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경성(京城), 늦여름 저녁 무렵. 예사롭지 않은 외모의 남자 넷이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을 거쳐 종로를 걷고 있었다. 백구두에 봉두난발, 갈색 나비넥타이, 얼굴의 반쯤을 덮은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창백해서 양인(洋人)인가 싶은 사나이, 그 곁에 중산모를 눌러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흐느적흐느적 걷는 폼이 마치 인조인간처럼 보이는 사나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갓빠'머리(머리 꼭대기를 일자로 깎은 머리) 스타일의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아냐.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힐끔거리며 한마디씩 던졌다. 스틱을 들어 공중에서 휘휘 돌려대던 백구두의 사나이가 돌연 "캬캬캬캬…" 하고 웃었다. "이 꼴들을 보게. 참, 정말 곡마단 일행이 왔다구 애들이 또 줄줄 따라오겠어."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어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의 웃음소리는 독특했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일세의 귀재(鬼才)'로 불리게 될 이상(李箱·1910~1937)이었다. 그리고 꼽추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 흐느적거리며 걷는 소설가 겸 번역가 양백화(梁白華·1889~1938), 소설가 구보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그 일행이었다.
1931년에 개점한 경성 최초의 커피다방 낙랑파라에서 구인회(九人會) 모임을 마친 일행은 근처 골목길에 있는 우고당(友古堂)에 들러 구본웅을 대동하고 한 잔하러 나선 길이었다.
경성역 대합실의 끽다점(喫茶店)과 더불어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던 낙랑파라의 주인은 일본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출신의 화가 이순석이었다. 이순석은 경성부청(府廳)과 마주 선 건물 이층에 화실을 꾸리고, 아래층에는 끽다점을 냈다. 입구는 파초 화분으로 장식하고, 내부 널마루 위에 톱밥을 펴서 사막에 온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낙랑파라는 훗날 배우 김연실이 인수해 이름을 낙랑이라고 바꾸고 해방 후까지 운영했다.
▲ 이상의 절친한 벗이었던 화가 구본웅이〈친구의 초상〉 (1935년 작)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이상의 초상화.
구본웅이 1935년 3월경 우고당 2층에 마련한 화실에서 그린 〈우인(友人)의 초상〉이란 작품이 있다. 봉두난발에 상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이상의 초상화다. 파이프 담배는 본디 이상의 것이 아니라 구본웅의 것이었다. '배고픈얼굴을본다./ 반드르르한머리카락밑에어째서배고픈얼굴은있느냐./ 저사내는어데서왔느냐./ 저사내는어데사왔느냐.'(이상의 시 〈얼굴〉)
이상은 거울을 보며 자주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퇴폐와 패륜의 표상으로, 때로는 광인(狂人)으로 오해받으며 냉대와 수모를 당하고, 병고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내면에 은닉된 스캔들의 원소, 존재 그 자체로 시대의 개벽을 예고하는 천둥이며 번개였던 이상! 위트와 패러독스로 무장한 천재는 너무 일찍 이 지구에 온 것인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했다. 물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이상 자신이었다. 김기림은 이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에게서 해학과 야유와 독설로 '세속에 반항하는 악한 정령(精靈)'을 보았다.
이상은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4일자에서 8월 8일까지 연작시 〈오감도〉를 발표했다. 이때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집어치워라!" "이상이라는 작자를 죽이고 말겠다!"는 야유가 쏟아졌다.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결국 연재는 15회로 중단됐다. 그는 항변했다.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2000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다들 야단하는 바람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이상은 시대를 너무나 앞질러갔기에 이해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뒤에야 당대의 냉대와 몰이해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그는 '박제'가 되어버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날개〉를 쓴 것은 아닐까. 이상의 삶은 '전통(친부·親父)'에서 내쳐져 '근대(양부·養父)'로 입양되었다가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아해'의 슬픈 종생기(終生記)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강릉을 본관으로 하는 김연창(金演昌)이 그의 생부다. 김연창은 얼굴이 얽은 사람으로, 형 김연필(金演弼)의 주선으로 구한말 궁내부(宮內府) 활판소(活版所)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 세 개를 절단당한 뒤 작은 이발소를 개업해서 호구지책을 삼았다.
이상은 〈슬픈 이야기〉라는 글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버지도 다 얽으셨습니다. 그분들은 다 마음이 착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손톱이 일곱밖에 없습니다. 궁내부 활판소에 다니실 적에 손가락 셋을 두 번에 잘리우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생일도 이름도 모르십니다. 맨처음부터 친정이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외가집 있는 사람이 퍽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장모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김해경이 1910년 9월 23일 새벽 6시경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중인 계급의 가난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을 지은 이는 조부 김병복(金炳福)이었다. 해경은 집안의 자랑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부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의 이상. 그림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뿔’제공
어린 해경은 젖을 떼자마자 총독부 상공과의 하급 관리직에 있던 자식 없는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백모는 해경에 대해 엄격했다. 백부가 안아줄 때도 겁이 난 어린 해경은 늘 울곤 했다. 해경의 내면은 어리광과 유희 본능을 억압당하고 낯선 세계가 주는 공포와 불안에 착색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상(李箱)'이란 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혼재한다. 해경이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반 시절 공사장에 감리감독을 나갔을 때, 인부들이 그의 성을 잘못 알고 일본식으로 '리상(李樣)!' 하고 부른 데서 기인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상'이란 필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경성고공(京城高工) 제8회 졸업앨범이다. 조선인 학생 17명이 이름을 올린 그 명부 안에 해경은 이상(李箱)이란 필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1931년에는 김해경이란 본명으로 《조선과 건축》(7·8·10월호)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 21편의 일어(日語) 시를 연이어 내놓는다. 그리고 아홉 달 뒤인 1932년 7월 같은 잡지에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 아래 7편의 시를 내놓으며 비로소 '이상'이란 필명을 쓴다. 전통과 탈전통, 어른과 아이, 혈통적 의무와 예술적 자유 사이에서 공포와 불안의 운명에 주박당한 기호인 김해경은 이상이라는 귀면(鬼面)을 쓰고 탈주한다.
김해경이란 이름은 강릉 김씨라는 핏줄을 잇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라는 정언적 명령이자 세속적 가치의 기호라는 함의를 갖는다. 1931년 백부 김연필이 죽고 해경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 다가온 것은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에서 볼 수 있듯 가난의 참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였다.
'해경'은 그의 생식력과 노동력이 온전히 이 가족적 가치의 재생산에 바쳐져야 함을 의미하는 가족명이다. 따라서 '이상'이란 필명의 참칭은 '김해경'의 전면부정이자 그것이 강제하는 일체의 운명으로부터의 탈주와 새로운 주체 탄생, 그리고 근대적 가치에 의한 봉건적 가치의 죽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시인 김승희는 이 변성명(變姓名) 행위를 '억압과 위기에 대응하는 자아변형과 제의적(祭儀的) 변화의 추구'로 설명한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된 운명으로 주어진 '김해경'의 상징적 죽음과 함께 이루어질 이질적인 삶으로의 분열·분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고, 평론가 신형철의 지적대로 '자연인 김해경에서 문학인 이상으로의 탈출'이다.
이상은 정지용이 주재하던 잡지 《카톨릭청년》(1933.7.)에 한국어로 된 시를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을 한국문학의 영토 안으로 편입시켰다. 그중 〈1933, 6, 1〉이라는 시에서 "나는 그날 나의 자서전에 자필의 부고(訃告)를 삽입하였다"라는 표현을 썼고, 이어서 같은 잡지(1933.10.)에 내놓은 〈거울〉이라는 시는 자아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분열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낸다.
1930년대 경성은 강렬한 음향과 색채로 충만하고, 상쾌한 만보(漫步)와 새로운 미적 규준, 그리고 동경(憧憬)의 '울트라 모던'이 꽃피는 장소였다. 그 자신 대표적인 '모던 뽀이'였던 시인 김기림은 당시 경성인들이 선망하는 것이 '다이야 반지-양식(洋食)-오후의 산책로-백화점-극장의 특등석-예금통장'이었다고 했다.
'모던 뽀이'들은 상징적 아버지(조선·전통·과거)를 살해하고 스스로 부왕(父王)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은 미개한 '원주민', 전근대의 '낙후'와 '봉건'의 잔재들이었다. 그것은 '모던'으로 나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데 아버지의 상징적 살해가 필요했다. 이상은 '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시 〈오감도〉 제2호)가 되는 것이냐고 탄식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대신에 '모던'을 손에 쥔 '13인의 아해들'은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들이며,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상)들이었다.
▲ 조선일보 기자 시절의 김기림 시인. 동료 문인이자 문학기자로서 이상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시인 김기림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가까운 학성군 출신이었다. 1908년생이니 이상보다 두 살 연상이다. 주로 종로서를 외근 구역으로 맡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기림은 '북구(北歐)적인 선이 굵고 축구감독 같은 풍모'를 지녔고, '근심·우울·센티멘털리즘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명랑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신문사 안에서의 별명은 '김모범 청년'이었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는 염상섭·현진건·김동인·채만식·홍기문·함대훈·이원조 등 문인들이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이익상·주요섭·윤백남·이무영·홍효민·주요한·이은상·변영로·심훈 등이 있었다. 당시 문단의 헤게모니는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 문인기자들이 쥐고 있었고, 그 중심에 김기림이 있었다.
김기림과 이상의 우정은 호혜평등 관계이기보다는 이상이 자신의 지지자이자 멘토였던 김기림에게 일방으로 기대는 형국이었다. 일찍이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김기림은 이상에게 "파리 가서 3년간 공부하고 오자. 파리에 있는 슈르 리얼리스트들하고 싸워서 누가 이기나 내기하자"고 제의했다. 이상은 김기림에게 편지를 보내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일 저일 의논하고 싶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쓰면 김기림에게 보냈다. "졸작 〈날개〉에 대한 형의 다정한 말씀 골수에 숨이오. 방금은 문학청년이 회로(灰爐)에 돌아갈 지상최종의 걸작 〈종생기〉를 쓰는 중이오. 형이나 부디 억울한 이 내출혈을 알아주기 바라오!"
그 무렵 이상은 거듭되는 카페 경영의 실패, 금홍과의 이별,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몸과 의식이 퇴락하고 있었다. 구인회 멤버인 정인택과 윤태영이 황금정 뒷골목의 어두컴컴한 셋방에 숨어 지내던 이상을 찾아 "지금까지 걸어오던 불건강한 악취미는 청산하고 건강한 생활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이상은 얼마 뒤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에 교정부 직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김유정이 가끔 나타나 이상의 책상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갔다. 김유정이 "해경, 그건 뭐하라는 표시요?"라고 물으면 이상은 "이건 거꾸로 박힌 활자를 바로 세우라는 표시요"라고 답했다.
1936년 7월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가 나왔을 때 동북제대에 유학 중인 김기림의 부탁으로 이상이 본문 편집과 표지 장정을 떠맡았다. 책에 쪽수 표기를 하지 말자는 이상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김기림은 "책인데 어떻게 쪽수 표시를 안 하느냐"고 난색을 표했다. 구본웅은 "한 1000부 박아서 팔자"고 했고, 이상은 100부만 찍자고 했다. 결국 200부를 찍고자 했던 김기림의 뜻대로 되었다.
이상은 그해 10월경 동경행을 감행하면서 김기림에게 편지를 썼다. "골맹에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 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火)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한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자질구레한 유언 나부랭이로 말미암아 칠십년 공든 탑을 무너뜨렸고 허울 좋은 일생에 가실 수 없는 흠집을 하나 내어 놓고 말았다.
李箱선생 왈 톨스토이 별명이 Leo-Cheka 교황비밀경찰이란다.
고놈의 명예 돈 욕심 때문에 자식과 아내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사회를 위한다는 깜냥으로 내핍생활을 하며 톨스토이主義敎를 창설해 친히 교황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은 4,000명에 달하는 이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부활'을 발표하였다는데, 그것 이야말로 미국에 스파이를 보내려는 작전이었나 보다. 별명이 Leo-Cheka 교황비밀경찰이라고 한 것을 보면.... Cheka는 훗날 KGB가 된다.
세네카 그는 인간은 자연사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톨스토이를 보니 정말 그렇다.
늙어 공명심은 나를 죽인다. 李箱 철학의 요지이다.
나는 일개의 교활한 참관인 자격으로 그런 우매한 성인들의 생애를 방청하여 있으니 내가 그런 따위 실수를 알고도 재범할 리가 없는 것이다.
거울을 향하여 면도질을 한다. 잘못해서 나는 생채기를 냈다. 나는 골을 벌컥 냈다.
그러나 와글와글 들끓는 여러「나」와 나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들은 제각기 최선을 다하여 제 자신만을 변호하는 때문에
나는 좀처럼 범인을 찾아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체로 어리석은 민중들은「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이네」하고 마음을 놓고 지내는 모양이지만
사실 사람이 원숭이 흉내를 내이고 지내는 바 진짜 지당한 옛 선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리라.
오호라!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아담 이브의 그런 충동적 습관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다.
반사운동과 반사운동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잠시 실로 전광석화만큼 손가락이 자의식의 포로가 되었을 때
나는 모처럼 내 허무한 세월 가운데 무심하게 버려있는 요상한 바위 같은 네 콧잔등을 좀 만지작만지작했다거나,
고귀한 대화와 대화 늘어선 쇠사슬 사이에도 확실히 순간적 타이밍을 허용하는 들창이 있나니
그 서슬 퍼런 칼날이 자의식을 걷잡을 사이도 없이 살을 베는 순간
나는 내 거울같이 맑아야할 지극히 보배인 두 눈에 혹시 눈곱이 끼지나 않았나 하는 듯이
적절하게 주름살 잡힌 손수건을 꺼내어서는 그 두 눈의 만지작만지작 했다거나
ㅡ 내 혼백과 두루 뭉실 점잖은 태만성이 그런 사소한 불똥 같은 것들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보고 와서)
내 총괄되는 처소 뇌세포에 일러바쳐야만 하는 그런 아주 급한 행동을 나는 이루 감당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산호편을 자랑하고 싶다.
「쓰레기」「우거지」
이 구질구질한 단어의 분위기를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이 기독교 감리교식으로 결혼하던 날 교회 식장 통로(웨딩로드nave and aisle)에서
이「쓰레기」「우거지」에 비슷한 감흥을 맛보았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과연 그렇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그런「쓰레기」나「우거지」같은 오색종이 테이프를 (내 종생기 곳곳에다 가엽게 심어 놓은 자잘한 순서를 따라 진행하기 위하여)
뿌려 보려는 것인데ㅡ 다행히 짝이 맞는다. 以上이상
「치사한 소녀는」
「해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꽃이 지듯 좀 파래지면서」
「살얼음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운기를 품은 훈풍이 불어와서」
「스커어트」아니 아니,
「너무나」아니, 아니,
「좀」
「슬퍼 보이는 붉은 털을 건드리면」그만. 더 이상 진한 말은 안 된다.
나는 한 마디 가련한 어휘를 첨가할 성의를 보이자.
「나붓 나붓」
이만하면 완비된 장치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의 첫 장을 꾸밀 그 소문 높은 珊瑚鞭산호편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실체적인 것으로 나로서는 너무나 과감히 치사스럽고 어마어마한 세간살이를 장만한 것이다.
그런데ㅡ 혹 지나치지나 않았나?
천하에 똑 소리 나는 관찰력이 없지 않으니까.!
너무 금색 칠을 아니 했다가는 섣불리 들킬 염려가 있다. 그러나ㅡ 그냥, 어디! 이대로 사용해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 가을바람이 자못 퉁소 소리로 감아드는 내 구중중한 방에 홀로 누워 終生종생하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에 의하면 나는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紅顔美少年홍안미소년」이라는 것이다.
그렇건만 나는 확실히 늙은이다.
그날 하루하루가「인생은 짧고 예술은 기다랗다」하는 엄청난 평생이다.
나는 날마다 목숨이 끊어졌다.
나는 자던 잠(이 잠이야말로 언제 시작한 잠이더냐.)을 깨이면 내 뼈에 사무치는 생애가 시작되는데 청춘이 여지없이 탕진되는 것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웠지만 역력히 보인다.
나는 늙어옴에 가난한 식사를 한다.
12시간 이내에 終生종생을 맞이하고 그리고 할 수 없이 이리 궁리 저리 궁리 유언다운 글이 어디 유실되어 있지 않나 하고 찾고,
찾아서는 그중에 의젓한 놈으로 몇 추린다.
그러나 고독한 만년 가운데 한 구절의 짧은 풍자시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처참히 나는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일생의 하루ㅡ
하루의 일생은 대체(우선) 이렇게 해서 끝나고. 끝나고 하는 것이었다.
자ㅡ보아라.
이런 내 분장은 좀 과하게 치사스럽다는 느낌은 없을까? 없지 않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게 일세를 풍미할 만한 새롭고 정갈한 맛이 비교가 안 되는
햄릿Hamlet (妄言多謝잘난체 해서 죄송)을 하나 출세시키기 위해서는 이만한 출자는 아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나는 가을이고. 소녀는 봄 해동기
어느 때나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즐거운 소꿉장난을 한 번 해보리까.
나는 그해 봄에도ㅡ 부질없는 세상이 스스러워서 눈서리 같은 위엄을 갖춘 몸으로
싸늘한 심정에 불쌍한 나날을 맞고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美文 美文 曖牙애하! 美文
(美文아름다운 글. 美文멋진 문양. 曖牙스케치해 놓은 美文멋진 문양)
미문이라는 것은 지극히 조처하기 위험한 수작이니라.
(美文멋진 문양이라는 것은 지극히 관리하기 위험한 손의 작업이다.)
나는 내 感傷아픈 마음의 꿀방구리 단지 속에 청산 가던 나비처럼 痲醉昏死 꿀에 너무 취해
혼절하기 자칫 쉬운 것이다. 조심조심 나는 내 맵시를 고쳐야 할 것을 안다.
나는 그날 아침에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지 이를 닦으면서 내 작성 중에 있는 유서 때문에 끙끙 앓았다.
열 세 벌의 유서가 거의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을 집어 내 보아도 다 같이 서른여섯 살에 자살한 천재 빈센 반 고흐가 머리맡에 놓고 간 蓋世,逸品(세상에 떨칠만한 뛰어난 작품)의 흉내 내기에서도 한 발짝도 나서지 못했다.
( Vincent van Gogh 1853.3.30 ~ 1890.7.29)
내게 요만 재주 밖에는 없느냐는 것이 다시 없이 분하고 억울한 사정이었고 또 초조한 마음의 근원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되 가장 고매한 얼굴은 지속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리고 계속하여 끙끙 앓고 있노라니까.
(나는 일시일각을 허송하지는 않는다. 나는 없는 지혜를 끊이지 않고 쥐어짠다.)
속달편지가 왔다.
소녀에게 서다.
선생님! 어젯저녁 꿈에도 저는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꿈 가운데 선생님은 참 다정하십니다. 저를 어린애처럼 귀여워해 주십니다.
그러나 白日밝은 햇살아래 정처없이 떠도는 선생님은 저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비굴하다 라는 것이 무슨 빛으로 되어 있나 보시려거든 선생님은 거울을 한 번 보아 보십시오.
거기 비치는 선생님의 얼굴빛이 바로 비굴이라는 것의 빛입니다.
헤어진 부인과 삼년을 동거하시는 동안에 너 가거라. 소리를 한 마디도 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유일의 자만이십니다 그려!
그렇게까지 선생님은 인정에 苟苟구구하신가요.
R과도 깨끗이 헤어졌습니다. S와도 절연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된다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믿어 주시는 바지요?
다섯 달 동안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청절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최후까지 더럽히지 않은 것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저의 희멀건 살의 매력이 이렇게 다섯 달 동안이나 놀고 없는 것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이 아깝습니다.
저의 잔털 나스르르한 목 영한 온도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선생(先生)님이어!
저를 부르십시오. 저더러 영영 오라는 말을 안 하시는 것은 그것 역시 가신적 경우와 똑같은 이론에서 나온
구구한 인생변호의 치사스러운 수법이신가요?
영원히 선생님「한 분」만을 사랑하지요.
어서 어서 저를 전적으로 선생님만 의 것을 만들어 주십시오.
선생님의 전용이 되게 하십시오.
제가 아주 어수룩한 줄 오산하고 계신 모양인데 오산치고는 좀 어림없는 큰 오산이리다.
네 딴에는 제법 든든한 줄만 믿고 있는 네 그 안전지대라는 것을 너는 아마 하나 가진 모양인데
그까짓 것쯤 내 말 한 마디에 사태가 나고 말리라,
이렇게 일러드리고 싶습니다. 또ㅡ 예끼! 구역질나는 인생 같으니 이러고도 싶습니다.
삼월삼일 날 오후 두 시에 동소문 뻐스정류장 앞으로 꼭 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 징벌을 안 받지 못하리다.
만19세 2개월을맞이하는 貞姬정희 올림
李箱선생님께 물론 이것은 죄다 거짓부렁이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用心法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법 특히
그중에도 結尾마지막 부분의 비견할 데 없는 청초함이 壯,疾風迅雷 굉장히 날쌔고 과격함을 품은 듯한 명문이다.
나는 까무러칠 번하면서 혀를 내어둘렀다.
나는 깜빡 속기로 한다. 속고 만다.
여기 이 이상선생님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나는 지난밤 사이에 내 평생을 經歷경력했다.
나는 드디어 쭈굴쭈굴하게 노쇠해 버렸던 차에 아침(이 온 것)을 보고 이 키!
남들이 보는 데서는 나는 가급적 어쭙지않게 (잠을)자야 되는 것이거늘, 하고 늘 이를 닦고 그리고는 도로 얼른 자버릇 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또 그럴 세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짐짓 기이하기도 해서 그러는지 驚天動地(하늘이 놀랄 만큼)의 육중한 경륜을 품은 사람인가보다고들 속는다.
그러니까 고렇게 하는 것이 내 시시한 자세나마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의 비결이었다.
즉 나는 남들 좀 보라고 낮에 잔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고 欣喜雀躍(참새가 날아오르듯) 좋아서,
나는 蓋世의 經綸(잘난 채 하는 것이나 체면 같은 것)과 유서를 정리하는 고민을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하여 바로 이발소로 갔다.
나는 여간 아닌 호걸답게 입술에다 치분을 허옇게 묻혀가지고는 그 현란한 거울 앞에 가 앉아
이제 화려하게 개막하려 드는 내 終生존생을 유유히 즐기기로 거기 해당하게 내 맵시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위선 그 鵲巢雷名(제비집이라는 별명)까지 까지 있는 산발한 머리를 썰어서 상고머리라는 것을 만들었다.
五角鬚(양볼 코 턱수염)은 깨끗이 도태해 버렸다.
귀를 후비고 코털을 다듬었다.
안마도 했다.
그리고 비누세수를 한 다음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니 품있는 데라고는 한 귀퉁이도 없어 보이는 듯 하면서 또한 태생을 어찌 어기리요,
좋도록 말해서 라파엘전파前派 고전파 일원같이 그렇게 淸楚白面書生(말숙한 책만 읽는 사람)이라고도 보아줄 수 있지 하고 실없이 제 얼굴을 미남자거니 고집하고 싶어 하는 구지레한 욕심을 속으로 탄식하였다.
나는 내 그런 여간 이만저만하지 않은 풍모를 더욱 더욱 이만저만하지 않게 변화를 주기 위하여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고다지 알맞은 단장을 하나 내 손에 쥐어 주어야 할 것도 때마침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綾織 - 날실과 씨실을 몇 올씩 건너뛰어 만나게 함으로써 빗금무늬가 나타나게 짜는 방법
별수 없이ㅡ 오늘이 즉 3월 3일인 것이다.
나는 점잖게 한 30분쯤 지각해서 동소문 지정받은 자리에 도착하였다.
貞姬정희는 또 정희대로 아주 정희답게 한 30분쯤 일찍 와서 있다.
정희의 입상은 제정러시아 때 우표딱지처럼 적잖이 슬프다.
이것은 아직도 얼음을 품은 바람이 땅을 녹이는 머리답게 싸늘해서 말하자면
정희의 모양을 얼마간 침통하게 해 보일 탓이렷다.
나는 이런 경우에 천만 뜻밖에도 눈물이 핑 눈에 그뜩 돌아야 하는 것이 꼭 맞는 원칙으로서의 의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벅저벅 정희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둘은 이 땅을 처음 찾아 온 제비 한 쌍처럼 잘 앙증스럽게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도 나는 내 두루마기에 잡히는 주름살 하나에도 단장을 한 번 휘젓는 곡절에도 세세히 조심한다.
나는 말하자면 내 우연한 終生을 감쪽스럽도록 찬란하게 느껴보기 위하여 내 살얼음을 밟는 듯한 포ㅡ즈를
아차 실수로 무너뜨리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굳게굳게 명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맨 처음 발언으로는 나는 어떤 奇絶,慘絶,警句절묘하고 멋진 말을 내어 놓아야 할 것인가,
이것 때문에 또 잠깐 머뭇머뭇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대이고 거 어쩌면 그렇게 똑 제정러시아적 우표딱지같이 초초하니 어쩌니 하는 수는 차마 없다.
나는 선뜻
「설마가 사람을 죽이느니」
하는 소리를 저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그런 가라앉은 목소리에 꽤 명료한 발음을 얹어서 정희 귀 가까이다 대이고 지껄여버렸다.
이만하면 아마 그 경우의 최초의 발성으로는 무던히 성공한 편이리라.
뜻인즉, 네가 오라고 그랬다고 그렇게 내가 불쑥 올 줄은 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는 꼼꼼한 의도다.
나는 아침 반찬으로 콩나물을 삼전어치는 안 팔겠다는 것을 교묘히 무사히 삼전어치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미끈한 쾌감을 맛본다.
내 딴은 다행히 노랑 돈 한 푼도 참 용하게 낭비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내 청천에 벽력이 떨어진 것 같은 인사에 대하여 정희는 실로 대답이 없다.
이것은 참 큰일이다.
아이들이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하고 노는 그런 암팡진 수단으로 그냥 단번에 나를 어지러뜨려서는 넘어뜨려버릴 작정인 모양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 상쾌한 정희의 確乎(굳굳한 부동자세)야말로 엔간치 않은 출품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내어 놓은바 급소를 찌른 말은 그만 즉석에서 분쇄되어 가엾은 잘못된 작품으로 내려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나는 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손짓 발짓을 한번 해 보이고 이윽고 낙담하였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일이 여기 이른 바에는 내 포ㅡ즈 여부가 문제 아니다.
표정도 인제 더 써먹을 것이 남아 있을 성싶지도 않고 해서 나는 겸연쩍게 안색을 좀 고쳐가지고 그리고
정희! 그럼 나는 가겠소, 하고 깍듯이 인사하고 그리고?
나는 발길을 돌려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 파란만장의 생애가 자잘한 말 한 마디로 하여 그만 타다 남은 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나는 세상에도 참혹한 풍채 아래서 내 終生을 치른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그럼 그럴 성싶기도 하게 단장도 한두 번 휘두르고 입도 좀 일그적 일그적해 보기도 하고 하면서 행차하는 체해 보인다.
5초 ㅡ10초ㅡ12초 ㅡ30초ㅡ1분 ㅡ결코 뒤를 돌아다보거나 해서는 못쓴다.
어디까지든지 사심 없이 패배한 체하고 걷는 체한다. 실심한 체한다.
나는 사실은 좀 어지럽다.
내 쇠약한 심장으로는 이런 자약한 체조를 그렇게 장시간 계속하기가 썩 어려운 것이다.
묘지명이라.
일세의 귀재 李箱은 그 일생의 대작「終生期一篇 종생기 1편을 남기고
서력기원후1937년 3월 3일 오후 3시 여기 밝은 태양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졸하다.
향년 만25세와 11개월
鳴乎 오호라! 상심하리라.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李箱
구천을 우러러 통곡하고 이 북망산의 한 돌판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의 죽음 후 수삼인의 비첩이 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하니 지하의 李箱아! 바라건댄 편히 눈을 감으시라.
그리 칠칠치는 못하나마 이만큼 해 가지고 이꼴저꼴 구지레한 흠집을 살짝 숨기기로 하자.
고만 실수는 여상의 묘기로 겸사겸사 메꾸고 다시 나는 내 반생(半生)의 틀에 후일에 관해 차근차근 고려하기로 한다. 以上
역대의 풍자시와나라가 기울어지는 것과의 관계는 어길 수 없는 굳은 규칙이 모두 내게 있어서는 내 위선을 몰래 감추는 한 스무드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의 풍자시는 나라가 위태롭거나 사회가 혼란 할 때 많이 나타나는 하나의 규칙이다.
그러나. 한 두 편의 풍자시로 내가 애국자요 하는 것은 위선을 감추는 하나의 구실일 뿐이다. 행동하는 지식이 필요할 뿐이다.)
실로 나는 내 목숨을 잃음의 자리에서도 임종의 합리화를 위하여 프랑스의 화가 Corot
(1796~1875)코로처럼 복숭아색의 팔렛을 볼 수도 없거니와
톨스토이처럼 탄식해 주고 싶은 쥐꼬리만 한 금언의 추억도 가지지 않고 그냥 난데없이 다리를 삐어 넘어지듯이 스르르 죽어 가리라.
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 French
그는 독신으로 살았다.
"코로처럼 복숭아색의 팔렛을 볼 수도 없거니와" = 여성과의 교제는 그의 생애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그는 전생애를 그림에 바쳤다.
거룩하다는 칭호를 휴대하고 나를 찾아오는「연애」라는 것을 응수하는데 있어서도
어디서 어떤 노소간의 의뭉스러운 선인들이 발라먹고 내어버린 그런 유훈을 나는 헐값에 걷어 들여다가 제련. 재탕해서 다시 써먹는다.
(내가 이런 얄팍한 수법을 써 먹)는 줄로만 알았다가 또 내게 혼나는 경우가 있으리라.
나는 찬밥 한 술 냉수 한 모금을 먹고도 넉넉히 일세를 위압할 만한 苦言고언을 가려내어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지혜의 실력을 가졌다.
그러나 자의식의 절정 위에 발돋움을 하고 올라선 숨이 끊어질 때 내뱉는 짧은 비명의 소리와 같은 비결을 보통 밤 시장 국수버섯을 팔러 오신 시골 아주머니들에게 서너 푼에 그냥 넘겨주고 그만두는 그렇게까지 자신의 에티켓을 미화시키는 겸허의 방식도 또한 나는 흔들림 없이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탄탄한 틀을 짜놓을지어다. 以上
亂麻복잡하게 뒤얽힌 어지러운 세상과 같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마간 비극적인 自己探求.
이런 흑발 같은 남루한 주제는
문벌이 버젓한 나로서 채택할 신세가 아니거니와
나는 서양의 에티켓으로 차 한 잔을 마실 적의 포ㅡ즈에 대하여도 세심하고 세심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휘파람 한 번을 분다 치더라도 네 극비리에 최선의 선율을 골라서 감춰진 옛 가락을 지켜가야만 한다. 그런 다음이 아니고는 나는 희망 잃은 황혼에서도 휘파람 한 마디를 마음대로 불 수는 없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고결한 지식?
사슴, 물오리, 이 밖의 어떤 종류의 동물도 내 동물의 왕국에서는 낙탈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수렵용으로 귀엽게 가엽게 되어먹어 있는 동물 外에 동물에 언제든지 無可奈何막무가내 고집을 부림으로써 지혜가 없다.
또ㅡ 그럼 풍경에 대한 방만한 처신법?
어떤 풍경을 묻지 않고 풍경의 근원, 중심, 초점이 말하자면 나 하나
「도련님」다운 소행에 있어야 할 것을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강조한다.
나는 이 맹목적 신조를 두 눈을 그대로 딱 감고 믿어야 된다.
自進한「愚昧」「歿覺」이 참 어렵다. (스스로 무식한척 하기가 참 어렵다.)
보아라. 이 自得자득하는 愚昧우미의 絶技절기를! 歿覺몰각의 絶技절기를
白鷗는 宜白沙하니 莫赴春草碧 하라.
흰 갈매기는 흰 모래가 제격이다. 프른 풀밭에 앉지마라
李太白이는 전후만고의 으리의리한「華族화족」
나는 이태백을 닮기도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오언절구 한 줄에서도 한 字 가량의 태연자약한 실수를 범해야만 한다.
현란한 문벌이 풍기는 가히 범할 수 없는 기품과 세도가 넉넉히 古詩 한 구절쯤 서슴지 않고 상처를 내어 놓아도 다들 어수룩한 체들 하고 속느니 하는 교만한 미신이다.
곱게 빨아서 곱게 다리미질을 해 놓은 한 벌 속옷에 깜박 속는 깨끗한 정조처럼
그렇게 아담하게 나는 어떠한 넘어지고 자빠짐에서도 거뜬하게 얄미운 미소와 함께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니까ㅡ 오늘날 내 한 氏族이 분명치 못한 소녀에게 섣불리 딴죽을 걸려 넘어진하다기로서니 이대로 내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는 희망의 호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終生을 한 방울 하잘 것 없는 오점을 내이는 채 숟가락 집어 던지 듯해서야 어찌 初志처음 품은 꿈의 만분의 일에라도 응답할 수 있는 면목이 족히 서겠는가, 하는 허울 좋은 구실이 긴긴 날의 밤보다도 오히려 한 뼘 짧은 내 앞으로 나가야 할 앞길에 맞닥뜨리기시작하는 것이었다.
완만 착실한 서술!
나는 과히 눈에 띠울성싶지 않은 한 지점을 재재바르게 붙들어서 거기서 공중 담배를 한 갑 사(주머니에 넣고) 피워 물고 정희의 뻔ㅡ한 걸음을 다시 뒤따랐다.
나는 그저 일상의 다반사를 간과하듯이 범연하게 휘파람을 불고, 내, 구두 뒤축이 아스팔트를 디디는 템포 음향, 이런 것들의 귀찮은 조절에도 깔끔히 정신 차리면서 넉넉잡고 삼분3분, 다시 돌친 걸음은 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부질없는 세상에 제 심각하면 침통하면 또 어쩌겠느냐는 듯싶은 서운한 눈의 위치를 동소문 밖 신개지풍경 어디라고 정하치 않은 한 점에 두어 두었으니 보라는 듯 한 부득부득 지근거리는 자세면서도 또 그렇지도 않을 성싶은 내 묘기 중에도 묘기를 더한층 허겁지겁 연마하기에 골돌하는 것이었다.
日暮청산ㅡ날은 저물었다. 아차! 아직 저물지 않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보다.
날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러면 아까 장만해 둔 세간기구를 내세워 어디 차근차근 살림살이를 한 번 치뤄 볼 천우의 호기가 내 앞으로 다다랐나 보다.
자ㅡ 태생은 어길 수 없어 비천한「타」를 감추지 못하는 딸ㅡ
(앞에서 말한 치사한 소녀 운운 하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이 바보 李箱의 호의에서 나온 곡해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연수의 세 번째 장편소설. 천재시인 이상(李箱)의 유품인 '데드마스크'에 대한 진위를 중심으로 이상의 삶과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고 있다. 1부 데드...
이 책은..
나의 평가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전기적 사실을 끌어모은다 해도 이상의 이문장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상이 결코 가난하고 허전해지지 않는 한, 모든 전기는 이상이 쳐놓은 비밀의 그물에 걸려들 뿐이다. -p 121
현기증이 나는 정오의 싸이렌 소리에 문득 겨드랑이의 날개를 발견하고 날기를 소망하였으나 끝끝내 날지 못한, 한국 문학사에 거대한 흔적을 남긴 천재 작가. 이상은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초현실, 추상주의의 유행속에서 총독부의 잘나가는 기수직을 때려치우고 기생 금홍과 다방 '제비'를 차린 모던보이 이상, 건축가로 화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그의 삶이 영원히 비밀과 신비로 감싸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활동하던 작가들이 모두 실종되거나 납북,월북되었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소설 '꾿빠이, 이상'(문학동네,2001)은 바로 그런 이상의 삶과 문학, 죽음의 비밀로 연관된 작품을 둘러싸고 있다.
어느것이 가짜인가 진짜인가? 진짜로 믿으면 진짜이고 가짜로 믿으면 가짜인가? 작품을 이끄는 것은 이른바 가짜와 진짜의 '진위 논란'인데 그 대상은 모호하면서도 퍽 흥미롭다. 자연인 김해경과 이상이라는 인공인의 대결, 죽은 후에 한 친구가 떴다는 데드마스크의 분실과 가짜 데드마스크의 출현에 한 출판사의 김연(화) 기자가 연루되면서 아마추어 이상연구자가 쓴 이상의 오감도 제 16호 시에 대한 진위논란, 이상 문학을 연구하고 학술 발표차 한국에 온 재미국문학자 피터 주의 정체성(자신이 미국인이냐,한국인이냐,대만인이냐)이 실타래처럼 엉켜 진실게임의 진실을 찾아간다.
작가도 말미에 밝혔듯 김윤식의 이상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소설의 뼈대를 잡아갔기 때문에 잡지사 기자 김연의 시각으로 풀어가는 '데드마스크'에는 이상의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실제 인물들의 이름과 사건들이 나온다. 실제와 허구속 이상의 발자취가 미궁에 싸여있어 독자를 아득한 심연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정체-이상의 데드마스크. 잡지사 기자인 김연(화)에게 걸려 온 한통의 전화로 데드마스크의 출현과 가짜라는 판명, 그로 인해 그를 이루고 있는 상황들이 모두 의심받게 되는데, 어떤 시인의 아내(인터뷰기자)와의 사랑마저도 그 진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가짜 데드마스크의 헤프닝속에 김연 기자에게 한 아마츄어 이상연구자의 수기가 전해지는데, '잃어버린 꽃'에서는 이상의 삶을 그대로 쫓다가 결국 73세의 나이로 이상과 같이 도쿄의 한 병원에서 자살을 하는 서혁민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이상의 삶과 그의 작품과 같은 삶을 살려고 했던 이상이 도쿄로 유학가서 그곳에서 자연인 김해경을 벗어던지고 영원히 우리의 이상으로 남게 되는 순간을 비교적 꼼꼼하게 수기로 옮기고 있다. 또한 유실된 오감도 제 16호의 작품과 비슷한 작품을 본인이 직접 쓰면서 다시한번 이상의 작품이냐 아니냐로 진위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미친놈의 개수작이냐' 또는 '다시는 태워날 수 없는 천재작가냐' 어느쪽을 믿느냐에 따라 그 믿는 쪽이 진실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 거짓이라도 믿으면 진실이 되는 것일까? 작가는 이미 유실된 데드마스크의 출현과 분실된 나머지 오감도 작품, 피터주의 출생등을 영원히 해결못한 비밀로 처리함으로써 이상의 삶과 작품을 신비화하는데 한몫한다. 동료작가들과는 다르게 일찍 멜론을 외치며 도쿄의 한 병원에서 죽어간 그의 삶을 따라가는 비현실적인 소설 속 장치인 가공인물, 서혁민처럼 이상의 작품과 삶앞에서 그의 비밀에 걸려들어 허우적 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란 무릇 안이한 일상을 담보받은 우리들과는 달라야 하는 법. '새'에서는 미국에서 '이상'연구 논문 발표차 피터 주가 한국에 오면서 기자 김연이 건네주는 서혁민의 시를 이상의 유작으로 발표하지만 결국 학술발표에서의 진짜라고 발표되었던 작품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품도 거짓임을 알게 된다. 그 부분은 자신이 미국에서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확인하며 느꼈던 절망감과 함께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된다. 결국 뛰어내린 곳이 백화점 옥상, 안전한 곳에 미치자 그는 드디어 말하게 된다. '꾿빠이, 이상'. 이 분분이 작가의 기품이 숨어있는 곳. 결국 패배했지만 뛰어내렸던(삶의 참된 가치를 찾아) 그 짧은 순간이 주인공 피터주에겐 진정으로 죽어서 산 이상이 쳐 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는 사건이기도 하다.
'꾿빠이 이상' 은 이상의 전기적 사실에서 벗어나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세사람의 주인공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문학의 환원성을 보여준다. 작품속에 이상이 있고 그와 한 시대를 살았던 동료작가들, 연인들, 평론가들이 있고 기자가 있고 아마추어 연구자가 있고 박사가 있어 범접할 수 없는 이상문학의 위대성을, 그로 인해 현재의 우리의 삶에 어떤 연관성이 있나 보여주는 순도높은 작품이다. 소설을 읽는 궁극적인 이유가 우리 인식을 공고히 하였던 제도나 사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사고를 더 확장시키는 것에 있다면 세 사람의 주인공이 실패할 줄 알면서도 갈 수 밖에 없는 여행지를 만나보시라.
그래, 이쯤에 고백부터 하나 하자. 글쓰기가 이렇게 더이상 더 막연해지기 전에,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나도 딱 이상의 나이까지만 살자고 해놓고선 부끄럽게도 몇년을 더 살고 있다.(아마도 별일이 없는 한 그 의 삶의 기간의 세배는 더 살게 되겠지.) 내게도 다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이상문학과의 만남은 말할 수 없이 강렬한 것이었고 그 낯섦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도 당장 무엇인가 어떤 일탈을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불안한 현실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찌 이 타락한 세계를 그냥 그대로 두고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거부할 수 없다면 껴안자. 힘껏.
by
귀리
* <무브온21블로거기자단>이란 : 무브온21에서 활동하는 논객들이 모여 구성한 기자단입니다. 무브온21의 주요 칼럼과 무브온21 논객들이 기획한 기사와 인터뷰를 내보냅니다.
종생기의 글 내용은 이상 특유의 맵시 있는 절약법으로 피력한 위트와 페러독스의 표현이다. 잃어버린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면 금방 들킨다. 그렇게 되면 그 그림은 감춰지거나 영원히 폐기처분해 버릴 테니까. 훗날 천하에 깨우친 눈 있는 선비가 나타나 의심을 품고 내 작품을 찾아주길 바라고 있었기에 구체적인 설명을 피한 것이다.
李箱 : 동경에서 사망 1937년 4월 17일
의미 찾기: 어머니. 우리들 3인. 잉태분만. 유산. 十九 살. 수척한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 아이 낳기
성 세바스티양: 순교자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다가 나무에 묶여 사살됨.
로자 룩셈부르크: 이상적인 사회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살해당함.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Helene Fischer) 85년생 독일이 자랑하는 미녀 가수. 국민가요가수 .1985년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에서 출생
꼿나무
李箱이상
벌판 한 복판에 꼿나무 하나가 잇소
근처에는 꼿나무가 하나도 업소
꼿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꼿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꼿을 피워가지고 섯소.
꼿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꼿나무에게 갈 수 업소
나는 막 달아낫소
한 꼿나무를 위하야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숭내를 내엿소.
1933.7 월간 『카톨릭 청년』 <가톨릭 청년> 2호,
차라리 이렇게 난해한 시로 영원한 신비를 간직하게 할 걸 그랬나 보다.
독자들을 깊은 안개속의 시루엣으로 끌어들여 미궁 속을 헤매게 하여
탐색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의도한 바라 할 수도 있다.
이상은 문학활동 내내 거울을 만지작거린다.
거울에 비치는 我他의 이중적 설정으로 .언어 또한 이중적 언어를 사용하여
한 단어 속에도 이중 삼중의 의미를 가진다.
언어의 마술사였다.
해설 / - 이상의 자기고백서 -
벌판 한 복판은 어디인가?
중원의 땅 만주를 이르는 말이다. 일제는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하고 실제 통치한다.
近處에는 꼿나무가 하나도 업소 사실상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생소한 땅이다.
주변으로는 일본 세력이라고는 없다.
만주 땅에는 일제군벌세력과 대륙팽창주의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꼿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꼿나무를 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熱心으로 꼿을 피워가지고 섯소. 1933년 만주국을 실제 통치하는 관동군은 일본 천왕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한반도를 넘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워 중흥의 꽃을 피워 나가고 있던 시기이다.
꼿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꼿나무에게 갈 수 업소 하지만 중원의 땅 만주국을 뚝 떼어 일본으로 가지고 가지는 못 한다.
나는 막 달아낫소 한 꼿나무를 위하야 그러는 것처럼 수많은 농민들이 쫒기 듯 달아난 곳이 만주 땅이었다. 그 속에는 독립의지를 품은 애국자들도 있었으니 일제의 만주이주정책에 호응하는 냥 만주로 달아나서는 독립투사가 됐다.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숭내를 내엿소. 시인 이상도 만주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는 자기 고백서인 것이다.
만주국을 실제 통치하고 있는 일제의 전력을 꽃에 비유하고 있다. 나무아닌 꽃은 일장춘몽 지면 그만이다.
李箱은 머지않아 일제 폐망이 도래한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살았다.
여러 글 속에 일제 폐망의 굳은 믿음을 감추어 놓았다. -끝-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 마지막 황제인 부이를 황제로 삼아 실제 통치는 일본제국 부대인 관동군이 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다.
1945년 8월 18일 붕괴되었다.
-월간 『카톨릭 청년』 <가톨릭 청년> 2호, 1933.7월
이 詩를 쓰기 전인 1932년 이상 22세 때 이미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滿洲移住 만주이주 한편 일제는1931만주사변 후에는 만주이주정책으로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한 경우가 많았다.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했으며, 1931년에는 63,982명, 32년-672,649명, 34년 -719,988명에 달했다.
이들의 90%가 소작농민으로, 소작료는 국내보다 낮았으나 각종 세금 수탈로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