등)의 입장과도 내용상 동일한 것이다. 또한 이른바 재조직 논의라는 것도 그 내용만 가지고 본다면 1930년 4월 이후 카프 중앙의 소장파들이 추구하던 조직론의 핵심(재조직론)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카프 중앙이 재조직을 추진하면서도 카프 조직의 현실적 사정을 고려하면서 추진한 데 비해, 개성지부의 양창준 등은 일본 나프(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의 조직 형태를 본따서 이현인, 「카프 분규에 대한 대중적 견해」, ?시대공론?, 1932.1, 52면.
 하나의 이상적 형태로서의 조직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간극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직 문제의 최우선 원칙으로 전국적 예술운동에 대한 카프의 헤게모니 관철을 염두에 두고 있던 카프 중앙의 입장에서는 카프 중앙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어떠한 조직 논의도 ‘반카프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이 ‘?군기? 사건’은 이 시기 카프 중앙의 태도가 얼마나 종파적이고 섹트적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카프 영화부와 신흥영맹 사이의 갈등도 사실은 활동 방향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카프 중앙의 헤게모니 관철을 전면에 내세운 종파적 조직관에서 비롯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대중극장은 ‘군기파’에 들지 않은 카프 개성지부원 김종인(金鍾仁) 등을 내세워 재기를 시도 ?동아일보?, 1932.7.18.
하지만 자체 역량의 미비 김소엽, 「연극운동의 회고와 비판-대중극장을 예로 들어」, ?조선중앙일보?, 1933.8.30~31.
로 공연 한 번 하지 못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른바 ‘?군기? 사건’이 진행되는 중에 카프 연극부의 지도 아래 서울에서 ‘청복극장(靑服劇場, 1931.4)’ ?조선일보?, 1931.4.19., ?동아일보?, 1931.4.21.
이 창립된다. ‘카프 소속 및 그 동반자’에 해당하는 임화, 안막, 김남천, 이규설(李圭卨), 이찬(李燦), 정용산, 신영, 김태진, 김형용, 이귀례(李貴禮), 송계숙 등으로 이루어진 구성원으로 보아 카프 연극부에 의해 창립된 극단이 분명하다. 또한 그 명칭으로 보아도 앞에서 살펴본 카프 영화부 직속의 ‘청복키노’와 동일 계열의 것임이 분명하다. 카프 연극부의 입장에서 보면 ‘청복극장’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에 직계 극단을 갖게 된 셈이다. 카프 연극부 설립으로부터 보면 만 1년이 걸린 셈이다.
청복극장은 <지나(支那)!>(7장), <다리업는 말틴>(11장), <아세아>(1막), <파업조정안>(1막), <탄갱부>(1막), <하차>(1막), <3등수병 말틴>(13장), <전선>(5막), <반향>(5막)의 레퍼터리로 1931년 5월 제1회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해 여름부터 ‘카프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저절로 해산되고 만다. 같은 무렵 이동규(李東珪), 홍구(洪九) 등에 의해 ‘우리들극장’(1931.6)이 서울에서 조직 한효, 앞의 책, 292면.
되는데, 홍범(洪凡)에 의하면 구성원의 대부분이 노동자로 이루어진 소인극단(素人劇團)이었다고 한다. 홍범, 「최근 극단의 회고와 전망」, ?조선중앙일보?, 1932.3.14.
    1932년에 쓴 이 글에서 홍범은 ‘군소 프로극단’이 가진 결점을 ‘청복극장’은 전혀 가지지 않았으며, 연극부의 직속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또한 청복극장과 함께 ‘우리들극장’을 새로운 프로극단으로 제시하면서, 정작 ‘이동식 소형극장’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대신 “모든 불순분자들을 자기진영에서 가혹 축출식히는 동시에 접근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방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동식소형극장과 카프 연극부의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극단은 카프 연극부의 지도 아래 조직되었지만, 이어 8월부터 시작된 ‘제1차카프사건’의 영향으로 아무런 활동도 보여 주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이처럼 카프 연극부 설립 전후의 프로극단의 동향을 보면 1930년 4월 카프 연극부 설립 이래 1931년 4월에 청복극장이라고 하는 직계 극단이 만들어지고, 또 그를 전후하여 직계 극단은 아니지만 일정한 조직적 연관 아래 마치극장, 가두극장, 대중극장이 창립되어 활동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극단은 한결같이 검열 및 주체 역량의 미비로 단 1회의 공연도 하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극단 이동식소형극장과 극단 메가폰

대중극장과 청복극장이 개성과 서울에서 창립될 무렵 해주의 ‘해주연극공장(海州演劇工場, 1931.4)’ ?동아일보?, 1931.4.7, 1931.4.8.
과 원산의 ‘조선연극공장(朝鮮演劇工場, 1931.4)’ ?동아일보?, 1931.4.30.
이 창립된다. 이 두 극단은 ‘연극공장’이라는 명명법으로 보아 어떠한 유사성, 특히 신흥영맹계의 ‘영화공장’ 들과의 연계성이 추정되지만, 구체적 근거나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가두극장이나 대중극장, 청복극장과 달리 처음부터 카프 연극부와 무관하게 자생적으로 등장한 프로극단인 것으로 추정된다. “現朝鮮의 情勢로서는 캅푸演劇部의 生新한 活動을 期待하지 아니할 수 업게 된다. 卽 地方劇團의 創立 밋 그의 組織的 技術的 指導者의 派遣 뉴스의 發的 等等에 잇서서 좀더 活動의 機軸을 開拓하여 주엇스면 한다.”(안함광, 「무산연극운동의 촉진-문제의 간단한 제기로서」(하), ?조선일보?, 1931.5.10)의 안함광의 주장도 결국 카프 연극부가 해주연극공장과 아무런 조직적 연관을 갖고 있지 못함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특히 원산의 ‘조선연극공장’은 흥행극단이 프로극단으로 발전해 나간 독특한 경로를 가지고 있는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 경로를 살펴보면, 조선연극공장은 원래 1930년 5월경 흥행극단인 원산관(元山館) 직속의 ‘WS연예부’(WS는 원산의 영문 이니셜)로 출발했다. 원산관 주인 김창준(金昌俊)과 극작가 박영호(朴英鎬) 등이 주도한 ‘원산관연예부’는 1930년 11월 상연중이던 <과도기> <하차> 등의 각본이 문제가 되어 당국으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아 ?조선일보?, 1930.11.19
 일시 해산하였다가, 곧바로 ‘동방예술좌(東方藝術座)’라는 이름으로 재출발 ?조선일보?, 1930.12.8
하여 원산과 함흥을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동방예술좌가 1931년 4월경 극단 명칭을 ‘조선연극공장’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1931.4.30
 이 명칭의 변경과 함께 종래의 ‘에로’ 경향을 청산하고 새로운 진용과 무대형식을 가진 극단으로 혁신하여 활동하던 중, 10월의 함흥 공연시 <아리랑 승인편>과 <아리랑 반대편>이 문제되어 극단원이 검속되고 함흥에서의 공연 활동이 일체 금지를 당하면서 ?조선일보?, 1931.10.13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조선연극공장은 몇 차례의 검속과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원산관연예부 시절부터 계산하면 약 1년 반 동안 원산과 함흥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한 공연 활동을 전개한 셈이다. 이처럼 활발한 공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프로극단을 표방하지는 않으면서 실제 공연에서는 경향적 각본을 상연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단의 성격은 엄밀한 의미에서 프로극단이라기보다는 ‘동반자’적 성향을 가진 극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31년 7월경부터 ‘이동식소형극장(移動式小型劇場)’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 8월 경성부 와룡동 시대공론사에서 창립을 하게 된다. 이동식소형극장의 창립시기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다.
   1931년 11월의 ?조선일보?(1931.11.11)와 ?동아일보?(1931.11.14) 기사에는 창립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공연 계획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선풍아는 1931년 11월 13일에 쓴 「조선프로레타리연극의 전조」(?시대공론?, 1932.12)에서 ‘금추(今秋)’에 창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신건설사 사건’ 예심 결정문(1935.6.28)에서는 ‘1931년 8월경 와룡동 시대공론사’에서 창립하여 11월부터 순회 공연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보면 1931년 여름에 창립하여 11월부터 공식 활동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1931년 7월의 ?조선일보?(1931.7.9) 기사에 나오는 ‘소형 이동극장’의 창립 소식이 곧 ‘이동식소형극장’의 창립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그 기사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사, 「小型 移動劇場 創立―工場 農村 巡廻公演 方今 公演을 準備中」, ?조선일보?, 1931.7.9.
   “금번 새로히 소형이동극장(小型移動劇場)이 창립되엿다는데 일반 무산대중(一般無産大衆)의 리익을 위한 극운동을 개시하리라는바 방금 공연준비(公演準備)에 분망중이라 하야 공장(工場) 농촌(農村)으로 순회(巡廻)하여 이동공연(移動公演)을 할 터이라 한다.”
 이동식소형극장은 극단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장이나 농촌에 있는 노동자 농민을 상대로 하는 ‘이동연극(移動演劇)’을 주로 하는 극단이다. 이동연극이라 함은 농촌․산촌 등 상설적인 극장 설비가 없는 곳, 학교․공장․회사 등 관객들의 삶의 현장으로 연극을 직접 가지고 들어가서 공연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한 극장 설비가 없는 곳이기에 소수의 인원과 간단한 도구로 무대를 연출하는 ‘소형극장’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일찍부터 프로연극에서는 이동연극을 주요한 공연 형태로 추구해 왔으며, 이는 일본의 프로연극이나 조선프로예맹 동경지부의 활동에서도 직접 실천된 바 있다. 앞서 살펴본 대구의 가두극장에서도 주요 공연 형태의 하나로 제시한 바 있다. 극단 명칭이 그렇다고 하여 ‘이동식소형극장’이 중앙공연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 이동식소형극장은 1931년 11월 상연 예정으로 <전선>(村山知義), <순아! 네 죄가 아니다>(小掘甚二), <이층의 사나이>(씽클레어)의 번역극 외에 <호신술>(송영), <작년>(석일량), <지하층 소동>(김유영), <부음>(김영팔), <박첨지>(兪鎭午), <다난기의 기록>(이효석) 등의 레퍼터리로 제1회 중앙공연을 준비한 바 있다. ?동아일보?, 1931.11.15, ?조선일보?, 1931.11.11.
 그러나 중앙 공연은 각본 불허가 등으로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조선일보?, 1932.2.19.
, 결국 이동공연의 형태로만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게 된다. 추적양, 「이동식소형극장운동-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조선일보?, 1932.5.6.
   이동식소형극장의 활동 경과에 대해서는 정호순 앞의 논문, 48~51면 참조.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앙공연보다는 이동공연이 상연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 극단이 이동공연을 위주로 하는 극단으로 출발한 것도 그 때문이며, 바로 이동공연의 형태를 취한 결과 서울에서 만들어진 프로극단으로서는 최초로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립 당시의 이동식소형극장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顧  問 姜天熙
脚本部 兪鎭午 李孝石
演出部 金幽影 河北鄕
裝置部 秋赤陽 金美男
道具部 張鐵兵 朴昌赫
效果部 金容泰
宣傳部 金赫
出版部 崔貞熙
音樂部 金永燦
演技部 石一良 李葉 尹想黙 黃河石 韓愚(?) 朴哲熙 張越廠 林永植 張福萬 許世忠 白如川 鄭完赫 金蓮實 金仙草 金鮮英 崔露砂 金惠淑 金馬利亞 姜海蓮 ?조선일보?, 1931.11.11.


김유영, 추적양, 석일량, 이효석, 이엽 등 중심 멤버의 대부분이 신흥영맹계인 서울키노와 관련된 인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연기부 소속의 연기자들도 주로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영화배우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구성원으로 보아 이 극단이 카프 연극부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탄생한 극단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카프 연극부를 비롯한 카프 중앙 및 청복극장의 주요 구성원은 경찰 조사를 받은 이후여서, 상대적으로 활동력이 크게 둔화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프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규모의 이동식소형극장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 극단이 카프와 무관한 영역에서 출발한 극단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동식소형극장은 카프 연극부가 아닌 신흥영맹계 영화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만들어진 극단이라 할 수 있다. 창립 장소인 시대공론사가 김유영 등이 신흥영맹의 재기를 꿈꾸었던 곳이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동식소형극장의 창립을 주도한 김유영은 이미 1931년 4월 경부터 이동식소형극장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至今부터―푸로레타리아的 演劇運動의 基本方針은 어케 할 것인가―는 原問題와 버스러지는 듯함으로 캅프 演劇部에 存在한 同志들이나 다른 鬪爭的 分子에게 맛기고. 다만 映畵 公開時에 잇서서 小規模的으로(大槪 一幕으로 된 寸劇) 公開할 수 잇는 移動式小型劇場을 組織하엿스면 어 한다. … 日本에서는 左翼劇場 內部에 包含한 移動劇場部에 獨立한 存在 ‘푸로레타리아演藝團’이 잇서서 移動式 活動을 專門的으로 하고 잇다. … 그리고 ‘푸로레타리아演藝團’이 납프의 푸로키노 映畵工場과 握手하야 地方으로 移動公演을 할 에는 이러한 劇團이 반드시 決死的 後援을 한다고도 한다.
朝鮮의 프로레타리아 演劇人도 日本과 가튼 手段 方法을 引用하야 朝鮮의 客觀的 情勢를 잘 살펴서 (略) 슬로간으로 移動式小型劇場을 組織하야 우리들 映畵人과 가티 握手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강조 인용자) 김유영, 「금후 푸로 영화운동의 기본방침은 이러케 하자」(10), ?조선일보?, 1931.4.12


김유영은 일본 프로연극의 예를 들어가며 ‘이동식소형극장’을 만들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피력하고 있다. 인용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일본에서는 동경 좌익극장(左翼劇場) 산하에 이동극장부 ‘프롤레타리아연예단’을 조직하여 이동공연을 전담하게 하였다. 김유영의 이러한 언급으로 보면 이동식소형극장이라는 극단 명칭도 이동공연의 전담을 의도하고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유영의 계획이 1931년 8월경 현실화한 것이 곧 이동식소형극장이다. 극단 창립 직후에도 김유영은 「이동식소형극장의 공연을 압두고」 ?시대공론?, 1932.1
란 글에서 극단원이 조합 공장 농촌 등지에 들어가서 써클을 조직할 것, 공연시 노동자권을 발행할 것, 기술이나 경제 관계로 1막극만을 공연할 것 등 극단 활동 방침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창립 전후의 과정으로 보아 이동식소형극장은 김유영의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이미 카프에서 탈퇴한 상태에 있었던 만큼 카프 연극부와 이동식소형극장의 거리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앞의 김유영의 글이 발표된 ?시대공론?(1932년 1월호)에 나란히 발표된 전미력(全美屴)의 「푸로레타리아 미술의 개척―신흥미술가동맹 결성을 촉함」에 나오는 이동식소형극장에 대한 언급이다.

예술동맹의 ×××〔미술부-인용자〕와 적극적 행동에 불가능으로 푸로레타리아미술을 위한 집단이 아직 업다. 조선의 ××제도 전후……대중은 양해하여 주워야 된다. 여기서 단연 ‘신흥미술가동맹(新興美術家同盟)’을 작성하려고 제기한다. 신흥미술가동맹의 계통은 분 시일의 역사적 도정에서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돌파하여 대중 압헤 출현한 이동식소형극장의 성립이다. 동지(상세는 금일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한 바와 갓치) 金幽影 李孝石 兪鎭午 石一良 秋赤陽 李葉 崔貞熙(순서 不同) 외 수인으로 결합되여 소형극장의 창립과 연(連)해 ?시대공론(時代公論)?의 속간행(續刊行)과 (다음 호부터는 ?제삼선(第三線)?으로 개제)에 라……신흥미술가동맹 등……다갓치 밀접한 결합에……발양(發揚)되여 간다.(강조-인용자) ?시대공론?, 1932.1, 75면.


전미력은 이동식소형극장 장치부 부원인 김미남(金美男)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주장은 카프 ×××(미술부)의 활동 불가능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위한 집단이 없기 때문에 이동식소형극장에 뿌리를 둔 ‘신흥미술가동맹’을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전미력의 ‘신흥미술가동맹’ 조직론에 대해서는 최열, ?한국현대미술운동사?, 돌베개, 1991, 64면 참조.
 전미력이 과거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명명법을 그대로 이어 받은 ‘신흥미술가동맹’ 결성을 촉진하고 있고, 또 그 신흥미술가동맹이 이동식소형극장의 계통 조직이라고 하는 사실로 보아 이동식소형극장이 구 신흥영맹계의 맥을 잇고 있는 극단임이 분명해진다.
또한 뒤에 소위 ‘신건설사 사건’으로 프로 연극인들이 다수 검거되었을 때 이 이동식소형극장의 주도 멤버들도 함께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주목되는 것은 당시의 재판부가 김유영․추적양․석일량․이엽․최정희 등의 ‘이동식소형극장’ 조직건을 ‘카프사건’과는 별도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주지방법원 예심 판사 고야미일랑(高野彌一郞), 「카프사건 예심 결정문(1935.6.28)」, ?고등경찰보? 제1호, 64면.
    동일한 내용이 ?매일신보?(1935.10.28) 기사에도 보도되어 있다.
 이동식소형극장을 마치 ‘좌익 결사’인 것처럼 취급하는 재판부 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카프 연극부 및 극단 신건설과 별도로 이동식소형극장(극단 메가폰 포함)을 취급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동식소형극장의 계통이 카프 연극부와는 전연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해 주는 증거라 하겠다.
이동식소형극장은 1932년 2월경에 함흥의 이동극단인 ‘동북극장(東北劇場, 1932.2)’ ?동아일보?, 1932.2.18, ?조선일보?, 1932.2.19.
의 김승일(金承一)․김형용(金形容)이 새로 가입하고, 기존의 멤버 가운데서는 김유영․최정희․김미남 등이 탈퇴하는 것을 계기로 내부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김유영이 탈퇴함으로써 카프 연극부와의 대립 의식이 약화되고, 어느 정도 친화성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순회 공연을 마친 후 이동식소형극장은 자진 해소 ?조선일보?, 1932.5.25.
하고 극단 ‘메가폰’으로 재출발하게 된다. ?조선일보?, 1932.5.25, ?동아일보?, 1932.5.28.

사무소를 경성부외 아현리 명화관에 둔 극단 메가폰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書記局  金形容, 秋赤陽
脚本部  宋影, 兪鎭午, 金形容
演出部  申讚, 秋赤陽
裝置部  秋赤陽, 李相春
演技部   羅鐵
舞臺監督  金承一 ?동아일보?, 1932.5.28.


기존의 멤버 가운데 과거 신흥영맹계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기성 영화계의 배우들이 대거 탈락하고, 대신 김승일과 김형용이 새로이 간부에 선임되었으며, 거기에 송영․이상춘․신고송 위의 신찬이 곧 신고송이다. 그는 1931년 일본 동지사 및 코프 조선협의회에서 활동한 후 1932년 3월경 귀국하였으며, 귀국해서는 ?연극운동?의 발간에 주력하였고, 1932년 5월에는 카프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동지사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박영정, 앞의 글, 참조.
․나웅․신영 등 카프 연극부 관계자들도 대거 진출하고 있다. 극단 메가폰은 비록 그 전신이 이동식소형극장이라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면면으로만 본다면 카프 연극부의 직계 극단에 가까운 단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메가폰의 창립에 카프 연극부원들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신고송의 귀국과 함께 오랜 숙원이던 기관지 ?연극운동?의 발간 ?조선일보?, 1932.3.2, 1932.4.28, 1932.7.9.
이 이루어지고, 그를 계기로 카프 연극부가 연극운동의 전국적 통일을 위한 구체적 활동을 개시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 4월 이래 과제로 제기되어 있던 카프 연극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동맹’ 결성을 향한 구체적 발걸음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2년 전의 신흥영맹에 대한 카프 영화부의 배격 방침과는 달리, 이동식소형극장에 대한 카프 연극부의 대응에서는 ‘동반자의 획득’ 문제와 관련되는 방침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박태양이 극단 메가폰 출발 전후의 카프 연극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고 하겠다.

이 극단〔메가폰-인용자〕의 전신은 ‘이동식소형극장’이다. 이 이동식소형극장은 북선 지방공연에서 상당한 성과를 엇고 귀경하자 그 극단의 지도격에 잇든 악평 놉흔 좌익 탈락자 김×〔유〕영은 드듸여 숨길 수 업는 반동의 마각을 들어내게 되엿다. 그리하야 동 극단의 멘버는 이에 반대하야 그를 내여 고 다시 진영을 정돈하고 나온 것이 ‘극단 메가폰’인 것이다. 이 극단은 당초부터 현재 조선에 잇서서 프로레타리아연극의 실천을 짐지고 잇는 캅프 연극부와는 하등의 연락이 업시 결성되엿든 것이다. 캅프 연극부의 동지 신고송이 거기에 손을 대기 시작하게 된 것은 동 극단의 제1회 공연시엿든 것이다. (나는 이와 관련하야 연극운동 영역에 잇서서 동반자 문제를 가장 빗나게 해결하엿다는 것을 말할나고 하엿스나 그만 둔다.) 상기한 곳에서 본 바와 여히 ‘극단 메가폰’을 조직된 연극운동자들은 놉흐게 평가하여서 말하자면 좌익극 운동의 동반자적 지위에 잇섯든 것이다.(강조-인용자) 박태양, 「김광섭 군의 극단 제언을 박함」(상, 중), ?조선일보?, 1933.1.29, 2.14.


이렇듯 카프 연극부와 조직적으로 무관한 상태에서 이동식소형극장이 창립되고, 그것이 다시 극단 메가폰으로 재출발하였지만, 좌익연극의 ‘동반자’적 위치에 있는 극단으로 높이 평가해서 카프 연극부에서는 신고송을 중심으로 그와 결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프 연극부의 입장에서 보면 ‘동반자적 극단’의 위치를 가지고 있던 이동식소형극장에 대해, 배제가 아닌 포용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프로연극 진영을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을 구체화시킨 셈이다. 물론 그것은 1932년 5월에 재구성된 카프 중앙,80) 1932년 5월의 중앙위원회에서 신고송, 이찬, 강호 등이 신임 위원으로 선임된 것과 관련된다(?조선일보?, 1932.5.19).
 특히 신고송의 역할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극단 메가폰은 1932년 6월 8, 9 양일간 신고송 작 <메가폰>(슈프레히콜), 유진오 작 <박첨지>, 송영 작 <호신술>, 김형용 작 <지옥> 등의 레퍼터리로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가졌다. ?동아일보?, 1932.6.8.
 원래 10일까지 공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10일 밤 공연은 중지하고 지방 순회 공연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동아일보?, 1932.6.11.
 비록 이틀간의 공연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극단으로서는 처음으로 극단 메가폰이 서울에서 ‘중앙공연’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메가폰은 이후 인천 공연 ?동아일보?, 1932.6.27, 1932.7.2.
 후 내부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해산의 운명을 맞는다. 이로써 이동식소형극장으로 대표되는 신흥영맹계의 연극 활동도 막을 내리는 셈이다.
메가폰의 활동이 시들해진 데에는 또다른 원인이 있다. 그것은 1932년 8월 카프 연극부의 직계로 극단 ‘신건설(新建設, 1932.8)’ ?동아일보?, 1932.8.7.
이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연출부 신고송, 문예부 송영․권환, 미술부 이상춘․강호, 연기부 이귀례․박태양․신영․한호 등으로 조직된 극단 신건설의 멤버 가운데는 극단 메가폰에서 활동하던 멤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메가폰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메가폰의 활동이 위축되었다기보다는 극단 신건설로 재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출발이 가능했던 것은 극단 메가폰이 명목상으로는 이동식소형극장의 후신이었지만, 그 실질 내용에 있어서는 카프 연극부의 직계 극단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극단 메가폰은 이동식소형극장과 카프 연극부가 결합하여 당시의 프로연극운동을 조직적으로 통일해 나가는 과도기적 극단으로서의 위치를 갖는다 하겠다.

3) 극단 신건설과 카프 연극부

앞서 보았듯이 1932년 봄 동경에서 귀국하자마자 ?연극운동?의 발간을 통해 프로 연극 진영을 통일하고자 했던 신고송의 활동은 극단 이동식소형극장 및 메가폰과의 결합을 통해 그 징검다리를 마련하고, 마침내 1932년 8월 극단 신건설의 창립을 통해 서울에서의 프로연극 진영의 통합을 성취하게 된다. 극단 신건설이야말로 카프 연극부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연극운동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극단 신건설이 채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주도 멤버이던 신고송이 ‘?우리동무? 사건’85) 이 사건은 세칭 ‘?별나라? 사건’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신고송이 잡지 ?별나라?의 주간으로 잘못 알려져 붙여진 이름이며, 그가 사실은 ?연극운동?지의 주간이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수사 결과 사건 내용은 ?연극운동?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우리동무? 사건’이라 함은 신고송 등이 일본의 코프 조선협의회 기관지 ?우리 동무?를 국내에 배포하다 출판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고송은 이 사건으로 시인 이찬(李燦)과 함께 구속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금고 10월의 형을 받는다.
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극단 신건설의 활동도 일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고송의 구속 사유는 출판 관계로 인한 것이었지만,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극단 신건설의 활동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고송의 구속 이후 김태진․김승일․이상춘․강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정비하고 창립공연 준비에 들어간 것은 창립 이후 6개월째인 1933년 1월의 일이었다. 이 때의 극단 신건설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文藝部  朴太陽 金永俊 李鐸鎬
演出部  金兌鎭 邊孝植 李翰 羅雄 金承一
經濟部  朴太陽 李圭卨
裝置部  李相春 姜湖 秋赤陽 李斗星
宣傳部  李葉 鄭靑山 李圭卨
效果部  尹駿燮
照明部  姜湖 秋赤陽
出演部  南宮雲 邊碩 金承一 李葉 李圭卨 羅雄 具連壽 姜湖 崔泰峰 安鐵 李斗星 林正華 李相協 尹南影 秋赤陽 鄭靑山 朴琪燮 白世鐵 李貴禮 金順子 柳英玉 金海? ?조선일보?, 1933.1.7.


여기에는 당시의 프로연극계가 총망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카프 연극부 멤버는 물론이고, 이동식소형극장(메가폰) 및 청복극장 계열의 전 구성원이 모두 극단 신건설로 결집했던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카프 연극부의 주도권 아래 프로연극운동이 통일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앞절에서 살펴본 바 프로영화운동이 ‘동방키노’(1932.12)에 이르러 통일적 조직을 형성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동방키노와 극단 신건설은 구성원이 겹치기도 하고, 또 사무소까지 동일한 장소(장사동 198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긴밀한 연계 아래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악화되어 가는 객관적 정세를 무시하고 주관적 요인만 가지고 본다면, 카프의 영화부와 연극부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도약의 기본틀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절에서 본 강호의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1933.4)에서 제시된 카프 영화부의 조직 및 활동 방향을 그대로 이 시기 카프 연극부의 활동에 적용하여 보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즉, 카프 연극부의 독자적 활동의 강화를 통해 ‘연극동맹’ 및 ‘문화연맹’으로 나아가는 카프 재조직 작업이 이 시기에 이르러 극단 신건설의 존재로써 구체적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극단 신건설은 1933년 2월 세칭 ‘?연극운동? 사건’ 이는 중앙고보 격문 사건의 배후를 수사하다 우연히 발각된 것으로 처음에 ?연극운동?사에서 그 관계자가 검거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최종 재판 결과에 의하면 ‘?영화의 벗? 사건’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이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박영정, 「연극운동 사건에 대한 재검토」, ?민족극과 예술운동? 10, 1994.여름, 110~127면 참조.
이 발생해 이상춘․강호․김태진 등 주요 멤버가 구속됨으로써 또다시 일시 정체를 겪게 된다. 즉, 이 사건으로 1933년 2월 이상춘․강호․김태진․나웅․추적양 등 카프 연극부와 영화부의 주요 멤버가 구속되었다가, 3월의 기소 과정에서 나웅과 추적양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이상춘․강호․김태진의 3인만 기소되었으며, 다시 8월의 예심 재판에서 신고송․이찬의 ‘?우리동무? 사건’과 병합심리되어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이상춘 1인만 면소되고 나머지 4인은 8월(이찬, 강호, 김태진)에서 10월(신고송)의 금고형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신고송․강호․김태진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1933년 후반에서 1934년 전반에 이르는 극단 신건설의 활동에서는 이상춘과 나웅 등이 중심축을 형성하게 되며, 극단 신건설은 1933년 11월 창립 1년 3개월 만에 비로소 창립 공연 ?조선일보?, 1933.11.8.
   이 공연에서 나웅은 연출을, 이상춘은 무대장치를 맡았다.
을 성취하게 된다.
이후 1934년 2월 카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에 의해 카프의 문화연맹으로의 재조직 작업이 구쳬화됨에 따라 카프 연극부는 사실상 연극동맹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에 카프 연극부는 나웅․이상춘․김욱(金旭)․고영(高英)․홍구(洪九)의 5인으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상설적 사무기관으로 서기국을 두어 그 책임자로 이상춘을 선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카프 재조직의 구체화에 따라 개인만이 아니라 극단 등 연극 단체가 직접 카프 연극부에 가맹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며, 그 가입 여부를 카프 중앙이 아닌 연극부 자체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여 독립성도 ‘연극동맹’ 수준만큼 강화된다. 카프 서기국, 앞의 글, 6면.
 각 장르 부서별 독립성 강화를 통한 동맹 조직으로의 전환과 각 장르별 동맹 조직을 토대로 한 카프의 연맹으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재조직 작업이, 1930년 4월 처음 제기된 이래 4년 만에 그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앞서의 청복극장은 물론이려니와 극단 신건설도 카프 연극부의 ‘직계 극단’이기는 했지만, 조직론적으로 ‘직속극단’은 아니었다. 그것은 카프 연극부의 조직 성격이 극단을 하부 구성원으로 하는 ‘연극동맹’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조직론적 미비점이 1934년 2월에 이르러서 비로소 해결된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카프 연극부 집행위원 나웅의 「연극운동의 신단계-캅푸 연극부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야」(1934.3) ?조선중앙일보?, 1934.3.21~3.30.
가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웅은 이 글에서 과거의 카프 중앙이 지닌 종파적이고 섹트적인 편향에 대한 엄정한 자기비판을 전제로, 프롤레타리아 전문극단 및 자립극단에 대한 연극부의 통일적 방침의 수립, 소부르주아 출신의 동반자 문제 해결을 통한 다수자 획득의 방침 등을 자신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신건설사 사건’ 직전의 카프 연극부는 ‘연극부’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그 실질에 있어서는 ‘연극동맹’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프 연극부(이상춘)의 산하에 중앙극단 ‘신건설사’(김형갑), 평양극단 ‘신세기(新世紀)’ 평양의 프롤레타리아극단인 마치극장의 개명 ‘명일극장(明日劇場)’이 해산된 후 그 후신으로 조직된 극단으로, 20여 명의 동인이 창립대회를 마치고 ?연극선(演劇線)?이라는 잡지까지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조선중앙일보?, 1933.9.5).
, 함흥극단 ‘북방무대(北方舞臺)’ 1933년 12월 함흥에서 김승일, 김형용, 이규설 등이 중심이 되어 20여 명의 단언으로 조직된 극단이다(?조선일보?, 1933.12.20).
, 해주극단 ‘공장’ 해주연극공장을 말한다.
, 대구극단 ‘가두’ 대구의 ‘가두극장’을 말한다.
 등의 다섯 극단을 정식으로 가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6, 192면.
 다만 이러한 체제 정비를 갖춘 시점에서 곧바로 ‘신건설사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극단 신건설은 물론이고, 카프 조직 전체가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연극동맹’으로서의 카프 연극부가 미처 가동도 되기 전에 활동 중단을 맞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1935년 5월 카프가, 6월 극단 신건설이 경찰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카프와 카프 연극부는 조직과 활동에 있어서 말그대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카프는 1935년 5월 28일, 극단 신건설은 1935년 6월 5일 동대문서에 해산계를 제출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35.6.5, 1935.6.6).


4. 맺음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1930년대의 프로연극은 1930년 4월 카프 연극부가 설립되는 것을 전후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여러 프로극단이 창립되면서 그 활동이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프로극단이 동경의 무산자극장과 카프 연극부의 영향 또는 지도 아래 조직되었지만 이동식소형극장의 경우는 그와 다른 조직적 맥락에서 출발하였다. 카프 연극부의 직계에 속하는 극단으로 청복극장과 우리들극장이 있고, 그 방계 극단으로 가두극장과 대중극장, 마치극장 등이 있음을 보았다. 한편 카프 연극부보다는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조직적 뿌리를 두고 있는 이동식소형극장이 창립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다시 극단 메가폰을 경과하면서 양대 세력의 통합극단인 극단 신건설에 이르게 되었음도 살펴보았다.
카프 연극부의 입장에서 프로연극의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면, 애초 프로연극의 통일적 지도를 염두에 두고 출범하였지만, 카프 중앙(1930년 4월)의 헤게모니를 앞세운 종파적 조직론 때문에 프로연극의 전국적 통일 노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카프 중앙과 대립하는 이동식소형극장이라는 극단이 나오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프 중앙의 이러한 태도는 1932년 5월 재편을 계기로 변화하게 되며, 특히 신고송을 중심으로 하는 카프 연극부의 실천 방식의 변화에 힘입어 카프 연극부가 프로연극의 전국적 통일을 위한 구심점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극단 메가폰에 카프 연극부원이 다수 참여한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프로연극계의 통합극단으로서의 극단 신건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의 극단 신건설이 출범함으로써 1934년의 ‘연극동맹(안)’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프로연극의 조직적 통일을 기하고자 했던 카프 연극부의 목표가 1932년 극단 메가폰을 분기점으로 하여 ‘연극동맹’의 형태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와 같이 카프 연극부를 중심으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극단들의 조직 관계를 개관해 봄으로써,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이 ‘연극동맹’을 목표로 하는 전국적 통일 과정이라는 일정한 흐름을 지니고 전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카프 연극부와 여타의 프로극단들의 관계에 대한 계열화의 시도를 통해, 그동안 모든 프로극단을 동일한 성격을 가진 집단으로 뭉뚱그려 인식하던 데서 한걸음 나아가 그들 내부의 갈등이나 성격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찰을 바탕으로 각각의 프로극단 및 그들의 공연 활동이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평가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일지사, 1976
박영정, 「일제강점기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3, 태동, 1993
박영정, 「연극운동 사건에 대한 재검토」, ?민족극과예술운동? 10호, 1994.여름
  양승국, ?한국근대연극비평사 연구?, 태학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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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순, 「한국 초창기 프롤레타리아 연극 연구」, 단국대 석사논문, 1991
최  열, ?한국현대미술운동사?, 돌베개,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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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효, ?조선 연극사 개요?, 국립출판사, 1956

조선일보 사람들 - 김동인 편

2012.12.1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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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

 

 

“기자 생활은 수절 과부의 서방질” ― 김동인

 

 

작가 김동인(金東仁)은 대단한 독설가였다. 특히 기자로 ‘변절’한 문인들에게 그는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며 “(그의) 작품은 한낱 인도주의를 과장한 문자의 유희에 멈췄을 뿐”(조선일보 1929년 7월 28일)이라고 비난했다. 역시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 주요한에게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주요한에게 신문사를 그만두고 시인으로 돌아가라며 “이것은 나의 권고인 동시에 조선문예 애호가를 대표한 나의 명령이다”(조선일보 1929년 12월 3일)라고 했다.

 

그런 김동인이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한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직장생활을 한 것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훗날 기자 생활을 한 것에 대해 “과부의 서방질이나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도 창필하게 생각하는 바이다”(<문단 30년의 자취>)고 했다.

 

그가 학예부장으로 재직한 기간은 40일에 불과했다. 그가 입사했을 때 편집국장은 그가 비난해 마지않던 주요한이었다. 그의 맏형 김동원은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할 때 ‘조선일보 발기인회’ 창립위원을 지내고 취체역(이사)으로 재직 중이었다. 김동원은 폐간 때까지 재직한 뒤 광복 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김동인은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하루 두 편의 신문소설을 썼다. 그는 일찍이 대중의 흥미를 고려해야 하는 신문소설을 쓰는 일은 문학을 배반한 ‘훼절(毁節)’ 이라면서 “생활을 위하여 드는 문필은 자기를 굽히고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신문소설을, 그것도 하루에 두 편씩이나 쓰는 일은 자신의 말대로 “수절하던 과부가 생활문제로 서방질하는 것과 같이 비장한 결심”이 아니면 안 되었다. 

 

 

   

▲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직후 40일 간 학예부장을 지낸 김동인. 그는 독설가에다 고집이 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김동인이 입사했을 때는 조선일보가 1933년 4월 26일 ‘혁신 기념호’ 100만부를 발행하면서 새롭게 출발하던 순간이었다. 김동인이 관장했던 학예부는 5면 가정·아동란과 9면 학예면을 맡았고, 그는 5면과 9면에 각각 다른 작품을 동시에 연재했다. 4월 26일자 5면에는 ‘김동인’이란 이름으로 단편소설 <적막한 저녁> 1회가, 9면에는 ‘금동(琴童)’이라는 필명으로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 1회가 실렸다.

 

김동인은 “하도 총망스러운 신문사 일”을 해 가며 남는 시간에 이 소설들을 썼다. 그의 아내 김경애에 따르면 그는 연재물 두 회분을 30분 내에 쓸 정도로 글을 빨리 썼다(《만국부인》 1932년 10월). 그러나 아무리 속필이라 해도 학예부장 업무를 처리하며 소설 두 편을 매일 쓴다는 일은 무리였다. 장편 <운현궁의 봄>은 그의 재직기간 동안 9회밖에 나오지 못했다. 4~5일마다 한 편씩 게재된 셈이다. 때문에 좀 성실하게 연재하라는 독자들의 편지를 자주 받았다.

 

그는 의욕적으로 학예부를 운영했다. 가정란과 어린이난을 확충하고 학예면에 독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넓혔다. 혁신 기념호에서 그는 학예부 명의로 “마감 기일도 특별히 없고, 길고 짧기도 당신의 자유이며, 그 문체도 할 수 있는 대로 한글로 한다는 이외에는 제한이 없으며, 지상 익명도 또한 당신의 자유”라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조건을 내건 원고모집 공고를 냈다.

 

이어 5월 2일자 1면에 <신인을 구한다. 천재여 오라>는 제목으로 상금 1000원을 내건 연재소설 현상모집 공고를 실었다. 상금 1000원은 매년 쌀 10석을 추수하는 논을 살 수 있는 금액으로 우리 나라 신문 사상 초유의 상금 액수였다. 14일자 학예면은 신문소설 연구 특집호로 꾸려졌는데, 이때 그는 <신문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나>라는 글을 썼다.

 

그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한 성격 때문에 신문사 안팎에서 미움을 많이 받았다. 동료 문인들은 그를 “조선문단에 독립불기(獨立不羈,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음)의 괴물”(최서해)이라거나 “오만한 천재”(박종화)로 불렀다. 

 

 

   

▲ 김동인의 캐리커처. 안석주가 그린 것으로 조선일보 1933년 1월 12일자에 실렸다. 

 

 

한번은 소설을 발표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던 카프 회원 박승극으로부터 <농민문학론>이라는 원고를 받았다. 김동인은 그것을 읽어 보지도 않고 던져 버렸다. 며칠 뒤 편집국장 주요한이 왜 그 원고를 싣지 않느냐고 채근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필자로부터 직접 항의를 받았지만 그는 끝내 게재하지 않았다. 이후 박승극과는 원수지간이 되어 몇 년 동안 그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했다.

 

김동인은 편집국장 주요한과 소설가 추천 문제로 의견충돌을 빚어 퇴사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실을 연재소설 작가로 이태준을 추천했다. 그러나 주요한은 “어떤 간부가 채만식을 추천한다”며 며칠 뒤 채만식의 소설 <인형의 집을 나와서>를 가져와 “고칠 데를 고쳐 주라”며 건넸다. 김동인은 채만식의 원고를 “여러 군데 빡빡 말살을 하여 도로 내 주고” 조선일보를 나와 버렸다.

 

조선일보 재직 동안 김동인에게는 “한두 가지의 유쾌한” 일도 있었다. 소설가 이기영의 발견을 꼽을 수 있다. 어느 날 편집고문 문일평이 그를 찾아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김 선생, 미안한 청탁이 하나 있는데요. 내 어떤 친구가 이즈음 생활이 아주 곤란한 모양인데, 그 친구가 소설을 하나 썼노라고 그것을 조선일보사에서 사 주면 해서 그러는데요…….”

 

문일평은 이기영이 한 잡지에서 김동인에 대해 안 좋은 비평을 한 적이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김동인은 그런 일은 일일이 기억도 못 하니 우선 원고를 보자고 해 작품 <서화鼠火(쥐불)>를 받았다.

 

“나는 그때 민촌(이기영의 호)이란 이름은 ‘살인 방화’ 식의 좌익 작가로 기억하고 있더니만치 또 여전히 ‘살인 방화’ 식 소설이려니 하여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문일평에 대한 대접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 《문단 30년의 자취》

 

예상과는 달리 이기영의 소설은 일반 좌익 작가들의 작품 이상이어서 그는 약간의 가필을 해서 조선일보에 싣기 시작했다. <서화>는 김동인이 그만둔 후에도 계속 연재됐다. 임화는 <서화>에 대해 “우리들의 소설의 새로운 보다 높은 달성의 지점을 지시하는 새로운 표주(標主, 푯대)”(조선일보 1933년 7월 19일)라고 극찬했다. 이 작품에 이어 이기영은 당대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이라 평가되는 장편소설 <고향>을 조선일보(1933년 11월 15일~1934년 9월 21일)에 연재했다. 이기영은 나중에 월북했고, 그의 며느리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 부인이 되어 김정남을 낳았다.

 

김동인은 또 하나의 보람으로 작품 발표의 장을 찾지 못하고 참담한 생활을 이어가던 좌익 문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점을 들고 있다. 그는 “단 몇 푼이라도 지불해서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들에게 점심 한 그릇 값이라도 내어 주기 위하여 늘 경리측과 다투었다”고 했다.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약 한 달 후인 1933년 6월 28일, 김동인은 재직 시절에 연재하다 중단했던 소설 <운현궁의 봄>을 조선일보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사장 조만식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와 파격적인 원고료를 제시하며 계속 집필해 줄 것을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운현궁의 봄>을 한꺼번에 완결해서 써 주고 원고료 600원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김동인은 자신의 처지를 ‘백초(白貂, 흰 담비)’에 빗대어 자조적으로 설명했다.

 

“백초는 자기의 털의 순백한 것을 몹시 사랑하고 아껴서 절대로 진흙밭이나 털을 더럽힐 곳은 통행을 안 하고 돌림길을 하여서라도 그런 곳을 피하며, 앞에 더러운 곳이 있고 뒤에 사람이라도 쫓아오면 사람에게 잡히기를 감수할지언정 털 더럽힐 곳은 안 가지만 어쩌다가 실수해서 조금이라도 털을 더럽히면, 그 뒤에는 자포가 되어 스스로 더러운 곳에 함부로 뒹굴러 온통 전신을 더럽힌다 한다. 통속소설로 일단 절(節)을 굽힌 뒤에는 나는 청결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쓴다.” ― 《조광》 1939년 12월

 

1930년대 중후반 그는 극도의 신경증으로 집필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러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주요한의 회고에 의하면 이 무렵 그는 아무 말 없이 한 시간 이상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하고 병을 치료한다고 인왕산 바위에서 일광욕을 해서 까맣게 타서 다녔다. 1938년 그는 정신착란 상태를 겪었다. 약물중독 상태에서 총독부 관리가 옆에 있는 것을 모른 채 한 말이 천황모독죄에 걸려 약 반 년 간 헌병대에서 옥살이를 했다.

 

1939년에는 자진해서 총독부에 찾아가 황군 위문 작가단에 끼워 달라고 부탁해 중국 북경 근방의 전선을 시찰했다. 김동인은 이 무렵 기억상실증과 심한 난독증(難讀症)으로 거의 1년 간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다시 당국에 찾아가 “지난날의 기억을 다 잃었으니 다시 한 번 전선을 시찰하고 싶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 천황 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이다” (매일신보 1942년 1월 23일)는 글도 썼다.

 

광복 후에는 ‘민족적인 것’에 집착하며 좌익을 규탄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1948년 다시 글씨를 정상적으로 쓰지 못하고 가족을 분별하지 못하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동인은 6·25 당시 운신을 전혀 못 해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홀로 남겨졌다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했다.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는 현대 문학의 선구자 김동인을 추념하고 문학발전에 기여하고자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1967년 사상계사의 운영난으로 중단됐다가 1979년 동서문화사에 의해 부활됐고 1987년 제18회부터는 조선일보사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1995년 11월 김동인의 미망인 김경애는 “남편을 뛰어넘는 소설가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며 집을 판 돈을 동인문학상 운영위원회에 기증했다. 아들 김광명은 한양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인문학상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 책 『조선일보 사람들』 중 발췌 p.318~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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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文壇) 30년의 자취
저자: 김동인
출전: <新天地>[신천지], 1948.3~1949.8

신천지 1948년 3월(통권 24호, 제3권 제3호) 1948-03-01 文壇30年의 자취 金東仁 목차제공
2 신천지 1948년 4·5월(통권 25호, 제3권 제4호) 1948-04-01 文壇30年의자취(3) 金東仁 목차제공
3 신천지 1948년 6월(통권 26호, 제3권 제5호) 1948-06-01 文壇30年의 자취(3) 金東仁 목차제공
4 신천지 1948년 7월(통권 27호, 제3권 제6호) 1948-07-01 文壇30年의 자취(4回) 金東仁 목차제공
5 신천지 1948년 9월(통권 29호, 제3권 제8호) 1948-09-01 文壇30年의 자취(5回) 金東仁 목차제공
6 신천지 1948년 10월(통권 30호, 제3권 제9호) 1948-10-01 文壇30年의자취(6) 金東仁 목차제공
7 신천지 1949-01-01 1949-01-01 文壇 30年의자취(8) 金東仁 목차제공
8 신천지 1949년 2월(통권 33호, 제4권 제2호) 1949-02-01 文壇30年의자취(90 金東仁 목차제공
9 신천지 1949년 7월(통권 37호, 제4권 제6호) 1949-07-01 文壇30年의자취(11) 金東仁 목차제공
10 신천지 1949년 8월(통권 38호, 제4권 제7호) 1949-08-01 文壇30年의자취(終) 金東仁 목차제공
11 신천지 1949년 11·12월(통권 41호, 제4권 제10호) 1949-12-01 文壇30年의자취(7) 金東仁 목차제공

 

 

 

1918년 12월 스무닷샛날 밤이었다.

일본 동경 本鄕[본향]에 있는 내 하숙에는 나하고 朱耀翰[주요한]하고가 화로를 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파우리스타의 커피 시럽을 진하게 타서 마시면서 그날 저녁(한두 시간 전)에 동경 유학생 청년회관에서 크리스마스 축하회라는 명목으로 열렸던 유학생들의 집회에서 돌발된 사건 때문에 생긴 흥분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서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에 꽃이 피었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겨우 8, 9년, 아직 그 날의 원통함과 분노가 국민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더우기 선각자요, 지도자로 자임하고 있던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애국지사적 기분이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포부가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깊이 새겨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 歐洲大戰[구주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인류에게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제창하였다.

한 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사로서 결정될 것이지 어떤 강력한 국가의 실력으로 좌우될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어떤 국가로서 그 나라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강국에게 먹히운 자가 있다면 그런 무리한 실력주의는 배제하고 그 민족의 자유의사 로서 그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력이 부족하여 일본에게 병합된 한국이라, 이 기회에 윌슨 대통령의 제창에 따라서 한국은 마땅히 그 국권을 회복해야 된다는 부르짖음이 동경 유학생(선각자로 자임하는) 새에 부르짖어졌고,

그 날(1918.12.25) 크리스마스 축하를 핑계삼아 청년회관에 집회하여서 거기서 드디어 커다란 결의까지 한 것이었다.

즉 3․1운동의 씨가 그 밤에 배태된 것이었다. 운동을 진행시킬 위원을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內地(일본)와 연락할 방도를 토의하고 헤어진 것이었다.

요한과 나는 거기서 헤져서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커피 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함께 내 하숙으로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들 새에는 아까의 집회의 이야기가 사괴어졌다.

그 집회에서는 徐椿[서춘]이 우리(요한과 나)에게 독립선언문을 기초할 것을 부탁했었지만, 우리는 그 任[임]이 아니라고 사퇴(뒤에 그것은 春園[춘원]이 담당했다)했었는데 사퇴는 하였지만 내 하숙에서 마주 앉아서는 처음은 자연 화제가 그리로 뻗었었다.

처음에는 화제가 그 방면으로 배회하였었지만 요한과 내가 마주 앉으면 언제든 이야기의 종국은 ‘문학담’으로 되어 버렸다.

“정치 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

이야기는 문학으로 옮았다.

막연한 ‘문학담’‘문학토론’보다도 구체적으로 신문학운동을 일으켜 보자는 것이 요한과 내가 대할 적마다 나오는 이야기였다.

이 밤도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로 뻗었다. 그리고 문학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同人制[동인제]로 문학잡지를 하나 시작하자는 데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진전되었다.

200원이면 창간호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매호 100원씩만 추가하면 계속 발간할 수 있다는 요한의 말에 그러면 그 자금은 내가 부담하기로 하고 자금도 자금이려니와 손맞잡고 일해 나갈 동인을 고르자 하여 늘봄(長春[장춘] 田榮澤[정영택]), 흰뫼(白岳 金煥[백악 김환]), 崔承萬[최승만] 등을 우선 내일이라도 찾아가서 동인되기를 권유하고 장차 孤舟 李光洙[고주 이광수]를 끌어넣고 그때는 이 땅에 어찌도 엉성한 지 이 이상 동인 될 만한 인물을 찾아내기조차 힘들었다.

잡지의 이름은 <創造[창조]>라 하기로(처음에는 요한이 <창조>는 종교 내 음새가 있다고 약간 반대하였지만)하고 밝는 날 곧 평양 어머님께 전보쳐서 창간비 200원을 청구하기로 하고, 둘(요한과 나)이서 내 하숙집 자리에 든 것은 새벽 다섯시도 지나서 우유배달 구루마의 소리를 들으면서였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서 요한과 나는 하숙에서 함께 조반을 먹고 아 오야마(靑山[청산])의 전영택을 찾으러(동인되기를 청하러) 내 하숙을 나섰 다.

우편국에 들러서 200원 보내달라고 전보를 어머님께 치고 아오야마의 전영 택을 찾아서 함께 김환을 방문하고 다시 최승만을 방문하여 모두 동인되마 는 쾌락을 듣고 요한, 전영택, 나 셋이서 어떤 양식점에 들러서 함께 런치 를 먹을 때, 우리들의 기쁨과 흥분으로 떠드는 이국말 소리에 다른 객들은 놀라는 눈을 우리에게 던졌다.

―이리하여 4천 년, 이 민족에게는 ‘신문학’이라는 꽃이 그 봉오리를 벌 리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은 모르지만 한문이 이민족의 글로 통용되며 모방 한문학으로 민족 의 문학욕을 이렁저렁 땜질해 오던 이 민족에게 그 ‘문학 갈증’의 욕구에 대응하고자 우리 몇몇 젊은 야심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는 ‘3․1운동’의 실마리가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 이 1918년 크리스마스 저녁이요, 민족 4천 년래의 신문학 운동의 봉화인

<창조> 잡지 발간의 의논이 작정된 것이 또한 같은 날 저녁이었다.

뿐더러 그 <창조> 창간호가 발행된 1919년 2월 8일은 또한 ‘3․1운동’의 전초인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문’ 발표의 그 날이었다.

조선 신문학 운동의 봉화는 기묘하게도 3․1운동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 요한도 동갑으로서 내가 요한보다 한 달인가 두 달 먼저 났다.


민족의 역사는 4천 년이지만 우리의 문학의 유산을 계승받지 못하였다. 우 리에게 상속된 문학은 한문학이었다.前人[전인]의 유산이 없는지라, 우리가 문학을 가지려면 순전히 새로 만들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문학 가운데서도 나는 ‘소설’을 목표로, 요한은 ‘新詩[신시]’를 목표 로 주춧돌을 놓고서 그 자리를 골랐다.

문학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자이라, 우선 그 문장에서 소설이면 소설용어, 시면 시용어부터 쌓아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30년 전의 일이요, 오늘날은 벌써 소설이며 시에 대하여 그 용어의 스타일이며 본때가 확립되어 있어서 오늘날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은 그 방면의 고심이라는 것은 아주 면제되어 있지만 지금에 앉아서 보자면 평범 하고 당연한 ‘문장’도 처음 이를 쓸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고심과 주저라 는 관문을 통과하고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다. 우선 문장의 구어화였다.

<창조> 이전에도 소설은 대개 구어체로 쓰여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구어’라는 것이 아직 문어체가 적지 않게 섞이어 있는 것으로서 ‘여사 여사 하리라’‘하니라’‘이러라’‘하도다’등으 구어체로 여기고 그 이 상 더 구어체화 할 수는 없는 것으로 여기었다. 신문학의 개척자인 춘원 이 광수의 소설을 볼지라도 <창조>가 구어체 순화의 봉화를 들기 이전(1919년 이전)의 작품들을 보자면 (「無情[무정]」이며 「開拓者[개척자]」등) 역시 ‘이러라’‘하더라’‘하노라’가 적지 않게 사용되었고, 그 이상으로 구 어체화 할 수는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창조>에서 비로소 소설용어의 순구어체가 실행되었다.

‘구어체’화와 동시에 ‘過去詞[과거사]’를 소설용어로 채택한 것도 <창 조>였다. 모든 사물의 형용에 있어서 이를 독자의 머리에 실감적으로 부어 넣기 위해서는 ‘現在詞[현재사]’보다 ‘과거사’가 더 유효하고 힘있다.

‘김 서방은 일어서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하는 것보다 ‘김 서방은 일어섰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하는 편이 더 실감적이요, 더 유효하다 하여 온갖 사물의 동작을 형용함에 과거사를 채택한 것이었다.

<창조>를 중축으로 <창조> 이전의 소설을 보자면 그 옛날 한문소설은 무론 이요, 李人稙[이인직]이며 이광수의 것도 모두 ‘현재사’를 사용하였지 ‘과거사’를 쓰지는 않았다. <창조> 창간호에 게재된 나의 처녀작 「弱 [약]한 者[자]의 슬픔」에서 비로소 철저한 구어체 과거사가 사용된 것이었 다.

또한 우리말에는 없는 바의 He며 She가 큰 난관이었다. 소설을 쓰는데 소 설에 나오는 인물을 매번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최 아무개면 최 아무개라 고 이름을 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하여서 무슨 적당한 어휘가 있으면 쓰고 싶지만 불행히 우리말에는 He며 She에 맞을 만한 적당한 어휘 가 없었다. He와 She를 몰몰아(성적 구별은 없애고)‘그’라는 어휘로 대용 한 것―‘그’가 보편화하고 상식화한 오늘에 앉아서 따지자면 아무 신통하 고 신기한 것이 없지만 이를 처음 쓸 때는 막대한 주저와 용단과 고심이 있 었던 것이다.

일본말의 ‘違[위]ひなかつた’를 직역하여 ‘틀림없다’‘다름없다’등으 로 처음 쓸 때의 그 어색함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느꼈다’‘깨달았다’등의 형용사를 갖는 의의와 전연 다른 방면에 활용 하여 재래의 우리말이 표현할 수 없는 특수한 기분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 다. 지금은 ‘느꼈다’‘깨달았다’등이 소설용어로는 보편화되었지만, 처 음 그 어휘를 쓸 적에는 도무지 틀에 맞지 않아서 스스로도 불안에 불만을 느끼면서(즉 이런 ‘느낀다’는 형용사) 쓴 것이었다.

지금 소설이나 시를 쓰는 후배들의 어느 누가 이런 방면의 고심을 하는 사 람이 있을까? 태고적부터 우리말에 이런 소설용어가 있었겠지쯤으로 써 나 아가는 우리의 소설용어―거기는 남이 헤아리지 못할 고심과 주저가 있었고 그것을 단행할 과단성과 만용이 있어서 그 만용으로써 건축된 바이다.

스무 살의 혈기. 게다가 자기를 선각자노라는 어리석은 만용― 이런 것들 이 있었기에 조선 소설용어의 주춧돌은 놓여진 것이다. 그 만용만 없었던들 소설 중에의 주춧돌은 튼튼히 놓여지지 못하고 3․1 전환기를 지내 군웅난립 의 세상을 만나서 소설용어는 혼란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3․1은 우리 민족 의 큰 전환기다. 3․1때에 旣成[기성]이던 사람은 ‘기성인’으로, 3․1 뒤의 사람은 ‘후인’으로, ‘기성인’은 ‘후인’에게 대하여 지도권을 잡았기 에 말이지, 3․1 때에 소설용어에 ‘기성 스타일’이 없었다면 3․1 뒤의 군웅 이 亂生[난생]하여 제각기 자기를 주장하여 천태만상의 소설용어 스타일이 생겨났을 것이다. He며 She에 대해서도, 3․1 후에 어떤 사람은 ‘저’‘저 여자’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궐’‘궐녀’를 주장하여 한동안 제 주장 을 고집하였지만, ‘그’라는 용어가 전기에 생긴 것이라 종내 ‘그’로 확 정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궐’‘궐녀’로 했던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궐’이란 용어가 미처 생각나지 않아서 ‘그’로 된 것이다.


< 창조> 창간호에 나는 「약한 자의 슬픔」이란 소설을 썼고 주요한은 「불 노리」란 시를 썼다. 그 전해(1918) 4월에 나는 결혼을 하였다. 양력 4월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음력 4월 8일 석가여래의 탄일에 평양에서는 수십 년래 쉬었던 큰 관등놀이를 하였다.

수십 년 못하였던 것이니만치 호화롭고 굉장하게 하였다.

새로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을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니 관등놀이 다. 처갓집에서는 사위맞이 축하 겸 큰 배를 한 척 구하여 뱃속 잔치 열고, 觀燈船[관등선]에 섞이어 유쾌한 한 저녁을 보냈다.

신혼, 잔치, 관등― 하도 마음이 기뻐 그 관등놀이의 굉장하고 훌륭함을 요한에게 말하였더니 거기서 名篇[명편]「불노리」의 노래가 생겨난 것이었 다. <창조> 창간호에는 요한의 시 「불노리」와 전영택의 소설, 최승만의 희곡, 내 소설 등으로 인쇄는 橫濱[횡빈](요꼬하마)에 있는 복음인쇄소에 맡겼다. ‘복음인쇄소’는 조선 성경을 인쇄한 곳이다. 조선글 활자는 충분 하였지만 직공이 조선글을 모르는 일본인이라, 글자 모양으로 보아서 문선 을 하느니만치 ‘号[호]’자와 못’자‘외’자와 ‘’자 등이 혼동되고 ‘’‘’등 아랫자는 넉넉하지만 ‘깔’‘생’등은 부족한 따위의 불편 이 여간이 아니었다.

자기의 글이 활자화되는 것만도 신통하고 신기한데 그것을 자기의 손으로 교정까지 보노라니 마음의 유쾌 만족은 이를 데 없었다. 자기의 글이 활자 화되고 그 활자화된 글을 또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교정보면서 고치고 싶은 데는 고치기도 하고, 진실로 유쾌한 일이었다. 「약한 자의 슬픔」의 원고(인쇄소에 넘겨서 인쇄하고 되돌아온)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군데군데 좀 먹은 채 내 손에 보관되어 있다.

제2호의 원고가 인쇄소로 넘을 때 창간호의 견본이 우선 왔다. 그리고, 2 월 초여드렛날 그 1천 부가 횡빈서 동경에 철도로 오기로 되어서 그 전날인 이렛날은 흥분되어 어서 명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리에 들었다.

여드렛날은 두 가지의 일이 있다. 하나는 무론 횡빈서 본사(김환의 하숙) 로 도착된 잡지를 보러 본사로 가는 일이요, 또 하나는 이 날 또 유학생의 모임이 청년회관에서 열리는데 거기도 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여드렛날 일찌기 일어나선 조반을 채근하여 먹고 막 나서려는데 웬 손이 찾아왔다.

은근히 내미는 명함을 보니 와까마쓰(若松[약송]) 경찰서 형사였다.

눈이 펑펑 내리는 이른 아침의 길을 형사와 동반하여 와까마쓰 경찰서로 갔다.

그 날 조선 여자도 한 사람 와까마스 경찰서로 불리어 취조를 받았다. 金 [김]마리안가 黃愛德[황애덕] 혹은 黃信德[황신덕]인가, 조선 학생 집회에 서 간간 보던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무슨 취조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요컨대 <창조> 창간 비용 으로 집에서 200원 갖다가 쓴 것이 학생의 신분으로는 큰 돈이라 무엇에 쓴 것이냐는 것이었다.

분명히 잡지 창간 비용으로 쓴 것이 판명되어 당일로 무사히 석방이 되었 다. 경찰에서 무사히 나와서 아오야마의 본사로 가서 거기서 비로소 유학생 독립선언 발표의 전말을 들었다.

동경 유학생과 일본 경찰의 투쟁의 막은 열렸다. 그로부터 유학생은 청년 회관 혹은 히비야 공원에 집합하여 일본 경찰을 상대로 연일 투쟁을 하였 다. 그 어떤날 히비야 공원에서 집회하였다가 경찰에서 해산을 당하고 몇몇 은 경시청으로 引致[인치]가 되었는데, 다른 10여 명 학생은 곧 다시 석방 되고 나와 李達[이달]이라는 학생이 하룻밤 검속을 당하였다.

그 사건이 <大阪朝日[대판조일]>과 <東京日日[동경일일]> 신문에 보도되어 집에서는 깜짝 놀라서 ‘어머님 병환이 위독하니 곧 귀국하라’전보를 내개 쳤다.

그 전보가 거짓 전보인 줄을 알 까닭이 없는 나는 깜짝 놀라서 주요한을 찾아서 <창조>의 뒷일을 부탁하고 그 날 밤차로 동경을 떠났다. 3월 초하룻 날이었다. 기차가 大阪[대판]을 지날 때에 기차에서 신문을 사서 보니 조선 서는 무슨 사건이 발발되었다.

그러나 큰 사건으로는 알지 않았다. 그 새 10년간 겪은 寺內[사내]와 長谷 川[장곡천]의 무단정치 아래서는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동경서도 그 새 한 것처럼 몇백 명씩 모여서 수군거리다가는 해산당하고 그런 일쯤이 있은 것으로 추측하였다.

下關[하관]서 연락선에 오를 때와 부산서 뭍에 내릴 때에 경계가 좀 심한 것은 느꼈지만 3․1의 그렇듯 크고 웅대하고 장쾌한 사건이 폭발되었으리라고 는 뜻도 안 하였다.

기차에서 비로소 윤곽을 짐작하였다. 뿐더러 이전 같으면 일본인인 기차 전무차장에게 벌벌 떨 시골 노인네가 전무차장에게 무슨 호령을 하는 광경 을 보고,

“아아 민족은 살았구나. 寺內[사내]의 총뿌리로도 민족의 혼은 죽이지 못 하였구나!”

하고 칵 눈물지었다.

기차가 경성을 지나면서 因山[인산] 구경 왔다가 3․1을 겪고 돌아가는 사람 에게서 비교적 정확히 3․1의 웅대한 멜로디를 들을 수 있었다.

기차에서 듣는 감격의 뉴우스에 도취되면서 평양까지 이르러 집으로 들어 갔다.

나는 열다섯 살까지의 소년 시기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친구가 없는 사람이 다. 본시 교제성이 없는 위에,‘나쁜 가정의 아이들과 사괴지 말라’는 교 육방침 아래서 자라니만치 소학교의 동창은 있지만 서로 가정으로 찾아다닐 만한 친구가 없다.

3․1의 국민자숙으로 거리도 쓸쓸하고 친구도 없고 집에 박혀서 책이나 읽을 밖에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 나의 아우가 제 동무들과 謄刷版[등쇄판]으로 격문을 찍어서 밤마 다 시내에 돌리고 있었는데 그 격문의 원고를 하나 초하여 달라 하므로 초 하여 주고 그 때문에 3월 스무엿샛날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로 감옥으로 꼭 석 달을 지내서 6월 스무엿샛날,

‘6개월 징역, 2개년 집행유예.’

라는 판결을 받고 다시 밟은 세상에 나와서 보니, 인쇄소에 넘기기만 하고 그 뒤를 관계치 못한 <창조> 제2호는 무론 인쇄는 다 되었지만 격변하는 세 태가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책을 본사에 가려두었다 하며, 본사에는 김환 혼자서 유숙하고 있고 전영택도 귀국해 있었고 주요한도 귀국하여 내 안해와 협력하여 무슨 격문을 하나 꾸며 시내에 돌리고 요한은 上海[상해] 로 피신을 하고, 바야흐로 일어서려던 조선 신문학은 3․1에 봉착하여 정돈상 태로 되어 있었다.

문학운동은 3․1에 봉착하여 동인은 산지사방하고 정돈상태에 있었지만, 시 민생활은 3․1 이전으로 복귀되어 시집갈 이 시집가고, 장가갈 이 장가가고 다시 평온한 원상으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3․1사건을 결국 寺內[사내] 총독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 이라고 하여 해군대장 齋藤實[재등실]이를 조선총독으로 내보내고 조선에 문화정치를 편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 齋藤實[재등실]의 문화정치의 배에 편승하여 조선에도 몇 개의 잡지와 민간 신문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출판을 목표로 하는 회사도 생겨났다.

그때 나하고 廉尙燮[염상섭]하고의 새에 논전이 한 번 벌어졌다.

당시에 <창조> 동인이라 하면 조선 문화계의 한 빛나는 존재로 되어 김환 도 <창조> 동인이 된 덕에 동경 유학생 기관 잡지 <學之光[학지광]>의 편집 위원 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풍(?)으로써 동경 조선인 YMCA의 기관 잡지 <現代[현대]>에 무슨 소설을 하나 썼다. 김환은 자기가 동인관계를 갖 고 있는 <창조>에 자기의 소설을 발표하고자 했지만 내가 그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하릴없이 <현대>에 발표한 것이었다. <현대>는 <창조> 동인인 崔承 萬[최승만]이 편집책임자였다. 그런데 그 <현대>에 실은 김환의 소설에 대 하여 염상섭이 비평문을 써서 <현대> 잡지에 보냈다. 그 염상섭의 비평문 가운데는,

‘내가 이전의 무슨 소설을 써서 <학지광>(동경 유학생 기관지)에 기고하였 더니 그 <학지광> 편집위원인 김환이 내 소설을 沒書[몰서]하였기에 김환은 얼마나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번 <현대>에 난 것을 보니 이 꼴 이다.’

하는 서두로 김환의 소설을 욕하였다.

그 서두문은 즉 감상문이라 편집원 최승만이 애전에 삭제하고 그 원문만을

<현대>에 실어주고 그 사정을 내게 편지로 알리었다.

나는 그때 문학에 대하여 청교도 같은 결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그러 니만치 김환의 소설은 <창조> 지상에는 싣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염상섭의 이 개인 공격적 비평을 문학의 모독이라 보아 성냈다. 그리고 상섭이 봉직 하고 있는 창간 초기의 東亞日報[동아일보]에 염상섭의 비평 태도를 공격하 는 글을 보냈다.

한 개 작품에 대하는 비평가는 그 작품의 작자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할 아 무 권한도 없고, 독자에게 대하여 그 작품의 호불호(즉 감상방법)를 설명하 는데 그치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에 변사의 지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에 염상섭이 김환의 소설을 비평한 것은,

‘이전 <학지광> 편집원 시대에 운운.’

하여 과거의 원혐을 들고 나왔으니 이는 불순한 비평이요, 따라서 廉[염]의 이번의 태도는 좋지 못하다는 나의 논지였다.

거기 대하여 염상섭은 같은 동아일보 지상에 대답하여 작품 비평가는 범죄 에 대한 재판관같이 그 작품을 쓰게 된 동기며 원인까지도 추궁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논전이 계속되는 그동안에 염상섭, 吳相淳 [오상순], 黃錫禹[황석우] 등이 ‘동인제’로 <廢墟[폐허]>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는 <창조>에 대하여 <폐허>가 생기고 ‘창조파’에 대한 ‘폐허파’가 생기게 되었다.

<창조>에도 이광수가 동인으로 가입하고, 吳天錫[오천석]이 들고 李一[이 일]이 들고, 새로 동인들이 늘면서 속간을 시작하였다. 그때 <창조>는 과연 문학청년들의 애모하는 푯대였다. <창조> 지상에 글 한 번 실어 보는 것을 큰 영예로 알았다. 朴×胤[박×윤]이 자기의 소설을 한 번 <창조>에 싣게 해 달라고 그 교환 조건으로 <창조> 한 호의 발간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소 청을 한다고 김환이 누차 조르므로 제5호인가 6호인가의 한 호 발간비를 부 담시키고 박×윤의 글을 한 번 실은 일이 있다. 또 方×根[박×근]도 그런 사정으로 한 번 싣기로 하였는데 그다지 신통치도 않은 소설을 두 회분을 써 왔으므로 하반부는 몰서하여 버렸다.

나의 그때의 작품도 돌아보면 하나도 신통한 것이 없었지만 자기 딴에는 걸작이라는 신념으로 썼다. 더우기 ‘그’라는 대명사며 순구어체와 과거사 의 ‘소설용어 방침’이 후배들에게 그냥 답습되어 조선 소설용어의 기준이 되는 것을 바라볼 때 스스로 만족감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문학을 대표하는 두 파― <창조>와 <폐허>는 그 칭호가 꼭 그들 의 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창조파’는 다 제 밥술이나 먹는 집 자제들로서 생활이 안정되니만치 자 연 창조적이요 명랑하고 생기발랄하고 용감하였다.

거기 반하여 ‘폐허파’는 폐허적 퇴폐 기분에 싸이어서 침울하고 암담하 고 보헤미안적 생활을 경영하였다.

이 ‘폐허파’의 퇴폐적 기분을 싫어하여 <폐허> 동인이던 金岸曙[김안 서], 金惟邦[김유방], 金彈實[김탄실] 등 몇 사람이 <폐허>를 탈퇴하고 <창 조>로 옮겨 왔다.

그런데 ‘폐허파’에는 스스로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근대문학을 대표 하는 花形[화형]은 ‘소설’인데 ‘폐허파’에는 소설작가가 없었다. 閔泰 瑗[민태원](牛步[우보])이 <폐허>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그는 통속작 가로는 3․1 이전의 사람이지만 끝끝내 통속의 역을 벗지 못했고, 오상순 (시), 황석우(시), 金萬壽[김만수](철학), 염상섭(평론) 등등으로 소설작가 가 없었다. <창조>에는 이광수가 있고 전영택이 있고 내가 있고 하여 조선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가 전부 모였고, 시로는 요한이 있고 김안서가 있고 오천석이 있고 하여 신시의 수령이 다 모여서 조선 문단은 <창조>로 대표하 였었다.

게다가 '창조파'에서 세운 소설용어 스타일이 조선 소설의 표준(이광수도 과거에 쓰던 문어체의 잔재를 아주 청산하였다)이 되었는지라, <창조>의 광 휘가 찬연히 빛나는 반비례로 <폐허>는 음울한 생명을 유지하다가 그나마 제2호를 간신히 발행하고는 폐간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창조>에서 엄이 돋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창조>를 일으켜 서 키운 주요한, 전영택, 내가 아직 그냥 살아서 이 문단의 일원으로 아직 그냥 움직인다 하는 것은 희유한 경사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당년 <폐 허>의 일원이던 염상섭이 소설가로 전향을 하여 그의 건필을 그냥 두르는 것은 이 또한 큰 경사이다.

복받은 조선 문단― 그 창시 때의 사람들의(폐허파와 창조파) 중요한 멤버 는 30년이 지낸 아직도 그냥 건재해 있다 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도 쉽지 않 을 경사이다.

<창조> <폐허>에 뒤달려 생겼던 바 <白潮[백조]>가 중요한 멤버의 거지반 을 저 세상으로 보낸 것(羅稻香[나도향], 玄憑虛[현빙허], 洪露雀[홍로작], 金浪雲[김낭운], 李相和[이상화], 盧子泳[노자영], 그 밖 여러 사람이 죽었 다)처럼 <창조> <폐허>의 원로들도 죽었다면 오늘날의 조선 문단은 얼마나 쓸쓸하랴.

이 희유의 경사를 스스로 축하하는 뜻으로 내가 과거 30년간 걸어온 문단 의 자취를 더듬어 보아서 그간 나의 주변에 일고 잦은 에피소드, 일화 등을 차례로 적어 보려 한다.

때때로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명예에 관계된 일도 없지 않을 것이고, 쓰 기 곤란한 일도 없지 않을 것이나 내가 죽으면 무덤 속에 감추어져 버릴 것 이 아까와서 모든 고장을 무릅쓰고 적어 보려 한다.

독자도 그 점을 미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文學[문학]과 나[편집]

나는 어찌하여 세상에 하고 많은 학문 중에서 문학― 문학 가운데서도 소 설을 목표로 길을 잡았는가? 그리고 또 어떤 길을 밟아서 1919년 (<창조> 잡지 발간)의 金東仁[김동인]까지 이르렀는가?

나의 아버지가 나를 일본 동경으로 공부하러 보낼 때는 당년의 세상 보통 의 어버이가 자식에게 촉망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장차 변호사나 의사가 되 기를 희망하였다. 이론 잘 캐고 경우 잘 따지는지라, 용한 변호사가 되리 라, 어려서부터 화학, 물리 실험에 능하였으니 의학자로도 용한 수완을 보 이리라, 하여서 의사나 변호사 되기를 기대하였다. 열다섯 살의 어린 몸으 로 청운의 뜻을 두고 만리 밖 외국에 공부하러 떠나는 나도 장래의 목표를 의학이나 법률에 두었다.

동경에서 주요한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요한은 그의 아버지가 동경 조 선인 유학생 선교목사로 동경에 주재하게 된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 나보다 1년 전에 동경에 와 있던 것이다.

본국서도 같은 소학교(중등학교의 전신인 예수교 소학교)에 다녔었다. 동 경의 요한을 만나니 요한의 말이 자기는 장차 ‘문학’을 전공하겠다 한다.

법률학은 분명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는 학문이다. 의학은 분명 의사가 되 는 학문이다. 그러나 문학이란 장차 무엇이 되며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어 떻게 생긴 학문인지, 그 윤곽이며 개념조차 짐작할 수 없는 나는 이 주요한 이 나보다 앞섰구나 하였다. 소년의 자존심은 요한보다 뒤떨어지는 자기 자 신이 스스로 불쾌하고 부끄러워서 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明治學院[명치학 원]을 피하고 東京學院[동경학원]에 들었다. 요한은 1년 전에 학교에 들었 는지라 그때는 벌써 명치학원 중학부 2학년이었다. 나는 새로 입학하려면 1 학년에 입학하게 되는지라 1년 뒤떨어진다. 같은 명치학원에서 요한보다 하 급생 노릇하기가 싫어서 동경학원 1학년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듬 해 동경학원은 왜인지 폐쇄되며 재학생들은 명치학원과 靑山學院[청산학원] 에 각각 분배 전학시키는 바람에 나는 저절로 명치학원으로 배정되어 요한 이 3학년 때에 나는 명치학원 2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동경학원 시절, 그러니까 아직 중학 1학년 때에 영작문 시간에 숙제로서, 1년생 정도의 영작문 한 편씩이 과제되었다. 나는 그때 영어에 매우 취미를 붙이던 때라, 내가 아는 영어 지식의 최선을 다하여 영어 노래 를 하나 지었다. 지금은 무론 그 내용도 잊었거니와 스펠까지 잊었지만 ‘튕클튕클, 리틀 스타’로 시작하여 몇 줄의 노래를 옥편을 뒤적이고, 참 고서를 뒤적이어 만들어서 내놓았더니, 선생이 보고 네가 지은 것이냐 묻기 에 내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더니 너는 장차 훌륭한 문학자가 되겠다고 칭찬 하여 준다.

나는 선생의 칭찬을 듣고 이런 것이 문학인가 하여 문학의 윤곽을 짐작했 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러나 문학자가 어떤 것인지, 문학자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나는 역시 장래 목표는 변호사나 의사에 두었었다.

동경학원은 이찌가야(市谷[시곡]) 육군사관학교 근처에 있었다. 하학하고 등에 조그만 가방을 진 학생(나는 열다섯 살 때까지는 유난히 작았다)은, 일부러 걸어서 아오야마(靑山[청산]) 연병장 뒤로 휘돌아서 연병장 어구에 있는 찻집에서 모찌(혹은 야끼이모) 2전어치를 사서 먹으면서 한가로이 나 까시부야(中澁谷[중삽곡]) 하숙까지 돌아오고 하였다. 공일날은 빠지지 않 고 아사쿠사(淺草[천초])에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는 제1차 구주전쟁이 시 작된 해요, 아메리카의 영화가 차차 불란서며 이태리 영화를 압도하여 세력 을 잡기 시작하는 초기이며, 탐정활극이 영화계의 주조였으며, 몇십 권짜리 연속 대장편이 등장하려는 무렵이요, 채플린의 한 권 두 권짜리 폭소 희극 이 영화계에 데뷰하는 무렵이요, 일본은 大正[대정] 난숙기의 꽃시절이었 다.

한 조그만 이름 없는 조선 소년은 공일날마다 아사쿠사 영화관(제국관, 전 기관 등의 양화 전문관만 다녔지 일본 영화는 보지 않았다. 일본 영화는 아 직 무대극의 구투 그대로 오노에<尾上松之助[미상송지조]> 독무대 시절이 며, 아직 여배우라는 것은 일본에 없던 태고시절이었다)에서 채플린에게 허 리를 끊기며 혹은 하리 핫취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리고 돌아올 때는 나까 미세 뒤에서 10전짜리 덴동(てんどん―튀김덮밥)에 혀를 채며 영화의 탐정 극에 공명과 고혹을 느낀 소년은 차차 탐정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떤 때 소년문학문고로 「비밀의 지하실」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그 제목이 탐정소설 같아서 사다가 읽어 보았다. 탐정소설이 아니었다. 코 롤렝코든가 누구든가 잊었지만, 노서아의 어떤 대가의 소설을 번역한 것이 었었다.

탐정소설은 아니고, 내용에 그다지 엽기적으로 끌리는 대목은 없지만, 그 작품 전체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맛과 무게와 힘은 분명히 어린 나의 마음 을 움직였다. 탐정소설은 아니고도, 그 작품에 끌렸다. 소설문학문고 전 7 권을 모조리 사다 읽었다.

탐정소설 아니고도 마음 끌리는 소설이 있구나, 비로소 소설에 흥미와 관 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연애라든가 남녀 관계에는 흥미를 모르는 소년이 었지만, 탐정이야기 아니고 연애이야기 아니고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이야 기가 있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큰 새 지식이었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것도 어언간 알았다.

―이리하여 차차 문학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보다 아래 들기 싫어서 서로 좀 소원하게 되었던 요한과 다시 가까이 사 괴고, 문학을 토론하고, 차차 문학으로의 정열이 높아 갔다.

동경 명치학원이란 학교는 조선 사람과는 매우 인연 깊은 학교다. 명치학 원 조선학생 동창회 명부를 보자면 朴泳孝[박영효], 金玉均[김옥균] 등이 그 첫머리에 씌어 있고, 내가 그 학교에 재학할 동안에도 白南薰[백남훈]이 5학년에 재학하였고, 文一平[문일평], 정광수도 명치학원 출신이요, 화백 金觀鎬[김관호]의 그림이 나 재학할 때도 그 학교 담벽에(김관호도 명치학 원 출신이다) 장식되어 있었고, 현재의 조선을 짊어지고 많은 일꾼이 명치 학원을 거치어 사회에 나왔다.

일본서도 시마자끼 도오손(島崎藤村[도기등촌]) 이하의 많은 문학자가 명 치학원 출신이라, 따라서 문학풍이 전통적으로 학생들에게 흐르고 있었다 (그 학교의 자랑인 교가는 시마자끼의 지은 것이다). 그러는 만치 3,4학년 쯤부터는 그 학년 학생끼리의 회람잡지가 간행되고 있었다. 3학년 때에 나 도 3학년 회람잡지에 소설 한 편을 썼다. 지금은 다만 썼었다는 기억밖에는 무슨 소리를 썼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이 일본문으로 쓴 소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처녀작이다.

음울하고 교제성 없기 때문에 너 일본말 아느냐, 교수하는 말 알아듣느냐 는 주의까지 듣던 소년이 일본글로 소설까지 썼다고 동창(일본애)들은 아직 껏 내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고쳐 먹고 문학담을 하자고 하숙으로 찾 아오는 동창이 꽤 여럿이 생겼다. 그리고 소년다운 열정과 희망으로 너는 장차 조선의 소설가가 되어라, 나는 일본의 소설가가 되마, 그리고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문학으로 교류하며 끝까지 문학 교제를 하자고 굳게 손까지 잡 았던 동무도 여럿이다.

지금은 이름까지 잊어버린 그때의 동무들― 과연 그들은 그때의 희망처럼 문학으로 출세를 하였는지? 그때는 일본도 아리시마 다께로오(有島武郎[유 도무낭]), 기꾸찌깡(菊池寬[국지관]), 아꾸다가와 류노스께(芥川龍之介[개 천용지개]) 등도 출세하기 이전이요, 기꾸찌의 스승인 나쓰메(夏目漱石[하 목수석]) 등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소년다운 야심이 만만하던 시절이라, 더우기 나의 아버지가 나 를 기르실 적에 唯我獨尊[유아독존]의 사상을 나의 어린 머리에 깊이 처박 았으니만치 일본문학 따위는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할이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본 동창 아이들 과 문학담을 하면서도 너희 섬나라〔島國[도국]〕인종에게서 무슨 큰 문학 생이 나랴 하는 생각은 늘 속에 품고 있었다.

레오 톨스토이야말로 나의 경모하여 마지않는 작가였다. 「전쟁과 평화」 며 「안나 카레니나」등에 나타난 그 귀신 울릴 만한 기묘한 사실 묘사뿐 아니라 ‘全[전] 톨스토이’를 경모하는 것이었다. <창조> 몇 호엔가에 그 런 뜻의 글도 썼거니와 그때의 나의 문학관 내지 예술관은 대략 이러하였 다.

<창조>에 쓴 나의 예술관의 대의― ―대체 사람이란 동물은 하느님의 만든 세계에 만족치 않는다. 자연계에 아 름답고 훌륭한 ‘꽃’이라는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손끝으로 제 재간으 로 그림으로든 조각으로든 꽃을 모방하여 만들고(그러니까 따라서 자연계의 꽃과 달라서 빛깔의 아름다움도 부족하거니와 냄새도 없고) 이 초라한 복제 품을 좋아한다. 우수한 ‘자연품’보다도….

제 손으로 만든 것이 자연계의 것보다 아무리 너절하고 초라할지라도 자연 계만에 만족치 못하고 제 손으로 복제하여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심 정이다.

이것이 즉 예술이다. 자연계를 모방하여 음향으로 복제한 것이 음악이요,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복제한 것이 문학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가 창 조한 세계’―이것이 예술이다.

이런 관점으로 노서아의 두 큰 작가(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 볼 때에 ‘사랑의 천사’며 성자라는 존경을 만인에게 받는 도스토예프스키 보다 인도주의의 강독자요 폭군이란 평을 받던 톨스토이가 훨씬 더 ‘내 세 계’를 명료하게 창조해 가지고 그 ‘자기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이런 의미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예술가로 더 승하다….


이런 의미로 우선 톨스토이를 예술가로 경모하고 지엽적으로는 그의 섬세 하고 부진한 사실 묘사와 소설의 기술적 수완에 경모하였다.

나의 작풍이 톨스토이를 모방하든가 톨스토이의 영향을 얻은 점은 없지만 그것은 민족성이나 환경이나 교양의 차이 때문이지 톨스토이라는 인격은 내 게 큰 영향을 주었다.

文學[문학] 出發[출발][편집]

1918년 연말 <창조> 잡지를 간행하기로 작정하고 그 창간호에 실으려고 소 설을 쓰려 원고지 앞에 앉기 이전에는 명치학원 중학부 재학때 3학년생 회 람 잡지에 일본글로 소설을 한편 써 본 경험밖에는 원고Tm기에 전력이 없었 다.

우리가 간행하는 잡지이며, 틀림없이(몰수당할 근심 없이) 공개될 글이라 하고 보니 덜컥 겁이 앞선다.

과거에도 머리 속으로는 소설을 구상도 해보았고 대목대목 상세하게 꾸미 어도 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붓을 잡고 원고지 앞에 앉아본 전력 이 없느니만치 마음이 떨렸다.

더우기 과거에 혼자에 머리 속으로 구상하던 소설들은 모두 일본말로 상상 하던 것이라, 조선말로 글을 쓰려고 막상 책상에 대하니 앞이 딱 막힌다.

‘가정교사 강엘리자벳은 가리킴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나의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의 첫머리인데 거기 계속되는 둘째 구에서부터 벌써 막혀 버렸다.

순‘구어체’로 ‘과거사’로― 이것은 기정 방침이라 ‘자기 방으로 돌아 온다’가 아니고 ‘왔다’로 할 것은 예정의 방침이지만 거기 계속될 말이 ‘かの女[여](그녀)’인데 ‘머리 속 소설’일 적에는 ‘かの女[여]’로 되 었지만 조선말로 쓰자면 무엇이라 쓰나? 그 매번을 고유명사(김 모면, 김 모, 엘리자벳이면 엘리자벳)로 쓰기는 여간 군잡스런 일이 아니고 조선말에 적당한 어휘는 없고….

이전에도 막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3인칭인 ‘저’

라는 것이 옳을 것 같지만 조선말에 ‘그’라는 어휘가 어감으로건 관습으 로건 도리어 근사하였다. 예수교의 성경에도 ‘그’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간간 사용되었다. 그래서 눈 꾹 감고 ‘그’라는 대명사를 써버렸다.

이때에 있어서 ‘일본’과 ‘일본글’‘일본말’의 존재는 꽤 큰 편리를 주었다. 그 어법이며 문장 변화며 문법 변화가 조선어와 공통되는 데가 많 은 일본어는 따라서 선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소설가의 소설에 쓴 용어가 그 나라 국어에 작용하는 힘이 지대하여 소설에 쓰인 용어가 시민의 새에 ‘反語[반어]’로 화하는 것이 꽤 많은지라, 그러니만치 책임 없는 문 장을 함부로 써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설을 쓰는 대 가장 먼저 봉착하여― 따라서 가장 먼저 고심하는 것이 用 語[용어]였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를 조선글로 쓰 자니,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이는 ‘ナツカシク’‘一[일]ヲ感[감]ヅタ’‘一 [일]二[이]違[위]ヒナカツタ’‘一[일]ヲ覺[각]エタ’같은 말을 ‘정답 게’‘을 느꼈다’‘틀림(혹은 다름)없었다.’‘느끼(혹 깨달)었다’등으로 ― 한 귀의 말에, 거기 맞는 조선말을 얻기 위하여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하였다. 그리고는 막상 써 놓고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해서 다시 읽어 보고 따져 보고 다른 말로 바꾸어 보고 무척 애를 썼다. 지 금은 말들이 ‘회화체’에까지 쓰이어 완전히 조선어로 되었지만 처음 써 볼 때는 너무도 직역 같아서 매우 주저하였던 것이다. 더우기 나는 자라난 가정이 매우 엄격하여 집안의 하인배까지도 막말을 집안에서 못 쓰게 하여 어려서 배운 말이 아주 부족한 데다 열다섯 살에 외국에 건너가 공부하니만 치 조선말의 기초 지식부터 부족하였고 게다가 표준어(경기말)의 지식은 예 수교 성경에서 배운 것뿐이라, 어휘에 막히면 그 난관을 뚫기는 아주 곤란 하였다. 썩 뒤의 일이지만 그때 독신이던 나더러 염상섭이 경기도 마누라를 아내 삼으라 권고한 일이 있다. 조선어(표준어)를 좀더 능란하게 배울 필요 상 스승으로 경기도 출신의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다. 지금 소설을 쓰는 사 람이 맛보지 못하는 난관들이었다.

또 前人[전인]도 겪지 않은 고생이었다. 전인이 춘원이거나 菊初[국초]거 나 다른 사람들도 다 그저 순화 못한 구어체로 과거사, 현재사의 무자각적 혼용으로 소설용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심도 하지 않았다.

술어에 관해서도 한문 글자로 된 술어를 좀더 조선어화 해 볼 수 없을까 해서 ‘교수’를 ‘가르킴’이라는 등, 대합실을 ‘기다리는 방’(「약한 자의 슬픔」제1회 분에서는 ‘기다림 방’이라 했다가 제2회 분에서는 ‘기다리는 방’이라 고치었다)이라는 등 창작으로서의 고심과 아울러 그 고심에 못하지 않은‘용어의 고심’까지, 이 두 가지 고심의 결정인 처녀작「약한 자의 슬픔」을 써서 ‘4천 년 조선에 신문학 나간다’고 천하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의 젊은 문학자들이 다만 창작욕이라든가 예술욕의 충동으로써 문학을 만드는 것과, 당시의 우리의 심정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당시의 우리는 4천 년 민족 역사 생긴 이래 아직 있어 보지 못하던 신문학을 창건한다는 포부와 자긍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자취는 후인에 영향되는 ‘전철이 된다’하여, 우리의 겪음의 좌일보, 우일보가 조선 신문학의 운명의 바늘이라 하여 그 거취를 매우 신중히 하였다.

대중적 흥미에 치중하는 것은 문학을 통속화하는 것이요, 문학의 타락이라,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에 신문학 발달 興起期[흥기기]에 있어서 오자끼(尾崎[미기]) 도구 도미(德富[덕부]) 야나가와(柳川[유천]) 등의 흥미 치중 작가들이 지도권을 잡기 때문에 일본문학은 대정 초엽까지도 ‘답보로’상태에 있다 하여 조선 신문학 발아의 초기에 가장 피할 것이 ‘대중적 흥미 치중’이라 하여 이것을 몹시 꺼리었다.

이런 자각과 이런 주장을 가진 사람들의 손으로써 조선 신문학의 주춧돌은 놓여진 것이다.

<創造[창조]>와 <廢墟[폐허}>[편집]

<창조> 창간호를 발행하고 제2회의 교정을 간신히 끝내고 만세사건이 폭발 되어 나는 귀국해 버렸다.

뒤이어 경찰서로 감옥으로 꼭 석 달을 세상과 떨어져 있다가 다시 광명한 천지에 나오니, 세상은 예대로 환원되어 시집가고 장가가고 10전 20전 돈을 다투고….

<창조> 발간에서 움이 돈은 조선 신문학은 만세사건에 동인들이 각각 흩어 져서 정지상태에 빠졌다. 내가 감옥살이를 끝내고 나와 보니 김환과 최승만 은 동경에 있고, 전영택은 그 새 귀국해서 결혼했고, 주요한은 상해로 망명 해 있었다.

인쇄만 하고 쌓아 두었던 <창조> 제2호를 발행케 하며 동인들과 연락하여 제3호 원고 수집에 착수하였다.

그때 李一[이일]과 오천석이 <창조>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하므로 마침 현 재의 다섯 사람만으로는 원고난을 느끼던 차이라, 상해의 주요한에게 편지 로 교섭하여 역시 상해에 망명해 있던 이광수도 끌어 이일과 오천석을 새로 동인으로 넣기로 하였다.

그때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의 만세사건은 寺內[사내](뒤에 長谷川[장곡 천]) 총독의 무단정치에 대한 반항행동이라 하여 齎藤實[재등실]이를 조선 총독으로 보내고 문화정치를 한다고 선포하였다.

그 문화정치의 덕으로 민간신문이 생겨나고 언론도 얼마간 자유의 길이 열 렸다.

이리하여 과거에는 嚴封[엄봉]되어 있던 언론과 출판 등에 약간의 완화가 생기매, 이 땅에는 웬 문학자가 그리도 많았던지 너도 소설 나도 소설, 너 도 시 나도 시로, 시인 소설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많은 문학자들의 많은 작품을 소화하기 위하여 사면에서 잡지사 와 출판사가 생겨났다.

글을 토막토막 끊어서 쓰면 이것이 시요, 남녀가 연애하는 이야기를 쓰면 이것이 소설인 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쓸쓸하였다. 이 많은 ‘글쓰는 사람’가운데도 촉망할 작가 가 나서지 않고 따라서 <창조> 동인이라는 한 그룹밖에는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못하니, 무변광야에 홀로 헤매는 것 같아서 고적하고 쓸쓸함 이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때에 역시 동인제로 문학잡지 <廢墟[폐허]>가 창간되었다. 그 동인으 로는 黃錫禹[황석우] 吳相淳[오상순] 廉尙燮[염상섭] 閔泰瑗[민태원] 金萬 壽[김만수] 南宮檍[남궁억] 金明淳[김명순] 下營魯[하영노] 金億[김억] 金 瓚永[김찬영] 기타였다.

그러나 신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작가가 <폐허>에는 없었다. 전인인 통속작 가 민태원이 <폐허>의 소설을 대표하였다.

그런데 <폐허> 창간호가 발간되면서 <폐허>의 주요 동인인 김안서, 김찬 영, 김명순의 세 사람이 <폐허>를 탈퇴하고 <창조>로 건너온 것이었다.

김명순은 김탄실이라 하여 이전 <靑春[청춘]> 잡지의 현상 소설에 당선하 고 그 문명이 빛나던 존재였다.

김찬영은 평양의 전설적 부호요, 명문집 자제로 동경 미술학교 출신으로, 다방면(그림과 글)에 소양 많은 사람이었다.

김안서는 만세 이전부터의 시인으로 ‘하여라’‘하였서라’투를 시작하여 시에 독특한 지반을 쌓아나가던 사람이다. 그때 서울에 돌아와 있던 김환에 게선 ‘김찬영, 김억, 김탄실이 <창조>로 오겠다니 어떠냐’는 편지가 있어 서 그것 좋다고 하여 <창조>로 오게 되었다.

이것이 <창조> 제2호의 특고다.

사실 제2호 원고를 橫濱[횡빈](요꼬하마) 인쇄소로 보내자 동경 유학생 독 립선언 사건이 생기고, 뒤이어 3․1의 위대한 운동이 발발하고, 귀국하자 감 옥에 들어가고 뒤따라 주요한도 본국을 거치어 상해로 망명하고, 전영택도 귀국해 버리고(전영택은 귀국하여 전부터의 약혼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식장에서 약혼자는 만세사건으로 형사에게 잡혀가는 비극을 겪었다), 최승만(현과도정부 문교부 무슨 과장), 오천석(현 과도정부 문교부장), 김 환(사망) 등이 겨우 무사한 동인이었지만, 그들도 서로 아무 연락도 없이 지내는 형편으로 내가 꼭 석 달 만에 소위 집행유예로 감옥에서 나와 보니,

<창조>를 실마리로 움돋으려던 조선문학은 된서리를 맞아 그 싹이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여름 감옥에서 나온 한 달 뒤 잠깐 동경을 다녀왔다. 의사도, ‘그대의 건강 상태로는 긴 여행은 못하리라.’고 충고하였지만, 마음을 흔 드는 어떤 情事[정사] 때문에 만사를 제치고 동경 여행을 한 것이었다.

동경서 일이 뜻과 달리 되어, 아프고 쓰린 가슴을 붙안고 귀국한 나는, 번 연히 마음을 다시 먹고, <창조> 속간에 착수하였다.

그때는 소위 寺內[사내]의 무단정치의 대신으로 齋藤[재등]의 문화정치가 조선에 펴진다 하여, 민간신문의 발간 계획도 들리고, 文興社[문흥사]라는 출판사가 생겨 <曙光[서광]>이라는 잡지를 간행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曙光 社[서광사]에서는 기고 부탁도 왔다.

그 <서광> 창간호보다 <창조> 제3호를 먼저 내놓으려고 퍽이나 애를 썼지 만, 동인이 상해 동경 서울 평양에 분산되어 있고, 인쇄소가 횡빈에 있느니 만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서광> 창간호가 1919년 11월 30일이었는 데 <창조>는 그보다 열흘 늦어, 12일에 제3호가 났다.

그러나 그 해 2월에 창간하여, 그 뒤의 만세사건이며 동인 이산, 입옥 등 온갖 분규를 겪으면서도, 그 해 안으로 3호를 내놓았다 하는 것은 오직 동 인들의 불타는 열성의 산물이다.

그 뒤 <창조> 제4호는 다음해 2월 22일부로 발행되었는데, 거기 난 신간 소개를 보면, 소위 齋藤[재등] 총독의 문화정책의 물결에 편승하여 그 새 막혔던 이 민족의 문화에의 돌진을 볼 수가 있었으니, 그 신간 소개를 초기 하자면,

<曙光[서광]> 제2호, 2월 18일 발행.

<新靑年[신청년]> 제2호, 12월5일 발행.

<綠星[녹성]> 창간호, 11월 5일 발행.

<서울> 창간호, 12월 15일 발행.

<現代[현대]> 창간호, 1월 31일 발행.

<三光[삼광]> 제2호, 12월 28일 발행.

<女子時論[여자시론]> 창간호, 1월 24일 발행.

이상은 <창조> 지상에 신간 소개가 난 것만이거니와 이 밖에도 많은 잡지 가 소나기 쏟아지듯 생겼다. 그 대개는 창간호가 종간호를 겸하거나, 혹은 제2호 내지 제3호까지 간신히 내고 그만둔 것이었지만….

하여간 한일합방 이래 막혔던 우리 민족의 울분은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 다. 혹은 재력 부족으로, 혹은 사람 부족으로 크게 자란 자는 없지만, 1919 년 말에서 1920년 초에 걸치어서는 진실로 많은 잡지가 생겼다가 없어졌다.

그 잡지마다 탕약에 감초격으로 으례 소설 한두 편씩은 실렸지만 그 실린 소설에서 장래성 있는 작가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서운하였 다. <창조>가 신문학의 첫 고함을 친 지 겨우 1년 남짓이 지낸 뿐이지만, 우리는 마음 초조하게 소설작가의 출현을 기다린 것이었다. 소설이 근대문 학의 花形[화형]이니만치 소설작가가 배출하여야 문단이 흥성스러워진다 보 아서, 장구성 있는 소설작가가 나지 않은 현상을 매우 괴롭게 여겼다.

<창조>는 그 뒤 제9호까지 내고 폐간하여 버렸다. 폐간한 이유에는 여러가 지가 있겠지만, 이만 했으면 조선 신문학의 주춧돌도 놓여졌다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요, <창조>가 아닐지라도 동인들의 글의 발표 기관(신문, 잡지) 이 많이 생겼으니 동인지가 필요없게 되었다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창조> 폐간의 진정한 원인 내지 이유는, 첫째로는 무제한한 入費[입비]였 으니 마지막에는 2천 부까지 소화되었지만 그 매상대금은 어디론가 없어지 고 매번을 새로 새 비용을 내온 것이 괴로왔다. 게다가 나도 차차 방탕에 빠지어 문학보다도 방탕에 더 고혹을 느끼게 되었고, 또 <창조> 유지가 귀 찮아져서 폐간의 의향을 꺼내었더니, 그냥 계속하려면 뒤맡을 책임자가 없 어서 폐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때 사실 나는 <창조>의 무제한 입비에 정떨어져서 사무 책임자인 김환에 게 누차 불평을 말하였더니, 김환은 그러면 창조사를 주식회사로 하여 보자 고 하두 열심히 돌아다니는 그 열성에 감복하여, 나는 ‘주식회사 창조사’

의 제1회 불입금을 김환에게 솔선하여 맡겼더니 김환은 그 돈을 홀짝 안 (安) 모라는 기생에게 부어넣고 주식회사의 꿈은 영 소멸되어 나도 손떼기 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창조>는 조선 신문학 史上[사상]에 지대한 자취와 공적을 남기 고 제9호로서 끝을 막았다.

그러나 <창조>가 남겨 놓은 공적은, 조선문학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몰 락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창조>를 무대삼아 조선문학 건설의 큰 역사 에 애쓴 일꾼들이(김환 한 사람이 죽은 밖에는) 30년 뒤인 오늘까지 모두 건재하여, 혹은 정부의 문화 부분의 고관으로, 혹은 민간 문화사업의 책임 자로 그냥 꾸준히 조선문화 진흥에 힘쓴다 하는 것은, 조선을 위하여 축하 할 일이다. 이나(金東仁[김동인])만은 무능 무재하여 오십 반백의 몸을 서 재에서 붓대에만 씨름하고 있지만, 同友[동우]들의 사회에서의 건투하는 양 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의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 지경이다.

<廢墟[폐허]>·<白潮[백조]>[편집]

1921년 봄에 나는 소위 <창조> 주식회사의 창립총회를 하자는 김환의 초청 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유방 김찬영, 안서 김억, 그 밖 몇몇 글벗과 짝지어 종로를 지나가다가 문 득 동무들이 발을 멈추어 김억의 말로,

“소개하지. 한동안 紙上[지상]에서 싸우던 염상섭 군.”

하는 바람에 나도 발을 멈추고 맞은편에 얼굴이 커다랗고 입이 너부죽한 사 람을 마주 보았다.

얼마 전에 小星[소성] 玄相允[현상윤]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걸고 그 위 김 환에게 인신공격(소설 비평이라는 핑계로서)을 한 염상섭에게 대한 나의 선 입관은 자못 좋지 못하였다. 필시 얼굴도 인상이 나쁜 인물이리라는 선입관 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고 내게 향하여 손을 내미는 염상섭은 다만 짝없는 호인일 따름이었다.

상섭의 내미는 손에 마주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주시 하여 마지 않았다. 선입관과 실물이 너무도 相違[상위]되므로….

그 날, 상면한 사람은 염상섭뿐 아니라 고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김만 수 등 <폐허>파 주요 동인 전부였다.

그들과 작별하자 곧 안서가 날 꾸짖는다.

“염(尙燮[상섭])은 자네를 그렇듯 호의로 대하는데 자네는 왜 옛날 논전 을 했으면 했지 오늘 그렇듯 악의의 눈으로 염을 대하는가. 사람이 그래선 못써 너무 狹量[협양]이야.”

당년의 안서는 노염 잘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 면 곧 절교로 선언하고 옷을 떨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간다. 그러나 30분 내지 한 시간 뒤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까의 절교는 잊은 듯이 찾아 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안서지만 지금의 내게 대한 책망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염상섭 이 나의 선입관과 달라 예상 외의 호인이므로 나도 내심 상섭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판에 안서의 이 꾸중이다.

여기 대하여 惟邦(김찬영)이 대신 말하였다―.

“동인 군, 자도 기회 있을 때 자네에게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자넨― 아마 생장과 환경의 탓이겠지만 대인응대에 남보기에 몹시 거만해 뵈어. 그 게 자네 처세에 큰 방해가 될 걸세.”

자기로는 모르지만 사실 그런 양하여 건방지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며, 더우기 경찰이나 경무부 도서과 같은 데서는 ‘나마이끼(なまいき―건방 짐)’하다는 탓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은 일이 비일비재다. 그러나 이 ‘거 만하다’는 것도 나이와 지위의 나름인 듯, 내 나이 오십(마흔아홉이다)이 되고 지위도 문단의 늙은이로 되고 보니, 건방지다는 폄은 어언간 없어지고 말았다.

주식회사 창조사의 제1회 拂入株金[불입주금]을 곧 김환에게 보내고 나는 자금 이후는 원고와 편집 책임밖에는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랬더니 내 불입금을 오입에 죄 소비해 버린 김환은 어떻게 수단을 썼던지 <창조> 제8호와 제9호의 발행비 책임을 廣益書舘[광익서관]에 떠지워서 8호와 9호 는 광익서관의 손으로 무사히 세상에 나왔다.

나는 그 주식회사 창조사의 발기인회에 참석코자 상경하여 발기총회에서 어떤 기생과 사괴게 되어 한번 쏠리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성격으로, 문학이 고 예술이고 집어치고 방탕의 방면으로 쏠려 들어갔다.

<폐허>는 뒤에 나서 먼저 없어지고(2호로 폐간), <창조>도 9호로 폐간해 버리고 이 땅에는 한때 그 흔했던 문예잡지는 종자도 없어졌다.

그런데 <폐허>가 단 두 호를 낸 뿐으로 조선 문학사상에 커다랗게 이름을 남긴 것은 전혀 염상섭의 공이 아닌가 한다.

<폐허>가 간행되는 동안 염상섭은 내내 한 작품 비평가로 종사했지만, 그 뒷날 <開闢[개벽]>이 간행되고 <조선문단>이 간행될 때에 <개벽> 지상에 처 녀작 「청개구리」로 출발하여서 大[대]염상섭의 오늘을 이루었는지라, ‘염상섭 요람’의 마을인 <폐허>가 따라서 이름이 살아 있지 않은가 본다.

<폐허>와 전후하여 생겼던 문예잡지 <三光[삼광]>이며 그 밖의 다른 잡지들 이 모두 잊히어졌는데 오직 <폐허>의 이름은 <창조>에 버금하여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상섭의 덕이라 보는 것은 나의 실수일까?

<창조>와 <폐허>가 다 없어지고 잠깐 잠잠하던 이 땅에는 문예잡지 <백조>가 생겨났다.

조선 신문학 초창기를 회고할 때에 분명 창조파라는 색채와 ‘페허파’라 는 색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백조>에는 색채가 없었다. 억지로 집어내자면 書生[서생] 색채가 있다고나 할까?

현재 재학생 혹은 갓 교문을 나온 젊은이들― 이런 문학소년 내지 문학청 년들을 규합하여 동인으로 하였는지라, 다만 문학 애호라는 점만이 공통될 뿐이지 사상이나 경향은 십인십색으로 통일된 색채가 없었다.

그러나 <창조> <폐허>에 속하지 않은 온 조선의 총규합이라, <백조> 간행 당시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동인들도 후일 <개벽>과 <조선문단>을 무대 로 일어나서 한때 조선 신문학 황금시대를 현출하였다.

그런데 위에도 쓴 일이 있지만 <창조> 동인 열한 사람 가운데 30년 뒤인 지금에 죽은 사람은 오직 김환 항 사람이요, <폐허>에는 민태원, 남궁벽 등 두 세 사람이 죽었으나 염상섭을 필두로 오상순, 변영로, 황석우, 중요한 동인은 역시 축나지 않았는데 <백조>는 이상하게도 稻香[도향] 나빈을 비롯 하여 빙허 현진건, 노작 홍사용, 춘성 노자영 등 온 동인의 6할이 저 세상 으로 갔다 하는 것은 비통하고도 괴상한 숙명이다.

그 가운데도 도향과 노작의 죽음은 진실로 아깝다.

도향이 죽은 것이 겨우 스물 서너 살이었으니, 무론 아직 미성품이요, 좀 과히 로만티시즘과 센티멘탈리즘에 기운 느낌은 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천 분이 완숙되어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것은 조선문학을 위하여 찬탄하여 마 지않는 바이다.

도향에 관해서는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홍노작에 대하여 한두 마디 쓰고자 한다.

제호는 잊었지만 <개벽> 지상에서 노작의 시를 보고 큰 시인의 알이 하나 생겼구나, 한 일이 있었다. 그후 얼마 뒤에 서로 면식은 하였다.

1942년경, 나는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未 決監[미결감] 같은 방에 영화감독 尹達春[윤달춘]이 있었다. 그 윤봉춘이 노작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무슨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영화의 주제 가를 하나 지어 달라려 노작을 찾아갔는데, 갈 때 빈 손으로 갈 수가 없어 서 쇠고기를 한 근 사들고 갔었다.

노작의 집 아이들은 고기의 맛이 하두 신기하여 대체 이 맛있는 물건이 무 엇이냐고 부모에게 물으니까 그건 ‘노다지’라고 하여 두었다.

그 뒤부터 윤봉춘이 노작의 집에 가면 아이들은 노다지 가져온 사람이라고 환영하더라는 이야기다.

감옥에서 윤봉춘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아아, 노작이 그렇게 곤란하게 지 내는가, 조선문인된 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엾어라고 깊이 탄식하였다.

그러나 1년 뒤 감옥에서 나와서는 노작을 한 번 찾아 본다는 것이 어름어 름 밀리고 밀리는 중, 1945년 국가 해방의 날도 지난 그 초가을 어떤날, 웬 전문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만나 보았더니,

“노작 홍사용 선생을 아시오?”

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아노라고 했더니 지금 홍선생이 많이 위중하십니 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뚱 하였다. 그래서 노작이 나를 한 번 만나기를 부탁하더냐고 물었 더니, 그런 배는 아니요 다만 같은 문단이기에 노작의 위독을 알리는 뿐이 라 하고는 도로 가버렸다.

아마 짐작컨대 그 여학생은 노작의 친척이나 친지로서 내 집 앞을 지나다 니며 내 문패를 보고 金東仁[김동인]이가 어떤 화상인가 한 번 보고자 노작 을 핑계삼아 들어왔던 것이리라.

그래서 무심하게 버려 두었더니, 2, 3일 뒤에 신문지는 노작의 부보를 알 리었다.

자기 집 전답을 팔아서 그 돈으로 <백조>를 간행한 노작, <백조> 자체가 조선문학 건설에 남긴 공로는 그다지 없다. 그러나 <백조>를 요람으로 출발 한 노작의 많지는 못하나마 몇십 편의 주옥은 조선 문학사상에 영구히 빛날 보배다.

현빙허의 죽음도 진실로 아깝다. 빙허는 어떤 정도까지 그의 업적을 남기 고 죽었으니, 어려서 죽은 도향처럼 원통하게 아깝지는 않지만, 이 <백조>의 세 작가(빙허, 도향, 노작)가 지금도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을 한다면 우 리 문단은 얼마나 더 흥성스러울 것인가?

沈滯[심체][편집]

사실은 <백조>가 언제 창간되어 언제 폐간되었는지 그 당시에는 나는 몰랐 다. 나는 <창조>의 책임을 집어치우고는 아주 글과 떠나서 한동안 방탕에 잠기느라고 글과는 아주 절연하게 있었다.

1921년에서 1922년에 걸친 겨울을 나는 서울 패밀리 호텔의 한 방을 전용 으로 잡아두고 거기서 살았다. 저편 한 방에는 유방 김찬영이 묵어 있었다.

패밀리 호텔에 있을 노자영(아직 상면도 없는 사람이었다)에게서,

‘무슨 연애 서간을 한 편 써 달라.’

는 부탁을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여러번 받은 일이 있는데,

‘연애 편지를 얻고 싶거든 먼저 내게 애인을 제공해서 그 애인에게 보내 는 편지를 구하여 보라.’

고 야유적인 회답을 보냈더니 다시는 연애 서간 요구는 없었고, 그 뒤 알아 보니 노자영은 그때 그렇게 모든 연애 편지들을 한 책으로 모아서 「사랑의 불꽃」이라는 제호로 출판하였다 한다.

그 노자영의 출현으로 보아서 아마, 그때 백조파가 대두하던 시절인 모양 이다. 그러나 <창조>와 <폐허>의 잔당들은 모두 아주 글과 떠난 생활을 하 고 있었다.

춘원과 요한은 상해에서 <독립신문>에 종사하고 있고, 염상섭은 <폐허> 폐 간 뒤에 할 일이 없어서 이따금 나나 김찬영을 패밀리 호텔로 찾아서 소일 하다가 평북 어떤 산촌의 교원 자리를 하나 구해서 그리로 떠났고, 안서는 행방불명(아마 고향에 내려가 있었을 것이다)이요, 김찬영과 나는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食道園[식도원]에서 세월을 보내는 형편이요, 김환은 서울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만 주식회사 창조사의 제1회 불입금을 집어삼킨 허물 이 있는지라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사실 그 새 창조했던 <조선문단>은 폐허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러한 때에 또 한 개의 비극이 우리 문학사상에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광익서관 주인 高敬相[고경상]의 아버지의 환갑의 전날이었다.

그 날도 남궁벽 등의 두세 친구와 식도원에서 놀았다. 그런데 남궁은 몹시 배가 아프다고 괴로운 얼굴을 하면서도 시장한지 음식은 그냥 먹는다.

대개 남궁이란 친구는 그 옷이나 몸가짐에 몹시 마음쓰는 사람으로서, 기 침 한 번, 손짓 몸짓 한 번도 모두가 오래 스스로 수련하여서 터득한 남궁 독특의 스타일과 타입으로서, 단벌 양복이나마 언제든 깨끗이 솔질하고 총 대같이 바지의 줄을 새워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궁이 이 날은 체모를 차리지 못하고 한편 구석에 디굴디굴 굴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다못해 남궁의 愛妓[애기] 한경애라도 불러 주 려고 퍽이나 애를 썼으나 그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튿날은 고경상 아버지의 환갑날.

공경상은 <폐허>의 두 호 발간비를 부담했고, <창조>도 마지막 두 호는 그 에게 맡겼으며, 「無情[무정]」「海王星[해왕성]」등 여러 개의 출판물을 내는 등 신문학 운동에 적지 않게 공허한 사람이라, 그 아버지의 환갑은 온 문화인이 축하하였다.

그 자리에 으례 나올 남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니 배가 몹시 아파서 앓고 있다 한다.

엊저녁 너무 과식하더니 필시 식체여니 하여,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 다. 그리고 그날 저녁으로 만주 방면으로 어떤 기생과 놀러 떠나기를 약속 했는지라, 몰래 기회 보아서 그 연회석을 피해 나와서 약속한 기생과 북행 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서 이틀을 보내고 만주 안동에 이르니 나의 定宿[정숙]인 원보관에는 나보다 먼저 내게의 전보와 편지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전보와 편지는 아 울러 서울 柳志永[유지영]에게서 온 것으로 남궁의 急逝[급서]를 알린 통지 였다.

그 말투, 몸가짐, 걸음걸이, 하다못해 기침하는 법까지 자기 독특의 방식 을 안출해서 이행하던 남궁, <폐허>의 동인이면서도 <폐허>의 보헤미안적 기분을 싫어하며 죽는 날까지 <창조> 동인들과 교우하면서도 역시 절조를 지켜서 <폐허>를 탈퇴하지 않던 남궁.

남궁의 죽음도 나도향, 홍노작, 현빙허 등의 죽음과 아울러 조선 신문학사 에 대한 지대한 고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同人詩[동인시]의 終焉[종언][편집]

이리하여 1922년경까지로 조선 신문학은 동인지의 시대를 이탈하였다. 그 러나 종합 잡지로 그때 <개벽>이 발간되고 있었지만, 초창기의 <개벽>은 천 도교의 人乃天[인내천]이나 주창하는 한 기관잡지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 <개벽>이 정도에 올라서 ‘종합잡지’로서의 소임을 다하여 문예에 상 당한 페이지를 제공하고, 또한 춘해 방인근이 월간 <조선문단>을 간행하게 될 때에 온 조선문인(<창조>의 잔당, <폐허>의 잔당, <백조>의 잔당, 그 밖 새로 나오는 사람들)은 이 두 잡지를 무대로, 좋게 말하자면 백화난만 상태 요, 나쁘게 말하자면 어중이 떠중이 난무의 혼란시대를 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혼란 가운데서 그래도 조선 신문학은 차차 정돈되고 자라서 오 늘까지 이른 것이다.

위정 당국의 탄압과 사회 대중의 무시(멸시) 아래서 이만한 문학이라도 건 설해 놓은 문인들의 고충을 조선 사회는 마땅히 크게 감사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高敬相[고경상][편집]

<창조> <폐허> <백조>의 세 동인 잡지 시대가 조선문학 탄생의 진통기였다.

1919년 2월에 창간호를 내어 1921년 6월에 제9호를 내고 폐간한 <창조>.

1920년 6, 7월경에 창간하여 제2호까지 내고 폐간한 <폐허>.

그 뒤에 생겨서 두세 호 내고 폐간한 <백조>.

이 문학 건설의 큰 공사에 있어서 몰각할 수 없는 역할을 한 사람이 있으 니, 즉 광익서관의 주인 고경상이다.

고경상의 伯氏[백씨] 裕相[유상]은 滙東書館[회동서관]을 경영하고, 고경 상은 광익서관을 경영하여 당시 조선 서적업계에 이 형제가 군림하고 있었 는데, 동생 되는 고경상은 그때 일어나는 조선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져 동경 서 발행되는 유학생 기관지 <학지광>이며 <女子界[여자계]> 등 잡지의 조선 판매의 책임을 지고 또는 이광수(春園[춘원])의 「무정」이며 「개척자」등 도 초판 발행을 감행하였고 <폐허> 창간호와 제2호는 순전히 고경상의 힘으 로 발간되었고, <창조>도 내가 출자 책임을 회피한 후인 제 8, 9의 두 호는 고경상의 힘으로 발간되었다.

광익서관의 가게 점두는 문사들의 공동휴게소와 연락처의 소임을 하였고, 더우기 폐허파의 문인들은 제 가정을 피하여 방랑적 표랑적 생활을 즐기더 니만치 그들은 늘 광익서관의 점두를 구락부인 듯이 모이고 하였다.

안서(김억)의 처녀 시집(번역) 「懊惱[오뇌]의 舞蹈[무도]」도 고경상의 손으로 발행되었다.

고경상은 이렇듯 영리자로서는 외도인 ‘문학 옹호’를 하다가 마침내 조 선의 老舖[노포]인 광익서관을 둘러엎고 심화가 나서 한동안 상해, 북경 부 근에 유랑하다가 1930년경에야 귀국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예전의 광익서관의 점원이던 사람이 경영하는 책방에 점원으 로 들어가서 주객전도의 구슬픈 살림을 한동안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女人[여인]」원고를 그에게 제공하며 출판계에 재출발하 기를 권고했더니, 이에 용기를 다시 내어,

“서 푼짜리 원고를 출판함으로써 출판계에 재등장을 하니 社名[사명]을 三文社[삼문사]라 지으라.”

는 농담에 따라서 ‘三文社[삼문사]’라는 간판을 걸고 출판계에 재출발을 하였다.

본시 출판과 책사에 경험이며 솜씨가 있던 사람이라 그 영업은 순조롭게 되어, 큰 집을 사고 전화를 매고 전집 간행에까지 착수를 하더니, 금광 방 면에 오입을 하여 일껏 바로 되어 가던 출판과 서적까지 집어삼키고 다시 은퇴하여 버렸다.

그러나 초창기의 문학 건설 운동에 있어서의 고경상의 공로는 조선문학이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경상의 원조만 없었더면 대체 <폐허>라는 잡지가 나와 보았을는지, 따라서 ‘폐허파’라는 그룹이 생겨 보았을는지부터가 의문이요, <창조>도 제7호로 폐간되었지 8, 9호는 나 보지 못했을 것이요, 여러가지의 단행본도 썩 후년에야 출세해 보았을 것이다.

고경상은 문학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문학 건설에 바친 힘과 희생정신 은 조선문학이 감사히 여기어야 할 것이다.

冬眠期[동면기][편집]

<백조>가 언제 창간되었다가 언제 폐간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폐허>의 동인인 霽月[제월](염상섭)이며 樹州[수주](변영로)며 황석우 등 은 <폐허>가 창간되기 전에도 한 개 문학청년으로 <창조>에 투고 등을 하여 그 이름은 기억하는 바였지만 <백조>의 동인들은 모두 갓 중학 출신의 소년 들로서 그다지 관심치 않는 동안에 창간되었다가 폐간되었다. 그 <백조>의 동인으로 나빈(도향), 현진건(빙허), 홍사용(노작) 등이 <개벽>이며 더 뒤 에 <조선문단> 등을 무대삼아 成家[성가]를 하였기에 말이지 <백조>가 간행 되는 당년에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기생집에 갈지라도 기생에게 ‘금향 씨’‘명화 씨’하여 ‘씨’의 존호로 부르고 기생에게 창가를 가르치며 전연 난봉 학생 같은 행세를 하며 다니던

<백조> 동인들이었다.

나도향은 그의 자랑하는 美聲[미성]으로 ‘김산월’인가 하는 기생에게 창 가 춘원 작가 金永煥[김영환] 작곡 ‘백마강’을 가르쳐서 그 창가가 한때 童妓[동기] 새에 유행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조선 신문학 건설’의 주춧돌을 놓으라고 애쓰는 젊은이들 에게 한결같이 외롭고 쓰린 일은 우리의 이 사업에 대한 일반 사회의 몰이 해 및 무시였다.

우리는 우리의 전인인 춘원(이광수)의 밟은 문학 발자국을 옳다 보지 않았 다. 춘원은 문학을 일종의 사회 개혁의 무기로 썼다. 이상 건설의 선전기관 으로 썼다.

그 태도 내지 주의를 우리는 옳다 보지 않은 것이다(그런 관계로 춘원이

<창조> 동인으로 있는 2년나마 <창조>에서는 춘원에게 소설을 부탁하지 않 았다).

권선징악을 목적으로 한 소설을 용납할 관대성을 못 가진 것과 같은 의미 로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소설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문학은 오직 문학을 위한 문학이 존재할 뿐이지,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은 문학으로 인정하지 못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또 리얼이라는 것이 소설 구성의 최대 요소로 여기었다.

독자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흥미 본위의 소설을 쓰는 것은 문학자로서 부끄 럽게 여길 일이라 보았다.

그런지라, 우리가 그때 산출한 소설이라는 것은 대중적 흥미는 아주 무시 한 생경하고 까다롭고 싱거운 것뿐이었다.

우리는 이 생경한 ‘이야기’를 소위 ‘문학’이라 하여 대중에게 ‘맛있 게 먹기’를 강요한 것이었다.

3․1 후 반항기분과 신흥기분으로 일부의 젊은이들은 이 생경한 문학의 맛있 는 체하고 억지로 받아 먹었지만, 일반 대중은 우리의 노력의 결정인 신문 학을 아주 무시하여 버렸다.

새 문학이 없는 이 땅에 새 문학을 건설해 보겠다고 나선 우리들에게 일반 사회의 이 냉대는 과연 적적하고 가슴 아팠다.

<폐허>의 폐간도 이 냉대에 정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도 (무어니 무어니 하여도) 대중의 열렬한 지지와 후원만 있으면 폐 간 안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창조> 폐간되고, <폐허> 폐간되고, <백조>도 없어지고, 조선 사 회에는 문학운동이 한때 冬眠[동면]상태에 빠졌다.

‘문학’을 냉대하는 사회에 무슨 문학이랴― 이런 심리로 모두 폐간하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각기 제멋대로 놀아났다.

<창조>의 동인들은 오입장이로 돌아서고 <폐허>의 동인들은 방랑과 표랑으 로 돌아섰다.

위에도 쓴 일이 있거니와 ‘주식회사 창조사’의 불입한 불입금을 ‘안금 향’이라는 기생에게 통 부어 넣고, 그 때문에 김환은 면목이 없어 말을 더 듬는 떼, 떼, 떼 하는 눌변으로써 연해 시골(진남포였다) 자기 집 논을 팔 아서 변상하겠노라고 쫓아다니며 변명하였지만, 나도 그때 바람이 나서 몇 천 원의 돈을 김환에게 먹히운 것쯤은 생각도 안하던 때라 아주 개의치 않 고 나 놀대로 놀아났다.

안서는 그때 漢城圖書株式會社[한성도서주식회사]에 「위인 링컨전」이라

「위인 와싱톤전」이라 위인 누구 누구전을 연속적으로 팔아서 술값 수입이 좋던 시절이라, 매일 康明花[당명화]라는 기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시절 이었다.

늘봄 전영택은 평양에, 東園[동원] 이일은 서울에 각각 신혼한 애처의 보 금자리에 묻혀 있었다. 천원 오천석은 아직 총각으로 몸을 아버지(목사)의 품에 쉬고 있었다.

이광수, 주요한은 상해에 있었다.

염상섭은 <폐허> 폐간 전후하여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교원으로 두석 달 가 있다가, 다시 제 집으로 돌아와서 숨어 있었다.

이리하여 모두 붓을 내어던지고 제멋대로 놀아나서 조선문학은 탄생 2년 뒤에 동면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때의 언론기관으로 민간과 총독부 기관지를 합한 네 개의 신문과 <개벽> 잡지뿐이었는데, 신문은 문예를 다루지 않고 <개벽> 역시 초창기로서 천도 교의 인내천만을 주장하는 얘기 잡지로서, 아직 문예와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東亞日報[동아일보]>[편집]

<창조> 1920년 5월호 맨 끝에 6호 활자로 동아일보의 창간을 축하하는 글 이 늘봄 전영택의 문장으로 실리어 있다. 그 글을 보면 마치 어른이 어린이 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한 사랑과 귀염이 가득 든 문장이다.

언론기관으로 순전히 민간의 자본과 민간의 기술과 민간의 힘으로 생겨나 는 동아일보를 <창조>는 진심으로 어른답게 축복한 것이었다.

초창기에서 중간기까지의 조선문인으로서의 동아일보에 한 때(잠깐이라도) 적을 두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따로 제 직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는 나 한 사람이 아닐까 이렇 게 나는 생각한다) 얼른 꼽아 볼지라도 맨 초창기 동아일보에 천원 오천석, 제월 염상섭이 있 었고 춘원 이광수와 주요한이며, 안서 김억이며, 빙허 현진건이며, 춘성이 며, 누구누구 枚學[매학]키 힘들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동아일보같이 조선문학을 학대하고 박대한 언론기관도 또 한 없다.

조선의 문인으로 동아일보에게 쓰라린 박대를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춘원 자신부터가 문인으로서 는 학대를 받았으니 더 할말 없을 것이다)이며, 동아일보가 바야흐로 싹트 려는 조선문학에 대하여 범한 과오가 또한 심한 바 있다.

이것도 아래에 차례로 기회 생길 때마다 쓰겠거니와 그 탄생(발간)을 그렇 듯 진심으로 축복하였던 우리는 그 축복을 내심 후회하고 취소하였던 것이 다.

다른 신문(時代日報[시대일보]며 朝鮮日報[조선일보] 등)이 그래도 좀 양 심적인 신문소설을 지상에 연재할 때에 동아일보는 솔선하여 통속소설과 구 담으로 대중에게 아첨하여 이 탓에,

‘신문소설이란 것은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이 아니면 안 된다.’

를 세워 놓아서, 지금 자라려는 조선문학에 된서리를 준 죄로 변명할 여지 가 없는 동아일보의 과오다.

南宮壁[남궁벽]의 죽음[편집]

1921년에서 1922년에 걸친 문학 동면기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남궁벽의 죽음이었다.

남궁벽은 <폐허> 동인에서 가장 빛나는 또한 특이한 존재였다.

그의 남긴 시와 문예 비평, 에세이는 모두 散逸[산일]되어 오늘날은 찾아 볼 바이 없지만 상섭, 수주 아직 출세하지 못한 당년의 <폐허>에서는 남궁 이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남궁은 <폐허>의 룸펜색을 싫어하여 단벌 옷이나마 늘 깨끗이 손질하고 다 림쳐 입고 날카로운 콧등에 안경을 쓰고 단장을 짚고 담배도 굶으면 굶었지 ‘해태’가 아니면 피지 않았고― 그런 사람이니만치 룸펜색 농후한 <폐허>당을 피하여 김찬영이나 나와 늘 짝지어 다녔다.

김찬영이나 내나 모두 평양 명문집 자제로서, 옷도(남궁처럼) 늘 손질은 못하지만 모자에서 신발까지 모두 최고급품을 여러 벌씩 가지고 있는지라 늘 깨끗하였고, 이런 점이 남궁의 뜻에 맞는 듯하여 내나 찬영이 서울 와 있으면 남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정숙인 패밀리 호텔에 와서 세월 을 보냈다.

그다지 말이 없는 남궁이요, 그다지 말이 없는 내가 종일 한 마디의 이야 기도 없이 마주 있다가 저녁때 내가 먼저 내 단장을 짚고 외투를 입으며 일 어서면 남궁도 따라서 외투를 입고 단장을 짚고 일어선다.

(남궁은 그 외투의 엉덩이가 허옇게 닳은 것을 매우 마음 썼다. 그러나 자 존심이 몹시 센 남궁은 그 자기의 외투의 초라함을 한 번도 하소연한 일이 없었다. 나는 여유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여유있게 자란 만치, 옷같은 것도 감이 보이면 짓고 짓고 하여 옷이 남이 달라면 서슴지 않고 주고 하여 유지 영 같은 사람은 내 옷을 꽤 여러 벌 얻어 입었지만, 남궁은 달라는 일도 일 체 없었고 나도 또한 남궁에게는 차마 달라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아 마음으 로는 한 벌 주고 싶으면서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호텔에서 나와서는 그때 남미창동 살던 유지영을 불러내어 가지고 이 일행 은 식도원으로 간다. 그때의 식도원은 우리 일행을 위하여 제7호실은 늘 비 워두는 것이다.

식도원에서는 새벽 서너 시까지 질탕치듯 놀아난다.

우리는 이런 허장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글과는 아주 절연하고.

그것은 광익서관 주인 고경상의 아버지의 환갑 전날이었다. 우리(김찬영, 남궁벽, 유지영, 나)는 또 식도원에서 놀았다. 그런데 노는 도중 건너편 방 손님과 기생 때문에 시비가 생겼다.

보이는 좌우편 다 괄시할 수 없는 손님들이라, 더 커지지 않도록 알선하느 라고 삥삥 도는 동안 남궁은 이 시비통에 끼어들기를 피하여 음식만 연해 먹고 있었다. 이튿날 고경상 아버지의 환갑 잔치에 <창조>, <폐허>의 재경 동인이 모두 축하하는데, 으례 올 남궁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알아 보았더니 어제 먹은 음식이 체하여 몹시 앓는다는 것이다.

그 날 나는 어떤 동반자와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이 있었으므로 앓는 남궁 을 찾지 못하고 연석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길을 떠났다.

평양서 2, 3일 지내서 목적했던 안동까지 이르니 안동 내 정숙인 원보관에 는 전보 한 장과 편지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유지영에게서 온 전보와 편지였다. 전보는 남궁이 죽었다는 것을 알 린 것이요, 편지는 남궁이 그 밤 먹은 음식에 체하여 종내 죽었다는 사인의 보도였다.

아직 미성품인 채 죽은 남궁이니, 남궁이 살았다면 조선문학에 어떤 업적 을 남겼을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성격과 날카롭던 관찰안과 미성품인 채로 새벽 明星 [명성]같이 산뜻하던 詩風[시풍]은 그에게 壽[수]만 더 있었더면 어떤 문학 업적이 있었을 것을 넉넉히 단언할 수 있다.

廉尙燮[염상섭][편집]

상섭과 나는 두 번 큰 싸움을 하였다. 한 번은 서로 아직 상면도 없는 1920년경이요, 또 한 번은 1928년경이다. 그러나 현 문단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꼽으라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상섭 그 밖 두서너 사람밖에는 없다.

상섭의 문학 출발 초년경에는 몹시 불우했다.

그의 성격에는 어디인지 비꼬아진 데가 있어서 젊었을 적에는 남에게 시비 를 걸기를 좋아했다. 소성 현상윤과도 무슨 논전을 한 일이 있다. 창간초의 동아일보에 잠깐 들어갔었지만 언제 들어갔다가 언제 나왔는지 電光石火[전 광석화]적이었다.

그 뒤 고경상은 후원으로 동인제로 <폐허>가 났다가 없어졌지만, 상섭은

<폐허>에서도 한 그림자 엷은 존재였다.

남궁벽의 아버님 남궁훈 노인이 安秉畯[안병준] 앞에서 조선일보 사장이 될 때 상섭은 남궁벽의 인연으로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명 청년 상섭의 아래 사원이 통제될 리가 없어서 곧 불신임 문제 가 일어나서 꼭 사흘 국장 노릇하고는 물러나왔다.

그 뒤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잠깐 갔었지만, 이 역 언제 갔다가 언제 그만두었는지 전광석화다.

문학 동면기에 내가 패밀리 호텔에서 놀아날 때 상섭은 가끔 호텔로 놀러 와서는 그의 능변적인 너부죽한 입을 놀려가면서 뒷날 그의 장편소설에서 보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화술로써 사람을 고혹케 하고 하였다.

그 뒤 나는 그 새의 1년간의 놀이에서 피곤도 하고 염증도 생겨 잠깐 동경 으로 산보를 다녀와서는 평양의 내 가정으로 돌아와서 그 새의 피곤을 삭였 다. 대동강에 김찬영과 마상이〔小舟[소주]〕를 내다가 띄워 놓고 낚시를 대동강에 던지고 그 새 모진 놀이에 피곤한 머리와 몸을 고요히 쉬었다.

그동안에 상섭은 육당 최남선 주재의 東明社[동명사]에 들어가서 <東明>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23년 상섭이 동명사에 있으면서 내게 소설 하나 써 보내라고 부탁하였 다. 이 요구에 나는 3·1 옥중기의 한 토막으로 「笞形[태형]」을 써 보냈다.

이 전후하여(1923, 4년경이라 생각된다) 지금껏 천도교의 기관지인 듯한 느낌이 강하던 <개벽>이 차차 종합잡지로 체재를 갖추며, 처음은 좌익 색채 가 강렬하다가 민족주의 색채로 변하여 동시에 적지 않은 페이지를 문예란 에 제공하였다.

한낱 문예비평가로 자임 타임하던 상섭이 <개벽>에 그의 처녀작 「標本室 [표본실]의 靑[청]개구리」를 발표하였다.

이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대하여 나는 1929년 조선일보 지상의 ‘朝鮮 近代[조선근대] 小說考[소설고]’라는 소론에 이렇게 썼다.


‘그 새 문예비평가로 방황하던 상섭은 이에 비로소 소설 작가로서의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더우기 그의 능란하고 풍부한 어휘는 문단의 경이였다. 뒷날 내가 아내를 잃고 독신으로 지낼 때에 상섭은 누차 나더러 경기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고하였다. 춘원의 소설 문장이 그처럼 화려한 것은 춘원 부인 허씨의 어 학 코치의 덕이라 하며, 경기 여인의 好辯[호변]이 소설 제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뜻으로 나더러 경기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상섭의 호의적 충고를 좇지 않고 평안도에서도 용강이란 시골, 용강서도 농 촌 처녀를 아내로 맞아서 가정을 이루고 현재에 미쳤었지만, 나더러 그런 권고를 하느니만치 상섭은 자기의 경기인인 풍부한 어휘를 아낌없이 소설상 에 썼다.

(약)성섭이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소설을 썼다. 이 사람이 소설을 썼 구나, 나는 이런 마음으로 그 작품을 보았다. 그러나 연재물의 제1회를 볼 때, 나는 큰 불안을 느꼈다. 강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직각하였다. 이인직 (국초)의 독무대 시대를 지나서 이광수(춘원)의 독무대, 그 뒤 2, 3년은 또 한 나의 독무대 시대에 다름없었다.

(약)과도기의 청년이 받은 불안과 공포―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타난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상섭의 출현에 몹시 불안을 느끼면서도 이 새로운 ‘하믈레트’의 출현에 통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약)….’

文學[문학] 開花[개화][편집]

조선문학 발전에 있어서 <개벽>의 공적은 크게 보아야 할 것이다.

동인잡지 <창조>를 지나서 동인잡지 <폐허>와 동인잡지 <백조>― 이렇듯 신문학의 업은 동인잡지에서 싹터서, 동인잡지니만치 각각 자기네의 성곽처 럼 지내다가 1922년의 동면기에 들었던 것이다.

이 동면에서 깨날 때 그들의 작품을 받아 소화할 만한 기관은 오직 <개벽> 하나였다.

인제는 <창조>니 <폐허>니 <백조>니 파당적 색채를 떠나서 한 조선의 문학 자로서 모두 <개벽>에 모여들었다.

상섭이 두각을 낸 것도 <개벽>이거니와 빙허(현진건), 도향(나빈), 노작 (홍사용) 등 <백조> 잔당이며 朱耀燮[주요섭](요한의 동생), 素月[소월](金 廷湜[김정식]) 등이 이름을 나타낸 것도 <개벽>이었다.

상섭이 먼저 나왔는지 빙허가 먼저 나왔는지는 지금 기억에 모호하지만, 곧 뒤이어 도향까지 나타나서 조선의 소설단이 찬란한 競艶[경염]을 <개벽> 지상에 전개하였다.

요한의 시도 <개벽>에 나타났다. 노작의 시도 나타났다.

더우기 민요시인 소월(김정식)의 출현은 온 문단의 경이였다.

소월은 본시 안서(김억)의 제자였다. 안서의 문하에서 시도를 닦을 적에는 그 시풍은 물론이요, 원고용지의 모양 형식까지도 스승 안서를 본따므로 우 리는 그의 장래성을 아주 무시하였는데, 그가 자기의 길을 민요에서 발견하 고 「朔州龜域[삭주균역]」을 노래부르며 문단에 데뷔할 때에 그의 스승 안 서를 비롯하여 온 문단은 이 놀라운 천재의 출현에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스승인 안서부터가 지금껏 固持[고지]하던 자기의 시풍과 시도를 버리고 제 자인 소월의 개척한 신민요를 개종을 한 것이다.

박명한 천재 김소월―.

개화해 보기 10년도 못 하여 소월은 그만 저 세상으로 갔다. 모진 술이 그 의 젊은 생명을 빼앗았다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민족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은 영구히 우리 문학상에 빛날 것이다.

스승 안서의 손을 빌어 「素月詩集[소월시집]」이 간행되어 오늘에 이른 점은 시집 한권 못내 본 남궁벽에게 비기어 나은 편이나 소월의 업적에 대 해서는 한 개 기념비라도 있을 법한 일이다.

<白潮[백조]> 殘黨[잔당]의 걸음[편집]

<백조>는 <창조>나 <폐허>에 관계없는 젊은 문학 애호자의 총 모임이니만 치 일정한 주견과 주장 색채가 없었다.

그런지라 빙허(현진건), 도향(나빈)이며 노작(홍사용), 월탄(박종화), 夕 影[석영](安碩柱[안석주])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는 懷月[회월](朴英熙 [박영희]), 八峰[팔봉](金基鎭[김기진]) 같은 조선 좌익문학의 창시자가 또 한 있었다.

회월이나 팔봉이나 무슨 확호한 신념 아래서 좌익문학과 좌익사상을 주장 한 바가 아니고, 다만 젊은 객기와 호기심에 겸한 한 때의 외입과 반동 기 분으로 그리로 달린 것은 뒷날의 그들의 행보를 볼지라도 알 수 있거니와 당년의 회월은 가장 적극적으로 좌익문학을 주장하여 한때 無技巧文學[무기 교문학] 전성의 시대를 현출한 일이 있었다.

이 무기교문학은 그 발상지가 소련이요, 일본을 거쳐 조선에 수입된 것으 로서,

‘무산자는 어느 何暇[하가]에 기교를 희롱한다는 한가로운 재간을 할 겨 를이 없으니까 문학에 있어서도 소재를 독자 앞에 제공하면 그뿐이지 기교 를 희롱하는 것은 부르조아 문학이라.’

하는 이론 아래서 살인 방화 소설과 주먹마치 시가 한때 문단을 횡행하였 다.

그러나 팔봉은 회월과 달라 약간 온건파로서 문학은 건축과 같은 것이라는 이론으로 한동안 회월과 올싸움을 하였으나 회월의 정열에 압박되어 마지막 에는 회월에게 굴복하였다.

한편 구석에서는 이런 이론이 주장되고 진전되는 동안도 온건파에 속한 우 리들은 그런 주장을 무시하고 오직 고요히 우리의 참된 문학을 건설하기 위 하여 매진하여,

‘문학은 문학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

는 가장 평범한 진리가 확인되는 날까지 우리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년에 회월은 열정적이요, 부딪치면 반드시 쏘는 살벌〔針峰[침봉]〕같은 사람으로서 당시의 문사로 회월에게 한두 번 쏘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맹장들(회월, 팔봉 등등)도 한두 번 경찰과 감옥의 맛을 본 뒤에는, 그 만 질겁을 해서 180도를 더 한 번 꺾어 360도로 極左[극좌]에서 極右[극우] 로 조선인의 일본 황민화운동의 최선봉으로 혹은 ‘文人報國會[문인보국 회]’며 혹은 ‘國民總力聯盟[국민총력연맹]’의 간부로서 활약하다가 국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조선이 소련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던 20년 전 사상과 조선인이 일본 황 민되기를 부르짖던 5년 전의 주장을 다 청산하고 고요히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리는 그들― 그들 역시 단군의 후손이요, 배달 종자였다.

이 뒤에 그들이 다시 민족문화 운동의 선두에 나서서 지휘봉을 두를 날이 있을런지? 오십 가까운 늙어가는 몸이라, 과거의 소련 추종과 일본 추종의 과오를 청산하고 다시 재출발의 길에 올라서기에는 앞날이 너무 짧다. 만약 재출발하는 세월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들의 재분은 불순한 환경 때문에 헛 되이 썩는 것이니 이 또한 아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羅稻香[나도향][편집]

1923년 여름 나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발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어떤 출판사에서 출판하자고 교섭이 있었지만 무책임한 출판사가 무책임하 게 출판하는 것은 나의 프라이드가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인쇄소(한성도서주식회사)에 갔다가 내 처소(태평여관)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도중에 있는 청진동 안서의 여관에 들렀더니, 그때 안서는 웬 손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흰 린넬 쓰메에리 양복을 입은 얼굴에 굴곡 많은, 나이의 나보다 한두 살 아래로 보이는 키는 작은 편인 젊은이였다.

나는 그 젊은이의 입은 옷이며 얼굴 생김이 마치 형사 같으므로 형사인가 하여 도로 돌아설까 하는데 안서가 그 젊은이를 나도향이라 소개하였다.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라는 도향의 소설을 본 기억이 있는지라, 이 친구가 도향인가 호기심은 났으나, 그 형사 같은 첫 인상이 불쾌하여 나는 뚱한 채 그다지 말도 사괴지 않고 그냥 내 처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도향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와서는 서슴지 않고 린넬 저고 리를 벗어서 병풍에 걸고 마루에 장기판을 보고 장기둘 줄 아느냐고 묻는 다.

“약간.”

나는 어제의 인상이 좋지 못한 찌꺼기가 있어서 흥미없는 듯이 대답하였더 니,

“한 번 놉시다.”

하면서 장기판을 들여왔다.

몇 번 놀았는지 그 승부가 어땠는지는 4반 세기를 지난 옛날이라 기억이 없지만, 서로 수가 비슷비슷하였다고 기억한다. 장기를 몇 차례 논 후에 도 향은 나에게도 눕기를 권하며 자기도 보료 위에 번뜻 자빠누웠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참 뻐근뻐근 빨다가 문득 어두운 데 홍두께로,

“김 형, 사람의 세상은 왜 이리 외롭소?”

한다.


‘종로 네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사람들이 곁으로 앞으로 휙휙 지나 갑니다. 그들이 내 얼굴을 보면 마주보며 미소해 주려고 벼르지만, 눈만 마 주치면 얼른 외면해 버리고 그냥 씁쓸히 지나가니 사람의 세상이란 꼭 그렇 듯 서로 무관심히 지내야 합니까?’


그의 소설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에 나타난 적적미를 나는 여기서 그 본인에게서도 발견하였다.

“도향, 우리 술 먹으러 갈까?”

“대찬성! 대찬성.”

어제의 불쾌하던 인상이 기억을 깨끗이 씻고 두 젊은 소설학도는 작반하여 청량리로 나갔다.

그로부터 매일 도향은 나의 처소에 와서 날을 보냈다.

육당(최남선)이 <시대일보>의 주인이 되며 염상섭이 <시대일보> 사회부장 이 되면서 빙허(현진건)와 도향이 사회부 기자가 되어 <시대일보> 사회부는 소설작가로 조직되었다.

그 겨울에 나는 무슨 일로 상경하여 저녁에 우리는 어떤 술집으로 갔다.

우리란 염상섭, 나도향 및 朱鍾健[주종건]이라는 공산주의자(역시 <시대일 보>기자)였다.

그 자리에서 주종건은 주로 내게 향하여 공산주의의 설법을 시작하였다.

염상섭은 소위 ‘진보적 사상’이라 하여 얼마만치 공산주의를 시인하는 사 람이었지만 이런 설법을 만나면 또한 그의 성격상 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 이었다. 내게로 향한 주종건의 설법에 대하여 상섭이 대맡아 논전이 시작되 었다.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문득 한 마디 끼어 보았다. 소위 체면이든가 체재라든가 하는 것을 공산주의에서는 어떻게 보느냐고.

“체재라든 체면이라든, 그런 건 다 소부르조아적 근성입니다.”

“그럼 주 공, 이건 내 눈이 무딘 탓인지는 모르겠소마는, 주 공 가슴에 걸려 있는 싯누런 시계줄을 나는 도금줄이라 봤는데, 설사 도금이 아니고 진정한 금이라 한들, 니켈이나 그저 쇠줄이나 노끈을 쓰지 않고 싯누런 줄 을 쓰는 건 무슨 까닭이오? 또 실례지만 그 줄 끝에 시계가 있기는 하오?

알맹이 없이 누런 줄만 가슴에 장식한 건 아니오? 주 공이 싯누런 시계줄을 가슴에 걸고 있는 동안은 공산주의 선전의 자격이 없다고 나는 보오.”

도향이 연해 발가락으로 내 무릎을 꾹꾹 찌르는 것은 통쾌하다는 뜻인지 너무 심하다는 뜻인지는 모르지만 주씨는 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쳐 버 렸다.

그 자리를 파한 뒤에 염(상섭)은 나더러 너무 심하다고 나무랐지만 도향은 소년처럼 올라뛰며,

“김 형 만세! 김 형 아니면 못할 말, 김 형만이 할 수 있는 말― 김 형, 만만세! 만만세!”

하며 좋아하였다.

나이 젊은 사람, 더우기 경제적으로 불순한 환경에 있는 사람은 아주 감염 치기 쉬운 공산주의로되, 도향은 불순한 환경의 젊은이이면서도 끝끝내 거 기 대립하여 있었다.

1924년 겨울 춘해가 <조선문단>을 창간하였다. 원고료를 200자 한 장에 50 전씩 내었다.

이 원고료는 <개벽>에서 먼저 시작한 일로서 <창조> 잔당들은 돈으로 글을 팔랴 하여 도리어 불쾌하게 보았다.

그러나 나만은 강청에 못이기어 글을 썼지만, ‘개벽사’건 ‘조선문단 사’애당초 내게는 원고료를 낼 생각도 안했고, 나도 받을 생각도 안했고, 그런 만치 글쓰는 데 자셋상스러웠다.

그러나 재경 문사들은 이 두 잡지사의 원고료가 술값 도움에 적잖은 보탬 이 된 모양이었다.

여기 대해서는 뒤에 더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도향은 여기서 약간 여유가 생긴 모양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러나 동경에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귀국하였다.

동경서도 異鄕[이향]의 적적함을 여러번 엽서로 하소연하던 도향이라, 그 가 귀국한 뒤에 나는 일부러 상경하여 그를 만났다.

평양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도향의 하소연에 꼭 오라고, 오면 술과 기생 은 싫도록 대접하마고, 도향이 下壤[하양]할 날까지 약속하고 나는 평양으 로 돌아와서 도향의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을 당하여 도향에게서 사정 때문에 못 간다는 엽서가 왔다.

그 사정이란 물론 찻삯 등 경제사정일 것이 짐작이 가서, 이 뒤 상경할 기 회가 생길 때 함께 데리고 오리라고 벼르는 동안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신 문지는 도향의 죽음을 알렸다.

나는 이 신문보도를 보고 소리없이 울었다. 총각으로 죽은 도향이었다. 굴 곡 많은 얼굴이며, 땅딸보 키며, 가난이 여인의 사랑을 끌 매력이 없는 것 이라 살틀하고 다정한 도향이었지만 그의 짧은 생애를 고적하고 쓸쓸하게 마치었다.

그 뒤 얼마 지나 역시 고인 曙海[서해](崔鶴松[최학송])에게서 도향의 비 석을 해 세우려 하니 얼마간 찬조하라는 편지가 왔다. 나는 그때 왜 이런 태도를 취하였는지 지금까지도 생각날 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 하는 바이지만, 그때의 서해의 간곡한 편지에 대하여 나는 내가 <조선문단>에 글을 쓸 터이니 그 원고료를 받아서 비석 비용에 보태라고 회답하였다 (서해는 그때 조선문단사에 있었다).

그때 서해가 조선문단사에서 내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얼마 받아서 비석 비 용에 보태 썼는지 어떤지는 따져 본 일이 없지만, 뒷날 사진으로 본 도향의 비석(작다란 화강석 비석이었다) 따위는 도향에게 대한 우정 관계로든 서해 에게 대한 의리 관계로든, 나 혼자의 힘으로라도 넉넉히 해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서해는 내 태도를 불쾌히 여겼는지, 혹은 조선문단사에서 내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얼마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도향의 비석은 서해의 힘으로 건립되었 다. 가장 기대 크던 도향이었다.

나이 어리니만치 아직 미성품 채로 사라진 도향이지만, 여러 각도로 뜯어 보아서 가장 기대 크게 가질 작자였다.

도향 죽기 전후의 조선문단(주로 소설단)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자면 최서 해는 조선문단사의 식객으로, 사원으로, 서기로, 하인으로, 명목 모호한 존 재로 겨우 몇 편의 창작으로 출발하려던 무렵이라 말할 바이 없고, 빙허(현 진건)는 질보다 재간이 과승하여 재간으로 메꾸어 나가던 사람이요, 염상섭 은 그 풍부한 어휘와 아기자기한 필치는 당대 독보지만 끝막이가 서툴러 ‘미완’혹은 ‘계속’이라고 달아야 할 작품의 꼬리에 ‘끝’자를 놓는 사람이요, 월탄(박종화)은 <개벽>에 창작 몇 편을 실어 보았지만 습작 정도에 지나지 못하고, 중일전쟁 전후에야 <매일신문>에 ‘신문소설’을 써서 비로소 대중 적으로 알린 사람이요, 춘해(방인근)는 그때부터 오늘까지 전진, 후퇴 전혀 없는 사람이요, 나 역 시 그 시절 작품은 모두 묻어 버리고 싶은 형편이니 말할 것도 없고, 이러 한 문단 형편에서 도향을 잃었다는 것은 조선문학 발전에 지대한 손실이라 지 않을 수 없다.

도향의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은 영양부족한 창자에 독한 냉주를 끊임없이 사발로 들이킨 때문이다.

소월하며, 도향하며, ‘조선’이란 땅은 천재를 내려주기는 너무도 아까운 땅이다. 성경의 귀절에 있나니 가로되,

‘도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지 말라. 도야지는 진주의 그 무엇임을 알지 못하느니라.’

영양부족으로 죽은 도향의 비석에 이 구(句) 한 귀를 새겨 주고 싶다.

<靈臺[영대]>[편집]

1924년 여름 안서가 평양에 왔다. 아직 <조선문단>이 창간되기 전이요,

<개벽> 혼자서 활보하던 시절이었다.

김찬영, 김억, 나, 이렇게는 대동강 특유의 정취인 ‘어죽놀이’를 하고 강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요리집에 들렀다.

강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였다.

동인잡지가 없으면 자연 게을러진다. 의무적으로 꼭 써야 할 기회가 없으 면 자연 붓을 들기 싫어지는 것이 인정이다. 게다가 우리의 기관 잡지가 아 닌 잡지에 글을 쓰자면 자연 눈칫밥 먹는 것 같아서 쓰고 싶은 소리를 마음 대로 쓰지 못한다.

뿐더러 <개벽>은 원고료를 바라서 쓰는 것 같아서 쓰기 싫고, 거저 쓰자니 남의 시비가 있고, 모두 귀찮으니 동인제의 잡지를 또 발간해 보자는 것이 었다.

이야기(의논)는 일사천리로 진척되어 곧 착수하기로 하였다. 동인으로는, (가나다순) 金觀鎬[김관호], 素月[소월] 金廷湜[김연식], 金東仁[김동인], 岸曙[안서] 金億[김억], 流暗[유암] 金興濟[김흥제], 惟邦[유방] 金瓚永[김찬영], 長春 [장춘] 田榮澤[전영택],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 蘆月[노월] 林長和[임 장화], 天園[천원] 吳天錫[오천석], 朱耀翰[주요한].

이러하였다. 이것을 다시 따지면 예전 <창조> 동인에서 김환과 최승만, 동 원(이일)이 없어지고, 소월(김정식)과 유암(김여제)이 새로 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약간(진실로 약간)의 이동이 있는 밖에는 <창조> 동인 그대로였 다.

제호는 ‘靈臺[영대]’라 하기로 하였다. 옛날 문왕의 ‘영대’의 인연도 상서롭거니와, 한문 글자 ‘영대’의 네모나고 묵직한 생김생김도 노블리티 하였고, 글자의 획수가 많으면서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글자라는 점도 마음 에 들었거니와, 이남 발음으로 ‘영대’, 서도 발음으로 ‘녕대’라는 그 리듬과 신령 령자(靈[영]) 집 대자(臺[대])가 합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고 답적인 취미에 적합하여 제호는 ‘영대’라 하자는 내 의견은 이의없이 채 택되었다.

그 직전에 상해에서 귀국해 있던 춘원(이광수)과 요한(주)도 오래간만에

<영대>에 붓을 잡았다. 요한보다도 춘원은 진실로 오래간만에 창작 집필이 다. 「人生[인생]의 香氣[향기]」라는 자서 소설을 썼다.

편집도 평양서, 인쇄도 평양서 하기로 하였다. 평양에는 동인으로는 김찬 영과 내가 있을 뿐이다. 書家[서가] 盧三山[노삼산]에게 제호를 받아오고, 중국 고금명가 필적으로 ‘영’자와 ‘대’자를 수십 장 골라서 짝맞추고

‘앙리 마티스’와 ‘피카소’등의 素畫[소화]를 커트로 모고 목각 컷을 새 기고―.

이렇듯 만단 준비를 다하여 1924년 8월 초하룻날 창간호가 나왔다.

이 <영대>가 나온 직후에 서울서는 춘해(방인근)의 손으로 춘원 주재라는 명색으로 <조선문단>이 창간되었다.

또 그 직후에 예전에 <폐허> 잔당들이 모이어 <폐허이후>를 내었는데 창간 호 즉 폐간호로 되어 버렸다.

<영대>는 1924년 8월에 창간하여 1925년 정월에 제5호까지 내고 폐간했는 데 평양 光文社[광문사]라는 광고지나 인쇄할 능력을 가진 인쇄소에 페이지 物[물]을 맡기고 보니 그 고생과 고심이 여간이 아니었다.

요행 직공들의 헌신적 협력(직공장이 나와 소학 동년 동창이었다)과 경영 자 측의 희생적 원조의 덕으로 서너 달 뒤부터는 조금 낫게 되었으나, 처음 은 참 맹랑한 상태로 도저히 할 것 같지 않았다. 매달 우리가 지불하는 인 쇄료의 반액에 해당하는 새 활자를 계속적으로 사들여서 조금 인쇄소 꼴이 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서 판매를 맡은 노월(임장화)과 안서(김억)에게서는 판매대금 을 엽전 한 푼도 오지 않았다. 그 실정을 조사해 조고자 나는 1924년 상경 하여 몸을 임노월의 집에 던졌다.

임노월이라는 친구 재미있는 친구로서 탄실 김명순과 동서생활을 하다가 탄실은 모에게 빼앗기는 체하고 밀어치우고 현재는 金元周[김원주], 지금은 중이 되어 있는(수행 누락)과 동서를 하고 있었다.

김원주는 본시 모 전문학교 교수의 영부인으로 조선 신여성계의 혁혁한 존 재로 있었는데(주원 자신의 말에 의지하자면) 남편인 교수씨의 의족(교수씨 는 다리가 제 다리가 못 되고 의족이다)이 밤마다 선뜩선뜩 맨살에 닿는 것 이 역하여 임노월의 유혹에 응하였노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3, 4년 전 李東園[이동원]의 소개로 서울 어떤 고지대의 문화주택(교 수씨의 댁)의 마담으로서의 김원주, 신여성계의 지도자요 花形[화형]으로서 의 김원주를 본 일이 있느니만치 지금 임노월의 집에서 행주치마를 입고 된 장찌개를 끓이는 김원주에게― 더우기 임노월의 안해인지 소실인지 정체불 명한 김원주에게 매우 모멸하는 눈초리를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신경이 약간 둔한 김녀는,

“아이고 김 선생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고 반겨 맞는다. 나는 그 날 하루를 노월의 집에서 묵고 이튿날 노월에게 (원주도 듣도록),

“자네네 집은 제일에 춥고, 그 위에 나는 된장국과 콩나물만으로는 밥이 목을 넘지 않으니 여관으로 떠나노라.”

고 선언하고 그의 집을 나와서 나의 年來[연래]의 定宿[정숙]인 태평여관으 로 옮겼다.

나는 그때 <영대>에 「遺書[유서]」라는 소설을 연재 중으로 신년호까지 나 나야 끝날 예산이었다. 그래서 신년호까지는 부득이 내야겠는데 <영대> 판매대금의 행방을 조사해 보니 안서의 술값과 노월의 콩나물 값으로 둘이 경쟁적으로 ‘총판매소’에서 찾아가는 형편이었다.

이에 <영대>는 신년호까지나 내고서는 폐간하려고 마음먹고 다시 평양 집 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와서는 김찬영과 의논하고 <영대>는 생명 6개월로, 제5호로 폐간하였다.

<영대>를 걷어치우기로 하고, 나는 소위 ‘산보’차로 잠깐 동경을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더니, 춘원도 「인생의 향기」가 중단되는 것을 아꼈고, 안서는,

“<영대> 제6호는 어찌하고 동경으로 산보를 가느냐?”

고 항의하였다. ‘동경 산보’면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로 끝날 것이 아니 고, 한두 달은 걸릴 것이니 그동안 <영대>는 어쩔 작정이냐는 것이다. 그래 서 유방(김찬영)의 의견이 폐간하는 게 좋겠다 하여 폐간하기로 합의가 되 었다 하니, 안서는 깜짝 놀라며 폐간이란 웬 말이냐 한다. 그래서 솔직하게 폐간 이유를 말했더니 안서는 ,

“여보게 연말연시가 아닌가, 양해하게 양해하게.”

그러나 이미 왕복 차표를 산 터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듯 <영대>는 다섯 호로 다시 죽었다. <영대>는 다섯 호로 죽었지만 조 선문학 발전에는 아무 공헌도 없이 폐간된 것이다. 예전 <창조>를 발간할 때는 동인들의 의기가 벌써 ‘조선문학 건설의 본화’라는 생각 아래서 정 열과 정성으로 불탔지만 이번의 <영대>는, 1. 게을지 않기 위하여 1. 눈칫글 아닌 글을 자유로이 쓰기 위하여 이처럼 순전히 우리 동인들 자신의 필요와 욕구 때문에 생겨 났던 것이라, 거기는 조선문학을 건설한다든가 발전시킨다든가 하는 의욕은 낄 여지가 없 었다.

일본은 그때 대정 14년으로서 제1차 전쟁으로 돈벌이도 많이 하였고 문화 발달도 많이 한 ‘大正[대정] 爛熟期[난숙기]’였다. 난숙기의 일본의 수도 동경은 漫步者[만보자]의 기분으로 간간 들여다보기는 흥미있는 일이었다.

파산의 비극을 겪고 경제적인 여유를 잃기 이전까지는 나는 1년에 한두 번 씩 동경을 ‘산보’식으로 다녀오는 것이 취미요, 겸해 습관으로 되어 있었 다.

이리하여 <영대>를 집어친 뒤에는 또 잠깐 동경을 다녀온 것이다.

<朝鮮文壇[조선문단]> 시대[편집]

1924년 가을 춘해 방인근이 자기 시골 진답을 죄 팔아가지고 상경하여 춘 원 이광수의 집에 기류하면서 이광수 주재, 전영택․주요한 고문이라는 구호 로써 월간 문예잡지 <조선문단>을 창간하였다. 상해에 망명해 있던 이광수, 주요한 등이 그 직전에 ‘귀순’을 표명하고 귀국해 있던 것이었다. 그때는

<창조>의 잔당들의 <영대>를 간행한 직후요 <폐허>의 잔당들이 <폐허이후>를 계획 중인 시운이었다.

오늘날에 앉아서 보자면 이 춘해의 <조선문단>은 조선 신문학사상 몰각할 수 없는 큰 공적을 남기었다. 춘해 자신은 우금 조선문학에 기여한 한 개의 작품도 만들지 못하였지만, 그의 창간한 <조선문단>이 문학사상 남긴 공적 은 지대하다.

염상섭, 나도향, 현빙허 등이 스타트를 한 것은 <개벽> 지상이었지만 소설 가로 토대를 완성한 것은 <조선문단>에서였다.

서해(최학송―아까운 천재였다)의 요람도 <조선문단>이었다. 蔡萬植[채만 식]의 요람도 <조선문단>이었다. 尙虛[상허] 李泰俊[이태준]의 문학청년으 로서의 요람, 鷺山[노산] 李殷相[이은상]의 요람, 그 밖 적잖은 작가들이 이 <조선문단>을 요람으로 출발하였다.

이 가운데도 서해 최학송은 출중한 거물이었다. 삯꾼, 부두 노동자, 중, 아편장이 등의 파란중첩한 고난살이의 과거를 가진 최서해가 마음에 불붙는 문학욕을 품고 찾아든 것이 오래 전부터 사숙하던 춘원 이광수였다. 그 집 이 겸해 조선문단사 임시 사무소 겸 춘해 방인근 기류처였다.

춘해는 그때 조선문단사 주인(사장)이요 또한 스스로 기성인이라 자진하던 시절이요, 서해는 장차 출발하려는 아직 ‘알(卵)’이라 서해는 처음 조선 문단사의 사환 겸 문사 겸으로 있었다. 그때 갓 바람이 난 방춘해가 기생집 에라도 묵고 싶으면 서해를 시켜 인천쯤으로 가서 서해는 전화를 조선문단 사로 걸어서 방춘해의 부인(田有德[전유덕] 여사요 전영택의 매씨다)에게,

‘지금 잡지사 용무로 방 선생(춘해)과 함께 인천에 왔는데 혹은 오늘 밤 은 인천서 묵게 될런지도 모르겠읍니다.’

는 뜻을 통해 두고 방춘해는 마음놓고 기생(아마 김산월이라는 기생으로 기 억한다)을 품고 밤을 지새고 서해는 전화 끝내고 도로 서울 춘해에게 돌아 와서 방춘해가 기생 품고 자는 웃목에서 새우잠을 자는― 그런 불우한 세월 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방춘해가 서해에게 대한 대접은 너무 잔학하고 너 무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한창 문학욕이 왕성하여서 바야흐로 폭발할 듯이 문학정열에 들뜬 서해는, 이 주인 아닌 주인(방춘해)의 수모를 쓰게 보지 않고 오직 이 집에 기류해 있으면 많은 문사들과 지면할 기회가 있고 또는 방춘해의 감식 에 맞으면 자기(서해)의 글을 <조선문단> 잡지상에서 실을 수 있는 점을 고 맙게 보아서 굴욕적 생활을 탓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방춘해는 <조선문단>을 창간만 춘원 댁에서 하고는 용두리로 옮겼다. 시골 서 전답을 팔아 와서 돈이 있는지라, 문사들에게 원고료(200자 한 장에 50 전으로서 <개벽>도 그 정도였다)를 내주었다. 그리고 어느 편이 원인이고 어느 편이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즉 자기가 놀고 싶어서 문사들과 축지어 다녔는지 축지어 다니노라니 바람이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일같이 문사 들과 짝지어 놀러다니고 술 먹으러 다녔다. 명월관 지점, 혹은 태서관으 로….

나는 그때 평양 사는 사람이라, 늘 함께 놀지는 못하였지만, 상경하면 꼭 초대향응을 받았다. 그때 방춘해의 술을 많이 얻어 먹은 사람이 염상섭, 고 나도향, 고 현빙허, 고 유지영, 고 梁白華[양백화], 박월탄, 박회월 등과 심부름꾼 격인 최서해 등이었다. 그 모두가 斗酒[두주]를 사양치 않는 호걸 들이요, 또한 모두가 주머니 빈 사람들이라 매일같이 쓴 방춘해의 유흥비는 막대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방춘해의 부인 전유덕(호는 春江[춘강] 여사)은 지금은 고인이 된 사람이 지만, 유명한 신경질의 사람이요, 질투 세고 욕 잘하는 사람이었다. 염상섭 이며 고 현빙허 등이 방춘해를 끌어내려(술 씌우려) 조선문단사로 찾아갔다 가 춘해 부인 춘강 여사에게,

“이 개자식들, 뭘 하러 지근지근 남의 참한 서방님을 유혹하러 찾아다니 느냐? 배라먹을 자식들.”

이라는 욕을 얻어먹기를 수없이 하였고, 눈치보아 가면서 욕 안 먹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밀사로 보내는 수단까지 써서 방춘해를 끌어내고 하였다.

나는 평양 사람으로 그다지 방춘해를 끌어낸 일도 없거니와 춘강 여사의 오라버니 되는 늘봄 전영택의 친구요, 그 위에 선배되는 관계도 있어서 춘 강 여사에게 개자식이란 욕을 얻어먹은 적은 없지만, 염상섭, 현빙허, 박월 탄, 양백화 등은 개자식 욕을 욕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면역되어 있었다.

그 내가 어떤 해(1926년이라 짐작한다) 상경하여 그때의 정숙인 태평여관 에 투숙하여 저녁에 나도향을 만나 함께 태평여관에 묵은 일이 있다.

이튿날 아침 깨어서 그냥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며 나 도향과 이야기하고 있노라는데 방춘해 당황한 얼굴로 찾아왔다.

눈에 눈꼽이 낀 채로 소청하는 말이, 이제 자기의 안해(춘강)가 이리로 자 기를 찾으러 올지 모르겠으니 와서 자기를 찾거든 지난밤 함께 자고, 일찍 돌아갔다고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부탁을 하고 춘해 방인근이 돌아간 지 10분도 못 되어 우리(나와 나도 향)가 누워 있는 방문을 벼락같이 열며 춘강 부인이 들어섰다.

“우리 인근이 여기 있어요?”

나도향은 여러번 겪은 일인 듯이 그저 무심하였으나, 나는 대처 그 ‘우리 인근’이란 날에 놀라서,

“춘해 말입니까?”

곧 반문하였다.

“예. 그 녀석 그래 어디 있어요?”

“방금 나간걸.”

“자리 어디 폈었어요?”

거기는 나와 나도향 두 사람의 자리만 아직 개키지 않은 채 있는 것이었 다.

“보이가 개켜 내갔지요.”

“그래 어디를 간다구요?”

“댁으로 갔을걸요.”

히스테리 일으킨 여인의 독특한 흥분된 어조로 이놈을 , 이놈을 중얼거리 면서 다시 왜각 문을 닫고 돌아서는 춘강 여사에게 나는 오히려 공포감까지 느꼈다.

이런 무서운 암〔雌[자]〕범의 시하에서도 그냥 바람 부릴 수 있는 방춘해 의 용기가 깊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암범의 감시 아래 있 는 재경문사들의 재간에 또한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형편이라, 그때 방춘해가 제 집에서 외출을 하려면 內[내]허락을 받 지 않으면 안 되고 내허락을 따내기 위하여 최서해의 인천 시외전화의 수단 이 안출되었고(서해가 인천에 밀파되어 조선문단사로 전화 걸어 급한 社務 [사무]가 있으니 인천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다),그렇지도 못한 때는 뒷일은 어떤 벼락을 맞던 간에 부인의 눈만 안 떼는 데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춘해가 밖에 빠져나올 구실을 얻기 위해서 조선문단사에서는 교외 절간에 ‘좌담회’‘합평회’등을 자주 열었다. 그리고 그것(회합)뒤 에는 반드시 제2차 회가 어떤 요정에 열리었다.

나도 상경한 때마다 그러한 좌석에 참여했지만, 그때 함께 담소하던 벗이 대개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오늘날에서 회고하자면 감개 깊고 짝없이 그립 다. 나도향, 현빙허, 양백화, 유지영, 최서해, 전춘강 여사. 모두 아하 아 하.

그러나 돌아보건대 조선문학 30년에 그 시절이 가장 호화스러운 시절이 아 니었을까?

문단에는 파당적 분열이 없고, 선배와 후배 새에 샘이나 자만의 갈등이 없 고, 모두 서로 자기문학 건설에만 열중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3․1 운동 뒤에 신혼기분과 호경기에 따르는 생활안정 가운데서 마음이 모두 부 드럽고 용가하고 기운찬 분위기가 작품 행동에도 영향되어 활발하고도 무게 있는 작품들이 속출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방춘해의 공로도 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방춘해는 시골서 논밭을 팔아 가지고 서울 올라와서 <조선문단> 잡지와 술 값에 다 탕진했지만 '<조선문단> 시대' 라는 한 절기를 만든 것은 크게 감 사해야 할 것이다.

나의 原稿料[원고료][편집]

<영대>를 집어치운 뒤에 한도안 나는 한가한 몸을 대동강의 낚시질로 소일 하며 원고료 받지 않은 처지라, 그야말로 자셋상스럽게 기고를 하며 지내다 가 심심풀이로 훌쩍 일로 동경으로 ‘산보'를 갔다.

이 ‘동경 산보’라는 말의 유래는 이러하다.

어떤 때 동경까지 잠깐 놀러가느라고 평양을 떠나서 잠시 서울에 들렀는 데, 서울 전차에서 문득 오래간만에 춘원을 만나서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산보’라고 대답한 위에 이어서,

“동경 잠깐….”

했더니 춘원은,

“아, 동경 산보요? 과연 東仁式[동인식]이로군.”

하여 그 뒤부터는 동인은 동경을 산보처럼 다닌다는 말이 났고, 친구들을 만나면,

“동경 산보 안 가느냐?”

고 웃음의 말을 하게 된 것이다.

평양서 동경까지 왕복 차표를 사가지고 갔었는데 동경에 한 달쯤 놀고 인 젠 귀국하려고 보니, 왕복 차표에 돌아오는 절반 차표가 없어진 것이었다.

동경서 한 달 지내는 동안, 언제 어디서 잃었는지 알 수 없는 분실이었다.

장차 돌아갈 동안 기차에서 쓸 비용 밖에는 다 써버린 뒤라 귀국할 차비가 없었다.

그때 동경 왕복 차표는 통용 기한 두 달이요, 2할이라는 특전이 있으므로, 이 초라한 특전에 유혹되어 두 달 동안 보관하기 힘든 작다란 왕복을 샀던 자신을 내내 나무라면서, 일변 집으로 편지 띄우고 또 조선문단사와 ‘개벽 사’에 원고료를 좀 주겠느냐고 편지를 하였다. 그랬더니, 집(평양)에서와

<조선문단>, <개벽> 두 잡지사(서울)에서 같은 날 돈이 왔다.

미루어, 평생 처음 청구하는 원고료에 말 떨어지기 무섭게 곧 보낸 것이 분명하였다. 더우기 내 예상 이외로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이리하여 원고료라느 것을 동경여행 때 처음 받아 보았다.

두 잡지사에서 보낸 액수가 서로 같은 점을 보아서 당시 잡지사로서 작자 에게 대접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었던 모양이다.

보통 2등차를 타던 내가 예상 이외 필요 이상의 돈이 들어온 덕에 1등차에 푹 박혀 호화로운 기차 여행을 하여, 자기의 땀으로 번 돈을 쓰는 기분을 상쾌하게 느꼈다.

이것이 내게 있어서는 처음 받은 원고료인 동시에 처음 내 노력으로 번 돈 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의 관념은 여전히,

‘원고는 쓰되 돈을 받을 것이 아니라.’

는 것이었다. 원고에 대해서 돈을 받는다면 아무리 해도 심리상의 구속이 생길 것이요, 심리상의 구속이라도 있으면 맑은 맛이 없게 될 것이다. 한껏 자유로운 기분 아래서 붓을 잡기 전에는 아무리 해도 불순성을 띠게 된다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三千里[삼천리]>[편집]

방춘해의 <조선문단>도 춘해가 돈을 다 없앤 뒤로는 폐간하여 버렸다. 지 금 생각하면 그만한 부수가 나왔으면 수지는 맞을 성싶은데 술값이 너무 많 이 나가서 폐간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문단> 잡지가 없어지매 조선의 문단도 한때 침체였다. 잡지 <조선문 단>에서 빛을 競艶[경염]하던 꽃이 다 한꺼번에 사라진 모양이었다.

어느 땅이던 그렇겠지만, 우리 땅은 더우기 명료히 출판물과 문학과가 共 生共死性[공생공사성]을 보인다. 출판계가 아직 왕성치 못한 탓이겠지만, 잡지가 몇 개 생기면 문단도 활기를 띠고 잡지가 몇 개 없어지면 문단도 침 체하고, 잡지가 없어지면 문단도 동면기에 든다.

방춘해의 <조선문단>이 폐간되고 <개벽>이 적잖게 좌익화하자 몇몇 좌익계 열의 문사가 겨우 꺼져 가는 생명을 존속할 뿐, 신생 조선문단은 침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평양서 천하만사를 잊고 낚시질로만 소일을 하다가 그도 부족하여 또 놀아났다.

<조선문단>과 <개벽>의 원고료로 비교적 곤궁치 않은 생활을 하던 재경 문 사들은 <조선문단> 폐간되고 <개벽>이 좌익화하자 작가로서 밥줄이 끊겨져 서, 혹은 재빨리 신문사에 취직하며 혹은 문학을 폐업하며 등, 신생 조선문 단은 참담한 형태에 빠졌다.

이런 때에 巴人[파인] 金東煥[김동환]의 <三千里[삼천리]> 잡지가 조선문 학의 명맥의 한 귀퉁이를 붙드는 역할을 하였다.

파인은 감개성 많은 시인이었다. 동시에 조선일보 기자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건대(사실 여부는 보증하지 않는다.) 파인은 조선일보 기자로 당년 개 최 되었던 共進會[통진회] 끝난 뒤에 출입기자에게 준 수당금(진실로 약간 한 금액이다)을 가지고 버리는 셈치고 <삼천리>를 창간하였다는 것이다.

파인의 하숙집, 빈대투성이의 파인의 거실― <삼천리>사 편집실 발행과 발 송실, 영업실을 겸했고 파인이 사장 ․ 편집인 ․ 기자 ․ 하인을 겸한, 참으로 빈약한 출판이었다. <조선문단>을 요람으로 출발한 파인이지만, 그 당시는 진실로 무명한 시인이었다. 저널리스트의 열력도 적고 문단적인 열력도 적 고 한 사람이었지만, 그 재치있고 엇글수한 편집 기술에 일종 미혹성이 있 어 <삼천리>는 시골 독자에게 환영을 받았다.

돈이 없는 파인이요, 따라서 원고료를 내놓지 못하는 형편이며 우의에 호 소해서 얻어내는 원고와 파인 자신이 꾸민 폭로 기사, 에로 기사 등의 하잘 것 없는 내용의 <삼천리>였지만, 이 밑천 아니 먹힌 잡지사 시골 독자에 매 력 있었던 모양으로 비교적 잘 팔리었다.

게다가 또한 <개벽>은 좌익화하고 그 위에 잡지 내용보다도 원고료 지불을 아낄 필요로 신진급도 못 되는 무명인의 글만을 취급하는 형편인데, 파인의

<삼천리>는 그 목차가 벌써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낼 만하여 일테면 ‘삼천 리식’이라는 한 타입이 생겼다.

파인은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집어치우고 잡지에 전력을 하였다.

당시 잡지란 다 없어지고 오직 <개벽>과 <삼천리>(명색은 월간이지만 대개 서너 달 혹은 너덧 달에 한 호가 났다)뿐이라 작품 발표기관을 잃은 신시단 은 극도로 침체하였다. 때때로 마음 속에 충일된 창작욕에 참지 못하여 써 낸 우수한 작품들이 저절로 <삼천리>에 모여 <삼천리>에는 간간 <삼천리>답 지 않은 우수한 글이 발표되어 이 덕으로 <삼천리>의 인기는 더욱 높아 갔 다.

春園[춘원]의 再活動[재활동][편집]

이 문단 침체의 기간을 나는 평양서 돌아왔다.

그런데 상해 망명에서 돌아온 춘원 이광수와 주요한은 얼마 뒤에 동아일보 사에 들었다.

춘원이 다시 글(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광수 주재라는 명색의 춘해의 <조선문단>에 단편이 몇 편 있었지만, 춘 원 자신도 창작 방면에 자신이 없었던 듯 <영대>가 폐간되기까지 그 <영대>에 자서전 「인생의 향기」를 연재하다가 중단한 뿐으로 창작방면에서는 손 을 떼었다가 동아일보와 특수관계를 맺자 동아일보에 대중소설을 쓰기 시작 하였다.

이 춘원의 재활동은 신생 조선문학 건전한 발육에 지대한 장해를 주었다.

그때의 우리는 소설의 기초, 소설의 근간을 ‘리얼’에 두고 아직껏 「春香 傳」[춘향전]「沈淸傳」[심청전] 혹은 「九雲夢」[구운몽]「玉樓夢」[옥루 몽] 등이나 읽던 이 대중에게 생경하고 건조무미한 ‘리얼’을 맛있게 먹으 라고 강요하던 것이다.

그 구시대의 마지막 잔물이요, 신시대에 한 풀 들여민 이가 국초 이인직이 었다.

국초의 뒤를 이어 신문화의 봉화를 든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그러나 구시 대에서 신시대에 들어서는 춘원에게는 아직 낡은 옷이 너무도 여러 벌 입히 어 있었다.

그런 소설에 젖은 이 땅 대중에게 ‘리얼’만을 가지고 이것을 맛나게 먹 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혹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앞서는 정열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 생경한 ‘리얼’문학을 대 중에게 이거야말로 문학이라고 제공하고 있던 것이다. 대중은 짐작컨대 맛 은 모르고 이 맛없는 문학을 맛있게 받는 것이 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인가 하여, 맛없는 가운데서라도 맛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세월이 얼마를 계속하노라면 대중도 종내는 리얼의 ‘맛’과 ‘멋’

을 이해하는 시절에 이르리라는 장구한 생각으로, 우리는 그냥 우리의 리얼 의 길만 고집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때에 춘원이 재활약을 시작하여 리얼에 소화불량된 이 대중에게 다시 통속, 흥미중심의 소설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 문학발달에 큰 지장이 아닐 수 없다.

이 고장, 이 지장에도 불구하고 온 문단은 춘원과 別立[별립]하여 신문학 건설로 정로만 고루 밟았다. 그러나 발표기관이 없는지라. 움돋는 신문학의 싹은 자라지를 못하고 일견 사멸한 듯한 형태에 놓여 있었다.

동아일보가 조선 언론계에 군림하고 출판계에 군림하는 자리를 반석처럼 확보하는 반면에, 문학 발표기관은 없는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어 문학은 참 담한 형태로 떨어지고, 문단에서 고립된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배경으로 온 대중에게 지지받으면 커다랗게 일어섰다.

그러나 춘원이 재활동하는 처음 무렵에는 자기는 창작자는 못 된다는 스스 로 삼가는 마음으로 「許生傅」[허생부] 등의 講談[강담]으로 카무플라주하 는 풍이 보이었지만, 대중의 지지가 자기에게 있다고 믿은 뒤부터는 소설이 라는 칭호는 붙일 수 없는 설화를 역사소설이란 명칭으로 연해 동아일보에 썼다.


이것은 오직 춘원만을 허물할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의 사시가 그러하였 고, 사장 고 宋鎭禹[송진우]의 명령이 그러하였다. 송진우는 자기가 신문소 설(동아일보에 실리는)을 읽는 배가 아니요, 그의 안해(본시 평양 기생)가 신문소설의 고문이라, 안해가 읽어서 재미있다는 소설의 작가를 고르자니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요, 게다가 ‘신문 잘 팔리도록’이라는 조건이 붙고 보니 부득이한 일인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구소설에서 현대문학으로 올라가는 도정에는 그러한 계단은 없지 못할 층계이기는 하다. 게다가 신문지상에 소설을 이용하여 이 우리 민족에게 위정 당국이 감추던 우리의 역사를 알리고 민족사상을 주입 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흥 문학도들은 춘원을 문학도의 반역자라 하여 문단에서는 아주 제외하고, 춘원은 춘원대로, 문단은 문단대로 각각 딴 길을 걷게 된 것이 다.

춘원은 또는 요한은 나더러도 동아일보에 소설을 쓰라고 몇 번 말하였다.

그러나 문학의 길에 대하여 청교도 같은 주장을 가지고 있던 당년의 나는 동아일보가 고답적 소설을 용인하지 않는 한 , 나는 거기 붓을 잡을 수 없 노라고 내내 사절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신문학에 주춧돌을 놓았노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차마 문학의 진정한 발달에 저해되는 일은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 래 다시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당년에 그렇듯 프라우드하던 내가 돌변하여 역사소설로, 史譚[사담]으로 막 붓을 놀리어서 적지 않은 사람을 뒤따르게 하여 발전 노정에 있던 신문학을 타락케 한 것은 나로서는 나로서의 이론이 따로 있다 할지라도, 또한 스스로 후회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이렇듯 나는 평양서 놀아나고 있는 동안에, 그때(안서 김억도 평양에 와 있었다)의 문단은 사멸된 듯 고요하고 춘원이 홀로 대중소설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左傾文學[좌경문학] 擡頭[대두] 時節[시절][편집]

좌익문학이 대두한 것이 문단 부진의 그 시절.

소련에서 제조되어 일본을 거치어서 우리나라까지 수입된 그때의 이론은 문학상의 온갖 기교를 무시하자는 것이었다. 무산자는 기교를 희롱할 유한 한 신분이 못 되니 문학상의 모든 기교는 有閑[유한] 문학자에게 맡기고 무 산자는 기교를 무시한 문학을 만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문제로 같은 좌익문학 진영에도 회월 박영희와 팔봉 김기진과 의 사이에 대립이 생겨서 적잖은 논전까지 있었다.

종내 기교 무시를 주장하는 회월이 승리를 하여 좌익문학은 기교따위를 돌 볼 한가한 처지가 아니라는 논지 아래서 한때 소위 ‘살인 방화 소설’전성 시대를 현출한 일까지 있었지만, 온 문단이 침체한 시기에 주로 <개벽>을 터전으로 대두했는지라 처음 꽤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때 기성문인들은 다 동면상태의 시대라 좌익문학은 발생하면서부터,

“낡은 문학과 낡은 사상은 모두 사회에서 청산하였노라.”

고 개가를 크게 외쳤다.

그렇게 외쳐도 상당할이만치 문단은 고요한 동면상태였던 것이다.

소위 ‘청산’이라는 말은 좌익계열이 즐겨 쓰던 용어로서, 어떤 문사(우 익 계열의)의 어떤 사정으로 한두 달 혹은 반 년 일 년 붓을 쉬고 있으면, 성급한 좌익계열은 임시 휴식을 영구 정지로 속단을 하고 ‘청산했노라’고 쾌재를 외치고 하였다.

그러한 시기 도안을 나는 고향 평양에서 술과 계집과 낚시질로 모든 다른 일에서는 떠나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펄떡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그 새 6, 7년간에 굉장한 남용으로 내 재산상태가 현저하게 흔들림을 본 것이 었다.

이에 어느 권고하는 사람의 권에 따라서 나는 토지관개사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평양 근교에 몇백 정보되는 땅에 물을 대어 주어서 논을 풀게 하고 그 水稅[수세]를 받아 생활을 경영하기로 한 것이었다.

평양서 전선을 게까지 끌어내어 전기의 힘으로 물을 끌어 논을 푸는 것이 었다.

薄土[박토]가 美沓[미답]으로 변하여 거기 벼가 나서 자라는 것을 바라볼 때에 스스로 만족감과 긍지를 무한히 느끼면서 이 새사업에 도취하였다.

그 가을 수세로 들어온 큰 낫가리를 보며, 이만하면 내 경제생활은 그냥 유지되려니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 관개상업 불허의 지명이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일본 정부에서 쌀값 폭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朝鮮産米[조선산 미] 移入[이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거기 추종하여 産米制限 [산미제한] 정책을 쓴 탓도 있겠지만, 또 한 가지 원인은 그때 현장(개간) 을 조사하러 나왔던 일본인 관리와 민족 차별적 감정으로 언쟁이 시작되어 그 관리를 쫓아 돌려보낸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단지 물허가에 그친 뿐 아니라, 이미 개간했던 땅을 다 도로 원상 회복을 하라, 즉 논이 되었던 땅을 밭이나 뚝으로 회복해 놓아라 하는 것이었다.

전기를 끌어내다가 설비를 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걸린 데다가, 다시 원상 으로 회복해 놓는 데 다시 막대한 비용이 걸치어서, 그렇지 않아도 현저하 게 흔들림을 보았던 나의 재산상태는 아주 발가숭이― 잘못하면 큰 빚을 지 고 떨어질 형편이었다.

관개했던 땅을 다시 원상 회복을 하려면 나의 남아 있는 재산(땅)을 죄 팔 아버려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깨끗이 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명문소집 귀동으로 고이고이 자라나서 가난을 모르고 부족함을 모르 던 이 호화로운 젊은이가 장차 돈없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생각을 하니, 기 막히고 아득하였다.

천금의 귀한 줄을 모르고 만금의 많은 줄을 모르던 몸이, 이제 장차 푼전 에 딸리는 생활을 생각하매 그저 딱하였다.

그냥 지나가면 몇 해는 더 부족 모르고 지낼 것을 남의 꼬임에 빠져서 괜 한 노릇(관개사업)을 시작해서 재정적 몰락을 다그어 끌었거니― 나무려운 생각까지 매우 컸다.

나는 재산정리의 사무를 아내에게 일입하였다. 차마 내 손으로는 祖[조]의 유업을 팔아 없애기 싫어서 아내에게 말하여 이것 이것을 팔아서 정리하고, 그래도 모자라거든 이것 이것을 팔고 어느 것은 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거 든 최후까지 남겨 두라고 부탁을 한 뒤에 나는 그 모든 것이 차례로 팔리는 상황을 보기가 역하여 서울로 피해 올라왔다.

서울서는 中學洞[중학동] 어느 집에 몸을 던지고 그 겨울을 보내고, 이듬 해도 여름이 가까와서 집으로 돌아가 보니 본시 적지 않던 논밭은 다 없어 지고 그것을 팔아 빚을 정리하고, 꼭 남고 모자람 없이 들어맞더라는 아내 의 말이다.

中學洞[중학동] 時節[시절][편집]

‘文[문]은 窮也[궁야]라.’

하여 글과 궁함을 불가분의 것이라는 중국인의 말도 있고,

‘붓은 한 자루요, 젓가락은 두 개라.’

하여 한 자루의 붓으로 두 가락의 箸[저]를 당하지 못한다고도 하거니와, 더우기 이 땅의 문사들과 가난과는 숙명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연분인 양하 여,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중학동에 하숙하고 들어보니 자라던 신문학은 동 면에서 거진 사멸 상태요, 따라서 문사들은 모두 붓을 깊이 감추고 딴 직업 에 종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서해 최학송은 어는 券番[권번]의 기생잡지 간행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 데, 이것이 좋은 부류에 드는 지극 참담한 형편이었고, 안서 김억은 영리한 사람으로서 고향인 郭山[곽산]에는 밭낟알이나 있지만 그것은 처자를 위하 여 남겨 두고 단신으로 상경하여 어떤 출판회사에 「위인 와싱톤전」이니

「위인 그렛스톤전」이니 하는 것을 연해 팔아서 그것으로 그 새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고 ‘假面’[가면]이라는 개인잡지까지 한 호(두 호이든 가)를 내놓아 보기까지 하였으나, 이 침체기에는 안서까지도 할 수 없이 그 의 장기 ‘에스페란토’를 팔아서 그것으로 호구를 하다가 그것으로도 당할 수 없어 시골 논밭을 팔고 가족을 서울로 불러올리어, 서울서 살림을 하면 서 처세상 불리한 문우 교제는 아주 끊고 ‘에스페란토’제자들과만 교우를 계속하고 있는 즈음이었고, 주요한은 서대문 안에 ‘태백상점’이라나 하는 고무신 가게를 내고 고무신 장사에 겸 동아일보 기자(조사부장이었다) 노릇 을 하고 있었고, 염상섭은 술값이 없으면 두문불출하는 사람이라 꾹 집에 숨어 생사조차 형편이었고, 임노월은 고향 진남포에 내려가 있었고, 함께 따라갔던 아내( ? ) 김원주는 노월과 이별하고 혼자 서울 올라와 사직골 어 떤 하숙집에 하숙하고 새 남편을 물색중이었고, 춘해 방인근은 소식 불명이 었고, 신출이었던 노산 이은상, 상허 이태준, 채만식 기타는 전연 소식도 알 수 없었다.

滿月臺[만월대], 善竹橋[선죽교], 慶州[경주]의 시조와 역사대중소설로 뒷 날 이름을 나타낸 월탄 박종화는 그때는 아직 미미한 존재로서 白華[백화] 梁建植[량건식], 염상섭 등의 술친구인 관계와 <백조> 잔당인 관계로 문단 에 알리어 있었는데, 그는 서울 商家의 자제로 부호의 둘째 아들로 생활은 안정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와 형의 겹친 시하라 현금은 푼전을 손에 쥐어 보지 못하는 판이라, 역시 불경기에 문사축에 얼굴도 나타내지 않고 집에 박혀서 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듯 문사들은 각기 제 입 풀칠하기만 급급한 판국에, 나는 서울로 올라 와서 중학동에 하숙을 잡고 들어앉았다.

파산이라는 비운을 목도하지 않고자 도피해 온 나인지라, 꺼져들어 가는 암담한 심사를 속이기 위하여 하숙에 마장 상과 마장 쪽을 사다 놓고 보료 방석 화문석을 벌여 놓고 친구들을 청하여 매일 밤을 새면서 마장을 놀았 다. 대체 마장이란 유희는 바둑이나 장기와 달라서 돈을 거는 내기가 아니 면 싱거운 것이라 돈없는 문사들은 피하고 장사치들을 상대로 돈내기 마장 을 놀아서 그날그날의 암담한 심사를 속이고 있었다.

도박운이 약한 나는 적잖은 손해를 보고 하였으나 이런 노릇이라도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이만치 마음이 괴로왔다.

문사로서는 그래도 간간 푼전을 만질 수 있는 김억만이 한두 번 놀아 보고 는 손해 보았노라고 발을 끊고 오직 장사치들이 그때에 나의 동무였다.

그 겨울 어떤 잡지엔가 김원주(一葉[일엽] 여사)의 시― 라기보다는 예삿 글을 짤막짤막이 끊어서 딴 줄로 쓴 것이 발표되었는데, 그 글은 전문이 이 성이 그리워 죽겠다는 뜻으로 차 있는 글이었다.

임노월과 헤어져 혼자 사는 과부 김원주였으며 몸이 풍만하고 육감적인 일 엽 여사라, 이 글을 보고 그의 심경을 짐작했다. 더우기 일없이 하숙으로 찾아와서 한참씩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는 돌아가던 그가 생각나서 마음 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겨울 크리스마스날 일본의 대정 천황이 죽었다. 벌써 죽은 것을 감추고 있느니 어쩌니 항간 말썽이 많던 대정이 그 15년의 제왕 생애를 마치고 별 세한 것이었다. 일본의 대정 난숙기, 명치가 45년간 쌓아올린 제국에서 15 년간을 무사평온한 임금 노릇을 하다가 세상 버린 그 발표에 호의를 앞에 펴놓고 내 하숙에서는 역시 마장판이 벌어졌다.

2, 3일째 나는 치통으로 신음하고 있던 차이라 친구들에게 마장을 시키고 나는 보료에 누워서 참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밤도 김원주가 찾아왔다. 마장 친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껏 그냥 않아 있던 것이다.

일찌기 모 전문학교 교수의 영부인이었던 몸으로 임노월과 눈이 맞아 본남 편을 버리고 노월의 안해인지 첩인지 애인인지로 노월의 본댁 진남포에 한 동안 가 있다가 다시 노월과 헤어져(버렸는지 버리웠는지는 모른다) 홀몸으 로 지내는 그였고, 최근 그 성욕에 미칠 듯한 글을 공공연히 내놓은 그에게 동양 도덕적 불쾌감을 품고 있는 나는, 나에게 무릎을 베어줄 듯 가까이― 마장 상과는 등지고 있는 그를 외면하여 아까 복용한 강렬한 진통약에 취하 여 누워 있었다.

보통 밤을 새던 마장패들이 그 날은 11쯤 끝내고 내게 눈을 끔쩍 하면서들 돌아가는 것은 무슨 딴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진통제와 치통 에 부대낀 나는 그냥 담벽을 향해 누운 채 움직임 없이 있었다.

원주는 얼마나 더 앉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차가 인젠 끊어졌을 텐데 어떻게 가나―.”

혼자 걱정을 종알거리면서 밤이 꽤 깊어서 돌아갔다.

중학동서 사직골까지 거리는 약간 있으나 전차 탈 곳은 없는 것이다.

그 일이 뉘 입에서 소문 퍼졌는지 연말 가까운 어떤날 서해 최학송이 하숙 으로 놀러 왔다가,

“일엽, 살 푸근푸근하지요 ?”

하며 웃는다. 나는 “에이, 여보” 하여 일소에 붙여 버렸지만 그 뒤로 두 세 친구에게서 그런 조롱을 받은 일이 있다.

그 일 뒤로는 원주는 다시 중학동 하숙에 온 일이 없었다.


서해가 南[남] 某[모]( ? )라는 出財者[출재자]를 붙들어 가지고 그가 예 전 하인처럼 있으면서 조력한 일이 있는 방춘해의 <조선문단>을 속간하겠다 고 소설 한 편을 부탁하였다.

나는 <조선문단> 복간이 반가워서 오래간만에 붓을 잡고 내 외사촌 누이가 겪은 일을 토대삼아 한 단편을 만들어 서해에게 주었다.

「딸의 業[업]을 이으려」라는 단편이다. 그랬더니 이튿날로 몇십 원의 원 고료를 가져왔다.

지난날 동경서 차표를 잃고 조선문단사와 개벽사에 편지하여 좀 융통받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원고는 거저 주’고, 뒤에 <조선문단>과 <개벽>에서 는 또 한 사례의 의미로 보낸 것이지 매수를 세어서 원고료를 받은 것이 아 니었고, 이번 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의 첫 원고료였다.

매일 마장 도박으로 잃은 금액에 비기자면 하잘것 없는 적은 돈이었지만 이 돈이 고마워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돈으로 만년필과 잉크 스탠드를 사서 그 만년필로써 그 뒤 적지 않은 글을 썼다.

이 중학동 시절에 望洋草[망양초] 金明渟[김명정](혹은 김탄실 양)이 <매 일신보> 기자로 며칠 들어갔다. 이것이 여자 신문기자의 맨 처음이었다.

망양초는 ‘남편 많은 처녀’라는 일컬음을 듣던 사람으로서 일찌기 동경 유학 때에 몇 남편을 경유한 것을 비롯하여 귀국해서는 임노월을 경유(김원 주 보다 먼저다) 하고 유방 김찬영을 경유하고 그 뒤 서울서 처녀과부로 지 내던 터이었다. 따라서 딴 수입 없이 지내노라니 매우 곤핍하였고 들리는 평판에는 안서며 상섭이며 萬壽[만수]들이 식지 움직여 혹은 하숙으로 찾고 혹은 함께 산보를 청하고 했으나 정절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는 나는 보증치는 않는다.

망양초라는 사람은 뒷날 내 소설(「金姸實傳」[김연실전])의 주인공이라고 세상에서 추정하는 사람으로, 그의 오라비와 내가 소학 1년생 때의 동창생 이었던 관계로, 본시부터 지면이 있었고 내가 패밀리 호텔에서 놀아날 때에 곁방에 있던 김유방의 리베로 몇 번 보았고, 그 전에는 임노월의 리베로 대 한 일이 있어서 좀 쑥스러운 데도 불구하고 얼굴 붉히지 않고 나를 대하였 다.

뒷이야기지만 그는 매일신보사에 며칠 있다가 퇴사하여 한때 독일 유학 가 겠다고 독일어를 배운다고 김 모(현재 한국민주당의 효장이요 당시 좌익운 동의 거물)를 찾아다니다가 사제간 이상한 관계가 생겨, 그때에 그의 또 다 른 친구(남자)와의 사이에 삼각관계에 격투까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망양초는 나보다 연장자인 오라비를 가졌고 역시 나보다 연장자인 리베를 몇 사람 경유한 여인이라 나더러 봇쟝봇쟝 하며 중학동을 가끔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林[임], 金[김] 등과 좋게 지내던 이야기는 하는 일이 없고, 그 대신 안서며 상섭이 자기에게 어떻게 어떻게 구는 것을 자기는 어떻게 땄노 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면서 웃고 하였다.

그러나 영업적 賣女[매녀] 아닌 여인에게는 동양인적의 불감증인 나는 망 양초에게 아주 흥미도 느끼지 않고 그의 뜻있는 듯한 자랑에 그저 머리만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망양초에 대해서는 또 후일담이 있을테니 그만치 쓰고, 최서해가 출재자를 붙들어서 만든 <조선문단> 속간은 한 호―ㄴ가 두호―ㄴ가 내고 출재자는 또 사라졌다. 그것을 발간하는 동안, 그때 탐정소설의 애독자이던 채만식도 적지 않게 협력하였고 채만식의 문단 진출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억한 다. 그러나 최서해의 열성과 문사들의 의지는 그냥 계속되었지만 출재자의 열의가 끊어져서 속간 <조선문단>도 폐간되었다 그것이 폐간된 뒤에 서해는 다시 주선하여 누구를 붙들고 <現代評論[현대 평론]>이라는 종합잡지를 시작하노라 하며 원고를 부탁하기로 「소설가의 詩人評[시인평] 제3 金億論[김억론] 써서 주고 <현대평론>이 발행되는 것을 보지 않고 다시 중학동 하숙을 집어치우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재산을 다 정리해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안해의 말이었 다. 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하면 무얼 하랴. 한 푼 없는 깍대기라는데도 불구하고 밥상에는 늘 기름진 음식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진솔 새 옷 만 제공되는 수수께끼의 살림에도 나는 한 마디도 없이 오직 침묵하였다.

내 주머니가 늘 비어 있을 뿐이지 생활은 지난날과 아무 다름이 없었다.

이런 수수께끼의 생활이 반 년이나 계속하였다.

여름부터 나는 또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대동강은 나에게는 다시 없는 보 배였다.

쓸쓸하고 아픈 회포도 대동강에 호소하면 씻기어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에 너서 첫 멱〔初浴〕[초욕]을 대동강 물에 감고 자란 자, 누구 대동 강에 대하여 지극한 애착을 안 느끼는 자 있으랴마는, 나의 감상적이요 정 열적인 성격은 더욱 대동강에 대한 애착이 심하여서, 망연히 대동강물만 굽 어보노라면 모든 수심과 괴로움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었다.

生活[생활] 破局[파국][편집]

여름에서 시작한 낚시질은 가을도 마가을까지 미쳤다.

마상이에서 자고 마상이에서 깨고 마상이에서 밥지어 먹고 아주 마상이에 서 살았다.

때때로 쌀이 필요하다든가 담배며 성냥이며가 필요하든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생기든가 하는 때어만 집에 들어갔다. 그러면 안해는 내 취미, 내 성격에 맞을 만한 장그런 물품을 준비해 두었다가는 제공하고 하였다.

평양의 마상이라는 배는 대동강에서 낚시질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발달한 배다. 크기는 한 조각 편주에 지나지 못하지만 노를 젓는 손짓에 따라서 앞 뒤와 동서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서, 가령 큰 고기가 낚시에 걸리어 달아날 때는 고기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자유자재로 쫓아다닐 수 있고, 비올 때나 잠잘 때 위에 덮은 ‘뚬’이 있고, 닻을 달고는 여울도 올라갈 수 있 고, 낚시질의 온 도구를 배에 장비하게 된 경첩한 배다. 그리고 평양 사람 으로는 마상이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것이다.

언젠가 안서가 평양에 놀러왔다가,

“나는 마상이를 저을 줄 안다.”

고 뽐내며 마상이 타러 가자기에 함께 갔더니, 안서는 마상이의 노를 들고 일어서서 뒤로 향하여 돌아서되 머리를 더풀거리며 숨이 차서 젓고 있었다.

마상이란 대체 그 전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며 왼손만으로 가볍게 젓는 것 이 원칙이다(오른손은 아주 쉰다). 안서처럼 힘들이고 애써서 젓는 것이 아 니다.


마상이에서 낚시질로 천하만사는 잊고 그날그날을 혹은 萬景臺[만경대]로 내려가며 혹은 酒岩[주암]으로 올라가며 고기잡이에 취에 온갖 세상을 모르 고 지내는 동안, 가을도 깊어 첫겨울에 가까왔다. 곱게 자란 선비의 손이 마가을 찬바람에 폭로되어 손등이 모두 터져 주먹을 쥐면 피가 흐를 지경이 지만, 불안한 심경을 잊기 위해서는 뭍에 오르지를 않았다.

날은 차서 마상이에서 밤을 지내고 나면 밤새 입김〔口氣〕[구기] 쏘인 데 는 허옇게 성애가 돋쳐 있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떤날 집에 옷을 바꾸어 입으러 돌아왔더니 안해가 없었다.

어린 딸애를 데리고 서울 잠깐 놀러간다고 떠났다 한다. 부자집 딸로 부자 집 안해로 갖은 호강을 다하다가 재정적 파국에 직면하니 기도 막히리라, 가슴도 답답하리라. 그 화풀이로 며칠 놀러 간 것이라 무심히 생각하고 옷 을 바꾸어 입고 다시 강으로 나왔다.

한 일주일 더 지내서 또 집으로 돌아오니 안해는 여전히 없었다.

내 산보용 모자에 무슨 종이가 있기에 펴보니 안해의 편지였다.

동경 가서 몇 해 공부를 해서 파산한 가정을 부활시키러 떠나니 그리 알라 는 것이었다.

나이 25, 6세에 공부는 무엇이며 공부하러 떠나는데 딸아이를 데리고 간다 니 무슨 소리냐? 나는 짐작했다. 내가 이 편지를 보면 곧 따라와서 자기를 도로 데려오리라는 생각으로 이 일을 감행했다고. 공부에는 방해되는 어린 아이(내가 몹시 사랑하던 애다)를 데리고 떠나고 내가 집에서 흔히 사용하 는 모자를 골라서 거기 편지를 넣고 간 점으로 미루어 내 짐작에 틀림이 없 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 나는 낚시질에서 한 번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서 이 그의 편지를 발견한 것은 그가 편지를 넣고 떠난 지 진실로 반 달이나 되었다.

나는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곧 상경하였다. 딸을 찾으러….

서울서 다시 일본 동경으로 이리하여 동경 바닥에서 내 어린 딸을 찾아 가 지고 다시 귀국하였다.

달아난 안해가 남기고 간 두 아이를 길러야 할 커다란 의무를 뒤맡지 않을 수 없는 나는 과거의 모든 호화롭던 놀이를 잊고 집에 박혀 있기로 하였다.

1927, 28 이태 동안을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평양에 박혀 있었다.

그동안에 안서의 행보는 재미있다. <창조> 없어지고 <폐허> 없어진 뒤에 안서는 시골 내려가서 자기의 논밭을 모두 팔아다가 서울에 집 두어 채를 사서한 채는 월세를 놓고 한 채는 자기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예금하 고 은행에 예금한 것은 소절수를 찢어서 술값을 치르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 여 여급들에게 ‘고깃데(小切手[소절수]―수표)상’이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에 안서를 따라다니던 친구로는 변영로, 염상섭 등이 있었다.

역시 ‘고깃데상’이라 부르면 안서는 득의연하여 아낌없이 소절수를 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서의 쥐꼬리만한 재산으로는 고깃데상 노릇도 얼마를 하지 못하 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소절수의 신세를 진 일이 한 번인가밖에는 없 지만 안서와의 사이는 이 소절수 시절을 전후하여 매우 가까와졌다.

안서가 무슨 일로 평양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평양에 나를 찾았 고 내가 서울 무슨 볼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안서의 집을 숙소로 하였다. 그 때는 안서는 오랜 하숙 생활을 걷어치우고 禮智洞[예지동]에 집 한 채를 마 련하고 가족들을 불러올려 살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때에 원고료라는 것의 고마움을 비로소 알았다. 글을 돈으로 팔랴 하던 주장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돈도 안 받고야 글을 어떻게 쓰랴 하는 새 주장이 생겨 났다. 그때 <新小說[신소설]> 잡지가 생기고 <大潮[대조]>라는 잡지가 생겼는데 거기 글을 보내고 약소한 원고료가 들어온 것이 진실로 반 가왔다.

이리하여 나는 돈으로 글을 팔아서 살아가는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더우 기 그 돈이란 것이 무슨 군것질 용처가 아니요, 그 날 없으면 그 날은 굶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한 물건이었다.

나의 再婚[재혼][편집]

서양 철인이,

‘사람의 살림이란 여편네 있어도 귀찮아 못 살겠거니와 여편네 없이도 또 한 불편해 못 살겠다.’

고 갈파했거니와, 사실 안해 없는 홀아비 생활을 2년나마 하고 나니 인젠 진저리가 났다. 남매 두 어린 자식을 매일 가꾸어서 학교에 보내고 학교 하 학한 뒤에는 또한 학과 복습을 시키고 이것은 사실 여인이 할 노릇이지 사 내로서는 감당치 못할 노릇이었다.

1929년 여름 나는 두번째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결혼하기에 가장 마음에 켕기는 점은 경제적 안정인데 둘러보아야 우 리나라에 글 쓰는 사람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사의 안해란 가난쯤은 달게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 여름에 나는 지금 안해와 혼약을 한 것이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나는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기로 승낙을 한 것이었 다.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의 요구는 늘 받아왔지만 일체로 신문소설은 거절 해 오던 나로서도 결혼을 앞두고 경제문제 해결책으로 승낙을 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첫 훼절이었다. 아직껏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나는 내 길만 닦아 나아간다던 그 주장은 꺾이고 대중소설에 손을 댄 나의 첫번의 훼절이었다.

이리하여 첫번 신문소설을 쓰기 위하여 龍岡[용강] 온천으로 가서 「젊은 그들」의 첫머리를 좀 써서 동아일보사로 보내자 동아일보는 그만 무기 정 간이 되어 버렸다.

그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에게서 간곡한 위로의 편지가 있 었으나 나는 에라 잘 됐다쯤으로 쓰기 싫은 글 안 쓰게 되었으니 결국 잘 되었다고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中外日報>[중외일보](<시대일보>의 후신이다)에서 또 장편을 하나 요구한다. 그래서 <중외일보>에 대해서는 내 주장을 충분히 표시한 뒤에 그 런 조건 아래서라도 써 달라면 써 주겠노라고 하여 「太平行」[태평행]을 쓰기 시작하였다.

정간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 가을부터 다시 나기 시작하였다. 거기 는 「젊은 그들」이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중외일보>가 나다 말다 하 다가 깜빡 꺼지고 말았다. 「태평행」은 5, 60회 연재되다가 중단되어 버렸 다.

대체 이 땅에서 글 쓰는 사람의 비애란 자기가지여서 다 손꼽기도 어렵거 니와, 작품 발표기관 문제도 그 큰 것의 하나일 것이다.

신문이건 잡지건 작가에게 별별 소리를 다 하여 연재물을 시작하게 한 뒤 에는 뒷 책임은 아주 무시해 버린다. 신문(혹은 잡지)의 체면과 체재상 소 설 한편쯤 연재해야겠으니 연재를 하는 것이지, 그 작품이 완결되건 말건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런지라 몇천 편의 소설이 신문이나 잡지 에서 시작만 되다가 그 신문(혹은 잡지)의 폐간으로 중단되어 버렸는지 일 일이 다 헬 수 없다.

「태평행」도 <중외일보>의 폐간으로 중도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 겨울ㅡ 연말 가까이 나는 열 편의 창작과 그 밖에 4, 5편의 수필을 써 가지고 상경하였다. 그 새 독신생활 3년에 축적된 정력을 한꺼번에 쏟은 것 이었다. 열흘 동안에 창작 열 편과 수필 4, 5편을 써 던진 것이었다. 그것 을 모두 돈으로 바꾸니 꽤 오래간만에 주머니가 두둑하게 되었다.

그 두둑한 주머니를 털어서 평양에 남겨둔 오누이 두 아이의 겨울옷을 사 가지고 돌아올 때에 나는 돈의 힘의 고마움을 통절히 느꼈다.

몇 달 뒤 나는 새 안해를 맞아왔다. 그러나 그 전후부터 나는 강렬한 불면 증에 걸려서 신음하던 중이었다. 파산이라 失妻[실처], 이런 가지가지의 불 행한 사고가 만들어낸 병으로서, 약혼기간 중 약혼자를 찾아다닐 때도 최면 제는 늘 끼고 다니던 것이었다.

염상섭과 나와의 새에 소위 발가락 문제의 사건이 생긴 것이 아마 이때였 었다고 생각된다.

‘발가락’ 事件[사건][편집]

염상섭이 결혼한 것은 1927, 8년경으로 그의 나이가 그때 서른을 썩 넘은 때였다.

阿峴[아현]에 新居[신거]를 장만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와 이웃 하여 이은상이 살고 있어서 이은상을 통하여 염상섭의 신혼생활의 이면상이 끊임없이 세상에 전파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상섭이 제 새 안해를 때린다는 둥 싸움이 잦다는 둥 별의별 뉴우스가 다 있었다.

나는 언젠가 상경하여 안서와 함께 그 신혼 댁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 는 나는 안해를 잃고 독신생활을 하던 때로서 서른이 지내서 안해맞이를 하 고 살림을 하는 상섭의 살림 모양이 그저 아늑하고 부럽게만 보였다.

은상을 통하여 전파되는 모든 신혼생활의 잡음도 30이 지나서 결혼한 사람 의 당연한 의처증이려니 이렇듯 간단히 보아 두었다.

내가 두번째 결혼을 한 뒤 무거운 불면증에 걸려서 그것을 치료하려 상경 하였다. 그때는 안서는 樂園洞[낙원동] 어느 여관에 살고 있는 때였다. 안 서는 고깃데상의 즐거운 시절도 며칠을 못 지내서 끝장을 막고 서울에 두 채 장만했던 집도 다 없애 버리고, 실의의 외로운 몸을 낙원도 어떤 여관에 의탁하고 에스페란토 강습의 약간한 수입으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안서가 내게 대해서 매우 흥분된 태도로 무슨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즉 안서는 지난날 고깃데상 시절에 염상섭 등을 술잔이나 먹였으니까 안서 의 단순한 해석으로 자기는 상섭 등이 마땅히 그것을 신세로 알아야 할 것 인 데도 불구하고 상섭은 그 신세를 원수로 갚아서 안서를 주인공으로 한 무슨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분하여 못 견디겠으니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 었다.

그때 나는 마침 동아일보에 신년 현상소설에 고선의 책임을 지고 책상머리 에는 원고 뭉텅이가 산적되어 있던 시절이다.

그저 응응 해 두었더니 안서는 무슨 잡지를 내게다가 제공하며 상섭의 문 제의 소설이 있으니 읽어 보고 대책을 강구해 달라는 부탁이다.

그 해에 동아일보의 현상 모집은 그 금액에 있어서 단연 고액이었던 관계 로서 응모자가 놀랍게 많았다. 400편이 넘는 그 많은 응모 작품을 고선하다 가 그것을 그냥 소하물로 부치고 나는 뒤따라 내려왔다.

안서는 정거장까지 따라 나와서 꼭 복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평양집으로 돌아오니 지난봄 결혼한 내 안해는 곧 그의 첫딸을 낳으려고 신음하는 중이었다.

딴 방에 자리하고 누웠으나 强度[강도]의 불면증의 사람이 아무리 하룻밤 을 기차에 시달렸다 하나 졸음이 올 까닭이 없었다.

이에 나는 원고지를 펴 놓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발가락이 닮았다」는 이리하여 씌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안서의 부탁으로 씌어진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더구나 염상섭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모르는 바이다.

다만, 염상섭이 그것을 읽고 이는 자기를 모델로 자기를 욕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크게 노염을 내어, 그 소설에 대한 기다란 반박문을 써서 <東光 [동광]>에 기고하였다. 그런데 <동광> 잡지의 주간인 주요한이 그 글을 그 냥 보류하여 버려서 삭아버리고 말았지만 그 문제는 그때 문단의 화젯거리 가 되어서 그 뒤 한동안 조선일보 지상에서도 논란되었다.

서울 生活[생활][편집]

새해 봄에 나는 불면증을 정식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작년부터 원고료라는 것으로 생활의 기본을 삼은 이래 나의 창작에 대한 태도는 달라졌다. 아직껏은 고답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차차 꺾이어 나갔다.

열 장 쓴 것, 열한 장 쓴 것이 그 들어오는 금액이 다른지라 간격을 위주 하면 작품이 변하여졌다. 그리고 어디서든 글 주문만 들어오면 응하였다.

불면증 치료에 매일 다대한 비용이 걸리는 나는 그 비용을 구하기 위하여 수없는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3월에 안해가 서울로 나를 찾아왔다. 안해와 협의하여 서울로 이사오기 로 작정하였다.

대체 조선에서 원고료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더우 기 지방에서는 못할 노릇이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울에 자리잡기로 한 것이었다.

서울 살림의 준비ㅡ 우선 집을 한 채 월부로 사기로 하였다. 그리고 가족 다섯 사람의 서울 살림은 시작이 되었다.

당시의 글의 발표기관이란 순전히 신문이었다. 그런데 신문 가운데서는 조 선일보가 그 대표자였었고, 조선일보가 그 발행은 그냥 유지하여 오나 아주 위태로운 형편이었고, <중외일보>는 中央日報[중앙일보]로 변하여 가지고 나다 말다 하는 형편이었고, <매일신보>가 동아일보와 대항하여 꾸준히 나 오는 단 하나의 신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대체로 창작소설은 싣지 않는 편이라, 신생 소설문단은 그 발표기관을 전혀 못 가졌다. <동광> 혹은 <別乾坤[별건곤]>(<개벽>의 변형 물) 등에 간신히 지면 몇 페이지가 창작을 위하여 제공되는 뿐이었다.

그러한 상태 아래서 집을 월부로 사며 새살림을 시작하자니 고생은 여지없 이 컸다. 게다가 원고료는 저절로 정확히 지불하는 데는 적고 필자의 수효 는 늘고 보니 원고료는 저절로 차차 내려서 예전 <조선문단>이나 <개벽>에 서 내주던 액수의 4분지 1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문사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하였는지는 안서(김억)의 시 添削料[첨삭 료] 문제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고깃데상의 호화로운 시절의 뒤에 안서의 생활은 지극히 영락되어 그날그날의 담배 용돈에도 딸리고 있었는데 그 안 서가 한 가지의 기책을 안출했다.

안서가 안출했는지 주요한이 안출했는지는 모르지만 요한이 주간하는 잡지

<동광>에 ‘신시 첨삭료’를 두어서 신시 한 편에 50전(30전이든가) 우표를 동봉해 보내면 안서가 첨삭하여 준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잡지 선전책에 지 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수입된 첨삭료인 우표를 안서는 또한 <동광사>에 몇 할인가 하여 팔아서 술값 담배값에 쓰던 것이었다. 이것은 <별건곤> 잡지에서 ‘新時[신 시] 땜장이’라고 험구한 덕에 안서는 ‘시 땜장이’로 한 때 이름이 높았 다.

대체 안서라는 친구는 그 성질이 몹시 단순하니만치 한 번 누구를 밉게 보 기 시작하면 그 생각을 고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 으로서 춘원(이광수)이 오산중학 교원 노릇을 할 때 춘원의 문하에 공부를 하여 말하자면 춘원과 師弟[사제]의 분이었지만, 무슨 까닭으로 춘원과 틀 렸는지 춘원과는 아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 로 있으면서 안서에게 글을 써달라는 부탁도 안한 것이 안서의 노염을 저버 렸는지도 모른다.

‘시 땜장이’로까지 타락을 하면서도 동아일보에 글을 쓰지 않는다. 그래 서 어떤 때 춘원더러 안서의 글을 좀 사라고 권고한 일이 있다.

“좋은 원고면 얼마이고 사지요.”

그래서 춘원과 의논하여 동아일보 가정난에 「名婦列傳」[명부열전]을 한 동안 계속해서 쓰기로 하고, 안서에게 그 뜻을 말했더니 안서는 동아일보에 는 쓰지 않는다고 고집한다. 그것을 가까스로 얼려서 쓰여 가지고 그 원고 를 춘원에게 갖다 맡겼다.

몇 회나 계속했는지 모른다. 몇 회 계속하다가는 뚝 끊어지고 말았다. 동 아일보에 가서 알아보니 續稿[속고]가 오지 않아서 중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서에게 속고를 채근하였더니 안서 대답은 속고 찾으러 오지 않아 서 안 주었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안서의 생각으로는 속고를 연해 졸리어서 부득이 집필하고 싶었 을 것이요, 동아일보 쪽에서는 안서가 자진하여 가져오면 내주거나 할 마음 보였던 모양이다.

이리하여「명부열전」은 몇 번 나가다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 일을 가지고 누가 잘 했다 못 했다 할 것은 없지만, 결국 손해를 본 것은 안서였다.

당시에 안서는 여러가지 의미로서 불행의 대표자였다.

그가 소절수를 떼며 놀아날 때도 선술집이 아니면 과즉 카페였다.

그가 서울의 살림을 걷어치우고 가족은 모두 시골로 내려보내고, 낙원동 어떤 여관에 몸을 잠근 때는 경제적으로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곬이었다.

그때 그에게 애인이 하나 생겼다. 진남포 어느 소학교 여훈도로서 좌우간 안서의 손에 걸려들었으니 엔간히 만만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성씨가 제각기 다른 前夫[전부]의 소생이 몇 남매 있었다 하니 그 여인의 품행 가히 짐작할 것이리라.

안서는 그 여인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여인은 사내가 부르니 온 것이요, 안서는 여인이 생활비를 대려니 기대하였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서로 상대쪽을 믿었으니만치 덜컥 서로 만나면 그 새에 여러가 지의 델리케잇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여인은 안서를 믿고 서울로 왔다가 그간 다시 티각태각 진남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서울서 살림할 때의 상황을 염상섭이 상섭 독특의 차근차근한 필치로 소설화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의 외로운 살림에 동정하였다. 그래서 내가 힘써서 그 여인을 도 로 안서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기로 약속하였다.

약속에 의지하여 진남포로 가서 그 여인을 만나 보았다.

벌써 남편을 경험하고 그 뒤 또 남편 아닌 사내를 몇 경유한 그 여인의 다 변성에 적지 않게 압도되면서 안서의 그 새의 고적한 생활을 들어 호소해서 그 여인에게 다시 상경해서 안서를 위로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美女[미녀](그의 성이 강씨였다)는 그런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도 내심 걱정하였다. 이 여인의 성격은 안서와 결코 서로 맞 지 않을 터인데 안서는 무엇 때문에 이 여인에게 그렇게도 반했는가?

<東亞日報[동아일보]>와 新興文學[신흥문학][편집]

어느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출판계와 문학운동의 새에는 끊지 못할 관련성 이 있으며, 문학은 출판업이라는 배경을 가지고야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문학은 출판계라는 독립한 기관이 없어 신문에 힘입은 바 매 우 크다.

그러면 그 당년에 신문계에 패권을 잡고 있던 동아일보는 우리 문학운동과 어떠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었던가?

더우기 당년 문단의 가장 선배인 이춘원이 내내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자리 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동아일보는 당연히 조선 문학운동에 기여한 바 컸 으리라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일어나는 문학운동을 비방하고 그릇된 길로 몰아넣는 일에만 충실하였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誤斷[오단]일까?

200자 1매에 50전이란 원고료를 8매에 1원이라고 떨어뜨린 것이 동아일보 였다. 한 사람 앞에 다섯 페이지 이내로 지면을 제한한 것이 동아일보였다.

게다가 동아일보가 문사에게 대하여 취하는 태도며 취급방식은 사용인이 고 원을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선 편집국장 이광수가 원고를 사들이는 데도 주주총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다른 것은 미루어 알 것이다. 그때 나는 춘해 방인근의 연재소설 「魔都[마도]의 香[향]불」을 동아일보에 소개하여 연재케 하고 있었다. 그것이 거진 끝나게 되어 감으로 <매일신보>에 교섭하여 「放浪[방 랑]의 歌人[가인]」을 연재케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인지 동 아일보의 「마도의 향불」이 채 끝나기 전에 <매일신보>에 「방랑의 가인」은 연재가 시작되었다. 즉 결과에 있어서는 춘해는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두 신문에 연재소설을 집필하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지금껏 연재 중이던 「마도의 향불」을 탁 끊어버 리고 말았다.

나는 동아일보의 춘원을 찾아서 중단한 부당성을 말하고 인제 4,50회면 끝 날 것이니 끝나기까지 연재하기를 요구하였던 바, 춘원은 매우 어색한 웃음 을 웃으면서 이는 돈이 시키는 일이라, 돈(출자) 안 낸 자기로서는 용훼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짐작컨대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쓴다 하는 것은 한 큰 이권인 듯하 여, 이 이권을 두고 여러가지의 암투가 일어나서 춘해의 연재물이 그 희생 이 된 모양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사회적으로 변명하면서,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글을 쓰는 사람은 동아일보에는 쓸 자격이 없다.’고 하여서 그 뒤 한동안 이런 알력으로서 명랑치 못한 세월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어떤 문사는 ‘동아일보에 글쓸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매일신보>에 글을 사절하는 등 이런 일까지 생겼다.

이리하여 글 쓰는 사람 가운데는 <매일신보>에 글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 람이 한동안 갈리었다.

그럼 나는 어느 파에 속하였던가?

글 쓰는 사람 가운데 그런 기색이 보이자 나는 자진하여 동아일보에 글을 아니 썼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아일보사에서 글을 부탁해 왔 다. 그래서 나는 <매일신보>에 글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기자는 당황히 그것은 모두 풍설이지 어디 그럴 까닭이 있겠느냐고 변명하며 꼭 써 달라고 재삼 부탁을 한다. 요컨대 한동안 말썽거리였던 ‘매일신보 집필자 문제’도 누구 누구의 몇 사람을 보이콧하기 위한 일종의 책략이었지 그 이 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민족문학이 건설되려는 마당에 이러한 책략이 무슨 효과를 나타내랴?

<매일신보> 집필가 배격 문제도 이렁저렁 흐지부지하니 끝장이 났다.

대체로 동아일보 자체가 민족문학 건설 문제에 관하여 절대적인 지도권을 못 잡고 있는 터에 이런 구구한 문제가 좋은 끝장을 볼 수가 없었다. 문사 는 도리어 동아일보와 대립되어 동아일보를 무시하고 자기의 길을 걸었다.

李光洙[이광수]의 걸음[편집]

<창조>시절 이전에 「무정」이하「開拓者」[개척자] 등을 발표하여 文名[문 명]이 있던 춘원 이광수는 동경 조선유학생 독립선언문을 초한 뒤에 재빨리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을 주요한과 함께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 다가 그의 건강상태며 사회정세며를 따라서 조선총독부에 귀순하고 무사하 게 귀국하였다.

한동안 ‘儆新學校’[경신학교]의 영어교사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그때 한창 신문계에 드날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들어가서 일을 보기 시작하 였다.

그러나 사회정세는 춘원이 망명하기 이전보다 훨씬 달라졌다. 더우기 문학 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다.

젊은 우리들이 애써서 대중을 이렇게 끌어온 것이었다. 즉 춘원이 그 새 우리의 대중 앞에 내에 놓은 일종의 대중문학을 부인하고 우리는 새로운 문 학의 건설에 매진하던 것이었다.

춘원이 동아일보에 자리잡은 때는 바야흐로 이런 시기였다.

춘원은 한동안 주저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許生傳」[허생전]「再生」[재생] 등을…. 이것은 우리의 문 학발전상 지대한 지장이었다.

우리는 그 새 10년간을 영영공공 ‘대중적 흥미 없는 문학’ 건설에 힘써 왔다. 우리의 대중은 우리가 써낸 그 생경한 문학을 부득이하여 달갑게 먹 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딴에는, 우리 생각으로, 오랫동안 이런 문학 만을 제공하노라면, 나중에는 결국 대중도 이해하는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 던 바이었다.

그래서 대중을 우리의 생경한 문학으로 10년간을 길러 왔는데 춘원이 다시 금 이 대중에게 통속문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대중은 다시 춘원을 만났 다. 그 새 10년간을 쓴 떡만 먹어 오던 대중은 다시 춘원의 달콤한 글을 만 난 것이었다.

더우기 춘원이 그 달콤한 글을 발표하는 기관이 이 땅에서 왕자격으로 군 림해 있는 동아일보 지상이었다.

그때 동아일보에 「허생전」,「一說 春香傳」[일설 춘향전],「재생」등을 쓴 것이 춘원 자신의 뜻이었는지 혹은 동아일보 사장 古下[고하] 송진우의 뜻을 받음이었는지는 따져보지 못하였지만, 이 사실 때문에 바야흐로 싹트 려던 조선 신문학이 받은 타격은 막대하다.

이 책임을 오직 춘원에게 뒤집어 씌우는 내가 오히려 비겁하다. 파산, 실 처 등 쓰라린 사고에 부딪쳐서 붓을 던지고 숨어 있던 내가 다시 붓을 잡은 것은 동아일보 지상의 「젊은 그들」이었다.

아직껏 청초하고 고결함을 자랑하는 나였었지만 몇 푼의 원고료를 받아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절해 오던 동아일보 집필을 종내 수락한 것이었 다.

춘원은 어차피 그 출발이 신문소설이었던 사람이었지만, 이 나의 훼절이야 말로 온 조선 사회에 크게 영향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훼절을 나무라고 어떤 사람은 욕했지만 그보다도 많은 追 隋者[추수자]가 뒤따른 것이었다.

“신문소설을 써도 괜치않다. 金東仁[김동인]도 쓰지 않느냐? 신문소설을 쓰는 것은 결코 흠절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하여 신문학 발전에 큰 지장을 준 허물은 입이 백 개라 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

물론 신문소설이란 것은 대중은 신문소설 영역까지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 지만 그 반면에 문학을 등한하는 것이라, 조선문학은 신문소설의 창성으로 하여 뒷걸음친 것이었다.

신흥 문단에서는 춘원이 홀로 「허생전」이며 「재생」등을 쓴 동안은 춘 원은 문단인이 아니라 하여 불관심하여 버렸지만, 金東仁[김동인]까지 신문 소설을 쓰고 보니 신문소설을 쓰는 것이 문사로서 결코 흠이 안 된다 보게 되고, 그것이 차차 신문소설을 쓰려는 요구로 변하게까지 되었다.

신문에 한 편의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그것을 쓰는 동안은 이렁저렁 생활이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7,8개월 동안 생활의 안정을 얻는다 하는 일 은 사실 생활의 경제적 기초를 못 가진 문사들에게는 여간한 큰 일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春江[춘강] 女史[여사][편집]

위에서도 말했거니와 나는 1931년 봄에,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월부로나마 사기로한 杏忖洞[행촌동]의 나의 새 집은 새로 지 은 집으로서, 이 집을 그다지 불편 없도록 꾸리기에는 여간한 손실이 아니 었다.

게다가 나의 안해라는 사람이 평안남도 龍岡郡[용강군] 吾新面[오신면] 九 龍里[구용리]라는 시골 태생으로 평남 順安[순안] 義明學敎[의명학교]와 평 양 崇義女中學校[숭의여중학교]를 겨우 경유한ㅡ 아직 속으로든 겉으로든 학생때가 그냥 남아 있는 사람이었으매 살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 이었고 나 역시 돈이나 쓰며 호화롭게 놀기나 하던 사람이라, 살림이라는 까다롭고 귀찮은 일을 아내에게 맡겨 버렸다.

이때에 서울 살림에 선배되는 춘해 방인근의 신세를 적잖게 졌다. 전처 소 생의 두 아이의 학교 입학(전학) 문제도 춘해의 알선으로 이렁저렁 끝냈다.

그야말로 긴장한 마음으로 한 1년간 지내니 안해도 인젠 서울 살림에 익어 지고 살림이 차차 자리가 잡혔다.

그런데 방인근의 부인 춘강 전유덕은 이름은 좋이 有德[유덕]이지만 그 이 름과는 아주 상반되는 무덕한 사람이었다. 염상섭, 현빙허, 김억 등이 이전

「조선문단」 시절에 모두 춘강 여사에게 개자식 소리를 들은 사람이었지 만. 내가 서울로 이사온 뒤에 그의 집과 그다지 상거가 멀지 않은 관계로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서는 내 아직 철없는 아내에게 대하여 내 험구를 불 어넣으며,

“우리 방 선생은 본시 크리스찬이니까 개과할 가망도 많지만 김 선생(즉 나)은 아주 악질 부랑자니까, 애전에 분홍치마적에 갈라지는 편이 상책이 라.”충동한다고 아내는 내게 호소하고 하였다.

서울로 이사를 온 이듬해쯤으로 기억한다. 춘해와 나는 어떤 카페에서 술 을 같이 먹었다. 춘해는 그 날 제 집에 안 돌아갈 예정이었던 모양으로 자 기의 집으로 엽서를 한 장 띄웠다.

‘잡지 조선문단을 부흥할 필요상 나는 그 의논차로 시골에 와 있는데 한 2, 3일 뒤에 귀경하겠소 이런 뜻의 글을 써서 日附印[일부인]이 모호하게 찍힙소사 빌며 우체통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모호하게 찍히란 일부인은 모호하게 찍히지 않았던 모 양으로서, 춘해 부인 춘강 여사가 그 엽서를 들고 성이 독같이 나서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비가 좍좍 흐르는데 그 비를 함빡 맞으면서 와서은 댓바 람,

“우리 인근이 내놓으라.”

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응대를 안해가 하고 있었는데 상대자의 기세가 너무도 승승하므로 안해는 내게 응원을 청하였다.

그래서 나가보니 그는 그 춘해의 엽서를 휘두르며 시골서 편지 부친다는 것이 광화문 우편국 일부인이 찍혔으니 이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노릇일 것이라 인근이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좋은 말로 타일러 보았다.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나도 그 와 마주 성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보, 내가 인근이 아범이란 말이요, 할아버지란 말이오? 당신이 남편 잃고서 누구에게 시비를 거는 거요?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된 춘강 여사.

남을 찾아다니며 분홍치마 시절에 갈라서라고 권고하던 그도 이제는 지하 에서 썩는 몸이 되었는가? 그렇게도 제 남편을 감싸고 감추기 위해서 남편 의 친구를 모두 ‘개자식’으로 몰던 그도 그 남편을 끝끝내 지키지 못하고 자기 홀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아끼던 남편은 그 뒤 다시 새 안 해를 맞아서 새살림을 하는 것이다.

과도기의 한 유다른 전형이었다.

崔曙海[최서해][편집]

춘해의 <조선문단>을 발판삼아 출발한 학송 최서해는 그 뒤 <중외일보>가 간행되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그 뒤 다시 <매일신보> 학 예부에 적을 두게 되었다.

내가 평양서 두번째 결혼을 할 때에 일부러 평양까지 내려와서 들러리를 서준 서해였다.

당시의 <매일신보>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신문으로서 문사로서는 <매일신 보>에 붓을 잡는 사람이 업는 형편이었다.

그것을 서해의 부탁에 의지하여 내가 먼저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매일신보>는 이처럼 집필자가 없는 신문이니만치 원고료가 다른 신문보다 후하였다. 내가 계속하여 <매일신보>에 집필을 하고 원고료가 다른 신문보 다 후한 것이 알리어지자 뒤따라 다른 문사들도 집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매 동아일보에서는 ‘매일신보 집필가의 원고는 싣지 않는다’는 일종의 매명적 정책이 선 것이다.

동아일보는 여하튼간에 최서해는 그때 지명 문인들의 글을 사기에 열심이 었다.

나는 최서해에게 대해서 참으로 잘못한 일이 있다. 그것은 전에도 쓴 바이 지만, 나도향 세상 떠난 뒤에 최서해가 주동이 되어 고 나도향 비석을 해 세워 주는데, 그때 서해가 나더러 얼마간 찬조하라는 것을 핑계 좋게 거절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해는 끝끝내 나를 지지하고 내 원고를 어떻게든 돈과 바꾸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 조선 사회에서 월부로 집을 마련한다는 일은 시작하여 놓고 돈이 못 돌 아서 쩔쩔맬 때에 서해가 이 곤경을 구해준 적도 비일비재였다.

그 서해가 1932년 여름에 문득 병이 나서 모 병원에 입원했다 한다.

어떤 여름 날 <매일신보>로 갔더니 편집국장인 星海[성해] 李益相[이익상] 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서,

“서해에게 수혈을 좀 했더니….”

하면서 어지럽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나는 서해가 입원해 있는 모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다. 서해는 비교적 원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방금 춘원이 다녀갔지요.”

하며 그는 자기와 춘원과의 새에 막혀 있던 델리케잇한 감정이며 그런 관계 로 그 새껏 춘원을 보지 않았는데, 지금 자기는 병상에서 일지 못할 것이 분명해 졌으므로 일부러 춘원을 오라고 청하여 춘원이 방금 다녀갔다는 이 야기를 하였다.

사실 춘원은 많은 문인들에게 원혐을 사고 있다. 춘원과 아무 원혐 없이 지내는 사람은 문인 가운데는 오직 나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앉아서, 문단의 일원으로 행동하지 않고 순전히 신문인으로 행세한 것이 그 원혐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서해가 춘원과의 사이에 막혔던 간사리를 터버렸다 하는 데 비교적 마음이 흡족하여 이 짧은 인생에서 서로 옳고 긇고 하면 무얼 하겠느냐, 좌 우간 마음을 굳게 먹고 치료나 잘 하라고 그를 위로하고 작별하였다.

그로부터 이틀인가 사흘인가 뒤에 최서해의 별세가 신문에 보도된 것이었 다.

문단에서 이 나 金東仁[김동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이끼기 서해만한 사 람이 없었다.

더우기 또한 내가 가장 촉망하던 작가였다. 부두 노동자로까지 전락했던 그의 생활 경력은 책상머리 출신만인 조선문단에서 한 이채였다.

그의 남긴 작품은 진실로 적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 노릇을 하여 그 여가 에 붓을 잡은 그라, 더우기 작가 생활의 기간도 짧았으며 몇 편이 못 된다.

그러나 그의 남긴 ‘최서해’라는 이름은 크다. 그리고 이 이름은 만대까 지 남아 있을 것이다.

서해의 장례날, 그의 장례는 서해의 명성에 그다지 부끄럽지 않도록, 다른 것은 모르지만 장례의 뒤를 따르는 자동차의 수효가 4, 50대로서 그 기다란 자동차 행렬은 진실로 장하였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기다란 葬列[장열]은 최서해라는 사람에게 대한 인사가 아니라 <매일신 보> 학예부 책임자에게 대한 인사였다. 최서해라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20분 의 1의 대접도 아낄 조선 사회였다.

서해가 남긴 고아와 과부는 장차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탁하고 살랴? 그 장례가 호화로움에 반하여 뒤에 남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줄 사람은 전혀 없다.

이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몇 푼 거둔 것이 있었으나 그것도 누구가 먹었는지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태 뒤 나는 연전에 나도향 비석해 세워줄 때 서해에게 진 큰 양심의 짐을 갚기 위하여 서해의 비석을 해 세워주려 하였다.

그래서 백화 양건식이랑 김안서 등과 협력하여 서해란 단 두 글자를 가로 크게 새긴 비석을 하나 만들어 서해의 만 2주깃날 이를 그의 무덤 앞에 세 워주었다.

무덤 속에 서해가 이것을 알랴마는 나도향 建碑[건비] 때 그렇듯 애쓴 최 서해에게 대하여 그때 그렇듯 무심하였던 이 나의 속죄 행사였다.

辱設[욕설][편집]

이 1932년경을 전후하여 문단 한편 귀통이에는 욕설 비평이 대두하기 시작 하였다.

이 땅이 일본에게 합병된 지 20여 년 그 새 펴보지 못하여 압축된 감정을 펴보기 위하여 하는 욕이라 누구에게든 다닥치는 대로 욕이었다.

<批判[비판]>이란 잡지는 이 욕으로 판매정책을 세웠다. 좌익잡지라는 구 호였지만 당시의 조선총독부 검열정책이 좌익사상을 약간이라도 선전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던 시절이라, 비록 자칭 ‘좌익계동’의 잡지라 하나 <비 판>은 총독부 검열에 파스하는 잡지였다.

<비판> 잡지의 선동의 덕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욕을 꽤 얻어 먹은 축이었다.

누구누구에게 욕을 먹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 없으나 必承[필승] 安懷南[안 회남]이며 水原[수원] 朴承極[박승극] 등의 욕은 지금도 기억한다.

회남이 나를 욕한 것을 내가 밉다든가 하여서가 아니라 회남 자신이 출세 욕에 초조한 나머지, 왜 좀 후진에게 글을 비켜주지 않느냐는 나무람에서 나온 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할 욕이 아니고 잡지(혹은 신문) 간 행자에게 할 욕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자도 자기네의 신문(혹은 잡 지)를 많이 팔자니 자연 지명인에게 글을 청구할밖에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원고료로써 생활을 해 나아가는 사람이매 잡지(혹은 신문)의 요구 에 거절하지 않고 승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남의 초조한 생각으로는 김의 글 부탁을 좀 거절해 주면 그것이 자기 몫에 돌아올는지도 알 수 없으리라는 기대로서 내가 무슨 글을 쓰기만 하면 달려드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 글을 좀 많이 썼다. 寡作[과작]을 자랑하던 예전과 달라서 글을 써서 그것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할 입장에 서 있더니만치 부탁받는 글 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썼다.

이 땅에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된 지 우금 39년, 오직 붓대만으로(딴 직업 은 가져보지 않고) 생활을 경영한 사람이 나 단 한 사람밖에 없다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나에게는 남의 출세에 방해되고 어쩌고 그런 문제는 고려할 여가조 차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아 나아가는 막대한 비용을 오직 붓끝만으로 변 통해 나아가는 일만이 신기하고 기특하여, 어디서 글 부탁하는 사람이 걸려 들기만 하여라고 기다리는 판이니, 어찌 남을 고려할 수가 있었으랴?

그런지라, 뒷날 회남이 출세를 하여 문단의 일원이 되어 있는 오늘, 나는 회남에게 대하여는 전날의 욕설을 아주 잊어버리고 그의 대성만 고요히 기 다리고 있다. 그러나 박승극이 내게 욕설을 퍼부은 것은 그 의도가 더럽다 보아서 아직 내게 불쾌한 일이다.

내가 조선일보(方應謨[방응모] 조선일보다)에서 학예부의 일을 40일간 맡 아본 일이 있다. 그 어떤날 수원 박승극이라는 사람에게서 꽤 방대한 ‘農 民文學論[농민문학론]’이라는 원고 뭉텅이가 우편으로 배달이 되었다. 그 래서 그냥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2, 3일 뒤 편집국장 주요한에게서 ‘농민문학론’을 왜 지상에 싣지 않느 냐는 채근이 있었지만, 아직 보지도 않은 것이라 그저 그냥 버려두었더니 그 뒤 또 2, 3일 지나서 수원서 장거리 전화가 왔는데 가로되,

‘자기는 박승극이라는 농민문학론의 저자인데 왜 자기 원고를 신문지상에 발표하지 않느냐?’

는 것이다.

그때 내가 무엇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치 못하려니와 좌우간 내겠다고 승 락은 안 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서 웬 젊은 사람이 조선일보로 찾아와서 박승극의 편지를 내밀며 그 원고의 반환을 요구한다.

그로부터 그 박씨와 나와는 원수지간이 되어서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언론기관을 이용해 나를 욕하기 여념이 없었다.

박씨는 그 뒤 몇 해를 두고 나를 욕하고 욕하다가 그만 기진했는지 그 욕 을 중지한 것은 여러 해 뒤였다.

짐작컨대 박씨에게 있어서는 그 ‘농민문학론’이 꽤 애쓴 글이었던 모양 인데 그것을 그냥 도로 반환한 데서 그의 노염을 그렇듯 돋우었던 모양이 다.

조선의 문사치고 가장 욕많이 먹는 사람은 춘원이었고 내가 그 다음으로는 가는 모양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전 선생을 좀 욕한 일이 있지만….”

이라는 변명 비슷한 말을 듣는데, 나는 당년 그 욕에는 아주 무관심하여 누 구누구가 무슨 욕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냈다.

내가 방응모 조선일보에 40일간 봉직할 그 어떤날 같은 사의 촉탁으로 있 던 故[고] 文一平[문일평]이 은근히 나를 찾는다,

“김 선생, 미안한 청탁이 하나 있는데요. 내 어떤 친구가 이즈음 생활이 아주 곤란한 모양인데, 그 친구가 소설을 하난 썼노라고 그것을 조선일보사 에 사 주면 해서 그러는데요….”

이런 청탁이었다.

“좌우간 그 원고를 한번 보여주시지요.”

“아니, 그 친구가 언젠가 김 선생을 어느 잡지에서 욕을 했대요. 그래 서….”

“난 그런 건 일일이 기억도 못합니다. 원고를 좌우간 보여주세요.”

이리하여 문일평은 한 뭉텅이의 원고를 내어놓았다. 그 원고란 民村[민촌] 李箕永[이기영]의 「쥐불(鼠火)」이었다.

민촌이 언제 어디서 나를 욕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좌우간 민촌 자신이 기 억하느니만치 헐한 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민촌이란 이름은 ‘살인 방화’식의 좌익작가로 기억하고 있더 니만치 또 여전히 ‘살인 방화’식 소설이려니 하여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문일평에게 대한 대접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좌익계통에 살인 방화가 아닌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여 곧 전표를 떼어 약소한 원고료나마 문일평에게 내어주고 그 「쥐불」은 약간한 가필을 할뿐 조선일보 지상에 싣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서 민촌은 그 뒤이어 조선일보에 연재 장편을 쓰게 되고 그게 문단 한편 구석에서 욕과 살인 방화 소설 따위로 겨우 존재를 알 리었던 민촌이 당당한 중앙 무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민촌더러 말하라면 이것은 자기 작품이 우수했던 탓이라고 호언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동아일보는 전연 단편 창작은 취급하지 않고 우익잡 지들은 좌익계의 작품은 읽지도 않고 몰서하는 형편 아래서 「쥐불」이 다 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용납되었을 까닭이 없고 조선일보 곧 아니더면 민촌 의 출세는 몇 해를 뒤지든가 혹은 아직껏 「쥐불」의 원고를 부여안고 방황 하는 중일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 뒤 다시 「쥐불」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책으로까지 났다 는 그 표지는 보았지만.

그러나 좌익작가가 고수하여 오던 바의‘살인 방화’식의 소설에서 벗어나 려는 그 첫 작품으로 특필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取諦[취체]의 손[편집]

1919년 2월 <창조>의 발간으로 발족한 ‘韓文學[한문학]’은 그 새 10년간 의 공을 쌓아서 그 공에 대한 원만한 업적을 획득하였다.

이야말로 순전히 그 당년부터 이 길에 종사한 몇몇 문사의 순전한 열서의 산물이었다.

일반 사회의 지지도 없었다. 국가의 보호도 없었다. 아니, 그 반대로 온 국민은 문학을 천시 괄시하고 조선총독부 당국은 문학을 괄시, 학대, 탄압 하는 가운데서 오직 우리 몇몇 사람의 끓는 열정만으로 건설하고 키워 오던 것이었다. 위정 당국(조선총독부 당국)과의 항쟁의 순서를 따라 보면 일본 해군대장 齋藤實[재등실]이 조선총독의 임무를 띠고, 남대문 정거장에서 姜 字奎[강자규] 노인이 폭발탄 세례를 받으며 부임하여, 소위 문화정책 실시 를 선언한 직후에 이 땅에 족출한 신문화 운동은 일견 적색 색채를 다분히 띤 것이었다.

그것은 이 민족이 과거 10년간 일본 제국주의에게 학대받은 거기 대한 반 항으로 권력자에게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적색사상 포섭이었다.

주요한도 마치를 찬송하는 시를 쓰고 염상섭도 현재도 일부 사람에게는 중 간파로 인정되어 있느니만치, 소위 ‘진보적’사상의 사람이었고 적색사상 은 진보적 사상이라 하여 온 천하를 풍미하는 시절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에 반항심을 품은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일 본에 반항하기 위하여 붉은 사상이라도 용인하기를 사양치 않았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의 출장소인 조선총독부 당국은 처음은 이 붉은 사상 취체에 전력을 다하였다.

<개벽>도 좌경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조차도 ‘진보적 사상’에 기울 동 안, 우익의 진용을 견지한 자는 오직 신생 문단의 <창조>파 뿐이었다. 지주 의 자제, 부자집 도령들로 조성된 <창조>만이 좌익을 떠난 생예술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10년ㅡ1930년경에는 이 땅에는 좌익사상이라는 것은 그 무서운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소멸되거나 지하로 숨어 버리게 되었 다.

이러자 취체 당국은 당연한 순서로 민족문학에게로 그의 총부리를 돌렸다.

아직껏 무풍지대에서 고요히 자라던 민족문학자의 위에 탄압과 제재가 내 리기 시작하였다.

후년, 내가 무슨 사건으로 囚人[수인]이 되어 법정에 서게 될 때 그때 나 를 논고하던 현명한 검사가 말한 바,

“조선에 민족주의 사상을 뿌리고 배양한 문학가 이광수, 金東仁[김동인] 두 사람 가운데 이광수는 전향하여 지금 충량한 천황의 적자가 되었지만, 이 金東仁[김동인]이는 운운….”

의 논고도 받았지만, 일개 이름 없는 검사에게까지 민족주의의 문학가로 이 름 알리었더니만치 내 글에 대한 그들의 감시는 엄중하였다.

당국의 취제가 좌익사상에서 민족주의 사상으로 옮자 과거 좌익사상에 대 하여 탄압한 그 방식을 짐작하는지라 전전긍긍, 우리의 붓을 다시 깎아서 당국과 항쟁의 수단을 강구하였다. 우리는 문학의 수법의 이용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우리 민족사상을 죽이지 않기로 노력하였다.

선동에서 선전으로ㅡ 다시 변하여 암시 수법으로 이 민족사상만 주입해 두 면 언제든 민족 해방의 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암시 수법까지 이용하여 민 족주의 사상만은 살려 보려고 노력하였다. 우리가 문학적 수법을 이용하여 이렇듯 당국의 취체를 피하려 하면 당국의 취체도 또한 우리의 뒤를 따라왔 다.

“이 글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불온한 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다 읽고 가만히 생각하면 은연중 불온한 사상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삭 제하는 바이다.”

취체 당국은 마지막에는 이러한 막연한 이유를 붙여서 ‘암시’에까지 취 체의 손을 뻗치었다.

민족문화 건설과 민족주의 사상 유지의 두 가지 큰 명예를 멘 우리 문학도 들은 온 국민의 무시와 당국의 철저한 탄압 가운데서도 용하게 그냥 싸웠 다.

그때에 만약 우리가 기운에 지쳐서 어느 편으로든 넘어졌더면, 지금쯤은 이 땅은 소련의 한 연방이 되었거나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화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그 가여운 노력이 그래도 얼마간의 효력을 나타내어 8·15 이후에 대한민국이 이루어진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과거의 가여운 노력이 오늘날에 위대한 성과에 기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당년에 내가 쓴 글 가운데 위험한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고 인정받은 자는 죄 총독부 검열 당국에 압수되어 지금은 알아볼 바도 못 되지만, 그 지독한 검열의 눈까지 피하여 새어나온 글이 오늘날에 민족정신 보존의 일조라도 되었는가 하면, 문학의 위대한 선전력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연전 나를 구형하던 검사의,

“이런 선전력 많은 민족주의 문학가의 전언행을 엄중히 취체 제재(약)할 필요상, 피고를 1년 징역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논고하던 일이 상기되어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하는 바이다.

염상섭은 나하고 ‘발가락’문제를 일으킨 이래, 한동안 당시 적을 두었던 조선일보를 물러나와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가 육당 최남선의 알선으로 <매일 신보> 사회부장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한자리에 1년간을 앉아 있지 못하 는 그의 버릇을 따라서 <매일신보>도 집어치우고 만주로 뛰었다. 만주서도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 지내다가 국가 해방의 날을 맞아서 귀국하였다.

그런지라, 그는 그 모진 조선총독부 검열의 시달림은 겪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래 조선총독부의 검열 방침은 더 욱 기괴하게 발달되어, 암시 ‘취체’의 눈에까지 거리지 않는 선전방침에 는 당국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덮어놓고 문학이라는 것은 박멸하려고 그 취체방침은 나날이 강화되었다.

무슨 연대를 기록하면 절대로 명치든가, 대정, 소화 등의 연대를 기록하 지, 서력 몇 해라고는 쓰지 못하리라, 만주의 일을 쓰려면 꼭 ‘國[국]’자 를 놓아서 ‘滿洲國’[만주국]이라고 해야 하느니라, 등등. 한 글자에 대해 서까지 일일이 간섭이 가해지며, 가령 무슨 글에 ‘황량한 만주에도 겨울이 이르러서’란 글이 있으면 검열 당국에서는 ‘만주국’이라고 고치라는 주 서를 달아 내보내서 ‘황량한 만주국에도 겨울이 이르러서’라 인쇄된다.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에 아무개 ‘씨’라 하면 ‘씨’자를 삭제해 버리며 등등은 고사하고, 흔히 글의 원작자를 도서과에 불러서 원작품을 전 부 개작해 가지고, 이러이러하게 발표를 하라는 따위의 강요까지 받는다.

따라서 검열이 강화된 시절에 발표된 작품이란 것은 원작자와 검열관과와 합작물이 적지 않다. 어떤 시인은 시집을 검열받았는데 하도 많이 합작과 개작 부면이 많아서 남의 시를 개작하면 어쩌느냐고 분개하고 그 개작된 시 집을 그냥 삭여 버린 일까지 있다.

검열 당국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민족사상 전파를 막으려 했지만, 그래도 그 틈새를 꿰어 그냥 퍼져나가는 민족사상에 최후 탄압수단으로서 南次郞 [남차랑] 총독 시절에 그만 朝鮮語使用[조선어사용] 禁止令[금지령]까지 내 린 것이었다.

이런 탄압과 금지를 뚫고, 그래도 우리 문학이 윤곽을 세우고, 민족사상의 뿌리를 그냥 박아둔 당년의 문학가의 훈공을 크게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 앉아서 30년간 우리가 걸어온 가시밭을 돌아볼 때에 , 숱한 고초 는 겪었을망정, 결코 우리의 걸어온 발자국이 헛되지 않았노라는 긍지를 느 끼는 동시에 4천 년간 문화로 육성된 이 거룩한 땅에 唯物史觀的[유물사관 적] 사상을 뿌려보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일부인에게 대한 연민의 정을 또 한 금할 수가 없었다.

<朝鮮日報[조선일보]> 시대[편집]

내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순전히 붓끝으로 먹어 나가려고, 월부로 집을 한 채 사고 고투한 지 1년나마 뒤에 금광부자 방응모가 그 새 폐간 상태에 있 던 조선일보가 생겨났다.

듣는 바에 의지하건대 방응모는 본시 동아일보 定州[정주] 지국장이었다.

그는 동아일보 본사로 보내야 할 신문대금을 몇 달 밀렸다. 그래서 그때 동 아일보 사장이던 고 송진우가 지국을 해소시키고 말았다.

방응모는 송진우에게 누차 한 번만 더 연기해 주기를 간청했지만 송진우는 단연 이를 거절하고 지국을 해소시켰다.

여기 분개한 방응모는 하릴없이 금광 덕대로 전향하였는데, 운이 터지느라 고 금광에서 노다지가 나서 금광부자가 되었다 한다.

이 방응모가 철천지한을 품은 자가 동아일보와 그 한 계통인 普成傳門學校 [보성전문학교]였다. 내가 장차 크게 되면 동아일보를 압도할 신문과 보성 전문을 압도할 학교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때인지는 모르지만 방응모는 <중외일보> 폐간 임시에도 <중외일보>를 사 려고 움직이다가 아직 자금에 미흡한 점이 있어서 모 출판사를 사려고 움직 인 일이 있다.

전사는 하여간, 그때 사멸상태에 빠졌던 조선일보를 매수하여 다시 살린 그 공적은 크게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를 매수하여 蓮建洞[연건동]에 문을 열고 조만식 사장, 방응모 부 사장, 주요한 편집국장이라는 진용으로 동아일보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방응모의 금력과 주요한의 편집기술은 동아일보와 넉넉히 맞설 만하였다.

당시 윤전기가 한 대밖에 없는 조선일보로서는 동아일보의 일간 10페이지 의 간행을 실력으로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석간 간행이 인기를 사서, 더우기 투쟁력 왕성한 신진 기예의 기 자로 조직된 주요한 내각의 참신한 취재 편집이 인기를 사서 조선일보가 과 거 10년간을 따르다 따르다 못하여 참패한 동아일보와의 쟁파전에 조선일보 는 드디어 동아일보를 육박하고 압도하게 되었다.

귀순 이래 동아일보의 공로자 이광수를 조선일보에서 뽑아 오고, 명예사장 조만식을 들쳐내고 방응모 자신이 사장이 되고, 이리하여 조선일보는 동아 일보와 대등의 위에 오르고 지국장 떼인 분풀이는 충분히 하였다.

당시의 에피소우드로 방응모는 옛날 원수 송진우와 사사에 겨루어 어떤 좌 석에 초대를 받을지라도 자기가 먼저 가서 송진우의 웃자리에 앉아야지, 차 례가 뒤떨어져서 아랫자리로 가게 되면 불쾌한 표정까지 감추지 못했다 하 니, 그의 성격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신문의 성적이 이처럼 좋으니 그는 안심이 생겨서, 사장 조만식을 갈아내 고 스스로 사장이 되고 조선일보를 사실상 키운 공로자 주요한을 내쫓고, 조선일보의 독재왕이 되었다.

나도 방응모 조선일보가 될 때 불리어서, 조선일보의 학예부를 40일간 맡 아본 일이 있다. 이 40일간의 봉급 생활로서 과부의 서방질이나 일반으로 나 스스로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한두 가지의 유쾌한 일은 있었으니, 하나는 위에도 말 한 일이 있지만 민촌 이기영의 발견이었다. 그때의 민촌은 소위 살인 방화 소설 문사로 중앙 문단에서는 제외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좌익 문사들의 생활은 참담하였다. 민족파 문사들은 탄압의 틈 새를 꿰어, 어떻게든 뚫을 기교와 수법을 강구하여 탄압자들에게 대항하였 지만, 그런 수법이나 기교를 강구할 기능이 없는 좌익문사들은 전업하지 않 으면 굶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白鐵[백철]도 좌익(동반자)계열의 한 맹장으로 민족과 문학가들을 덮 어놓고 욕하던 패지만, 어떤날 조선일보에 나를 찾아와서, 인제부터 이데올 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 달라고 하면서 원고 뭉치를 내놓았다.

조선일보는 당시 복간초라, 원고료 예산도 확정되지 않아서 지금 생각하면 얼굴 붉힐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원고를 산 일이 있지만, 이렇듯 단 몇 푼 이라도 지불해서,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들에게 점심 한 그릇값이라도 내어 주기 위하여, 나는 늘 경리측과 다투었다.

그때 어떤날 편집국장 주요한이 나에게 조선일보에 연애 소설 한 편을 실 어야겠는데 누가 좋을 듯하냐 묻기에, 아마 여학생 소설로는 李泰俊[이태 준]이 으뜸이라 대답했더니 요한 말이 채만식이 어떻겠느냐, 어떤 간부가 蔡[채]를 추천하는데… 한다.

사실 이태준은 그때 ‘신생사(新生社)’라는 데 들어가서 몇 편 수필의 전 력은 있지만 아직 미지수였다.

채만식이도 아직 전력이랄 것은 없지만 <조선문단> 제2기 (방춘해 <조선문 단>이 폐간된 뒤에 최서해가 남 모라는 출재자를 붙들어 한 호인가 두 호인 가 낸 일이 있다) 시절에 약간 문명을 낸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채만식이 원고 한 뭉치를 가지고 찾아왔다. 요한의 말이 그 원고를 보아서 고칠 데를 고쳐 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태준을 지 지하는 사람이라, 채만식의 그 원고(「人形[인형]의 집을 나와서」라는 것 이었다) 여러 군데 뻑뻑 말살을 하여 도로 내주었다.

그런 뒤에는 나는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나와서, 뒤는 모르지만 채만식의 그 「인형의 집을 나와서」가 먼저 조선일보 지상에 연재되고 그 뒤에는 이 태준이 집필(아마 「聖母[성모]」라고 생각된다)하였다.

조선일보를 물러나와서 수절과부 서방질한 것 같아서 어이없이 있을 적에 어떤날 조선일보 사장 조만식이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雲峴宮[운현궁]의 봄」을 계속 집필을 파격의 원고료로써 부탁한다.

내가 조선일보에 재적할 동안 내가 책임맡은 학예면을 史譚[사담] 「雲峴 宮[운현궁]의 봄」을 며칠에 한 번씩 연재하고 있었다. 하도 총망스러운 신 문사 일의 여가에 쓰는 바이라, 쓰며 말며 그러했는데, 독자들에게서 좀 성 실하게 연재하라는 투서가 자주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아직 집값 월부금으로 치르던 것이 계속되는 시절에 갑자기 직장까지 떨어 져서 어찌할 방도가 아직 서지 못했던 차이라 나는 이를 수락하였다.

집값을 월부로 치르던 시절이라 내 원고를 한꺼번에 다 써갈 터이니, 원고 료를 일시금으로 달라고, 그 조건으로 다시 원고료 생활로 돌아왔다.

조선에서의 원고료 생활이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더우기 일본의 準戰生 活[준전생활] 체제의 강화시기로서, 인쇄 용지는 부족하였다. 검열제도 강 화로 글 쓰기는 어렵겠다, 우리 사람의 습성으로 원고료 지불은 군돈 같아 서 좀체 주지 않겠다, 그래도 원고료는 대정으로 주는 것이라 이쪽에서 채 근하기는 면중스럽겠다, 등등의 관계로 그냥 글에 종사하는 사람은 쉽지 않 고, 글을 부업으로 하거나 혹은 아주 글에서 떠나서 다른 직업으로 전향해 버리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 당년에도 ‘문단 침체’니 무에니 시비가 많았지만, 일반 대중의 이해 지지가 없고 관할 당국의 철저한 탄압 아래서 생활 방도도 보장되지 못한 문사들이 순전히 노력과 정성으로 그만한 업적이라도 쌓았다 하는 점을 크 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자고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문학이 이 러한 곤경 학대 아래서 나서 자란 자 있었던가?

더우기 조선문학은 조선어로써 조성되는 것이다. 南次郞[남차랑] 총독 시 절에, 소학교서부터 조선어과를 뽑아 버리고 관공리는 가정에서도 일본말을 쓰라고 강제하며 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사도 일본말로 하는 시절에 있어서 도 그 강제, 탄압, 그 제재를 무릅쓰고 조선어를 사수하여 해방된 국가에 그대로 바친 그 위업에 대해서는 이 나라 언어를 사용하는 자, 한결같이 모 두 사례를 하여야 할 것이다.

<野談[야담]>·<月刊野談[월간야담]>[편집]

1935년 尹白南[윤백남](敎重[교중])이 내게 무슨 원고를 한 뭉치 보내면 서, 그것을 읽어보고 그 이야기에 따라서 원고지 100매 가량의 소설을 하나 써달라는 것이었다.

윤백남이 출재자를 얻어서 <월간야담>이라는 잡지를 시작하는데, 원고를 매호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대체 윤백남을 비상한 才子[재자]로서, 동아일 보 사장 송진우의 마누라 유산홍이 윤백남의 애독자인 탓으로 연해 동아일 보의 講演面[강연면]을 담당하던 사람으로, 인재 박덕으로 어디를 가든 오 래 있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지금 출재자를 잘 만나서 <월간야담>을 창간하 지만 며칠이나 계속할는지 의문이었다.

그때, 원고 주문만 받으면 다닥치는대로 응하여 안회남에게, 후배에게 길 을 터주지 않는다고 욕을 먹던 나는 이 백남의 청도 곧 수락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역사소설의 한 선구로 지목받기는 하는 터이나, 역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 깜깜이었다.

백남이 내게 보여준 원고(「元斗的[원두적]」였다)를 참고하여, 원두표 이 야기를 한편 써서 백남에게 보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史譚[사담] 방면으로 손을 벌리게 되었다. 고답적 문 학작품 이외에는 붓들기를 피해 오던 나는, 이리하여 글로 밥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갖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거기 대한 변명적 이론조차 지어 낸 것이다.

백남은 그 천성은 역시 벗지 못하여 <월간야담> 창간 두세 달을 지내서는 그만 또 만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월간야담> 간행에서 재미를 본 그 잡지사에서는, 이번은 내게 달려들어, 그 당시 <월간야담>은 거진 내 글 만으로 꾸며나가며 간행을 계속하였다.

그것을 한동안 보다가, 나도 한 잡지를 시작해 보기로 하였다. <월간야담>이 내 글만으로 꾸며나가는 것은 둘째 두고, 그때 내가 다달이 쓰던 글의 분량을 모으면 한 개 잡지쯤은 넉넉히 당할 만한 분량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한 잡지를 창간하기로 하였다. 제호는 <야담>이라 하여….

문필생활이 지난한 이 땅에 있어서, 그 새 문필만으로 살아오자니 과연 진 저리가 났다. 그 새의 경력이 있으니 그래도 글 주문이 연락부절로 왔지, 그 주문을 글을 사양치 않고 쓰자니, 사실 지기지기하였다. 글 주문이나 없 고 한 때에는 등이 달았다. 물가 비싼 서울 살림에서, 더우기 새살림을 차 려 놓고 건설하는 판이니, 그 살림이란 여간 초조하고 등다는 것이 아니었 다.

백남의 <월간야담> 경영상태를 보니 수지는 제법 맞는 모양이었다. <월간 야담>은 거진 내 글로 꾸며진다. 그럴진대 그 내 글로써 내가 잡지를 간행 하면 매번 구구하게 원고료 받지 않고도 내 살림은 영위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創刊費[창간비] 약간을 마련해 가지고 <야담> 잡지를 간행 하였다. 숫자로 따져 보자면 수지는 맞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9천여 부까지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매호 새 비용을 처넣지 않으면 다음 호의 간행 이 불가능하였다.

그동안에 나의 건강은 철저적으로 꺾이어 나갔다. 시작한 지 1년 반, 잡지 로 16, 7회를 낸 뒤에는, 그 잡지를 어떤 진남포 사람에게 내어맡기고 나는 몸을 쉬려 平南[평남] 寧遠[영원] 어떤 광산으로 갔다.

이름은 광산이나, 산수 경치 진실로 명랑한 곳이었다. 그곳에 자리잡고 있 을 동안에, 중국 북경 교외 蘆溝橋[노구교] 근처에서 몇 방 총이 울리고 제 2차 대전의 서막인 支那事變[지나사변]이 터졌다.

손에 한 조각의 쇠가 없고, 있을지라도 쓸 줄을 모르는 우리 한국인은 자 연 이웃 나라의 사변에 관심을 갖는다. 지나사변의 서곡인 滿洲事變[만주사 변]이 터졌을 때도 이 백성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무슨 호박이나 생기지 않는가고, 매일 배달되는 신문의 특별호외를 목을 길게 하고 기다리던 터였 다. 그 만주사변이 헛되이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 하나를 세운 뿐 으로 막을 닫힐 때, 이 백성은 얼마나 실망을 하였던가?

지나사변이 차차 격화될 때에 이 백성은 다시 숨을 모아 쉬며, 그 진전을 보고 있었다. 광산의 사무실 계통은 물론이요, 한낱 광부에 이르기까지 모 두가 3, 4일만에 한 번씩 배달되는 신문을 기다리고 신문의 보도를 보고 자 기의 상상력을 가하여 가면서, 소위 지나사변의 추이에 신경을 쓰고 있었 다. 조선의 경찰 당국은 이 사변이 조선 민심에 영향될까 보아서, 취체가 차차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광산 광주되는 내 가형도 종내 ‘同友會[동우 회]’ 관계로 囹圄[령어]의 몸이 되었다. ‘동우회’란 島山[도산] 安昌浩 [안창호]가 만든 ‘興士團[흥사단]’의 조선 안 단체로서 그때 안창호도 수 감되어 마지막 옥사까지 한 것이다.

‘皇軍 慰問[황군 위문]' 北支行[북지행][편집]

앓는 몸을 이끌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나의 친지들은 대개 종로 경 찰서를 거치어 서대문 형무소에 입소되어 있고 서울 시내는 완연 戰時都會 [전시도회]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어떤날 거리에 나가 보니, 거리는 방공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 간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매고 있 었다. 夢腸 [몽장] 呂渾亨[여혼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삥삥 돌기를 좋아하 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삭여 버리고 말 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 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대체 <야담> 1년나마의 경영에 얼마나 노심을 했는지, 그때 꺾인 건강상의 손해는 좀체 낫지 않아서, 이듬해 앓는 사람에게는 겨울은 견디지 못할 일 이었다. 긴긴 겨울밤을 이불을 쓰고 누워서 나는 이불이나 쓰고 있지만 지 금 연해 보도되는 저 멀리 싸움마당에서 쫓기는 戰災民[전재민]들은 얼마나 고생하는가? 그때는 나는 중국 본토는 아직 가 보지도 못한 좁다란 인생이 라, 중국 땅은 춥게만 생각되어서 신문지가 보도하는 바 몇십만 명, 몇백만 명의 죄없는 백성의 유랑이 끝없이 가긍하였다. 동시에 일변으로 겁나는 것 은 총독부 정치의 나날이 강화되는 일이었다.

그 강화에 질겁을 하여 이 땅 각 계급, 각 사회는 소위 皇軍 慰問[황군 위 문], 소위 전쟁 협력, 소위 報國行動[보국 행동] 등 명칭으로 각각 무슨 일 이든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꿈쩍 않고 가만 있는 사회가 하나 있다. 즉 문 단이라는 사회만은 천하의 대변도 모르는 듯이 각각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당국은 보고도 모른 체하고 버려 둔다. 이것이 정녕 버려 두는 것이 아니 라, 너 두고 보자 벼르는 것이다. 문단에 탄압이나 간섭이 내리는 날에는 나 金東仁[김동인]이는 제일차의 희생물로 꿰어 올릴 것이다.

이광수는 ‘동우회’ 사건으로 벌써 감옥에 들어가 있고 만약 문단에서 희 생자를 구하자면 내가 제일차로 될 것이다. 병으로 날카롭게 된 신경에는 이것이 여간 큰 협위가 아니었다. 이 몸으로 감옥에 들어가면 당장 죽는다.

일본의 문사들도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근자 漢口[한구] 위문이니 전쟁문학 이니 자꾸 협력 행위를 하지 않는가.

여섯 명의 가족을 거느린 주인이 감옥에 들어가면 그 가족 전부가 참변이 다. 이런 협위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음력으로 섣달 그믐께 아픈 몸을 간 신히 일으켜서 그 길로 택시를 불러 타고 총독부로 사회교육과장 某[모]를 찾아갔다.

그때 내 생각으로는 일본 문사들 모양으로 한구 방면에 군사 위문이나 알 선해 주려니, 그렇게 되면 나는 중학 병태라 도저히 여행은 못할 게고, 문 단에서 누구 두세 명 선택해서 소위 군사 위문을 보내면 당국의 눈짓도 좀 덜해지려니 해서 그 사람(과장 모씨)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 과장 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군사 위문은 군에서 시끄럽다니, かミッパイ(가미 시바이)를 문사들이 쓰도록 해 보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없는 말 이라 나는 그냥 총독부를 물러나왔다.

나오는 길에 종로 네거리 이태준 경영의 文章社[문장사]에 들러서 지금 총 독부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 함께 웃어주었다.

나는 가볍게 웃어주었지만 이태준은 내 이야기에 가슴 찔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쟁에 협력 행위를 않고 초연하게 있는 것은 문단만이 아니었 다. 문단과 마찬가지로 출판업자들도 전쟁 나 모른다는 태도로 있던 것이었 다. 더구나 출판업자 중에도 서적상이라든가 인쇄업자가 아닌 ‘인텔리’출 신이요, 문사를 겸한 출판업자가 이태준의 문장사, 林和[임화]의 學藝社[학 예사], 崔載瑞[최재서]의 人文社[인문사] 등 세 곳이 있다. 내가 문장사를 다녀간 뒤에 이태준은 겁이 나서 학예사 임화며, 인문사 최재서 등을 초청 하여 협의한 결과 세 출판사에서 돈을 내어 여비를 만들어서 문사 몇 사람 을 선택하여 전선 위문을 보내기로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이리하여 장차 내려 씌워지려는 불세례를 문단 출판업자 연합으로 방비해 보자는 것이었다.

잊히지도 않는 섣달 그믐날, 집에서 설차림 떡을 먹고 있노라는데 이태준 에게서 속달 우편으로 지금 학예사 임화며, 인문사 최재서며가 함께 모였는 데 곧 좀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나갔더니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警務局 [경무국] 圖書課[도서과]에 좀 같이 가 달라는 것이었다.

일전에 학무국 사회교육과에 갔다가 ‘가미시바이’나 쓰라는 소리를 듣고 나온 나는, 그다지 시원히 생각지 않았지만 그들의 간청으로 함께 경무국 도서과를 찾았다. 그랬더니 도서과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뻐 환영 하는 것이었다.

사실 도서과에서는 문단에서 무슨 협력 행위가 있기를 가다리고, 만약 없 으면 처벌이라도 하려고 벼르던 중이었다. 이럴 즈음에 문단과 출판업자가 협력해서 무슨 행위를 하겠노라 자진해서 청하니까 그들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에도 알선해 주겠노라, 현지 각 당국에도 알선해 주겠노라, 자기네가 쓸 수 있는 호의는 다 쓰겠노라 하며 나더러 안색이 매우 좋지 못 하니 만약 여행을 하게 되면 감당하겠느냐 묻는다. 그래서 나는 건강상 여 행을 감당할 수 없으니 누구 적임자에게 밀겠다고 하였더니, 도서과에서 네 가 안가면 되겠느냐, 어서 건강 회복을 도모해서 한두 달 안으로 건강 회복 토록 노력하라고 한다.

당시 온 문단은 무언의 협위에 전전긍긍하던 시절이었다. 이 단체 저 단체 가 모두 위문이니 무엇이니 해서 당국의 취체의 예봉을 피하는 이 시절에, 한개의 단체도 못 가진 문사들이라, 장차 무슨 무서운 탄압이나 간섭이 있 을 것은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단체도 없기 때문에 앉아서 이 제재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던 문단은 이번 일을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때 뚱단짓 곳에서 시비가 생겼다. 춘원 이광수는 자기가 문단의 수령이노라고 자임하고 있었는데, 온 문단적 행사에 자기가 끼지 않았으니 이는 문단적 행사가 아니라 하여 <조선신문>이라는 日文[일문] 신문에 공격 을 가하였다.

춘원을 그때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던 즈음이었 다.

나는 자동차를 달려서 자하문 밖 춘원의 산장을 찾아 춘원을 만나서, 누누 이 이번 행사가 문단을 당국의 손에서 구해 보려는 일임을 설명하여 그대가 이 일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하여 서로 양해가 되고, 이튿날 춘원은 일부 러 龍山軍司令部 [용산군사령부]로 가서 <조선신문> 상의 공격은 자기가 한 바 아니요, 金文輯[김문집]이 라는 친구의 노릇이라고 변명하고 춘원이 선 두에 나서서 이번 일을 공공연히 추진시키기를 약속하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하마터면 문단에 내릴 뻔한 탄압 제재의 손을 묘하게 피해 버리 기는 하였다.

가난한 조선 사회ㅡ 그때 주최 세 출판사를 비롯하여 서울 온 출판업자가 죄 모여서 거둔 돈이 겨우 세 사람 여비밖에 안되었다.

목표지는 北支部[북지부], 기간은 세 달로서 세 사람은 길을 떠나게 되었 다. 나는 그 길에서 빠지고자 여러번 꾀해 보았으나, 내 건강이 나날이 양 호해 가서 건강을 핑계 삼을 수 없고, 도서과에서도 네가 빠지면 일이 되겠 느냐고 강압하여서 부득이 길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길에는 중대한 책임이 짊어지어졌다. 전선을 시찰하거든 돌아 와서 시찰 보고문을 저술해서 공포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떠날 때에 는 총독부 국장, 과장급이 모두 정거장에 환송하여 진실로 성대한 길이었 다.

불행이랄까, 다행이랄까, 나는 돌아오는 길에, 臨芬[림분]을 지나다가 혼 도하여 기억력을 전부 잃어버리었다. 그때 함께 갔던 친구 朴英熙[박영희], 林學洙[임학수] 두 사람은 ‘戰線紀行’[전선기행] 詩[시]와 수필을 저술하 여 짊어졌던 중임을 이행했지만, 기억력을 잃은 나는 당국의 미움을 받으면 서도 종내 이행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이태 뒤, 나는 ‘不敬罪’[불경죄]라 는 죄로 징역 1년을 산 일이 있는데, 그것도 요컨대 그 임무를 이행하지 않 은 탓이라 짐작은 하지만, 1, 2년 징역을 살면 살았지 그때 북지에서 본 참 담한 실황의 ‘無敵 皇軍[무적 황군]의 美德[미덕]’으로는 도저히 쓰지 못 할 것이었다.

同友會[동우회]와 李光洙[이광수][편집]

북지나 여행을 끝내고, 그 뒤 연여를 건강 회복 때문에 이 온천장 저 온천 장으로 돌아다니다가 조금 나아서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둘러보니 이 땅의 문단은 참으로 참담한 형태였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끼던 이 땅의 문단의 형태는 그야말로 참담하게 흩어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 중앙일보는 폐간되고, 온갖 잡지도 모두 문을 닫혀 서 문학이 의지할 근거지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조선총독부 당국의 조선어 박멸책은 더욱 강화되어, 도회지의 아이 들은 인젠 집에서부터 일본말을 쓰도록 훈련받고, 조선문의 출판물은 출판 을 금지하고, 예전 출판 허가를 받은 것조차 새로 출판하려면 다시 겸열을 받으라는 철저한 방침이었다.

글을 쓰려면 반드시 시국적인 글을 써라, 다른 글은 지금 비상시국하에 절 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껏 20년간을 민족주의적 지도자로서 자타가 허락하던 이광수가 전향한 것이 이때였다.

이광수는 ‘동우회’의 형사피고인으로 보석은 현재 자유로운 터이었지만 재입옥될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처지였다.

같은 동우회 형사피고인으로 보석 중에 있던 가형 東元 [동원]이 어떤날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때 나는 북경 여행에서 돌아와서 온천장으로 휴양 다니다가, 평양에 쉬고 있던 때였다. 형은 나더러 잠깐 상경하여 춘원을 만 나 춘원의 심경을 좀 따져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형의 심경을 짐작하였다. 부자집 맏아들로 아직껏 고생을 모르고 지 낸 형ㅡ 그가 예전 소위‘寺內[사내] 총독 암살미수 사건’이라는 세칭 105 인 사건에 걸리어 3년간을 감옥 미결수로 2년나마를 있다가 지금 보석으로 출옥해 있기는 하지만, 당국이 ‘동우회’를 처벌할 생각을 가지는 동안은 반드시 언제든 또 고난을 해야 할 것이다.

나이 60, 이제 또 감옥에 들어갔다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의 선배 동지 도 산 안창호는 얼마 전에 죽어 버렸다.

동우회의ㅡ동우회 회원들의 운명은 이제 춘원 이광수의 거취에 달려 있다.

이광수가 당국에게 대하여 전향을 표명하면 혹은 용서될 수도 있겠거니와, 이광수가 버티면 동우회 4, 50명의 생명은 형무소에서 결말을 지을밖에는 없었다.

도산 안창호 떠난 뒤의 ‘동우회’는 오직 이광수의 전향 여하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동우회의 평남 책임자로서 주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가형의 이때의 심경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형에게 여러가지의 의논을 하기를 피하였다. 이것이 나의 독단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형이 내게 한 말이 이광수를 전향시키어 동우회 40여 명의 생명을 구해달라는 뜻으로 들었다.

연전 북경 여행을 단행하여 문단에 내리려는 박해를 모면케 한 나는, 이에 가형 이하 40여 명 동우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명을 지고, 또 다시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하기로 하였다.

걸음걸이가 부자유하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하골 이광수를 찾은 것 은 이튿날 오정도 지나서였다.

택시에게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라 한 뒤에, 이광수의 집에 들어섰다.

이광수는 그때 자하골 산장에 홀로 있고 문안 자택에서 매일 조반 저녁을 배달하여 먹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은 늦은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문이 연해 덜컥 열리면 이광수는 달려가서 문을 닫고 다시 와서 나와 마주 않고,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壽[수], 富[부], 貴[귀]를 일생의 복록으로 꼽는데 그대 나이 50이니 이 미 수에 부족이 없고 그대 비록 재산이 없으나 부인이 넉넉히 자식 양육할 만한 재산이 있으니 부도 그만하면 족하고, 춘원 이광수라 하면 그 명성이 이 땅에 어깨를 겨눌 자 없으니 귀 또한 족하다. 이제 더 ‘수’를 누리다 가 욕이 혹은 더해지겠고 지금껏 쌓은 공이 헛 데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으 니, 그대의 수를 50으로 고정시켜서 그대의 뒤가 헛 데로 안 돌아가도록 함 이 어떠냐?”

고 그의 가슴 찔리는 말을 하였다.

그때 춘원은 난감한 듯이 연해 한숨만 쉬며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한 시 간 기다리라고 약속한 택시는 시간이 되었다고 싸이렌을 뚜우 뚜우 울리어 서 나 나오기를 채근하고 있었다.

나는 종내 몸을 일으켜 택시로 나왔다. 춘원은 따라 나와서 택시를 붙잡고 서서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다. 한 시간 가량을 이렇게 서 있다가 종내,

“내 잘 연구해서 좋도록 처리하리다. 백씨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시오.”

하고야 택시를 놓아주었다.

이광수가 그때 어떤 上申書[상신서]를 재판소에 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러나 상고심 재판까지 올라가서, 이광수는 온 책임을 자기가 뒤집어쓰고 자 기는 자기의 잘못을 통절히 느낀다는 성명을 하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이 2천만 동포를 진정한 천황의 적자가 되도록 하기에 여생을 바치겠노라는 서약을 하여, 5개년 간 끌던 ‘동우회’사건은, 모두 무죄의 판결을 받았 다.

내가 그때 춘원에게 권고한 바는, 춘원이 온 ‘죄’를 홀로 쓰고 수, 부, 귀 그냥 지닌 채 자살해 버리라는 것이었다. ‘자살’이란 말을 노골적으로 꺼내지 못하여 춘원으로 하여금 내 말 뜻을 잘못 해석하여 一蓮托生 [일련 탁생]식의 전향을 성명케 하여 춘원을 실질적으로 우리 민족운동 사상에서 말살케 한 것이다.

춘원은 재판소에서 전향을 성명한 이후 그의 성격상 표리가 다른 언행을 할 수 없으므로, 진정한 일본 천황의 적자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아직껏 꺼 리고 피해 오던 일본인과의 연회에도 자주 나가고, 총독부 출입조차 자주하 고, 大和同盟[대화동맹]의 간부로 지방 강연도 자주 나가고, 집에서는 일본 옷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며, 이러한 생활에 적합한 이론까지 꾸며내어 글 로 발표하며ㅡ 지금껏 청년계의 사표로 추앙받던 춘원이 홱 돌아서서 청년 사상 악지도자로 표변하였다.

학병, 징병 등을 위하여 강연을 다니며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말라 고 부르짖던 춘원ㅡ 그가 과연 예전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외치던 춘원의 후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춘원의 성격은 어디까지든 충직하였 다. 겉으로만 부르짖고 속으로 딴 꿈을 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지라 솔선하여 창씨개명도 하였고 대담스럽게 황국신민이 되라고 부르짖기도 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당시 춘원의 말을 따라서 지금껏 원수로 여기던 일본을 조국, 모국이라 생각을 돌렸던가?

당년 춘원의 전향으로 무죄 석방이 된 40여 명 동우회원은 모두 해방된 내 나라에 자기네들이 바칠 충성을 강구하고 있지만, 춘원은 오직 60의 늙은 몸을 효자동 구석에서 그래도 붓대는 놓을 수 없어서 외로운 심경으로 붓대 를 희롱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젊은이가 일본 제국주의의 철봉 아래서 춘원의 덕으로 피하게 되었는가? 춘원이 서둘러서 막지 않았다면 일 본의 성난 제국주의는 얼마나 많은 피를 이 민족에게 요구하였던가?

그러나 춘원은 이를 막기에 급급하여 ‘民族魂[민족혼]’을 일본에게 넘겨 준 것이다.

춘원 전향의 일부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나는 지금 ‘민족 반역자 처단법’

에 걸리어 있는 춘원을 보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춘원이 나에게 향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너 때문이라고 질책할지 라도 나는 변명할 아무 말도 없다.

1945년 8월 16일인가 17일인가에 苑南洞[원남동] 어떤 집에서 ‘문인보국 회’의 統[통] 이은 ‘文化協議會’[문화협의회]의 발족회가 있을 때 벽초 에 ‘이광수 제명’문제가 생겼다.

그 좌석에는 兪鎭午[유진오], 李無影[이무영] 등도 있었지만 兪[유]는 보 성전문의 교수로 학병추진 등에 불소한 노력을 한 사람이요, 李[이]는 朝鮮 總督[조선총독] 文學賞[문학상]을 받은 사람이라 아무 말을 못하고 맥맥히 있었고, 이광수의 변명을 위해서는 내가 한마디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나 는,

“이 회합이 정치단체를 목표로 하든가 良心人團體[양심인단체]라는 목표 라든가 하면여니와, 문사의 단체인 이상에는 조선문학 건설의 최초 공로자 이광수를 뽑을 수 없다. 만약 이광수를 뽑는 문사단체일 것 같으면 나도 참 가할 수 없는 바이다.”

고 퇴석한 일이 있지만 8·15해방 이래로 이광수는 샘이 다분히 섞인 많은 시비를 받고 지금 ‘反民法’[반민법]의 처단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文人報國會[문인보국회][편집]

북경 여행에서 돌아와서, 기억력을 잃었노라는 핑계로 연이어 각 온천장으 로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의 형태는 아주 달라졌다.

세상은 전쟁 색채와 협력 색채로 아주 메워졌다.

여기서 무슨 강연회, 저기서 무슨 음악회가 모두 전쟁 색채였다. 게다가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까지 선선을 포고한 뒤에는, 이 땅도 싸움하는 땅으 로, 이 백성은 황국신민으로 모두가 된 듯하였다.

위정 당국도 이 백성을 황국시민으로 화하기 위해서는 조선문학의 선전력 을 빌어야 될 것을 비로소 느낀 모양으로, ‘朝鮮文人協會’[조선문인협회] 를 총독부 후원하에 조직하게 하고, 朴英熙[박영희]로서 그 간사장을 삼고 이광수는 형사피고인이라 보류해 두었지만, 실질에는 회장이었다.

'조선문인협회'가 '조선문인보국회'로 발전하고 총독문화상 제도가 생겨서 문사들은 상을 타려고 경쟁하며 날뛸 때도 나는 병을 핑계삼아 이곳 저곳으 로 자리를 옮기며 피하고 있었다.

더우기 만주국 문학가들이 와서 환영하는 뜻으로 무슨 대회를 할 때 그때 시골 가 있던 이태준까지 끌려와서 거기 참석하였지만, 나는 멀리 양덕 객 창에서 친구들의 모임을 신문지로써 겨우 알았다.

국문 언론기관이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이 남고 다 폐간당하고, 잡지란 <朝光>[조광] 등 한두 개가 남을 뿐이었지만, 그 남은 것조차 소위 '국문 페이지'라 하여 '일문 페이지'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고단스러운 세상ㅡ 이런 세상에서 조선문, 조선문학의 생명이나마 유지해 보려는 것은 지대한 공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경 나는 병도 거진 나았노라 기억력도 거진 회복되었노라 하고 서울 로 아주 돌아왔다. 그러나 나의 이 도피생활은 당국의 미움을 샀던 모양으 로서, 서울서 한두 달 간 안온한 생활을 하려는데, 갑자기 그닥지도 않은 일로 헌병대에 붙들렸다.

일본 군헌의 교묘한 유도심문에 능락되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 수 단의 탓으로 소위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만 1년간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 냈다. 형무소에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일본 정치가 얼마나 가혹하게 전쟁 을 추진시키는가를.

造言蜚語[조언비어]죄로 들어온 죄수, 전시 절도죄로 들어온 죄수, 별별 불경 죄수, 그리고 바깥 세상에서는 그런 말싹만 티었다가는 유언비어죄로 걸릴 만한 소리도 형무소 안에서는 공공히들 하고 있는 것을….

1년을 지나서 나와 보니 세상은 더욱 좁아져 한 다리 한 팔을 자유로이 움 직일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문, 조선어 박멸 정책은, 실제로는 우리 의식의 줄이며 나아가서는 이 종족의 줄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조선어가 없이 장차 우리는 무엇으로 이민족에게 우리가 조선 사람임을 증 명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으랴? 문학이라는 것은 민족 있고야 볼 일이다.

우리의 자손이 일본말을 쓰는 인종으로 변하면 그들은 장차 무엇으로 자기 가 조선인임을 변명하랴? 언어의 말살은 즉 민족의 말살이다. 무슨 변이 있 을지라도 이 민족의 언어만은 사수해야겠다.

이리하여서 나는 죽도록 이 민족의 언어만은 사수할 결심을 하였다.

사실 그때 이태준까지도 자기가 일본말에 통하지 못하매, 자기의 작품을 친구시켜 일본말로 번역해서 발표하는 등의 苦肉策[고육책]까지 쓰는 형편 이었다.

이 노력은 필경은 헛된 노력으로서, 3, 4년 뒤에는 국가가 해방되어 조선 말의 세상이 이르렀지만, 그때의 나의 어린 딸에게 애써 가르쳤던 조선어가 일어로 교육받은 다른 동창들과 섞이어서 단연 이채를 나타낸 것은 그 노력 의 한 보수라고 할까?

그때의 일어의 추진정책은 얼마나 세었는지, 거리의 작은 가게에서라도 일 본말로 물으면 잘 응하지만 조선말로 물으면 눈 거들떠보지도 않던 형편이 었다.

마지막 씨름[편집]

총독부 당국의 조선어 탄압정책이 강화됨에 따라서 일반 독자층에는 그 반 동으로 조선문 서적 구입이 높아졌다. 전에는 한 판(版[판]ㅡ1천 부) 발행 하면 10년 걸려야 다 팔린다던 조선문 서적이 초판 3, 4천 부는 으례껏 팔 리고, 좀 잘 팔리면 1만 부는 나가게쯤 되었다.

이것은 그때 막다른 곬에 든 문사들의 생활에 약간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나 단행본이라면 으례 500페이지 이상이 표준이다. 웬만한 젊은 작가 들은, 500페이지를 채울 만한 작품이 없었다. 그런지라, 조선문 서적 잘 팔 리는 시절에도 그 혜택을 입는 작가란 몇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신 문 잡지 등, 신작 발표기관은 총 스톱을 한 시절이라, 이 땅의 문사들은 대 개 轉業[전업]을 하거나 폐업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御用學者,[어용학자] 御用文士[어용문사]만이 일본글로 작품을 써서 연명하고 있었다.

그때 문사들을 시달리는 협위 가운데 늘 정책적 협위 밖에, 또 '징용' 이 라는 협위도 있었다. 그때의 문사들이란 대개 징용 적령자였다. 게다가 무 슨 착실한 직업이 없었다. 그런 위에 교만하여 郡吏[군리], 面吏[면리]들에 게 미움 사는 무리였다.

나도 역시 그 협위를 받는 축이었다. 그때 나이는 40을 겨우 지났지만 징 용 연령이 50세까지로 확대됨에 따라서 그 범위 안에 들게 되어서 늘 전전 긍긍하였다.

그때 '문인보국회' 회장 阿部[아부] 某[모]의 보증이 있으면 징용을 면할 수 있다 하므로 생각다 못하여 그때의 간사이던 鄭人澤[정인택]을 찾아서 그대의 간사를 내게 양도하라 하였더니 정은 그래도 간사 자리가 아깝든지, 누구 다른 사람의 간사 자리를 알선하마 약속하고 이리하여서 구한 간사 자 리로써 겨우 안심을 한 형편이었다.

당시 정인택, 金龍濟[김룡제], 이무영 등은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하여 아 주 기개높던 때였다.

무영은 軍浦里[군포리]에 자리잡고 앉아서 고기에 굶주린 친구들이며 총독 부 고관들을 초대해서 '닭고기會[회]' 등을 베풀어 대접하며, 서울서는 볼 수도 없는 호화연회 등을 하며 있었다. 총독부 제조 '문인보국회'라는 것으 로 이들과 연락되는 춘원 이광수는 思陵[사릉]이라는 곳에 초당을 짓고 거 기 나가 살고 있었다.

언젠가 춘원은 거기서 요한을 기탁하여 자기의 심정을 말한 바 있었다.

"내가 東亞文學者大會[동아문학자대회]로 上海[상해]에 갔을 때 그때 요한 은 和信[화신]의 商用[상용]으로 상해에 왔었는데, 그때 요한은 상해 영미 인의 생활을 보고 에쿠, 일본이 졌구나 깨달았지요. 그 풍부한 물자를 가진 나라를, 돌쩌귀까지 빼서 쓰는 일본이 어떻게 당하겠느냐고 심각하게 느꼈 읍니다. 참 상해는 풍부하거든ㅡ."

이 말로 보아서 춘원은 지난날 일본이 꼭 이기리라는 신념하에서 그의 정 직한 성격이 조선사람을 위하여 조선사람이 장차라도 살려면 일본에 협력해 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황국신민화'를 그렇게 부르짖은 모양이었다.

그때 춘원은 몹시 번민하고 있었다. 상해 등지를 돌아본 결과로 일본의 패 배는 필연적인 일인 모양인데 일본이 전패하고 조선이 일본의 동반자로 몰 락하면여니와, 일본 거꾸러지고, 조선이 그 탓에 소생한다면 조선 민족의 일본인화를 활동한 자기는 당연히 반역자로 몰릴 형편이라, 그 때문에 매우 번민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때 나는 또 다른 일 때문에 춘원과 자주 만났 다.

일본 전패의 최후 계단을 우리 문사들은 어떻게 뚫고 나오는가? 그 새의 조선문 박해의 기나긴 기간을 통하여 그야말로 삼순구식의 고경을 겪어온 조선 문사들이 빛나는 신생 조선의 날까지를 무엇을 먹고 무엇을 쓰고 뚫고 나오려는가?

이 가난한 문사들에게 1년간의 생활비를 뒤대에 주어서 초비상 시국을 무 난히 뚫게 할 수단은 없을까?

이리하여 안출해 낸 것이 이런 수단이었다. 즉 춘원에게는 어떤 후원자가 있어서 춘원이 무슨 일을 하겠다면 몇백만 원 뒤대어 줄 호의까지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춘원을 선두에 내세워 작가의 단체를 하나 조직케 하고 그것을 핑계로 몇 백만 원 끌어내어 문사 한 사람에게 수삼만 원의 현금을 지불하여 근거 없 는 문사들이 국가 비상시국에도 그 물결에 휩쓸려들지 않도록 해보자는 것 이었다. 그 계획이 진행되는 즈음에는 8월 보름달, 국가 해방이 돌연히 이 른 것이다. 동시에 신흥 조선문학도 일본인의 제압 아래서 해방되었다.

分裂[분열][편집]

'문인보국회'란 본시 '조선총독부'에 소속하여 '문인협회'란 이름으로 발족 한 것이다. 그것이 일인까지 가입하고 조선문인보국회란 이름으로 재출발하 여 조선문인 전부를 포섭하였단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해방되니까 저절로 해소되고 문인보국회의 멤버와 승부를 가지고 새로 재조직된 것이 文學家同盟[문학가동맹]의 전신인 文化協議會 [문화협의회]다. 회관은 문인 보국회 회관인 韓靑[한청]빌딩 4층이었다.

그런데 나는 춘원 제명 문제로 거기서도 탈퇴하였다. 그러나 협의원 중에 서는 나의 탈퇴를 인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그 때 방인근, 박종화, 梁柱東 [양주동] 군이 朝鮮文人協會[조선문인협회]를 발기한다고 할 때도 내게 간 청하여 가서 해소시켜 달라하였다.

그때는 좌익, 우익이라는 편당적인 색채도 뚜렷하지 않은 시절이라 문화협 의회가 있고 문인협회가 또 생기는 것은 會[회]가 둘이 있어야 회장이 둘이 있을 것이라 조선사람 특유의 벼슬욕이 낳은 희극이려니 가벼이 생각하고 太古寺[태고사]로 문인협회를 누차 찾았다.

그러는 동안에 문화협의회는 차차 좌익적 색채가 농후해지며 몇몇 우익측 젊은 문사들은 자진하여 문화협의회를 탈퇴하여 그 측에서 제명한 몇몇 과 거의 친구 문사들은 謝罪聲明[사죄성명]을 하고 다시 가입 신청을 하는 등 의 사변이 일어났다.

각계가 다 좌우로 갈릴지라도 문단만은 한 개 민족의 문학으로 결코 좌우 로 분열시키고 싶지 않은 나는 좌우단합을 위하여 꽤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아직껏 선배를 선배로 대접해 오던 문단도 좌우익으로 갈리면서는 선배도 후배도 없었다. 내가 퍽 사랑하고 귀애하던 젊은 문사들도 수두룩히 좌익으로 돌아섰다. 이 사람이면 장치 우리 문단건설의 한 귀한 기둥이 되 려니 촉망하던 여러 사람이 좌로 달아났다. 소련에서 혹은 공산당에서 몇백 만 원의 기밀비가 나와서 좌익 문사들에 퍼졌다. 그것이 모두 위조지폐다 등등의 소문이 퍼지며, 사실 가난에 쪼들리던 좌익 문사들이 막대한 골동품 을 사며, 집을 사며, 여행을 하며, 한때 호화스러운 소문이 높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동경하는 북조선으로 모두 탈출하고 말았는데, 예술을 사 랑한다는 김일성 치하의 북조선에게도 그들은 과히 후대받지 못하는 모양으 로 도로 남조선으로 오고 싶어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은혜받지 못한 가련한 그들ㅡ 일찌기 일본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숨은 글을 쓰노라고 애쓰다가 그도 못하여 붓대를 꺾었다가. 나라가 해방되매 젊은 객 기에 공산주의로 쏠리어 북으로 도피하고 보니 그것도 시원치 않아서 도로 남쪽을 사모하는ㅡ 定心[정심] 없는 그들ㅡ 이것이 우리 민족의 결국의 결 말이던가?

1946년 이른 봄, 남한 땅에 버티고 있는 문사들로써 '文筆家協會'[문필가 협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연말, 무슨 시위 행렬을 구경하면서 大東新聞 社[대동신문사] 사장실에 앉아있다가 이야기끝에 문단도 이제 다 좌우 두 쪽으로 갈라졌는데, 좌측에는 공산주의 조직 기술에 따라서 '문학가동맹'이 생겨나서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우측 문사들은 제각기 개개체로 조직체가 없 어서 걱정이라 했더니, 사장은 이 내 말을 듣고 느낀 바 있던지 결성비는

<대동신문>에서 낼테니 하나 만들어 보자는 말이 나왔다.

이리하여 이듬해 정월에 國一館[국일관]에서 준비회를 열고 뒤이어 결성회 를 靑年會館[청년회관]에서 하였다.

그 첫 회합날, 나는 근자 밤출입을 안 하는 전통을 깨뜨리고 이에 출석하 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모두를 회장, 간사, 무슨 부장 등의 직함 자리의 전쟁을 보고 중도 집으로 돌아왔다. 과거 '문학가동맹'의 결성에서도 그랬 거니와 문인들이 문인답지 않게 무슨 자리를 서로 탐내서 다투는 것은 참으 로 역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2, 3일 뒤 역시 대동신문사에서 그 신생 '문필가협회'의 간부 李 軒求[이헌구]를 만나서 문필가협회가 할 일 가운데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조선 사람이 대개, 대체 문사라는 인생은 좌익이거니 하는 생각을 가졌으니 이것을 타파하는 일이 급하고 그러기 위해서도 방송국에라도 한 주일에 단 10분씩이라도 문필가협회의 시간이라는 것을 두어서 우익 문인의 단체가 있 다는 것을 상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그 밖의 수삼 조건으로 주의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문필가협회의 한 벼슬 자리를 이미 차지한 그는 더 움직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지 나의 주의는 聽而不聞[청이불문]이었다.

이래, 문필가협회는 무엇하는지 이 요란한 세상에서 고요히 잠만 자고 있 는 모양이다. 그때 대동신문사에서 나온 협회기관지의 비용도 누구나 먹었 는지 잡지가 나온 것을 보지 못했고, 젊은 축들이 문학 옹호를 위하여 무슨 행동을 하려 하면 도리어 간부측에서 억압해서 못하게 하며ㅡ 말하자면 문 학을 보호하려는 협회가 아니요, 위축시키려는 협회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땅 좌익 중견 전부를 포섭하고 있는 그 협회는 장차 제 길로만 올라서면 우리 문학진흥의 날도 이르게 될 것이다. 다만 파생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성의 영향인지, 거기도 金派[김파], 李派[이파] 등 수두룩한 파가 생겨서 서로 할퀴고 뜯는 불상사가 보이는 것은, 바라보기에 딱하고 한심스 러운 일이다.

結語[결어][편집]

이렇듯 우리 문학은 1918년에 발족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 맨 처음부 터 오늘까지의 고생스러운 가시밭을 다 겪어온 나같은 사람은 눈에는 과연 용하게 자라났다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만한 괴로운 가시밭이었다.

한 민족의 문학이 발흥하려면 첫째로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고, 감독 당국 의 보호 장려가 필요하거늘, 우리의 민족 문학은 처음 대중의 지지의 권외 에서 나서 자랐고, 감독 당국의 탄압과 배제의 아래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시밭에서 자란 문학이 어느 민족에 또 있던가?

이러한 고난을 뚫고 좀 자라노라니까 좌익문학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순탄 히 자라는 민족문학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좌익문학이 없어지면서는 소 위 태평양전쟁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종이가 없고 물자가 부족한 가난살이에 겹쳐서 당국은 문학협력을 강요하는 어지러운 세상이 이르렀다.

그 뒤에 이른 고개는 38선이라는 구획으로 나라가 두 조각이 나며, 우수한 몇몇 문사가 북조선으로 건너가서 삼십 유여 년 길러온 문학도 두 조각으로 부스러진 일이었다.

'도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 도야지는 진주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다.' 고 한 바이블의 말이 있지만 문학은 이 민족에게는 너무도 거룩한 학문일지 도 모른다. 5천 년간 문화로 길러나고 자란 동양민족이 문화를 무시한단 사 실도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다.

일본 당국의 탄압이 있고 일반 대중의 무시까지 겹칠 때, 어떤 때는 이 문 학을 탁 내던지고 싶은 충동도 비일비재였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붙들어서 오늘날 국가 해방까지 본 것이다. 해방이 되자, 문단 중견들은 모두 북조선 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북조선에 가 있는 이태준이 문학가동맹 창립 때 어떤날 나에게 이 런 말을 하였다.

"소련서는 문학자도 大巨[대신]의 대우를 해 준답디다."

대신 자리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생활안정이 부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건국 200년 미만인 과학문명의 나라 미국 군정의 남조선을 박차고 북조선으 로 건너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언제 이런 말을 하였다.

"내 아들놈이 문학을 하겠다기에 욕했소. 이놈, 네 아비가 문학 30년에 집 한 간 못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너도 문학이냐고. 그래 의학을 시켰소. 사 위도 의사 사위를 맞고…."


일본이 40년간 이 땅을 통치함에 가장 문학의 발흥을 꺼린 것이다. 문학이 민심에 주는 그 영향력을 생각하여 '문학 없는 땅'을 만들려 한 것이다. 그 런 정책 아래서 문학을 건설하노라니, 과연 땀나는 노릇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일본에서 해방되고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운영되는 고장이 되었 다. 정치적으로 간섭하고 탄압하는 아무 기관도 없이 오직 자유로운 세상에 나서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내부적으로 남을 밟고 해치려는 좁은 생각에서 해탈되어, 우리의 문학을 힘차게 기를 수 있는 날이 이르렀다.

과거 40년간, 일본 정치 아래서 우리 사람이 한 일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학대받아 보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문학처럼 일본의 학대와 자국민의 무시 아래서 發芽[발아]해서 자란 것은 없다. 그 끈기 있는 생장력을 가지고 우 리는 장래 우리의 마음에 맞는 체제 아래서 우리의 문학을 크게 키워 볼 수 가 있을 것이다.

세계 열강의 틈에 끼어서 그 건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방 4천 년의 정기를 모은 우리의 문학을 우리는 장차 키워 보자.

가시밭에 자란 우리의 문학을 옥토에 고이 배양할 것이 우리와 우리 후배 에게 짊어지워진 지대한 사명이다. 된소나기를 지난날의 꿈으로, 우리는 우 리의 문학을 곱게 화려하게 키워 보자ㅡ 이것이 후배에게 주는 가장 진실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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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그는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23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선일보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이후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그의 형 김동원은 안창호의 측근으로 흥사단의 측면지원조직이던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는데,

그 역시 흥사단에 가입하고 동우구락부에 가입했다.

그 뒤 이광수의 수양동맹회와 통합하자 수양동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전향 의혹을 받게 된다.

 

 

 

 

 

金東仁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출생 1900년 10월 2일(1900-10-02)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51년 1월 5일 (50세)
소속 前 조선일보 학예부장
학력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종교 개신교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되었다.[1]



김동인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던 김대윤(金大閏)이다.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안창호의 측근 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청소년기[편집]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출국하여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도쿄 유학 중 그는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2]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되었다.[1]

 

김동인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이자 개신교 장로였던 김대윤(金大閏)이다. 이복 형 김동원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안창호의 측근 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인은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청소년기[편집]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해 9월 다시 출국하여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화숙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 되었다. 도쿄 유학 중 그는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2]

문학, 사회 활동[편집]
독립운동 참여[편집]
 
2·8 독립 선언이 낭독된 도쿄 히비야 공원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1918년 12월부터 이광수, 최팔용, 신익희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만세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체포,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상주의에 깊이 공감하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등 한국인 대표단이 내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소설가, 작가 활동[편집]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한편 신여성의 자유 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김동인은 신여성 문사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를 좀 더 알기 위해 엘렌 케이며 구리야가와 박사의 저서도 숙독"했지만, 결국 "남녀 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긴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3] 이러한 부정적인 언급들은 김명순 개인을 넘어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을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 여겼던 신여성들과 지식인들 전반을 겨냥한 것이었다.[3] 그는 소설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그는 풍자와 조롱을 잘 하였고, 동료 문인이나 언론인들, 취재 기자들과도 종종 시비를 붙기도 했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1932)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고 살았다.[4]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언론, 사회 활동[편집]
초반에 그는 문인은 순수하게 소설과 시만 써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23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5]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선일보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이후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그의 형 김동원은 안창호의 측근으로 흥사단의 측면지원조직이던 동우구락부를 조직했는데, 그 역시 흥사단에 가입하고 동우구락부에 가입했다. 그 뒤 이광수의 수양동맹회와 통합하자 수양동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전향 의혹을 받게 된다.

친일 행적 논란[편집]
 
193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 중일전쟁 당시 중국전선을 방문해 일본군을 위문하러 갔다왔다는 내용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하였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임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이후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이 밖에 김동인은 친일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그는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에 거절했다.

생애 후반[편집]
광복 이후[편집]
8월 17일 임화와 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돼 있었다. 한편 해방 직후 이광수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나타나자 앞장서서 이광수를 변호하는 몇 안되는 문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9월에 한민당이 창당되어 그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6] 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1945년 12월 이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내용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 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지책, '조선어와 조선 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미화했다.

말년[편집]
김동인은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7] 만년의 김동인은 약국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구입했다. 그 중 가장 값싸고 강력한 포수크로랄을 주로 먹었다. 그는 수면제에 의존해 살아 갔고, 수면제에 관한 한 박사가 됐다.[7]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중풍을 앓게 되면서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도 찾아왔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서울의 쪽방에서 병마와 고독과 싸우며 수면제와 술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으나 몸이 불편하여 얼마 못 가 다시 되돌아왔다. 6월 28일에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조선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4 후퇴 무렵인 1951년 1월 5일 서울 하왕십리동의 자택에서 사망, 동네 이웃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묻어주었다.

사후[편집]
한국 전쟁 직후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에 그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졌다. 이후 박종화, 염상섭, 장준하 등에 의해 그의 작품성에 대한 조명 및 추모운동이 시작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소설 3편을 포함하여 총 9편이다.[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학력[편집]
평안남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일본 도쿄 사립 중학교 수료
일본 도쿄 메이지 중학교 졸업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일본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기타[편집]
일제강점기 말기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투옥되고 변절하여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한국 전쟁 때 납북된 김동원이 소설가 김동인의 이복형이다.

1955년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김동인의 소설과 글 등을 통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소설의 한 부분만 떼어놓고 친일행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행위에는 적극성이 결여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했었다.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친일 행위를 인정했다.[9]

“ 김동인은 1944년 1월 16일부터 1월 28일까지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백마강>은 일본이 조선과 일본의 내선일체를 주제로 기획한 시국소설인데 김씨가 ‘작자의 말’ 등을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한 나라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그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

주요 작품[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김동인

〈배따라기〉
〈감자〉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대장부로 묘사한 역사소설)
〈광염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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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에 다가 가는데 임종국이 있다.

 

 

정운현

출생 1959년 9월 2일, 경상남도 함양

 방송인, 신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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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사항

2014.05 ~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인금고관리위원회 위원
2014.09 ~ 2015.01

팩트TV 보도국장, 앵커

2013.03 ~ 2013.09

국민TV 보도편성담당 상임이사

2010.01 ~ 2012.01

다모아 대표이사

2008.11 ~ 2009.10

태터앤미디어 대표이사

2008.01 ~ 2008.11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

2005.06 ~ 2007.1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 처장

2002.01 ~ 2005.06

오마이뉴스 편집국 국장

1998.08 ~ 2001.12

대한매일 기자

1984.10 ~ 1998.08
         중앙일보 기자

'임종국'에 해당되는 글 119건

  1. 어느 친일파의 후손 (1) | 정운현
  2. 내가 아는 그 사람, 박원순 (19) | 정운현
  3. 其國非其國, 國破山河在, 國亂思良相 (20) | 정운현
  4. “이제 임종국 선생 액자는 내려놓으십시오” (2) | 정운현
  5. 근 30년을 안고 다닌 ‘임종국 선생 액자’ (7) | 정운현
  6. ‘실업자 리영희’는 뭘 해서 먹고 살았나 (18) | 정운현
  7. 『임종국평전』 개정판 서문에 부쳐 (12) | 정운현
  8. <중년 백수가 망가지지 않는 법 18가지> (14) | 정운현
  9. 다시 펴보는 졸저 <임종국 평전> (2) | 정운현
  10. '언론인 신채호'를 아십니까 (4) | 정운현
  11. <친일파는 살아 있다-83> 이병기, 정지용의 '친일시' (2) | 정운현
  12. 안철수, ‘박태준 묘’에 무릎 꿇은 까닭 (5) | 정운현
  13. <친일파는 살아 있다-78> 친일파 연구 성과물들 | 정운현
  14. <친일파는 살아 있다-77>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은 누구? (5) | 정운현
  15. [역사 에세이-36] 김태효와 하태경, 박효종…다시 ‘친일’을 묻는다 (3) | 정운현
  16. <친일파는 살아 있다-75> ‘친일인명사전’ 누가 만들었나 | 정운현
  17. <친일파는 살아 있다-45> 고등계형사, 어떻게 고문했나 (3) | 정운현
  18. <친일파는 살아 있다-35> ‘창씨개명 제1호’ 승려 이동인 (2) | 정운현
  19. <친일파는 살아 있다-23> 독립유공 훈장 받은 친일파들 (8) | 정운현
  20. <친일파는 살아 있다-17> 역대 장관 중 친일파는? (3)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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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신간 <친일파는 살아 있다>... '목차' 소개 (41) | 정운현
  26. 신간 <친일파는 살아 있다>를 펴내면서... (18) | 정운현
  27. [역사 에세이-14]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는 MB와 골수 친일파들 (33) | 정운현
  28. [역사 에세이-2] ‘백범 친구’ 김홍량의 서훈이 취소된 사연 (7) | 정운현
  29. 법정스님! 어디 계십니까? 보고 싶습니다 (6) | 정운현
  30. 돌멩이가 증언하는 일제 ‘황국신민화’ 정책 (10) | 정운현
  31. 얼떨결에 <情이란 무엇인가>를 쓰게 된 사연 (30) | 정운현
  32. [심층분석] 리영희와 임종국, 닮은점과 다른점 (7)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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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임종국평전-57] 건강악화로 '친일파총사' 공동집필 계약 | 정운현
  50. [임종국평전-56] 유종호와 다른 문덕수의 '억지비판' | 정운현
  51. [임종국평전-55] 문덕수의 ‘임종국 비판’-‘유치환 옹호’ (3) | 정운현
  52. [임종국평전-54] 정지용의 ‘이토’와 유종호의 변론 (1) | 정운현
  53. [임종국평전-53] 유종호의 ‘친일문서론'과 ‘소견’ 비판 (5) | 정운현
  54. [임종국평전-52] ‘그릇된 신념’의 화신 춘원 이광수 (1) | 정운현
  55. [임종국평전-51] 납득못할 ‘대동아공영권’ 동조 발언 (6) | 정운현
  56. [임종국평전-50] 북한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오해와 편견 (3) | 정운현
  57. [임종국평전-49] 북한엔 비판적, 미국엔 우호적 (1) | 정운현
  58. [임종국평전-48] “증거 보자”며 찾아온 친일파 후손 (2) | 정운현
  59. [임종국평전-47] 막내여동생이 쓴 '진혼곡' (2) | 정운현
  60. [임종국평전-46] 죽어서 '바람'이 되고자 했던 종국 (5) | 정운현
  61. [임종국평전-45] 김언호 사장이 '도서반환요청서' 낸 사연 (6) | 정운현
  62. [임종국평전-44] 감방서 <친일문학론> 보급한 백기완 (1) | 정운현
  63. [임종국평전-43] 임종국의 요산재, 정운현의 보림재 (4) | 정운현
  64. [임종국평전-42] 타인 이름으로 펴낸 <친일문학작품선집> (2) | 정운현
  65. [임종국평전-41] '고향'에의 꿈 담은 <한국문학의 민중사> (1) | 정운현
  66. [임종국평전-40] 미야다 여사와의 ‘우정’과 편지 | 정운현
  67. [임종국평전-39] 자료조사차 상경 '자취'하다 병 얻어 (4) | 정운현
  68. [임종국평전-38] 저술 왕성했던 80년대.. 매년 1권씩 출간 (2) | 정운현
  69. [임종국평전-37] 오모무라의 편지에 그려진 ‘요산재’ 시절 (7) | 정운현
  70. [임종국평전-36] 전기.전화도 없어 녹록찮은 천안 시골생활 | 정운현
  71. [임종국평전-35] 생계비 해결, 집필 전념 위해 ‘천안행’ | 정운현
  72. [임종국평전-34] 일제말 한국문단 이면사 <취한들의 배> (2) | 정운현
  73. [임종국평전-33] 평론가 면모 보여준 <한국문학의 사회사> | 정운현
  74. [임종국평전-32] “내 이름 빼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 정운현
  75. [임종국평전-31] 천도교 신파 간부 임문호의 ‘친일행적’ (2) | 정운현
  76. [임종국평전-30] '풍운아' 부친 임문호의 쓸쓸한 장례식 (2) | 정운현
  77. [임종국평전-29]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실명 등장 (7) | 정운현
  78. [임종국평전-28] 서른 여덟에 하숙집에서 만난 '새 인연' (5) | 정운현
  79. [임종국평전-27] 두번째 이혼 전후 일기장에 심경 토로 (1) | 정운현
  80. [임종국평전-26] 이혼소송-전제조건 놓고 다투는 두 사람 | 정운현
  81. [임종국평전-25] 손위 처남에게 도움 요청 편지 보내 (5) | 정운현
  82. [임종국평전-24] 텅 빈 병실에서 아내를 그리며 쓴 시(詩)들 (2) | 정운현
  83. [임종국평전-23] 새벽에 고은 찾아가 “입산 하고 싶다” | 정운현
  84. [임종국평전-22] <친일문학론>의 ‘옥의 티’, 오상순과 이병기 (2) | 정운현
  85. [임종국평전-21] 28명의 '작가론'에서 서정주가 빠진 까닭 (6) | 정운현
  86. [임종국평전-20] 신인들이 서문, 발문을 쓴 사연 (4) | 정운현
  87. [임종국평전-19] 홍사중의 '친일문학 공적론' 비판 | 정운현
  88. [임종국평전-18] <친일문학론> 일간지 광고와 서평 (4) | 정운현
  89. [임종국평전-17] 고대 도서관서 자료 찾다 만난 김윤식 (8) | 정운현
  90. [임종국평전-16] <친일문학론> 집필을 결심한 까닭 (6) | 정운현
  91. [임종국평전-15] 5.16 쿠데타 세력과 한일회담 (4) | 정운현
  92. [임종국평전-14] 화장품 외판원. 참빗장사 등 행상 시절 (8) | 정운현
  93. [임종국평전-13] 동기생 이선숙과 결혼, 주례는 조지훈 (2) | 정운현
  94. [임종국평전-12] 신경림 얼굴에 흉터가 생긴 사연 (8) | 정운현
  95. [임종국평전-11] 미발표 유고 등 詩 10여 편 남겨 | 정운현
  96. [임종국평전-10] '귀족시인' 이한직 추천으로 데뷔 | 정운현
  97. [임종국평전-9] '이상 연구'로 사학도 소리를 듣다 (8) | 정운현
  98. [임종국평전-8] '이상 연구'와 스승 조지훈의 격려 (8) | 정운현
  99. [임종국평전-7] '천재시인' 이상(李箱)에 빠지다 (9) | 정운현
  100. [임종국평전-6] 대학 중퇴와 좌절된 판검사의 꿈 (3) | 정운현
  101. [임종국평전-5] 피난시절 대구서 고려대 정치학과 입학 (3) | 정운현
  102. [임종국평전-4] 도봉리 집으로 찾아든 '식객'들 (6) | 정운현
  103. [임종국평전-3]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농고' 진학 (6) | 정운현
  104. [임종국평전-2] 우수한 성적에 건강했던 소학교 시절 (10) | 정운현
  105. [임종국평전-1] '그'를 찾아 3남과 여행을 떠나며 (21) | 정운현
  106. 오늘 문득, 임종국 선생을 그리며 (21) | 정운현
  107. 리영희 선생이 운전하신 차를 얻어 탔습니다 (130) | 정운현
  108. [작심기획:동아 대해부-9] 인촌, '친일' 불구 버젓이 건국훈장 받아 (59) | 정운현
  109. 뭐? 책 보관하려고 강남에 아파트 샀다고? (97) | 정운현
  110. 그리운 두 선비.. 송건호와 임종국 (7) | 정운현
  111. [3부] 강준만은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안된다? (32) | 정운현
  112. [춘원 다시보기-地] '문학'에만 쏠린 '이광수 연구' | 정운현
  113. 며칠 '집필휴가'를 다녀오겠습니다 (38) | 정운현
  114. 반민특위 조사관 정철용 선생의 선물 '목욕탕 수건' (4) | 정운현
  115. 그립고 보고픈 얼굴들 (29) | 정운현
  116. 지우가 죽다, 동백꽃이 떨어지다 (17) | 정운현
  117. 임종국 "3월과 8월엔 대목이었습니다" (10) | 정운현
  118. 임종국의 '쓸쓸한 시(詩)' 두 편 (26) | 정운현
  119. 낙숫물 소리, 정인(情人)의 속삭임 소리 (13) | 정운현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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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의 명언 1.

 

 

 

거짓말은 처음에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두 믿게된다.

2. 한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

3.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4.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된다.

5.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수있다.

6.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7.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땐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있다.

8. 99개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의 적절한 배합니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9. 언론은 정부의 손 안에 있는 피아노가 되어야한다.

10. 민중은 단순하다. 빵 한덩어리와 왜곡된 정보만 준다면 국가에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_IQN31uV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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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

믿을까 말까?

 http://blog.naver.com/damchi1209/10001351690


 


 

 

 

 

6.정인택의 신파조(新派調)

 

 

7.권순옥의 선택

 

 

주변 인물의 단편(이상 등)

 

 

이상 소설 "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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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4&setId=268441&totalCount=201&kristalProtocol=&itemId=ma&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B5%9C%EB%A6%B0&searchKeywordConjunction=AND

 

잡지 삼천리 속  최린

 

 

 

삼천리 제4호 1930-01-11 人材巡禮(第一編), 新聞社側 소식 원문제공
82 삼천리 제5호 1930-04-01 全盛時代 회고·수기 원문제공
83 삼천리 제6호 1930-05-01 諸氏의 聲明 설문 원문제공
84 삼천리 제6호 1930-05-01 나는 웨 僧이 되엇나? 韓龍雲 회고·수기 원문제공
85 삼천리 제7호 1930-07-01 海外諸氏 在內時代 회고·수기 원문제공
86 삼천리 제9호 1930-10-01 現有勢力 總調査, 新幹, 農總, 勞總, 靑總, 槿友, 天道敎, 基督敎, 佛敎 소식 원문제공
87 삼천리 제9호 1930-10-01 러부렛타-의 告白 회고·수기 원문제공
88 삼천리 제10호 1930-11-01 友邦 巨頭 會見記 소식 원문제공
89 삼천리 제11호 1931-01-01 朝鮮 民族的 代表의 選出問題 설문 원문제공
90 삼천리 제12호 1931-02-01 朝鮮運動은 協同乎 對立乎, 新幹會「解消運動」批判 설문 원문제공
91 삼천리 제12호 1931-02-01 大會 以後의 天道敎經倫 心耕學人 논설 원문제공
92 삼천리 제14호 1931-04-01 最近 十年間 筆禍, 舌禍史 회고·수기 원문제공
93 삼천리 제15호 1931-05-01 光武隆熙時代의 新女性總觀 회고·수기 원문제공
94 삼천리 제17호 1931-07-01 喫煙室 잡저 원문제공
95 삼천리 제17호 1931-07-01 交叉點 소식 원문제공
96 삼천리 제3권 제9호 1931-09-01 三千里 「壁新聞」 第4號 소식 원문제공

 

 

 

 

 

동아일보

 

 

1 동아일보 1920-07-12 03 10 금일 공판 시작되는 朝鮮民族代表 사십팔인의 肖像: 孫秉熙, 崔麟, 權東鎭, 吳世昌, 林禮煥, 權秉悳, 李鍾一, 羅仁協, 洪基兆, 金完圭, 羅龍煥, 李鍾勳, 洪秉箕, 朴準承, 李寅煥, 朴熙道, 崔聖模, 申洪植, 梁甸伯, 李明龍, 吉善宙, 李甲成, 金昌俊, 李弼柱, 吳華英, 朴東完, 鄭春洙, 申錫九, 韓龍雲, 白相奎, 安世桓, 林圭, 金智煥, 崔南善, 咸台永, 宋鎭禹, 鄭魯湜, 玄相允, 李景燮, 韓秉益, 金弘奎, 金道泰, 朴寅浩, 盧憲容, 金世煥, 康基德, 金元璧, 劉如大
2 동아일보 1920-07-14 03 01 展開된 獨立運動의 第一幕; 朝鮮民族代表 四十七人의 公判, 第二日에는 崔麟外 八名만 審問, 公安妨害의 理由로 傍聽은 一時禁止, 極秘密裏에 四人을 審問한 內容은 何?//崔麟부터 審問開始…//傍聽을 禁하고 大審問…//崔麟兩次의 四人會議…//崔南善宣言方法을 討議…崔南善參加始末…//宋鎭禹 李寅煥이 上京하야…//玄相允…//鄭魯湜 金道泰…(寫: 법정으로 들어가는 피고들)
3 동아일보 1920-07-15 03 01 兩敎同志者의 相呼相應; 朝鮮民族代表 四十七人의 公判, 第三日은 李寅煥外 五名을 審問, 獨立宣言의 計劃과 同志糾合에 奔走, 三月一日以前의 暗中飛躍的大活動…//李寅煥; 耶蘇敎의 同志糾合…兩敎合同의 運動…握手後의 大活動…//崔麟; 金五千圓의 出處…//咸台永; 「舊韓國을 回復할뿐」…//梁甸伯 李明龍 劉如大 三人 參加의 經過…
4 동아일보 1920-07-16 02 09 宣言動機의 眞實한 告白, 朝鮮民族代表四十七人의 公判; 申洪植 吉善宙; 悶悶難抑의 不平//朴熙道 吳華英 鄭春洙; 宜當許可할 獨立//李甲成 安世桓 金世煥; 熱烈한 獨立論//朴寅浩 盧憲容; 五千圓支出問題//崔南善; 最後의 一人 最後의 一刻//崔麟 權東鎭 吳世昌; 裁判長과 殆히 論戰
5 동아일보 1920-09-21 03 01 獨立宣言事件의 控訴公判 急轉直下로 事實審問에, 問題의 核心인 「公訴不受理」은 自歸水泡, 공소 불슈리 문뎨는 판결 내일때까지 더퍼둔다고, 생각도 아니하얏던 사실심문부터 드리모라친다, 第一日은 崔麟外 四十名을 訊問//控訴의 理由, 고등법원의 결정은 사건송치를 의미함//又復不受理申立, 제령제칠호는 아무 효력도 없다는 주장; 被告는 上告權을 가젓슨즉 먼저 법문제를 해결할지라; 被告側의 質問, 본안심리는 무엇? 일심판결은 파괴?//崔麟; 「獨立은 世界大勢」//各派의 合同運動//宣言書作成顚末, 최남선의 학식과 인격을 믿고 대세에 순응하여 짓도록 당부//午後엔 十四人 審問, 권동진외 십삼명심문
6 동아일보 1921-03-01 03 04 滿二個年의 春을 迎하는 獨立宣言事件 囚人의 生活, 권동진 한사람만 위병이 나고 그 밧게는 모다 별탈은 업다고(寫: 독림션언사건 관계쟈의 구금된 경성감옥; 최린 박희도 오세창 최남선 권동진 오화영의 사진, 그 옆에 쓰인 글씨는 각기 그사람들이 감옥으로부터 최근에 가족에게 부친 편지의 필적)
7 동아일보 1921-12-23 03 01 獨立宣言한 崔麟 咸台永 吳世昌 權東鎭 李鍾一 金昌俊 韓龍雲등 假出獄, 작 이십이일하오 두시삼십분 돌연히, 同志中 在監者는 李寅煥 吳華英 李甲成등 三人
8 동아일보 1922-03-07 03 05 桑港慘事에 鑑하야; 무엇보다도 사랑이 급무, 가장 의미가 심졀한 계획(天道敎庶務課長 崔麟氏談)
9 동아일보 1922-04-01 05 01 新生을 追求하는 朝鮮人, 現下急務는 果然 何인가//人格이 主, 비판정신의 필요, 中央高普校長崔斗善씨談//團結 敎育 피 공업발달의 필요, 漢城圖書會社 張道斌氏談//自作自給, 방금 가장 큰 문뎨, 韓一銀行頭取 閔大植氏談//經濟 活字 기타는 여개방차, 天道敎庶務課長崔麟氏談//不知是惡, 먼저 알어야 한다, 普成高普校長 鄭大鉉氏談//物質重視, 돈이 잇서야산다, 中央靑年會長 尹致昊氏談//農民救濟, 부자의 생각할일, 佛敎會 理事 朴漢永氏談//道德建設 시긔질투는 금물, 中央靑年會總務 李商在氏談//靈的革新 새로운 종교가 필요, 兪星濬氏談//經濟獨立 뎨일문뎨는 정권, 辯護士 朴勝彬氏談//相互扶扶助 힘을 모아 분투할일, 新生活社長 朴熙道氏談//不眠不休 모든일에 끈기잇게, 京城圖書舘 李範昇氏談
10 동아일보 1922-04-02 05 01 新生을 追求하는 朝鮮人, 現下急務는 果然 何인가//人格이 主, 비판정신의 필요, 中央高普校長崔斗善씨談//團結 敎育 피 공업발달의 필요, 漢城圖書會社 張道斌氏談//自作自給, 방금 가장 큰 문뎨, 韓一銀行頭取 閔大植氏談//經濟 活字 기타는 여개방차, 天道敎庶務課長崔麟氏談//不知是惡, 먼저 알어야 한다, 普成高普校長 鄭大鉉氏談//物質重視, 돈이 잇서야산다, 中央靑年會長 尹致昊氏談//農民救濟, 부자의 생각할일, 佛敎會 理事 朴漢永氏談//道德建設 시긔질투는 금물, 中央靑年會總務 李商在氏談//靈的革新 새로운 종교가 필요, 兪星濬氏談//經濟獨立 뎨일문뎨는 정권, 辯護士 朴勝彬氏談//相互扶扶助 힘을 모아 분투할일, 新生活社長 朴熙道氏談//不眠不休 모든일에 끈기잇게, 京城圖書舘 李範昇氏談
11 동아일보 1922-11-23 04 04 海州天道敎講演: 事業의 精神(崔麟), 朝鮮人의 將來(李敦化)
12 동아일보 1922-11-26 04 03 安岳邑天道敎會主催 演會: 朝鮮人의 運命(崔麟), 우리의 主義(李敦化)
13 동아일보 1922-11-29 04 04 鎭南浦碑石里 天道敎會大講演: 自活의 道(崔麟), 朝鮮의 將來(李敦化)
14 동아일보 1922-12-21 08 04 博川天道敎區에서 崔麟 李敦化兩氏의 大講演: 力(李敦化), 職業神聖(崔麟)
15 동아일보 1922-12-21 08 05 宣川天道敎區에서 天道敎中央總部 崔麟 李敦化兩氏 巡講
16 동아일보 1922-12-22 04 03 龍岩浦敎區에서 崔麟 李敦化兩氏講演
17 동아일보 1923-01-01 신년 제1호 03 01 朝鮮及朝鮮人의 煩悶(一) 정치적 경제적의 자유가업는 것이 제일번민, 편당싸홈하는 것도 큰걱정, 최린氏談
18 동아일보 1923-03-31 03 09 天道敎靑年會主催 강연: 現下의 日本(崔元淳)現下의 極東(金燦)現下의 朝鮮(崔麟)
19 동아일보 1923-04-05 03 09 朝鮮女子靑年會主催로 강연회: 朝鮮女子(崔麟)最大急務(李載甲), 旣婚男子의 離婚이 可乎아 否乎아(李弼秀)(모임란)
20 동아일보 1923-04-20 03 08 평양의 교육강연회, 大成敎育會主催로: 演士 宋鎭禹 崔麟 玄相允(모임란)

21 동아일보 1923-05-09 04 09 永同靑年會大講演會: 社會進化와 協同運動(金喆壽), 反省(崔麟), 너와나(安信行)
22 동아일보 1923-06-07 04 04 民大宣傳大講演: 反省(崔麟)(黃州)
23 동아일보 1923-08-07 04 04 文化大講演會計劃, 沙里院天道敎會主催 沙里院學友會及本社沙里院支局後援으로(演士 李熟化 崔麟)
24 동아일보 1923-12-09 02 01 必勝을 期하는 選手의 勇姿, 신임톄육회장 崔麟씨의 간곡한 식사가 잇고 먼저 텬진이 류로하는 소학단부터 개젼햇다(寫)//小學優勝은 光成에, 결국 한졈으로 輔仁에 패배(寫)//中學優勝은 培材에, 량군의 대젼과 관중의 응원격렬
25 동아일보 1924-01-01 02 01 生活改善의 第一步로 새해부터 우리朝鮮人이 實行할 새決心; (앙케트)//猜忌, 黨派, 조션민족의고질(李商在談)//悲觀, 不實, 비관하는 것은 멸망으로 드러가는길(崔麟氏談)//無公德心, 사소한일이 우리전톄를 욕되게한다(申興雨)//無勇無氣, 먼저용긔잇자(趙喆鎬氏談)//不潔한 우리의집안, 새해부터는 비와 걸레를 쓰름하기로 하여봅시다(金美理斯女史談)//自尊虛慾은 자긔를 망한다(金昌俊)//身體를 정결히하라(朱永善)//表裡不同 거듭나지안으면, 표리부동을 곳칠수업다(李敦化)//會規不守, 집회시간을 직히지 안는자는 남까지 락심식힘(盧俊鐸)//虛禮濫費, 쓸데업는 절차(兪星濬)//無職業녀자들은 놀고먹는 말을듯도록 하지말라(姜道成女史談)//白色, 不潔, 의복의결점, 염색옷을 검소히 입고 때때로 빨아 입읍시다(申앨버 女史談)//飮食一定, 시간불일과 생식으로 먹는것은 국민위생에 큰방해(申弼浩)//無用한 수고를 덜자(金弼禮)//浪費, 無蓄, 터무니업시 랑비, 돈업는 조선사람들이 쓰기를 예산업시 쓴다(金潤冕)//時間節約에 힘을쓰자(李灌鎔博士)//順序不整, 유시무종은 모다순서와 성산이 튼튼하지 못한까닭(李範昇)//酒와 煙草를 폐지하라, 술과 담배를 먹는것은 사회의 생명을 먹는것(金一善)//料店出入을 삼가하라, 소위 명사네들은 고등부랑자갓다(李鍾駿)//無味乾燥, 우리생활은 너무도 취미업다, 새해부터 잘살자(安錫桂)
26 동아일보 1924-01-07 02 04 離婚問題의 可否 (七) 自己犧牲에 同情, 살겟다 안살겟다하는 생각, 자긔를 희생함에 더욱 동졍, 崔麟氏談
27 동아일보 1924-02-11 03 07 天道敎講道會에 崔麟氏參席(安州)
28 동아일보 1924-10-25 02 03 天道敎祖 大神師 出生百年紀念式, 이십 팔일 기념관에서 거행(寫: 일반공용에 뎨공할 준공되는 천도교 긔념관)//紀念館無料提供, 엇던단톄 무슨일에든지 무료로 빌릴터, 天道敎崔麟氏談
29 동아일보 1924-12-06 03 03 婦人講座開催, 조선녀자청년회관에서: 自立의 二大條件(崔麟)
30 동아일보 1925-01-01 03 03 崔麟(古友)氏 試筆
31 동아일보 1925-01-23 02 01 百鬼遍滿한 昏衢의 明燈//混沌한 思想界의 善後策(二千萬民衆當面한 重大問題其一)//社會改善 爲先生活保障, 崔麟氏談//現實에 立脚 理論보다 實地, 韓龍雲氏談//各自尊重 主義나 思想을, 金得洙氏談//生活安定 此亦根本問題, 萎錫奉氏談//文藝, 宗敎, 健全한 眞正한, 鏡城耶蘇敎牧師 金麟瑞氏談//敎育, 生業, 그리고 宗敎로, 全州靑年會 尹相産氏談//言論廓淸, 敎育과 宗敎로, 咸興基督靑年會 李舜基氏談//惡黨撲滅 무엇보다 上策, 京城 金鍾範氏談//急進捷徑, 自然의 順理로, 京城金若水氏談//國民敎育, 第一物資豊足, 京城女子敎育協會金美理女史談
32 동아일보 1925-10-01 02 04 己未年運動과 朝鮮의 四十八人, 最近消息의 片片 (二) 崔麟, 白相奎, 韓龍雲, 金昌俊, 林禮煥, 羅仁協(讀者와 記者欄)
33 동아일보 1925-12-05 04 07 敎理講道와 社會問題講演, 來十日부터 高原天道敎에서: 演士 李敦化 崔麟
34 동아일보 1926-06-10 05 01 新事實 每日 續出, 學生中心의 某運動發覺, 市內 關係의 可驚할 情報, 鍾路署 兩段活動//學生續續檢擧, 일변으로는 경찰부에//主要人物 薛某//鷄龍山을 搜索//各道에서 檢擧護送, 경긔경찰부로//崔麟氏도 同行, 본사댱 金性洙氏도 동행
35 동아일보 1926-06-11 01 11 驛頭에서 또 逮捕, 상해에서 들어온 청년한명 작일 오후 일곱시경에 톄포, 민족적인 사건으로//종로서에 동행되엇든 崔麟氏와 金性洙氏 歸宅
36 동아일보 1927-04-21 04 06 五百戶稅代納, 崔麟容氏가(群山)
37 동아일보 1927-06-11 02 07 一年 豫定으로 崔麟氏 洋行, 구미 각국의 졍세시찰 목뎍, 十一日 橫濱出發
38 동아일보 1927-10-08 04 09 兩期戶稅代納, 崔麟容氏(群山)
39 동아일보 1928-04-01 02 09 崔麟氏 歸國, 금일 오후 팔시에, 歐米視察마치고
40 동아일보 1928-04-03 02 04 多數人士 歡迎裡 崔麟氏 再昨 歸國, 약 일개년간 세계를 시찰하고 재작일 밤에 무사히 귀국하여, 世界 卄一個國을 周遊

 

41 동아일보 1928-04-14 02 08 崔麟氏 歡迎 수요구락부 주최로
42 동아일보 1929-01-30 05 05 巨金探索者 崔麟政出發,「지러露皇室」遺産인 金塊가
43 동아일보 1929-04-09 04 08 金百圓을 寄附, 崔麟模氏가 新明學校에(碧潼)
44 동아일보 1930-01-01 01 01 創作生活, 天道敎正道領 崔麟氏談
45 동아일보 1930-04-04 03 01 十週年記念號를 通하야 朝鮮에 부치는 付託, 內外各國名士; 近代新聞紙의 偉力은 强大正當한 支配가 必要,「해일삼」卿//文化的 舊邦 배울 것이 만하「쫀넬슨」氏//朝鮮을 代表 極東文化 啓發,「치챠엡」氏//讀者의 信任 十年間의 功績 魚丕信//固有의 文化護持 又는 啓發 崔麟
46 동아일보 1930-04-09 02 06 天道敎靑盟이 自治反對決議 결의운운에 대하야 崔麟氏는 絶對로 否認
47 동아일보 1930-10-23 02 01 派爭에서 合同으로, 天道敎의 新舊兩派, 世稱沙里院派도 合同될듯, 交涉委員의 往來頻頻//兩派幹部의 感想 實現은 時間問題 合同을 確信 崔麟氏談//「오히려晩時의 嘆」誠實한 態度로, 李鍾麟氏談
48 동아일보 1930-12-19 02 06 天道敎幹部更迭 大領은 鄭廣朝氏, 合同問題압두고 大變革 權東鎭 崔麟兩氏는 顧問으로
49 동아일보 1930-12-21 02 09 ≪取消申請記事≫天道敎幹部更迭 大領은 鄭廣朝氏, 合同問題압두고 大變革 權東鎭 崔麟兩氏는 顧問으로
50 동아일보 1930-12-25 03 09 貧民同胞救濟, 安東縣 崔麟柱氏가
51 동아일보 1931-01-16 03 08 百七十戶에 白米一斗式, 安東 崔麟柱氏 厚意
52 동아일보 1931-09-20 03 12 金浦支局; 崔麟植 韓萬憶 任記者 記者 金鳳基 文善澤 依願解職
53 동아일보 1933-01-01 부록 01 08 新春을 맞는 우리의 抱負와 希望 ; 崔麟 : 協助精神과 實際的運動[肖]//梁柱三 : 犧牲精神과 實踐的氣魄[肖]//韓龍雲 : 正明한 認識[肖]
54 동아일보 1934-01-01 부록 01 08 新年에 보내는 우리의 새 信號 其一. 中道로 躍進, 中央基靑會長 尹致昊//過去를 淸算, 天道敎大領 崔麟//自主와 自學, 天道敎大宗司長 權東鎭//緊張과 忠實, 延禧專門學監 兪億兼//圓智方品行, 佛敎專門校長 朴漢永
55 동아일보 1934-04-09 석간 02 09 天道敎記念講談會 講師氏名 : 崔麟 鄭廣朝 李敦化 李根培
56 동아일보 1934-04-16 석간 02 05 天道敎 大道正 崔麟氏 參議說, 중추원 참의 후보로 내정
57 동아일보 1934-04-18 석간 01 08 崔麟(勅任官待遇) 朝鮮總督府中樞院參議被仰付
58 동아일보 1934-07-27 조간 02 06 桂洞崔麟宅 後園地下에서 彈丸五百發 發見 拳銃長銃彈藥과 革帶等, 鍾路署 血眼活動
59 동아일보 1934-08-03 조간 02 09 崔麟政護送도 中止 連累檢擧再着手 蓮建洞서 老人一名 檢擧取調 舊露皇室 寶物詐欺事件擴大
60 동아일보 1934-08-03 석간 02 01 孤島의 七億圓祕寶 싸고도는 世界的獵奇 警視廳刑事隊出張 主役崔麟政 逮捕 蓋平에서 京城護送 東署에 留置 國際的詐欺 朝鮮에 飛火//산사람 喪廳 黃金劇의 클라이막 중국어 능통한 것을 기화로 縣長의 丈人의 行勢//卅萬圓 먹은 崔麟政 被殺假裝코 潛跡, 舊韓國時代露公使通譯 미끼로 寶物採取運動金橫領

61 동아일보 1934-08-05 석간 02 12 現金等六萬圓 崔麟政押送, 로서아 「로마놉흐」皇室 「寶物」事件 舞臺移動
62 동아일보 1934-08-11 조간 02 11 國際詐欺의 關聯者 皮熙承 崔麟政等昨夜押送 「露皇室寶物事件」 後聞
63 동아일보 1934-09-20 조간 02 01 女流畫家 羅蕙錫氏 崔麟氏相對提訴 妻權 侵害에 依한 慰藉料萬二千圓 請求, 十九日午後正式手續[肖]//訴狀에 나타난 請求理由의 全文//貞操蹂躝關係는 內容證明으로, 不應하기에 畢竟訴訟提起 辯護士蘇完奎氏談
64 동아일보 1937-10-02 석간 04 07 特志家의 寄附로 新明學院에 曙光, 定州 兩崔氏巨金 喜捨, 崔麟瑞, 崔弘瑞씨가(雲田)
65 동아일보 1938-05-03 석간 01 11 崔麟(朝鮮總督府 中樞院參議) 依願總督府中樞院參議被免
66 동아일보 1946-10-10 석간 01 03 親日·反逆者들이 擡頭 崔麟, 李光洙, 金大羽, 朱耀翰, 朱耀燮, 桂光淳等이 謀議
67 동아일보 1947-08-19 석간 02 04 前中樞院參議 崔麟 留置場에서 斷食 天道敎 靑友黨事件?
68 동아일보 1949-03-24 석간 02 07 反民者 一回公判 三十日 崔麟等에 實施//楊秉一等自首(全州)//金大亨等 서울로 押送
69 동아일보 1949-03-30 석간 02 02 反民裁判 ; 經濟上의 親日이오 朴興植 政治活動을 否認[寫]//崔麟等은 今日//前高等刑事 李俊聖被逮//愛國志士들에 弑虐 拷問王金泰錫罪相을 陰蔽//눈병을 핑게로 金泰勳保釋申請(仁川)//親日牧師 金仁善逮捕
70 동아일보 1949-04-01 석간 02 05 反民裁判 民族運動에 큰 汚點 崔麟變節의 動機를 說明//金泰勳 서울 送致(仁川)//朴正純等四名 서울 本部에 送致(大邱)//鄭僑源을 收監 楊載弘刑事는 起訴//李豐漢은 保釋//金秊洙에 拘束取消處分//朴鍾杓, 孫永穆等 反民特檢에 送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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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위키백과  (0) 2016.02.09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878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한성부로 상경하여 개화파 청년들과 교유하게 된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쳤는데, 당시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일심회 조직 사건으로 일본으로 잠시 피신했다.[1] 그때 개화파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당시 일심회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다.

1904년 10월에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 부립 제1중학에 입학하였다. 그해 중학교 교장이 조선인에게는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파업을 일으켜 퇴교당한다. 1905년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선임된다. 1906년 메이지 대학을 입학한 최린은 대한제국 황실을 모독한 공연장을 습격하고 영업방해로 검거된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다. 1907년에는 광무학회 총대와 태극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년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일본 유학 중에 같은 황실유학생이었던 최남선,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쓰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교류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귀국 후 1910년 10월 천도교에 입교했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였고, 교육 분야에 종사했다.

3.1 운동 활동[편집]

1918년부터 손병희오세창, 권동진 등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의 방안을 논의하다가 1919년 3·1 운동고종의 인산일을 구상했다. 최린은 불교계의 한용운, 기독교계의 이승훈을 통해 두 종교 대표를 참가시키고 기미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또한 3·1 운동의 3원칙으로 대중화와 단일화, 비폭력을 제시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 이후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하였다.

사회활동과 변절[편집]

출옥한 후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 교육과 주임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5월 동지였던 손병희가 사망했고, 그 해 9월부터 1924년까지 종리사를 거쳐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종법사를 지냈다. 그외에 1923년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홀동하며 점차 활동영역을 사회문화 전반으로 넓혀갔다. 같은 해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발기인,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 1925년 조선체육회 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유럽과 미국등 21개 국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1929년에 교단 최고직인 도령에 올랐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폭 넓은 사회활동을 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손병희가 죽고 난 이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이때부터 최린은 '민족개량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다. 이 자치론은 "독립의 전단계로서의 자치와 실력 양성"을 뜻하였고, 이는 곧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과 실력 양성이라는 실리를 만족하므로 최린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유산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자치론은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키려는 일제의 정치모략이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다. 총독부와 밀착한 이러한 행보는 변절의 단초가 된다.

나혜석과의 불륜[편집]

1928년 우연히 파리 시에서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거리가 된, 당시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중 나혜석과의 불륜이 발단이 되어 1930년 나혜석은 이혼하게 된다.[2]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다. 1928년 11월 20일 저녁, 두 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함께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밤 최린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수십 회 이어졌고,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란 소문이 나돌았다.[3]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나혜석은 그와 사랑에 빠진다.[4] 그러나 나혜석이 여러 남성과 연애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우영은 비밀리에 파리로 돌아와 나혜석의 뒤를 따라갔고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실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나혜석이 이혼한 뒤, 그녀의 자유 연애관과 여성주의 사상을 피곤하게 여긴 그는 나혜석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최린과의 불륜이 이혼의 원인이 된 이상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를 정조 유린죄라는 명목으로 법원에 고소하게 된다.

나중에 나혜석은 그를 상대로 12000원의 위자료 소송을 청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매수하고, 그는 2천원의 돈을 나혜석에게 전달하고 입막음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아내를 유혹하고 가정을 파탄냈다는 사회의 조롱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도 신뢰가 깎이게 된다.

친일 행적[편집]

1940년 2월 11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최린의 글. 내용은 황국신민으로서 봉공의 성의를 다하고 동시에 내지 동포의 상애의 정의를 촉진한다.'라는 내용으로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사설이다.

1934년 4월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그 해 8월 내선일체와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는 한일 연합 친일 조직인 시중회를 조직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1937년 7월 중추원에서 주편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로 선발되어 전주,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이리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국민의 자각을 촉구하는'강연활동등을 수행했다.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등 각종 친일단체에 주요간부를 맡으며 강연 활동과 학병권유 유세, 내선일체 적극지지, 전쟁을 지원하는 등등 수없이 많은 친일행적을 남겨 극렬 친일 인사가 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5] 최린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5]

광복 이후[편집]

광복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미군정청이 발표한 '이동사령 제29호'에 따라 같은 날짜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교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시인하고 재판장과 방청객들 앞에서 솔직한 참회를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사면될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덤덤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최후 변론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납북과 최후[편집]

그는 여러 번 병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반민특위 재판 공판을 3차례 받은 끝에 1949년 4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 전쟁 기간 중에 납북되어 끌려갔다. 이후 조소앙, 김원봉, 엄항섭, 안재홍 등의 인사들과 함께 북한의 대남한 통일 선전기관에 참여를 요구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 이후 행방은 1958년 12월에 81세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을뿐 그외에는 알려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으므로 1962년 3월의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 올랐으나 곧 제외되었다.

사후[편집]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천도교의 두 부문에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최린은 공개적으로 친일을 한 인물인데다 천도교 신자로서 김일성과 직접 교류한 박인진, 최동오, 김달현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게 평가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도 대표적인 민족 배반자로 언급되었다.[6]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역시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이광수의 묘도 조성되어 있을 정도지만,[7] 최린의 최후나 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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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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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전집






제1권 역사
朝鮮上古史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90~1936)가 쓴 한국사 관련 책 가운데 대표적인 저술이다. 한말 일제강점기에 언론인·구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역사연구자로서 활동한 그는 『조선상고사』를 비롯하여 『독사신론(讀史新論)』·『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의 저서와 많은 논술들을 남겼다.
  한말 구국언론활동을 펴던 단재(신채호)는 역사의식을 드높이는 글을 많이 썼다.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의 논설에는 역사를 통해 애국심을 고양하려는 단재(신채호)의 생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무렵에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발표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1908년 8월 하순부터 그 해 12월 중순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독사신론』은 종래 전통적으로 고수해 오던 한국사 인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로운 역사인식의 결과물이었다. 『독사신론』과 관련하여 의미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독사신론』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그의 한국사 인식이, 그 뒤 상당한 수정 보완 작업을 거치긴 했지만, 『조선상고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207~218쪽 참고).
  단재(신채호)는 1910년 나라가 망한 후 언론구국활동과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서 틈틈이 국사연구도 계속했다. 1910년 4월 국외로 망명한 그는 청도회의를 거쳐 그 해 9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권업신문(勸業新聞)』을 통해 언론구국활동을 전개했다. 1913년 『권업신문』이 폐간되자 단재(신채호)는 상해에 거주하는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을 받아 만주를 거쳐 상해에 가서 1년간 체류했다. 1914년 대종교인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을 받은 단재(신채호)는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가서 1년간 체류하며 동창(東昌)학교 국사교재로서 조선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현 등에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군을 답사하고 문헌의 부족을 실지답사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1915년 단재(신채호)는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언론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북경 근처의 사적답사와 조선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아마도 이때에 그는 상당량의 원고를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언급되겠지만, 1921년 이윤재가 북경의 단재(신채호)를 방문했을 때 수년 전부터 써 왔던 것이라면서 보여준 역사관련 원고는 이미 이 무렵에 1차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북경에 체류하면서 단재(신채호)는, 1917년 조카딸 향란(香蘭)의 혼사 문제로 잠깐 귀국한 적이 있으나, 3·1운동을 맞을 때까지 그는 북경에 체재했다. 3·1운동 직후 단재(신채호)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통합임시정부 조직과정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임되는 것을 계기로 단재(신채호)는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고,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는 1919년 10월 동지들과 함께 상해에서 창간한 『신대한(新大韓)』을 통해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과도 논쟁을 벌였다.
  1년 남짓 상해에 머물렀던 단재(신채호)는 1920년 4월 북경으로 옮겨 박자혜와 결혼, 한 때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그 이듬해 1월에는 『천고(天鼓)』를 간행,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했다. 3·1운동 후 옥고를 치르고 북경으로 ‘탈주’한 심훈(沈熏)은 그 때 마침 『천고』라는 잡지를 주간하는 단재(신채호)를 방문, “희미한 등하(燈下)에서 모필(毛筆)로 붉은 정간을 친 원고지에다가 철야집필”하면서 “한 구절 쓰고는 소리 높여 읊고 몇 줄 또 써 내려가다가는 붓을 멈추고 무릎을 치며 위연(喟然)히 탄식”하는 그를 목도했다고 술회했다(심훈,「단재와 우당」, 『개정판 단재 신채호전집 별집』, 1979, 410~416쪽).
  1922년 12월 김원봉의 요청으로 단재(신채호)는 상해에 내려가 유자명과 함께 그 이듬해 1월에 총 5장 6400여 자로 된,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이론화하기 위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그 무렵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주비회와 1923년 1월 3일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도 관여,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그 해 8월 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으나 일본을 의식한 소련 정부의 방해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단재(신채호)가 이끈 창조파와,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를 의미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그는 1924년 3월부터 한 때 승려생활도 했다. 그러나 1924년 가을부터 그는 다시 국사연구를 재개하면서 북경대학 도서관을 이용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는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북경에 체재하면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경에 그래도 안정적으로 체재하면서 집필할 수 있었던 시기는, 1915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까지 약 4년간과 1920년 4월부터 1922년 12월까지였고, 1924년 가을부터 그가 무정부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간까지도 국사연구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21년에 북경에 체류하고 있던 단재(신채호)는 자신이 집필한 상당량의 국사 관련 원고뭉치를 갖고 있었다. 이 해 단재(신채호)가 자신을 방문한 이윤재에게 그 원고뭉치를 보여 주었다. 이윤재는 단재(신채호)와 북경 주변에 산재한 조선사 관련 고적과 자료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단재(신채호)의 조선역사 저술에 관해서도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 원고뭉치를 볼 수 있었다. 이윤재는 15년 후 단재(신채호)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단재(신채호)와 나눈 대화를「북경시대의 단재」라는 글로 남겼다. 그 글에서 그는 당시 그 원고뭉치를 본 사실 외에 단재(신채호)의 입옥 후 그 원고뭉치의 행방을 암시하는 여운도 남겼다. 

  “‘선생은 조선역사(朝鮮歷史)를 하나 저술하시지 아니하시렵니까’
  ‘내가 수년 전부터 조금 써 둔 것이 있는데 아직 좀 덜된 것이 있습니다마는 쉬 끝내려고 합니다.’하며 원고 뭉치를 끄내어 보인다.
  이 원고는 모두 다섯 책으로 되었는데, 첫째 권은 『조선사통론(朝鮮史通論)』, 둘째 권은 『문화편』, 셋째 권은 『사상변천편』, 넷째 권은 『강역고(疆域考)』, 다섯째 권은 『인물고(人物考)』, 이밖에 또 부록이 있을 듯하다고 한다.
  ‘이것을 얼른 출판하도록 하십시다.’
  ‘아직 더 보수할 것이 있으니 다 끝난 다음에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수정하는 때이면 이왕이면 철자법(綴字法)까지 다 고쳐서 했으면 어떨까요.’
  ‘물론 좋지요. 그것을랑 선생이 맡아서 전부 고쳐 주시오.’
  ‘그런데 인쇄는 내지(內地)에 들여다가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조선문(朝鮮文) 활자가 있으니 인쇄하기 편리한 것이요, 다음으로 해외의 출판물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취체(取締)가 심하니 조선 안에서 발행되어야 널리 보급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석판인쇄(石版印刷)가 연판인쇄(鉛版印刷)보다 값이 싸니 인쇄비가 훨씬 덜 들 것이요, 아무리 그네들의 취체가 심하다기로 선언서(宣言書)나 격문(檄文)이 아니요. 단순히 학술로 된 서적까지 그렇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 말에는 더 우기지 못하고 출판비는 힘닿는 데까지 내가 힘써 보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출판비로써 불다(不多)의 금액을 주선하였던 바 여의(如意)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원고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중외일보(中外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 지상에 단재(신채호)의 조선사 논문이 가끔까끔 실리는 것이며, 단행본으로 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가 그 원고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선생의 입옥후(入獄後)에도 그 장서 전부가 천진(天津) 모(某)씨에게 임치(任置)되어 있다 하니 그 원고도 아마 그 속에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하, 480~ 482쪽).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하의 편집자는 위 인용문 중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시대일보(時代日報)』로, 『조선사연구초』를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로 그리고 ‘천진(天津) 모씨(某氏)’를 ‘박용태(朴龍泰)’로 주기(註記)했으나, 이윤재가 적시한 『조선사연구초』를 편집자가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로 바로잡는다고 한 것은 착오인 것 같이 보인다. 이 글을 쓸 당시(1936.4) 이윤재는 단행본 『조선사연구초』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1929년에 이미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조선사연구초』에 실려진 논문들은 자신이 북경에서 본 단재(신채호)의 원고뭉치 속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북경의 그 원고뭉치가 뒷날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로 연재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윤재가 적시한 『조선사연구초』를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일 것이라고 추정하여 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윤재가 그 글을 쓸 당시에는 『조선사연구초』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있었으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신문에 연재만 되었을 뿐 아직 단행본으로 출간되지는 않았다.
  단재(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쓴 시기는 그가 북경에 다소 안정적으로 체류하고 있었을 1915년~1919년의 약 4년간과 1920년 4월~1922년 12월까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윤재에게 원고뭉치를 보여주었던 시기가 1921년이니까 『조선상고사』를 쓴 시기는 1921년 이전이라고 봐야 한다. 이와 함께 『조선상고사』 ‘총론’의 집필 연대를 알게 해 주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조선상고사』 총론에, “거금(距今) 16년 전에 국치(國恥)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포”했다고 언급한 구절로서 ‘총론’을 쓰기 16년 전에 『독사신론』을 썼다고 함으로써 『독사신론』이 발표된 지 16년 후에 이 ‘총론’을 썼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16년 전’이란 단어가 국치(1905년 을사늑약)를 수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독사신론』을 지어’를 수식하고 있는가 하는 데에 따라 이 책 총론의 집필연대가 달라질 수 있다. 필자도 한 때 ‘거금 16년 전’을 그 뒤에 나오는 ‘국치’라는 단어를 꾸민다고 보고 이 ‘총론’의 집필연대를 1921년으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거금 16년 전’은 ‘『독사신론』을 지어’에 닿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상고사』 ‘총론’의 집필 연대는 1924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앞에서 논의한 것을 정리해 보자. 1921년 단재(신채호)가 이윤재에게 보여준 원고 뭉치 가운데 『조선상고사』가 있었다면, 1924년 이후에 집필했을 『조선상고사』의 ‘총론’은 거기에 들어 있을 수가 없다. ‘총론’ 부분을 제외한 『조선상고사』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상고사』의 ‘본문’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신채호)는 1921년 이전에 『조선상고사』의 본문을 먼저 써 놓고 뒤(1924년 이후)에 『조선상고사』의 ‘총론’을 썼던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그가 『조선상고사』의 본문에 해당하는 부문을 먼저 써 놓고 몇 년 뒤에 총론을 썼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을 먼저 써 놓고 서론과 결론을 쓰는 일반 저술방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총론’을 쓴 시기와 관련하여 참고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총론’에 나타난 단재(신채호)의 역사이론과 관련된 것이다. ‘총론’에 나타난 단재(신채호)의 역사이론 중에는 그 내용이 양계초(梁啓超)의 『중국역사연구법』에 영향을 받은 듯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양계초가 『중국역사연구법』을 공간한 것은 1922년이다. 따라서 『조선상고사』 ‘총론’에 나타난 단재(신채호)의 역사관이 양계초의 『중국역사연구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총론’은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이 공간된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단재(신채호)의 한국사 연구업적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25년 1월 3일부터 10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등 뒷날 『조선사연구초』에 합편된 6편의 논문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국내 신문에 연재하게 된 것은 당시 국내 지인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원고료를 얻어서 어린 아들의 양육비에 보태기 위함이라고 했다. 연재된 후 홍명희(洪命熹) 등이 이 논문들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려고 했을 때, 단재(신채호)는「평양패수고」에 불만이 많아 수정하겠다고 하면서 출판을 지연시켰던 모양이다.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료도 부족되고 평일의 연구도 너무 조율(粗率)하든 것이 작구 자각됩니다. 더욱 전일에 부분적 논문이나마 경솔히 쓴 것이 후회됩니다”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단행본 간행을 ‘중지시킬 수 있으면 중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했다. 그러나 홍명희는 단재(신채호)에게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라”고 하면서 홍석하(洪石下)를 통해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조선사연구초』, 홍명희 서 참조). 『조선사연구초』는 홍명희 서문을 쓴(1926) 지 3년 후인 1929년 6월에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정인보의 감수를 받아 출판하였다.
  『조선사연구초』가 간행된 시기는 국내에서 신간회 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시기였고 국학운동의 동력도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 때 평소에 단재(신채호)를 흠모하고 있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이 지인을 통해 단재(신채호)와 소통하여 그의 또 다른 원고를 입수, 연재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 책의 원명이라 할 『조선사(朝鮮史)』다. 민세는 자기보다 11세나 앞섰던 단재(신채호)를 중학에 다닐 때부터 지도층의 명사로 흠모하였고 서울의 동숙(同宿)하는 우사(寓舍)에서 만나 본 적이 있고 1913년에는 중국 상해에서도 다시 만나 잠시나마 동제사 활동을 같이 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가 조선일보사를 운영할 때에 『조선사』를 연재했고, 『조선사』 연재를 마감하는 바로 그 이튿날(10월 15일)부터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를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사』는 1931년 6월 10일부터 같은 해 10월 14일까지 『조선일보』 학예란에 무려 10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조선사』라고 한 것은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조선통사를 계획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재가 북경에서 다섯책으로 된 원고뭉치를 보았을 때에도 첫째 권이 『조선사통론』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는 백제의 부흥운동에 그치고 있다. 때문에 『조선일보』 연재 『조선사』가 해방 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을 때에 『조선상고사』로 개제(改題)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일보사가 단재(신채호)의 『조선사』를 연재하면서 편집상 가끔 착오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재 제목을 제 때에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재 제 54회(1931.8.12)부터 제 62회까지의 제목이다. 그 제목이 연재 제 53회(1931.8.11)의 중간에서 제8편「삼국 혈전(血戰)의 시(始)」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재 62회까지의 연재 첫 머리의 제목은 계속 제7편「남방제국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이라는 제목으로 보이고 있다. 때문에 연재 제목만 보면 제 52회부터 제 62회까지 [제7편]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제 63회(1931.8.22)에 이르러 갑자기 제9편「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연재 제 53회 중간부터 제 62회 초까지 제8편「삼국혈전의 시」로 되어 있다.
  또 있다. 연재 내용이 중복된 것도 있다. 가령 연재 82회와 83회의 모두(冒頭)에 게재한 11개 줄이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이것도 편집상의 착오 때문이다. 아마도 그 다음날 연재 첫 머리의 것을 전날의 것으로 잘못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진도 그것을 발견하고 그 이튿날(83회) 연재 끝에 사고(社告)로 “작일(昨日) 본란(本欄) 모두(冒頭) 11행은 금일(今日) 모두(冒頭)의 것이 오식(誤植)되었삽기 금일 재식(再植)하오며 이를 심사(深謝)함”이라고 ‘정정訂正’사고를 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연재 중에는 저자인 단재(신채호)의 실수라고는 볼 수 없는 오류들이 제법 눈에 많이 뜨인다. 가령 고구려의 살수전역을 다루고 있는 연재 64회에는 수나라의 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의 좌(우)익위대장군이라는 직책이 같은 연재에서 달리 표기되어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다. 이 점은 1948년 판 『조선상고사』(269쪽)에서도 우문술 우중문은 각각 좌익위대장군으로도 나오고 우익위대장군으로도 나오고 있다. 이 또한 편집 책임자나 인쇄공들의 부주의로 인한 오식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마 이런 실수들을 저자인 단재(신채호)가 직접 목격했더라면 당장 연재를 중지시켰을 것이다. 중국에서 자신의 원고에 글자 하나 그것도 어조사 하나를 고쳤다 하여 당시 꽤 인기를 끌던 투고를 중지시켰던 단재(신채호)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자기의 저술이 연재되고 있을 때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연구가 미흡하다는 것을 들어 연재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동아일보』에 연재된 논문을 『조선사연구초』로 합편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하려 했을 때에도 몇 번이나 홍명희에게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던 것과 상통한다. 『조선일보』 연재를 중지시켜 달라고 한 것은 여순감옥에 수감중인 단재(신채호)를 면회하러 간 『조선일보』 신영우(申榮雨)에게 요청한 것이며, 안재홍도 뒷날 보고를 받았다. 신영우가 단재(신채호)를 옥중 면회한 것은 『조선일보』에 『조선사』 연재가 끝나고 『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고 있던 1931년 11월 16일이다. 신영우가, “선생이 오랫동안 노력하여 저작한 역사가 『조선일보』 지상에 매일 계속 발표됨을 아십니까”라고 했을 때 단재(신채호)는 “네. 알기는 알았습니다마는 그 발표를 중지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지은 것이라 하나, 그것이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된 것이라고는 믿지 아니합니다. 돌아가시면 그 발표를 곧 중지시켜 주십시오. 만일 내가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신영우는 다시 “그와 같이 겸손하여 말씀하지마는 그것이 한 번 발표되자 조선에서는 큰 환영을 받고 있읍니다”고 하자, 단재(신채호)는 “내가 그것을 지을 때에는 결코 그와 같이 속히 발표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이 연구하여 내가 자신이 생기기 전에는 발표하고자 아니할 것이 중도에 이러한 처지에 당하여 연구가 중단되었으나, 다행히 건강한 몸으로 다시 지상에 나가게 된다면 다시 계속 연구하여 발표하고자 한 것입니다.……”(『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하, 442~443쪽)고 말했다. 단재(신채호)의 이같은 언급은 민세도 들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조선사』가 해방 후 『조선상고사』로 개제하여 단행본으로 간행될 때 민세는 그 책의 서문에서, 단재(신채호)가 그 원고를 두고 ‘미정고(未定稿)’이며 ‘퇴고(推敲)를 가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렇지만 민세는 『조선사』가 ‘조선 사단(史壇)과 학계의 하나의 틀림없는 중보(重寶)’임을 확신하고 연재를 지속시켰던 것이다. 이는 식민지하에서 실의와 좌절을 곱씹고 있던 동족에게 단재(신채호)의 『조선사』를 통해 민족적인 긍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영우가 단재(신채호)를 면회한 시기는 『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고 있을 때였지만 앞뒤 문맥으로 보아 단재(신채호)가 중지시켜 달라고 한 것이 당시 연재되고 있던 『조선상고문화사』만을 의미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단재(신채호)는 감옥에서 그 연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중지시켜 달라는 단재(신채호)의 요청이 꼭 『조선상고문화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세도 단재(신채호)의 중지 요청에 『조선사』가 포함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가 다시 소개된 것은 해방 직후다. 1946년 4월 김송규(金松圭)를 발행인으로 한 서울 광한서림(廣韓書林)이 『조선사론(朝鮮史論)』 제 1집-「단재 신채호선생 유고」를 간행했는데, 이는 『조선사』의 제 1편인 총론을 따로 떼어서 단행본(4.6판, 61쪽)으로 묶은 것이다. 필자 미상의 ‘머리말’에는 “선생의 탁월하신 인격, 고매하신 식견, 홍박심원(弘博深遠)하신 학식, 표현할 수 없이 열렬하신 애국정신을 우리는 배우고 본받아 건국의 원동력을 얻읍시다. 이 유고는 우리 조선사를 바로잡는 가장 정확한 역사학론인 만큼 특히 『조선사』를 논술저작하며 일반이나 생도에게 가라치며 또 연구하시는 이들은 꼭 재독삼독(再讀三讀)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해방 직후 국사책이 극히 적은 상황에서 단재(신채호)의 저서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었다.
  그 뒤 1948년 10월 다시 『조선사』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단행본(4.6판, 372쪽)으로 종로서원(鐘路書院)에서 간행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가 백제의 부흥운동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에 통사로서의 명칭인 『조선사』보다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안재홍은「신 단재의 조선사 권두에 적음」이라는 서문에서, 단재(신채호)를 두고 한말 천재적 사학자요 열렬한 독립운동자라고 하면서, “그 천성준열天(性峻烈)함과 안식(眼識)의 예리함은 시속(時俗)의 배(輩) 따를 수 없는 바이었고 사상의 고매함은 스스로 일두지(一頭地)를 벗어나든 바이니 이에 간행된 조선사는 그 유저(遺著) 중에 가장 이채(異彩)나는 바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세는 또 “단재(신채호)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 함이 있었다”고 하여 단재(신채호)의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과 의미 때문에 안재홍은 조국의 씩씩한 재건을 위해서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이 밑거름이 된다고 보았다. 정부가 수립될 즈음에 『조선상고사』가 간행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등장과 한국 전쟁은 『조선상고사』의 기반이라 할 민족주의를 압살하고 있었다. 해방 후 그렇게 부르짖던 민족, 민족주의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 민족주의 사학자가 주목될 수는 없었다. 4·19혁명은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도 부활시켜 갔다. 민족주의 역사학이 새롭게 주목되면서 단재(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의 저작이 소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가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전 3권, 을유문화사)을 간행하면서 제 1권 조선사연구로 『조선상고사』를 간행했다. 이어서 1977년에는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와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가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전 4권, 형설출판사)을 간행하여 학계와 일반에게 크게 보급하게 되었다.
  전집의 간행으로 『조선상고사』를 접하기가 쉬워지자 이 책의 번역서와 주석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번역서는 일본에서 처음 나왔다. 경응의숙(慶應義塾)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조선어과(朝鮮語科)를 졸업한 전직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현 동경신문) 기자였던 시부돈자(矢部敦子)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綠蔭書房, 1983)를 펴냈는데, 미촌수수(梶村秀樹)·영목정민(鈴木靖民)이 감수하고 미촌수수(梶村秀樹)가 『신채호(申采浩)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제목의 해제를 붙였다.
  『단재신채호전집』이 간행된 후 얼마 안 있어 『조선상고사』에 대한 주석이 시도되었다. 1974년 1월 8일부터 1975년 5월 22일까지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던 주간지 『서울평론』에서 제 9호부터 79호까지 총 56회에 걸쳐 이만열이 『주석 조선상고사』를 연재했고 뒤에 이를 두 권으로 간행했다. 단행본 주석서로는 진경환(陳鏡煥)이 인물연구소에서 간행한 『조선상고사』(1982)가 처음 나왔는데, 권두에 유석현(劉錫鉉)의 『전민족 의식지향의 지표』라는 제목의 추천사가 있다. 앞서 언급한 서울평론 연재 이만열의 『주석 조선상고사』는 수정 보완을 거쳐 『주역(註釋)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상, 하』(형설출판사, 1983)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하게 되었다. 이만열은 그 주석에서 해제(상, pp. 7-14)도 쓰고 본론 주석에 앞서서「상고사 이해를 위한 주석자의 말」(상, pp. 95-102) 및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인식 시고』(하, pp. 539-576)라는 논문도 붙여 조선상고사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 했다. 주석자의 이런 해설과 논문을 읽으면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의 구조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주석서는 제 2편 수두시대와 제 3편 삼조선 분립시대 등에 원저자가 인용한 중국 고전의 출처를 제대로 찾지 못해 주석서로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 점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석 조선상고사』상, 하는 한국측 자료의 전거를 충실히 찾았고, 원저의 원전 인용의 오류를 바로잡은 부분이 많다.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연재했지만, 『조선사』라는 이름이 주는 대로 ‘조선통사’로서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원래 통사 원고가 그 이상은 없었는지, 아니면 단재(신채호)의 요청대로 연재를 중단했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총론에서 우리나라 역사학을 개관하고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제외하면, 단군시대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 말기 백제부흥운동에서 끝나고 있다. 이 책의 맨 끝 제 11편 제 7장은「부여복신(扶餘福信)의 사(死)와 고구려(高句麗)의 내란(內亂)」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제 7장의 3개 절이 1. 자진(自進)의 통관(通款)과 피주(被誅), 2. 부여복신(扶餘福信)의 피살(被殺), 3. 복신(福信) 사후(死後) 풍왕(豊王)의 망(亡)으로 되어 있어서 제 7장의 전반 제목인 ‘부여복신의 사’ 부분은 드러나 있으나, 후반 제목인 ‘고구려의 내란’ 부분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더 규명해 봐야 할 과제이긴 해도, 제 7장의 제목에 상응하는 후반 부분을 서술하지 못하고 연재를 끝낸 것을 보면 원고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원래 통사였던 것으로 보이는 『조선사』가 백제부흥운동에서 중단되었기 때문에 해방 후 그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묶을 때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저자의 한국사학사 정리 및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개하는 제 1편의 총론과, 삼국시대 말까지의 한국상고사의 흐름을 서술한 나머지 7개편 등 총 8편으로 조직되어 있다. 단재(신채호)가 정리한 역사이론과 한국상고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만열의 『주석 조선상고사』에 게재된 해제와 논문에서 이미 자세히 밝힌 바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
  먼저 제 1편 총론에서 단재(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것으로 정리했다. 투쟁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모순과 상극 관계에서 파악하려 했던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을 연상케 한다. 그는 ‘아와 비아’의 초점을 민족 문제에서 찾으려 했다. 우리 민족을 아의 위치에 두고 비아인 다른 민족과의 모순과 투쟁을 서술하는 데에 역점을 두려고 했다. 여기서 단재(신채호)가 외민족과의 투쟁인 대외항쟁을 역사서술에서 강조한 이유를 읽을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대외항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을 내세운 것이나, 대중국 투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고구려를 내세우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재(신채호)는 총론에서 신지(神誌)에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사학사를 일정하게 정리했다. 종래 역사학은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시작되어 조선조로 전승되어 왔다고 보았다. 단재(신채호)는 이와는 달리 단군 때의 신지의 역사가 고기류와 『서곽잡록(西郭雜錄)』·『해동잡록(海東雜錄)』 등으로 면면되어 왔다고 강조했다. 단재(신채호)는 또 그가 유가사학에서 남긴 자료를 통해 단군 이래 면면해 왔다는 낭가(郎家)사상의 자주적인 측면을 가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헌사학으로서의 유가사학을 비유가사학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종래 유가사학에서 보였던 비자주적인 한국사가 단재(신채호)에 의해 자주독립적인 역사학으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단재(신채호)의 한국사학사 정리에서 주목되는 것은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정복을 비롯하여 한백겸·유득공·정약용 등의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그 장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한국상고사 인식에는 조선 후기 이종휘(李鍾徽)의 역사학이 짙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총론은 이렇게 단재(신채호)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학사를 정리했던 것이다.
  총론에서는 또 역사방법론을 나름대로 제시하면서, 사료로서의 고비(古碑)의 참조, 논증에서 중요시해야 할 각 자료간의 호증(互證), 한국사 사료에 보이는 명사의 해석문제, 위서(僞書)의 판별(辦別) 그리고 만몽(滿蒙) 언어와 풍속에 대한 연구 등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실증적인 역사연구방법론으로서, 인과관계를 찾기 위한 계통(系統)론, 자료의 종합적인 판단을 위한 회통(會通)론, 선입견을 제거하라는 심습(心習)론, 자료를 기록할 당시의 역사적 원형을 찾는 본색(本色)론 등을 제시한 후, 이러한 논증 방법론을 구사하여 사회와 개인, 시대와 공간의 균형성을 가지고 역사연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 2편에서부터 『조선상고사』는 말 그대로 조선의 상고사를 다루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단군시대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역사를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정리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상고사는 그 인식체계에서부터 일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와서는 삼국 이전의 역사를 단군 기자 위만 등의 고조선을 내세우고 무체계적으로 나열했다. 그 뒤 조선조 시대에 간행된 『동국통감』 등의 사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사를 단군→기자→위만(4군2부)으로 체계화하고 삼한은 위만에 부속시켰다. 임진왜란을 겪고 조선 후기 정통론이 등장하면서 상고사의 체계는 단군→기자→마(삼)한으로 정리하고 위만은 참위(僣僞)로 정리되었다. 단재(신채호)는 자기 시대까지 전승되고 있는 정통론을 점차 지양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상고사의 두 체계(단군→기자→위만(4군2부)과 단군→기자→마(삼)한)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학사적으로 본다면, 단재(신채호)는 단군이 기자로만 계승되지 않고 처음부터 부여·고구려 계통과 기자 계통의 두 계통으로 계승된다는 것과, 부여·고구려 계통은 계속 삼국시대까지 발전하게 되지만, 기자 계통은 삼한과 위만으로 두 계통으로 각각 계승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조선 후기 이종휘의 견해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단군의 정통이 부여·고구려로 계승된다고 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음에서 간단히 언급될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상고사를 신수두시대, 삼조선분립시대, 열국쟁웅시대로 시대구분하고 신수두시대의 대단군의 정통이 부여 고구려로 전승된다고 보았다. 그는 우선 상고사의 각 시대에 대해 설명하고 사료로써 이를 뒷받침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신수두시대를 대단군왕검의 시대라 하고 중국 오제(五帝) 말의 요(堯)·순(舜) 및 하(夏)·은(殷)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단군이 지나의 수재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부루(夫婁)를 창해(滄海)사자로 삼아 도산회(塗山會)에 파견한 것이 이 시기였다고 보고 있다. 그 뒤 대단군왕검 중심의 단군조는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의 삼조선으로 분열되었는데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삼조선은 대한족(對漢族)격전시대에 해당하는 열국쟁웅시대에 이르러 삼한을 성립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구상했던 한국상고사 체계도는 다음 [그림]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丹齋申采浩(단재 신채호)의 韓國上古史 體系圖(한국상고사 체계도) 


  이 시기와 관련하여 단재(신채호)가 주장하는 몇 가지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우선 그는 삼한의 성립과 관련하여 삼조선·삼한설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곧 전삼한·후삼한이 존재했다는 전후삼한설로 된다.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사연구방법론의 하나인 지명이동설이 나오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전삼한에서 후삼한으로 오는 과정은 민족이 이동하게 되는 시기와 일치한다고 보는데, 이 때 이동하는 이들이 자기의 옛 지명을 그대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또 단재(신채호)는 열국쟁웅시대 즉 대한족(對漢族)격전시대를 B.C. 190년 전후의 수십년으로 보고 그 후기에 와서 한(漢)과 고구려 사이에 9년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9년 전쟁이란 28만구를 거느린 남여(南閭)가 한에 투항하자 한 무제가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했다가 9년 만에 철폐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이렇게 철폐된 것이 바로 고구려의 투쟁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이 싸움의 고구려측 영웅이 대무신왕이라는 것이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34쪽).
  여기서 대무신왕이 창해군 철폐(B.C. 128)에 관여한 존재라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대무신왕의 재위연대(A.D. 18~44)와는 150년~170년간 어긋난다. 여기서 단재(신채호)는 고구려연대삭감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 단재(신채호)는 28왕 705년간 계속되었다는 고구려의 연조(年祚)에 삭감이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몇 개의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에 당 고종이 가언충(賈言忠)으로부터 들었다는 고구려비기의 고구려 9백년설, 문무왕이 안승(安勝)에게 일렀다는 고구려 8백년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을 들어 고구려의 연조가 삭감되었다고 주장했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11~112쪽).
  단재(신채호)는 종래 중국이 고조선을 치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것은 지도상에 그은 계획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한반도 밖에 한사군을 설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사군을 두고 “토상(土上)에 그은 것이 아니요, 지상(紙上)에 그린 일종의 가정(假定)”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한반도 내 설치를 주장하기 위해 평양 부근에서 낙랑유물을 발굴했다는 것을 두고 단재(신채호)는, “이 따위 기명(器皿)은 혹 남낙랑(南樂浪)이 한(漢)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기명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을 전승할 때에 부획(俘獲)한 기명이 될 것이요, 이로써 금今 대동강 연안이 낙랑군치임을 단언함은 불가하니라”(『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41쪽)고 했다. 인용문에서 남낙랑(南樂浪)이라 함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최리(崔理)를 최후의 왕으로 한 낙랑국을 일컫는 것으로 단재(신채호)는 이를 한사군의 낙랑군과 구분하여 남낙랑이라고 불렀다. 단재(신채호)는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그 낙랑이 평양 주변에 있을 수 없었다는 이유의 하나로 그 지역에 최리의 낙랑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단재(신채호)는 한사군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거나 실재했다면 한반도 밖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상고사의 주체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단재(신채호)사학의 한 측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상고사』에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인식체계의 하나는 대단군조선의 역사가 부여·고구려로 계승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독사신론』에서 부여·고구려 주족론을 부르짖은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며,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중국의 양자강과 회하(淮河) 사이에 단군 부여족의 식민지가 형성되었다는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이론을 내세우면서 우리 민족의 대외경쟁력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주장했다.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낸 나라가 바로 고구려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김유신의 ‘음모’라고 폄론하였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329~337쪽).
  단재(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의 연조(年祚)가 삭감되었다는 것과 그 대안으로 “고구려 유국(有國) 9백년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존속기간을 7백여 년(BC 37~AD 668)으로 잡고 있는 『삼국사기』도 800년설 혹은 900년설을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 유국 9백년설’은 그 뒤 실학시대의 『해동역사』를 거쳐 단재(신채호)가 본격화했고 『조선상고사』에서는 아예 고구려의 연조가 9백년이라고 썼다. 단재(신채호)는 연개소문의 ‘혁명’을 소개하면서 “그런즉 연개소문을 고구려 9백년간의 장상대신들뿐 아니라 곳 고구려 9백년간에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가진 1인이었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채신채호전집』 상, 290쪽)고 했다. 오늘날 고구려의 연조가 9백년이라고 하는 주장이 남북 역사학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이를 선구적으로 주장한 근대사학자는 바로 단재(신채호)였다.
  단재(신채호)의 상고사 인식 가운데 또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한국 상고사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종래 김부식 이하 한국의 유가적인 역사가들과 일본의 식민주의사가들이 내세운 한반도 중심의 한국사 역사무대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를 삼국시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 활동무대를 한반도 중심으로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한민족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를 삼국시기로 보지 않고 삼국 이전의 상고사의 시기로 보았다. 따라서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와 중국의 동부 지역(산동성·안휘성 등)까지를 단군 부여족의 활동무대로 보았다. 특히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중국의 동부지역이 불리지국이라는 단군 부여족의 식민 지역 정도로 서술하고 있지만(『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87~88쪽),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중국인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를 인용하여 동이계통의 서언왕(徐偃王)의 정복활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단군 부여족의 중국 진출을 강조한 단재(신채호)는 백제·신라의 해외경략설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백제의 요서경략설과 신라의 일을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동빈 김상기 박사가 가장 먼저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소개한 것처럼 이해되고 있으나 그 전에 단재(신채호)와 위당 정인보가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근구수왕의 영웅적 활동을 소개하면서 백제의 해외경략을 소개하고 있다(『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194~196쪽). 물론 이것은 중국의 사서(『양서』·『송서』·『자치통감』 등)에 보이는 자료를 근거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가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하면서도 비범한 내용을 놓치지 않는 기민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발견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그는 백제·신라의 일본진출설도 소개하고 있다. 이 점은 『조선상고사』 전편에 흐르는 고구려의 대외경략 뿐 아니라 백제·신라의 대외경략도 일정하게 소개하여 한국 상고사의 주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이것은 곧 한국사의 주체적인 웅혼한 모습을 독립의지로써 확인해 가려는, 말하자면 자주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것이다. 독립운동이 일제의 강점을 극복하는 방안이라면, 단재(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하고 역사의 자주독립성을 확립해 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그 열매의 하나가 『조선상고사』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조선상고사』의 집필 과정과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 및 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달랑 들고 망명길에 올랐던 단재(신채호), 그는 자료의 부족과 연구 환경의 열악함 속에서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랬듯이,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목표로 역사 연구에 임했다.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역사 연구에 임했다. 때문에 그가 스스로 “역사란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란 것이 아니요, 상언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언 혹 변개하라는 것이 아니”(『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35쪽)라고 역사 연구의 과학화를 주장하였지만, 그의 주장대로 실천되어졌는가는 의문이다. 역사 연구마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는 그 연구가 민족적 편파성 내지는 이념적 교조성을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목적 위주의 역사연구를 최소화하고 사료에 입각하여 최대한 객관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느냐가 문제였을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단재(신채호)가 총론에서 언급한 역사과학화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연구지형에서 본다면 수긍할 수 없는 대목들이 없지 않다. 이런 점은 주로 주체성의 지나친 강조와 민족의식의 과잉투영을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과잉성이, 그의 또 다른 저서 『조선상고문화사』에서보다는 대종교적인 이념이 훨씬 덜 침윤되었거나 혹은 탈색된 것이긴 하지만, ‘신수두’니 ‘신조선’·‘불조선’·‘말조선’이니 하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토록 몰아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한국 상고사의 체계나 대외관계를 제대로 밝힐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또 그가 『조선상고사』에서 가끔 민중 이야기를 내세운 대목도, 어색한 삽입구가 들어 있는 문장마냥, 정제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정리된 것도 아니어서 이념적 과잉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문제는 또 있다. 『조선상고사』를 포함한 단재(신채호)의 여러 연구에서 보이는 사료 검증의 문제다. 그는 『천부경(天符經)』이니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두고 위서(僞書)라고 분명히 언급하였고(『조선상고사』 -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55쪽),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발해 대야발이 쓴 저서라고 인식했지만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인용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자주 인용한 『서곽잡록』과 『해상잡록』은 물론이고 『갓쉰동전』·『규염객전(虯髥客傳)』 등 일부 사료들이 엄격한 사료비판을 거쳐 활용했는지는 계속 추적해야 한다. 그가 망명객의 신세로서 제대로 자료를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러한 자료 활용 태도를 묵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그 자신이 언급한 엄격한 사료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해방된 나라에서 그가 주장한 역사의 과학화를 더 강화해야 할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조선상고사』는 저자 자신이 주장한 역사학 이론을 가지고 보거나 현재의 역사학 연구지형에서 관찰하더라도 분명히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후학들은 그런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그가 제기했던 역사학의 과제를 창조적으로 풀어가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고 본다. 다행스런 것은 단재(신채호)의 자주적인 역사학이 해방 후 남북에서 드러내 놓지는 않은 채 일정하게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통일 시대에 한국의 남북 사학이 그의 역사학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상고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상고사』는 앞서 언급한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술 당시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역사학이 과학적 자주적 역사인식에 걸림돌이 되어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일제강점의 시대적 산물인 식민주의 사학이 횡행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근대 민족주의 사학 이론을 토대로 자주적이고 체계적인 민족사를 개척, 시도한 몇 안 되는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조선상고사』는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세운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이다. 그 책이 한 시대에서 보여주었던 그 독보적 위치는 한국사학사에서 일관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단재신채호전집』 제 1권에 수록하는 『조선상고사』는 『조선일보』 연재본과 그 연재를 새로 타자로 쳐서 현대인이 읽기 쉽도록 한 새활자본, 그리고 1948년 종로서원에서 간행한 『조선상고사』를 싣기로 했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영인해서 싣고 그것을 현대인이 읽어볼 수 있게 새활자본으로 정리한 것은 단재(신채호)가 이 원고를 썼을 시기로 본다면 이것이 가장 가까운 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여러번 간행되었지만 단재(신채호)의 원고를 저본으로 하여 활자화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본다. 때문에 『조선일보』 연재본이 이미 간행된 많은 『조선상고사』 중에서 단재(신채호)의 어투와 문장에 가장 가까운 문장으로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식자공의 실수 때문인지 혹은 원고 자체의 난해함 때문인지 오류가 많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활자본은, 편자의 입장에서 명백하게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조선일보』의 연재를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원고에 글자 한 자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단재(신채호)의 원고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형식논리에서 본다면 이 판본이 단재(신채호)의 생각을 진솔하게 잘 타나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인쇄공의 실수로 나타난 오류는 학자들의 연구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는 뜻도 된다.


제2권 역사
朝鮮史硏究草
박걸순 | 충북대 교수

 Ⅰ.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

  단재 신채호의 생애는 계몽운동가로서 언론활동기(1905~1910), 해외 망명과 민족운동 및 한국고대사연구기(1910~1925), 무정부주의운동기(1925년 이후) 등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와 활동에서 나타난 사회사상은 시민적 민족주의기(1898~1922), 혁명적 민족주의기(1923~1924), 무정부주의기(1925~1936)로 3분하여 이해되기도 한다.
  단재(신채호)는 많은 사론과 역사저술을 남겼다. 그의 역사학은 저술을 기준으로 할 때 다음과 같이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제1기(1905~1908) : 한말 『독사신론(讀史新論)』으로 대표되는 단재(신채호)사학의 초창기.
2. 제2기(1909~1920년대 초) :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로 대표되는 단재(신채호)사학의 발전기.
3. 제3기(1920년대)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대표되는 단재(신채호)사학의 성숙기.

  한말 단재(신채호)는 『황성신문(皇城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활동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그의 사회사상과 역사인식을 형성하고 심화시켜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근대국민국가를 추구하는 한편 역사민족주의(歷史民族主義)를 바탕으로 부여족(扶餘族)을 주족(主族)으로 하는 사천년 민족사의 성쇠소장(盛衰消長)을 추구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전통시대의 사서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없었다고 하며, 내란이나 외란의 병화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사가들의 손에 의해 역사가 탕잔(蕩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외국의 기록에 나타난 우리의 역사상도 외국인들이 주체가 된 것으로서 ‘무록(誣錄)’이나 ‘위록(僞錄)’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중국 기록의 경우는 중국 민족의 특유한 심적 심리인 자존성으로 인해, 일본 기록의 경우는 근대 일본의 악랄한 학욕(壑慾)으로 인해 모두 ‘참 조선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곧 단재(신채호)는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다”라고 외국 사료를 전면 비판하였다.
  그는 기왕의 기록이 이같이 틀렸기 때문에 올바른 조선사를 짓기 위한 구급 처방으로서 현존하는 모든 사책의 득실을 평(評)하고 진위를 교(校)하여 조선사의 전도를 개척함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한 말의 모래를 일어 한 톨의 사금을 얻거나 혹 얻지 못하는 상황에 비유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대 이래 조선시대까지의 구사(舊史)의 기록을 간단히 평가한 결과를 네 가지로 피력하였다. 첫째는 대개가 정치사이고 문화사가 별로 없고, 둘째는 고금을 회통(會通)한 저작이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망전말 기술로 끝났으며, 셋째는 공자의 『춘추(春秋)』를 사(史)의 극칙(極則)으로 알아 그 의례(義例)를 따라 존군앙신(尊君抑臣)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숭화양이(崇華攘夷)를 주장하다가 끝내는 자국까지 양(攘)하는 벽론(僻論)에까지 이른 경우가 있고, 넷째는 이종휘 일파를 제외하고는 국민의 자감(資鑑)에 공(供)하려기 보다는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아 자가(自家)의 강토를 촌촌척척(寸寸尺尺) 할양하여 급기야는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한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맹농파벽(盲聾跛躄)’이 된 것은 빈번한 내란과 외환 등 천연화재(天然禍災)가 아니라 인위의 장초(障礎)라며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전통사서에 대한 불신과 비판은 한말의 교과서로까지 연결되었다. 그는 한말에 이른바 신사체(新史體)로 기술된 새로운 사서들도 구사(舊史)의 투(套)를 고치지 않아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학교 교과용으로 편찬된 역사서로서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어 없느니만 못하다고 혹평하였다. 이는 ‘동국주족단군후예(東國主族檀君後裔)’의 역사를 올바로 기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서양식의 근대식 체재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근대사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단호한 표현이었다. 이 같은 단재(신채호)의 한말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학부의 교과서 검정방법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어 곧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라는 극단적 논설로 발표되었다.
  한말의 사학에 대해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자신이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연재하였고, 수십 명의 학생들의 청구로 지나식[支那(중국)式]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역사(非歷史) 비소설(非小說)’의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를 지었으나, 두 작업이 모두 사고로 중단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근래에 단재(신채호)의 1910년대 저술로 보이는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叙言)』이 발견되어 관심을 끌고 있으나, 아직 검토의 소지가 많다.
  단재(신채호) 사학의 제1기를 대표하는 『독사신론』은 이 같은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사신론』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시 1910년 『소년(少年)』에 『국사사론』이라는 이름으로 게재된 미완의 사론이다. 그런데 『소년』은 이 사론을 전재하며 표제에 “많은 희망과 큰 슬픔을 아울러서 너를 이 세상에 보내노라. 원하노니 장수하라 큰소리치라. 유수 같을 지어다.”라고 특기하였다. 이는 단재(신채호)가 직접 쓴 것은 아니나, 이 사론을 저술한 단재(신채호)의 심경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최남선은 「전재(轉載)하면서」라는 글에서 이 사론을 “순정사학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하다”고 하며, 조국의 역사에 대하여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하는데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독사신론』은 인종과 지리를 논급한 서론과, 단군 이래 발해의 존망까지를 10장으로 서술한 상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자신의 사관과 단군 이래 발해까지의 민족사에 대한 골격을 제시한 미완의 사론이다. 그는 이 사론이 ‘신역사’를 찬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대 중국의 저술은 ‘일성(一姓)의 전가보(傳家譜)’이고, 서양의 기적(記籍)은 ‘일편(一編)의 재이기(災異記)’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우리의 구사(舊史) 또한 허다(許多) 잔결(殘缺)하고 허다(許多) 탄망(誕妄)하기 때문에 이를 모두 없애버리고 신역사를 찬진하려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신역사 찬진을 위해서는 본국 문헌인 조사야승(朝史野乘)을 모두 수집하고 편린잔갑(片鱗殘甲)의 재료라도 모두 모아야 하며, 불길과 같은 안광을 들어 고금 정치풍속의 각 방면을 정세(精細)히 관찰한 다음에 필을 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 연후에 나라의 주인되는 일종족(一種族)을 발현하여 주제로 정한 다음, 정치의 장이(張弛)·실업의 창락(漲落)·무공의 진퇴·습속의 변이·외래 각 족의 흡입·타방 이국의 교섭을 서술하여야만 역사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무정신의 역사이며, 무정신의 역사는 무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무정신의 국가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사론은 체재가 정비된 통사가 아니고 사평체의 미완의 사론이기 때문에 이 글만으로 단재(신채호)는 완전한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을 제시할 수 없었고, 민족사의 통사적 인식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사신론』은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을 성립시킨 저술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이 사론을 통해 중세적 왕조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서술의 주체를 민족의 소장성쇠로 설정함으로써 민족사관을 정립하였다. 또한 존화사관에 젖어있는 주자학적 구사를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일제의 허구적인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반식민사학의 기치를 세웠다. 따라서 식민사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말의 사가를 대표하는 현채나 김택영, 장지연 등도 그에게는 배격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사학은 민족주의의 틀 속에만 고착된 것이 아니라, 사회진화론 등 사회과학 이론을 통해 민족사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독사신론』은 단재(신채호) 스스로가 ‘논평의 독단임과 행동의 대담함을 자괴’한다고 한 바 있는데, 전반적으로 고증이 불충분하고 지나치게 정치사와 대외관계사에 치우친 나머지 사회사와 경제사 분야가 결여된 한계가 지적된다.
  단재(신채호) 역사학의 제2기를 1909년으로 분기하는 것은 전년의 『독사신론』과 구별하는 의미도 있으나, 이 해에 『대한매일신보』에 「애국 이자(二字)를 구시(仇視)하는 교육자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이십세기(二十世紀)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 「논려사무필(論麗史誣筆)」,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등의 중요한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직전에도 선교와 단군에 관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망명 직후인 1911년경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1914년경 서간도에서 윤세복과 교유하며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답사한 것은 고대사 인식과 연구에 커다란 전기가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는 1921년경 북경에서 자신을 방문한 이윤재(李允宰)에게 보여 주었다고 하는 「조선사통론(朝鮮史通論)」·「문화편(文化篇)」·「사상변천편(思想變遷篇)」·「강역고(疆域考)」·「인물고(人物考)」·「부록(附錄)」을 통하여 그의 집필 주제와 관심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원고들은 불행히 현전하지 않으나, 1920년대에 발표된 여러 논문의 초고가 되었거나,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문화사』 등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원고의 일부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지는 바, 북한 측의 조속한 공개를 기대해 본다.
  한편 그가 1916년 소설형식으로 저술한 『꿈하늘(夢天)』에도 그의 고대사인식 체계가 잘 나타나 있다. 『꿈하늘』은 단재(신채호)가 주인공 ‘한놈’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친 사담체(史談體)의 자전적 소설인데, 그 서문에 단재(신채호)의 창작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독자에게 할 말씀 세 가지’에서 이 소설이 ‘꿈꾸고 지은 것’이 아니라 ‘꿈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소설이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붓 가는대로 구사한 수필임을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체재를 따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특히 그는 이 소설이 환상의 세계를 그린 것이나, 사서를 참고한 것이니 반드시 허구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꿈하늘』이 소설이지만 단재(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을 논의할 때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단재(신채호)의 『꿈하늘』은 박은식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와 함께 초기 민족주의 사학의 몽환적 역사서술과 인식의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 역사학의 제2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상고문화사』를 들 수 있다. 본서는 1931년과 193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실제 집필한 시기는 1918년에서 1921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그 증거로서 『조선상고사』와는 달리 강한 대종교적 역사인식을 표방하고 있으며, ‘단군(檀君)’이 아니라 ‘단군(壇君)’이라는 표현, ‘단군시대(壇君時代)’라는 편명(編名)의 설정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부여족 국가인 단군조선이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여 삼국으로 이어지는 상고사를 5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하였다. 그런데 제1편은 단군시대라고 편명을 붙였으나, 제1장 조선이라 이름한 뜻, 제2장 조선 역대문헌의 화액(禍厄)이라는 장의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시대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다. 그는 제1장에서 조선만이 유일한 국호이며, 역대의 국가명은 모두 단군시대의 부명·관명·지명이라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제2장은 조선이 4천년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내·외적에 의한 ‘무망(無妄)의 재(災)’와, 폭군과 우부(愚夫)에 의한 ‘불시(不時)의 액(厄)’으로 말미암아 역사 재료가 ‘새벽 별을 셈과 한 가지가 되고 만’ 조선 고적과 기록의 소멸과 변개의 대개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찾아내 바로 잡는 방법으로서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의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조선의 가치 있는 역사를 다물(多勿)하고자 하였다.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조선상고사』 총론과 유사하다.
  『조선상고문화사』도 미완이나, 단재(신채호)는 본서를 통해 단군 이래 삼국 성립 이전의 상고사의 흐름을 조선족, 즉 부여족의 국가 활동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비록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전 강역이 아닌 요서나 요동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족의 국가 활동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부여족이 주족이 된 조선의 상고사를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서에서 주목할 만한 학설로는 한사군의 새로운 위치 비정과 남북 양 낙랑설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조선상고문화사』는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와 함께 문화사 부분의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단군조선 전반기 1천년의 정치와 문화는 고대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고 하며, 중국을 비롯한 동양 각국 문화의 원류가 된 모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만일 후손들이 무력으로 그 문화를 보호하고 확장하였다면 조선이 진실로 동양문명사의 수좌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독점하였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에서 단군시대의 종교로서 선교를 들고 있으며 화랑은 신라의 과거법이 아니라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의 오행과 팔괘는 조선에서 수입해 간 것이라 하여 한중관계를 문화우열의 관계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특히 ‘기자(箕子) 동도(東渡)’를 인정하면서도 기자가 조선에 온 뜻은 ‘신앙의 조국인 조선’으로 온 종교적 사유가 정치적 사유보다 크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기자를 동교(同敎)의 국인(國人)·인방(隣邦)의 노사(老師)·은조(殷朝)의 충신·망명한 고객(孤客)으로 표현하며 곧 오교(吾敎)의 현사(賢師)이기 때문에 그를 동정하여 평양(平壤) 일우(一隅)의 군읍(郡邑)을 주어 제후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단군시대의 고유문자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고유문자로 지은 『신지(神誌)』를 사람이름이나 역사책 이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 또한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논의한 것과 유사한 내용이다. 곧 『조선상고문화사』는 1910년대의 한국사학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역사연구방법론에 의한 고대사 인식체계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들어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은 더욱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는 그 대표적인 연구서이다. 특히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적 색채를 상당히 벗어나서 더욱 실증적인 ‘역사를 위한 역사’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Ⅱ. 『조선사연구초』의 저술 배경

  『조선사연구초』는 1920년대인 단재(신채호)사학의 제3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평가된다. 이 시기 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과의 노선 대립으로 임시정부를 뛰쳐나와 『신대한(新大韓)』을 간행하는 등 반임정활동을 펼쳤다. 1920년 북경으로 간 단재(신채호)는 박용만·신숙 등과 함께 제2회 보합단과 군사통일촉성회 등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주도하는 등 무장투쟁론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921년 단재(신채호)는 북경에서 김창숙·박숭병 등과 『천고(天鼓)』를 발행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당시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조선사연구초』나 『조선상고사』에 앞서 단재(신채호) 사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결한 자료이다. 한편 당시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고 박은식·원세훈 등과 「아(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였으며, 통일책진회를 발기하는 등 임시정부와 이승만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북경에 머물 당시 그는 자신의 무장투쟁론을 ‘무장단투(武裝段鬪)’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일본 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라 하더라도 조선에 무례를 가하거든 칼이나 총이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라도 ‘혈전(血戰)’을 벌이는 것이 조선정신이라고 강조하였다.
  1923년은 단재(신채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였다. 전년 12월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해로 온 단재(신채호)는 류자명의 도움을 받아 이해 1월 「조선혁명선언」의 작성을 완료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의 직접혁명론을 제창하였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보이는데 1920년대 독립운동 논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의 대표격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한데 크게 실망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북경대 교수였던 이석증(李石曾)의 도움으로 북경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열람하며 역사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무정부주의에 더욱 경도되어 갔다.
  1924년 그는 일시 북경 교외에 있는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승려의 길을 택한 것은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등 독립운동의 부진으로 ‘회심(灰心)’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재(신채호)는 이미 국내에서부터 불교에 관한 조예가 깊었는데, 정인보는 단재(신채호)의 불교에 대한 깊음이 ‘조선인 거사림(居士林)에 거의 최고’라고 평가하였을 정도이다. 실제로 단재(신채호)는 『유마경(維摩經)』 등 불경에 밝았고 친구들에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열독을 권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명이 조선사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1924년 가을 하산하여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무렵 이석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무장투쟁론을 ‘전일의 그름’이라고 과오였음을 자인하며 무장투쟁이 유생의 능사가 아니고 국가흥망이 일조(一朝)의 돌발(突發)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에 역사연구에나 전념하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전일에는 또한 나라 운명의 절박함을 통곡하고 분연히 일어나 붓을 내던지고 몇몇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적과 싸우기를 기도하였더니 벌써 정세는 더욱 틀려지고 기회는 더욱 멀어져 안타깝게도 부질없이 머리만 어루만지는 동안 어느덧 천(賤)한 나이 사십을 지났습니다. 이리하여 무장단투(武裝段鬪)란 유생의 능사가 아니고 국가 흥망이란 일조(一朝)의 돌발(突發)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도연명(陶淵明) 같이 비록 얼른 ‘오늘의 옳음’을 감히 자신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거백옥(遽伯玉)과 같이 또한 ‘전일의 그름’은 자인합니다. 그러면 이 몸이 나갈 곳은 어디일까? ‘유어(鮪)도 아니요 전어(鱣)도 아니니 못 속으로 들어가랴? 솔개도 아니요 새매도 아니니 하늘 위로 올라가랴?’라고 한 시(詩)를 외며 하염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생각건대 오직 남은 바 역사 연구사업을 계속 진행하고 과거의 견문을 정리 편수하여 후진 학자들로 하여금 나라의 전통을 잊지 말게 하는데 혹 만일의 도움이 될까 합니다.…”

  이는 국민대표회의가 파탄하여 독립운동계의 희망이 좌절된 시기의 단재(신채호) 심경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체념에 불과한 것일 뿐, 그는 본격적인 역사연구와 집필에 전념하며 여전히 무장투쟁론을 견지하고 실천에 나섰다.
  단재(신채호)는 1924년 6개월여의 승려생활을 하는 동안에 「전후삼한고」와 『조선상고사』 총론 등을 집필하였고, 이 논문들은 국내로 송고되어 『동아일보』 등에 연재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역사 논문이 국내의 신문에 연재된 것은 그의 국내 거주 가족들의 극심한 생활고를 염려한 지기들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즉, 얼마간의 원고료를 통해 그의 처자의 생활비를 지원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그 스스로도 수차에 걸쳐 경제적 곤란을 토로한 바 있다. 홍명희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는 그의 절실한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처 쇄자옥(鎖子獄)이란 말을 이제야 심절(深切)히 각득하였습니다. 아우가 일신으로 돌아다닐 때는 아무 물애(物碍)가 없더니, 지금에는 장문잠(張文潛)의 이른바 칠(漆)로써 목(沐)한 셈입니다. 이십 년 게으른 노동의 소득은 겨우 정리치 못한 뇌중에 있는 조선사고(朝鮮史藁) 뿐이라, 본작의 가치가 원래 얼마 되지 못하겠지만 더욱 시세가 틀리어 매매할 곳이 없지만 그러나 가진 것이 그것뿐이므로 아직 저작하기 전에 산반을 들고 이로써 자가와 처자의 호구를 답(答)합니다. 그러나 외지에서는 할 수 없어 오직 내지만 바라는데 내지에 있는 ○○가 없는 놈이 하물며 내지를 떠난 지 십오 년 후리오. 그런 즉 그 중간(中間)의 거간인(居間人)은 형(兄 홍명희)이나 매당(邁堂)을 믿을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매당(邁堂)은 원래 차등(此等) 주시력(周旋力)이 전결(全缺)이라 함도 가(可)하니, 부득불 형(兄 홍명희)을 전시(專恃)할 수밖에 있습니까? 지어 논 수편을 정서하는 대로 보낼 것이니 아보(亞報)에 게재하는 동시에 ‘설항(說項)’의 방편도 많이 생각하심을 바랍니다. 제(弟)의 속현처(續弦妻) 박자혜(朴慈惠)와 4세의 맥아(脉兒)가 경성 관훈동 182 이운경가(李雲卿家)에 우거(寓居)하오니 일차 문가(文暇)에 과방(過訪)하여 그 생활의 정형을 한번 보심을 바랍니다.…”

  이 글은 단재(신채호)가 절친했던 홍명희에게 그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후삼한고」의 원고를 보내면서 ‘자서(自敍)’에서 어린 자식의 생활비를 염려하는 아내의 독촉 편지 때문에 써서 보내는 것이라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전후삼한고」 삼편 18장은 작년 여름 어느 달이던가 한창 장마 심할 때 북경 모불사(某佛寺)에서 체류하면서 대개 수십 일의 공부(工夫)로써 저작한 것이다. 물론 그 재료의 수집과 연구의 노력은 그 수십 일 동안의 일이 아니다. 한 것은 목하(현재) 소아(小兒) 양활(養活)의 곤란(艱難)을 빙자하여 매주일 편지마다 보채는 가인(家人)의 입을 틀어막는 마개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 가치의 멸여(蔑如)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홍명희도 단재(신채호)가 국내의 신문에다 역사 논문을 발표한 것은 친구들의 서신 권유도 있었으나 사실은 약간의 원고료로써 4세의 어린 아들 수범(신수범)의 양육비를 보태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단재(신채호)의 어린 아들 수범(신수범)에 대한 사랑은 매우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옥중 면회 온 이관용에게 수범(신수범)을 부탁하였으며, 한 기자에게는 국내에 있는 아들의 교육문제가 걱정되나, 옥중에서 걱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아주 단념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애틋한 부정과 비감한 옥중 심경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한기악(韓基岳)을 통하여 『시대일보』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또한 서울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단재(신채호)는 평생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으나, 돈에 대하여 비굴하지는 않았다. 그가 북경에서 『중화보(中華報)』에 사설을 연재하여 생계를 꾸리고 있던 때, 신문사에서 자신의 원고에서 문장의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의(矣)’ 자(字)를 오자(誤字)하였다 하여 집필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단재(신채호)는 이로 인해 판매부수가 급락하자 수차 사과하러 온 중국인 사장을 질책하고 끝내 집필하지 않았다. 단재(신채호)는 그것이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돈을 위해 집필했던 사실이 조선인으로서 지조를 잃은 행동으로 후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때 자신이 김립(金立)으로부터 불의의 돈을 받았고, 역사편찬을 빌미로 김립의 돈을 속여 먹었다는 오해에 대해 적극 항변하기도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매우 엄격한 역사편찬의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민족주의 사가로서 당당한 격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전후삼한고」를 송고하며 원고를 받는 사람에게 첫째, 비록 투고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는다는 사규가 있더라도 등재하지 않을 시는 즉각 필자에게 반환해 줄 것, 둘째, 본고를 등재할 때는 일자일구도 가감하거나 이동하지 말 것, 셋째, 원고의 반환 시에는 간접적으로 하지 말고 직접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원고에 잘못된 판단이 있다 하더라도 연구의 기초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원고 전부가 부정당함은 가하나 일자일구의 가감이나 이동은 불가하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초』의 편찬과 관련하여 단재(신채호)의 역사저술 자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최근 『조선사연구초』 같은 것도 방장 간포(刊布)하여 하려 할 즈음에 훼판(毁板)하라는 글발이 단재(신채호)에게로부터 왔었으니 이러한 점에서 더욱 단재(신채호)의 사학적 고격(高格)을 볼 수 있는 바다. 이른바 ‘식법자구(識法者懼)’가 단재(신채호)를 두고 말한 것 같기도 하나 이보다도 단재(신채호)의 사학은 ‘일이월부동(日異月不同)’의 실이 있어서 그 고(故)에 자안(自安)하지 못함이니, 학문의 진경(進境)보다도 그 자기(自欺)하지 못하는 학적(學的) 양심이 또한 경복(敬服)함직하다. 다만 성기(性氣)가 본래 곰살갑지 아니하여 발함이 있으면 찬란할 겨를을 낼 여지가 없어 간혹 일자의 불안을 증오하다가 전책(全冊)을 성냥불에 붙이는 등 어떤 때는 스스로 과사(過思)함을 모르고 홧김에 북북 찢어 쑤세미를 만드는 등 적년(積年)의 공(功)을 들여 심혈(心血)을 다 쏟은 것으로 하여금 편각간(片刻間)에 오유(烏有)를 만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하는데, 나온 바로 『조선사연구초』만 하더라도 그가 여기 있기만 하였으면 그 고집에 피차 격면(隔面)하기까지 이르더라도 빼앗아다가 없애고야 말았을 것이니, 누작누훼(累作累毁)하였다는 것이 반드시 사실일 줄 안다. 평심하여 말하면 부족한대로라도 우선 통사의 체계를 세우고 수정을 수가(隨加)할지언정 구(舊)를 전기(全棄)하지 말아 구장(久長)을 기하고 나갔던들 금일에 와서 남은 것이 이같이 무다(無多)하지는 아니할 것이어늘 속을 썩이지 못하기도 너무 심하여 저렇듯이 작훼(作毁)가 빈수(頻數)하였더니 이는 그 성기(性氣)의 단(短)이라고 할 것이로되, 다시 생각하여 보면 그가 자시(自視)하여 부족한 것이 타인으로서 보기에는 미증유의 형견(炯見)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의 부족으로 아는 것도 이렇거든 나아가 마지아니하는 그의 사학적 고예(高詣)가 만년에 어느 정도까지 갔었음을 어찌 알랴. 혹 말하기를 그가 사학에 있어 우주에 번쩍거리는 전광(電光) 일성이 승(勝)하고 복류(伏流) 삼과(滲過)하면서도 기어이 그 줄기를 바다까지 끌고 가는 근기는 부치지 아니하느냐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단재(신채호)의 꾸준한 점인들 어찌 그 필적이 있으랴. 그 작훼(作毁)도 실상 꾸준 속의 작훼(作毁)임을 알라.”

  홍명희는 『조선사연구초』의 간행 직전 이 계획을 단재(신채호)에게 알렸다. 이 때 단재(신채호)는 「평양패수고」의 내용 중 수정할 것이 있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홍명희는 어렵게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 허가를 받은 뒤라서 원고를 보내 수정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재판 할 때 수정하라고 하였다. 이에 단재(신채호)는 아예 출판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그것은 아들의 양육비를 위해 자신이 원고를 너무 경솔히 써 ‘자심(自心)에도 불만'하였기 때문이었다. 홍명희는 단재(신채호)의 역사저술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자기의 고심연구(苦心硏究)한 것을 초(草)하다가 갑자기 없애버리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초한 것을 다시 살펴보고 불만을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그의 불만하여 하는 모양으로 보면 그의 역사상 연구가 「멘텔리」란 학자의 수학, 언어학 지식과 같이 암중에 매몰되고 말런지도 알지 못할 일이다. 주옥(珠玉)이 매몰됨을 아까워함은 상정(常情)이니 나는 한갓 나의 친구를 위하여 모충(謀忠)함이 아니요, 심상(尋常)한 주옥(珠玉)으로 비(比)치 못할 단재(신채호)의 연구를 일단이라도 매몰치 아니하려고 함이다. 그럼으로 나는 다시 편지로 단재(신채호)에게 권하기를 「불만을 참으라 초하는 것을 중지하지 말라」하였다. 중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어느 기회에 이 사초처럼 간행하게 되기를 깊이 바라는 까닭이다.…”

  단재(신채호)는 옥중으로 자신을 면회 온 『조선일보』 기자에게도 자신의 연구가 너무 단정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없고 완벽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발표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며, 만일 자신이 10년의 옥고를 무사히 치르고 출옥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할 것이라는 의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보면 단재(신채호)의 역사 관련 원고는 가족들의 생계와 아들의 양육을 위한 경제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국내 언론에 게재되어 공개될 수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조선사연구초』는 단재(신채호)가 타국에서 영어의 몸이었기에 간행이 가능한 셈이었던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역사저술이 비재멸학(菲才蔑學)의 의견이라고 겸양하였으나, 또한 자신의 역사저술에 대하여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는 있으나, 연구의 기초와 방법은 착오가 없다고 자신하였으며, 삼한 칠십여국에 대한 고증은 이전 사람들보다 ‘오뉴월 하룻볕’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내라야 이것을 발견하지”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사색당쟁사(朝鮮四色黨爭史)』와 『육가야사(六伽倻史)』는 조선에서 자신이 아니면 능히 정곡한 저작을 못하리라고 확신하였다.
  1924년 10월에는 홍명희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1924. 10. 20~11. 3) 등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안질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집필을 계속하여 『동아일보』에「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1925. 1. 3),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1925. 1. 15~1. 26), 「평양패수고」(1925. 1. 30~2. 16)를 연재하였고, 별도로 「전후삼한고」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논문도 집필하였다. 이 논문들은 대부분 『조선상고사』의 집필과정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단행본 『조선사연구초』는 그가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1929년 6월 서울 견지동에 있는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되었으며 일원의 정가로 발매되었다. 본서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연학사에서 재간하였다. 여기에서는 전자를 저본으로 영인하고 활자화 한 것이다.

 Ⅲ. 『조선사연구초』의 구성과 서술 내용

 『조선사연구초』는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삼국지 동이열전 교정」·「평양패수고」·「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등 6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다.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은 한자 차용 표기에 대한 단재(신채호)의 사료비판 인식을 잘 보여준다. 단재(신채호)는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두문으로 된 국명·관명·지명 등에 대해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착오를 교정하고 와오(訛誤)를 귀진(歸眞)하며, 제 시대의 본색(本色)을 탄로(綻露)하고 이미 산실된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중 고적을 발굴함에 비길만한 조선사 연구의 비약(秘鑰)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이두문이 한자의 전음(全音)·전의(全義) 혹은 반음(半音)·반의(半義)로 만든 일종의 문자라고 하며, 연구상의 곤란함을 5가지로 지적하였다. 그 곤란함이란 첫째, 구결문(口訣文)으로 화(化)하기 이전에는 자모의 발견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법칙도 없었고, 둘째, 신라 경덕왕대에 지명을 정할 때에 옛 이름의 본의를 버리거나 역용(譯用)하지 않고 한자로 하였으며, 셋째, 사서에 이두문으로 된 당시의 본명을 기록하지 않고 후래에 역용한 한자어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며, 넷째, 조선의 사책에 와자(訛字)·오자(誤字)·첩자(疊字)·루자(漏字)가 많으며 중국의 사책의 조선열전 부분의 ‘사실의 오(誤)나 문구의 와(訛)’가 대단하여 믿을 수 없으며, 다섯째, 언어는 시대를 따라 생멸하며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되거나 변개된 말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신채호)는 이두문 표기의 연구를 위해 ‘천려(千慮)의 일득(一得)’으로서 6가지 해석방법을 수립하여 제시하였다. 이 해석방법은 매우 구체적인데,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본문의 자증(自證) : 고유어가 한자의 석(釋)이나 음(音)을 차용한 이두문일 때 일명(一名)·일작(一作)·본왈(本曰) 등을 병기한 경우로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본문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경우.
2. 동류(同類)의 방증 : 홀(忽)·파의(波衣)·홀차(忽次)·미지(彌知)·목멱(木覔)·부사(夫斯) 등과 같이 동일한 접미사나 접두사를 지닌 동류를 수집하여 해석을 추단(推斷)하는 경우.
3. 전명(前名)의 소증(溯證) : 아사달(阿斯達)과 비서(非西)의 예와 같이 부나 조의 성씨를 얻으면 그 자손의 성씨를 자연히 알듯이 지명이 모호할 시 그 옛이름에서 진가(眞假)를 아는 경우.
4. 후명(後名)의 연증(溯證) : 신(臣)·진(辰)의 예를 들고, 결국 김유신·연개소문·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칸)을 같은 의미로 해독하며, 전명(前名)의 소증(溯證)과 상대되는 경우.
5. 동명이자의 호증(互證) : 가장 대표적 사례로서 ‘라’와 ‘불’을 들고, 복잡한 이명자에서 음·의·연혁으로 동명을 밝혀내는 것으로 조선 고사 연구에 비상한 도움이 있는 경우.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 : ‘아리’를 ‘長’의 뜻으로 해석하여 ‘리가람(長江)’을 조선족의 분포 순으로 육처(六處)에 존재한다고 하고 유리왕과 개루왕과 같이 양왕이 존재한 경우.

  이 여섯 개 조항의 언어학적 해석방법은 지나치게 문헌에만 편중되고 항목 구별이 정밀하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는 한편, 일정한 방법을 가지고 체계 있는 해석을 시도한 최초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단재(신채호)는 이런 해석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로서 ① 전인이 이미 증명한 것을 더욱 견확(堅確)하게 함, ② 유래의 의문을 명답할 수 있음, ③ 전인의 위증을 교정함, ④ 전사의 두찬(杜撰)을 타파할 수 있음을 예시를 통해 설명하였다. 다만, 그는 이두문 명사 해석상의 독단을 피해야만 이 같은 효과가 가능하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결국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은 단재(신채호)가 우리 상고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영성한 자료를 보완하기 위해서 사료에 기록된 인명이나 지명 등의 고유명사와 관직명은 물론 옛 풍속이나 제도에 이르기까지 한자로 표기된 모든 자료를 올바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삼국사기 중 동서양자 상환고증」은 『동아일보』에 단 1회 게재된 단문이지만,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 자세가 잘 보이는 글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글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은 자신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였으나, 자신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는 것을 강조한 문장으로 이해된다.
  단재(신채호)는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조의 “국가동유낙랑(國家東有樂浪)”이란 문장을 들어서 고사상 ‘동(東)’자와 ‘서(西)’자가 바뀐 원인을 규명하고 실증하였다. 그는 낙랑에 대한 안정복과 정약용의 견해를 소개하고, 양인의 오류를 지적하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서’자가 ‘동’자로 기록된 예로서 온조왕 23년 조의 “동북일백리(東北一百里)”와, 동왕 37년 조의 “한수동북(漢水東北)”, 지리지의 “동북대진(東北大鎭)”의 셋을 들며, ‘동북’으로 표기된 이 기록들은 모두 ‘서북’으로 표기되어야 맞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말에 ‘동방’을 ‘시’라 하였고, ‘서방’을 ‘한’이라 하였으므로 삼국시대 학자들이 한자를 취하여 이두문을 만들 때 ‘서’자의 음인 ‘시’를 취해 ‘동(東)’을 ‘서(西)’로 쓰고, 그 대신 ‘서’를 ‘동’으로 쓴 것을 이후 사가들이 사책을 지을 때 바뀐 ‘동’과 ‘서’를 썼기 때문에 고사상 ‘동’과 ‘서’가 바뀐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실례로서 “가슬라(迦瑟羅) 일명(一名) 하서랑(河西良)”과 “동맹(東盟)”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동’자와 ‘서’자가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하며, 관명과 지명이 두 개가 병기된 것은 이두자로 쓴 사책과 한자로 쓴 사책 기록의 차이로 설명하였다.
  본고의 결론은 김부식에 대한 비판으로 맺었다. 그는 김부식이 ‘황조맹랑(荒粗孟浪)한 사가’라고 평가하며, 그가 이두문에 무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두문을 철저히 배척하여 『삼국유사』에 수록한 시가를 전혀 수록치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김부식이 인명이나 지명에 이두문이 있었음을 알았거나, ‘동’과 ‘서’가 이두문으로 인해 바뀐 것을 알았다면 모두 배척하여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에 일부 ‘동’과 ‘서’가 바뀐 것이 존재하는 것은 고려 초의 문사나 승려들이 고기를 한문으로 지을 때 이두문으로 된 사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빠뜨린 결과라고 하였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은 단재(신채호)가 중국사서의 전도(顚倒)·와오(訛誤)·탈락(脫落)·증첩(增疊)된 자구까지 교정할 수 있는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사료해석 능력을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는 먼저 우리의 고대사 관련 문헌이 너무 적기 때문에 중국 고사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특히 『삼국지』 동이열전을 취한 까닭은 『사기』나 『한서』의 조선열전은 ‘중국유적(中國流賊)의 침략사’, 『남북사』, 『수서』, 『당서』 등의 동이열전은 ‘한족의 외경사(外競史)’에 불과하고, 위진시대 사관이 지은 『위서』와 『위략』도 문제가 있는 사서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삼국지』를 버리고 『후한서』만 선택한 선유의 오류도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자신이 『삼국지』를 취하여 교정하는 이유는 첫째, 서적을 초사(抄寫)하여 전하는 과정에서 전도(顚倒)·와오(訛誤)·탈락(脫落)·증첩(增疊)된 자구가 허다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고증가들이 조선열전이나 동이열전 같은 부분은 고증에 힘쓰지 않았고, 설령 힘써 고증한다 하더라도 인명·지명·풍속·사정 등을 잘 몰라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곳이 있으며, 둘째, 중국인의 유전적 자존성으로 말미암아 고의로 무록(誣錄)하거나 전문(傳聞)으로 와록(誤錄)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전도·와오·탈락·증첩된 자구의 사례로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1. 서문의 유오환골도(踰烏丸骨都)는 초사자(抄寫者)가 성명(城名)인 오골(烏骨)과 환도(丸都)를 몰랐기 때문에 유오골환도(踰烏骨丸都)의 오류이다.
2. 『예전(濊傳)』의 유렴치(有廉恥) 불청구려(不請句麗) 언어법속(言語法俗) 대저여구려동(大抵與句麗同)은 유렴치불청흉(有廉恥不請匈)이 일구(一句)”이고, 언어법속여구려동(言語法俗與句麗同)이 일구(一句)이다.
3. 『한전(韓傳)』의 신지(臣智) 혹가우호(或加優呼) 신운견지(臣雲遣支)는 신지(臣智) 혹가 우호(或加優呼) 신견지(臣遣支)의 오류이다.
4. 『변진전(弁辰傳)』의 차읍(借邑)은 읍차(邑借)의 도재(倒載)이다.
5. 『변진전(弁辰傳)』의 미오사마(彌烏邪馬)는 미오마사(彌烏馬邪)의 도사(倒寫)이다.
6. 『한전(韓傳)』의 사로(駟盧) 막로(莫盧)와 『변진전(弁辰傳)』의 마연(馬延)은 첩사(疊寫)한 것이므로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산거(刪去)한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열전의 기사 중에서 초사자들의 오류를 교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본문 기사의 오류도 지적하였다. 그는 고구려를 침략했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의 서적을 가져가서 참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위오(違誤)가 많은 것은 『원사(元史)』·『명사(明史)』·『일통지(一統志)』가 고려의 사책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등록하면서도 망개(妄改)와 위증(僞證)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다음의 네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1. 중국 사가들이 자존의 벽견으로 허다한 소화(笑話)를 끼쳤으나, 위증과 불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하여 진한을 진인(秦人)의 자손이라 함으로써 조선의 족계를 난(亂)하려 하였다.
2. 읍루(挹婁)가 예(濊)의 별명임을 모르고 읍루전을 입(立)한 이외에 예전(濊傳)을 立한 것이 하나의 잘못이요, 동북 양 부여 가운데 북부여는 부여라 칭하는 동시에 동부여를 예로 인식함이 또 다른 잘못이다. 특히 주(主)인 동부여를 입전(立傳)하지 않고 객(客)인 예를 입전(立傳)한 것은 잘못이다.
3. 낙랑을 뺌으로서 지리의 결점은 고사하고라도, 고구려와 낙랑, 낙랑과 삼한의 언어·풍속 등 동이 관계를 말하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부여 등 북방 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 동이열전의 가장 큰 결점이 되고 있다.
4. 고구려왕을 고구려후라 하고, 고구려사에 보이지 않는 고구려후 ‘騶’란 이름이 보이는 등 착오가 많다.

  단재(신채호)는 본고의 결론도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맺고 있다. 결론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부식은 조선 고사(古史)가 결망(缺亡)된 까닭에 무호동중(無虎洞中)의 삵과 같이 조선사가들의 비조가 되었지만, 피(彼)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송인(宋人)의 『책부원구(冊府元龜)』 일천권을 사다가 자가(自家)의 참고에 공(供)하고는 내각에 심장(深藏)하여 타인의 열람을 불허하여 자가가 유일한 박학자의 명예를 가지는 동시에 『삼국사기』가 자가의 명예와 같이 국내 유일의 역사됨을 희망하였다. 피(彼)의 악렬한 수단이 참 통악할 만할뿐더러 그 사학적 두뇌가 비상히 결핍하여 즉 근세의 발달된 역사에 비하여 손색(遜色)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고대의 인물중심주의의 역사의 저울로 달아볼지라도 『삼국사기』는 몇 푼어치가 못 되는 역사다.…그러므로 『삼국사기』는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전무하다.…”

  단재(신채호)의 우리 사학계에 대한 비판은 당대 사학에까지 미쳤다. 그는 한백겸과 안정복이 탄복할만한 정상근밀(精詳謹密)로 김부식의 착오를 많이 찾아냈다고 평가하면서도 중국 사서에 대한 신뢰가 너무 과하여 진위가 착잡한 자료를 마구 인용하고, 후대의 위작도 존신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근래의 사학자들이 기록의 시(是)·비(非)·오(誤)·정을 따져보지 않고 각종의 진서(眞書)·위서(僞書)·와언(訛言)·정언(正言)을 모두 재료로 삼고, 양문(洋文)의 형식으로 편장(篇章)을 갈라 신사학자가 지은 조선사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질타하였다.
  「평양패수고」는 조선 문명의 발원지로서 고삼경(古三京)의 하나인 평양과 칠대강(七大江)의 하나인 패수(浿水)가 오늘날의 평양과 대동강으로 혼동되는 것을 비판하며, 그 착오된 이유를 지적하고 고평양(古平壤)=해성(海城), 고패수(古浿水)=한간락(蓒芉濼)으로 위치를 비정한 것이다. 먼저 단재(신채호)는 시대별로 위치를 달리한 ① 삼조선시대의 평양, ② 삼국과 동북국 양시대의 평양, ③ 고려 이후의 평양 등 세 개의 평양이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고려 이후의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이나 고평양, 즉 삼조선시대 평양 위치의 변증은 지난한 문제로서 조선의 선유나 최근 일본학자들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평양을 찾지 못한 이유를 찾는 방법이 착오되었다고 하며 다음의 네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 번째 착오는 평양과 패수의 의의를 해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평양(平壤)·평양(平穰)·평나(平那)·변나(卞那)·백아(百牙)·낙랑(樂浪) 등은 성(城)을 이르는 것이고, 패수와 패하 등은 강을 이르는 것으로 문자는 다르나 가음(假音)은 ‘펴라’로서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음성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음의 독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두 번째 착오는 평양과 패수의 고전에 관한 사책의 본문을 선해(善解)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위략』과 『사기』의 조선열전과 흉노전에 수록된 동일한 사실의 기사를 대비 분석하여 ‘이천여리’가 상곡(上谷)부터 요양(遼陽)까지이며, 왕검성인 험독(險瀆)은 오늘날의 해성(海城)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세 번째 착오는 위조된 문자를 고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중국 사책은 거의 독특한 병적 심리인 자존성이 있는 춘추필법 계통자의 저작인 고로, 특히 자신들과 관계된 전쟁이나 영토문제의 경우는 위조가 심하여 믿을 수 없으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저작이라는 『무릉서(茂陵書)』와 『한서』 지리지에서 낙랑군이 위조된 부분을 들었다. 네 번째 착오는 고사를 읽을 때에 전후의 문례를 모르고 자구의 문의만을 억해하여 위증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한서』 지리지 요동군의 ‘험독(險瀆)’ 주(註)를 잘못 해석한 『동사문답(東史問答)』·『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해동역사(海東繹史)』를 ‘천하의 소화(笑話)’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를 ‘풍인(瘋人)의 해석’으로서 ‘세인이 모착(模捉)할 수 없는 비지리(非地理)의 지리(地理), 비역사(非歷史)의 역사(歷史)’라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조선 문명사상 중요한 지방인 평양과 패수가 천여 년 동안 천 여리나 떨어진 평안도의 소지방으로 출계(出系)한 것은 ‘위증한 서적의 작얼(作孼)’에도 원인이 있으나, 첫째, 동북 양국이 대치하다가 북국이 거란과 여진에게 멸망하여 종족이 전멸되고 토지도 잃는 등 조선 민족이 대외적으로 실패함으로써 평양과 패수란 이름을 보전치 못하였고, 둘째, 조선 문헌이 결망하고 위증된 중국사서가 일세에 횡행한 결과라고 진단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사서 중 위증의 문자를 조작한 것은 당 태종과 안사고(顔師古)가 조선의 강성과 문명을 시기하여 손 댄 『한서(漢書)』와 『진서(晋書)』가 가장 심하며 『남제서(南齊書)』와 『수서(隋書)』 등에서도 당 태종이 조선 관련 기사를 도말(塗抹) 혹은 개찬(改竄)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관야정(關野貞)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서 열수(列水)를 대동강으로 비정한 것도 『한서』 지리지의 위증을 몰랐기 때문에 착오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본서 중 어떤 말은 학자의 견지에서 나왔다느니보다 정치상 모종의 작용이 적지 않다고 식민사학적 성격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예전의 평양과 패수가 오늘날의 평양과 패수가 된 것은 첫째, 조선 고대에는 동일한 두 개나 두 개 이상의 지명을 짓고 남북 등을 붙여 구별하였다는 설과, 둘째, 선민(先民)이 국도나 인민을 천사(遷徙)시킬 때 지명까지 함께 옮겼으니 해성(海城), 한간락(蓒芉濼)의 ‘펴라’에서 평양, 대동강으로 옮기고 ‘펴라’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본고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남북 양 낙랑설=남북 양 ‘펴라’ 설이다. 그는 한사군의 위치도 천사무상(遷徙無常)하였기 때문에 낙랑군 수부(首府)도 해성(海城)에만 고정되지는 않았으나, 요동(遼東) 이외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재된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낙랑과 평양은 모두 ‘펴라’의 가자(假字)이나, ‘남(南) 펴라’는 평양이라 쓰고, ‘북(北) 펴라’는 낙랑이라 썼는데, 낙랑이 멸망한 뒤로는 평양만을 사용하였으니, 양자는 격절(隔絶)한 관계라는 것이다. 곧 단재(신채호)는 남에 있던 평양과 패수는 낙랑국 또는 평양성이라 불리며 대동강상에 고정되었으며, 북에 있던 평양과 패수는 낙랑군이라 불리며 군치(郡治)가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상곡(上谷)까지 이동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전후삼한고」는 사료 비판을 통하여 진번막(眞·番·莫) 삼조선(三朝鮮)을 기준(箕準)이 남천(南遷)하기 이전 북방에 있던 신·불·말의 전삼한(前三韓)·북삼한(北三韓)으로, 마한·변한·변진은 전삼한의 후신으로 유민들이 남하하여 이룩한 후삼한·남삼한으로 규정한 논문이다. 본 논문의 구성을 보면 논지가 명확히 드러나는 바, 목차는 다음과 같다.

一. 인용서(引用書)의 선택(選擇)
  (一) 인용서의 진위 판별
  (二) 조선 고사의 잔결(殘缺)
  (三) 중화사가의 조선에 관한 기록
  (四) 조선인 기록으로 중화사책(中華史冊)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 사실
  (五) 삼국지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六) 삼한에 관한 기록
二. 전삼한, 삼조선의 전말
  (一) 삼한의 소출자(所自出)
  (二) 삼한은 곧 삼조선
  (三) 전삼한의 명칭
  (四) 전삼한 창립자 단군
  (五) 전삼한의 강역과 연대
三. 후삼한 - 삼국지에 보인 나가제(羅·加·濟) 삼국
  (一) 후삼한 고증에 대한 선유의 오류
  (二) 중삼한의 약사
  (三) 후삼한 - 나가제(羅·加·濟)의 역사
  (四) 후삼한의 호상관계
  (五)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
  (六) 후삼한과 낙랑대방의 관계
  (七) 후삼한과 북방 제국의 언어

  본고는 단재(신채호)의 역사연구 자세와 방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철저한 사료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사료를 인용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판별을 통해 가치를 성찰해야 하며, 우리의 고사가 잔결하여 중국 사료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나, 존화양이·상내약외(詳內略外)·위국휘치(爲國諱恥) 경향이 있는 중국사서 중 『삼국지』가 관구검이 탈취해 간 고구려 기록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조선과 관련된 기록 중 믿을 만하나, 이 또한 조선본위의 조선사가 아니라 사이전(四夷傳) 가운데 부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소략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삼국지』의 조선 관련 기록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첫째, 중국 사가들의 타국에 대한 병적 심리로 인해 망설이 많아 편신(偏信)할 수 없고, 둘째,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자기 신민에게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에 관한 기록을 도개(塗改)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존신(尊信)할 수 없으며, 셋째, 도자(倒字)·오자(誤字)·누자(漏字)·첩자(疊字) 등이 많음을 들었다.
  단재(신채호)는 전삼한(前三韓)의 존재를 밝히지 못한 한백겸의 실착을 지적하며 『삼국사기』·『위략』·『삼국지』 중 전삼한의 기록을 예시하였다. 그는 단군·기자·위만을 삼조선이라 한 『고려사』의 기록을 비판하고, 진번막(眞番莫)을 삼조선이라 주장하며, 진·번·막은 신·불·말 삼국의 뜻이요, 진·변·마는 신·불·말 삼왕의 뜻이라고 하였다. 다만 이들이 다르게 쓰인 것은 이두문을 한자로 취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전삼한의 개창자는 ‘단군(檀君)’이 아니라 ‘단군(壇君)’이며, 이를 소도(蘇塗)인 ‘수두’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님금’은 신단(神壇) 주제자(主祭者)를 일컬음이요, ‘신한’은 정치 원수를 일컬음이니 단군왕검은 신단 주제자가 정치 원수의 직권을 병유(幷有)한 시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전삼한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강역의 비정이다. 단재(신채호)는 ‘번조선’(불한)은 요하 이서와 개원(開原) 이북으로, ‘막조선’(말한)은 마한의 전신으로 압록(鴨綠) 이동, ‘진조선’(신한)은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로 비정하되, 삼조선은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신한’의 통치하에 약간의 구별을 가진 국가라 하였다. 이 견해는 우리 역사 발전의 무대를 만주의 요동과 요서 등 동북지방으로 크게 확대시킨 것으로서, 유학자들에 의한 전통사학과 침략적 식민사학에서 설정한 한민족사의 범주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전삼한설을 주장한 단재(신채호)는 후삼한 고증에 대한 한백겸·안정복·정약용·한치윤·한진서 등 선유의 ‘3대 오류’로서 ① 후대의 것으로 개찬(改竄)의 광거(狂擧)를 한 『후한서』를 주요 자료로 삼고 더욱 중요한 『삼국지』는 보조 자료로 인용한 점, ② 당 태종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사가들은 ‘종족적 편견’으로 자기들에 불리한 기사는 망산(妄刪)하였으나 이를 편신(偏信)한 점, ③ 해석상의 오류로서 이두자의 해석을 모르거나 중국 사료의 오류를 답습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런데 단재(신채호)는 진번막(眞·番·莫) 전삼한이 멸망하고 나가제(羅加濟) 후삼한이 건설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준(準)의 마한과 진번 양국의 유민이 건설한 진한과 변진의 양 자치부락을 ‘중삼한’으로 개념화하였다. 즉, 그의 삼한설은 전·후삼한설이 아니라 전·중·후삼한설이라 할 것이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삼국지』 삼한전에 보이는 나가제(羅·加·濟) 삼한(후삼한)에 대한 강역·음의·연혁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또한 전삼한 때에는 ‘신한’이 수위(首位)가 되고 ‘말한’과 ‘불한’이 보좌였으나, 후삼한 때에는 ‘말한’이 전삼한 때 ‘신한’의 위호(位號)를 지니고 칠십여 국의 공주(共主)가 되었다고 하였다고 상관관계를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삼국지』에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으로 기록한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예 등 5국을 설명하며 사실은 그리 핍절(逼切)한 관계가 적었다고 하며 오히려 관계가 밀접했던 낙랑과 대방을 빠뜨렸음을 결점으로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즉 ‘낙랑국’은 평안도에 할거하던 최씨 왕조로서 마지막 왕인 최리(崔理)가 고구려에 망하자 그에 소속된 수십 소국이 고구려에 불복하고 한(漢)과 통하여 한(漢)의 세력이 낙랑에 침입하였으나 한의 관리가 파견되거나 조령(詔令)이 미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낙랑군은 요동에 허설(虛設)되었던 군명(郡名)으로서, 그 아래의 제현 또한 허설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대방군 또한 최씨 멸망 후 일시 존재하던 소왕국이었으나, 한왕들이 이를 따라 요동에 허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단재(신채호)는 ‘가장 가경(可驚)할 사실’로서 경상도의 신라, 경기·충청도 등의 백제, 강원도의 예, 평안도의 고구려와 낙랑, 함경도의 옥저, 길림·봉천·흑룡 등지의 부여와 고구려가 동일한 언어로 통일되었음을 들었다. 비록 소부분인 읍루만이 언어가 좀 달랐으나, 만청(滿淸)과 조선의 고어가 상통하므로 큰 차이는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언어의 통일과 함께 사료 상에 나타난 관제와 풍속의 유사함도 강조하였다. 이는 단재(신채호)가 언어·관제·풍속을 통해 한민족 상고사의 범위를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을 회복하여야 할 다물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전후삼한고」는 부족과 지명 이동설을 차용하여 제시한 것으로서, 당시 정적이고 평면적인 삼한의 이해를 동적이고 입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견해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도 있으나, 민족사의 진폭과 외연을 확대시키고 이후 민족주의 사학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낭가사상의 관점에서 묘청의 ‘서경전역(서경천도운동)’이 지니는 역사적·사상적 성격과 의의를 규명하고, 『삼국사기』의 사대주의 사관을 비판한 논문이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一. 서론
二. 낭유불 삼가의 원류
三. 낭유불 삼교의 정치상 투쟁
四. 예종과 윤관의 대여진전쟁
五. 묘청과 윤언이의 칭제북벌론의 발생
六. 묘청의 광망한 거동 - 서경의 거병
七. 묘청의 패망과 윤언이의 말로
八. 본 전역후 삼국사기 편찬
九. 삼국사기가 유일한 고사된 원인
十. 결론

  단재(신채호)는 민족의 성쇠는 사상의 추향에 달린 것이고, 사상의 추향은 모종 사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조선 근세에 종교·학술·정치·풍속 등 각 방면에 사대주의 노예성을 산출한 것은 묘청의 서경전역(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에게 패배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근시안적 관찰이라고 비판하며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역대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가 반역(叛逆)을 친 전역(戰役)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불(郎佛)양가 대 유가(儒家)의 전이며 국풍파(國風派)대 한학파(漢學派)의 전이며 독립당대 사대당의 전이며, 진취사상대 보수사상의 전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그는 화랑은 본래 소도(蘇塗) 제단의 무사로서 ‘선비’라 칭하던 자였으나,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를 입어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 불렸고, 신라에서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고 국선·선랑·풍류도·풍월도라고도 불렀다고 하였다. 그는 최공도·노공도 등은 화랑의 원랑도·영랑도를 모방한 것이며, 학교의 『청금록(靑衿錄)』은 화랑의 풍류 『황권(黃卷)』을 모방한 것이라고 예시하며, 고려 초와 중엽까지 화랑의 유풍이 남아 있었으나, 사가의 필삭을 당해 전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려시대에 화랑사상을 실행하려던 대표적 인물로 여진정벌을 시행한 예종과 윤관을 들었고, 그 이후의 칭제북벌론자로서 윤언이·묘청·정지상을 들었다. 그런데 단재(신채호)는 칭제북벌론자로서 묘청보다 윤언이를 먼저 꼽았으며, 묘청의 광망한 행동은 책망하면서도 윤언이가 평양 천도에 반대한 것은 탁견이며 묘청의 광망한 거동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윤언이를 옹호하며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단재(신채호)는 본고에서도 2장에 걸쳐 김부식을 비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가 소략한 것은 병화로 인해 사료가 소실된 것이 아니라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焚滅)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김부식의 ‘이상적 조선사’는 ① 조선의 강토를 줄여 대동강이나 한강으로 국경을 비정하고, ② 조선의 제도·문물·풍속·습관 등을 모두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의 교육이나 받고, ③ 정치란 외국에 사신 다닐만한 비열한 외교의 사령이나 담임할 사람을 양성하여 동방군자국의 칭호나 유지하려는 것으로 개념화 하였다. 이어 그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 할 때 그 주의에 합당한 사료만 부연찬탄(敷演讚嘆)이나 개작하며, 합당하지 않는 사료는 논폄도개(論貶塗改)나 산제(刪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서, ① 부여와 발해를 발거(拔去)함, ② 백제의 위례를 직산이라 하고, 고구려의 주군을 태반이나 한강 이남으로 옮기고, 신라의 평양주(平壤州)를 삭제하여 북방 강토를 외국에 할양함, ③ 조선의 고유한 사상으로 발전한 화랑의 성인인 영랑(永郞)과 부예랑(夫禮郞) 등은 성명도 기재하지 않고 도당 유학생으로 거의 당에 동화한 최치원 등을 숭배함, ④ 당과 혈전한 부여복신(扶餘福信)은 열전에 올리지 않고 투항한 흑치상지(黑齒常之)를 특재(特載)함 등을 들었다. 그는 김부식에게 가장 산삭(刪削)을 당한 것은 유교도의 사대주의에 정반대되는 독립사상을 지닌 낭가의 역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전삭치 못한 것은 중국사를 존중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재(신채호)는「삼국지 동이열전 교정」등에서 『삼국사기』가 유일한 고사가 된 원인을 지적한 바 있으나, 본고에서는 그 원인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후에 윤언이·정지상 등이 처형당하였고,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모든 사료가 궁중에 비장되어 타인의 열람을 금함으로써 국풍파의 사상전파를 금지함, 둘째, 몽고의 압제를 받을 때 태조 이래의 실록이 허다하게 찬삭되는 등 정치 이외의 압박을 당하며 궁중에 비장된 고사가 더욱 심장(深藏)하게 됨, 셋째, 조선 창업 이후에도 『삼국사기』 이외의 역사를 공포할 의지가 없어 ‘송도(松都)의 비장(秘藏)이 한양(漢陽)의 비장(秘藏)’으로 될 뿐이며, 『고려사』가 세종에 의해 일부가 원문대로 회복되었으나, 결국은 『삼국사기』의 서법을 봉승(奉承)한 정도전의 『고려사』가 원본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의 가치 있는 사료도 비장됨, 넷째, 조선에서는 전대사까지도 관사(官史)나 준관사(準官史) 이외에는 마음대로 보거나 쓰지 못하는 괴습이 있어 역대 경복궁에 비장되어 온 고사가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만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삼국유사』가 전해지는 것은 『삼국사기』를 모방하여 사대주의 사관과 충돌하지 않은 결과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곧 단재(신채호)는 우리나라의 사상계가 낭가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분립되어 오던 중, 묘청의 광망한 거동과 패망으로 사대주의 천하가 되고 말았으며, 몽고의 압제를 경유하며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고, 조선도 사대주의로 창업되어 낭가는 아주 멸망해 버린 것이라는 탄식으로 결론을 맺었다.

 Ⅳ. 『조선사연구초』의 사학사적 의의

 1929년 6월, 홍명희 등의 주선으로 단재(신채호)가 국내 신문에 발표한 논문 등 6편을 모은 『조선사연구초』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되었다. 『조선사연구초』의 발행 직후 문일평은「독사한평(讀史閑評)」에서 단재(신채호)를 ‘조선혼을 부르짖던 애국자’라 하며 독후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이 사론이 일찍 조선 내에 있는 신문지를 통하여 실리게 될 때, 사계(斯界) 식자들 사이에 다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바어니와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지금 그 사론의 몇 편을 다시 수습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 곧 이 『조선사연구초』이다.…단재(신채호)가 조선사를 통하여 조선혼을 부르짖던 것은 사실이다마는 단재(신채호)가 단재(신채호)된 소이(所以)는 그의 열정보다도 독특한 사안(史眼)에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보는 바가 빠르고 날카로와 거의 타인의 추급(追及)을 허하지 않는다. 기탄없이 말하면 그의 이론이 반드시 모두 긍계(肯綮)에 맞는지는 모르나, 또는 그의 연구가 반드시 모두 과학적이라고는 할는지 모르나, 그의 견식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투철한 바 있으니 시(試)하여 이 『조선사연구초』를 뒤져보면 나의 말이 거짓 아닌 줄을 알 것이다. 그 중에 수습한 육편의 사론은 조선사를 연구하는 이로서는 누구나 한번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두문 명사 해석」 같은 것은 조선 고사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의 한 비약(秘鑰)이 될 것이며,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같은 것은 역사 저술하는 이의 가장 필요한 사료선택에 관하여 비판적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조선일보』, 1929년 10월 15일자).

  한편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순국 직후인 1936년 2월 28일부터 『조선일보』에 「조선 역사학의 선구자인 신단재(신채호)학설의 비판」 이란 제하로 7회에 연속하여 단재(신채호) 역사학에 대한 장문의 평론을 게재하였다. 이 평론은 홍기문이 ‘가친의 가장 가까운 친우요 또 나의 가장 경모하는 선배’인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해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평가를 시도한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제명처럼 단재(신채호)의 관념론적 사관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그를 조선역사학의 연구를 진흥시킨 선구자로서 조선 역사학의 개조라고 높게 평가하고 자리매김하였다.
  홍기문은 그의 부친 홍명희와 단재(신채호)의 절친한 관계로 인해 단재(신채호)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단재(신채호)의 원고가 부친의 요청으로 신문에 연재되는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그 원고를 본 일도 있었다.

  “…신단재(신채호)의 저서는 기간(旣刊)으로 『이순신전』·『을지문덕』·『최도통』·『조선사연구초』 등이 있고 미간으로 『조선사』가 있을 뿐이다. 그 중에도 『이순신전』, 『을지문덕』, 『최도통』은 그의 초기 저작인 만큼 역사가로서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작(作)이 되지 못하니 오직 나의 비판 대상을 이루는 것은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사』 양종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사연구초』는 가친이 그의 원고를 청하여 온 것인바 나도 일찍이 그 원고까지 본 일이 있고 『조선사』는 그가 초하다가 던지고 간 원고를 모씨가 정리하여 본보에 연재하던 것이라는데 그조차 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선사』는 모씨의 가필이 어느 정도 미쳤을까? 필자의 본의를 과연 손상함이 없었을까 등의 의문이 떠오르는 터로 그의 저작 중 완전히 신빙할 만한 것은 『조선사연구초』 일권에 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선배의 글을 정리하는 분으로서 그에 대한 경의로라도 근본적으로까지 임의로 가감을 행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직접 그 분으로부터 정리에 대한 경과를 듣지 못한 것은 섭섭한 일로 남겨두고 그만치만 신빙해서는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조선일보』, 1936년 2월 28일자).

  즉,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원고 중 『조선사연구초』는 타인의 가감이 없이 단재(신채호)의 본의를 잘 보여주는 신빙할 수 있는 원고라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관념론 사학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그는 단재(신채호)가 사상의 추향 여하가 민족의 성쇠를 결정한다고 하고, 모종의 사건이 그 사상 추향에 영향을 준다고 하며 묘청의 서경전역(서경천도운동)을 강조하고, 또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에 대한 투쟁에 의한 심적 상태의 기록이라 서술한 『조선사』를 지적하였다. 특히 그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유사 이래 역사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계급대립이라고 강조하며 이를 막연한 개념으로 심상하게 포섭시킨 단재(신채호)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홍기문은 이 같은 단재(신채호)의 사학은 종래 관념론사가로부터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는 이 같은 역사관 아래서는 결코 진정한 역사를 찾을 수 없으며, 곧 이는 단재(신채호)를 위해 ‘근본적 불행’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조선사연구초』를 한번 보라. 만일 그것은 각 부문 단편 단편의 연구 논문을 모은 것으로 또 좀 다르다고 할진대 다시 『조선사』를 보라. 관구검의 내침 수·당의 공전(攻戰)을 말하기에 급급할 뿐 삼국시대의 경제생활 내지는 계급관계 같은 데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단재(신채호)와 같은 역사관 아래서는 진정한 역사가 찾아질 리 결코 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를 위하여 거의 근본적 불행을 의미한다.”(『조선일보』, 1936년 3월 1일자).

  홍기문의 단재(신채호)사학에 대한 비판은 철저한 유물론사학에 입각한 것이다. 즉, 홍기문은 역사의 원동력은 물질적 생산력에 있고, 유사 이래 역사는 계급대립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유물론사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단재(신채호)의 관념론적 정신사학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는 단재(신채호)의 ‘자칭 과학의 관념론적 역사관’에 의한 역사를 “선민의 위세를 들먹여 조상의 거룩함을 자랑하고 그들의 자손 됨을 만족케 하는 역사”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관념론적 역사관이 배타자존의 역사를 산출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타자존의 강렬한 감정이 끝내 관념론적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그는 단재(신채호)가 인류학·언어학·고고학·토속학(土俗學)·비명학(碑銘學) 등 보조과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의 동래(東來)’ 등에서 영역 비정의 독단을 범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천품, 천재적 안광, 풍부하고 궁극적인 창견(創見) 등을 높이 평가하며 단재(신채호)를 조선역사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단재(신채호)의 학설을 무조건 신뢰해서도 안 되나, 단재(신채호)를 함부로 모멸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홍기문은 단재(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에 수록 논문 중 특히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과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이 비록 문헌에만 치우치고 항목의 구별이 정밀하지 못하며 독단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였으나, 이는 ‘백옥의 티’에 불과한 결함이라고 하며 단재(신채호)가 제시한 여섯 가지 해석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은 ‘역사학계의 막대한 보배’라고 극찬하며, 단재(신채호)가 자구의 교정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사례를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단재(신채호)가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의 오류와 왜곡을 비판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그는 단재(신채호)의 『삼국사기』 비판은 극도의 증오를 금치 못하여 가끔 어조의 격심함이 있다고 하면서도, 교정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옹호하였다.
  결국 홍기문은 단재(신채호)를 역사학자로서는 불행히 실패하였으나, 거대한 사료고증학자나 문헌학자로서는 성공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즉, 단재(신채호)의 학설은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으나 그가 문헌고증과 해박한 역사적 지식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역사연구와 해석의 방법론은 높이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비롯한 역사학에 대하여는 이후에도 많은 학자들의 평가가 있었다. 특히 단재(신채호)가 사거한 직후 많은 신문과 잡지들은 단재(신채호) 특집호를 기획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여기에는 단재(신채호)와 동시대를 살면서 교유했던 많은 인사들의 절절한 추모의 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에서 그를 ‘철혈주의를 부르짖은 주전론자’라 한 이극로의 평가는 그의 독립운동론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단재(신채호) 사학의 영향을 받은 정인보와 안재홍의 회고는 역사학자로서의 단재(신채호)의 위치를 명확히 설정하였다. 정인보는 단재(신채호)를 재·학·식의 삼장(三長)을 두루 갖춘 청구사가(靑丘史家)의 제일인자요 사학의 거벽이라고 평가하였다. 안재홍은 단재(신채호)를 조선사학의 선구자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변영로는 단재(신채호)를 국수주의의 항성, 조선의 랑케로 비유하였고, 원세훈은 단재(신채호)를 현 조선에서 유일한 사학가로 평가하였다.
  『조선사연구초』의 사학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족사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국명·지명·관명 등에 표기된 이두문의 해석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언어학과 음운학 등의 방법과 연계하여 민족사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는 민족사 연구를 심화시키는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민족사의 외연을 확장하고 진폭을 확대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남북 양 낙랑설=남북 양 ‘펴라’설 및 전후 삼한설 등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였다. 또한 평양과 패수가 오늘날의 평양과 대동강으로 혼동되는 것을 비판하며, 고평양=해성(海城), 고패수=한간락(蓒芉濼)으로 위치를 비정하였다. 이로서 전통 유학사가에 의해 위축되고, 일제 식민사가에 의해 왜곡된 민족사의 강역과 범주를 회복하고 외연을 확대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사의 정신적 맥락을 낭가사상으로 설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묘청을 낭불가·국풍파·독립당·진취사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하였으나, 그의 광망한 서경전역(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거동이 오히려 유가·한학파·사대당·보수사상을 대표하는 김부식에게 패배함으로써 결국 낭가사상을 단절시키고 말았다고 개탄하였다.
  넷째, 근대 역사학에서 사료선택과 비판의 중요성을 제고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중국사서가 중국인들의 존화양이·상내약외(詳內略外)·위국휘치(爲國諱恥) 필법으로 특히 그들과 관계된 전쟁이나 영토관계 기사는 위조와 개작이 심하다고 하며 사례를 제시하였다. 또한 거의 모든 논고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사대주의사관에 입각해 수많은 사료를 의도적으로 인멸하고, 민족사를 위축시켰다고 구체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연구에서 사료의 선택과 비판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마지막으로 『조선사연구초』는 1920년대 단재(신채호) 사학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저술일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민족주의 역사학의 연구 수준과 성과를 대표하는 저술로도 평가할 수 있다. 즉, 『조선사연구초』는 단재(신채호)를 ‘조선사의 열쇠’, 청구사학의 제일인자, 조선 역사학의 개조·선구자·거벽, 거대한 사료고증학자, 조선의 랑케로서 민족주의 역사학을 견인한 선구적 연구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3권 역사
讀史新論
大東帝國史敍言
朝鮮上古文化史
愼鏞廈(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1.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미 구한말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한 후 이어서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敍言)』·『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그 밖에 다수의 역사 연구논문들을 집필하고 발표하여 한국근대사학을 근대민족주의사학으로 성립시킨 위대한 업적을 내었다.
  단재(신채호)는 해외에 망명하여 민족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연구해서 집필하고, 별도로 간행은 국내에서 동지들이 했기 때문에 집필연도와 간행연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집필 순서로 보면 『독사신론』이 1908년, 『대동제국사서언』이 구한말, 『조선상고문화사』가 1910년대(1915년?), 『조선상고사』가 1921~1924년이고, 그 밖에 다수의 논문들과 미간행 저서들이 1910~20년대에 집필되었다.
  그러나 간행발표는 『독사신론』(1908), 『조선사연구초』(1930),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1932)의 순서로 간행되었고, 『대동제국사서언』은 간행되지 않았다.
  이번 『단재 신채호전집』 제3권에는 집필 순서에 따라『독사신론』(1908) →『대동제국사서언』(구한말) →『조선상고문화사』(1910년대)의 초기 저작 3책을 수록하고 이를 각각 해설하기로 한다.
  종래에는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발표 후에 보다 정밀한『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의 큰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 내용의 분석에 치중하여 『독사신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느낌이 있었다.
 『독사신론』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재된 저작으로서 애국계몽운동기에 사학계뿐만 아니라 전 문화계에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충격’을 준 저작이었다. 이 저작의 착상과 내용은 그 이전의 역사서와 당시 역사교과서류 등과 대비해 보면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독사신론』의 내용과 관점이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점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어서 신채호가 1910년 4월 국외로 망명한 후 최남선(崔南善)이 이를 잡지 『소년(少年)』에 전재하면서『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고 이름 붙여 ‘사론’임을 강조할 만큼 그것은 당시의 통념적 국사관에서 볼 때 ‘이단적’이고 또 ‘혁명적’인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종래의 구사(舊史)와는 전혀 다른 최초의 ‘신역사’였다. 단순화시켜서 표현하면 우리나라의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의 체계화는『독사신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1908년 시급하게『독사신론』을 집필하여『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한 동기로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아직도 중세유학의 영향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다수의 국사서들은 ‘존화사관(尊華史觀)’·‘소중화사상’·‘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지나)을 주인으로 하고 자기 나라를 객(客)으로 하여 주객을 거꾸로 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둘째, 일본 역사가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여 무설(誣說)을 퍼뜨리고 있는 점. 예컨대 ㉠ 한반도는 항상 북방 제 민족의 세력, 서로 지나(중국)의 세력, 남으로 일본의 세력이 교충(交衝)하는 지점이어서 한국 민족은 북·서·남의 강한 민족에 복속하여왔다는 무설 ㉡ 소위 일본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침공하고, 가야(伽倻)에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했다는 무설…등 초기 식민주의사관을 지어 퍼뜨리고 있는 점.
  셋째, 한국인이 지은 근대 국사서 또는 ‘역사교과서’까지도 자기 민족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밝히지 못하고, 어떤 교과서는 아직도 존화사관에 젖어 있거나 또는 일본 사학의 무설을 받아들여 자기 민족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사를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 배양의 첫째가는 부문이라고 보는 신채호의 역사민족주의와 역사는 민중의 애국심과 민지를 계발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신채호의 애국계몽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중세적 역사서들이나 비주체적 국사서들을 완전히 극복하여 추방시켜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애국심이 저절로 우러나와서 배양되고 용솟음치며, 한국 민족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당당하게 밝히는 ‘신역사’를 쓰는 것이 국권회복과 민족의 영구한 발전을 위하여 가장 긴급하고 중요하며 절박한 과제로 인식된 것이었다.
  신채호는 스스로 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의 근대 시민적 민족주의·애국계몽사상에 의거하여 ‘신역사’를 쓰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화급한 요청에 응하여 쓰여진 것이 『독사신론』인 것이다.
  현재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직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약간의 이유가 있다고 보여 진다.
  첫째,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이후에 『조선상고사』(『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연재됨)와『조선상고문화사』(『조선일보』, 1931년 10월 15일~12월 31일까지 그 일부가, 그리고 나머지는 1932년 5월 27일~5월 31일까지 40회에 걸쳐 연재됨)의 보다 정밀하고 고증적인 대작을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의 평면적 비교분석에 치중한 결과 『독사신론』의 중요성이 가려져서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인 점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둘째, 『독사신론』이 통상적 교과서와는 달리 ‘사론적(史論的)’ 신국사서(新國史書)이기 때문에 ‘고증’에 전혀 치우치지 않고 사론적 국사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증사학’의 엄격성과 과학성의 한 면만을 보고 역사의 다른 한 면의 본질을 외면하는 입장에서는 『독사신론』은 경시되기 쉬운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셋째, 『독사신론』이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시 다른 국사교과서들이 대체적으로 고대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일단 다룬 데 비하여『독사신론』은 발해 문제까지 다루고 미완인 채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 점도『독사신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서’에 대해서까지도 일관되게 역사주의적 고찰을 할 필요가 절실함을 강조하고 싶다. 『독사신론』이 1908년경에 국사학과 국권회복운동에 미친 영향 및 공헌과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가 1931~1932년의 국사학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및 공헌은 현저하게 다른 것이며, 각각 그 시대의 학문적 발전 조건과 사회적 조건에 관련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이야말로 근대국사학을 창건한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독사신론』은 사론적 저술이지만 학술적으로도 종래의 학설을 뒤집는 혁명적 새 학설을 다수 정립하여 제시하였다.
  예컨대 ① 부여-고구려 주족설(主族說), ② 단군-추장시대론, ③ 기자조선설 부정, ④ 기자일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 ⑤ 만주영토설, ⑥ 초기 대일관계신론, ⑦ 임나일본부설 부정, ⑧ 삼국문화의 일본에의 유입설, ⑨ 초기 대북방민족관계 신론, ⑩ 초기 대중국관계 신론, ⑪ 삼국 흥망원인 신론, ⑫ 삼국통일 및 김춘추 비판론, ⑬ 발해·신라 양국시대론, ⑭ 김부식 비판론 등 새 학설들과 그밖에 작은 주제들에 대한 다수의 신해석들이었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부여족(고조선족)을 중심으로 하여 안으로는 조선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진화과정을 밝히고, 밖으로는 사린의 타민족들과 어떻게 교섭과 투쟁을 전개해 왔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1924년의 『조선상고사』「총론」에서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관은 이미 『독사신론』에서 실제로는 서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한국 근대민족주의 국사학 성립의 저작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그 몇 가지 일반적 특징과 종래의 몇 가지 오해라고 생각되는 관점에 대하여 해설하려고 한다.
  첫째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처음부터 ‘민족주의’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며, 따라서 ‘민족주의 사관’이 수립되어 일관되게 발해시대까지의 국사를 ‘재해석’한 국사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독사신론』은 ‘근대민족주의’에 의거하여 국사를 해석하고 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근대민족주의를 보급·계몽하려고 의도한 새로운 국사서인 것이다.
  신채호가 누차 그 절박한 필요성을 강조한 ‘신역사’는 바로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으로 해석된 역사를 의미한 것이었다.
  둘째,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다루어진 ‘신역사’의 단위 주체는 ‘민족’이었으며,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민족적 주체성’이었다.
  단재(신채호)가 다른 국사교과서들처럼 연대나 기술하며 인명·지명이나 기술하는 역사를 반대하고 ‘일정주의(一定主義)’·‘일관정신(一貫精神)’이 살아 있는 역사를 주장한 것도 ‘민족주의 사관’에 의거하여 ‘민족주체성’이 있는 역사서술을 강조한 때문이었다. 김춘추나 김부식이 ‘민적(民賊)’·‘공구(公仇)’로서 가혹한 비판을 받은 것도 신채호의 이러한 관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셋째,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의 민족주의 사관은 중세사학을 철저히 비판·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는 예컨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등을 “일성(一姓)의 전가보(傳家譜)”로 밖에 보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왕조사를 철저하게 비판하여 소위 왕조의 정통을 따지며 공자의 ‘춘추’의리니 주자의 ‘강목’의리를 논하는 사학을 완루(頑陋)한 ‘구사’라고 비판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김부식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발해국을 떼어내어 포기해 버린 것도 김부식이 고려왕조를 정통으로 만들고 당시의 자기 군주에게 아첨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분석하고 ‘왕조사’의 폐해를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모든 종류의 중세사, 특히 춘추강목체사학을 ‘구사’라고 보고 있으며, 자기 시대는 ‘신안공(親眼孔)’으로 ‘신역사’를 써야 할 시대임을 극히 명확하게 자각하였고 주장했으며 실천하였다. 일부의 역사학도들이 한말까지는 단재(신채호)가 중세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넷째, 단재(신채호)는 자신의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의 역사관을 이룬 민족주의의 ‘민족’의 구성요소로서 언어·종족(또는 혈연공동체)·국토(토지)… 등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이 중에서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언어의 문제는 자명한 것으로 보아 다루지 않았다. 그가 이 저작에서 심각하게 다룬 것은 종족과 국토의 문제였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주로 고대사를 다루다가 중단된 저작이기 때문에 다수의 부족국가들의 인종문제 또는 부족문제에 부딪쳤다. 널리 아는 바와 같이 고대에는 근대에서와 같은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고대사를 연구하고 기술하려 할 경우에는 이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인 것이었다. 신채호는 고대사에서의 이 문제를 ‘주족’과 ‘객족’으로 구분하고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종족으로서 ‘부여족’을 제시하여 그 계통으로서 ‘부여-고구려 주족론’을 제기함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한국민족의 기원을 부여족에서 구하고 그것을 한국민족의 고대의 대명사로 쓰면서 부여족이 ‘토족’을 정복·흡수하여 고대국가를 수립·발전시키는 과정과 ‘객족’인 선비족·지나(중국)족·말갈족·여진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이 경우에 ‘부여족’을 한국민족 고대의 주종족으로 선택하고 부여족을 한국민족의 고대 대명사처럼 사용한 이유는 부여·고구려가 가장 강성했으며 다른 민족(객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여러 차례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고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고도의 문명국가를 수립하여 다수의 고대 동아시아 부족들을 지배했으며 강대한 중국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쟁하고 중국민족의 대규모 침략을 여러 차례 패배시킨 사실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사회진화론’을 그의 역사학의 이론적 배경으로 한 신채호에 있어서는 고대에서 가장 강성한 종족이 주종족으로 중요시된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사회과학적 민족형성론이나 역사적 사실의 연구결과와 완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견해는 한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시민적 사회과학인 사회진화론의 논리, 즉 강대한 종족의 정복에 의한 고대 문명국가 형성론을 그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시대의 자주부강한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그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함에 있어서 사회진화론에 의거한 진화사관을 수립하여 적용했으며, 인류 역사가 국가생활의 발달의 측면에서는 ① 추장시대 ② 귀족시대 ③ 전제시대 ④ 입헌시대의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일부의 역사학도들이 단재(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나 ‘주족(主族)-객족(客族)’ 구분론을 두고 신채호가 중세유가적 정통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관찰이라는 사실이다. 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 등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의거하여 나온 학설이 아니라 시민적 사회과학인 사회진화론과 시민적 근대민족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나온 것이었다. 또한 그의 ‘주족-객족’ 구분론은 본질적으로 시민적 근대민족주의에 기초한 강렬한 ‘민족적 주체성’을 역사서술에 투사한 것이었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은 ‘국토’ 문제에 있어서 만주를 시종일관하여 한국민족 형성의 구성요소 안에 포함하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만주는 우리 국토의 일부이며 한국민족 구성요소의 한 부분인 것이었다. 신채호가 이같이 만주를 우리 민족의 국토로 본 사실은 상호보완적으로 그의 고대 사관과 고대사의 구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여-고구려 주족론’이 만주를 우리 국토로 발견하게 함과 동시에 만주를 국토로 보는 관점이 부여-고구려 주족론에 대한 그의 입론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한국 고대사의 영역과 주 무대를 지리적으로 반도로부터 만주의 넓은 대륙 벌판으로 옮겨놓는 작용을 했으며, 우리나라 고대사를 더욱 웅장하게 만들게 하였다.
  단재(신채호)의 이러한 관점은 또한 그 후 김춘추의 삼국통일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데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후 한국 역사에서 요동과 만주를 수복하려는 운동과 인물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중요시한 관점을 낳도록 했음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최영을 한국 역사상 삼걸의 하나로 보는 신채호의 관점도 물론 이와 관련된 것이다. 신채호의 이러한 관점은 또 발해국을 재발견하여 국사에 편입하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기를 ‘양국시대’라고 보는 독특한 그의 사론을 정립케 하는 데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발해를 국사에 편입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은 아니고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등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한국 역사에의 발해의 중요성에 대한 신채호의 강조와 그 역사적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매우 강도가 높으며 이례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신채호가 만주를 우리 국토 안에 포함시켜 강조한 사실이 비단 고대사의 재구성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만주를 국권회복운동 기지로 설정하려는 신채호의 현실적 의도가 강력하게 투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독사신론』을 쓸 무렵 이미 만주 이주민들에게 만주가 한국 국토의 일부임을 설명하면서 그곳에서 민족문화를 간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몽하였다. 
  여섯째,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통하여 민중에게 ‘민족주의’·‘애국심’·‘민족적 자부심’을 교육하고 배양하려 하였다. 그는 역사가의 취미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나약한 자를 일어서게 하고 완매(頑昩)한 자를 깨우치게 하는 역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바로 계몽사학의 강조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모든 목표의 초점을 국권회복에 두었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애국심’·‘민족주의’·‘자강’·‘용기’·‘영웅적 투쟁’·‘발분’을 고취하는 애국계몽 사학을 주장하고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신국민’·‘애국심’·‘민중’이 강조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웅’·‘위인’의 행적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채호의 애국계몽사학의 특징 때문이었다.
  일부의 역사학도 중에는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을 쓸 무렵에 몇 개의 영웅전을 쓴 사실과 그 내용에 주로 큰 인상을 받고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영웅중심 사관’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피상적 관찰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재(신채호)는 예컨대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을 번역한 데 이어서 우리나라 역사상의 삼걸로 『수군제일위인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1908),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1909),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1909)을 썼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민중에 대한 계몽과 교육을 목적으로 한 저작이었다. 정작 단재(신채호)의『독사신론』의 내용은 결코 영웅주의 사관에 지배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시종일관하여 시민적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한 민족주의 사관이 본질적으로 관철되어 있다.
  단재(신채호)가 영웅·위인들의 전기를 쓴 것은 당시 국권회복의 목적과 관련하여 한국의 국민들이 낱낱이 ‘신국민’들이 되고 청년들이 과거의 영웅·위인들의 행적을 학습해서 낱낱이 무수한 신영웅들이 되어 국권을 되찾는 데 영웅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계몽한 교육상의 목적 때문이었음을 거듭 지적하고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단재(신채호)가 정작 『독사신론』에서 때때로 논급하는 영웅에 대한 찬양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학이 영웅의 역할을 주목하는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은 주로 고대사를 다룬 사서이다.
  단재(신채호)는 고대에는 한 나라의 원동력이 한둘의 영웅호걸의 지휘 여하에 달려 있었으나 자기의 시대에는 한 나라의 흥망은 국민 전체의 실력에 있고 한둘의 호걸에 있지 않으며, 만일 한둘의 영웅이 나와서 나라를 구제해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까지 단언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서 고대에 있어서는 근대와는 달리 영웅호걸의 역할이 매우 큼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대사를 다룬 그의 『독사신론』에서 관점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족이며 관철되고 있는 것은 시민적 민족주의 사관인 것이다. 당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기에는 그의 사관으로서의 민족주의 역사관과 교육목적의 영웅전기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을 쓴 애국계몽운동기에는 이미 신국사서가 다수 간행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신채호가 이러한 신국사교과서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던 측면은 영웅숭배라든가 고증이 부족한 점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강조한 민족주의 역사관과 민족적 주체성이 부족하다고 본 점들이었다.
  일곱째, 단재(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쓸 무렵에 이미 연대나 기술하며 인명·지명이나 기술하는 역사를 반대하고, ‘민족진화’의 상태를 기술하며 국가치란의 인과를 분석하는 역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단재(신채호)가 역사의 근대과학화 또는 사회과학화를 주장하고 당시의 최신의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여 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기술하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가장 많이 원용한 당시의 진보적 사회과학이론은 허버트 스펜서·벤자민 키드 등의 사회진화론과 서구의 지리환경영향론과 우리나라의 전통적 역사지리론을 종합하여 그 자신이 발전시킨 지리영향설 등이었다. 당시 사회진화론이나 지리영향설 등은 서구에서도 역사연구에 널리 원용되고 있던 대표적인 시민적 사회과학이론이었다.
  단재(신채호)는 사회진화론과 지리영향설의 큰 영향을 받고 역사에 있어서의 진화사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고대사 기술에서도 민족이 진화·진보해가는 과정을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단순한 사실의 서술에 그치지 아니하고 당시의 사회과학이론에 기초하여 집요하게 사실의 인과분석을 추구하였다. 이 점이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그 이전 및 동시대의 다른 국사서들과의 현저한 차이점이다. 신채호에 있어서는 고증은 역사서술의 준비단계이고, 인과분석을 하는 ‘해석’ 사학에 치중하여 『독사신론』을 씀으로써 한국에서 시민적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한국에서 근대민족주의 국사학을 성립시킨 업적으로서 1908년의 『독사신론』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1931~1932년에 간행된 그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서에서도 우리는 역사주의적 고찰을 전개하여 각각 그 역사적·사회적 역할의 다름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하여 지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의 기본 뼈대는 이미 『독사신론』에서 만들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사신론』은 그 내용과 역사관이 근대국사학을 성립시킨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신역사’였기 때문에, 신민회 및 청년학우회 기관잡지로 역할하던 최남선 관리의 잡지 『소년』제3권 제8호(1910년 8월호, 이탈리아 재건영웅 카블 100주년 기념호)에「국사사론[國史私論(고대)]」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가들과 선각자들이 『독사신론』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단기 4244년(서기 1911년) 10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인소년서회(在美韓人少年書會)에 의해 순국문(한글전용)으로 발행되었다. 해외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역사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순국문으로 발행되어 널리 애독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단재신채호전집』제3권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 『신한국보(新韓國報)』에 연재된 『독사신론』, 잡지 『소년(少年)』에 전재된 『국사사론』, 그리고 재미한인소년서회의 순국문판 『독사신론』을 원문대로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2.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敍言)」은 단재(신채호)가 『국사신론』을 발표한 직후인 1909~1910년 망명 직전에 집필하다가 중단된 『대동사천년사(大東四千年史)』의 첫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상고사』(1924년경 집필) 총론에서 거금(距今)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하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지상에 발표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중국식)의 연의(演義)를 본받은 비역사 비소설인 『대동사천년사』란 것을 짓다가 양역(兩役)이 사고로 인하여 중지되고 말았다고 기록하였다. 단재(신채호)가 여기서 짓다가 중단했다고 하는 『대동사천년사』의 이미 지은 부분이 이번에 새로 전집편찬위원회가 발굴한 『대동제국사서언』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도서인 이 책은 구한말~일제강점기 초기 어떤 이가 단기 4248년(서기 1915년) 을묘 6월에 『신채호저·무애산고(無涯散稿)』라는 표제로 단재(신채호)의 구한말 작품 몇 점을 등사로 필사해서 모아 놓은 필사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이 작품이 단재(신채호)의 저작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대동제국사서언』에 수록된 목차와 내용 범위는 다음과 같다.

  一. 국사는 국민의 필수물
  二. 구사가의 류견(謬見)
  三. 금일 저사(著史)의 곤난
  四. 본사(本史) 기(其) 수채(搜採)의 재료
  五. 국명
  六. 기원
  七. 시대구별
  八. 본론

  단재(신채호)는 자신을 ‘신사씨(新史氏)’라고 호칭하면서 4천년 통사를 쓰려니 대표적 국명이 마땅치 않아서 편의상 ‘대동’을 택하여 쓴다고 하였다. 서언의 「기원」까지는 내용의 문제의식이 『독사신론』의 문제의식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중복을 피하여 여기서는 「시대구별」부터 간단히 해설하기로 한다.
  단재(신채호)는 『대동사천년사』를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였다.
 
  ① 태고사 : 단군 건국부터 삼왕조 분쟁에 지함.
  ② 상세사 : 삼왕조 분쟁부터 발해 멸망에 지함.
  ③ 중세사 : 발해 멸망부터 만주 입구(入寇)에 지함.
  ④ 근세사 : 만주 입구부터 불구(佛寇) 격퇴에 지함.
  ⑤ 최근세사 : 불구 격퇴부터 금일에 지함.

  이어서 단재(신채호)는 태고민족사 부문을 다시 다음과 같이 6기(期)로 구분하였다.
 
  제1기 : 고립시대 - 역 각 개인 경쟁시대
  제2기 : 족장시대 - 역 각 가족 경쟁시대
  제3기 : 추장시대 - 역 각 부락 경쟁시대
  제4기 : 신국시대 - 역 각 신권 경쟁시대
  제5기 : 봉건시대 - 역 각 군웅 분치시대
  제6기 : 귀족시대

  단재(신채호)의 태고사의 이 시기구분은 구한말에 단재(신채호)가 인류사를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① 추장시대 ② 귀족시대 ③ 전제시대 ④ 입헌시대를 거치면서 진화됐다고 설명한 틀 가운데 ① 추장시대와 ② 귀족시대 이전까지의 역사를 세분해서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본론에 들어가서 「동방고대의 각 인종」을 서술했는데, 편찬위원들 사이에 이 부분이 독립논설이라는 주장도 있어 합의가 되지 않았으므로 「동방고대의 각 인종」은 전집 제6권 「사론·논설」편에 수록하기로 했다.

  3.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일까지, 그리고 이듬해 5월 27일부터 5월 31일까지 모두 40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1932년에 활자화되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집필연대는 1910년대의 작품이다. 단재(신채호)의 연보에 보면 1915년에 만주 거류 동포 계몽을 겸해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재로 『조선사』를 발간했다고 했는데, 그 일부가 『조선상고문화사』가 아닌가 추정된다. 동창학교는 만주 환인현에 윤세복[尹世復(후에 대종교 3세 교주)]이 세운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동포 교육을 위한 학교였다.
 『조선상고문화사』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단재(신채호)가 1910년대에 서술한 ‘고조선 역사’이다. 이 저서는 단군의 건국 직전에 중단된 『대동제국사서언』에 이어지는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다음과 같이 5편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제1편 : 단군시대
  제2편 :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
  제3편 : 아사달왕조 시대와 단군 이후의 분열과 식민지의 성쇠
  제4편 : 진한의 전성과 대외전쟁
  제5편 : 조선열국 분쟁의 초기

  제1편 「단군시대」에서는 서언과 같은 편인데, ‘조선’이라는 이름의 뜻과 조선 역대문헌의 화를 입음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조선’은 음이 ‘주신(珠申)’과 같고 또 ‘숙신(肅愼)’과 같으니, 조선=주신=숙신이 한 나라였고 동일한 기원의 국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고조선은 3경5부제를 실시했는데, ‘고구려’·‘고려’ 등은 단군조선의 중부의 이름이라고 지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지금의 하북성·요서·요동지방에 진한·변한·마한의 삼한(북삼한·전삼한)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단군조선의 영역 안이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북삼한이 뒤에 한강 이남의 남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하였다. 이 관점은 그의「전후삼한고」와『조선상고사』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단재(신채호)는 부여·낙랑 등도 단군조선의 3경9부 가운데 성 또는 부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신라·백제·가락·발해·태봉 등도 단군시대부터 명칭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조선 역대문헌의 화액(禍厄)」에서는 조선역사의 문헌들이 진개(秦開)·모돈(冒頓)·위만(衛滿)·유철[劉徹(한무제)]·설인귀(薛仁貴)·소정방(蘇定方)·호종단(胡宗旦) 등 외국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소멸된 것을 개탄하였다. 또한 그는 역대 문헌이 국내의 내란에 의해서도 소멸되고, 김부식 등 사대적 본국인들에 의해서도 다수 소실되었음을 각종 사례들을 들면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새벽하늘의 별처럼 드문 부족한 사료를 가지고서도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의 방법으로 실증적으로 조선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제2편 「단군조의 업적과 공덕」에서는 먼저 단군이 아들 부루(夫婁)와 신하 팽오(彭吳)를 황하 유역에 보내어 우(禹)에게 치수방법을 가르쳐 주어 우의 치수사업을 성공케 했음과 고대 중국과의 교류를 중국 고문헌 등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어서 단재(신채호)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이를 삼왕자라 하지 않고 구태여 ‘삼랑’이라고 하는 것은 단군을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고 기록한 곳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단군조선의 낭가신앙과 관련된 것이며, 신라의 ‘화랑’과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의 연원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신지(神誌)』는 단군의 역사서로서, 그 저자를 책 이름에서 취하여 신지라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고조선의 문자를 신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신지』의 역사가 곧 고조선 문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고조선 문자는『신지』역사책보다 훨씬 먼저 창제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고조선 문자를 만든 시조를 신지라고 하는 것은 정확치 않은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단군조선의 후예인 부여·고구려·신라·마한·가락·고려 등에서 10월 3일은 단군 탄신일이라 하여 기리고, 10월·3월·5월에 대회(대축제)를 여는 공통의 관습이 있게 된 것은 고조선 시기부터 형성된 관습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그 축제의 내용 관습에 ① 한맹(寒盟) ② 수박(手搏) ③ 검술 ④ 궁시(弓矢) ⑤ 격구(擊球) ⑥ 금환(金丸) ⑦ 주마(走馬) ⑧ 회렵(會獵) 등의 경기를 한 것은 시대에 따라 변경과 가감이 있을지라도 그 대부분은 단군왕조가 창시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단군의 통치방식은 5부를 두고 중부대가(中部大加)가 정권을 담당하되 3년에 한 번씩 교체하며, 동서남북의 4부의 제가(諸加)가 교대로 갈아들게 하는 방식이었다. 단군조선은 이 방식으로 아무런 쟁투 없이 거의 1천 년을 번영하였다. 이러한 단군의 5부의 통치방식은 상고시대의 중국에 수출되었다. 5부 대가의 별명을 ‘지’라고 했으므로 마가(馬加)를 ‘막리지(莫離支)’라고 했는데, 중국 상고의 ‘제(帝)’도 고조선의 ‘지’의 이름을 가져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단군 이후 1천여 년 동안의 고조선은 그 치제의 선미(善美)가 고대에 으뜸이었고 문화의 발달도 이웃 각 민족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제3편에서는 단군조선이 아사달로 천도한 아사달 왕조시대와 그 이후 분열, 그리고 중국에 있던 “식민지”의 성쇠를 다룬 편이다. 고조선은 단군 건국 이후 3경5부제를 실시하면서 1천여 년을 크게 번성하더니, B.C. 1334년(단군 1000년)경부터 B.C. 234년~B.C. 134년(단군 2100년~2200년) 사이에는 쇠미하게 되었다. 그 가장 큰 요인은 내부에서 갈등이 격화되어 불통일 상태에 빠졌고, 이를 통일할 큰 인물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단재(신채호)는 지적하였다.
  B.C. 1154년~B.C. 1144년경에 주(周)의 문왕(文王)이 은(殷)의 주(紂)를 쳐서 은이 멸망하고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오자 조선왕은 이를 받아들여 현재의 만주 광녕현(廣寧縣)에 있는 한 고을의 군수를 맡기었다고 단재(신채호)는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기자일읍수위설(箕子一邑守尉說)을 더욱 확고히 정립하고, 사마천(司馬遷)의 ‘무왕봉기자(武王封箕子)’ 등 각종 기자조선설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반고(班固)의『한서(漢書)』에서 이를 빼고 다만 “기자가 조선에 피지(避地)하였다”라고 하여 사마천을 비판한 것을 지지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고죽국(孤竹國)이 단군 5부의 후손으로서 조선의 9족의 하나인데 주 무왕이 고죽을 멸하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형제가 주의 녹(祿)을 거절하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음은 그가 조선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당시 조선족이 식민하여 가장 번성한 곳은 ① 산동(山東) ② 산서(山西) ③ 하북(河北) 지방인데 주 무왕이 이를 공격하여 이 지방에서 부여족(조선족)의 교민과 지나족[支那族(중국족)]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주의 대공격으로 산동지방에 있던 조선족의 식민국인 엄(奄)과 우(嵎)는 싸웠으나 패전하여 망하고 내(萊)는 수백 년간 저항하면서 중국족인 제(齊)와 서로 대치하였다.
  회하(淮河) 부근에서는 조선족의 서국(徐國)에서 서언왕(徐偃王)이 나와 크게 번영해서 그에게 조공하는 제후들이 36국에 달하게 되었다. 주가 비밀리에 초(楚)와 동맹을 맺고 조선족의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공격하여 결국 당하지 못해서 서국도 패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산동·회하지방의 고조선족 소국들의 역사를 쓰기 위해 실제로 이 지방을 답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는「대서제국(大徐帝國)의 흥망」이라는 절에 “팽성(彭城) 등지에 철문관(鐵門關)·주마당(走馬塘) 등의 지명이 있는데, 본토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양지(兩地)는 다 서언왕의 말로의 유적이라. 철문관이 명말부터 인민이 교통의 불편으로 말미암아 전체를 파고 뚫으므로 그 유적을 찾을 수 없으나, 고대에는 양석(兩石)이 좌우에 우뚝 서서 철문과 같은 고로 철문관이라 이름하며, 그 안에는 사면이 꽉 막히고 수백가의 살만한 벌이 있는데, 언왕(偃王)이 이 속에서 초병(楚兵)에게 피위(被圍)되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감사대(敢死隊)로 선봉을 삼아 관문에 나와 주마당에 이르러서는 말타고 달린 고로 ‘주마당’의 이름을 얻음이라 하더라.”라고 서술한 곳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제4편 「진한의 전성(全盛)과 대외전쟁」에서는 고조선의 요서지방의 구역에 진한(진조선)이 발흥하여(전삼한설) 중국의 제(齊) 등과 싸운 사실을 서술하였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고조선은 아사달 왕조부터 통일이 깨어져 열국이 나뉘어 다투었으므로 해외 식민의 여러 소국들이 비록 지나(중국)족의 무력 공격을 만나도 이를 구원할 겨를이 없다가 요서지방에 진한의 진왕이 나서 B.C. 634년에 무력으로 조선열국의 맹주가 되어 고조선의 제왕(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지나(중국)족에서는 제의 환공(桓公)이 재상 관중(管仲)을 얻어 부강해지자 맹주가 되어 지나(중국)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두 민족의 각각의 연합군이 연경(燕京)지방에서 만나 민족적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진한(진조선)의 진왕이 B.C. 706년에 연의 항복을 받고 남으로 나아가 제를 치니 제가 진왕에게 굽히어 세공을 바치고 현제(玄帝)의 존호를 올리매 이에 진한의 세력이 지나(중국)에 덮이어 주(周)·노(魯)·위(衛)·조(曺)·송(宋)·허(許) 등 지나(중국)족의 열국이 제를 따라 진한을 상국으로 높이니, 이 시기가 진한의 전성시기였다.
  단재(신채호)는 여기서 ‘기조(箕朝)’의 전설이 있었다고 했으나, 뒤에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이 부분이 잘못 기술된 것이라고 모두 취소하였다. 즉 전사(『조선상고문화사』)에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기자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됨이 아니요,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나니 이는 제2편 제2장에 기재하려니와, 이제 사실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하노라.”라고 서술하였다.
  진왕이 제를 친지 44년 후인 B.C. 663년, 이미 진왕은 죽고 그 후손의 통치기에, 제 환공이 고조선족의 내(萊)를 급습하여 멸망시키므로 진한의 왕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제를 공격하니 양 민족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단재(신채호)에 의하면 이 전쟁은 후에 고구려와 수의 전쟁보다도 더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패는 결정되지 못했으나 제는 진왕에게 현제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지나(중국)족의 연이 힘을 길러 연의 진개(秦開)가 B.C. 334년에 고조선의 진한을 공격하여 고조선의 고죽(孤竹)과 선비(鮮卑)를 잃게 되었다. 여기서 고조선이 난하 이서지방을 연에 잃게 되었다. 뒤이어 진이 지나(중국)족을 통일하면서 B.C. 254년에 연을 멸하고 만리장성을 만들어 고조선 세력과의 경계선을 만들었다.
  제5편 「조선열국 분쟁의 초기」에서는 고조선의 속국이었던 흉노(匈奴)가 자립하여 지나(중국)족들을 위협하고, 지나(중국)에서는 한(漢)의 유방(劉邦)과 초(楚)의 항우가 대립하다가 한이 통일한 시기의 고조선의 상태를 서술하였다. 일찍이 진시황이 지나(중국)족을 통일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이 진시황과 협정하여 중립공지(中立空地)를 설정했었는데, 진이 망했으므로 부(否)의 아들 준왕(準王)은 이 협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만(衛滿)이 망명해 오므로 준왕은 중립공지에 받아들여 서번(西藩)을 삼았더니, 위만이 망명자를 모으고 밖으로는 흉노와 맺어 반란을 일으켜서 준을 공격하고 만주 요동의 광녕현에 있는 준의 수도(북평양)를 점거하였다. 위만 조선이다. 준왕의 세력은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세우니 이에 따라 진한·변한도 남천하여 후삼한시대가 시작되었다. B.C. 109년에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의 영토였던 요동·요서지방에 진번(眞番)·임둔(臨屯)·현토(玄莬)·낙랑(樂浪)의 한의 4군을 설치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위만조선의 영토는 압록강 이북 요동·요서지방이었으며 그 수도도 요동의 광녕현이었고, 한사군도 모두 압록강 이북의 요동·요서에 있었다고 논증하였다. 이어서 부여에서 발흥한 고구려가 요동·요서에서 설치된 한사군을 쳐서 멸하고 동부여의 항복을 받으며 남평양에 수도를 두었던 동남의 낙랑국[국왕 최리(崔理)]도 멸하여 매우 강성한 나라로 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여기까지 쓰고 ‘미완’이라는 글자와 함께 중단되고 있다. 단재(신채호)의 그 후의 집필은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새로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그 동안 연구한 결과와 함께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이미 상세히 서술한 부분들은 간략히 요약하고, 새로 연구한 부문은 상세하게 서술 가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선상고문화사』가 1910년대에 먼저 저술되고, 그 다음에 1910년대 말~1920년대 초기(1924년경)에 걸쳐 『조선상고사』가 후에 저술된 것을 알 수 있다. 단재(신채호)의 『조선상고문화사』는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체계화한 고조선사의 고전이라 할 것이다. 
  단재(신채호)의 『독사신론』·『대동제국사서언』·『조선상고문화사』는 (『조선상고사』와 함께) 그가 근대역사학의 방법과 역사관으로 한국민족사의 초기형성과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체계화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제4권 역사
乙支文德
水軍第一偉人李舜臣
수군제일 거록한 인물 이순신전
東國巨傑崔都統
동국에 제일영걸 최도통전
伊太利建國三傑
최홍규|경기사학회장·전 경기대 교수

1. 영웅 전기물의 저술 배경과 의의

  본권에 수록된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한글판 『을지문덕』, 국한문본 『동국거걸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水軍第一偉人李舜臣)』,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국한문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등의 저작은 1900년대 중·후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역사학자로 발신(發身)하여 활동하던 초기 역사관과 애국계몽사상가로서 활동하던 시기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특징과 편린을 선명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전기물들이다.
  발표 시기면에서 보면, 1907년 10월 25일 서울 광학서포(廣學書舖)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태리건국삼걸전』(양계초의 원저명은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이 비록 역술본(譯述本)이긴 하나 가장 빠르고, 처녀작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1908. 5. 2~8. 18)과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1908. 6. 11~10. 24)이 각각 연재되고, 또 그런 와중에서 1908년 5월 30일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해 7월 5일 한글판 『을지문덕』을 잇달아 서울 광학서포에서 각각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의 무장 최영(崔瑩)의 영웅적 활동을 그린 『동국거걸최도통』이 역시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1909년 12월 5일에서 1910년 5월 27일까지 가장 뒤늦게 연재 발표됨으로써 고구려·고려·조선시대를 각각 대표하는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의 영웅전기 3부작은 비록 일부가 미완이긴 하나 신채호가 구상한 민족사적 3걸의 얼개가 대충 마무리된 셈이다.
  1900년대 중·후반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국사를 민족사로 파악하는 한편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이후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난극복과 한국사를 빛낸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애국심으로 무장한 영웅들의 역사전기물을 통해 역사자강·민족자강의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한의 희망」(1908),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1908), 「영웅과 세계」(1908), 「기회는 불가좌대(不可坐待)」(1908), 「20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1909), 「20세기 신국민」(1910) 등의 논설을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표하고, 앞의 역사전기물과 함께 일제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적 전야(前夜)나 다름없는 한말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국민적 영웅의 출현을 열렬히 대망하고 국민 모두가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해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불법적 강권으로 체결된 을사늑약과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순종에게 양위(讓位)한 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8월 구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민족적 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전후해서 일제의 식민지화 기도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고, 신채호·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 애국계몽사상가들의 활동이 전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된 1905년 전후 시기에 대한제국의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현실을 우리 민족이 직면한 최악의 역사적 위기로 파악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 국민이 좌절하지 말고 역으로 민족적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가운데 희망·애국심, 그리고 역사에 대한 원력(願力)과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많은 애국계몽 논설과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 이후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민족사적 3걸(傑)에 대한 역사전기물은 모두 자주독립된 민족국가 건설과 역사의 부활을 열렬히 희구하는 신채호의 역사의식과 시대적 처방전(處方箋)으로써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민족을 역사 주체로 인식하는 역사학자로서 그의 학문적인 사명감과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점으로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한말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침략으로 일찍이 우리 민족이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식민지 전야와 같은 민족적 위기를 노정(露呈)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현실을 해소하기 위한 혁명적 변화를 주도하면서 대세를 역전시킬 구국적 영웅의 출현을 열렬히 대망하면서, 그 모범적인 사례를 고대와 중세의 역사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의 역사전기물들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처한 대한제국기의 시대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애국계몽사상가로서 국민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하는 데 1차적 목표를 두고 있다. 아울러 그가 역사학자로서 발신하여 이후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창건하는 데 그 출발점이자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907~1910년에 발표된 신채호의 역사전기물에 대해 편의상 발표순에 따라 내용과 역사적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신채호가 애국계몽사상가·역사학자로서 1900년대 중·후반 대한제국이 처한 역사적 위기를 타개할 국민적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고, 국민 모두에게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분발할 것을 갈망하는 의도에서 역술된 책이 바로 『이태리건국삼걸전』이다. 1907년 10월 25일 서울 광학서포에서 본문 94면으로 발행된 이 책은 신채호의 처녀작과 같은 단행본 저술로써 원저자인 양계초[(梁啓超), 호 임공(任公), 1873~1930]의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을 번안, 장지연(張志淵)의 교열(校閱)로 출간한 것이다.
  이 역술본의 서문은 교열자인 장지연이 썼고, 수편(首篇) 서론(緖論)에서 종편(終篇) 결론에 이르기까지 모두 28절의 목차 아래 그 내용이 국한문 혼용의 논설체로 서술되어 있다. 원저자인 양계초는 일찍이 1898년 4월 강유위(康有爲) 등과 함께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고 국정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민족혁명을 고취하고 공화제의 필요성을 선전하면서, 그해 8월 강유위 등과 함께 무술정변(戊戌政變)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양계초는 손문의 혁명적 입장과는 달리 청조의 개조 강화를 주장했으며, 경학(經學)·사학·불교학 등에 박통하였다. 그의 저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한말 지식인들에게 민족자강사상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신민설(新民說)』과 『중국역사연구법』 등의 저술은 신채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채호는 역술본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과 결론에서 ‘무애생(無涯生)이 왈(曰)’이라는 그 자신의 관점과 평언(評言)을 붙여 한말의 위기적 현실에 빗대어 애국자 대망론을 펼치면서,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민족국가 통일운동기에 활약한 세 역사적 인물의 혁명적 위업과 애국적 활동을 소개하였다. 즉, 이탈리아 국민적 애국주의의 상징적 존재이자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운동을 주도했던 마찌니[瑪志尼(Giuseppe Mazzini, 1805~1861)], 가리발디[加里波的(Giuseppe Garibaldi, 1807~1882)], 카부르[加富爾(Camillo Benso di Cavour, 1810~1861)] 등 3걸의 활동을 통해 철저한 조국애와 민족주의 사상으로 근대 국민국가 건설운동에 헌신한 애국적 영웅의 표본으로 삼으려는 관점을 드러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혁명가 마찌니는 일찍이 카르보나리(Carbonari) 당원으로 입당, 뒤에 망명하여 마르세이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을 결성하였다. 그는 1848년 귀국하여 밀라노의 혁명에 참가한 뒤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등 통일 이탈리아 건설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정열적인 애국자 가리발디는 일찍이 청년 이탈리아당에 가입, 공화파의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1860년 ‘붉은 셔어츠대’ 1천여 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과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 사르디니아(橵的尼亞)왕에게 바침으로써 마찌니·카부르와 함께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통일운동의 3대 위인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독립운동가 카부르는 뒤에 사르디니아의 수상직에 올라 활약하였다. 그는 조국통일을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손잡고 1859년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뒤 롬바르디아를 해방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이탈리아의 완전 통일을 이루기 직전 애석하게도 별세하였다.
  이 역술본 역사전기물은 19세기 이탈리아의 국민국가 통일과정에서 활약한 세 영웅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철저하고도 탁월한 애국심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가를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국한문 혼용의 논설체로 서술한 것이다. 즉, 그들의 출생에서 성장과정,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 영웅의 생애와 활동상을 그 시대적 배경 하에 묘사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3걸이 단순히 근대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주도한 타국의 영웅으로만 그치지 않고, 1900년대 중반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을 척결하고 국운을 소생·부활시킬 민족영웅의 상징적 표본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데 번안자의 참다운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이 역술본에서 ‘무애생의 왈’이라는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과 평언을 붙여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펼쳤다. 그에 의하면 19세기 중반 당시 이탈리아가 당면한 역사적 조건이 20세기 초 식민지적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형편과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격차 또한 멀지 않고, 비록 타국의 과거사라 할지라도 그 역사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난 극복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짙게 드러냈다. 비록 이 역술본에서는 19세기 통일 이탈리아의 국민국가 건설과정에서 나타난 빈(wien)체제의 붕괴과정과 대한제국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에 대한 인식, 즉 제국주의적 국제정치상황 사이에서 노정되는 커다란 역사조건의 괴리 등에 대한 역사인식이 드러나 있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인식과 객관적 서술이 결여되어 있는 등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신채호가 일제의 악랄한 무력적 침략이 가중되는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통일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에 헌신한 세 영웅의 활동상이 크게 어필하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이탈리아 3걸의 생애와 활동상을 통해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고 자강론적(自强論的)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려 했다는 데 이 책을 번안한 역술자의 진정한 저술 의도와 목표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들 마찌니·가리발디·카부르 등 세 영웅의 생애와 애국적 활동을 이탈리아와 19세기라는 공간적·시간적 조건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민들에게 민족적 위기의 해소와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새로운 분발을 촉구하기 위한 1900년대 초 당시로써는 최초의 역사전기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이 세 영웅의 생애와 활동상을 곧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의 사회적·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상징적 구국의 영웅상(英雄像)으로 크게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역술자로써는 이 3걸을 통일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운동을 주도하며 헌신한 지역적·시대적 특수성이나 그 사례로 한정시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경쟁과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대한제국의 국운을 바로잡고 국권 회복(恢復)과 함께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한 민주공화의 정체를 골간으로 하는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열렬히 대망했다는 데 이 저술을 번안하게 된 배경과 동기가 있었다.
  신채호는 그 서론에서

  무애생(無涯生)이 왈(曰), 위재(偉哉)라 애국자(愛國者)며 장재(壯哉)라 애국자여. 애국자가 무(無)한 국(國)은 수강(雖强)이나 필약(必弱)하며, 수성(雖盛)이나 필쇠(必衰)하며 수흥(雖興)이나 필망(必亡)하며 수생(雖生)이나 필사(必死)하고, 애국자가 유(有)한 국은 수약(雖弱)이나 필강(必强)하며 수쇠(雖衰)이나 필성(必盛)하며 수망(雖亡)이나 필흥(必興)하며 수사(雖死)이나 필생(必生)하나니, 지재(至哉)라 애국자며 성재(聖哉)라 애국자여. 기국(其國)의 편토촌양(片土寸壤)이 무비(無非) 애국자의 완(腕)·비(臂)·지(趾)·지(指)로 소개척자야(所開拓者也)며, 기국의 척신신자맹(隻身身子氓)이 무비(無非) 애국자의 심혈누제(心血淚悌)로 소잉조자(所孕造者)며, 산하(山河)의 일초엽(一草葉)과 수저(水底)의 일어별(一語鼈)이 무비 애국자의 정신기백으로 소화육자야(所化育者也)며…

라고 열정적인 애국심과 헌신적인 애국자의 표본을 이 역술본 도처에서 발견하고 강조하려고 하였다.
  신채호는 이 책에서 헌신적이고 참다운 애국적 지도자의 출현은 민족자강과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필수요건이자 원동력임을 전제, 그 필요성을 크게 주장하고 있다. 이 역술본에서 신채호가 대망하는 애국자의 상(像)은 결코 입과 붓으로 그치는 형식적인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뼈·피·살갗·얼굴·모발 등 신체 각 조직조차 철저하리만큼 심신 모두가 애국심으로 절여지고 무장된 애국자였다. 즉 “와시(臥時)의 염(念)도 국야(國也)며 좌시(坐時)의 상(想)도 국야며 기가야(其歌也)도 국야며 기소야(其笑也)도 국야며 기곡야(其哭也)도 국야라”고 할 정도의 심신 모두가 민족애의 열정으로 점철(點綴)된 철저하리만큼 헌신적이면서도 식견이 뛰어난 애국자의 상(像)인 것이다.
  신채호는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 말미에서 이 책을 역술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간략히 밝혀 놓았다.

  오호(嗚呼)라. 문명의 등(燈)은 6주(洲)에 찬란하고 자유의 종(鐘)은 사린(四鄰)에 요란한데 아배(我輩)는 하죄(何罪)완대 독(獨) 차(此) 지옥(地獄)고 망산하이참목(望山河以慘目)하고 앙창천이비규(仰蒼天以悲叫)타가 유정(有情)의 일필(一筆)로 이태리 애국자 3걸의 역사를 술(述)하노니, 기(其) 국난(國難)이 여아상류(與我相類)하고 기(其) 연조(年祚)도 거금불원(距今不遠)이라. 기(其) 간고경력(艱苦經歷)이 방불왕래우오흉(彷彿往來于吾胸)하고 기성음소모(其聲音笑貌)가 돌올봉현어오전(突兀捧現於吾前)하는도다. 약(若) 차서(此書)의 인연과 차서의 소개로 대한(大韓) 중흥(中興) 삼걸전(三傑傳) 혹 삼십걸(三十傑) 삼백걸전(三百傑傳)을 경장(更張)하면 차(此)는 무애생 무애(無涯)의 혈원야(血願也)로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 세계의 선진 각국은 문명의 진보와 민주공화를 기반으로 한 자유가 날로 신장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만이 캄캄한 어둠 속에 놓인 채 망연자실해 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적 시대현실 속에서 근대 이탈리아 국민국가 건설운동에 헌신한 마찌니·가리발디·카부르의 그 영웅적 활동과 애국심을 통해 이를 본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국민의식 또한 크게 각성됨으로써 국난 극복과 우리나라를 중흥시킬 민족사적 영웅 3걸, 30걸, 아니 3백걸전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이것이 곧 번안자(무애생)가 의도한 피끓는 염원이라고 독자들에게 간곡히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국권극복을 선도할 수 있는 애국심에 투철한 민족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는 신채호의 염원과 찬송은 그의 시대가 당면한 사회적·역사적 현실의 특성과 요구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영웅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등 영웅사관(英雄史觀)에 기초한 그의 초기 자강론적 민족주의와 역사 민족주의의 발상과정과 그 사상적 특성·경향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이는 1900년대라는 간난과 위기의 시대를 만나 국민 모두에게 국권회복의 용기를 북돋고 자주독립의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 기본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바램을 강조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신채호의 관심은 통일 이탈리아 건설운동을 주도한 이들 3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지문덕·최영·이순신 등 투철한 애국심으로 대외투쟁에 승리, 조국 수호에 큰 역할을 한 민족사적 3걸에 대한 관심으로 전위(轉位)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참고로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28절, 본문 94면으로 구성된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편(首篇) 서론(緖論), 제1절 3걸 이전의 이태리 형세, 제2절 소년 이태리의 창립(刱立), 제3절 카부르(加富爾)의 궁경(躬耕), 제4절 마찌니(瑪志尼)와 가리발디(加里波的)의 망명, 제5절 남미주(南美洲)의 가리발디, 제6절 혁명 이전의 형세, 제7절 1818년의 혁명, 제8절 로마(羅馬)공화국의 건설과 멸망, 제9절 혁명 후의 형세, 제10절 산디니아(橵的尼亞)왕의 현명, 제11절 카부르의 내정개혁, 제12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1단, 제13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2단, 제14절 카부르의 외교정책 제3단, 제15절 이오(伊奧: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개전(開戰)의 준비, 제16절 이오(伊奧: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제17절 가리발디의 사직, 제18절 카부르의 재상(再相), 제19절 당시 남(南)이태리의 형세, 제20절 가리발디의 이태리 감정(戡定), 제21절 남북 이태리의 합병, 제22절 제1국회, 제23절 카부르의 장서(長逝), 제24절 가리발디의 하옥(下獄)과 유영(遊英), 제25절 가리발디의 재체(再逮), 제26절 이태리의 대일통(大一統)이 성(成)함, 종편(終篇) 결론.

3.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한글판 『을지문덕』

  신채호는 자강론적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대외전(對外戰)에서 한국사의 영광과 긍지를 선양한 삼국시대의 민족영웅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1908년 5월 30일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해 7월에는 한글판 『을지문덕』을 서울 광학서포에서 매당(邁堂) 변영만(卞榮晩) 교열로 각각 발간하였다.
  무애생(無涯生) 신채호의 필명으로 저술된 국한문판의 원제는 ‘대동사천재 제일위인 을지문덕 대동사천재(大東四千載) 제일위인(第一偉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이며, 권두에는 변영만·이기찬(李基燦)·안창호(安昌浩) 등의 서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본문 43면으로 이루어진 한글판에는 책의 맨 앞에 을지문덕의 입상 초상화가 덧붙여 있으며, 이들 인사의 서문이 모두 생략된 채 실려 있지 않다.
  먼저 변영만은 순한문체로 집필된 서문에서 고래로 우리나라는 정주(程朱)의 성리학과 한유(韓愈)·소식(蘇軾)·소철(蘇轍)·이백(李白)·두보(杜甫) 등 중국 당송(唐宋) 8대 가류의 문장만 읊조리며 의존하고 숭상하는 사대주의적 폐풍이 전해져 그 결과 날이 갈수록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이 쇠퇴하고 노예학(奴隸學)에 길들여지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살수(薩水)에서 수군(隋軍)을 격파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의 전기야말로 대동(大東) 4천년의 자주독립의 민족정신을 선양한 전국민의 필독서로서 우리나라 서적계의 효시를 이루는 역사전기물로 뜻깊은 회심의 쾌작(快作)이라고 상찬하였다.
  신채호의 벗인 이기찬 또한 그 서문에서 을지문덕이야말로 “우리 대동 4천여년 역사상에 제일되는 위인이니 그 독립적 기상(氣像)과 건투적 정신이 실로 우리 대동민족의 대표적 인물이며 모범적 인물이다”라고 전제, 영웅을 숭배하고 연구하는 자는 대영웅 을지문덕의 위업, 곧 그 ‘성공한 역사와 그 인격의’ 자취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저자의 웅혼탁영(雄渾卓瑩)한 문장으로써 윤색을 가하여 살수의 굉렬(轟烈)한 전황(戰況)과 을지공(을지문덕)의 심의(沈毅)한 인격을 묘사한” 신채호의 이 역사전기물이야 말로 그 독립적 기상과 건투적 정신을 국민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안창호는 해외 각국에서 워싱톤(華盛頓)과 나폴레옹(拿破倫)과 같은 영웅의 전기를 통해 수많은 후세의 영웅들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역대 우리나라는 을지문덕과 같은 민족적 대영웅의 기록과 사적이 미진하여 후세인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영웅의 활동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미진한 가운데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그 논단(論斷) 또한 매우 정밀하게 서술한 저자 신채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하여 이 역사전기물을 통해 “조국의 명예역사를 거(擧)하여 비열자(卑劣者)를 경성(警醒)함이며…선민(先民)의 위대사업을 찬(贊)하여 국민의 영웅 숭배심을 고취함이며…2천년 전의 풍운전쟁을 한가롭게 앉아 노래함이 아니라 열성적·모험적의 옛사람의 지난 자취를 묘화(描畵)하여 2천년 후 제2 을지문덕을 환기함이니…”라고 이 전기물의 시대적·계몽적 역할과 선구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당시 국난을 타개할 민족적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는 1900년대 위기적 시대현실 속에서 애국심 배양을 위한 그 계몽적 역할에 한결같이 주목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권두에 저자의 범례가 있고,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17장에 본문 7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 내용의 서술 체제는 관련 사료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논문에 가까운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의 차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론(緖論), 제1장 을지문덕 이전의 한한(韓漢)관계, 제2장 을지문덕시대의 여수(麗隋)형세, 제3장 을지문덕시대의 열국(列國)상태, 제4장 을지문덕의 의백(毅魄), 제5장 을지문덕의 웅략(雄略), 제6장 을지문덕의 외교, 제7장 을지문덕의 무비(武備), 제8장 을지문덕의 수완(手腕)하에 적국(敵國), 제9장 수구(隋寇)의 성세(聲勢)와 을지문덕, 제10장 용변호화(龍變虎化)의 을지문덕, 제11장 살수(薩水) 대풍운의 을지문덕, 제12장 성공 후의 을지문덕, 제13장 구사가(舊史家) 관공(管孔)의 을지문덕, 제14장 을지문덕의 인격, 제15장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을지문덕, 결론.

  먼저 저자는 범례를 통해 “우리나라 4천년 인물 가운데 그 웅위민활(雄偉敏活)한 수완을 발휘하여 굉대휘혁(宏大輝赫)한 공업을 세운 자를 헤아리건대 부득불 을지문덕에게 첫 손가락을 꼽을 터인데, 그럼에도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려 있는 을지문덕의 역사가 수십 귀절에 불과하니 이가 어찌 후인의 책임이 아니리오?”하고 영웅 경시의 풍조를 개탄하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에 관한 일련의 사적을 가능한 정밀하게 수집하고 널리 채록하여 사료에 입각한 충실한 ‘을지문덕전’이 되도록 노력했음을 밝혀 놓고 있다.
  이어서 저자는 본문「서론」에서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공업(功業)과 우리 민족성의 강용(强勇)함이 침략군 수군(隋軍)을 전멸시켜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의 영웅적 활동에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년동안 이소사대(以小事大) 사대주의에 찌든 우유(迂儒)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史籍)에는 위대한 영웅의 강의불굴(强毅不屈)의 역사는 거의 축소되거나 매몰 제외되어온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개탄하면서 일대 민족적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신채호는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발간 이후 그가 재직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1908. 5. 2~8. 18)에 국한문 혼용의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을, 역시 『대한매일신보』(1909. 12. 5~1910. 5. 27)에 국한문 혼용의 『동국거걸최도통』을 각각 연재 발표하는 등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을 한국사를 빛낸 민족사적 3걸로 간주하는 역사전기물을 잇달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한문에 소양이 없는 일반민중과 부녀층을 상대로 그들을 계몽하고 널리 읽히기 위해 1908년 7월 서울 광학서포에서 한글판 『을지문덕』을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한편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대한매일신보』(1908. 6. 11~10. 24)에 연재 발표하였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민족사를 빛낸 이들 세 영웅은 모두 수(隋)·명(明)·왜국(倭國) 등 침략적의 외세와의 투쟁에서 크게 승리한 민족적 위인들이며, 애국심으로 무장한 대표적인 구국의 영웅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단(但) 일국(一國)의 강토는 기국(其國)의 영웅이 신(身)을 헌(獻)하야 장엄케 한 자며 일국의 민족은 기국의 영웅이 혈(血)을 유(流)하야 수호한 자라. 정신은 산립(山立)이며 은택(恩澤)은 해활(海闊)이거늘 기국의 영웅을 기국의 민족이 불지(不知)하면 기국이 국(國)됨을 기득(豈得)하리오. 고로 대가(大家)의 사필(史筆)로 영웅의 진면목을 사전(寫傳)하며 재자(才子)의 사부(詞賦)로 영웅의 대공덕(大功德)을 찬미하고 노(爐)의 행(香)과 단(壇)의 고(鼓)로 영웅의 하강(下降)을 기도하며…내(乃) 아국(我國)은 영웅 숭배하는 근성이 하여시(何如是) 박약(薄弱)한지 금고무쌍(今古無雙) 진정영웅(眞正英雄)은 악착(齷齪) 사필하(史筆下)에 초초매장(草草埋葬)하고 기혹(其或) 영웅으로 신앙하는 자는 지록이마(指鹿爲馬)함과 무이(無異)하여 장혁악습(墻䦧惡習)으로 동족(同族)과 상전한 자도 왈(曰) 시영웅(是英雄)이라 하며, 낙천주의로 외구(外寇)을 미사(媚事)한 자도 왈 시영웅이라 하며, 심지어 적국창귀(敵國倀鬼)로 조국을 반서(反噬)한 자[설인귀(薜仁貴)의 유(類)]도 왈 시영웅이라 하야 인간 구비(口碑)와 한청유적(汗靑遺蹟)이 차유인(此類人)에게 상다(常多)하니 아(我)가 영웅 2자를 위하여 일곡(一哭)함이 가하도다.

  신채호는 이 책의 서론에서 “일국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고 영웅의 역사적 역할을 전제하면서 민족영웅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신앙을 크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왕의 사서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 수호에 헌신한 각 역사시기에 활약한 영웅의 행적이나 활동상을 소홀히 하거나 왜곡시켰음을 깊이 개탄하였다. 그는 역사전기 『을지문덕』의 서론과 결론에서 한민족의 국력이 강성하고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던 고대세계에 깊은 향수를 나타내면서, 민족사를 빛낸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고 하여 국권 회복과 민족 중흥의 구국적 영웅상의 도래(到來)를 열렬히 희구해 마지않았다.
  이처럼 신채호가 한말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과거의 영웅을 사(寫)하여 미래의 영웅을 초(招)하노라”고 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역사적 영웅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러한 영웅들의 존재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민족의 사표로써 각 시대마다 위기적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국민들에게 국난 극복을 위해 무궁하리만큼 용기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깊이 인식하였다.
  신채호는 역사전기 『을지문덕(乙支文德)』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한중(韓中)관계, 고구려와 수나라의 형세, 열국상태를 논설체로 개관하고, 을지문덕의 웅략·외교·무비·전술·인격 등과 살수대첩의 경과와 고구려의 승전 사실을 비교적 소상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612년(영양왕 23) 수양제(隋煬帝)의 총지휘하에 1백여 만에 이르는 대규모의 군단으로 고구려를 침공한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였다.
  즉, 수나라 육군이 고구려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성(遼東城)에 쇄도하여 포위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이 이끄는 3만 5천명의 별동부대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성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신책(神策)에 가까운 용변호화(龍變虎化)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압록강과 살수(현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이 들어왔다가 지치고 굶주리게 되어 헛되이 철수하던 중 마침내 살수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았다. 이 살수대첩은 수장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케 하고 수군 2,700명의 생존자만이 겨우 돌아갈 정도의 대전과를 거두어 고구려군에게 대승리를 가져다 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이 싸움에서 수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말미암아 내란으로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고대 한민족의 대외투쟁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을지문덕과 같은 영웅의 전기물을 낸 것은 일제의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기에 처한 시대현실 속에서 국민과 청소년들이 강용(强勇)한 영웅들의 사적을 본받아 외세를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위한 영웅적 투쟁의 필요성을 고취하기 위한 애국계몽적 관점이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애국적인 영웅들의 무장투쟁 활동을 통해서 애국계몽운동과 함께 당시 전개되고 있던 항일 의병무장투쟁을 고무 격려하려는 의도도 직·간접적으로 은밀하게 담겨져 있었다. 일례로 한글본 『을지문덕』에 서술된 다음과 같은 내용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무장투쟁의 당위성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고로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오, 나의 권리가 이미 떨어지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올 따름이며, 설혹 형극 속에 비참한 일을 당하여 회계에 부끄러움을 잠시도 참지 못할 경우를 당하면 마땅히 날마다 섶에서 자고 때때로 쓸개를 맛보아 칼과 피로 전국 인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하거늘…

  신채호는 한글판 『을지문덕』 결론 부분에서 “…지금은 일폭 금수강산이 파쇄가 되어 단군 이후에 사천년을 전래하던 중심기지까지 남에게 사양하여 우리집 형제들은 발을 디딜 곳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압록강 서편을 생각이나 하여 보리오. 슬프다. 이십세기 새 대한에 을지문덕의 탄생이 어찌 그리 더디뇨.” 하고 고대세계의 웅비(雄飛)했던 영웅의 활동과 현재의 암담한 역사적 상황에 대비하면서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 책 말미에 “슬프다. 만일 다른 나라의 진보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진대 중고시대에 그렇게 강한하던 민족이니 지금 당하여 세력이 마땅히 세계에 으뜸이 될 것이어늘 무슨 연고로 그 타락한 경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나뇨. 내 이제야 알괘라. 그 나라 인민의 용맹하고 나약함과 넉넉하고 용렬함은 전혀 그 나라에 먼저 깨달은 한 두 영웅이 고동하고 권장함을 따라서 진퇴하는 바로다” 라고 식민지 전야나 다름없는 위기의 시대를 구원할 민족영웅의 메시아적 역할을 대망하는 영웅사관의 일단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하였다.

4.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水軍第一偉人李舜臣)』과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신채호가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한글판 『을지문덕』 발간에 이어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필명을 써 『대한매일신보』(1908. 5. 2~8. 18)에 국한문 혼용의 역사전기물로 연재 발표된 것이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이다. 이어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민중과 청소년·부녀층을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을 국문판 『대한매일신보』(1908. 6. 11~10. 24)에 잇달아 연재 발표하였다.
  먼저 국한문 혼용으로 서술된 『수군제일위인이순신』의 차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서론(緖論), 제2장 이순신의 유년(幼年)과 급(及) 기(其) 소시(少時), 제3장 이순신의 출신과 기후곤건(其後困騫), 제4장 방호(防湖)의 소역(小役)과 조정의 구재(求材), 제5장 이순신의 전역(戰役) 준비, 제6장 부산해(釜山海) 부원(赴援), 제7장 이순신의 제1전玉浦, 제8장 이순신의 제2전唐浦, 제9장 이순신의 제3전見乃梁, 제10장 이순신의 제4전釜山, 제11장 제5전 후의 이순신, 제12장 이순신의 구나(拘拿), 제13장 이순신의 입옥(入獄)·출옥(出獄)간에 국가의 비운(悲運), 제14장 이순신의 재임(再任) 통제사(統制使)와 명량(鳴梁)의 대전첩(大戰捷), 제15장 왜구의 말로, 제16장 진린(陳璘)의 중변(中變)과 노량(露梁)의 대전(大戰), 제17장 이순신의 상환(喪還)과 급(及) 기(其) 유한(遺恨), 제18장 이순신의 제장(諸將)과 공의 유적(遺跡) 급(及) 기담(奇談), 제19장 결론.

  한편 신채호는 국한문본 『수군제일위인이순신』 서론에서,

  오호(嗚呼)라. 도국수종(島國殊種)이 대대(代代) 한국의 혈적(血敵)이 되어 일위상망(一葦相望)에 시선(視線)이 독주(毒注)하고 구세필보(救世必報)에 골원(骨怨)을 심각(深刻)하여, 한국 사천재(四千載) 역사에 외국 내침자를 역수(曆數)하면 왜구(倭寇) 2자가 기호(幾乎) 십지팔구(十之八九)에 거하여…

라고 하면서, 역대 왜구의 침략을 구체적으로 예거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의탁하여 한반도를 무력으로 보호국화한 뒤 식민지화 기도를 획책하는 1900년대 초 일제의 침략적 마수(魔手)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신채호는 이어서 역사상 일본과의 대외전에서 승리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신라 태종, 고려시대의 김방경(金方慶)과 정지(鄭地), 조선시대 이순신의 위업을 열거하면서 특히 이순신을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대일전을 승리로 이끈 탁월한 민족사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다시 이 책의 결론에서 충무공(忠武公)을 영국의 넬슨[乃利孫(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과 견주어 그 위대성을 평가한 다음, “오호라, 영웅의 명예는 항상 그 나라의 세력을 따라서 높고 낮음이로다”라고 하여, 충무공보다 넬슨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까닭을 막강한 군사력과 국력의 신장(伸張) 여하에 따라 평가되고 있기 때문임을 상기시켰다.
  신채호는 계속하여 한글본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결론」에서 “대저 수군의 제일 유명한 사람이 있고 철갑선을 창조한 나라로 오늘날에 이르러 저 해군의 가장 강한 나라와 비교하기는 고사하고, 필경 나라라는 명색조차 없어질 지경에 빠졌으니…”라고 망국의 징후를 보이는 대한제국기의 심각한 나라 형편을 개탄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한말의 한심한 민족 현실과 고통 속에 헤매는 한국민의 일대 분발을 촉구하면서 “20세기 태평양에 둘째 이순신을 기다리자.”고 하며 제국주의가 발호하는 해양시대를 맞아 외경력(外競力)을 갖춘 새로운 민족영웅의 출현을 대망하였다.
  특히 신채호는 임진왜란이라는 7년전쟁기에 대(對)왜구 해전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이순신의 활약상과 전술에 주목하여 동서고금의 역대 인물들과 비교하여 충무공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즉, 이 전기물 제19장「결론」부분에서 강감찬(姜邯贊)·정지(鄭地)·제갈량(諸葛亮)·한니발(漢尼拔) 등 동서고금의 인물들과 비교하여 무장 이순신의 뛰어난 애국심과 전술전략을 높이 평가하였다. 다만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트라팔가르 앞바다에서 격멸한 영국의 넬슨 제독과 견줄만 하나 오히려 취약한 군비와 병력으로 해전을 승리로 이끈 명장 충무공의 전략전술과 사적이 크게 특기할 만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이순신전』이 널리 읽혀져 고통에 빠진 한국민들이 일대 분발하여 “형천극지(荊天棘地)를 답평(踏平)하며 고해난관(苦海難關)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을 간절히 희망하였다.

5. 국한문본 『동국거걸최도통(東國巨傑崔都統)』

  국한문 혼용의 『동국거걸최도통』은 고려 말 원(元)·명(明) 교체기에 마지막까지 고려왕조의 영광을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비운의 죽음을 맞은 무장 최영(崔瑩)의 사적을 논설체로 서술한 미완의 역사전기물이다. 이 전기물은 금협산인(錦頰山人)이란 필명으로 『대한매일신보』(1909. 12. 5~1910. 5. 27)에 연재 발표된 민족사적 3걸의 영웅전 가운데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이 영웅 전기는 저자 신채호가 1910년 4월 조국을 탈출하여 해외망명을 단행함에 따라 끝내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이 미완의 역사전기물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차례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緖論), 제2장 최도통 이전의 아족(我族)과 외족(外族), 제3장 최도통의 전반생(前半生), 제4장 지나(支那)의 풍운(風雲)과 최도통의 북행(北行), 제5장 최도통 북벌정책의 시착수(始着手)와 왕의 반복(反覆), 제6장 양(兩) 적국(敵國)의 교침(交侵)과 최도통의 재기(再起), 제7장 양차(兩次) 홍건적란(紅巾賊亂)의 최도통, 제8장 최도통의 어몽고책(禦蒙古策).

  신채호는 고려 말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과 새로운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국내 정세의 갈등 속에서 나라의 영광을 위해 북벌(北伐)을 꾀하고, 고려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과 왜구를 정벌하는 등의 활약을 한 무장 최영의 생애와 활동상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간단없이 고려왕조를 위협하는 국내외 환경 속에서 70평생을 통해 고려왕조의 존립과 국위 선양을 위해 동정북벌(東征北伐)의 무장활동과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을 선양한 최영의 강용(强勇)·청렴한 인간상을 바람직한 영웅상으로 인식, 그의 업적과 활동상을 크게 찬양하였다.
  신채호는 이 전기물 제1장 서론에서 고려 말 공민왕·우왕대에 침입이 잦던 왜구·홍건적·반란군 등을 토벌, 동정북벌의 애국적인 무장으로 명성이 드높던 최영을 “국가의 정신을 발휘하여 배외(拜外)의 완몽(頑夢)을 타파하고 아(我) 단군자손의 진면목”을 발휘한 거금 7백년간을 대표하는 역사적 위인으로 손꼽았다. 그는 『고려사』와 정도전(鄭道傳) 등이 최영의 북벌계획을 ‘효패(孝悖)’와 ‘광망(狂妄)’이라 폄하한 것을 노예두뇌의 소치라 크게 분개, 최영이야말로 부여족의 역사와 ‘고대 최명예적(最名譽的)의 역사’를 현양한 역사적 위인으로서 작금에 겪고 있는 ‘부여족의 고통’을 구원할 ‘절대거걸(絶對巨傑) 애국위인 최도통’이라고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최영은 일생을 통해 애국적인 탁월한 무장으로 외침과 내란을 평정한 후 만년인 1388년 관직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는 1374년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 1377년 육도도통사(六道都統使)·삼사좌사(三司左使),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 1388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활약한 국가 보위를 위한 대내외 무장활동에 크게 역점을 두어 이 전기물에도 ‘도통(都統)’이란 제호(題號)를 택해 쓴 것 같다.
  특히 신채호는 고려 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며 북변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8도도통사로 취임 활동한 사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최영이 우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李成桂) 등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요동 정벌이 좌절된 사실에 대해 신채호는 크게 애석해 마지 않았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이에 최영은 소수의 군사로 맞서 싸우다가 패전, 체포되어 공료죄(攻遼罪)로 참형(斬刑) 당한 이후 일반 민중들이 최영을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그 원혼(怨魂)을 기리고 있는 사실도 신채호에게 크게 어필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최영은 고려의 사직을 보위하려는 구파 세력의 마지막 보루로서 신흥사대부들이 후원하는 가운데 신진세력 이성계의 군벌(軍閥)과 대결, 시종일관 고려왕조를 지키려 한 강용·청렴한 장군이었다. ‘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의 유명한 속설이 후세에까지 유전할 정도로 청렴·강직했던 최영의 죽음과 함께 고려왕조도 종말을 고했으며, 그의 원혼은 후세인들의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민중들의 뇌리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었다.
  신채호는 이 미완의 전기물을 통해 최영이 살았던 고려 말의 사회를 “전국 인심이 부패비열의 극도에 달했던 시대”라 보고 애국적 열정과 신념으로 외침과 내란을 평정하는 데 헌신한 무장 최영의 사적을 역대 고려왕조를 대표하는 탁월한 역사적 위인으로 평가하려 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이 전기물은 1910년 4월 신채호의 해외망명으로 인해 고려 공민왕대 대몽(對蒙)정책과 대(對)홍건적·왜구정책에 골몰하는 최영과 정세운(鄭世雲)·승현린(僧玄麟) 등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제8장 최도통의 여몽 고책」(『대한매일신보』, 1910. 5. 27)을 끝으로 더 이상의 집필이나 신문 연재가 중단,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미완의 역사전기는 앞서 집필 발표된 을지문덕·이순신 등의 전기물이 그러하듯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논설체로 서술되었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된 목차는 크게 서론부와 대내외의 역사적 상황에 대처하는 최영의 영웅적 활동과 사적을 평면적으로 서술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고려 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국내외 정세, 곧 원명(元明)교체기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애국적 무장 최영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내란을 평정하는 가운데 대원(對元)·대명(對明)의 북벌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그의 군사활동과 정치적 지도력, 그리고 구국영웅으로서의 고뇌·갈등 등이 강조되어 있다.

6. 역사전기물과 영웅사관(英雄史觀)

  신채호가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 간행 이후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역대 영웅들의 사적을 전기화하려 한 것은, 한국사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자긍심에 기초하여 1900년대 초 민족·국가·역사자강사상을 고양시키려는 데 출발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전기물들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읽혀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한국민의 일대 분발과 용기를 촉구하고자 하는 애국계몽적인 의도가 짙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신채호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국민적 애국심의 표본으로 부각시킨 민족사적 3걸은 모두 국난 극복의 영웅들이다. 이들은 특히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외경력(外競力)을 갖춘 무장들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한결같이 위기적 민족현실을 타개하고 반사대주의적인 자주독립의 민족의식을 선양·실천하려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두드러진 특성이 발견된다. 이는 일본·청국·러시아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 등 외세의 침략으로 시달리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성된 한말의 시대정세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일제의 무력적 침략으로 조성된 위기의 시대에 국권 회복과 국운 개척을 위한 상징적 표본으로 구국의 영웅상을 대망하는 신채호의 애국적 염원과 자강론적 민족주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유념해야 할 점은 1900년 초 애국계몽운동기 이후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에 출발점이 된 역사전기물과 영웅사관의 관련 문제이다.
  일찍이 신채호는 “영웅만이 역사를 창조한다”고 주장한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웅숭배론(원제 영웅 및 영웅숭배)』을 영문 원서로 읽을 만큼 역사의 중요성과 함께 영웅의 능력과 역사적 역할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그는 민족사적 3걸의 역사전기를 집필 발표할 무렵,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라. 고로 사필(史筆)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고 사필이 무(武)하여야 민족이 무(武)하는 배이어늘…
하고 상무적(尙武的)인 강건한 역사인식의 필요성을 요청하면서 민족과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였다. 그러한 신채호의 발상은 을지문덕·이순신·최영 등 민족사적 3걸 모두가 역사상 대외투쟁에서 승리한 애국적 무장이며, 각 전기물마다 그들의 영웅적 활동이 크게 강조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역사의 주체로서 영웅에 대한 인식은 앞의 역사전기물들에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같은 시기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영웅과 세계」(1908), 「기회는 불가좌대」(1908), 「20세기 신동국지영웅」(1909) 등 논설에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다. 이미 국한문판 『을지문덕』에서, “국가의 강약은 영웅의 유무에 있고, 장졸중과(將卒衆寡)에 부재하도다”라고 역사주체로서 영웅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한 바 있었다.
  또한 신채호는 한글판 『을지문덕』에서 “일국 강토는 그 나라 영웅이 몸을 바쳐서 위엄이 있게 한 것이며, 일국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 하여, 민족의 선양(宣揚)과 강토(疆土)의 보존은 모두 영웅의 활약 여하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고 국권회복운동에 진력할 구국의 영웅대망론을 펼쳤다. 한국사의 영광을 실현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영웅들에 대한 관심은 이 시대의 급박한 위기적 현실을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초기 신채호의 역사와 사회 주체에 대한 인식이 영웅사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의 영웅대망론은 당시의 일반 민중과 청년 학생들이 역사상 위대했던 영웅의 활동을 본받아 국민 모두가 각 분야에서 투사가 되어 참여하도록 그 분발을 촉구하려는 애국계몽적 발상이 내포된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신채호는 애국계몽 논설에서

  영웅이 기회를 조(造)하고 기회가 영웅을 산(産)하나니, 영웅과 기회는 호상대(互相待)하며 호상위용(互相爲用)하는 바로다. 수완(手腕)은 풍운(風雲)을 질타(叱咤)하고 일세를 뇌총(牢寵)하며 거적(巨敵)을 최(摧)하고 망국(亡國)도 흥(興)케 함이 시왈(是曰) 영웅이라.

고 썼다. 신채호가 말하는 영웅은 시대추세에 대한 능동적 대응과 창조적 역량의 발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기회와 영웅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망국도 부흥케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존재이자 외경력을 갖춘 민족영웅이었다.
  신채호는 또 다른 논설에서 “영웅자(英雄者)는 세계를 창조(創造)한 성신(聖神)이며, 세계자(世界者)는 영웅의 활동하는 무대라”고 하여 영웅의 존재와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이 시대는 영웅의 분몌흥기(奮袂興起)할 때”라고 보았다. 또, 20세기 초 현재의 국제 상황은 열국경쟁시대이므로 국가는

  반드시 세계와 교섭하며 분투함으로써 세계 속에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나라에 세계와 교섭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교섭할지며, 세계와 분투할 영웅이 있어야 세계와 분투하리니, 영웅이 없고야 그 나라가 나라 됨을 어찌 얻으리오.

라 하고 세계(외국)와 교섭하고 외경력 있는 구국적 영웅의 역할과 그 출현을 갈망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영웅이란 일차적으로 을지문덕·연개소문(淵蓋蘇文)·케사르·한니발 등 세계사와 한국사를 통해 혁혁한 대외투쟁과 영토 확장전에서 전공을 세운 무장들만의 대명사로서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종교가·정치가·실업가·문학가·철리가(哲理家)·미술가 등 각 분야의 걸출한 존재들로서 국운 개척에 헌신적인 역할과 위업을 남길 인물들을 지칭하였다.
  신채호의 영웅대망론은 뒤에 「20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이란 논설 속에서 한층 더 구체화되어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을 정립시키기에 이르렀다.

  고금 수천재(數千載)에 인문(人文)이 대벽(大闢)하며 동서 6대주에 철혈(鐵血)이 분비(紛飛)하여 목하(目下) 기절괴절(奇絶怪絶) 장절참절(壯絶慘絶)의 20세기 대무대를 개(開)하고, 세계 풍운아의 연극을 시(試)할새, 강자는 상(賞)을 몽(蒙)하여 점점(點點) 영토를 양반구(兩班球)에 기치(棊置)하며, 약자는 벌을 수(受)하여 애애도조(哀哀刀俎)에 재활(裁割)을 시공(是供)하나니 영웅 영웅 20세기 신동국 영웅이여.

  이처럼 신채호는 자기의 시대를 약육강식(弱肉强食)·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진화론적 원리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자행되는 시대로 보았다. 따라서 힘의 논리가 지배되는 국제질서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강론적 민족주의 사상 아래 외세의 도전에 대해 효과적인 응전을 수행할 영웅, 곧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20세기 초 탁월하고 진취적인 능력을 지닌 한민족의 영웅상을 고대하였다. 그는 워싱턴·카부르·마찌니·크롬웰·비스마르크 등 서구 각국의 근대 영웅들과, 광개토대왕·연개소문·최영·이순신 등 민족사적 영웅들의 역할과 위업을 열거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척결한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을 열렬히 대망하였다.
  한편 신채호는 1909년 신민회의 이론가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상, 입헌·공화의 국민주권사상 등 근대적인 정치의식이 성숙됨에 따라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서 ‘신국민(新國民)’상을, 사상적으로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대논설 「20세기 신국민」(1910)에서 중고적(中古的) 영웅의 한계를 지적, 20세기 국가경쟁의 원동력은 한둘의 영웅에 있지 않고, 정치·종교·실업·무력(武力)·학술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활약하는 국민적 역량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민 각계각층의 대내외적 외경력의 발휘를 촉구하였다.
  신채호는 그의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천연(天演)의 공례(公例)에 기초한 국민의 외경력이 요청되는 시대로 보고, 한둘의 영웅이 국운을 좌우하던 중고시대와는 달리 20세기는 국민 모두가 각 분야에서 외경력을 발휘할 때임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 초기에 부각시킨 영웅사관·영웅대망론이 군권시대(君權時代)의 역사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 것이라면, 이후 그가 내세운 새 시대의 국민적 영웅상(英雄像)인 ‘신국민’은 양계초가 『신민설』에서 제안한 ‘신민(新民)’과 마찬가지로 자강력(自强力)과 입헌·공화의 국가사상을 가진 ‘유신(維新) 국민’이었다. ‘신국민’이야말로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기풍을 지닌 새로운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장차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데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5권 신문·잡지
최광식|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1. 『신대한(新大韓)』과 신채호(申采浩)

  (1) 『신대한(新大韓)』의 창간 배경
  『신대한』은 1919년 10월 신채호에 의해 상해에서 창간되었다. 『신대한』은 신채호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창간한 잡지였다. 따라서 『신대한』은 신채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당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단재(신채호)는 조부의 권유로 당시 대한제국 관료였던 신기선의 제자가 되고 1898년 그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언론활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단재(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활약하면서 1905년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신민회에 가입했던 신채호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이 결정되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1917년에 잠시 조선에 잠입했던 일을 제외하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일생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과 함께 많은 저작활동을 병행했는데 『조선상고사』(1931년), 『조선상고문화사』(1931년)가 대표적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시작되자 신채호도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승만과의 불화로 인해서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1920년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신채호는 1921년 북경에서 잡지 『천고』 1권 1호부터 7호까지 발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만행을 언론을 통해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최광식,『역주 단재 신채호의 천고』, 아연출판부 2004). 한편 북경에 근거지를 둔 신채호는 다물단을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론에 입각한 ‘즉시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에는 의열단의 요청으로 그의 독립사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는 「조선혁명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후 단재(신채호)는 임시정부 창조파로 활동하게 된다.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 사상을 전환한 것은 1925년경으로 보인다. 1927년에는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발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만 기륭항으로 향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단재(신채호)는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년간의 옥고 끝에 1936년에 순국하였다(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4, 256~259쪽 ; 김삼웅, 「연보」, 『단재 신채호 평전』, 2005, 501~516쪽).
  『신대한』의 창간은 3·1운동 직후부터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가담하여 이승만의 독립청원운동에 반대하며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북경으로 떠났던 시기를 전후하여 창간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신채호는 북경에서 상해로 건너가 신익희·이광수·조소앙·최근우·이시영·신석우·여운형·조완구를 포함하여 29명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승만을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로 선출하자는 데 신채호는 반대했다. 단재(신채호)는 이승만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람이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 이에 신채호는 강한 불만을 표현했지만 그래도 임시정부에 계속 몸을 담고 있었다. 이후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통합임시정부가 재조직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임시정부 반대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1919년 10월 신채호는 신규식과 남형우의 지원을 받아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임시정부 쪽에서는 회유의 표시로 독립신문의 사장으로 신채호를 초청하고자 했으나 신채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단재(신채호)는 동지 30여 명을 규합하여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 탄핵 파면을 요청하는 등 점차 反임시정부 계통의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소크라테스형 지식인의 한 예-」,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240~241쪽).
  신채호가 이승만에게 반대한 것은 독립운동의 방법론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주된 독립운동 방법론은 이른바 ‘준비론’이었다. 당장의 독립이 어려우므로 민심의 통일과 지덕의 준비, 국민개조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승만의 경우에는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외교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노선 때문에 이미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박용만·신채호 등이 임시정부의 노선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임시정부의 혁신을 놓고 무장투쟁론은 전개하며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정부수립을 주장했던 ‘창조파’와 실력양성론과 외교론에 입각한 ‘개조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창조파에 속해있던 신채호는 임시정부와 마침내 결별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와의 결별 후 신채호는 다시 언론투쟁의 길로 뛰어들었고 『신대한』은 그 결과물이었다. 1919년 10월 28일 상해 보강리에서 1주 2회 발행을 원칙으로 하여 『신대한』을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보고서와 기록을 보면 임시정부는 『신대한』의 창립을 불편하게 여겨서 이를 폐간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일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사설에서 『독립신문』이 『신대한』을 불편하게 여겼다는 것은 충분히 감지된다. 『신대한』은 상해와 중국의 한인(韓人)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폭압을 규탄하고 또한 외교정책과 실력양성론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임시정부를 거세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무장투쟁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결국 『신대한』은 임시정부 쪽의 압력에 의해 1920년 초에 폐간되고 만다. 이미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였던 신채호는 『신대한』 폐간 직후 미련 없이 상해를 떠나 활동장소를 북경으로 옮겼다(김상웅, 「연보」, 『단재 신채호 평전』, 2005, 228~241쪽). 북경으로 옮긴 후 1921년 1월부터 7월까지 『천고』1권 1호부터 7호까지 발행하였다.

  (2) 『신대한(新大韓)』의 주요 내용
  현재 『신대한』은 창간호(1919.10.28)·제17호(1920.1.20)·제18호(1920.1.23)가 전해지고 있다. 『신대한』의 기사구성은 크게 3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해외의 사정을 알리고, 한국과 관련된 국내·외 사정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것이다.

  1) 1919. 10. 28일자 창간호
  창간호인 제1호의 1면은 창간사로 시작하고 있다. 창간사에서는 『신대한』이 창간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신채호는 사회주의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관계와 계급전쟁을 논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에서 ‘일본(日本)의 반성(反省)을 요구(要求)하자’나 ‘외교(外交)에 신뢰(信賴)하자’와 같은 방법론 등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한다. 말미에는 ‘칼’과 ‘붓’으로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자는 말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어서 3·1운동에 대한 견문록이 실려 있으며, 남대문정차장에서 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가한 폭탄테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 범인으로 밝혀진 의사(義士)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2면에서는 국민의회의 선포를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이들의 선포문과 포고문 그리고 각 정부 부처들의 명단까지 실어서 세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총독부가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탈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유도 자세히 설명하며 일본의 식민통치의 수탈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어서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삼국 동맹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중추원에서 제출한 ‘자치론’을 기사로 제시하고 있다.
  3면에서 주목해야 할 기사는 ‘간독원흉(奸毒元凶)한 왜(倭)의 정책(政策)’이다. 이 기사는 3·1운동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변화(헌병제의 철폐와 관직명 개칭)가 이전보다 더 가혹한 억압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이외에 3면에서는 주로 해외의 정치상황과 국내외 한인의 동향을 알려주고 있다.
  4면에서는 국내외의 한인들의 소식을 전하는 ‘우리 통신(通信)’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기사는 ‘국제연맹(國際聯盟)에 대(對)한 감상(感想)’이다. 여기서 신채호는 외교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다. “평화회의(平和會議)에서 그 성언(聲言)한대로 각민족(各民族)의 자결(自決)의 요구(要求)에 응(應)한 자(者)가 얼마나 되느뇨”, “민족자결(民族自決)을 허(許)함은 그 표면(表面)뿐이오 내용(內容)의 진의(眞意)는 열강국(列强國)의 이해(利害)를 (前提前提)함이 아닌가 하는 허다(許多)이 의문(疑問)이 있도다”, “그러니 우리 조선(朝鮮)은 강력자(强力者)에 대(對)한 요구(要求)보다 신기리(新氣理)에 향(向)하야 춤추며 평화신(平和神)에 대(對)한 환영(歡迎)보다 적(敵)에 향(向)하야 분국(奮國)함이 더욱 신성지고(神聖至高)한 의무(義務)라 하노라” 등의 내용은 국제연맹을 통한 독립청원이 얼마나 덧없는 행동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2) 1920. 1. 20일자 제17호
  먼저 1면과 2면에서는 각각 한 편의 장문 사설이 신문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1면의 첫 글은 ‘여론(輿論)을 제조(製造)할 일’이다. 이어서 1면에는 주로 독립운동이나 일본의 식민정책과 관련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기사들이 제시된다. 주요 기사로는 1년 전의 경성에서 ‘결의단(結宜團)’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어 ‘자산가(資産家)’들에게서 자금을 얻어내려다 실패한 사건[결의단(結宜團)의 조난(遭難)], 신의주의 감옥이 파옥된 사건[신의주파옥상보(新義州破獄詳報)]이 소개되고 조선의 현실과 관련해서는 일제 식민당국이 조선시대의 유습인 역둔토(驛屯土)를 임의로 처분하는 것을 비판하는 기사와 조선에 있는 여학교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움직임이 있는지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2면에는 ‘언(言)과 행(行)을 일치(一致)하여라’는 사설이 실렸다. 사람은 언행을 일치시켜 행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인데,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도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단재(신채호)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에 2면은 1920년 당시 전 세계적인 이슈의 하나였던 러시아 내의 적군(볼셰비키)과 백군 내전에 관한 작은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연해주까지 와 있었던 체코군인들의 귀환 문제, 미국·일본 등의 시베리아 출병 문제 등에 대한 기사들이다. 러시아의 내전은 동아시아와 관련 있는 연해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치열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그만큼 단재(신채호)의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3면의 머리에는 국제 소식들이 실려 있다. 국제연맹, 미국에서의 공산당 검거, 필리핀 독립 청원 문제, 애란(愛蘭, 아일랜드)의 독립투쟁, 이탈리아의 피우메 점령 소식 등이다. 3면 중간부터는 국내 소식과 독립운동에 관련된 기사들이 실려 있다. ‘대한적십자(大韓赤十字) 제일회회원(第一回會員) 대모집경쟁회(大募集競爭會) 총성적(總成績) 발표(發表)’, ‘북간도(北墾島)의 실황(實況)’ 등의 큰 기사들에서부터 국내외 등지에서 독립과 관련된 작은 기사까지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조선 국내에서 조선인 경영의 신문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기사도 보인다[소위(所謂) 한인경영(韓人經營)의 삼신문(三新聞)이 우장출세(又將出世)]. 3면 마지막에는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이라고 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한일관계사료를 여러 연대기에서 뽑아서 정리해 놓고 있다.
  4면에서 눈에 띄는 기사는 ‘왜정부(倭政府)의 간책(奸策)과 봉천(奉天)의 흑막(黑幕)’과 ‘한국(韓國)의 진상(眞相)(속續) (육六) 나단열·페퍼 저(著) 제오(第五) 겸구령(箝口令)’이다. 전자는 필자가 직접 자기 목소리로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나단열·페퍼라는 외국인이 쓴 것을 번역하여 실은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다. 특히 후자는 조선의 현실과 관련하여 사회에서의 언론 자유가 탄압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3) 1920. 1. 23일자 제18호
  1면에는 ‘신구인물(新舊人物)의 대사(代謝)’라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진화하려면 사회가 변해야하고 사회가 변하려면 구인물(舊人物)에서 신인물(新人物)로 바뀌어야 하는데, 신구(新舊) 인물은 사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조선의 역사에서 사상계의 신운동(新運動)이 있던 시기를 정조(正祖)시대, 갑신정변 전후, 갑오을미(甲午乙未) 이후, 갑진을사(甲辰乙巳) 이후, 독립운동(獨立運動) 이후 5시기로 분류하여 조선이 진보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또 각 시기의 인물들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영친왕이 입국한다고 하였으나 오지 못했다는 기사와 길림(吉林)에서의 활동 기사가 보인다. ‘서북간도(西北墾島)·상해(上海)·야소교(耶蘇敎)·천도교(天道敎)·불교(佛敎)·○○○會와 관계(關係)’ 기사들이 있는데 서북간도와 상해지역에서 또 각 종교와 단체가 연계하여 전개한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2면에는 프랑스(法國) 외무성에서 프랑스·영국 등의 나라와 독일(德國) 대표자간의 강화조약 부속의정서를 조인했다는 ‘조약비준교환(條約批准交換)’과 윌슨대통령이 제1회 국제연맹회의를 소집하자고 한 ‘연맹회의소집(聯盟會議召集)’ 등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외국의 통신을 인용하여 전달하고 있다. 또 세묘노프 장군에 관한 기사나 시베리아 등지에서의 미국·일본과 같은 나라의 군사이동과 변동사항에 관한 기사, 미·일군 주둔지역에서의 반미일 감정 등 군사문제에 관하여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관계사료집(日本關係史料集) [십(十)]’도 보이는데 여기서는 고려시대 왜(倭)가 쳐들어온 사실과 고려가 그에 대항하는 모습을 정리하였다.
  3면에서는 ‘신성(神聖)한 독립군(獨立軍)’ 이라는 글이 있는데 진정한 독립군은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 후에는 ‘미국(美國)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회답(回答)’, ‘가주우배일운동(加州又排日運動)’ 등 2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외국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또 ‘영국혁명(英國革命)의 음모(陰謀) [삼(三)]’이라는 글이 있는데 영국혁명에 대해 준비주밀(準備周密)·혁명적(革命的) 출판물(出版物)·문자험악(文字險惡)·혁명론자(革命論者)·음모조직(陰謀組織)·대동소이(大同小異)·중심인물(中心人物)·여력완력(膂力腕力)·유래원대(由來遠大)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4면에서는 페퍼가 쓴 ‘한국(韓國)의 진상(眞相)’이라는 글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3·1운동에 관한 국내소식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3·1운동의 주모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은 당하면서도 의연하고 또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서 ‘혁명(革命)의 심리(心理)’라는 글에서는 법란서(法蘭西, 프랑스) 대혁명(大革命)의 사례를 들어서 특권을 일당(一黨)에 주어서 또다시 대중의 분노를 사지 말고 일파(一派)에 이익을 주어 다른 파(派)의 불만을 사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3) 신채호의 독립운동에서 『신대한(新大韓)』의 위치
  신채호는 구한말에서부터 1930년대까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일제의 강점에 저항하며,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신채호의 독립운동에서는 무엇보다 ‘민족’이 언제나 핵심에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서 취했던 시기별 정치사상에는 몇 단계의 변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채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시기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 1905년에서 1910년까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서 논설과 저술에 매진했던 시기. 제2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기지 설치운동과 계몽활동을 했던 1910년대. 제3기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1922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3년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까지의 시기. 제4기 1924년 이후 승려생활, 북경군사통일회, 무정부주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1936년 순국할 때까지의 시기(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 -소크라테스형 지식인의 한 예-」,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29~230쪽).
  한편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언론활동기(1905~1910년), 민족운동 및 한국고대사 연구기(1910~1925년), 무정부주의사상기(1925년 이후)로 나누기도 하며(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59쪽), 또는 크게 보아 1910년을 전후한 사회진화론적 역사관에 입각했던 시기와 1920년 이후의 혁명적 역사관에 입각했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김기승, 「신채호의 진화사관과 혁명사관의 대치」,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143쪽).
  이러한 신채호의 활동시기 구분을 살펴볼 때 『신대한』이 독립운동사상의 일대 변화를 확연히 보여주는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바로 전 단계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20년대 초 신채호가 보여주는 정치사상의 변화상을 살펴봄으로써 『신대한』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는 1905~1910년의 언론활동기에 비록 사회진화론과 자강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력양성론과 준비론을 비판하며 ‘즉시독립론’에 입각하고 있기도 했다. 이는 신채호의 일생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독립관이었다. 단재(신채호)는 독립운동에서 실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오직 실력을 양성한 후에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오히려 “부강이 독립의 전제를 작(作)한다 하기보다 오히려 독립이 부강의 전제가 된다함이 가(可)하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김명구, 「한말·일제강점 초기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003, 194~195쪽).
  신채호의 1910년대 논설을 살펴보면 아직 사회진화론과 자강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1910년대의 신채호는 약자가 강자가 되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선진국이 된 문명국을 모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채호는 강자가 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이후 신채호는 민중직접혁명론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김기승, 「신채호의 진화사관과 혁명사관의 대치」,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152쪽).
  『신대한』은 시기적으로 신채호가 사회진화론을 벗어나 혁명론으로 전환하는 1920년대 초의 문턱에서 간행되었다. 우리는 『신대한』을 통해서 신채호의 사상적 변화의 단초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910년대 말 신채호는 즉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더욱 힘을 실었으며, 무엇보다 타협론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1919년 10월 『신대한』 창간의 배경이나 목적 역시도 준비론과 외교론 등의 타협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채호의 독립운동 노선을 더욱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는 타협론의 유형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다. 첫째는 외교론이다. 신채호는 사대주의적 외교를 비판하고 이승만의 독립청원론을 일본의 속국에 있던 한국을 미국의 속국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안창호가 주장했던 준비론이다. 신채호는 독립쟁취를 위한 준비에 동의하면서도 일본이 과연 우리가 준비하도록 놓아두겠느냐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셋째는 ‘내정독립’, ‘자치’, ‘참정권’을 주장하는 타협론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마지막은 문화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신채호는 문화운동 역시 한국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악영향을 미친다고 이해했다(김강녕, 「단재 신채호의 정치사상」, 『단재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84쪽).
  기존까지는 이러한 신채호의 비타협적 독립운동사상을 읽을 수 있는 자료로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을 주목했지만, 1919년 10월에 창간한 『신대한』을 통해서 이미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사상의 단면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신대한』은 신채호의 독립운동사상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데 아주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신대한』 폐간 직후 신채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1921년 한문체 잡지인 『천고(天鼓)』를 발간하게 된다. 『천고』에는 중국인 글도 실었으며, 중국인도 독자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순한문으로 발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조선과 중국이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최광식, 『단재 신채호의 천고』, 17~44쪽).
  이처럼 『신대한』이 1921년 북경에서 『천고』가 발간되기 직전에 발행된 신문이라는 점에서도 『천고』에 나타난 신채호의 독립운동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2. 『천고(天鼓)』에 보이는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

  『천고(天鼓)』는 단재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발행한 한문체 잡지로 1호에서 7호까지 발간되었다(중국인이 쓴 논문과 중국신문에서 발췌한 기사는 백화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북경대도서관에 1호·2호·3호만 수장되어 있다. 필자는 1999년 1학기 북경대 초청으로 역사계(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를 강의하게 되어 북경대학교에 갔다가 『천고』 1-3호를 열람하고 그 중 고대사부분을 복사할 수 있었다(입수경위에 대해서는 『역사비평』 48호에 소개한 바가 있다. 최광식, 「단재 신채호가 북경에서 발행한 잡지 『텬고』」, 『역사비평』 48, 역사비평사, 1999).
  『천고』 1호는 도부학(渡部學) 교수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 보내주어 그 일부가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별집(단재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 1977)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고』 1호 내용 전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중국편-에 영인되어 있다(윤병석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중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한편 『천고』 2호는 대한매일신문의 김삼웅 주필이 2000년 6월 연변에서 찾아 복사를 하여 공개하였다(김삼웅, 「‘천고’ 제2호 연변서 첫 발굴」, 『대한매일신문』 2000년 6월 28일자. 필자는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의 배려로 복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를 근거로 하여 2004년 『천고』 역주본을 간행한 바가 있다. 한편 최근에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남덕 여사가 『천고』 3호를 필사하여 공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천고』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논설과 독립운동 기사와 아울러 고대사를 비롯한 한국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천고』는 한문과 백화문으로 간행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천고』의 내용 중에는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의 단결을 부르짖는 내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인들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천고』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논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각 호당 고대사 논문이 하나씩 실려 있다. 단재 신채호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단재 신채호선생탄신100주년기념논집, 1980과,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단재신채호선생순국50주년추모논총, 1986에는 각각 논문이 20편이 실려 있는데 고대사 관계 논문은 각각 2편씩이 있을 뿐이다) 정작 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가 않다(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그리고 종래의 연구는 『독사신론』(1908),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1910년대와 1920년대 초반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2편의 논문이 있다. 한영우, 「1910년대의 신채호의 역사인식」, 『한우근선생정년기념사학논총』 1981;조인성, 「신채호의 낭가사상에 대한 일고찰 '동국고대선교고'를 중심으로」, 『경대사론』 창간호, 1985). 필자는 1921년에 발행된 『천고』 고고편을 통하여 1920년 전후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을 살펴본 바가 있다(2000년 12월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2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천고』의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인식」을 발표하였으며, 그 글이 2001년 3월 『한국사학사학보』 3집에 수록되었다).
  여기서는 『천고』의 고고편과 아울러 다른 한국사 관련 논문을 통하여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천고(天鼓)』의 목차와 내용
  『천고』 제1권 제1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卷首揷圖; 獨立運動時之犧牲者獨立運動流血之女士
天鼓新年新刊祝                    本社同人               1
天鼓創刊辭                           編輯人                 1
祝大朝鮮軍政署之大破倭兵       大弓                   4
朝鮮獨立及東洋平和                震公                   8
日本帝國主義之末運將至          我觀                  14
論日本之有罪惡而無功德          鐵椎                  18
天鼓與新年                            新人                  22
考古篇                                  志神                  23
波蘭光復之略史                      同淚                  30
華友寄送之兩大著                                           34
爭自由的雷音                         種樹                  34
論中國有設中韓親友會之必要    天涯恨人            36
大韓獨立軍破倭露佈                大弓                  39
悼姜宇奎先生                         肖民                  41
謀殺前皇太子之奇聞                大弓                  43
軍政署布告戰況                      大弓                  46
內國時聞                               肖民                  62
海外雜俎                               世眼                  62
 
  『천고』의 신년 신간축사는 본사동인(本社同人)이, 『천고』의 창간사는 편집인(編輯人)이 쓴 것으로 둘 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보인다. ‘대조선 군정서가 왜병을 대파한 축사’는 大弓(대궁)이 쓰고,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는 진공(震公)이 쓴 것으로 이 글들도 신채호가 쓴 것이다. ‘왜가 이른바 친선이라는 것은 이와 같다’는 절굉생(折肱生)이, ‘일본 제국주의의 말운(末運)이 이르렀다’는 아관(我觀)이, ‘일본의 유죄와 무공덕을 논함’은 철추(鐵椎)가, ‘천고와 신년’은 신인(新人)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신채호가 쓴 것이다. ‘고고편(考古篇)’은 지신(志神)이 쓴 것으로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다(『천고』 3호에는 고고편의 필자가 신지(神志)로 되어 있다. 신지는 대종교에서 고조선의 역사가로 보고 있는 인물이다. 신채호가 대종교에 입문하고 나서부터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폴란드의 광복 약사’는 동루(同淚)가, ‘중국인 친구가 보내준 두 책’은 종수(種樹)와 천애한인(天涯恨人)이 쓴 것으로 이것들은 중국인 친구가 보내준 글이다[『천고』 2호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은 단결해야 한다’는 글에서 신채호는 천애한인(天涯恨人)이 쓴 ‘중국에 중한(中韓) 친우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글을 읽고 감격하여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몰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대한독립군이 왜를 파한 것을 알림’과 ‘전황태자(前皇太子)를 모살(謀殺)하는 기문(奇聞)’, ‘군정서의 포고 전황’은 대궁(大弓)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다. ‘강우규선생 추도사’와 ‘내국시문’은 초민(肖民)이 쓴 것으로 필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내국시문(內國時聞)은’ 국내소식을, ‘해외잡조(海外雜俎)’는 해외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천고』 1권의 2호는 1921년 2월 1일 발행되었는데 그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首揷畵(2)
韓漢兩族之宜加親結              震公             8
古朝鮮之社會主義                上同             12
臚陳日軍殘暴之公文             半面生          16
古魯巴特金之死之感想           南溟            20
萬里長城                             神志            26
見聞雜感                             大弓            26
兩島血戰之鱗爪                 一記者            28
倭奴之勾結馬賊                 一記者            30
最近一朔內獨立運動之進行     鐵椎            31
琿春事件之彙報                 一記者            37
海外消息                             肖民            48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은 마땅히 단결해야 한다’와 ‘고조선(古朝鮮)의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진공(震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의 글이 확실하다. ‘일군의 잔폭함을 보이는 공문’은 반면생(半面生)이, ‘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은 남명(南溟)이 쓴 것으로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내용을 보면 신채호가 틀림이 없다.

無政府主義 非吾所講究也 豈曰不可 抑無暇也 此身 爲賊所執 身首手足 皆爲鐵鎖所縛 運動屈伸 無以自由 當是時 所急者 在逐賊 隣家 雖有山珍海錯 充滿羅列 吾奚暇願此也 余非唯無政府主義未究 卽其歷史之顚末 未及詳覽也 非唯古魯巴特金之死於何日之不知 卽其生年之爲何年 …… 중략 …… 其所著之書 吾只得見其日譯漢譯之斷片的文字而已 未嘗誦其書聞其言 而遽論其人 可乎 嗚呼吾之爲此文也 非欲論其人也 將以書吾之所感而已

  『천고(天鼓)』1권 2호, 대어고로파특김지사지감상(對於古魯巴特金之死之感想)(이 글은 단기 4254년 1월 29일 밤 등불 아래에서 썼다고 되어 있어 단재 신채호의 글임이 분명하다. 『천고』는 매달 1일자 발행으로 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원고 청탁을 하여 글을 받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고 청탁을 하고, 원고를 받고, 편집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이 사망한 날이 1월 28일이며, 신채호가 사망기사를 본 것은 1월 29일인 것이다)

  위의 글에 의하면 단재(신채호)가 무정부주의를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나라를 빼앗겨 이러한 사상에 심취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이 태어난 해나 사망한 날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이 지은 책은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것을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기 때문에 크로포트킨 자신보다는 크로포트킨의 책에 대한 소감을 쓰겠다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신채호는 일찍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서적을 일본어나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접하기는 하였으나 이때까지는 아직 무정부주의에 대한 사상적 수용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이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수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이호룡,『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단재(신채호)가 행덕추수(幸德秋水)와 유사복(劉師復)의 책을 통하여 아나키즘에 접하기는 했으나 아나키즘을 자기의 사상으로 수용한 것은 『천고』의 ‘크로포트킨의 추도사’를 통해 볼 때 1921년 이후인 것이 확실하다.
  한편 ‘고조선(古朝鮮)의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신채호가 직접 쓴 것으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신지(神志)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며, 만리장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사실상 한국고대사의 영역을 논하고 있다. ‘견문잡감(見聞雜感)‘은 대궁(大弓)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며, 간도 학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양도혈전(兩島血戰)의 편린(片鱗)’과 ‘왜노(倭奴)가 마적(馬賊)과 결탁함’, ‘혼춘(琿春)사건의 휘보(彙報)’는 일기자(一記者)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훈춘사건에 대한 내용들이다.
  ‘최근 한달간 독립운동의 진행’은 철추(鐵椎)가 썼는데, 국내와 해외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해외소식’은 초민(肖民)이 필자이고, 인도의 독립운동, 아일랜드인의 어려움, 일본정부가 일본화폐를 배척하는 중국에 대해 질문하는 공문, 일본 노동계의 파업, 일본 정부가 사회주의를 경계하는 글, 일본 병사가 미군함 선원을 해한 사건, 영일동맹과 일본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다.
  『천고』 3호의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㛮揷畵(3)
韓漢兩族之宜加親結                震公            8
第三回三一節普告同胞             大弓            1
各地第三回三一節紀念             記者            5
獨立運動中一大快報                震生            7
獨立宣言首領之近況               克公            12
馬克齊君之公函                                       14
祈戰死                                 浣生            16
考古篇                                 神志            19
壬辰倭亂人物之一                  耳溪            23
二月以後獨立運動之進行         一民            29
和龍縣居留同胞被禍一覽表     上同             35
琿春事件之彙報                     記者            46
中美俄三國與日本關係            記者            49
日本之時局                           記者            54
世界特聞                              記者            58

  ‘제3회 3·1절을 동포에 알림’은 대궁(大弓)이 필자이므로 신채호가 쓴 것을 알 수 있다. ‘각지의 제3회 3·1절 기념’은 기자가 쓴 것으로 누가 썼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독립운동중의 일대 쾌보’는 진생(震生)이 필자로 되어 있어 신채호가 쓴 것이 확실하다. ‘독립선언 수령의 근황’은 극공(克公)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이극로(李克魯)일 것으로 추측한다. ‘마극제군의 편지’는 마극제(馬克齊)가 보내온 편지이며, ‘전사자를 기도함’은 완생(浣生)이 필자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고고편(考古篇)’은 신지(神志)가 쓴 것으로 신채호의 저술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인물의 하나’는 이계(耳溪)가 필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輯)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2월 이후 독립운동의 진행’과 ‘화룡현 거류 동포의 피해 일람표’는 일민(一民)이 필자로 되어 있는데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훈춘사건의 휘보’, ‘중국·미국·러시아 3국과 일본관계’, ‘일본의 시국’, ‘세계특문’ 등은 기자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누가 쓴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세계정세에 대한 논설을 많이 싣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2) 『천고(天鼓)』의 한국사 관련 내용
  1) 『천고(天鼓)』의 고고편(考古篇)
  신채호는 『천고』 1권 1호에 고고편을 쓰고, 3호에 이어서 고고편을 서술하였다. 한편 2호에는 진공(震公)이라는 필명으로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회주의(社會主義)’라는 논설을 기고하고 있다(목차에는 ‘古朝鮮之社會主義’라고 되어 있고, 내용에 들어가서는 ‘朝鮮古代之社會主義’로 되어 있다).
  『천고』 제1권 1호 고고편은 ‘승군(僧軍)’과 ‘화랑(花郞)’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그 앞의 인언(引言, 머리말)에서 고고편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唾棄國粹而 不欲復道 固人之情也 然吾國果何如 遺忘三寶 自高麗焚棄九扃 自李朝 記歷代 則始箕子而去夫餘 論地志則劃鴨綠而遺渤海 尊祀古賢 定方 先於階伯 論述武功仁貴 偉於蓋金 辰卞列國 固蔚然乎當時稱覇之大邦也 而讀史者 不知其源委 南永諸郞 固儼然乎千年間支配思想界之大聖也”  
[『천고(天鼓)』 1권 1호 고고편(考古篇) 인언(引言)]

  신채호는 먼저 국수론(신채호는 Nationalism을 국수론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고 하였다. 국수론(國粹論)은 위험성이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를 버리면 삼보(三寶)를 버리는 것과 같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면서 고려시대에 구경(九扃)을 태워버린 것과 조선시대에 기자로부터 역사를 서술하여 부여(夫餘)를 빼어 버린 것, 지리를 논하면서 압록강에 국한하여 발해(渤海)를 빠트린 것을 비판하였다. 부여와 발해를 중요시하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이 나타나 있다. 또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과 설인귀를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나 백제의 계백장군 보다 존숭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을 비판하였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변진(弁辰) 열국(列國)은 대국인데도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역사연구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남랑(南郞)=영랑(永郞) 등 화랑은 천 년 동안 사상계를 지배한 성인인데도 이에 대한 인식을 못하고 있음을 통탄해 하고, 1,000년간 신라의 사상계를 지배해 온 화랑도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고 국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화랑도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인언(引言)에는 다음과 같은 점도 주장하고 있다.

“雖然尊孔之烈易至於復辟 尙古之弊 必及於退化 守舊不化 又久爲內外所詬病 如中華者 不屑國粹 固不足怪也 若吾人則 不然 知人而不知我 其害爲媚外 知今而不知古 其弊爲誣先”
[『천고(天鼓)』 1권 1호 고고편(考古篇) 인언(引言)]

  단재(신채호)에 따르면 공자(孔子)와 같은 성현을 공경하는 것이 마치 복벽(復辟)을 하는 것 같고 퇴보하는 것 같으나 우리는 중국과 달라서 우리의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그 피해가 크다고 하였다. 중국은 국수(國粹)가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는 옛 것을 모르면 선조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 고증을 하여 고고편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천고』 1권 1호 고고편에는 승군(僧軍)과 화랑(花郞)에 대해 서술하고, 『천고』 1권 2호에는 고고편이 없이 고대사 논문으로 ‘조선고대(朝鮮古代)의 사회주의(社會主義)’라는 글이 있으며, 『천고』 1권 3호 고고편에는 진왕(辰王)과 소도(蘇塗)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최광식, 「『천고』의 ‘고고편’에 보이는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한국사학사학보』 3집, 2001).

  2) 한중관계사 인식
  신채호는 『천고』 2호에 실려 있는 ‘한한양족지의가친결(韓漢兩族之宜加親結)’이라는 논문에서 현실에 있어서 한중관계를 논하기 앞서 한중관계의 역사를 논하였다. 먼저 한국과 중국의 산수(山水)를 논하며 한중관계의 친연성(親緣性)을 강조하였다.

從地圖之書 觀韓中兩國之山水 朝鮮之若鴨綠大同白馬蟾津等大江 及其他細流 皆奔注而西向於中華 中華之水 若江淮河漢等大水 及其他支河 皆奔注而東向於朝鮮 兩國之山脈亦然 有若相卽 而不欲相離者 此非兩國親愛之表徵 而天之所命也乎

  지도를 보면 한국의 강물은 모두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중국의 강물은 모두 조선을 향해 흐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산맥들도 그러하여 마치 서로를 향해 나아가려 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 양국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은 서로 교류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往者兩國人之相交也 朝鮮人有一失 中國人亦有一失 其失也同 而其所以失不同 前者失於大謙 後者失於自尊 時也

  옛날에 한중 양국이 서로 교류함에 잘못이 있었으니 조선인은 지나치게 겸손하였으며, 중국인은 자존의식이 강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고쳐야 진정한 한중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인의 한국사 왜곡문제를 논하고 있다.

以劒 割我舊土者 吾未能與抗 以筆誣我舊土者 吾乃偏欲與之言 其尤宜爲人笑也 然我兩國人 不可不親結 旣欲親結 不可不開心相見 我願此後朝鮮人 勿以謙卑 圖皮面之交際 中國人勿以古史之妄筆 據作正史而侮於相愛之地也

  칼로 우리의 옛 영토를 나누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붓으로 우리의 옛 영토를 농락하면 대항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중 양국은 친하게 지내고 힘을 모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논문에서는 고조선의 옛 영역을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淮南子 論秦之長城曰 北擊潦水東結朝鮮 然則長城 當時朝鮮與中華之分界也 則長城者 可以與言古朝鮮之一斑矣 作萬里長城考 高句麗蓋蘇文 自夫餘築長城 南之海凡千餘里 此國史上城之崔長者 羅馬該撤以北寇頻逼 築城於菜因河北 其長至數百里 此西洋史上城之崔長者也

  『회남자(淮南子)』를 인용하여 장성이 당시 조선이 중국과 더불어 나눈 경계라 하였다. 즉 장성은 고조선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만리장성을 진시황 이전의 장성, 진시황 이후의 장성, 진시황의 장성 등 셋으로 나누어 상세하고 논하였다.

匈奴傳 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活將十萬之衆 北擊胡悉收河(羊白河)南地 因河爲塞 四十四縣城 臨河徒適戍以充之 通直道自九原至雲陽 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 紀臨洮至遼東萬餘里 蒙活傳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 此則秦始皇之長城也 以上所述 中華歷代長城之略史也

  『사기』 흉노전과 몽염전을 고증하여 진시황의 장성이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만여 리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위략」을 인용하여 요동의 위치를 고증하고 있다.

魏略所云滿藩汗者 卽漢武帝所分爲汶藩汗二縣 而其名見於漢書遼東郡志者也 卽今蓋平海城等地也 所云拓地二千餘里者 自上谷(今宣化府)至襄平(今奉天城西北) 其程可再折而南 至於蓋平海城 其程可二千里而有餘也 然則燕郡之遼東 秦長城所至遼東 亦可知 而弟三問題結矣

  「위략」의 기록을 통하여 만번한을 지금의 개평과 해성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숙신·조선·부여·예·동호 등을 한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徒摭一二與中國接觸之事實 以共好寄者之賞玩而已 故或一國之名 訛爲數國(如肅愼朝鮮夫餘濊東胡等 實皆一國 而其名稱 煩訛至此)

  한나라의 이름을 여러 나라로 잘못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즉 숙신, 조선, 부여, 예, 동호 등은 실제로 한나라인데 여러 나라로 잘못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호를 우리나라로 인식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3. 맺음말

  이상으로 『천고』에 보이는 한국사 관련 논설을 통하여 이 시기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종래는 『독사신론』(1908)을 통하여 1900년대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으며, 『조선상고사』(1931)와 『조선상고문화사』(1931)을 통하여 1920년대의 한국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천고』(1921)를 통하여 1910년대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살핌으로써 단재의 한국사 인식의 변화과정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를 보는 관점이 민족주의인 점은 계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와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일대의 사건」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나 그에 대한 이해는 매우 초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사회주의」에서 정전제를 사회주의로 인식한 것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크로포트킨의 죽음에 대한 감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아나키즘에 대한 사상적 수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에 환멸을 느낀 그가 조직이나 단체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천고』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상호 협조 하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있으며, 그런 주장을 역사적 맥락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은 종래와 같은 사대적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친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의 위치를 요동지역으로 비정함으로써 중국과 고조선이 대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실례로 들고 있는 것이다. 민족자존의 역사를 견지하면서 중국과 대등하게 협조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실증한 것이라 하겠다.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천고』 1호와 2호 전부와 3호중 신채호 선생의 저술이 확실한 부분을 번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만 역주 작업을 하였다. 앞으로 『천고』4·5·6·7호도 발견되어 민족독립운동사와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을 연구하는데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제6권 논설·사론
김삼웅|독립기념관장

1. 기존 전집의 문제점

  단재 신채호는 한말·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계몽주의 계열의 역사가이며, 언론가였다. 그가 처음부터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성리학자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터득하였으며, 신승구로부터 한학을 익혀갔다. 한말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던 신기선의 집에서 머물면서 많은 책을 섭렵하였으며, 그의 추천에 의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당시 한국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성리학자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수학과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신채호가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으로 자처하기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에 몸을 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신규식·신백우와 더불어 산동학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로 활동하였다.
  신채호가 본격적으로 계몽활동을 시작한 것은 황성신문사에서 대한매일신보사로 자리를 옮기면서였다. 그는 여기서 주필로 활동하면서 한국사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사론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 명의 이탈리아 영웅을 서사한 『이태리건국삼걸전』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사에 있어 현재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을 저술하려 하였다. 사론과 더불어 그는 당시 한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한국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나름의 논설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기고하고 있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각종 논설과 사론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무너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강제병탄, 1910)하자 신채호는 기나긴 망명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정착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대양보』·『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신문의 논설과 사론을 담당하였다. 논설과 사론을 통한 식민지 국민의 계몽활동은 임시정부로부터 이탈한 후에도 지속하였다. 그는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만의 특유 화법으로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신문뿐만 아니라 그는 각종 잡지 창간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대동(大同)』의 창간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1921년부터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여 많은 논설과 사론을 집필하였다. 당시 신문 지상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는 많은 논설과 사론을 작성하였다.
  신채호의 이러한 행동 궤적을 감안해 본다면, 신채호의 사상을 파악하고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논설 및 사론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신채호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가 집필한 논설과 사론을 수집·정리하는데 많은 열정을 쏟았는데, 대표적인 책으로 1972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형설출판사에서 발행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전집(全集)』하(下)와 1975년에 나온 개정판(改訂版)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전집(全集)』별집(別集)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수십 편의 논설 및 사론이 수록되어, 신채호 연구에 있어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단재 신채호 전집』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련된 연구가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과 사론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해당 잡지나 신문에 실려 있는 논설과 사론의 원전자료를 수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전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생생한 1차 사료로서의 역할보다는 2차 사료로서의 기능밖에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기존 전집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특별한 검증 장치 없이 무분별하게 수록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기존 전집에서 각각의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그것이 왜 신채호의 작품인가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신채호의 실상을 접근 하는데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 해제자의 생각이다. 이에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의 논설 및 사론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당 자료의 원전을 수록함과 동시에 무기명 논설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피력하려 한다.

2. 기명 논설·사론의 검토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에 수록될 논설 및 사론은 크게 기명(필명)과 무기명으로 분류하였다. 먼저 기명 및 필명이 기재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새해축사」, 「수원이생원」, 「주락조씨의 부인」, 「한씨부인의 자선」, 「게씨문중의 학교」, 「대한(大韓)의 희망(希望)」, 「역사(歷史)와 애국심(愛國心)의 관계(關係)」, 「성력(誠力)과 공업(功業)」, 「대아(大我)와 소아(小我)」,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는 하유(何由)로 기(起)하였는가」, 「문법(文法)을 의통일(宜統一)」, 「여우인절교서(與友人絶交書)」,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 「부(父)를 수(囚)한 차대왕(次大王)」,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 건국연대(建國年代)에 대(對)하여」, 「예언가(豫言家)가 본 무진(戊辰)」,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뉘것이냐」,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전성시대(全盛時代)」는 기존 단재 전집에도 수록된 작품들이다. 이번 전집에서는 해당 논설 및 사론의 원문과 새 활자본을 보완하여 수록하였다.
  이번 전집에 새로 수록될 기명(필명) 논설 및 사론으로는 「고금광복기(古今光復記)」, 「동방고대각인종(東方古代各人種)」,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 「사십이상(四十以上)은 진살(盡殺)?」, 「월왕구천살인(越王句踐殺人)」, 「소아교양론(小兒敎養論)」,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이 있다. 「고금광복기(古今光復記)」는 『향강잡지(香江雜誌)』 창간호에 실려 있는 글이다. 『향강잡지』는 1913년 12월 20일 홍콩에서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중국 혁명파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아 박은식 주도하에 창간되었다. 창간호에는 총 14편의 논설이 실려 있는데 「고금광복기」는 그 중 하나다. 이 글을 신채호가 작성했다고 보는 이유는 『향강잡지』가 창간될 시점에 신채호는 상해에 있어 박은식이 주관하는 잡지에 글을 기고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 이 글의 필명이 ‘단생(丹生)’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방고대각인종(東方古代各人種)」은 「대동제국사서언(大東帝國史序言)」과 더불어 『무애산고(無涯散稿)』에 수록된 작품이다. 『무애산고』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책으로 우송(又松) 이규호(李奎鎬)라는 사람이 귀중한 여러 도서 중에 하나였다. 필사자·출판사·발행자 등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단군기원지사천이백사십유팔년(檀君紀元之四千二百四十有八年)’이라고 필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간행연대는 1915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신채호(申采浩)저’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 『무애산고』의 무애(無涯)는 신채호가 사용했던 여러 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이 책의 저자는 신채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동방고대각인종」은 예맥족·숙신족·선비족·거란족·지나(중국)족·왜족·몽고족·돌궐족·부여족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사론에서는 단순히 각각의 족을 설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범주화하였다. 즉, 예맥족·숙신족·선비족·거란족은 부여족과 더불어 살거나 전쟁을 하였던 족으로 분류하였다. 지나(중국)족·왜족·몽고족·돌궐족은 부여족의 국경안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항상 침입하여 괴롭히는 족으로 판단했다. 이처럼 신채호는 한국사의 주족을 부여족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를 중심축에 두고 주변 여타의 족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 「사십이상(四十以上)은 진살(盡殺)?」, 「월왕구천살인(越王句踐殺人)」은 ‘진공(震公)’이라는 필명으로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실린 글들이다. 진공을 신채호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는 첫 번째 이유는 『천고(天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천고(天鼓)』는 신채호가 1921년 북경에서 창간한 잡지였는데, 여기에 ‘진공’이라는 필명이 보인다. 예컨대, 『천고』 1권의 「조선독립 및 동양평화(朝鮮獨立及東洋平和)」, 『천고』 2권의 「한한양족지의가친결(韓漢兩族之宜加親結)」, 「고조선지사회주의(古朝鮮之社會主義)」는 필명이 ‘진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천고』와 『독립신문』에 ‘진공’이라는 필명으로 실려 있는 저자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천고』의 대부분을 신채호가 집필하였다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독립신문』의 그것도 신채호의 필명일 가능성이 높다.
  『독립신문』에 실려 있는 위 3편의 글들은 문체나 사상면에서 신채호의 다른 작품들과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금일(今日)에 또 피난(避亂)할 십승지(十勝地)를 찾는 사람들」에서 당시 문예사조의 하나였던 ‘연애소설’과 ‘신시(新詩)’에 대하여 현실 도피적인 문학일 뿐이라며 그만의 특유 화법으로 비판의 날을 세우는데, 이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낭객의 신년만필」과 「문예계 청년에 참고를 구함」이라는 글과 사상면에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낭객의 신년만필」에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다니는 치인(癡人)’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제목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독립신문』에 ‘진공’이라는 필명의 글은 신채호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과 「소아교양론(小兒敎養論)」은 1935년 『신동방』이라는 잡지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두 편의 글이 『신동방』에 실리게 되는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다. 이 두 편의 글은 제목에서 말해주듯 ‘소아(小兒)’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신채호 나름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성질(性質)에 따라 아해(兒孩)들을 가르칠 일」에서는 부모 특히 아버지의 신분과 직업에 따라 자식을 교육시킬 것이 아니라, 소아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질을 육성하여 국가의 큰 재목이 될 수 있도록 교육 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소아교양론」에서는 태아시절부터 소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었다. 신채호가 소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국가의 근본이 소아에게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중심은 국민에 있으며, 국민의 핵심은 청년이라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청년이 강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소아시절 부모가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집에 수록될 기명(필명)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대한매일신보』 담총(談叢)·잡동산이에 연재된 짤막한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담총과 잡동산이는 1909년 11월 20일부터 1910년 4월 7일까지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국문판에 각각 연재되었다. 『대한매일신보』 국문판에는 필명이 보이지 않으나, 국한문판에는 ‘검심(劍心)’이라는 필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면 담총에 보이는 ‘검심’은 신채호의 필명인가.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5일자 담총란에는 「국(國)사의 일사(逸事)」라는 제목의 글이 연재되었는데, 여기서 저자 ‘검심’은 “홍이계(洪耳溪)가 연경(燕京)에 사(使)하다가 요양계관산(遼陽鷄冠山)에 일비(一碑)가 유(有)한데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대패(大敗)하여 단기(單騎)로 주(走)하다가 차산(此山)에 유숙(留宿)하였다고 기재(記載)한 것을 친견(親見)하였다.”라고 하여, 홍양호[이계(耳溪)는 홍양호(洪良浩)의 호임]의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2월 29자 담총란에는 「국문(國文)의 기원(起源)」이라는 글이 연재되었는데, 이 글의 필명 또한 ‘검심’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면서, 한글의 기원을 『진언집(眞言集)』이란 책에 근거하여 승려 요의(了義)에서 찾고 있었다. 한글을 창조한 사람으로 요의를 들고 있는데, 이는 ‘검심’만의 독특한 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채호의 글로 인정받고 있는 「국한문(國漢文)의 경중(輕重)」, 「국문연구회 제씨(國文硏究會諸氏)에게 권고함」이라는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채호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에서 “여(余)가 견(見)하는 바 국시중(國詩中)에 기유전(其流傳) 최구(最舊)한 자(者)를 거(擧)하면 고승(高僧) 요의(了義)가 국문(國文)을 시창(始創)하고 불교(佛敎)를 찬미(讚美)한 진언(眞言)이 시(是)라 할지나”라고 하여 승려 요의를 언급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담총의 저자인 ‘검심’은 신채호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담총은 다양한 주제를 짤막하게 적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신채호의 현실인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서는 담총에 실려 있는 모든 글들을 소개하는 것은 피하고, 신채호의 현실인식을 읽어낼 수 있는 몇 편의 글들만 추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담총 또는 잡동산이에 실려 있는 신채호의 글들을 살펴보면, 기존 체제에 대한 파괴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군(君)과 국(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29)이라는 글에서 전통시대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군과 국을 동일시하였는데, 오늘날 한국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군(君)은 군(君)이오 국(國)은 국(國)이 되야한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군과 국의 분리를 통해 전근대 사회의 표상물이었던 군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려 했다.
  군(君) 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에 대해서도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성인(聖人)」(『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8)이라는 글에서 ‘성인’이 가지고 있던 신비성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성인(聖人)이 개중인이상(蓋衆人以上)에 초출(超出)치 아님은 아니나 피(彼)도 역(亦) 사회업력(社會業力)의 조성(造成)한 바오 자연(自然)히 생지(生知)한 자(者)가 아니라”고 하여 성인을 격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아가 현시대는 “자유시대(自由時代)니 범아학자(凡我學者)는 고인(古人)의 노(奴)가 되지 말지어다”(『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년 11월 27일자 「지나고설[支那(중국)古說]부에 운(云)하였으되」)라고 하여 기존 전통적 질서와 권위에 대해 부정하였다. 신채호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부정을 파괴의 논리로 이어 나간다. 아래의 자료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오인(吾人)은 공자(孔子)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야소[耶蘇(예수)]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마합맥[麻哈麥(마호메트)]으로 선생(先生)을 작(作)할까, 왈(曰) 개부부(皆否否)라 오직 진리(眞理)로 선생을 작(作)하리라. 고(故)로 공자(孔子)·야소[耶蘇(예수)]·마합맥[麻哈麥(마호메트)]의 행(行)한 바라도 진리(眞理)에 합(合)하면 공승교(恭承敎)하려니와 만일 진리(眞理)에 부합(不合)한 자(者)면 오인(吾人)은 두(頭)가 쇄(碎)하더라도 결단(決斷)코 반항(反抗)을 작(作)하여 아(我) 진리선생(眞理先生)을 유종(惟從)하리라. (중략) 성인경(聖人經)·현인전(賢人傳)이라도 진리(眞理)에 합(合)하면 이(已)어니와 진리(眞理)에 부합(不合)하면 오인(吾人)은 골(骨)이 분(粉)하더라도 결단(決斷)코 정의(正義)를 장(仗)하여 아(我) 진리성경(眞理聖經)을 유독(惟讀)하리라. 대저(大抵) 파괴(破壞)가 무(無)하면 건설(建設)이 무(無)하나니 구학설(舊學說)이 불파괴(不破壞)하면 신학설(新學說)이 불건설(不建設)될지며 구사상(舊思想)이 불파괴(不破壞)하면 신사상(新思想)이 불건설(不建設)될지며 구습속(舊習俗)·구제도(舊制度)가 불파괴(不破壞)하면 신습속(新習俗)·신제도(新制度)가 불건설(不建設)될지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1월 7일자 「유진리(惟眞理)」)

  공자·예수·마호메트는 성인임과 동시에 ‘구학설(舊學說)’·‘구사상(舊思想)’·‘구습속(舊習俗)’·‘구제도(舊制度)’의 표상물로 등치된다. 이상의 것들은 ‘진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파괴의 대상이 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신채호는 전통과의 단절을 꾀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강한 어조로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신학설(新學說)’·‘신사상(新思想)’·‘신습속(新習俗)’·‘신제도(新制度)’의 건설을 강조한 것은 그의 현실인식과 관계가 깊다. 그는 「상복연(喪服鳶)」·「재맹아(再盲兒)」(『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3)와 「서인(西人)이 오주[澳洲(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발현(發現)할 제(際)」(『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5)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현시대를 제국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힘의 논리 즉, ‘우승열패’와 ‘생존경쟁’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통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이 신채호의 판단이었다.
  신채호가 새롭게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새로운 학설·사상·관습·제도는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무분별하게 서구화를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서구화를 받아들임에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국수(國粹)」(『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13)라는 글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만일(萬一) 국수(國粹)를 파괴(破壞)하고 법국[法國(프랑스)]의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면 시(是)는 자국인(自國人)을 구(驅)하여 법국노[法國(프랑스)奴]가 되게 함이오 국수(國粹)를 파괴(破壞)하고 덕국[德國(독일)]의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면 시(是)는 자국인(自國人)을 구(驅)하여 덕국노[德國(독일)奴]가 되게 함이라. 고(故)로 외국문명(外國文明)을 수입(輸入)하려는 자(者)가 위선(爲先) 국수(國粹) 이자(二字)를 삼복(三復)할지어”라고 하여, 국수를 파괴하지 않는 방향에서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담총의 다른 글에서도 찾아진다.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2)에서 그는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 기국성(其國性)이 어찌 여사(如斯)히 약(弱)한지 정치상(政治上)·문화상(文化上)에 모두 타(他)의 정복(征服)하는 바 되고 종교상(宗敎上)까지 타(他)의 정복(征服)을 당(當)하여 불교(佛敎)가 입(入)함에 한국적(韓國的) 불교(佛敎)가 되지 못하고 불교적(佛敎的) 한국(韓國)이 되며, 유교(儒敎)가 입(入)함에 한국적(韓國的) 유교(儒敎)가 되지 못하고 유교적(儒敎的) 한(韓)국이 되어 해(害)만 유(有)하고 익(益)은 무(無)하였거늘, 여금(如今) 천주교(天主敎)·기독교(基督敎)가 입(入)함에도 역연(亦然)할 여(慮)가 유(有)하니 비부(悲夫)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신채호는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거기에는 한국적 주체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수가 중심이 되고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에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담총에 실려 있는 몇 편의 글을 가지고 신채호의 현실인식과 극복방안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담총에는 이상의 글 외에도 많은 짤막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인식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글로는 「로이십사[路易十四(루이 14세)]는 법국[法國(프랑스)]의 효군(梟君)이라」(『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0), 「국(國)사의 일사(逸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5), 「단(斷)발」(『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1), 「삼국이후(三國以後)의 한국(韓國)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2), 「여(余)가 왕년(往年)에 일사학선생(一史學先生)을 과(過)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5), 「양국사학(兩國史學)의 반비례(反比例)」(『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역사인식 외에 영웅관에 대해 언급한 글들로는 「위인(偉人)의 두각(頭角)」(『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8), 「철인(哲人)의 면목(面目)」(『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30), 「강감찬(姜邯贊)과 가부이[加富爾(카보우르)」(『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4), 「동양영웅아(東洋英雄兒)의 결점(缺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1), 「연개소문(淵蓋蘇文)」·「김준(金俊)」(『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1. 21), 「대영웅(大英雄)·소영웅(小英雄)」(『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2. 2), 「종교가(宗敎家)의 영웅(英雄)」(『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 2. 16) 등이 있다. 신채호의 교육관을 살펴 볼 수 있는 글들로 「내가 향곡(鄕谷)에 구경(覯景)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0), 「옛적에 일소아(一小兒)가 유(有)하니」(『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1), 「유(柳)수운(雲) 한석봉(韓石蜂)」(『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1. 26), 「촌여(村閭)의 인(人)이 항상(恒常) 소아(小兒)를 조속(操束)하여」(『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1), 「노예공부(奴隸工夫)」·「협잡교육(挾雜敎育)」(『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3), 「여(余)가 향일(向日)에 일독서실(一讀書室)을 과(過)하다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9. 12. 24) 등을 들 수 있다.

3. 무기명 논설·사론의 검토

  이번 『단재 신채호 전집』을 발간함에 있어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여 왔다. 편찬위원회는 한국근현대사 전문가와 신채호를 전문적으로 전공하는 학자들로 구성하였다. 편찬위원회를 만든 이유는 이번 전집에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수록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더불어 앞서 지적한 것처럼 기존 전집에는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경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것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논설 및 사론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이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각각의 그것이 신채호의 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에 있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편찬위원회를 대위원회와 소위원회로 나누고, 소위원회에서 무기명 논설 및 사론에 대해 검토 작업을 하였다.
  편찬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에 대해 인식의 궤를 같이하였다.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논설 및 사론 가운데 어떤 것을 제외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과 어떤 것을 제외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 전집 가운데 어떤 것을 넣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기존 전집에는 분명한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부정하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소위원회에서는 기존 전집 가운데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부터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에 대한 관견 이측」, 「소회일폭으로 보고동포」, 「이십세기 신동국지영웅」은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역사에 대한 관견 이측」은 『대동제국사서언』, 『조선상고문화사』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주필로 근무하던 신채호가 그것을 ‘기서’의 형태로 글을 수록할 이유는 없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기서’라는 이유로 신채호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필명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하지만 ‘기서’는 독자 투고이기 때문에 신채호가 투고까지 하면서 신문사에 글을 실을 이유는 없어 보이며, 그와 비슷한 필명은 다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위 세 작품은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결정하였다.
  「서호문답」, 「국민·대한 양마두상 객일봉」도 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편찬 소위원회에서는 결정하였다. 「서호문답」의 서호는 김규식의 호로 생각되며, 거기에서 그려지는 영웅관은 신채호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 소위원회의 견해였다. 그리고 「서호문답」에는 일본을 찬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신채호의 일본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국민·대한 양마두상 객일봉」에는 베델을 옹호하는 내용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양기탁의 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상 5개의 글은 신채호의 그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소위원회의 판단이었다. 소위원회에서는 이들 작품을 이번 새로운 전집에서는 수록하지 말자는 견해도 나왔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소위원들 전체의 견해였다. 비록 소위원들이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또 다른 전문가들의 주장과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대한신민회취지서」와 「고락유수」는 삭제하기로 하였다. 「대한신민회취지서」는 안창호의 작품이 분명하며, 「고락유수」는 『시천교월보』에 수록되었다고 하는데 『시천교월보』에는 그러한 글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채호가 친일단체의 잡지인 『시천교월보』에 글을 기고할 일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이십세기 신국민」, 「만주와 일본」, 「만주문제의 취하여 재론함」, 「청년학우회취지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등은 신채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에 대해 「이십세기 신국민」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보이지만 양계초의 「신민설」을 번역한 것이며, 「만주와 일본」, 「만주문제의 취하여 재론함」은 동일한 저자로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청년학우회취지서」에 대해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최남선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는데, 『경부신백우』에 의하면 신채호가 작성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이 또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상 4개의 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소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나머지 논설 및 사론에 대해서는 신채호의 글이라고 소위원회에서 판단하였다. 예컨대, 「동양이태리(이탈리아)」에는 「독사신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는 점, 「구서간행론」, 「서적계의 일평」, 「구서모집의 필요」는 내용상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문체와 사상이 일치하였다. 「국문연구회 위원제씨에게 권고함」과 「국한문의 경중」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담총에서 보이는 내용과 문체가 흡사하였다. 이처럼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신채호의 논설 및 사론을 나름대로 검토하여 기명, 무기명-인정, 무기명-추정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은 「성토문」과 「조선혁명선언」은 독립운동편에 수록하기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은 기존 전집에는 논설 및 사론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그 성격상 독립운동편에 수록해야 한다는 것이 편찬위원들의 판단이었다.


제7권 문학
김주현|경북대학교 교수

 1. 단재(신채호)의 글쓰기와 문학

  단재 신채호를 이야기할 때 그의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온다. 언론인, 애국계몽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역사학자, 문인, 무정부주의자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는 문사철을 겸한 전통적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에 참여한 실천적 지성인이다. 그는 애국계몽기 언론활동을 통해서 계몽운동을 펴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무력투쟁을 선도하는 등 우리 근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이제까지 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조명되어 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문인 신채호, 신채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단재(신채호)가 문인으로 지칭된 것은 이미 당대에도 그러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계몽기에 『을지문덕』을 창작하고, 『이순신전』, 『최도통전』을 써서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안자산(자산 안확)은 『조선문학사』에서 “무애생의 명이 강호에 선전하야 문예가 혁혁한 자는 신채호”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안자산(자산 안확), 『조선문학사』, 한일서점, 1922, 124~125쪽]. 김태준은 단재(신채호)의 『을지문덕』, 『최도통전』 등을 들어 “역사소설을 지어 신생면을 개척한 것도 씨의 독창에서 난 것이며, 융성한 정치관념과 국가관념을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라고 평가하였으며(김태준, 『조선소설사』, 『한국문학사연구총서』 3, 삼문사, 1982, 441쪽), 임화는 그의 작품들을 『정치소설』에 포함시켜 논의하였다(임화, 「신문학의 태생」(6), 『한국문학사연구총서』 1, 삼문사, 1982, 510쪽). 이것들은 신채호의 애국전기물을 대상으로 문채 및 작품의 성격을 논의한 언급들이다. 단재(신채호)에 대한 당대의 문학적 평가는 애국계몽기, 주로 역사전기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단재(신채호)는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병합조약(강제병탄, 1910)이 이뤄지기 직전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토크·상해·북경 등지에 머물면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몰두한다. 그 시기 그는 적지 않은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발표 지면을 얻지 못했고, 상당수가 원고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단재(신채호)는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그의 사후 상당수 유고는 떠돌게 된다. 단재(신채호)의 문학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문학유고가 발견되어 세상에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단재(신채호)의 문학, 특히 그의 유고들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전집에 포함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단재(신채호)의 문학 전모와 전집 문학편의 구성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2. 단재(신채호)의 창작유고

  단재(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옥사한 직후 그의 유고 일부가 공개된다. 1936년 4월 『조광』에서는 단재(신채호)추모특집을 마련한다. 거기에 「고려영(高麗營)」, 「추야술회(秋夜述懷)」, 「금강산(金剛山) 시조(時調)」 등의 유고와 더불어 단재(신채호)가 홍벽초(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이 소개된다. 당시 단재(신채호)가 역사연구뿐만 아니라 문학 유고도 남겼음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외에 「대가야국천국고(大伽倻國遷國考)」,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은 전혀 미발표된 자(者)이요, 그의 심박(深博)한 고징(考徵)과 예리한 변절(辯折)은 동방고사(東邦古史)에 관하여 반드시 만인미발(萬人未發)의 창견(創見)을 이룬 바 더욱 있겠는데, 이제 그것이 고인(故人)과 함께 두터이 지하에 묻히니 애(愛)하다[안재홍, 「오호 단재를 곡함」,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378쪽].
 
  안재홍은 단재(신채호)에게 「대가야국천국고(大伽倻國遷國考)」, 「정인홍공략전(鄭仁弘公略傳)」 등의 원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서세충 역시 미간된 책으로 이 두 저술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윤재에 따르면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 다섯 책의 원고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의 입옥 후에 그 장서 전부가 천진(天津) 모(某)(박용태(朴龍泰) : 편집자) 씨(氏)에게 임치되어 있다고 하니 그 원고도 아마 그 속에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이윤재, 「북경시대의 단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481~482쪽].

  이윤재는 단재(신채호)의 다섯 권 저술이 “천진 모씨”에게 있을 것으로 추정했고, 편집자는 “천진 모씨”를 “박용태”로 설명했다. 이윤재의 추정이나 편집자의 지적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그것은 단재(신채호)가 일경에 의해 체포된 이후 「만리장성이 뉘 것이냐」(1932.12.9~14)가 박용태의 이름으로 발표된 사실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단재(신채호)의 글은 그가 감옥에 들어간 이후 박용태가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단재(신채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38년 12월 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원고의 행방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단재(신채호)의 옥사(1936년) 이후 그의 유고들에 대한 발간 계획은 꾸준히 있어 왔다.
 
  1942년 이때를 전후하여 한용운·박광·신백우·최범술 제씨가 『단재선생유고집』의 간행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로 추진되지 못함[「년보」,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505쪽].
   1946년 중국에 신채호학사 설립. 중국인으로서는 세계사 대표 이석증, 중국학전관 대표 양가락, 상해 생물학연구소 대표 주설 등과, 한국인으로서는 정화암․유자명 제씨가 상호협력하여 선생의 유고를 한문과 영문으로 출간할 것을 계획함(「년보」,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506쪽).
 
  유고집의 발간은 1942년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 하에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단재(신채호)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했고, 또한 그의 글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항거하는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1946년 4월 상해에서 중국인 이석증을 비롯하여 한국인 정화암․유자명 등은 신채호학사를 설립하고 유고집 발간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발기문에 “한평생을 민족해방과 민족문학 확립발전에 헌신(「申采浩學社 上海에 設立」, 『동아일보』, 1946.4.9.)”이라는 구문이 있는데, 그의 문학유고가 적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의 복잡한 상황과 해방 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유고는 잊혀졌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북한과 1970년대 남한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3. 『룡과 룡의 대격전』의 탄생

  신채호의 유고는 1964년부터 1965년에 『조선문학』과 『문학신문』에 게재되기에 이른다. 먼저 김하명의 해설(『조선문학』 204, 1964.8.)과 더불어 「룡과 룡의 대격전」이 소개되고, 이후 주용걸의 해설(「탁월한 작가 신채호 문학에 대하여—최근에 발굴된 그의 창작 유고를 중심으로」, 『문학신문』, 1964.10.20.)과 함께 「꿈하늘」이 소개된다. 이 글로 보아 당시 신채호의 창작유고가 발견되어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용걸은 “신채호에게는 적지 않은 시조들과 약간의 자유시, 한시들도 있다. 예컨대 「새벽의 별」, 「고려영』, 「큰 바람」, 「감회」, 「꿈에 금강산에 놀고」, 「청루수」, 「나비를 보고」 등 시편들엔 조국 멀리 떠난 애국지사의 절절한 심정이며, 이국땅에서 겪게 되는 각양한 정신적 체험, 애국의 정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주용걸, 「탁월한 작가 신채호의 문학에 대하여-최근에 발굴된 그의 창작 유고를 중심으로」, 『문학신문』, 1964.10.20, 3쪽)”라고 진술하였다.
 
「꿈하늘」, 「룡과 룡의 대격전」 외에도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민족고전부]의 이름으로 「금전․철포․철추」, 「선언」, 「리해」, 「정육과 애국」 등의 수필과 「매암의 노래」, 「너의 것」, 「61일 계단의 회고」, 「나비를 보고」, 「새벽의 별」, 「고려영」, 「임술년 가을에 읊노라」, 「계해년 10월 초2일에」 등의 시․시조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작품들과 미발표 유고들을 한데 묶어 1966년 『룡과 룡의 대격전』이라는 유고선집을 발간하였다. 김병민에 따르면, 단재(신채호)의 유고는 1962년부터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리하였다 한다.
 
  중국에 사는 한 유지 인사는 북경에서 열린 학술논문발표회에서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는 광복 후 중국주재 조선대사관을 거쳐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에 전해졌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 후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는 1962년대 초 평양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평양의 학자들의 말씀에 의하면 김책공업대학에 있는 한 선생이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 들어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큰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는 단재(신채호) 선생의 유고를 발견했다고 한다. 하여 즉각 학계의 중시를 일으켰던바 김일성종합대학 어문연구소의 주용걸 선생, 언어문학학부 안함광 교수,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관계 일꾼들이 유고정리 사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신채호의 유고가 발견된 이후 1966년 2월 국립중앙도서관 민족고전부에서는 문학유고들만을 선택하여 윤색·삭제·편집을 거쳐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책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 연변대학출판사, 1994, 2~3쪽).

  『룡과 룡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은 당시 북한에 있는 단재(신채호)의 문학유고들을 정리하여 펴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으로 인해 단재(신채호)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학인으로 새롭게 조명된다. 그 책에는 소설과 수필, 시를 비롯하여 서간이 실려 있다.

「룡과 룡의 대격전」, 「꿈 하늘」, 「백세 로승의 미인담」, 「일목대왕의 철퇴」, 「일이승」, 「류화전」, 「리괄」, 「박상희」, 「○○○부원군으로 견자」, 「철마 코를 내려치다」, 「구미호와 오제」, 「선언」, 「금전·철포·저주」, 「도덕」, 「정육과 애국」, 「리해」, 「문예계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실패자의 신성」, 「인도주의의 가애」, 「사상가의 노력을 요구하는 때」,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명과 리와 진의 삼인」, 「지기를 위하여 죽음」, 「지동설의 효력」, 「수양은 탁계부터」, 「위학문의 폐해」, 「소년의 희생」, 「신선의 두를 참하라」, 「대흑호의 일석담」, 「8월 29일 연초」, 「너의 것」, 「매암의 노래」, 「새벽의 별」, 「1월 28일」, 「61일 계단의 회고」, 「나비를 보고」, 「고려영」, 「현량사 불상을 보고」, 「임술년 가을밤에」, 「고향이 그리워」, 「계해년 10월 초이튿날」, 「우리 형님 가신 날에」, 「김연성을 꿈에 보고」, 「무제」, 「리 수상에게 도서 열람을 요청하는 편지」, 「전훈 노인에게 준 편지」, 「극웅에게」, 「한기악씨에게」(『룡과 룡의 대격전』, 조선예술총동맹출판사, 1966, 4~5쪽).

  『룡과 룡의 대격전』은 말로만 떠돌던 신채호 유고의 실체를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계의 빈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안함광 등이 신채호의 유고를 정리한 것은 김병민의 언급처럼 신채호 연구에 획기적인 의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유고의 발견은 언론인 또는 역사학자로 알려졌던 신채호가 끊임없이 문학창작을 한 문인 내지 작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의 문학 「꿈하늘」과 「룡과 룡의 대격전」 등은 북한에서 높은 평가와 더불어 문학사적으로 새롭게 논의된다.

4. 『단재신채호전집』의 발간

  한편 1970년 남한에서는 이선근을 대표로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가 결성되어 전집 출간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전집편찬위원회는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형설출판사) 상․하권을 출간하였다. 상권은 주로 「조선상고사」 등의 역사물, 하권은 「조선사연구초」를 비롯하여 전기·논설·역사 관련 글을 비롯하여 소설·시가·서문 등을 싣는다. 특히 하권에는 아래의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시: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추야술회(秋夜述懷)」,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영오(詠誤)」, 「서분(書憤)」, 「술회(述懷)1」, 「술회(述懷)2」, 「한나라 생각」, 「금강산(金剛山)」, 「고려영(高麗營)」
소설 : 「고락유수(苦樂有數)」, 「익모초(益母草)」
비평: 「조선(朝鮮) 고래(古來)의 문자(文字)와 시가(詩歌)의 변천(變遷)」
서문: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서(序)」,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 「단기고사중간 서」.

  먼저 하권에 산입된 시 작품을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크게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것(가)과 단재(신채호)의 옥사 직후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발표된 것(나), 그리고 미발표유고로 있다가 단재전집에 포함된 것(다)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의 경우는 「서분(書憤)」(『보전친목회보(普專親睦會報)-친목(親睦)』, 1907. 10. 15.),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대한매일신보』, 1910. 2. 13.)와 「꿈에 금강산을 보고」(『독립신문』, 1923. 11. 10.)를 들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은 『조광』(1936. 4.)에 「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심훈의 글에 “그 당시 그는 42, 3세의 장년이었는데, 원체 문명을 높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금강산 단풍 구경보다도 몽고 사막풍에 흉금을 펼치고 싶다][심훈, 「단재와 우당」,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411쪽]”라고 언급되었다. 단재(신채호)가 43세 되던 때는 1922년이며, 『독립신문』에 발표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영오(詠誤)」(변영만), 「추억의 실루에트」(『중앙』, 1936.6에 소개), 「추야술회(秋夜述懷)」(1922년 창작되어 1936년 4월 『조광』에 소개), 「고려영」(『조광』, 1936.4) 등이 유고로 존재하다가 옥사 직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한나라 생각」 등은 유고로 존재하다가 전집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집 하권에 소개된 시들 가운데 『룡과 룡의 대격전』에도 실린 것은 「고려영」과 「추야술회」(북한 선집에는 「임술년 가을밤에」) 2편뿐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유고와는 다른 유고를 남한에서도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

  일제의 폭압 아래서 고 신백우 선생 같은 분은… 단재(신채호) 선생의 기간 미간 유고를 모집하여 집대성 발간하고자 온갖 심혈을 기울였었다[이선근, 「우리 민족사관은 누가 확립하였나」,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하) 형설출판사, 1977, 14쪽].

  위의 글은 편찬위 대표였던 이선근의 [간행사]의 일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신백우가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모집하여 갖고 있다가 그것을 아들인 신범식에게 넘겨주었으며, 신범식의 지원으로 전집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상 이선근과 신백우는 1950년대 이미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에 참여했다. 1954년 10월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김창숙․변영만․이선근 등 고문 6명, 신백우․이정규․장도빈 등 편찬위원 13명, 변영로․신수범․정화암 등 상무위원 9명, 감사 이을규 외 1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출판회에 특별히 42년과 46년에 각각 단재(신채호)의 유고출간을 계획했던 신백우와 정화암, 그리고 변영로가 눈에 띈다. 변영로는 「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는 글에서 단재(신채호)가 국시(國詩), 동사고(東史考) 등 저작에 여념이 없었단 말을[개정판 전집(별집), 397면] 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단재(신채호)의 [국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의해 단재(신채호)의 상당수 유고가 확보되어 전집편찬위원회가 구성된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들의 유고 출간사업은 1955년 『을지문덕』 번역판이 나온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신백우는 몇 차례 단재(신채호)유고 간행을 위해 힘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19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단재(신채호)의 유고들은 그의 아들인 신범식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유고 발간 사업은 1970년에 이선근에 의해 다시 추진된다. 이때 신백우가 지녔던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다시 전집편찬위원회에 전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72년 비로소 남한에서도 단재(신채호)의 유고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전집편찬위원회가 다른 원고도 확보하고 있었음은 전집하에 실린 「홍벽초(벽초 홍명희)에게」라는 서신에도 드러난다. 전집에서 벽초(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은 총 3개로 이뤄졌는데, 첫 번째 편지는 년도 미상이지만, 9월 5일에 쓴 것으로 확인이 되며, 두 번째 것은 내용상 1924년에 씌어진 것이다. 이 두 편지는 1936년 4월 『조광』지에 실렸던 것이다. 여기에 1930년 단재(신채호)가 옥중에서 쓴 세 번째 편지 일부가 추가되어 실렸다. 이것은 남한에서도 전집편찬위원회가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게다가 전집편찬위원회에서는 기존에 발간된 잡지·저서 등에서 단재(신채호)의 글을 발굴하여 전집 하권에 실었다. 그것은 소설과 비평, 서문에 걸쳐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소설 「익모초」의 발굴은 그것이 비록 일부로서 불완전하기는 해도 단재(신채호)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은 단재(신채호)의 문자관과 시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밖에도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서(序)」,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의 발굴은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 다만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고락유수」와 「단기고사중간서」를 단재(신채호)의 전집에 포함시킨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신문·잡지 등을 뒤지고 유고를 수합하여 전집에 산입한 공은 크다 하겠다.
  1972년 상·하 2권 발간에 이어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 바뀐 이름)는 또 다른 여러 편의 단재(신채호) 글을 추가로 발굴하여 1975년 『보유』편을 발간했다. 『보유』편은 논설, 사론․평론, 수상, 소설 등으로 구성되었다. 논설이 16편, 사론․평론이 6편, 수상이 8편, 소설이 9편이다. 여기에는 「꿈하늘」이 마침내 소개가 된다. 

  이 보유에 편입된 유고 정 자료들은 전서를 편찬할 때 누락된 몇 편의 글과 그 후에 하나씩 모집해둔 글들이다. 마침 만해(한용운) 스님과 경부 신백우 선생 등이 단재유고집을 편찬하고자 준비해 오던 자료보따리가 나와 거기에서 소설 「꿈하늘」[몽천(夢天)]을 비롯한 몇 개의 유고와…(중략)… 특히 최근에 선생의 장남 신수범 씨가 이도(移徒)를 하면서 낡은 세간을 챙기다가 윤세복 씨가 정리해 둔 미간 유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유화전」을 비롯한 몇 개의 소설과 「선언」을 비롯한 몇 개의 논설이 그것이다(『단재신채호전집』(보유), 형설출판사, 1975, 557~558쪽).
  보유편을 편집한 김영호는 자료의 입수경위를 위와 같이 밝혔다. 「꿈하늘」은 신백우로부터, 그리고 「유화전」, 「선언」 및 기타 소설은 윤세복으로부터 구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렸던 작품들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린 작품 가운데 전집 보유편에 실린 작품은 「꿈하늘」, 「유화전」, 「구미호와 오제」, 「백세 노승의 미인담」, 「철마 코를 내리치다」, 「일목대왕의 철퇴」, 「박상희」, 「리괄」, 「○○○부원군으로 간 견자」 등의 서사물과 「선언」, 「실패」,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등 수필 15편이다. 과연 전집간행위원회는 신백우와 윤세복으로부터 자료를 구한 것인가? 왜 『룡과 룡의 대격전』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그들로부터 구했다는 것인가?

  이 별집에 수록하고 있는 문품들로 말하면, 첫째 문예류로서, 소설 시 시조 수상 서한 등과 『천고』지에 게재된 문품들인데, 이것은 특히 일본 동경 무장대(武藏大) 도부(徒部) 학(學)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제공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양심 있는 학문인은 이같이 선생의 문품을 소중히 받드는 것임을 생각하면, 새삼 느꺼운 마음을 금치 못함과 아울러, 그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이은상, 「간행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별집), 형설출판사, 1977, 3쪽].

  1977년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는 다시 개정판을 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인 이은상의 「간행사」를 실었다. 개정판의 「간행사」에 자료의 수집 경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일본 동경 무장대(武藏大) 도부(徒部) 학(學)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는 구절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은 소설과 수상, 시, 시조, 서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절은 결국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을 도부(徒部) 학(學) 교수로부터 건네받았다는 말이 된다. 김영호의 신백우․윤세복의 주장은 북한 자료에 대한 논란을 없애기 위한 도회에 불과하다. 전집간행위원회는 도부(徒部) 학(學)으로부터 『룡과 룡의 대격전』을 입수했고, 이것을 전집에 실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의 유입은 비록 때늦은 감이 있지만 남한의 전집 발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룡과 룡의 대격전』은 개정판 단재전집에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유』편에 빠져있던 「용과 용의 대격전」, 「일이승」을 비롯하여 시, 시조, 한시, 그리고 서신 등이 모두 개정판 『별집』에 포함되게 된다. 그리고 새로이 『대한매일신보』 소재 여러 편의 글을 수록하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임중빈이 발굴 소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대한매일신보』, 1909.11.9~12.4.)이다. 그것은 전대 시화를 계승하면서도 계몽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채호가 견지한 문학관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매우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시화이다. 전집간행위원회는 수집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입수하여 실었다. 글 가운데 저자확정이 미처 이뤄지지 못한 채 실린 것들이 있어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들의 공로는 크다 하겠다.

5.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의 출간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단재(신채호)유고선집이 소개되었다. 그것은 김병민의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이다. 이 유고집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 하나는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거의 개변 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미 북한에서 나온 『룡과 룡의 대격전』에서도 단재(신채호)의 유고들을 소개하였지만, 이데올로기 및 기타 이유에 따라 편집되거나 삭제, 윤색된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단재(신채호)의 유고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이것을 토대로 한 전집 역시 개변을 겪었다. 김병민은 필사해온 것을 바탕으로 원전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김주현, 「단재 신채호의 문학과 정전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현대소설학회, 2007.12.).
  다음으로 『룡과 룡의 대격전』에 제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주용걸의 진술만 보더라도 『룡과 룡의 대격전』이 단재(신채호) 문학 유고의 전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소개한 시 작품 가운데 「큰 바람」, 「감회」, 「꿈에 금강산에 놀고」, 「청루수」 등 네 작품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소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꿈에 금강산에 놀고」의 경우 「금강산」으로 『조광』에 소개된 시조가 있어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머지 3편의 경우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유고 가운데 적지 않은 분량이 소개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행히 김병민은 『룡과 룡의 대격전』에 소개되지 않은 몇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단아잡감록(丹兒雜感錄)」, 「조선(朝鮮)의 지사(志士)」, 「아방윤리경(我邦倫理鏡)」, 「고구려삼걸전(高句麗三傑傳) 서문」.

  「단아잡감록」의 경우 총 9필로 되어 있다. 그런데 『룡과 룡의 대격전』에서는 제1필 지기 위하여 죽음, 제2필 피의 인과, 제3필 지동설의 효력, 제4필 수양은 탁계부터, 제6필 위학문의 폐해, 제7필 소년의 희생, 제8필 명과 리와 진의 삼인 등 7개의 글을 개별 글로 소개하고, 「제5필 물심양계의 병진」, 「제9필 나의 말일이 곳 지구의 말일」은 빼고 말았다. 그러나 김병민은 이들 작품들을 모두 소개하여 그의 선집을 통해 작품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작품도 단재(신채호)의 현실 및 역사관, 문학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소개는 의미가 크다.
  또한 그는 책의 후미에 신채호의 유고 작품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목록 가운데 『룡과 룡의 대격전』 및 그의 유고집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은 아래와 같다.

소설—「건륭황제의 꿈」
시—「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
수상—「사상가의 노력을 노력하는 때」, 「태산행기」
사학논저—「역사총론(歷史總論)」, 「강역고(疆域考)」, 「선랑사통론(仙郞史通論)」, 「전설시대사(傳說時代史)」, 「고구려사(高句麗史)」, 「단군강역도만주국(壇君疆域圖滿洲國)」, 「해북열국(海北列國)과 고구려(高句麗)」, 「조선사를 외국인에게 배우지 말지어다」, 중국사관(中國史觀) 방면 논문 3편(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 한국문화사, 1994, 250~252쪽).

  이것들은 신채호의 유고 작품 중 아직도 그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김병민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북한에 유고로 남아 있다. 북한에 있는 유고는 어서 빨리 국내로 들여와 전집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6. 최근 발굴 작품

  박정규는 『용파집(龍坡集)』에 실린 용파(龍坡) 신풍구[申豊求(1837~1932)]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시,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광무5년(1901)에 지은 오언배율, 그리고 「단재잠(丹齋箴)」을 발굴하여 소개했다(박정규, 「국내에서의 신채호 연보와 쓴 글에 대한 고찰」, 『단재신채호연구의 재조명』, 단재문화예술추진위원회, 2006, 62~67쪽 및 박정규 외 편, 『단재신채호』,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2006, 116쪽). 전집에서 첫 번째 것은 박정규처럼 그 내용을 따라 「용파수연시(龍坡壽宴詩)」로 이름을 붙였으며, 오언배율은 “광무(光武) 오년(五年)(1901) 신축(辛丑) 이월(二月) 칠일(七日) 신채호(申采浩) 배(拜)”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형식에 따라 간단히 「오언배율(五言排律)」이라고 붙였다. 「단재잠」은 [단재 신채호 선생 제23주기 추도식](1959.4.) 자료집에 실린 것으로 4자 14행 56자의 운문 형태를 띠고 있다. 그의 소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는 이 밖에 신영우의 글속에 포함된 한시와 단재(신채호)가 이화사에게 준 작별시도 중요한 작품으로 생각한다. 전자는 특별히 제목이 없어 임의로 「무제(無題)」로 이름 붙이고, 후자는 “자선이연경시(子鮮離燕京時) 신채호증자선이작별시(申采浩贈子鮮以作別詩)”라는 구절이 있어 편의상 「작별시(作別詩)」로 지칭했다. 전집간행위원회에서는 변영만의 글에 포함된 7언절구를 「영오(詠誤)」라는 이름으로 실었는데, 신영우가 소개한 7언배율은 시에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고원문물총의전(故園文物總依前) 유아풍류불용선(儒雅風流不用仙)
봉수옹창위특지(峰樹擁蒼爲特地) 현영가백우량천(哯永呵白又凉天)
향수월조방성몽(鄕愁越鳥方成夢) 시의오잠정입면(詩意吳蠶正入眠)
음파독총겸화⊙[吟罷讀叢兼話⊙(扌+覇)] 한인취미신유연(閒人趣味信悠然)

  이 시도 신영우가 [단재작(丹齋作)]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당연히 단재(신채호) 작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편의 한시가 있다.

부생사십성하사(浮生四十成何事) 
빈병상수불잠리(貧病相隨不暫離) 
각한수궁산진처(却恨水窮山盡處)
임정가곡역난위(任情歌哭亦難爲)

  이 시는 『동아일보』(1936. 2. 27.)에 실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신문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동호가 발굴하여 『단재신채호와 민족사관』(형설출판사, 1980, 685쪽)에 실었다. 이 시가 있었음은 “[부생사십성하사(浮生四十成何事) 빈병상수불잠리(貧病相隨不暫離)]라는 그의 한시(漢詩) 일구(一句)는 그의 아시(兒時)로부터 잠시도 면치 못한 적빈(赤貧)과 다병(多病)을 자탄(自嘆)한 일구(一句)”라는 원세훈의 추도문에서도 알 수 있다(원세훈, 「단재 신채호」,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형설출판사, 1977, 395쪽). 이 시는 “흥경도중작(興京道中作) 갑인(甲寅)”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1914년 흥경(興京) 가는 길에서 쓴 시]라는 말이다. 단재(신채호)는 1914년 단오 때 환인현(桓仁懸)에 있었음을 「무제」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위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3,4행이 「백두산도중」과 거의 같은데, 어떤 연유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한 작품을 먼저 짓고 나중에 손을 봐서 다른 작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기서는 해설에서 소개만 하고, 「백두산도중」만 전집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이 외에도 단재(신채호)의 시는 더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정인보가 “시조(時調)에 대하여 간혹 기탁(寄託)함이 있었다 하나 상해 있을 때는 보지 못한 바요, 한시(漢詩)에 있어서는 자못 영롱(玲瓏)․태탕(駘蕩)한 경계가 있어서 비록 솔이(率爾)한 저작이라도 사치(辭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개정판 전집(하), 461쪽)라고 하는 대목이나 정인보의 [국시(國詩)] 운운하는 대목은 단재(신채호) 시(시조, 한시 포함)가 많았음을 의미하지만, 실제 전집에 포함된 시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가정잡지』 제2년 제3호(1908년 3월호)에 실린 「익모초」의 제1회 게재분을 찾아냈다. 이 잡지는 현재 연세대 중앙도서관 귀중본실에 있는데, 여기에 소설 「익모초(益母草)」(40~47쪽) 제1회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제1회에 저자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제2년 7호(1908. 7.)에는 [신채호]로 분명히 밝혀져 있다. 단재(신채호)전집에는 현재 1908년 7월호에 실린 「익모초(속)」(5회 연재분 추정)만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최완길을 주인공으로 하여 애국심을 다룬 것으로, 단재(신채호)의 초기 문체 및 소설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작품에는 “기자왈”이라 하여 작가의 주장을 사평형식으로 직접 제시하였다. 다만, 『가정잡지』가 1908년 4월~ 6월호가 비어 있고, 또한 8월호 이후가 없는 상태라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장덕진군(張德震君)의 유서(遺書)와 일지서(日誌敍)」도 이번에 발굴되어 소개되는 글이다. 『장덕진전』에 붙인 단재(신채호)의 서문으로 27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장덕진의 전에 부친 글이다.
  그리고 이번에 단재(신채호)의 두 편지도 추가하였다. 하나는 4244(1911)년 9월 8일 안창호에게 보낸 한글편지로,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신채호가 미주로 오라는 안창호의 편지를 받았으나 [『권업신문』 발간] 관계로 미주로 가기 어렵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 다음 편지는 4245(1912)년 11월 1일에 쓰인 한문편지이다. 이 편지에서도 안창호가 단재(신채호)를 미주로 불러들이려 한 대목을 볼 수 있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재정과 건강상의 이유로 도산(안창호)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내용 가운데에는 이준의연회(李儁義捐會) 발기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이 두 편지는 신용하에 의해 이미 1986년 3월에 『한국학보』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글 편지는 모두 소개되었으나 한문 편지의 경우 3면 중 마지막만 소개되었다. 이후 『도산안창호전집』에 전체가 영인되어 실렸다.

7. 전집의 편제와 구성

  여기에 실린 신채호 문학은 『룡과 룡의 대격전』, 『신채호문학유고선집』, 그리고 『단재전집』 수록 문학과 최근 발굴 작품이다. 단재(신채호)는 계몽기에 『이태리건국3걸전』을 역술하고 『을지문덕』,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의 역사전기물을 썼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전기물은 제4권 역사편에 이미 수록하였다. 그런 관계로 이 권에서는 주로 순문학적인 작품들을 수록하기로 하였다. 먼저 단재유고선집인 『룡과 룡의 대격전』을 실은 것은 비록 윤색이나 누락 등의 문제가 없지 않으나 단재(신채호)의 유고를 직접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유고를 볼 수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김병민의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을 그대로 실은 것은 단재(신채호)의 원고에서 가장 손상이 적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전집간행위원회가 발굴하여 『단재전집』에 실은 작품들과 최근 새로이 발굴한 작품들을 실었다.
  편제는 시·소설·비평·서신·서로 나누었다. 시 가운데 「무제(無題)」(1896), 「용파수연시(龍坡壽宴詩)」(1897), 「오언배율(五言排律)」(1901), 「서분(書憤)」(1907),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1910),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1914), 「추야술회(秋夜述懷)」(1922) 등은 작품의 창작 년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영오(詠誤)」, 「작별시(作別詩)」, 「한나라 생각」, 「단재잠(丹齋箴)」 등은 창작 년대가 미상이다. 순서는 창작 연도순으로 하며, 한시·시·시조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래서 한시는 창작 년대를 알 수 있는 「무제」, 「용파수연시」, 「5언배율」, 「서분(書憤)」, 「구력세제(舊曆歲除) 봉우술회(逢友述懷)」,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추야술회(秋夜述懷)」 등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이어 년대 미상의 작품인 「증(贈) 기생(妓生) 연옥(蓮玉)」, 「증별(贈別) 기당안태국(期堂安泰國)」, 「독사(讀史)」, 「북경우음(北京偶吟)」, 「술회(述懷)1」, 「술회(述懷)2」, 「영오(詠誤)」, 「작별시(作別詩)」를 실었다. 여기에서 「무제」, 「5언배율」, 「용파수연시」, 「작별시(作別詩)」, 「단재잠(丹齋箴)」 등은 최근 발굴되어 소개된 것들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번역을 실었으며, 전집에 실린 작품은 이은상의 번역을 가져왔고, 그밖에 박정규·이충구․김병헌·정우락 제위의 번역을 참조하였다. 이어 일반시 「한나라 생각」과 시조 「금강산」, 마지막으로 운문 형태인 「단재잠」을 실었다. 
  소설에는 유일하게 「익모초(益母草)」를 실었다. 이번에 발굴된 「익모초」 제1회 발표분을 추가해서 실었다. 비평에는 계몽기 가장 중요한 비평문 중 하나인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대한매일신보』, 1909. 11. 9.~12. 4.)를 실었다. 1920년대의 중요한 글인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동아일보』, 1924. 1. 1.) 역시 비평문이지만, 전집 제6권 신문 등에 수록된 논설류에 실려 여기에서는 배제했다. 그리고 새로이 발굴된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 2통(1911, 1912)과 「차형혜감(車兄惠鑑)」(1928년경)을 실었다. 특히 한문 서신의 경우 정우락 교수의 번역을 참고하여 실었음을 밝혀둔다. 서문으로는 「세계삼괴물서(世界三怪物序)」(1908. 3.)와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서(序)」(1908년 여름)를 비롯하여 이번에 새로 발굴된 「장덕진군(張德震君)의 유서(遺書)와 일지서(日誌敍)」(1925)를 실었다.
  그 밖에 기존 전집에 들어 있으면서 제외한 것이 세 작품 있음을 밝힌다. 하나는 「철추가」이며, 또 하나는 「고락유수」, 마지막으로 「단기고사중간서」이다.

박물관(博物館) 도라드러,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쓰고, 남은 철추(鐵椎), 한번 구경하고나니, 잠겼던 기력(氣力)이 버쩍 나고, 숨었던 사상(思想)이 절로 난다, 더 철추(鐵椎)를 번뜩 들고, 박랑사중(博浪沙中) 드러가서, 진시황(秦始皇)의 타고 앉은 정차(正車)를, 와직근 퉁탕 부시고, 더 폭학(暴虐) 무도(無道)한 자(者)를, 분골쇄신(粉骨碎身)한 후(後)에, 우리 한국(韓國)의 국위국광(國威國光)을, 만고(萬古) 역사상(歷史上)에 빗내며, 자고(自古)로, 회포(懷抱)를 펴지 못하고, 목적(目的)을 달(達)치 못한, 고점리(高漸離) 형가배(荊軻輩)의 천추원혼(千秋怨魂)을, 위로(慰勞)코저(『대한매일신보』, 1910. 3. 25.).

  「철추가」는 『대한매일신보』 국한문본과 국문본에 모두 실려 있다. 국한문본에 실린 작품이 전집간행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어 개정판 전집에 실렸다. 국한문본에서는 저자가 [후창해(後滄海)]로 소개되어 있다. 후창해란 창해역사의 뜻을 가진 이후 사람이란 말이다. 아마도 단재(신채호)가 『조선상고사』 등에서 철추, 또는 창해역사 등을 언급하였기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문본에서 저자는 [강릉이창해]로 되어 있다. 이로 유추하건대, 이씨 성을 가진 강릉 사람으로 보인다.

  전집 하권의 [소설]에 포함시킨 「고락유수」 같은 것은 단재(신채호)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한 여성의 우여곡절의 일생을 그리려는 시도가 담긴 미완성작 「고락유수」가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단재(신채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제외하고서라도 1913년 3월 『시천교월보』에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이유는 충분하다. 1911년 2월 17일 창간되어 1913년 4월 27일 통권 27호로 종간된 『시천교월보』는 친일파 이완용이 창립한 시천교의 기관지였다. 신문의 이런 성격을 단재(신채호)는 몰랐을 리가 없었고 그렇다면 친일파에 대한 증오가 하늘까지 치솟았던 그가 거기에 글을 실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단재(신채호)는 머나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있어서 국내와는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므로 「고락유수」는 단재(신채호) 작품에서 빼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최옥산, 「문학자 단재신채호론」, 인하대 박사논문, 2003. 8, 66~67쪽). 
 
  최옥산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고락(苦樂)이 유수(有數)」(「고락유수(苦樂有數)」의 원제)를 단재(신채호) 작품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비록 저자가 [무애생]이라고 명기되어 있을지라도 신채호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세계3괴물서」에서 신채호는 [무애생(生)]이라고 썼지만, [무애생]이 신채호만의 호로 보기 어렵다. 이 작품은 1913년 4월(통권 27호)에 1회 게재되고, 이후 잡지의 폐간으로 게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즉 신채호 명의의 서문은 사실상 이화사의 소작으로 이화사가 광복회 「고시문」의 내용을 변개하여 서문에 넣었던 것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다(조인성, 「한말 단국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 『단기고사』,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3, 국사편찬위원회, 1989. 10, 253쪽).

  「단기고사 중간서」에는 “임자(1912)년에 내가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를 때에 지우 이화사가 일권 고사(古史)를 가지고 와서 장차 출간할 뜻으로 내게 서문(序文)을 청하거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재(신채호)가 1912년에 안동현에 이르렀을 때 「중간서」를 썼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채호는 1911년 12월말부터 1912년 5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문의 발간 사업으로 인해 대단히 바빴으며, 그런 그가 안동에 갔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이갑이 보낸 편지 3통[1911(4244). 11. 28, 1912(4245). 1. 29, 1912(4245). 2. 3.]을 보면 그 시기 단재(신채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채호가 1912년 11월 1일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소유소수지물(若少有所須之物) 당일관중국(當一觀中國) 차왕내지(次往內地)”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1910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이래 1912년 10월까지 중국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12년 초에 안동에 갔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게다가 「중간서」에는 “방술(方術)”, “반만년 역사상”, “중화인”, “중화각지”, “원저 주인공 야발 선생”, “만고불멸” 등 단재(신채호)의 표현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당시 단재(신채호)는 주로 “대동사천재(大東四天載)”, “지나(중국)”, “지나(중국)인” 등의 표현을 썼다. 단재(신채호)는 1916년 「꿈하늘」에서 “단군신조(檀君神祖)께서 교(敎)와 정치(政治)를 세우사 우리의 시조(始祖)가 되시고 강역(疆域)은 남북(南北)이 만리(萬里)가 되며 만대(萬代)에 미쳤사오나 그러나 어찌해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은 신지비사(神志秘詞) 여들짝 밖에 전(傳)치 못하였던가”라고 하여 단군에 관한 기록이 더 이상 없음을 고백하였다. 이후 단재(신채호)의 논저에서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도 「단기고사중간서」가 단재(신채호)의 글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세 편 모두 이번 전집에서 배제했음을 밝혀둔다.

8. 남은 말

  막상 전집을 구성하기 위해 작품을 찾았지만 기존 전집에서 크게 더한 것이 없다. 사실 이번 전집에서는 새롭게 추가해야 할 작품으로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먼저 북한에 있다는 단재(신채호)의 문학유고들이다. 이미 소개된 것 외에도 보다 많은 문학유고들이 북한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용걸·김병민, 그리고 안함광[안함광은 「신채호와 그의 문학」(『조선문학』 210, 1965. 2, 112쪽)에서 “시가 작품 「새벽의 별」·「너의 것」·「고려영」·「매암의 노래」·「청루수」·「나비를 보고」·「본국 홍수」…등이 있다.”라고 했다.]의 진술을 통해 아래와 같은 작품은 북한에 있지만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건륭황제의 꿈」
시—「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 「큰 바람」, 「감회」, 「청루수」, 「본국홍수」
수상—「사상가의 노력을 노력하는 때」, 「태산행기」.

  박정규는 오래전부터 단재(신채호)의 작품 발굴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그 일환으로 『단재신채호시집』을 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 시집에는 이전에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박정규는 아래 작품을 단재(신채호)의 시로 규정했다.

  「고식(姑息)과 시계(『황성신문』, 1907. 2. 11~12), 「독립가」(獨立歌)(『황성신문』, 1907. 2. 16), 「청포곡(聽布穀)」(『황성신문』, 1907. 4. 27), 「만필감흥(漫筆感興)」(『황성신문』, 1907. 5. 11),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황성신문』, 1907. 6. 12), 「열심(熱心)」(『황성신문』, 1907. 6. 27), 「가절감회(佳節感懷)」(『황성신문』, 1907. 8. 17), 「초혼가(招魂歌)」(『대한매일신보』, 1907. 12. 17), 「독립자유가(獨立自由歌)」(『대한매일신보』, 1908. 1. 1), 「소망」(『소년』, 1910. 8), 「안 잘 시간에 자는 잠들」(『권업신문』, 1912. 5. 26), 「시일」(『권업신문』, 1912. 8. 29).

  이 가운데에서 「고식과 시계」, 「청포곡」, 「만필감흥」,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 「열심」, 「가절감회」는 『황성신문』에 실린 운문체 논설이요, 「시일」은 『권업신문』에 실린 논설이다. 박정규는 「환기(喚起) 이천만민(二千萬民)하여 축팔만이천리지독립성(築八萬二千里之獨立城)」에 포함된 가사 「독립가」와 「신년송축」에 포함된 가사 「독립자유가」를 시로 소개했다. 그리고 논설 「영입귀문관(寧入鬼門關_이언정 물향묵서가(勿向墨西哥)」는 전반부만을 시로, 논설 「위국민대한양신문초혼(爲國民大韓兩新聞招魂)」의 후반부를 「초혼가」라는 시로 소개했다. 그는 이 시기 무서명 논설이 단재(신채호)에 의해 집필되었기 때문에 운문체 논설을 단재(신채호)의 시로 소개한 것이다. 「안 잘 시간에 자는 잠들」은 『권업신문』에 [단평]란에 실린 무서명의 산문이다. 이것은 행갈이가 되어 있고, 운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단재(신채호)를 논설에 삽입 시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했는데(『단재 신채호』, 136쪽), 그의 주장은 일부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용에 앞서 보다 확실한 작가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기에 전집에 싣는 것을 보류하였다.
  또한 권오만은 『대한매일신보』 소재 사회등가사를 연구하며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신채호 자신이 「사회등」 가사를 제작한 경우이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재직하면서 그의 활동을 논설 집필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중략)… 아마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610여 편의 「사회등」 가사 중 다수의 작품들이 그에 의하여 쓰여졌으리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채호는 「사회등」가사의 전개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고 할 수 있다(권오만, 『개화기시가연구』, 새문사, 1989, 375쪽).

  그는 신채호가 사회등가사의 작가 중 가장 중요한 작가(382쪽)였으므로 단재(신채호)는 사회등가사를 형성, 전개한 문학인으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고(380쪽)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채호의 사회등가사 참여 및 제작 여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비록 무서명으로 발표되어 어려움이 있지만, 앞으로 단재(신채호)의 사회등가사 형성 및 제작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전집을 묶었지만 여전히 전집은 미완성이다. 현재로선 이것이 최선이라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오히려 책임회피와 같은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언젠가 북한의 유고가 입수되고, 또한 단재(신채호)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보다 완전한 전집이 나오길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제8권 독립운동
윤병석(인하대학교 교수)

 1

  제8권 「독립운동」은 단재 신채호의 독립운동에 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단재(신채호)는 한국근대사학을 선도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또한 그는 구국계몽운동과 그를 이은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한 언론인이며, 저상(沮喪)하던 민족정기를 환기시킨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다. 그보다도 불요불굴의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한 단재(신채호)는 일제 침략으로 유린된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강직하고도 철저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다.
  단재(신채호)는 능문명설(能文名說)로 기술된 수많은 독립운동의 문자를 남겼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이와 같은 문필활동 외에도 조국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헌신한 애국적 행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 ‘독립운동’ 편은 그가 남긴 유문(遺文) 외에 행적을 밝히는데 필요한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분류는 제1부에서 ‘국내 구국계몽운동’, 제2부에서 ‘망명, 독립운동’, 제3부에서 ‘3·1운동(1919) 후 독립운동’ 자료로 대분하여 정리하였다.

 2

  단재(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山內)에서 태어났다. 조실부형하고 8세 때, 고향 청원군 낭성(琅城)으로 이사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낸 조부 신성우(申星雨) 밑에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여 14세 무렵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고, 시문(詩文)이 뛰어나 인근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18세 때에는 개화파 재상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그가 소장한 신·구(新·舊) 서적을 섭렵하고, 그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3년간 관내에서 기숙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만 머문 것이 아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불교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담하게 신사조(新思潮)를 수용하여 개화혁신과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근대 계몽사상가로 급부상하였다.
  단재(신채호)는 26세 때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신규식(申圭植)·신백우(申伯雨) 등과 산동학당(山東學堂)을 개설, 신교육운동에 솔선하였다. 얼마 후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 주필로 초빙되어 강렬한 항일논설로 구국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논설이 빌미가 되어 그 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탁(梁起鐸)이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 담당 주필로 옮겨 박은식(朴殷植)을 이어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언론을 선도하였다.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에 새로운 ‘조선사(朝鮮史)’의 정립을 시도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 민족주의 사학의 단초(端初)를 열었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전기물 『을지문덕』과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이태리건국삼걸전』을 저술, 구국을 위한 애국심 고취에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는 안창호·양기탁·이동녕·박은식·전덕기·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최후의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제1부 ‘국내 구국계몽운동’에는 단재(신채호)의 출신(出身)과 가계를 밝히는 세보(世譜)를 비롯하여 성장, 수학기의 문명(文名)을 실증할 자료와 성균관박사의 서임(敍任)·퇴임(退任),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정잡지』 등의 주필 편집 논설기자 등을 맡아 항일언론을 폈던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신민회에 가담하여 구국활동에 솔선한 자료도 망라하였다.
  이들 자료는 단재(신채호)가 망명 전 국내에서의 구국 행적을 직·간접적으로 실증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는 흔히 ‘신박사(申博士)’로 호칭되던 단재(신채호)의 성균관박사 칭호 자료도 포함되었다. 26세 때인 1905년 4월 4일 판임관육등(判任官六等)에 서임된 ‘성균관박사’이나, 그 다음날인 4월 5일 의원 면직된 문서와 신문기사들이다. 또한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 주필로 항일언론을 펴던 단재(신채호)가 1907년 11월 5일부터는 박은식을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주필로 옮겨 대한제국 최후의 문필보국(文筆報國)의 항일언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국한문판이 8,043부, 한글판이 4,650부,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가 463부로 총 13,256부가 발매된 것으로 집계된 자료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단재(신채호)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 신민회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양기탁 등과 같이 ‘밤늦게까지 주연을 열고 만세를 불렀다’는 일제 통감부의 정보기록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국계몽운동시기 자료 중에는 『독립협회약력(獨立協會略曆)』과 같이 단재(신채호)의 활동상이 기술되었으나 자료의 성질상 고도의 사료 비판이 필요한 것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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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신채호)는 31세 때인 1910년 국망을 앞두고 신민회 동지와 망명길에 올라, 그해 6월 ‘청도회담(靑島會談)’을 거쳐 국치일 전후 러시아 연해주에 첫 망명지를 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곳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과 『대동공보(大東共報)』를 계승한 『대양보(大洋報)』를 어렵게 간행하였다. 이어 권업회(勸業會) 창설에 가담, 언론부장으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을 맡아 국외에서의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서북간도와 국내를 연계, 의열투쟁을 결행하는 광복회(光復會)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년 남짓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단재(신채호)는 1913년 여름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을 받아 북만주를 거쳐 중국 상해(上海)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57세를 일기로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망명생활을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인 남만주 서간도(西間島) 지방을 왕래하면서 조국광복투쟁의 최전선에서 헌신하였다.
  제2부 ‘망명, 독립운동’에는 단재(신채호)의 연해주 망명과 그곳에서의 『대양보(大洋報)』와 『권업신문(勸業新聞)』의 간행 및 ‘권업회(勸業會)’ 활동 자료를 수록하였다. 또한 중국 상해(上海)와 북경(北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관여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관한 자료도 포함시켰다.
  단재(신채호)의 망명은 나라의 멸망을 목전에 둔 1910년 2월 국외독립운동기지 선정을 위한 신민회 결정에 따라 안창호·김지간(金志侃)·정영도(鄭英道) 등과 함께 결행되었다. 그러나 망명 경로는 인천에서 해로를 택해 청도(靑島)로 간 안창호 등과 달리 육로로 중국 안동(安東)을 거쳐 청도에서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 곳에서 그해 6월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청도회담(靑島會談)을 개최하고 청도에 모인 망명객 일행들과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발하였다. 이와 같은 망명과 청도회담에 관한 자료는 희귀하다. 그런 중에서도 정영도의 『증언록』과 이정희의 『아버지 추정 이갑(秋汀 李甲)』 속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단재(신채호)는 권업청년회(勸業靑年會) 등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서 무엇보다 항일언론을 재건하는 『대양보』와 그를 이은 『권업신문』 간행에 전력하였다. 그동안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로 대표되던 연해주지역 한인의 항일언론은 1910년 8월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전후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인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폐간되었고, 관련 인물들은 피체되었거나, 러시아 영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치전후 연해주지역 한인이 결속하여 전개한 성명회(聲明會) 활동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편성 등의 중요 민족운동은 대변지 없이 추진될 수밖에 없는 애로를 겪었다.
  연해주 한인사회는 이주 전후에 따른 원호(元戶)와 여호(餘戶)의 차별과 출신지역에 따른 북도(北道)·서도(西道)·경기(京畿)파의 대립, 그리고 이념에 따른 의병계열과 계몽계열로 얽혀 복잡한 정치 성향을 나타내어 단합된 항일민족운동을 추진하는데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이와 같은 현실적 조건은 여러 갈래 한인사회의 의견통일과 자금 마련, 러시아 당국으로부터의 발행허가 취득, 일제의 방해공작의 제거 등 어려운 문제와 중첩되어 단합된 항일노선을 걷기에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언론보국(言論報國)을 위한 헌신적 활동은 1911년 6월 18일 『대양보』의 창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에는 연해주 한인들의 단재(신채호)에 대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 이래의 항일언론인으로서의 성명(聲名)과 신뢰가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양보사의 임원은 사장에 최재형(崔才亨), 총무에 차석보(車錫甫), 러시아어 번역 유진률(兪鎭律), 발행인에 김대규(金大奎), 회계에 김규섭(金奎涉), 서기에 김만식(金晩植), 집금인(集金人)에 이춘식(李春植)으로 짜여 졌고, 단재(신채호)는 신문 내용을 총괄하는 주필을 맡았다. 대외적으로 편집 겸 발행인은 니콜라이 삐토르뷔취 유가이라는 러시아 귀화인 이름을 가진 유진률(兪鎭律)이 맡고 주필에 신채호로 선임되었다. 신문체제는 사설을 비롯하여 국내전보·외국전보·각국통신·최근시사·논설·대한통신·잡보·기서 등의 난을 마련하여 일견 『대동공보』와 유사한 편집체제를 갖추었다. 그보다도 주 2회 발행하는 이 신문은 창간과 더불어 내용이 철저한 항일기사와 민족의 독립언론으로 손색없이 채워져 일제가 가장 질시하는 언론으로 부상한 것이다. 일본영사관 측이 입수하여 일본어로 초역하여 상부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강동 재류의 동포에게 고함」이라 제한 창간호 논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강동 재류의 동포여, 머리들어 두만강 저편을 바라보면 동포가 적(일본)의 먹이(餌)가 되었다. 충신은 이미 죽고 애국지사는 투옥되었다. 신문과 학교는 박해를 받으며 토지 수용법이 나왔고 무명의 잡세가 날로 늘어간다. (중략) 『대양보』는 독자에게 금·은·칼·총과 충신·의사·독립·자유를 주어 적(일본)을 살해하게 할 것이다.(국역)

  또한 「대한통신」란에는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직후 국내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과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사내정의)] 총독 암살사건’, ‘신민회사건’으로 알려진 600여명의 애국자 탄압 사실을 필두로 각지 의병항쟁과 탄압, 불법한 토지 수용령 등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일제 무단통치의 내용을 규탄하고 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대양보』의 항일논조는 호를 거듭할수록 더해간다고 보고하고 있다.
  1911년 9월 14일자 제13호까지 발행이 확인되는 『대양보』는 실물 그대로 전래된 것이 현재 한 호도 없다. 그러나 이곳에 수록한 일제 측 비밀정보기록 중에는 제2호를 뺀 나머지 호수의 중요 내용을 초역 보고한 것이 남아 있어 그 실상의 일단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지 일본영사관에서는 이와 같은 『대양보』의 존재를 위태롭게 보고 발행을 불가능하게 하고자 비열한 비밀공작까지 폈다. 그것은 그들이 고용한 고급밀정 엄인섭(嚴仁燮)을 시켜 발행인인 현지 원호 출신의 유진률과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새로 세력이 커진 북도파 실력자 이종호(李鍾浩) 간에 이간 공작을 교묘히 펴면서, 그 해 9월 17일 『대양보』의 인쇄활자를 절취하게 한 것이다. 『대양보』의 상용 인쇄활자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00개의 활자를 몰래 절취하여 앞으로 인쇄를 다시 못하게 만들고 그 책임을 교포간의 알력으로 꾸민 비열한 공작을 편 것이다. 사실 대양보사 측이나 교포사회 측에서는 이와 같은 일제 측 공작을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일제가 저지른 그 진상을 이런 자료로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의 과제 가운데 이와 같은 사실의 규명 못지않게 또한 중요한 것은 어디엔가 전래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실물 『대양보』를 조사 수집하여 귀중한 항일언론의 내용을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대양보』 이전의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대양보』 이후의 『권업신문』의 실물들은 결호가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 성 페테르부르크 소재 국립도서관에 소장 전래되어 귀중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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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신채호)는 연해주 망명지에서 『대양보』 간행 활동과 함께 권업회(勸業會) 창설과 그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 간행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권업회는 단재(신채호)의 『대양보』 발행과 전후하여 개척리(開拓里)라고 부르던 한인 최초의 집단 거주지가 철거 당하고 새로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1911년 5월 19일 이종호·김익용(金翼鎔)·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조창호(趙昌鎬) 등 한인사회 각계파의 인물이 망라된 47인이 발기하였고, 동월 29일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성립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회장에는 신망 높던 그곳 한인사회 노야(老爺) 출신의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는 저명한 의병장 출신의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고, 단재(신채호)는 김그레고리·엄인섭·조장원·유진률·김유명 등 11인과 함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후 최대의 한인 민족운동기관으로 창립된 권업회는 대외적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권업회’라는 경제주의 단체임을 강조하였고,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신청하여 연흑룡주에서 절대 전제권을 가진 곤닷지 극동총독의 허가까지 얻어 내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17일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도 연해주 한인사회가 단합되어 활동할 수 있게 정비하고 그에 따른 임원을 선출, 조국독립의 쟁취를 최고 이념으로 하는 항일민족운동을 각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펴갔다. 이 총회에서 권업회를 대표하면서 실질적 운영 책임자가 되는 의사부 의장에는 헤이그 특사로 성명을 떨친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는 이종호(李鍾浩)가 선임되고, 단재(신채호)는 신문부에 부장겸 주필에 선임되어 『권업신문』의 창간과 발행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단재(신채호)는 이상설·이종호·홍범도·이근영(李根英)·조장원(趙璋元)·이민복(李敏馥)·김춘화(金春化) 등과 함께 권업회 발전에 앞장섰다.
  특히 단재(신채호)는 일제 공작으로 부득이 정간된 『대양보』를 잇는 『권업신문』 창간에 주력하여 권업회의 대변지로 부상시키는 한편 강력한 항일민족언론으로 부활시켰다. 『권업신문』은 명의상 발행인을 블라디보스토크 시의원인 이반 삐투르즈코프를 내세우고 있으나 단재(신채호)가 신문부장으로 총무 한형권(韓馨權)과 부원 박동원(朴東轅)·이근용(李瑾鎔) 등과 함께 『대양보』를 잇는 항일민족언론을 펴고 있었다. 인쇄활자를 절취당했으므로 부득이 필사 석판인쇄로 주1회 2,000부를 발행하는 신문으로 키워갔다. 특히 제2부 ‘망명, 독립운동’에 수록된 『대양보』와 『권업신문』, 그리고 권업회의 관련 자료는 한·일(한국·일본) 간의 중요자료를 망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측은 한인의 국외활동 기지로 가장 주목되는 연해주지역에서 『대양보』와 그를 잇는 『권업신문』이 간행되고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인 권업회 활동을 중시하여 그를 탄압 와해시키고자 현지 총영사관을 비롯한 각종 군관민의 정보기관을 통하여 철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비열한 탄압공작을 폈다. 수록된 자료는 현재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자료 중 단재(신채호)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한편 한국 측 자료는 국민회 관련 문서 속에 포함된 백원보(白元普)·이강(李剛)·이갑(李甲) 등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국민회 계통 인사들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 속에 담겨 있는 단재(신채호)의 현지 활동상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귀중자료들이다. 안창호는 단재(신채호)와 연해주 망명을 이어 미국에 간 후 단재(신채호)를 미국에 초청하여 『신한민보(新韓民報)』 등 국민회의 항일 언론을 맡기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단재(신채호)는 응하지 않았다. 단재(신채호)는 연해주에서 활동한 후에도 북만주를 돌아 상해와 북경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과 국사연구에 골몰하였다. 단재(신채호)로선 신명을 다 바친 독립운동의 현장이며 더욱이 그가 탐구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역사 유적이므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이라 해석된다.
  단재(신채호)는 1913년 후반기 이후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고구려의 흥기지인 서간도 회인(懷仁)에 가서 대종교에 입교도 하고, 『조선사(朝鮮史)』를 지어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년 남짓 머문 그곳에서 원근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비롯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 실측하고 백두산에 올라 고대사의 영광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경에 돌아와 『중화보(中華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여 호구(糊口)하면서, 국사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런 중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망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킨 중편 소설 『꿈하늘(夢天)』과 『용과 용의 대격전』등을 비롯한 망명전 국내에서 발표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의 뜻을 이어가는 애국 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한진(韓震)·박용만(朴容萬)·김성(金成)·박은식(朴殷植)·조소앙(趙素昻)·박기준(朴基駿)·이일(李逸)·신헌민(申獻民)·홍엽(洪燁)·윤세복(尹世復)·신빈(申斌) 등 17인과 함께 연명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측 극비의 정보기록에 의하면 단재(신채호)는 연해주 망명 후 부터 그의 말년까지 언제, 어디에서나 국외한인 중 대표적 ‘불령선인(不逞鮮人)’,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지목되어 감시와 체포 숙청의 공작이 뒤따르는 신변 위협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단재(신채호)도 망명활동 중에는 유맹원(劉孟源)·유병택(劉炳澤)·박철(朴鐵)·윤인원(尹仁元)·신단(申端)·신채호(申彩浩)·신응우(申應雨)·신병희(申秉凞)·신병호(申秉浩) 혹은 중국식 이름인 왕조숭(王兆崇)·왕국금(王國錦) 등의 가명을 써서 신분을 감추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의 선언서·취지서·성토문·논설과 그 밖에 많은 시문을 지어 발표하면서도 아예 기명하지 않거나 별명 혹은 단생(丹生)·단재(丹齋)·무애생(無涯生) 외에도 금협산인(金頰山人)·열혈생(熱血生)·검심(劍心)·한놈·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단아(丹兒)·누사(淚史)·진생(震生)·대궁(大弓) 등 여러 필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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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을 맞은 단재(신채호)는 조국독립을 확신하고, 상해에 달려가 임시의정원의 개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여운형·장덕수 등의 ‘도일행적(渡日行跡)’ 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임시정부의 ‘외원중시’와 ‘대일유화’적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였다.
  제3부 ‘3·1운동(1919) 후 독립운동’에는 Ⅰ. 대한민국임시정부, Ⅱ. 북경군사통일회, Ⅲ. 무정부주의운동, Ⅳ. 순국과 그 밖에 시기를 명확히 구별치 못하는 단재(신채호) 행적 관련 자료 등을 수록하였다. 그 중 Ⅰ.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자료에는 서두에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지역에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가 주동이 되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와 국내 서울에서 13도의 국민대표가 선포한 ‘한성정부’ 관련 자료를 수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대한독립선언서에 연명된 김교헌(金敎獻)·여준(呂準)·이상룡(李相龍)·박용만(朴容萬) 등 민족대표 39인 중 1인으로 기명되었고, 한성정부에서는 조정구(趙鼎九)·박은식(朴殷植)·현상건(玄尙健) 등 18명으로 구성된 평정관(評政官)에 선임되었다.
  단재(신채호)의 상해 임시정부 참여는 1910년대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조완구(趙琓九) 등과 함께 각지에서 모인 29인의 임시의정원 개원의원의 1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적극 참여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록』은 임시정부 수립경위와 초창기 활동을 밝혀주는 현존하는 귀중 문서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연호 그리고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 등을 제정하고 임시정부의 국무원을 구성하는 관제를 마련,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요인을 선거한 임시의정원의 의사록의 일종이다. 단재(신채호)는 국무총리를 선거할 때 홀로 이승만의 선출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3·1운동(1919) 직전 미국에서 ‘위임통치안’을 제기한 인물로 독립정신의 흠이 있어 정부수반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결국 단재(신채호)의 이같은 이의제기로 임시의정원 의원 등이 먼저 국무총리 후보를 상호 추천하고 그중에서 3인을 공천후보로 의결하고 최종으로 무기명 단기식 투표에 의하여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선출하였다. 이때 단재(신채호)가 천거한 박용만(朴容萬)은 3인의 공천후보도 되지 못하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당선되고 말았다. 단재(신채호)는 크게 불만으로 여겼으나, 그대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전원위원장도 연임하는 등 임시정부 초창기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들어 임시정부 통합운동의 결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며, 연해주의 노령(러시아령)정부와 상해 정부가 통합하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비하고, 국무총리를 대통령제로 격상하는 헌법개정을 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격상시켰다.
  단재(신채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유화적인 임시정부의 지도노선을 바로잡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그해 10월 28일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혈전(血戰)을 강조하며 임시정부의 외세의존 노선을 규탄하였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최근우(崔謹愚)·신상완(申尙玩) 등의 ‘도일행적(渡日行蹟)’을 원세훈(元世勳)·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유호국민대회(留滬國民大會)를 개최하여 신랄하게 규탄하였다. 그들의 도일행적은 적인 일본으로부터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얻으려 ‘비사후례(卑辭厚禮)’하려는 전통 외교로써 ‘민의위반(民意違反)’ 행위가 되고 또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아닌 ‘개인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대변지 『독립신문』과 맞서 간행한 『신대한』의 창간사를 비롯한 각종 논설과 관련 기사는 이를 실증하고 있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 무렵 남형우(南亨祐)가 단장인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의 부단장으로 각종 일제 측 자료에 부침(浮沈)되고 있다. 단재(신채호)와 뜻이 맞는 정치결사로 여겨지나, 『신대한』과의 관계는 확실히 밝힐 수 없다. 또한 국내에서 안희제(安熙濟)·박광(朴珖)·신백우(申伯雨)·윤병호(尹炳浩)·서세충(徐世忠) 등이 재건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단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6

  단재(신채호)는 1920년에 들어서면서 활동 중심지를 상해에서 다시 북경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반대세력과 합작하여 군사통일운동(軍事統一運動)을 일으켜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군사 단체의 통합과 혈전(血戰)의 독립전쟁을 강조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제3부 Ⅱ. ‘북경군사통일운동’ 자료에는 혈전을 준비하는 제2 보합단(普合團)으로 불리는 ‘대한민국군정부(大韓民國軍政府)’를 비롯하여 그를 뒷받침할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관련 자료와 『천고(天鼓)』, 『대동(大同)』 및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등의 관련 자료를 합록하였다. 그 중 제2 보합단(普合團)은 1920년 4월 북경에서 단재(신채호)를 포함하여 박용만, 고일청(高一淸)·김창숙(金昌淑) 등 반(反)상해임시정부 인사 50여명이 군사통일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타도하고 혈전과 그를 수행할 국민군 편성을 강조하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외형상으로 ‘각 단이 합동하여 공진(共進)’한다는 뜻으로 ‘제2 보합단(普合團)’이라 불렀으나, 속으로는 상해 임시정부를 반대한 ‘대한민국군정부(大韓民國軍政府)’를 건립하려 한 것이고, 단재(신채호)는 그 정부의 내무장(內務長)의 직임을 맡았다.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규탄하고 나아가 임시정부의 부실하고 철저하지 못한 독립노선을 극렬히 반대하는 ‘성토문(聲討文)’을 지어 김원봉·김창숙·남공선·이극로·장건상 등 54인의 연명으로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무력투쟁의 강화를 위하여 박용만·고일청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개최하고 배달무(裵達武)를 서간도에, 남공선(南公善)을 북만주에 파견하여 각지 무력군단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김정묵(金正黙)·박봉래(朴鳳來) 등과 ‘통일책진회’ 결성을 발기하여 ‘첫째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전개하고, 둘째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셋째 군사 각 단체를 완전히 통일하여 혈전을 꾀한다.’라는 내용의 취지서를 작성 공포하였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군사통일회’를 소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해체와 혈전을 통한 독립전쟁노선의 강화를 천명하였다.
  북경에서 이와 같은 군사통일회의 활동은 상해에서 박은식과 원세훈(元世勳) 등 13인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 요구와 만주지역에서 경신참변(간도참변, 1920) 후 독립군 재정비를 추진하던 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의 동조를 받아 1923년 정초부터 상해에서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는 나라를 잃고 국내외에 유리하면서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국민의 대표자가 한데 모이는 총회를 개최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임시정부 문제 등을 총괄 심의하여 온 국민의 총의로 조국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활성화시키려던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1921년 초부터 제기된 국민대표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3일부터 프랑스 조계내 민국로(民國路) 침례교회당에서 국내외 61개 단체 대표 124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였다.
  독립운동계의 각계 명사가 거의 참석한 이 회의는 그해 5월 15일 제63차 회의까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였으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의제도 다양하게 시국 현안 문제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 정책, 혈전의 전술, 그리고 임시정부 문제 등 각 안건을 심도 있게 논의하여 합의 도출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임시정부 문제를 놓고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갈려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때 단재(신채호)는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이 섞인 창조파의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창조파는 개조파의 퇴장 불참 속에 회의를 속개하여 새로 창조하려는 정부의 헌법까지 제정하고, 기존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도 적극 가담한 이 창조파의 활동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문에 추대되고 김규식(金奎植)을 수반으로 ‘한정부(韓政府)’ 혹은 ‘조선공화국정부’도 미구에 와해되어 독립운동사상 큰 상처만 남겼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보다 앞선 1921년 초 북경에서 김창숙 등과 함께 순한문의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여 제7호까지 계속하면서 민족단합과 한·중(한국·중국) 공동의 독립운동 이념을 정립하려 하였으며, 혈전(血戰) 강조의 독립운동 전술 천명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군사통일과 국민개병의 ‘독립전쟁론’ 구현에 중점을 둔 군사통일회 기관지 『대동주보(大同週報)』를 주간하였다. 표지에 『대동(大同)』이란 표제로 간행된 『대동주보』는 현재 1921년 7월 9일의 제3호를 비롯하여 4·5·6·7호가 전래되어 군사통일운동의 노선을 실증하고 있다.
  또한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보다 약간 앞서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의열단선언(義烈團宣言)’이라고도 하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 독립운동사상 불후의 문자를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전후에 걸쳐 그의 민족주의 독립사상을 이론으로 기술한 명문탁설(名文卓說)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민족주의사상 내지 민족운동의 전술로 백미를 이룬다고 논찬되는 이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운동이 ‘민중(民衆)’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폭력(暴力)’만이 그 단계에서 가장 유효 적절한 독립운동의 전술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은 물론이요, 이른바 ‘준비론’, ‘외교호국론(外交護國論)’까지도 철저하게 비판하고, 이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이한 무기(武器)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악수하며 부절(不絶)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朝鮮)’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하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을 주창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제와의 투쟁에서는 단연코 여러 가지 민족주의운동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혁명이론(革命理論)으로 칭예(稱譽)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말 이래 단재(신채호)의 ‘신민론(新民論)’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민중의 직접혁명’ 이론으로 진일보시킨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7

  단재(신채호)는 1925년 전후로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경도하기 시작하여 1927년 동방 9개국 대표가 모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그 대회 선언문까지 작성하였다. 또한 그 대회 결의에 따라 실천운동에도 가담 ‘외국위체변조사건(外國爲替變造事件)’에 연루되어 대만 기륭(基隆)항에서 일제 경찰에게 잡혀 공판정에서 10년형을 받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에서 8년여를 복역하다 옥사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독립’을 전제로 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 이념과 전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최후 공판 진술에서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의연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Ⅲ. ‘무정부주의운동’에는 단재(신채호)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모험을 간직한 실천운동으로 내외의 이목을 경동하게 하고 자신을 여순감옥에서 옥중 순국으로까지 몰고 가게 한 무정부주의 관련 자료를 수합한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신문보도 기사를 조사 수집한 것으로 파괴, 살해 등의 의열활동까지 도모하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활동과 ‘외국위체변조사건’의 전말, 투옥 공판의 경위 등을 규명할 자료인 것이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사상의 수용과 내용을 깊이 탐구하기에는 부실한 면이 적지 않다. 앞으로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운동 연구의 심화를 위하여 관련 자료의 재보완 발굴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이와 전후하여 단재(신채호)는 오랜 지기(知己) 홍명희(洪命憙)의 교섭을 받아 국내에서 결성된 신간회에 가담하고 국외활동중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일제 측 자료에는 이와 전후하여 단재(신채호)의 공산주의운동 관련 자료가 더러 보이는데 이는 사실성이 거의 희박한 정보 자료인 것 같다. 철저한 검정과 사료비판이 선행된 후의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Ⅳ. ‘순국, 기타’에는 10년 형기를 받은 단재(신채호)의 옥중관련 자료와 부인 박자혜(朴慈惠) 여사와 아들 신수범(申秀凡)·신두범(申斗凡) 등 가족관계 자료 및 그밖에 시기와 내용을 정확히 밝힐 수 없는 행적의 단편 자료 등을 함께 수록하였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직후부터 속병 등 신병이 끊이지 않았고 생계의 궁핍이 겹쳐 안정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일제로부터는 수급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되어 생명을 노리는 감시와 피체 위험이 첫 망명지 연해주에서부터 남북만주, 중국대륙 어느 곳에서나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재(신채호)는 이런 주변 위험을 개의치 않고 어디에서나 한편으로 민족주의사학의 저작과 웅혼한 역사문학을 창작하면서도 철저하고도 강직한 독립운동의 전사로 일관하다 끝내 여순감옥에서 1936년 1월 18일 석방을 1년 8개월 앞두고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급보를 받은 부인 박자혜 여사와 아들 수범(신수범)이 여순 감옥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가 그렇게 그리며 걱정하던 처자가 앞에서 오열하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차가운 시멘트 감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 운명의 시각만을 남기고 있었다. 민족의 자유와 나라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단재(신채호)는 며칠 후인 2월 21일 아무도 임종을 지키는 이 없는 감방 속에서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명운을 다하였다. 일제로선 ‘옥중사망’이나 한국의 역사로선 장엄한 ‘순국선열(殉國先烈)’의 전범(典範)인 것이다.


제9권 단재(신채호)론·연보
최기영|서강대학교 교수

1. 신채호론

  『단재 신채호전집』 제9권은 신채호와 교분이 있던 친구나 후학 등의 기록을 수집하여 ‘신채호론’을 정리한 것이다. 신채호에 관한 인물평을 비롯한 논의는 그의 생존 당대에도 많지는 않았지만, 종종 있었다. 괴벽스러웠던 그의 성품이라든가 그의 학문적 업적 등에 대하여, 주로 교분이 있던 인물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언급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신채호가 체포된 뒤 두 차례 면회한 회견기나 부인 회견기 등이 소개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사』 등이 연재되자, 신채호의 학설을 비판한 안확이나 홍기문의 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신채호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와 논의는 그가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직후에 두드러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조사 또는 신채호 관련 기사를 싣고, 두 신문사에서 간행하던 월간잡지였던 『신동아』와 『조광』에서는 그를 기리는 추모특집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안재홍이 「오호(嗚呼) 단재(신채호)를 곡함」(2월 27일자)을, 홍명희가 「곡단재(신채호)」(2월 28일자)를 조사로 게재하였다. 이어 홍기문이 「신단재(신채호)학설 비판」이라는 제목의 글을 2월 29일자부터 3월 10일자까지 8차례 연재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에서는 정인보의 「단재(신채호)와 사학」(2월 26, 28일자)을 실었고, 심훈이 「단재(신채호)와 우당[友堂(윤희구)]」(3월 12, 13일자)을 실은 바 있다. 그리고 『신동아』 4월호는 「신단재(신채호)를 추억함」이라는 제목으로 정인보가 「잔억(殘憶)의 수편(數片)」, 서세충이 「단재(신채호)의 천재와 응체(凝滯) 없는 성격」, 신석우가 「단재(신채호)와 ‘의(矣)’자」, 해객(海客)이라는 필명의 인물이 「단재(신채호)고우를 추억함」이라는 추모의 글을 실었다. 『조광』 4월호에는 「돌아간 신단재(신채호)의 면영(面影)」이라는 표제로 「희(噫)! 불귀의 신단재(신채호)」(편집자)를 싣고, 안재홍의 「신단재(신채호)학설사관(申丹齋學說私觀)」, 이광수의 「탈출도중의 단재(신채호)인상」, 홍명희의 「상해시대의 단재(신채호)」, 이극로의 「서간도시대의 선생」, 이윤재가 「북경시대의 단재(신채호)」, 미망인 박자혜의 「님의 영전에」라는 위령제문을 수록하였다. 신채호의 시와 편지도 소개하였다. 이 두 잡지의 특집이 신채호에 관련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 『삼천리』에 원세훈이, 『중앙』에 변영만이 회고담을 통하여 신채호의 별세를 안타까워하였다. 또 홍기문은 신채호 역사학 전반에 대한 검토를 시도하였다. 사실 신채호의 생애와 관련해서 작은 사실들이 이러한 회고문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고, 또 신채호라는 인물의 분위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자료는 원칙적으로 신채호와 교분이 있거나, 직접적인 교분이 없더라도 1950년대까지 발표된 기록을 대상으로 삼았다.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회고록 등에서 확인하였다. 대체로 당대 신채호에 대한 논의는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곧은 성품을 드러내는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고, 그의 학문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그리고 추모시 등도 몇 편 있다. 특히 신채호와 막역한 교분을 지닌 변영만·변영로 형제와 홍명희·홍기문 부자, 안재홍 등이 신채호에 관하여 여러 편의 글을 쓴 바 있어, 크게 참조된다. 그리고 신채호와 관련된 신문기사도 일부 수록하였다.
  아래의 표는 『단재 신채호전집』 9권에 수록된 자료의 목록이다.

순번

제         목

 필자

  발표지

 발표시기

비고

 1

大勢의 回運-新大韓主筆 申采浩先生

 

革新公報 50

1919.12.25

 

 2

問題 업는 論文을 읽고

沈鴻武

東亞日報

1924.10.20

 

 3

國粹主義의 恒星인 丹齋申采浩 先生

卞榮魯

開闢

1925.8

 

 4

申采浩氏의 吏讀解釋

安自山

中外日報

1928.3.6-8

3회 

 5

大連監獄에서 申丹齋와 面會

李灌鎔

朝鮮日報

1928.11.8

 

 6

申采浩 夫人 訪問記

 

東亞日報

1928.12.12,13

2회

 7

朝鮮史硏究草를 보고

文一平

朝鮮日報

1929.10.15-16

2회

 8

鐵窓中의 申采浩消息

 

朝鮮日報

1931.6.10

 

 9

申丹齋의 輪廓

薊篁生

朝鮮日報

1931.6.12

 

10

朝鮮의 歷史大家 丹齋 獄中會見記

申榮雨

朝鮮日報

1931.12.19-30

7회 

11

申丹齋의 語源考證을 檢討함

洪起文

朝鮮日報

1935.2.5

 

12

두 번 面會時 全然 意識이 不明-申丹齋, 殞命時 光景 旅順갔든 徐世忠氏 談

徐世忠담 

朝鮮中央日報

1936.2.25

 

13

丹齋와 史學

鄭寅普

東亞日報

1936.2.26,28

2회

14

嗚呼 丹齋를 哭함

安在鴻

朝鮮日報

1936.2.27

 

15

哭丹齋

洪命憙
(碧初)

朝鮮日報

1936.2.28

 

16

朝鮮歷史學의 先驅者인 申丹齋學說의 批判

洪起文

朝鮮日報

1936.2.29-3.8

8회

17

哭丹齋

李楨

東亞日報

1936.3.8

 

18

丹齋와 于堂

沈熏

東亞日報

1936.3.12-13

2회

19

고 단 신채호 선을 조상함

홍언

新韓民報

1936.3.26

 

20

申丹齋와 紅色內衣

點下生

東亞日報

1936.4.12

 

21

申丹齋와 紅燈街

KCS

東亞日報

1936.4.14

 

22

殘憶의 數片

鄭寅普
(爲堂)

新東亞

1936.4

 

23

丹齋의 天才와 礙滯없는 性格

徐世忠

新東亞

1936.4

 

24

丹齋와 ‘矣’字

申錫雨

新東亞

1936.4

 

25

丹齋故友를 追憶함

海客

新東亞

1936.4

 

26

申丹齋 學說私觀-尊貴한 그의 史學上의 業蹟

安在鴻

朝光 2-4

1936.4

 

27

脫出途中의 丹齋印象

李光洙

朝光 2-4

1936.4

 

28

上海時代의 丹齋

洪命憙

朝光 2-4

1936.4

 

29

西間島時代의 先生

李克魯

朝光 2-4

1936.4

 

30

北京時代의 丹齋

李允宰

朝光 2-4

1936.4

 

31

가신 님 丹齋의 靈前에-祭文을 代身하야 哭하는 마음-

朴慈惠

朝光 2-4

1936.4

 

32

丹齋 申采浩

元世勳

三千里 4

1936

 

33

故 丹齋 申采浩 先生을 追悼함

震人

民族革命

1936.4

 

34

野人春秋(二)

金東里

朝鮮中央日報 

1936.5.24

 

35

실루에트 二三

卞榮晩

中央

1936.6

 

36

祭申丹齋文

卞榮晩

山康齋文鈔

1957

 

37

丹齋傳

卞榮晩

山康齋文鈔

1957

 

38

申采浩學社 上海에 設立

 

東亞日報

1946.4.9

 

39

解說에 대신하여-丹齋先生과 나-

李瑄根

花郞道硏究

1949

 

40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光輝의 人 史家 申采浩 선생

卞榮魯

新天地

1954.6

 

41

丹齋遺稿 出版會 첫 會合 열고 發足

 

東亞日報

1954.10.30

 

42

丹齋와 나

진록성

靑史 1

1955

 

43

申丹齋와 花郞硏究

林耕一

花郞의 血脈 1

1956

 

44

申采浩論

卞榮魯

思潮 10

1958

 

45

丹齋先生 逸話片片

卞樹州

朝鮮日報

1960.2.20

 

46

哭丹齋先生墓

李殷相

朝鮮日報

1960.2.20


47

獨立運動秘話

金昌淑

京鄕新聞

1962.3.2

 

48

-申采浩- 獨立과 自尊의 奇人風志士

柳光烈

記者半世紀

1968

 

49

아버님 단재

신수범

나라사랑 3

1971

 

50

悼申丹齋

金昌淑

心山遺稿 1

1973

 

51

病枕無寐憶 白凡丹齋二公

金昌淑

心山遺稿 1

1973

 

52

傳記-丹齋 申采浩 略傳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3

丹齋 申采浩 追悼辭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4

雪中 懷 采浩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5

哭 丹齋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6

又 哭 丹齋

申伯雨

畊夫申伯雨

1973

 

57

朝鮮愛國史家申采浩

柳子明

世界史硏究動態

1981.2

 

58

丹齋 申采浩 先生

趙擎韓

光州隨筆 23

1991

 

59

申采浩

柳子明

독립기념관소장본

자료번호
3-011973-000

 


2. 신채호와 관련된 일화

  변영로가 1920년대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쓴 4편의 신채호 관련 글은 중복되기도 하지만, 신채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친형인 변영만과 신채호가 가까웠던 탓에 망명 전의 신채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국수주의의 항성인 단재 신채호선생」(『개벽』 1925년 8월호),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신천지』 1954년 8월호), 「신채호론」(『사조』 1958년 10월호), 「단재(신채호)선생 일화편편(逸話片片)」(『조선일보』 1960년 2월 20일자) 등에 나타나는 신채호에 대한 기억은 중복되기도 하지만, 망명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변영로는 신채호와 18년 연령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지 않지만, 변영만을 통하여 전문한 기억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수십 년 신채호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가지고 있어 신채호를 알리는데 계몽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신채호를 “선생이 시는 지으나 시인은 아니시고, 논문은 쓰시나 전문적 논문가도 아니시며, 모든 전고설문(典考說文) 등에도 통하시긴 하다 하나 그렇다고 그 길에 전념하시는 이도 아니다. 선생은 어디까지든지 사가이시다. 조선의 랑케라면 선생께 무례나 아닐는지. 여하간 천재적 기분에 있어서 방불한 가장 경모할 우리의 역사가이시다”라고 1925년에 평가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신채호와 교분이 있던 인물은 변영만이었다. 그는 1900년 전후 성균관에서 신채호와 함께 수학하여 수당 이남규 문하의 동학이었다. 연령은 신채호가 9살이나 위였지만, 신채호가 상경하여 활동한 뒤 가장 가까웠다. 따라서 변영만은 신채호가 한말부터 교분을 가진 경우였고, 신채호가 중국에 망명한 뒤에 변영만 역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중국에 망명하여 1910년대에도 교분이 이어졌다. 1920년 전후 귀국한 변영만이 신채호를 마지막 만난 것은 1921년 북경에서 개최된 변호사 관련 국제회의에 참가하였을 때였다. 따라서 “신단재(신채호)와 나와는 약관 시부터의 구요(舊要)인만큼 양인 상호(相好)의 정도가 비유를 불허하니 만큼 나는 단재(신채호) 숙지자로는 제2인은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평할 만큼 가까워, 1910년대까지 신채호의 일상을 가장 잘 알던 그가 「파심어[신단재(신채호)의 윤곽]」(『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자), 「실루에트 二三」(『중앙』 1936년 6월호)와 같은 회고체의 글을 쓰고, 신채호의 사후에 바로 「제단재문」, 「단재전」(『산강재문초』 수록)을 저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단재전」은 한문으로 쓴 전의 양식으로도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신채호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실루에트 二三」은 신채호 사후에 일화를 적은 것인데, 그 내용의 대부분이 「단재전」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에 비하여 「신단재(신채호)의 윤곽」은 신채호의 학문적·문학적 위치를 짧지만 요령 있게 평가한 내용이었다. 「단재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신채호 관련사항은 초취부인 조씨(趙氏)와의 관계와 관일(貫日, 신관일)이라는 아들의 존재, 조카 난(蘭, 신난)의 존재와 1917년의 비밀귀국, 제자 김기수(金箕壽)와 우응규(禹應奎)와의 관계 등이다. 그러면서도 신채호의 일화를 전하며, “그의 위력은 상량(爽凉)한 모광(眸光)과 그 청자(淸慈)한 음성에 있었고, 그의 빈핍(貧乏)은 그 세장(細長)한 수지(手指)와 그 윤기 없는 조갑(爪甲)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물어 본즉 「여자가 제일」이라고 항상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여자를 어떻게 처리하였던지 상상할 수도 없다”라는 괴벽스런 그의 성품을 알려주고 있다.
  변영만과 더불어 신채호와 가까웠던 인물은 홍명희와 정인보였다. 그들은 1910년대 전반기 상해에 망명해 있던 그룹이었다. 이광수의 회고에 따르면,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중국에 간 이광수는 안동에서 귀국하던 정인보를 만났고, 정인보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가서 신규식과 신채호를 비롯하여 홍명희와 문일평, 조소앙 등을 만났다. 1888년생인 홍명희와 1892년생인 정인보는 1880년생인 신채호보다 10년 전후의 연하였지만, 1889년생인 변영만과도 신채호와 교분을 가진 점을 고려한다면 상해에서 이들은 충분히 교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널리 문명을 날린 신채호에게 홍명희와 정인보가 가르침을 받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홍명희와 정인보가 귀국한 뒤에도 신채호는 이들과 인편이나 편지 등을 통하여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홍명희는 「곡단재」(『조선일보』 1936년 2월 28일자)라는 조사를 썼다. 그는 조사의 첫 부분에,

  단재(신채호)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 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신채호)가 지기로 허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상 사람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 만나볼 수 있는 곳에 있었어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려니 생각하면 그만이다. 신문의 보도와 수범[秀凡(신수범)]의 통기(通寄)가 나에게는 다 부질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신채호의 순국을 슬퍼하는 뜻을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홍명희는 이어 『조광』에 「상해시대의 단재(신채호)」라는 짧은 회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내가 단재(신채호)와 사귄 시일은 짧으나 사귄 정의는 깊어서 나의 오십반생에 중심으로 경앙하는 친구가 단재(신채호)이었습니다”라고 신채호와의 교분을 밝히고 있었으며, 그에게서 받은 서신에서 몇 구절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동아일보』 1936년 2월 26일자와 28일자에 「단재(신채호)와 사학」이라는 글로 신채호의 역사학을 평가하며, 『신동아』에 「잔억의 수편」을 실어 한시와 시조를 통하여 신채호를 기억하였다.
  미주(미국)에서는 『신한민보』의 주필인 홍언(洪焉)이 1936년 3월 26일자에 신채호의 순국을 기리며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조상함」이라는 조사를 실었다. 홍언은 신채호의 민족정신를 찬양하며 안중근의 뒤를 이은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는 신채호가 김부식의 존화주의를 쓸어버려 오늘날 한국민족의 사상이 있을 수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신채호를 조상함이 민족의 공의이며 가난한 선비에 대한 동정이라 하고 있었다.
  미주(미국)뿐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발행하던 기관지 『민족혁명』 제2호(1936년 4월간)에는 진인(震人)이라는 필명으로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추도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진인’은 일제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윤세주(尹世冑)였다. 윤세주는 신채호의 생애가 한국의 현실적 정치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었고, 그것은 국망 이전에는 무장투쟁이었으며, 국망 이후에는 비합법적 폭력주의였다고 지적하였다. 즉 윤세주는,

  선생이 청년으로 처음 사회적 생활에 나옴으로부터, 최후의 옥사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는 오직 조선의 현실적 정치문제를 위한 노력에 일관하였다. 선생이 신문기자가 된 것도 이로 인함이었고, 조선역사를 연구함도 이로 인함이었고, 해외에 망명함도 이로 인함이었고, 최후의 옥사도 이로 인함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이같은 조선정치를 위한 노력은 혁명적 정책을 떠나서는 있지 아니하였다. 망국이전에 선생의 구국정책은 전국적 무장궐기로서 외적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사대사상의 잔물이었던 당시의 의타외교정책과 문화점진정책에는 격렬한 대립으로서 이것을 배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망국 이후의 선생의 혁명방략은 또한 철저한 비합법 폭력주의로서, 일절 타협적 합법주의자에 대하여는 엄정한 비판으로서 이것의 분쇄(粉碎)에 노력하였었다.

라고 신채호를 평가하였던 것이다.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위체사건(爲替事件)으로 1928년 5월 대만 기륭(基隆)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대련(大連) 감옥의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그해 10월 신간회의 이관용(李灌鎔)이 대련감옥으로 신채호를 면회한 바 있었는데, 『조선일보』 1928년 11월 8일자에 그 면회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신채호는 이관용에게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 일역본과 『에스페란토 문전(文典)』, 그리고 『윤백호집(尹白湖集)』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세계문자로 에스페란토어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미루어, 신채호 역시 무정부주의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어 『동아일보』는 「신채호 부인 방문기」를 게재하여, 부인 박자혜의 간난한 생활상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1924년 10월 13일자에 실린 신채호의 「문제 없는 논문」이라는 글을 읽은 심홍무라는 이가 감회를 적은 「문제 없는 논문을 읽고」라는 글을 같은 신문 10월 20일자에 기고한 바 있었다.
  『조광』의 신채호 추모특집은 안재홍이 신채호의 학설을 소개하고, 시기적으로 이광수가 중국망명 직전의 신채호의 모습을 회고하였다. 이어 홍명희가 상해시대, 이극로가 서간도시대, 그리고 이윤재가 북경시대의 신채호를 소개하였고, 미망인 박자혜의 글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신동아』의 특집은 신채호의 성품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먼저 『조광』의 추모특집을 보자. 이광수는 1910년 신채호가 망명하던 중에 오산학교에 들렀던 시기와 1919년 상해에서 다시 만난 것을 회고하고 있었다. 이광수가 1936년부터 『조선일보』에 「그의 자서전」을 연재할 때에도 신채호를 묘사한 내용은 「탈출도중의 단재인상」과 같은 것이었다. 신채호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세수를 하였다든지, 발음을 무시하고 영어를 배우고자 하였다든지 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에게 적대적이던 신채호의 모습도 그려졌다. 이광수는 그를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의 주필로 초빙할 요량이었지만, ‘대의’와 ‘절개’를 내세운 신채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극력 비난하였다.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으로 이승만을 선출하게 되자 신채호는 “나를 죽이구랴”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극로는 1914년 서간도에서 잠시 신채호를 만난 다음,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와 북경에서 만난 신채호의 특성을 소개하였다. 이극로에 의하면 신채호는 능문-불능필, 능좌담-불능연설, 속독, 영어능통, 강직한 사필이 뚜렷하였다고 한다. 이윤재는 북경에서 만난 신채호의 저술과 역사연구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며, 한문처럼 영문을 읽던 모습을 소개한 바 있다. 신채호가 만주와 북경의 한국유적을 답사한 일이며, 신채호가 집필해 둔 원고가 조선사통론·문화편·사상변천편·강역고·인물고의 다섯 책으로 되어 있었음도 이윤재의 회고에서 알려진 일이었다. 미망인 박자혜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던 24세 때에 39세의 신채호를 만나 결혼한 기억도 언급하였지만, 신채호 별세 전후의 정황을 서술하였다.
  『신동아』에서는 정인보의 회고에 이어, 서세충은 신채호의 약력, 활동과 함께 중국에서 신채호가 논설로 이름이 높았음을 증거 하였다. 서세충은 신채호의 별세 전후 신채호의 가족들과 여순에 가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었다. 신석우는 「단재와 ‘의’자」라는 글로, 중국신문에 집필한 논설에 ‘의(矣)’자가 오식된 것을 중국인이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온 행동이라 하여 논설 집필을 단호하게 그만두었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해객이라는 필명의 필자는 신채호와 30년 지기였는데, 신채호의 성격을 학자로서의 벽성(癖性)과 한만(汗漫)에서 찾으며, 한학과 역사·시학·불경에 뛰어났다고 평가하였다.
  『조광』과 『신동아』 이외에도 『삼천리』와 『중앙』에서도 순국 직후 신채호에 관한 글을 실었다. 『삼천리』는 1936년 4월호에 원세훈이 「단재 신채호」를, 『중앙』에는 변영만이 「실루에트 이삼」을 게재하였던 것이다. 원세훈은 신채호의 고집불통하면서도 합리적인 성품을 일화를 통하여 밝히며, 궁핍하게 지내면서도 돈에 대한 원칙을 지키던 삶을 조명해 주고 있다. 변영만의 회고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심훈의 「단재(신채호)와 우당(윤희구)」이라는 글을 실었다. 심훈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북경으로 탈출해 몇 차례 신채호를 만났는데, “기우(氣宇)에 떠도는 정채와 샛별같이 빛나는 안광이며, 추상같이 쌀쌀한 듯하면서도, 춘풍으로써 접인하는 태도가,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 신채호는 『천고』를 주재하던 때였다. 아울러 『동아일보』는 1936년 3월부터 ‘아삼속사(雅三俗四)’라는 단평란을 신설하였는데, 4월 12일자에 「신단재(신채호)와 홍색내의」를, 4월 14일자에 「신단재(신채호)와 홍등가」라는 글을 실었다. 신채호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일화를 통하여 그의 단순함과 원칙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이정(李楨)이라는 이가 「곡단재」라는 한시를 보내온 바 있다.
  해방 이후 김창숙도 신채호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이승만 성토문을 작성하던 내용을 회고하였으며, 유광렬 역시 국민대표회의 시기의 신채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신채호와 일가이기도 한 신백우는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신채호의 기일을 전후하여 추도사를 짓기도 하였다. 신백우는 이미 신채호를 회고하는 한시를 여러 편 지은 바 있었다. 진녹성은 「단재와 나」라는 글을 『청사』라는 잡지 창간호에 실었는데, 신채호와의 교분을 언급하였으나, 내용이나 연대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1936년 신채호가 순국한 뒤, 정주에 가 이승훈을 만났다고 하였는데, 이승훈은 이미 1930년 별세하였다. 진녹성이란 인물은 1929년 대경성안내사를 설립하여 사기를 벌였다는 기록(『동아일보』 1929년 11월 16일자)으로 미루어, 신채호와 직접 관련을 맺었는지 알 수 없다.
  조경한 역시 신채호와의 만남으로 ‘경한(擎韓)’이라는 이름을 받은 일과, 영향을 받은 일을 회고한 바 있다. 아들 신수범은 1971년 『나라사랑』의 신채호특집호에 「아버님 단재」라는 글로 부친의 운명과 유물, 장례에 관한 일을 기록하였다. 이은상도 신채호의 묘를 참배하고 추모하는 시조를 남긴 바 있었다. 특기할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초 중국 상해에서 신채호학사를 건립하고자 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채호학사는 한국인들만의 발의가 아니라 중국인들도 참여하였는데, 아마도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를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1954년 10월에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어 유고 출판을 기획하였음도 확인된다.
  순국 직후에 저술한 변영만의 「단재전」은 일제강점기에 알려질 수 있는 글은 아니었다. 신채호와 교분이 있으며 그의 생애를 소개한 글은 변영만의 「단재전」과 신백우의 「단재 신채호 약전」이 있고, 1980년대에 중국에 생존해 있던 유자명의 「신채호」 원고본이 남아 있다.

3. 신채호 학문에 대한 논의

  신채호의 학문에 관련된 논의는 국어학과 역사학 연구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안확이 『동아일보』 1924년 10월부터 11월까지 3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이두문명사해석(吏讀文名詞解釋)」에 대한 비판을 1928년 3월에 『중외일보』 지상에 3회에 걸쳐 연재한 것이 그 처음이 아닌가 한다. 안확은 신채호의 이두 해석을

  고로 씨의 해석방법은 자기경험에 의한바 이집(已集)한 재료를 분류하여 호상 비조(比照)의 편(便)을 언함이오. 객관적 재료를 풍부하여 사고작용의 범위를 언유(言喩)함이 아니라, 갱언(更言)하면 씨의 방법은 자기의 전관적(全觀的)의 해석법을 언한 것이요, 고증의 근지(根地)를 언함이 아니다.

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여섯 가지를 들어 비판하면서, 마지막으로 “어(語)로써 역사의 사실을 논하기는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안확은 신채호의 역사연구를 가리켜, “씨의 사론에 있어서도 고려할 여지가 다(多)하나 그 탁견을 출함에는 경탄하는 바이오, 또한 씨의 논제는 다 필요한 제목에 재하매 차역시선(此亦是善)타 하는 바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신채호의 학설에 경찬하는 중에 이두 해석과 같이 약간의 의문이 있는 점을 문의한다고 밝혔는데, 기본적으로 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찬동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29년 6월 『조선사연구초』가 간행되자 문일평은 「독사한평(讀史閑評)」이라는 연재에서 

  단재(신채호)가 조선사를 통하여 조선혼을 부르짖던 것은 사실이다마는 단재(신채호)가 단재(신채호)된 소이는 그의 열정보다도 독특한 사안(史眼)에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보는 바가 빠르고도 날카로워 거의 타인의 추급(追及)을 허하지 않는다. 기탄없이 말하면 그의 이론이 반드시 모두 긍계(肯綮)에 맞는지는 모르나 또는 그의 연구가 반드시 모두 과학적이라고는 할는지 모르나 그의 견식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투철한 바 있으니 시(試)하여 이 『조선사연구초』를 뒤져보면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이라고 하였다. 문일평은 이어 신채호의 논지에 독단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독단이야말로 독자의 ‘정찰(精察)’이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신채호의 역사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비판적 검토를 한 것은 홍기문이었다. 그는 1935년 2월 전후하여 『조선일보』에 「역사와 언어의 관계」라는 논문을 연재하면서, 한 부분을 「신단재(신채호)의 어원고증을 검토함」이라는 제목으로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를 언급하였다. 홍기문의 관심은 어원과 관련된 것으로 안확의 관점과 유사한 것이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공헌이 이로써 전연 말소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논거의 빈위(瀕危)를 면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만일 그로 하여금 좀 더 어원의 과학적 고증을 주의케 하였다면 역사에 대한 그의 공헌이 현재보다 좀 더 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홍기문은 신채호의 순국 직후 역시 『조선일보』에 「신단재학설의 비판」이라는 논문을 8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 신채호를 ‘조선역사학의 개조’라고 언급한 홍기문은 『조선사연구초』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는 신채호가 역사의 원동력을 정신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라며, 계급투쟁의 유물론적인 역사관을 지니지 못한 점을 비판하였다. 아울러 배타자존(排他自尊)의 선입관으로 논증 없이 독단적으로 해석한 사례로 연개소문의 경우나 언어비정 등을 들어 비과학적인 점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기문은 신채호의 역사학을 비판적 관점에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즉 신채호를 거대한 ‘사료고증학자’와 ‘문헌학자’로 인정하면서, 일정한 방법으로 체계 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고 이두의 해석이나 중국문헌과 삼국사기 교정 등을 논의하였다. 물론 신채호의 독단이나 보조과학 이용의 부족, 방법론 등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신채호를 역사학뿐 아니라 문헌학에 기여한 바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홍기문은 비판의 마지막에

  여하튼 조선역사학계에 있어 단재(신채호)는 가장 큰 은인이 아닌가. 선구자로서도 그렇고 사료고증학자로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우리의 얼마만한 손실인가? 조선의 학계야말로 거듭거듭 불운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단재(신채호)여 편안히 쉬소서. 당신이 끼치어준 그 유산을 정당히 계승해서 진정한 조선사를 완성하여 당신의 업적을 한층 더 빛낼 날이 있을 것이다. 단재(신채호)학설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바는 오직 이것뿐이 아니나 제한된 지면 아래 여기서 그치지 아니치 못한다. 이 글을 쓰는 중간 간접 혹 직접으로 선배 혹 후배의 많은 충고는 감사히 여기나 서론에 이미 전제한 바와 같이 시비의 분분함을 이미 각오한터로 이 붓을 중단시키지 못한데 대하여는 미안한 마음까지 함께 금치 못한다.

  또 신채호의 역사학을 언급한 것은 정인보와 안재홍이었다. 정인보는 「단재(신채호)와 사학」에서 신채호사학의 특장을, “첫째 고증하는데 있어 다른 사람들 늘 보는 책속에서도 형안(炯眼)이 한번 쏘이기만 하면 이것저것을 비교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발견과 변파(辨破)가 있다”·“둘째 그 분운(紛紜) 복잡한 과거 내외의 기록을 정리하며 나가는데 마치 엉킨 실을 풀 때 어떠한 매듭 한 군데를 고르면 홱 풀리는 것 같이 매양 일처의 요(要)를 제거(提擧)하여 만서(萬緖)의 착(錯)을 해(解)하는 영완(靈腕)이 있다.”·“셋째 여러 천년 동안 구블렁거리며 내려오는 성쇠 변천의 소자(所自)를 그 실제로 좇아 고색(考索)하되 어떤 때는 문헌 미미한 속에서 오래두고 범과(泛過)한 것을 들추어 대관절의 약동하는 것을 보이기에 특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안재홍은 「존귀한 그의 사학상의 업적」에서 신채호가 한말에는 사론과 전기로 국민주의적·민족사상적 선구로 계몽·혁신적 사조의 선양에 기여하였음을 밝히고, 그가 진보된 역사과학 또는 사회경제사관을 지니지 못하였지만, “사학자로서 필요한 많은 고증과 외타(外他)의 비교연구에 의하여 그 전모에서는 다분의 과학자적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안채홍은 신채호가 구식 역사가가 아니라 조선사학의 선구자로 그 역사적 위치가 매겨진다고 찬양하였다.
  해방 이후 이선근은 『화랑도연구』라는 저서를 간행하면서, 신채호에게 사숙하고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임경일은 『화랑의 혈맥』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면서, 「신단재(신채호)와 화랑연구」라는 글을 실어, 화랑 연구에 있어 신채호의 선구적 업적을 소개한 바 있다. 해방 이후 신채호에 대한 관심은 화랑 연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학문에 대한 학계의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 전후에 이루어졌다. 홍이섭·김용섭·김철준·신용하·최홍규·이만열·안병직·한영우·배용일·박찬승 등 많은 역사학자들이 신채호의 역사학과 계몽운동, 독립운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신일철 등 철학자와 이경선·이동순 등 국문학자, 그리고 국외에서 가지무라(梶村秀樹)나 김병민 등의 연구도 적지 않다. 특히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편집으로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형설출판사, 1980)과 『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단재 신채호선생 순국 50주년 추모논총(형설출판사, 1986)을 비롯하여, 『단재 신채호연구논집』(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와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대전대학교 지역협력연구원 엮음, 다운샘, 2003), 『한국사학사학보』3집(한국사학사학회, 2001)의 특집 ‘신채호 사상의 현대적 조명과 과제’와 같은 공동연구서가 간행되었다. 또 신일철·신용하·이만열·최홍규·김병민 등의 전문연구서가 출판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신채호 연구는 수량이나 질적인 점에서 크게 증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저술은 해방 직후부터 『조선사론』(광한서림, 1946)이나 『조선사연구초』(연학사, 1946),『조선상고사』(종로서원, 1948) 등이 출간되었고, 1954년 ‘단재(신채호)유고출판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채호의 저술이 전체적으로 수집되어 발간된 것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72년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에서 2책으로 간행한 『단재 신채호전집』(을유문화사)은 1975년에 보유편이 만들어지고, 1977년에 상·중·하·보유 전 4권으로 형설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아울러 북한에서 발간된 『용과 용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과, 연변대학의 김병민이 편집한 『신채호문학유고선집』(한국문화사, 1995)이 입수되어 신채호 저작의 상당수가 확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의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진 신채호의 유고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간 새롭게 발굴된 자료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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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羅蕙錫

최승구 [崔承九]

가야마 린佳山 麟  최린崔麟 

일본식 이름雨英, 金雨英  김우영

사토우 야타佐藤彌太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

                              허영숙 [許英肅, 1895~1975]

 

시로야마세이주白山靑樹  金東煥
                                 최정희 [崔貞熙]

                                              金幽影 

 

 

                                                      

 

 

 

 

 

   허허  허씨가  나씨 집안 가족사진에서 보이네요.    ?     자매같다는 느낌이.......

나혜석과 허영숙은 인척관계인가?   위 세 사람은 1931년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벙  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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