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로 副領事가 되어 가지고 安東縣 가서 수 년을 지내다가 미술가의 안해 羅惠錫女史와 같이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돌연히 羅氏와 이혼을 하고 다시 시내에서 변호사업을 시작하엿다.
어린 자식 3, 4명이 달린 안혜와 이혼을 한 金君 - 그 중심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미친 물결같이 뛰노는 감정을 가진 예술가의 안해는 법으로 業을 삼는 이 남편과는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업섯는가.
안해 羅氏가 세계일주시 XX發明士 XXX氏와 巴里에서 달큼한 사랑을 속삭이엇다는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모르거니와 金君은 자기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혼소송을 대리할 때에는 타인이 상상도<67> 못할 名論을 토하야 法官의 머리를 끄덕거리게 하는 때도 잇다고 한다.
在野法曹界에 두번재 발을 들어놓는 金君은 무슨 의미로 보던지 甦生의 길을 거러나가는 첫 시련이니 금후의 金君의 辯護士로의 활약은 볼 만한 것인 줄 알앗더니.
1932.2.19 朝鮮總督府官報
李聖根이 咸鏡北道參與官에, 姜弼成이 咸鏡南道參與官에, 金雨英 이 道理事官에, 임명되다.
1939년 04월01일 동아일보
김우영(총독부도리사관) 승서고등관3등
1949년 01월 26일 한성일보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부산에서 반민피의자 金雨英과 河判洛을 체포
민족을 좀먹는 친일분자에 대한 반민특위의 메스는 드디어 지방에 확대되었다. 즉 중앙반민위원회 김용희 조사관 일행은 지난 23일 부산에 도착, 행동을 개시하여 동일 하오 9시 반경 부내 芙容洞에서 전 중추원參議 金雨英(64)을 체포하는 한편 이어 24일 상오 9시경에는 부수동에서 전 경남도 고등과 형사 河判洛을 체포하여 모처에 구금하였다 하는 바, 전기 김우영은 京都帝大를 졸업한 후 안동 副領事, 전남산업과장, 충남 參與官,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거두라 하며, 河는 고등과 형사로서 수많은 애국자를 고문학대하여 ‘고문왕’이라는 이름까지 받은 악질분자라 한다.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신장에 다리가 불편한 한 40대 여인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그대로 다리 위에서 운하로 버려졌다.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우파 의용단에게 살해당한 이 왜소한 중년 여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혁명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100%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던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위태로웠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요전수」(搖錢樹). 성탄수 모양의 요전수는 한조(BC 206∼AD 220)의 청동기 유물로
중국에서도 단 2점밖에 없는 국보급. 중국 유물로는 사 상 최고가격인 250만달러(당시 35억7000여만 원)에 미국인 부호에게 팔렸다. 요전수는 고 대인들이 지하 묘실에서 조명용으로 사용했 던 것으로 가지끝마다 정교한 고대동전 형상 의 꽃잎이 달려있고, 꽃잎 가운데 촛불을 꽂 도록 돼 있다.)
부상나무에는 아홉 개의 해가 아래가지에 머물고
하나는 윗가지에 머문다고 한다.
.
그곳에 세발까마귀 삼족오가 있었다한다.
고구려 고분
어느 날 열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올라 곡식과 초목이 타죽고 강물이 말라붙자,
요 임금은 예에게 명령하여 화살로 아홉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고 한다.
그림6. 부상수 사천성박물관
고대에는 태양이 뜨는 곳을 부상국(扶桑國)이라 하였다.
해가 뜨는 나라
부상국(扶桑国)이 일본을 가리키는 단어라 하고, 삼족오가 자기들 고유 문양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
부상수와 탕곡 삼족오의 의미는 그것 뿐일까?
고대 신화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산해경>과 <논형>을 중심으로 분석해본다.
論衡 說日中 왕충의 논형 해이야기 중에서
儒者說 선비들의 말에 의하면
日及工伎之家皆以日爲一 해를 관련한 전문가들이 해는 한 개라고 이르는데,
禹貢 (益 )山海經言 우와 익은 산해경에서
日有十 해가 열 개나 되며,
在海外東方有湯谷 바다 밖의 동쪽에는 탕곡이 있어
上有扶桑 위로는 부상이 있다 한다.
十日浴沐水中 열 개의 해가 물 속에서 목욕을 하고
有大木九日居下枝 아홉 개의 해가 아래가지에 머무는 큰 나무가 있으니,
一日居上枝하나는 윗가지에 머문다고 한다.
淮南書又言燭十日 회남자에서는 또 열 개의 해 가 비쳤다하고,
堯時十日並出 요 시대에 열 개의 해가 동시에 나와
萬物焦枯 만물이 그을려 고사하자,
堯上射十日 요가 열 개의 해를 화살을 쏘아 올리니,
以故不並一日見也 이로써한꺼번에 출현하지 않고 하나만을 보게 되었다.
世俗又名甲乙爲日 세속에서는 또 해를 甲乙갑을의 이름을 붙여(각기 다른 이름)
甲至癸凡十日 甲갑에서 癸해에 이르는 열 개의 해가 있으니,
日之有十 열 개의 해가 있다함이,
猶星之有五也별이 다섯 개 있는 것과 같다한다.
通人談 도통한사람의 이야기로써,
士歸於難知不肯辨明 학자들은분명히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것으로 귀결지었다.
是以文二傳而不定 이로써올바른 정설 없이 두 종류의 기록이 전해지니,
世兩言而無主 사람들은 두 이야기에 주관이 없는 것이다.
--- 줄임 ---
해가 목욕하는 탕곡 그리고 그 위에서 자라는 부상나무
<왕충>의 말데로 그 뜨거운 태양이 어떻게 물속에 목욕을 할 수있으며.
부상나무는 열개의 태양 아래에서도 고사하지 않고 자랄 수 있을까?
그 위에 올려진 삼족오는 죽지않는가?
天文人의 눈으로 보아야만 그 실체를 볼 수 있다.
물 속에서 태양이 목욕을하고 태양이 나무가지 위에 올라 앉은 모양이다.
해가 목욕하는 탕곡이란 연못 물 위의 떠있는 해그림자를 이르는 말이며,
부상나무란 해가 떠오르는 위치의 좌표를 의미한다.
곧
신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부상과 탕곡이란 천문관측 장비 역활을 한 것이다.
고대 천문에서 사용된 일출과 일몰 황도의 관측좌표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본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눈으로 태양을 관측하기는 불가능하다.
관측을 위해 해그림자를 이용하는 것이며 더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
즉 부상나무를 통해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박명시간에 떠오르는 위치를 정확히
측정함으로써 당시의 절기와 시각을 측정한 것이다.
이때에 부상나무는 일출 좌표를 찾는 규표 역활을 하게된다.
해그림자의 측정오차 를 줄이자면측정면을 완전한 수평이 되어야 한다.
탕곡: 잔잔한 연못의 물의 수면은 그대로 정확한 수평면이 만들어지고
여기에서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게 되는 것이다.
수천년 전 고대인들이 만든 시간측정의 비법인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이제 잔잔한 탕곡의 물 위에서 열 개의 태양을 찾아 저먼 옛날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일년 길이를 재는 방법에 해 떠오름을 관측하는 방법이 있다.
동쪽 지평선에서 매일 해가 떠오르는 위치는 변하고 있다.
춘분 또는 추분 때 정동쪽 방향이고,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때가 하지,
가장 동남쪽에 위치한 때가 동지때이다.
위 그림은 10일 간격으로 해가 뜨는 위치를 표시한 그림이다.
떠오르는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기준 좌표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규표? 바로 부상나무인 것이다.
이 때의 탕곡은 둠벙의 잔잔한 수평면이 된다.
관측의 정확도를 높이기위해 수평면은 필수적이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좀더 발전된 부상과 탕곡으로 해오름을 관측해보자.
탕곡 위에 떠있었다는 열 개의 해를 보자.!
매일 변하는 일출의 좌표를 열흘 단위로
부상수와 부상수 사이를 10일로 구분지으면
한 나무 시이에서 10일을 머무는 셈이 된다.
아홉 개의 해는 나무 밑에 있고 하나의 해는 나무위에 있다는 말을 그림으로 보자.
첫 날부터 9일 간은 해의 그림자와 부상나무의 그림자가 함께 물위에 비췬다.
그러니까 부상나무와 부상나무사이에서 해가 떠오른다는 뜻이다.
10일째 정해놓은 좌표점에서는 부상나무에 가려서 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의 수면위에는 해가 부상나무 위에 있는 것 처럽 보이게 되는 것이다.
9일간 부상나무 아래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왼쪽 위쪽의 그림에서보면
수면위의 해그림자는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부상수의 아래 쪽에서부터 똑같이 비추기
시작한다.
해가 부상나무 위 아래를 옮겨가는 천문의 표현이다.
천문에 관심을 갖는다면 탕곡과 부상나무는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숱한 우물과 저수조, 연못은 다시 한번 세심히 살펴 볼 일이다.
많은 유물들이 천문적으로 이해되길 기대한다.
서양의 현대판 탕곡과 부상나무를 보자 !
서양 해시계의 그림이다.
연못 속에 물고기와 함께 태양이 있고 사람이 부상나무를 대신하고 있다.
발 밑에 계절별로 위치를 달리하는 부상나무의 좌표를 그리고 있다.
중국 하남 밀현에서 발견된 유물 중 벽돌에 그려진 부상나무의 문양을 자세히 보자.
나무라고 하기보다는 도표나 그레프 같은 모양이다.
태양의 움직임을 나타낸 그림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일년 동안 같은시각 태양의 위치를 나타낸 그림이다.
태양이 목욕을하고 올라오는 부상나무
고대 태양이 떠오르는 위치로 시간과 계절을 측정했던 천문관측기구의 역할을 한 둠벙인 것이다.
부상나무의 위에는 삼족오가 있다고 한다.
(郭璞注 扶桑在上一日方至一日方出皆載于鸟)
(곽박이 해설하기를 "부상나무위에 해가 들어오고 하나는 나가는데 모두 새가 그위에 올려져 있다).
市街戰(시가전)이 끝난 都市(도시)步道(보도)에「麻(마)」가어지럽다 黨道(당도)의命(명)을받들고 月光(월광)이이「麻(마)」어지러운위에 먹을즐느리라 (色(색)이여 保護色(보호색)이거라) 나는 이런일을흉내내어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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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民(인민)이퍽죽은모양인데 거의 亡骸(망해)를남기지않았다 悽慘(처참)한砲火(포화)가 은근히溫氣(온기)를부른다 그런다음에는 世上(세상)것이發芽(발아)치 않는다 그러고 夜陰夜陰(야음야음)이 繼續(계속)된다 猴(후)는 드디어 깊은睡眠(수면)에빠졌다 空氣(공기)는 乳白(유백)으로 化粧(화장)되고 나는? 사람의屍體(시체)를밟고집으로돌아오는 길에 皮膚面(피부면)에털이솟았다 멀리 내뒤에서 내 讀書(독서)소리가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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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首都(수도)의 廢墟(폐허)에 왜遞信(체신)이있나 응? (조용합시다 할머니의 下門(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