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朝鮮朝) 대외(對外) 전역(戰役) 지휘부(指揮部) 일람(一覽) | ||
조선조에 병사(兵使) 및 수사(水使)가 맡는 일 곧 장수(將帥)의 직임(職任), 특히 국경(國境) 밖으로 군사를 진군(進軍)시키는 장군의 임무를 곤외지임(閫外之任)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조선조의 각종 대외 전역(戰役)을 수행하기 위하여 구성된 지휘부 내지는 사령관을 정리한 바를 문무제곤록(文武制閫錄)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글 중심으로 표(表)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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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
전역(戰役) 명칭 |
지휘부 및 지휘관 |
태조 |
병자(丙子, 1396) 대마도역(對馬島役) |
도통사(都統使) 김사형(金士衡)-안동인,좌정승 부통사(副統使) 남재(南在)-의령인,영의정 |
태조 |
정축(丁丑, 1397) 여진(女眞) 초안(招安) |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芝蘭)-청해인,개국공신 |
세종 |
기해(己亥, 1419) 대마도역(對馬島役) |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장수인,대사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통천인,좌의정 도통사(都統使)-유정현(柳廷顯)-문화인,영의정 체핵사(體覈使)-조치문(曺致文)-창녕인,판서 |
세종 |
임자(壬子,1432) 야인(野人)정벌(征伐) |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 부절제사(副節制使) 이순몽(李順蒙)-영천,영중추원사 |
세종 |
계축(癸丑, 1433) 육진(六鎭) 설치(設置) |
도순문사(都巡問使) 김종서(金宗瑞)-순천인,좌의정 |
세종 |
을묘(乙卯, 1435) 축오랑캐(逐兀良哈) |
도진무사(都鎭撫使) 이진(李震)-판서 대호군(大護軍) 정덕성(鄭德成)-판서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장(李藏)-판서 |
세종 |
정사(丁巳, 1437) |
팔도도찰사(八道都察使) 이석형(李石亨)-연안인,판중추 부체찰사(副體察使) 김장(金廧))-판서 |
세종 |
신유(辛酉, 1441) 육진(六鎭)축성(築城) |
도체찰사(都體察使) 황보인(皇甫仁)-영천인,영의정 출척사(黜陟使) 정갑손(鄭甲孫)-동래인,참찬 도순문사(都巡問使) 김종서(金宗瑞) |
단종 |
을해(乙亥, 1455) |
전라도체찰사(全羅道體察使) 정분(鄭苯)-진주인,우의정 |
세조 |
무인(戊寅, 1458) 건주(建州) 정벌 |
양서도체찰사(兩西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ㅡ고령인,영상 |
세조 |
경진(庚辰, 1460) 야인(野人) 정벌 |
강원함길도체찰사(江原咸吉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 |
세조 |
정해(丁亥, 1467) 북관적(北關賊) 이시애(李施愛) 토벌 |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전주인, 귀성군 부총사(副摠使) 조석문(曺錫文)-창녕인,영의정 도체찰사(都體察使) 윤자운(尹子雲)-무송인,영의정 좌대장(左大將) 어유소(魚有沼) 우대장(右大將) 남이(南怡) |
세조 |
정해(丁亥, 1467) 야인(野人) 정벌 |
정서주장(征西主將) 강순(康純)-신천인,영의정 좌대장(左大將) 어유소(魚有沼)-충주인,도총관 우대장(右大將) 남이(南怡)-의령인,병판 |
예종 |
기축(己丑, 1469) |
호남도원수(湖南都元帥) 홍윤성(洪允成사)-회인인,영상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구치관(具致寬)-능성인,영의정 |
성종 |
기해(己亥, 1479) 건주(建州) 토벌 -명(明) 요청 |
도원수(都元帥) 윤필상(尹弼商)-파평인,영의정 부원수(副元帥) 김교(金嶠)-선산인,판서 |
성종 |
신해(辛亥, 1491) 야인(野人)토벌(討伐) |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양천인,우의정 부원수(副元帥) 이계동(李季同)-평창인,영중추부사, |
성종 |
신해(辛亥,1491) 야인(野人)토벌(討伐) |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 부원수(副元帥) 성준(成浚)-관찰사. |
중종 |
경오(庚午, 1510) 삼포왜란(三浦倭亂) |
도원수(都元帥) 유순정(柳順汀)-진주인,영의정 부원수(副元帥) 안윤덕(安潤德)-廣州人,참찬 도체찰사(都體察使) 성희안(成希顔)-창녕인,영의정 부체찰사(副體察使) 박승문(朴承文)-판서 좌방어사(左防禦使) 황형(黃衡)-창원인,판서 우방어사(右防禦使) 유담년(柳聃年)-문화인,판윤 |
중종 |
임인(壬寅, 1542) 명(明) 요청 건주(建州)공격 |
도원수(都元帥) 이기(李芑)-덕수인,영의정 부원수(副元帥) 장언량(張彦良)-풍덕인,판윤 |
명종 |
을묘(乙卯, 1555) 장흥역(長興役) 왜변 |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준경(李浚慶)-경주인,영의정 좌방어사(左防禦使) 김경(金景)- 우방어사(右防禦使) 남치근(南致勤)-의령인,판윤 |
명종 |
임술(壬戌, 1652) 임꺽정(林巨正)토벌 |
도토사(都討使) 남치근(南致勤) |
선조 |
계미(癸未,1583) 적호(賊胡) 니탕개(尼湯介) 정벌 |
도원수(都元帥) 윤승훈(尹承勳)-해평인,영중추부사 도순찰사(都巡察使) 정언신(鄭彦信)-동래인,우의정 북병사(北兵使) 김우서(金禹瑞)- |
선조 |
정해(丁亥, 1588) 전라역(全羅役) |
좌방어사(左防禦使) 신립(申砬)-평산인,도순변사 우방어사(右防禦使) 변협(邊協)-원주인,공판 |
선조 |
임진(壬辰,1592) 임진사월역(四月役) |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풍산인,영의정 부체찰사(副體察使) 김응남(金應南)-원주인,좌의정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평산인,도순변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용인인,병마절도사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경주인,좌의정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평산인,부원수 팔도순찰사(八道巡察使) 한응인(韓應仁)-청주인,우의정 |
선조 |
정유(丁酉, 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안동인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이순신(李舜臣)-덕수인 |
선조 |
경자(庚子, 1600) 기찰(譏察)호남(湖南) |
도체찰사(都體察使) 이항복(李恒福)-경주인,영의정 부체찰사(副體察使) 한준겸(韓浚謙)-청주인,영돈녕 |
광해 |
무오(戊午, 1618) 조명군(助明軍) 심하(深河) 출병 |
5도도원수(五道都元帥) 강홍립(姜弘立)-진주인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김해인,병마절도사 |
광해 |
무오(戊午, 1618) 10월수관서(守關西) |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인동인 부원수(副元帥) 우치적(禹致績)-단양인,병마절도사 |
광해 |
경신(庚申, 1620) 경신 10월 |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 부원수(副元帥) 우치적(禹致績) |
인조 |
계해(癸亥, 1623) 계해 5월 |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고성인,병마절도사 |
인조 |
갑자(甲子, 1624) 이괄란(李适亂) |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경주,병마절도사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전주인,영의정 부체찰사(副體察使) 이시발(李時發)-경주인, 형판 |
인조 |
갑자(甲子, 1624) 7월 장만(張晩) 체대(遞代) |
도원수(都元帥) 이홍주(李弘冑)-전주인,영의정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 |
인조 |
정묘(丁卯, 1627) 정묘(丁卯) 홍립란(弘立亂) |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光州人, 병마절도사 |
인조 |
신미(辛未, 1631) 8월 |
도원수(都元帥) 김시양(金時讓)-안동인,판춘추관사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 |
인조 |
임신(壬申, 1632) 11월 |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안동인,영의정 부원수(副元帥) 윤숙(尹숙) |
인조 |
병자(丙子, 1636)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
관서도원수(關西都元帥) 김자점(金自點) 부원수(副元帥) 유림(柳琳)-진주인,총융사 남도도원수(南道都元帥) 심기원(沈器遠)-청송인,좌의정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평산인,총융사 도체찰사(都體察使) 김류(金瑬)-순천인,영의정 |
인조 |
정축(丁丑, 1637) 조청(助淸) 가도(椵島) 공격 |
상장군(上將軍) 유림(柳琳) 부장군(副將軍) 임경업(林慶業)-평택인,병마절도사 |
인조 |
경진(庚辰, 1640) 금주(錦州) 공격 |
상장군(上將軍) 이시영(李時英)-병마절도사 부장군(副將軍) 유림(柳琳) |
인조 |
경진(庚辰, 1640) 우(又)금주(錦州) |
상장군(上將軍) 임경업(林慶業) 부장군(副將軍) 이완(李浣)-경주인,우의정 |
인조 |
신사(辛巳, 1641) 조청병(助淸兵)) |
상장군(上將軍) 유림(柳琳) |
효종 |
갑오(甲午, 1654) 조청(助淸) 공차한적(攻車漢賊) |
상장군(上將軍) 변급(邊汲)-수군절도사 |
효종 |
무술(戊戌, 1658) 재조청(再助淸) 나선정벌(羅禪征伐) |
상장군(上將軍) 신류(申瀏)-평산인,삼도수군통제사 |
숙종 |
을묘(乙卯,1675) 체부(體府) 설치 |
도체찰사(都體察使) 허적(許積)-양천인,영의정 부체찰사(副體察使) 김석주(金錫冑)-청풍인,우의정 |
영조 |
무신(戊申, 1728) 무신란(戊申亂) 이인좌란(李麟佐亂) |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해주인,우의정 순무중군(巡撫中軍) 박찬신(朴纘新) |
순조 |
신미(辛未, 1811) 신미서적(辛未西賊) 홍경래란(洪景來亂) |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요헌(李堯憲)-전주인,형판 순무중군(巡撫中軍) 박기풍(朴基豊)-병마절도사 |
고종 |
병인(丙寅, 1866) 병인양란(丙寅洋亂) |
도순무사(都巡撫使) 이경하(李景夏)-전주인,후영사(後營使)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李容熙)-병조판서 종사관(從事官) 김성근(金聲根)-안동, 탁지부대신 |
고종 |
신미(辛未, 1871) 신미양란(辛未洋亂) |
순무사(巡撫使) 정기원(鄭岐源)-연일인,知三軍府使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함종인 |
고종 |
갑오(甲午, 1894) 동학전쟁(東學戰爭) |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남양인,훈련대장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전주인,대사간 양호도순무사(兩湖都巡撫使) 신정희(申正熙)-평산인,통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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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文解字
千光胤
『說文解字』는 중국언어학사상 불후의 名著로 東漢시대 許愼이 편찬한 것이다. 허신의 字는 叔重이고 河南省 郾城 사람이다. 그가 『說文』을 집필하기 시작한 和帝 永元 12년(A.D.100)부터 이를 완성하여 병 때문에 그 아들 許冲으로 하여금 대신하여 황제께 진상케 한 安帝 建光 원년(A.D.121)까지의 전후 20여 년간 작자는 반생의 심혈을 이 대작에 쏟았던 것이다.
『說文』은 중국의 언어학사상 자형을 분석하고 字意를 해설하고 聲讀을 가려 놓은 최초의 字典으로써 『說文解字』의 字形, 字義, 字音으로써 고대 문헌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청대의 훈고학자들은 이 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이를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선진 문헌을 주석하고 정리하였다. 段玉裁는 『說文解字』를 일컬어 이 책은 “자형의 근원과 자형 및 자음이 그렇게 된 이유”(許以形爲主, 字義之所以然)를 천명한 저작이라 하였고, 兪樾는 『小學考書』에서 “집집마다 허신의 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마다 설문학을 공부하였다.”(家有洨長之書, 人習說文之學)라고 하였다.
六 書
유흠(劉歆)이 말하는 육서란 象形, 象事, 象意, 象聲, 轉注, 假借이다. 허신이 정한 육서는 指事, 象形, 形聲, 會意, 轉注, 假借이며, 설문해자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육서로써 한자를 분석한 저작이다. 허신은 분해 가능한 문자에 대해서는 “회의”나 “형성”으로 해설 하였고(그러나 실제 설해 중에서는 “회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종모, 모(ㅆ某, 某) 또는 종모, 종모(ㅆ某, ㅆ某)로 썼으며, “형성”도 형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종모, 모성(ㅆ某, 某聲)”이라고 썼음),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문자에 대해서는 “상형”이나 “지사”라고 명기 하였다.
象形者, 畫成其物, 隨體詁詘, 日月是也
상형이란 어느 물체를 그려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물체의 모양에 따라 꾸불꾸불 그려냈으니, 日과 月이 그 예이다.
指事者, 視而可識, 察而見意, 上下是也
지사라는 것은 글자의 형체를 보면 곧 알 수 있고 관찰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문자로서, 上과 下자가 그 예이다.
會意者, 比類合誼, 以見指撝, 武信是也
회의란 비슷한 의미를 표시하는 글자들을 한데 같이 놓고서 아울러서 그 의미도 한데 합침으로써 다른 새 의미를 나타내 보이는 문자로서, 武와 信이 그 예이다.
形聲者, 以事爲名, 取譬相成, 江河是也
형성이란 비슷한 의미의 글자를 意符로 하고 언어 중에서 만들고자 하는 글자의 성음에 매우 근접한 글자를 聲符로 삼아 구성한 문자로 江과 河가 이 예이다.
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
전주란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문자군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글자를 대표로 삼음으로써 같은 문자군 내의 글자들이 대표 문자로부터 의미를 공통적으로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考와 老자가 그 예이다.
假借者, 本無其字, 依聲托事, 令長是也
가차란 본래 어느 의미를 표시하는 글자가 없는 단어에 대하여 언어 중 동음자를 찾아서 그 단어의 의미를 기탁하는 건인데, 令과 長자가 그 예이다.
說文解字 보는 몇 가지 요령
讀若某 某와 같이 발음한다.
讀與某同 발음은 모글자와 같이 한다.
象某形 무슨 형을 모양낸 것
ㅆ某ㅆ某 기본 구성 문자가 무엇 무엇인 회의자(會意字)
ㅆ某某聲 표의부(表意符)가 무엇이고 표음부(表音符)가 무엇인 형성자
陰 暗也. 水之南山之北也. ㅆ阜. 陰聲
음은 “어둡다”는 뜻이다. 강물의 남쪽이고 산의 북쪽이다. 표의부가 阜이고 陰성인 형성자이다.
爪, 象形也, 王育說 조(爪)는 상형으로 王育의 說이다.
ㅆ古文之形 고문의 모양이 그 원래 자형이다.
ㅆ古字之形 고자의 모양이 그 원래 자형이다.
象古文之形 고문의 자형을 모양내었다.
ㅆ古文省 고문의 필획을 생략해서 만든 것이다.
ㅆ入ㅆ二 入과 二로 구성된 회의자
ㅆ入合二 入자에 二가 포함되어 이루어진 회의자
仞, ㅆ人刃聲 仞은 표의부가 인이고 표음부가 刃성인 형성자이다.
『說文 巾부』 飾, 刷也. ㅆ巾, ㅆ人, 食聲. 讀若式
飾은 “문지르다”의 뜻으로 표의부가 巾과 人이고 표음부가 食성인 형성자이다. 式과 같이 읽는다.
十干
甲 東方之孟 陽氣萌動 ㅆ木載孚甲之象 大一經曰 人頭空爲甲
갑은 방위는 동방이고 맹양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무가 싹을 틔운 형상이다. 사람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이 갑이다.
乙 象春艸木 冤曲而出 陰氣尙彊 其出乙乙也 l同意 乙承甲 象人頸
을은 봄에 초목이 힘겹게 땅위로 비집고 나오는 것이며 음기가 아직 강한 상태에서 을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뚫다”(뚫을 곤 l)는 글자와 같다. 을은 갑을 이어 받으며 사람의 목에 해당하는 상형이다.
丙 位南方 萬物成炳然 陰氣初起 陽氣將虧 ㅆ一入冂 一者陽也 丙承乙 象人肩
병은 방위로 남방이다. 만물이 밝게 이루어 진다. 음기가 처음으로 일어나며 양기가 점점 줄어든다. 표의부가 “ㅡ”와 “入”과 “冂”자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一은 양을 나타낸다. 병은 을을 이어 사람의 어께를 나타내는 상형이다.
丁 夏時萬物 皆丁實 象形 丁承丙 象人心
정은 여름철 만물이 모두 여물어 지는 모양을 나타낸 상형 문자이다. 정은 병을 승계하며 사람의 심장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戊 中宮也 象六甲五龍 相拘絞也 戊承丁 象人脅
무는 방위로는 중궁이다. 육갑과 오룡이 서로 엉키어 설키여 있는 형상이다. 무는 정을 승계하고 사람의 옆구리 형상이다.
己 中宮也 象萬物辟藏詘形也 己承戊 象人腹
기는 방위로는 중궁이다. 만물이 숨어서 굽히고 있는 형상이다. 기는 무를 승계하고 사람의 배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庚 位西方 象秋時萬物庚庚有實也 庚承己 象人臍
경은 방위로는 서방이다. 가을에 만물이 건실하게 열매를 맺은 상형문자이다. 경은 기를 승계하며 사람의 배꼽을 나타내는 형상이다.
辛 秋時萬物成而孰 金剛味辛 辛痛卽泣出 從一辛 辛○(罪의 古字)也 辛承庚 象人股
신은 가을에는 만물이 자라서 성숙한다. 가을의 맛은 맵다.(굳게 여문 매운 맛이다.) 너무 매워서 눈물이 나온다. 신은 “ㅡ”과 “辛”으로 구성된 회의자이다. 신은 죄인의 코에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신은 경을 승계하며 사람의 허벅지에 해당된다.
壬 位北方也 陰極陽生 故易曰龍戰于野 戰者接也 象人裏妊之形 承亥壬以子生之敘也 壬與巫同意 壬承辛 象人脛脛任體也
임은 방위로는 북방이다. 음이 극에 달하여 양기가 생겨나기 때문에 역에 이르기를 “용이 들에서 싸운다.”하였다. 싸운다는 것은 접한다는 것이다. 임자는 여자가 아이를 밴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亥”와 “壬”을 이어서 子가 생기는 순서이다. 임은 “巫”자와 같은 의미이다. 임은 신을 승계하며, 사람의 정강이를 모양내었으며, 인체의 정강이를 이룬 부분이다.
癸 冬時水土平可揆度也 象水從四方流入地中之形 癸承壬 象人足
계는 겨울철에 수토가 평평하여 가히 잴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물이 사방에서 지중으로 유입하는 자형을 나타내었다. 계는 임을 승계하며, 사람의 발을 형상한다.
十二支
子 十一月陽氣動萬物滋 人以爲偁 象形
자는 11월에 양기가 움직여 만물을 자양한다. 자는 사람을 들어 올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이다.
丑 紐也 十二月萬物動用事 象手之形
축은 “얽어 매다”는 뜻이다. 12월에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축은 손의 모양을 나타낸 상형문자이다.
寅 髕也 正月陽氣動 去黃泉欲上出陰尙强也 象宀不達髕寅於下也
인은 종지뼈 髕자이다.(단옥재注 빈자는 틀렸다. 당연히 물줄기 통할 인자로 쓰야 한다.(髕字之誤也 當作○) PC에 인자가 없어 입력을 시키지 못함) 정월에 양기가 움직여 땅속의 물을 벗어나 땅위로 나오려 하나 아직 음기가 강하다. 머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있는 상형이다.
卯 冒也 二月萬物冒地而出 象開門之形 故二月爲天門
묘는 뒤집어쓰는 것이다. 2월에 만물이 땅을 뒤집어쓰고 나온다. 문을 여는 모양을 나타낸 상형문자이므로 2월을 하늘의 문이라 한다.
辰 震也 三月陽氣動雷電振民農時也 物皆生 ㅆ乙匕 匕象芒達 厂聲 辰房星天時也
진은 우레이다. 3월에 양기가 움직여 번개를 치고 진동하니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이다. 만물이 모두 소생하므로 표의부가“乙”과 “匕”이고. “匕”는 풀줄기가 땅위로 올라 왔음을 본뜬 것이며, 표음부가 “厂”성인 형성자이다. 진은 방성으로 농사를 주관하는 별을 나타낸다.
巳 已也 四月陽氣已出陰氣已藏 萬物見 成文章 故巳爲蛇象形
사는 “다하다”라는 뜻이다. 4월은 양기가 다 나왔고 음기는 모두 감추어져 있으므로 만물이 밖으로 나타나 아름다운 모습을 이룬다. 그러므로 巳는 뱀 모양으로 상형이다.
午 啎也 五月陰氣啎○陽冒地而出也 象形 此與矢同意
오는 거스른다는 뜻이다. 5월에 음기가 양기를 거슬러 땅을 뚫고 나온다. 상형문자로 矢와 같은 의미이다.
未 味也 6月滋味也 五行木老於未 象木重枝葉也
미는 맛이다. 6월에는 맛이 든다. 오행으로 목은 미에 이르러 노쇠해진다. 木과 枝와 葉이 구성요소인 상형문자이다.
申 神也 七月陰氣成體自申束 ㅆ臼自持也 吏以餔時聽事 申 旦政也
신은 神明이란 뜻이다. 7월에는 음기가 하나의 체를 이루어 스스로 펴고 굽히게 된다. 두 손을 교차하여 스스로 지닌다는 기본 의미로 이루어 진 회의자이다. 관리는 餔時(저녁을 먹는 申시를 뜻함)에도 정사에 들어야 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무를 돌보아야 한다.
酉 就也 八月黍成可爲酎酒 象古文酉之形也
유는 나아간다는 뜻이다. 8월에는 기장이 익으면 강신주를 담는다. 고문 酉의 자형을 모양내었다.
戌 ○也 九月陽氣微 萬物畢成 陽下入地也 五行土生於戊盛於戌 ㅆ戊一 一亦聲
술은 불이 꺼지는 것이다. 9월에 양기가 미약하고 만물이 온전히 익게 되며 양기가 지하로 들어간다. 오행으로 토는 무에서 생하여 술에서 성해 진다. 戊와 一을 기본 구성요소로 하며 一은 발음요소이다.
亥 荄也 十月微陽起接盛陰 ㅆ二二古文上字也 一人男一人女也
해는 풀뿌리이다. 10월 약한 음이 일어나 성한 음과 접한다. 二를 기본 구성요소로 하며 二는 고문으로 上자이다. 한사람은 여자이고 한사람은 남자이다.
☞주
1. 컴퓨터로 입력할 수 없는 문자는 ○으로 표시하였다.
2. 참고도서 : “설문해자주” “설문해자통론”
[스크랩] 측량의종류
레벨측량 (직접고저측량)고저 측량에 관한 사항들이 여러가지가 있지만요, 여기서는 현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만 다룰께요. 여기있는 내용들을 숙지하신후에 측량책
등을 보시면 더 깊은 내용들을 알 수 있을겁니다. 1. 레벨기
하 나 . 측량중의 야장기입
이때,
여기서 얻어진 GH는 현재의 지반고 이고, FH는 설계상의 계획고 이므로 이둘을 비교하면 그 오차를 알 수 있읍니다. 다음은 결과치를 계산한 후 야장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둘. 야장계산 결과
2. T P (Turning point) 일반적인 스타프(표척) 의 길이는 5m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 교량의 형하공간 측량
음의 부호를 붙입니다. 측량결과 형하공간은
에서 5.11m 임을 알수 있읍니다. 또, 슬라브 바닥의 완성고 (104.88)을 계획고(104.90) 과 비교하면 2 cm 의 시공오차가 있음을 알 수 있읍니다.
*홍장군의 홈피와 기타 블로그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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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문해자1
說文解字
千光胤
『說文解字』는 중국언어학사상 불후의 名著로 東漢시대 許愼이 편찬한 것이다. 허신의 字는 叔重이고 河南省 郾城 사람이다. 그가 『說文』을 집필하기 시작한 和帝 永元 12년(A.D.100)부터 이를 완성하여 병 때문에 그 아들 許冲으로 하여금 대신하여 황제께 진상케 한 安帝 建光 원년(A.D.121)까지의 전후 20여 년간 작자는 반생의 심혈을 이 대작에 쏟았던 것이다.
『說文』은 중국의 언어학사상 자형을 분석하고 字意를 해설하고 聲讀을 가려 놓은 최초의 字典으로써 『說文解字』의 字形, 字義, 字音으로써 고대 문헌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청대의 훈고학자들은 이 책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이를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선진 문헌을 주석하고 정리하였다. 段玉裁는 『說文解字』를 일컬어 이 책은 “자형의 근원과 자형 및 자음이 그렇게 된 이유”(許以形爲主, 字義之所以然)를 천명한 저작이라 하였고, 兪樾는 『小學考書』에서 “집집마다 허신의 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마다 설문학을 공부하였다.”(家有洨長之書, 人習說文之學)라고 하였다.
六 書
유흠(劉歆)이 말하는 육서란 象形, 象事, 象意, 象聲, 轉注, 假借이다. 허신이 정한 육서는 指事, 象形, 形聲, 會意, 轉注, 假借이며, 설문해자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육서로써 한자를 분석한 저작이다. 허신은 분해 가능한 문자에 대해서는 “회의”나 “형성”으로 해설 하였고(그러나 실제 설해 중에서는 “회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종모, 모(ㅆ某, 某) 또는 종모, 종모(ㅆ某, ㅆ某)로 썼으며, “형성”도 형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종모, 모성(ㅆ某, 某聲)”이라고 썼음),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문자에 대해서는 “상형”이나 “지사”라고 명기 하였다.
象形者, 畫成其物, 隨體詁詘, 日月是也
상형이란 어느 물체를 그려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물체의 모양에 따라 꾸불꾸불 그려냈으니, 日과 月이 그 예이다.
指事者, 視而可識, 察而見意, 上下是也
지사라는 것은 글자의 형체를 보면 곧 알 수 있고 관찰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문자로서, 上과 下자가 그 예이다.
會意者, 比類合誼, 以見指撝, 武信是也
회의란 비슷한 의미를 표시하는 글자들을 한데 같이 놓고서 아울러서 그 의미도 한데 합침으로써 다른 새 의미를 나타내 보이는 문자로서, 武와 信이 그 예이다.
形聲者, 以事爲名, 取譬相成, 江河是也
형성이란 비슷한 의미의 글자를 意符로 하고 언어 중에서 만들고자 하는 글자의 성음에 매우 근접한 글자를 聲符로 삼아 구성한 문자로 江과 河가 이 예이다.
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
전주란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문자군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글자를 대표로 삼음으로써 같은 문자군 내의 글자들이 대표 문자로부터 의미를 공통적으로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考와 老자가 그 예이다.
假借者, 本無其字, 依聲托事, 令長是也
가차란 본래 어느 의미를 표시하는 글자가 없는 단어에 대하여 언어 중 동음자를 찾아서 그 단어의 의미를 기탁하는 건인데, 令과 長자가 그 예이다.
說文解字 보는 몇 가지 요령
讀若某 某와 같이 발음한다.
讀與某同 발음은 모글자와 같이 한다.
象某形 무슨 형을 모양낸 것
ㅆ某ㅆ某 기본 구성 문자가 무엇 무엇인 회의자(會意字)
ㅆ某某聲 표의부(表意符)가 무엇이고 표음부(表音符)가 무엇인 형성자
陰 暗也. 水之南山之北也. ㅆ阜. 陰聲
음은 “어둡다”는 뜻이다. 강물의 남쪽이고 산의 북쪽이다. 표의부가 阜이고 陰성인 형성자이다.
爪, 象形也, 王育說 조(爪)는 상형으로 王育의 說이다.
ㅆ古文之形 고문의 모양이 그 원래 자형이다.
ㅆ古字之形 고자의 모양이 그 원래 자형이다.
象古文之形 고문의 자형을 모양내었다.
ㅆ古文省 고문의 필획을 생략해서 만든 것이다.
ㅆ入ㅆ二 入과 二로 구성된 회의자
ㅆ入合二 入자에 二가 포함되어 이루어진 회의자
仞, ㅆ人刃聲 仞은 표의부가 인이고 표음부가 刃성인 형성자이다.
『說文 巾부』 飾, 刷也. ㅆ巾, ㅆ人, 食聲. 讀若式
飾은 “문지르다”의 뜻으로 표의부가 巾과 人이고 표음부가 食성인 형성자이다. 式과 같이 읽는다.
十干
甲 東方之孟 陽氣萌動 ㅆ木載孚甲之象 大一經曰 人頭空爲甲
갑은 방위는 동방이고 맹양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무가 싹을 틔운 형상이다. 사람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이 갑이다.
乙 象春艸木 冤曲而出 陰氣尙彊 其出乙乙也 l同意 乙承甲 象人頸
을은 봄에 초목이 힘겹게 땅위로 비집고 나오는 것이며 음기가 아직 강한 상태에서 을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뚫다”(뚫을 곤 l)는 글자와 같다. 을은 갑을 이어 받으며 사람의 목에 해당하는 상형이다.
丙 位南方 萬物成炳然 陰氣初起 陽氣將虧 ㅆ一入冂 一者陽也 丙承乙 象人肩
병은 방위로 남방이다. 만물이 밝게 이루어 진다. 음기가 처음으로 일어나며 양기가 점점 줄어든다. 표의부가 “ㅡ”와 “入”과 “冂”자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一은 양을 나타낸다. 병은 을을 이어 사람의 어께를 나타내는 상형이다.
丁 夏時萬物 皆丁實 象形 丁承丙 象人心
정은 여름철 만물이 모두 여물어 지는 모양을 나타낸 상형 문자이다. 정은 병을 승계하며 사람의 심장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戊 中宮也 象六甲五龍 相拘絞也 戊承丁 象人脅
무는 방위로는 중궁이다. 육갑과 오룡이 서로 엉키어 설키여 있는 형상이다. 무는 정을 승계하고 사람의 옆구리 형상이다.
己 中宮也 象萬物辟藏詘形也 己承戊 象人腹
기는 방위로는 중궁이다. 만물이 숨어서 굽히고 있는 형상이다. 기는 무를 승계하고 사람의 배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庚 位西方 象秋時萬物庚庚有實也 庚承己 象人臍
경은 방위로는 서방이다. 가을에 만물이 건실하게 열매를 맺은 상형문자이다. 경은 기를 승계하며 사람의 배꼽을 나타내는 형상이다.
辛 秋時萬物成而孰 金剛味辛 辛痛卽泣出 從一辛 辛○(罪의 古字)也 辛承庚 象人股
신은 가을에는 만물이 자라서 성숙한다. 가을의 맛은 맵다.(굳게 여문 매운 맛이다.) 너무 매워서 눈물이 나온다. 신은 “ㅡ”과 “辛”으로 구성된 회의자이다. 신은 죄인의 코에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신은 경을 승계하며 사람의 허벅지에 해당된다.
壬 位北方也 陰極陽生 故易曰龍戰于野 戰者接也 象人裏妊之形 承亥壬以子生之敘也 壬與巫同意 壬承辛 象人脛脛任體也
임은 방위로는 북방이다. 음이 극에 달하여 양기가 생겨나기 때문에 역에 이르기를 “용이 들에서 싸운다.”하였다. 싸운다는 것은 접한다는 것이다. 임자는 여자가 아이를 밴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亥”와 “壬”을 이어서 子가 생기는 순서이다. 임은 “巫”자와 같은 의미이다. 임은 신을 승계하며, 사람의 정강이를 모양내었으며, 인체의 정강이를 이룬 부분이다.
癸 冬時水土平可揆度也 象水從四方流入地中之形 癸承壬 象人足
계는 겨울철에 수토가 평평하여 가히 잴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물이 사방에서 지중으로 유입하는 자형을 나타내었다. 계는 임을 승계하며, 사람의 발을 형상한다.
十二支
子 十一月陽氣動萬物滋 人以爲偁 象形
자는 11월에 양기가 움직여 만물을 자양한다. 자는 사람을 들어 올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이다.
丑 紐也 十二月萬物動用事 象手之形
축은 “얽어 매다”는 뜻이다. 12월에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축은 손의 모양을 나타낸 상형문자이다.
寅 髕也 正月陽氣動 去黃泉欲上出陰尙强也 象宀不達髕寅於下也
인은 종지뼈 髕자이다.(단옥재注 빈자는 틀렸다. 당연히 물줄기 통할 인자로 쓰야 한다.(髕字之誤也 當作○) PC에 인자가 없어 입력을 시키지 못함) 정월에 양기가 움직여 땅속의 물을 벗어나 땅위로 나오려 하나 아직 음기가 강하다. 머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있는 상형이다.
卯 冒也 二月萬物冒地而出 象開門之形 故二月爲天門
묘는 뒤집어쓰는 것이다. 2월에 만물이 땅을 뒤집어쓰고 나온다. 문을 여는 모양을 나타낸 상형문자이므로 2월을 하늘의 문이라 한다.
辰 震也 三月陽氣動雷電振民農時也 物皆生 ㅆ乙匕 匕象芒達 厂聲 辰房星天時也
진은 우레이다. 3월에 양기가 움직여 번개를 치고 진동하니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이다. 만물이 모두 소생하므로 표의부가“乙”과 “匕”이고. “匕”는 풀줄기가 땅위로 올라 왔음을 본뜬 것이며, 표음부가 “厂”성인 형성자이다. 진은 방성으로 농사를 주관하는 별을 나타낸다.
巳 已也 四月陽氣已出陰氣已藏 萬物見 成文章 故巳爲蛇象形
사는 “다하다”라는 뜻이다. 4월은 양기가 다 나왔고 음기는 모두 감추어져 있으므로 만물이 밖으로 나타나 아름다운 모습을 이룬다. 그러므로 巳는 뱀 모양으로 상형이다.
午 啎也 五月陰氣啎○陽冒地而出也 象形 此與矢同意
오는 거스른다는 뜻이다. 5월에 음기가 양기를 거슬러 땅을 뚫고 나온다. 상형문자로 矢와 같은 의미이다.
未 味也 6月滋味也 五行木老於未 象木重枝葉也
미는 맛이다. 6월에는 맛이 든다. 오행으로 목은 미에 이르러 노쇠해진다. 木과 枝와 葉이 구성요소인 상형문자이다.
申 神也 七月陰氣成體自申束 ㅆ臼自持也 吏以餔時聽事 申 旦政也
신은 神明이란 뜻이다. 7월에는 음기가 하나의 체를 이루어 스스로 펴고 굽히게 된다. 두 손을 교차하여 스스로 지닌다는 기본 의미로 이루어 진 회의자이다. 관리는 餔時(저녁을 먹는 申시를 뜻함)에도 정사에 들어야 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무를 돌보아야 한다.
酉 就也 八月黍成可爲酎酒 象古文酉之形也
유는 나아간다는 뜻이다. 8월에는 기장이 익으면 강신주를 담는다. 고문 酉의 자형을 모양내었다.
戌 ○也 九月陽氣微 萬物畢成 陽下入地也 五行土生於戊盛於戌 ㅆ戊一 一亦聲
술은 불이 꺼지는 것이다. 9월에 양기가 미약하고 만물이 온전히 익게 되며 양기가 지하로 들어간다. 오행으로 토는 무에서 생하여 술에서 성해 진다. 戊와 一을 기본 구성요소로 하며 一은 발음요소이다.
亥 荄也 十月微陽起接盛陰 ㅆ二二古文上字也 一人男一人女也
해는 풀뿌리이다. 10월 약한 음이 일어나 성한 음과 접한다. 二를 기본 구성요소로 하며 二는 고문으로 上자이다. 한사람은 여자이고 한사람은 남자이다.
☞주
1. 컴퓨터로 입력할 수 없는 문자는 ○으로 표시하였다.
2. 참고도서 : “설문해자주” “설문해자통론”
복희와 여와 천문해 - 형천의 머리를 찾아 -
투르판 아스타나 무덤에서 나온 중국 고대신상 그림인 <복희-여왜도>
동양의 신화는 거의가 산해경을 택스트로 이뤄져있다.
무릇 풀숲의 새가 하늘을 나는 봉황의 경지를 논할 수 없고,
발자국에 고인 물에서 노는 지렁이가 붉은 용이 하늘에 오르는 경지를 알 수 없다.
장엄한 음률이 울려 퍼지는 천상의 뜨락에 속된 악공이 발을 디딜 곳이 아니며,
배 없는 나루터에서 어찌 蒼梧之山과 ?까지 건너 갈 수 있겠는가.
天下를 통달하지 않고는 더불어 山海經의 의미를 말하기 어렵다.
아? 天下를 통달한 박식한 後代(후대)사람은 이것을 거울로 삼을 것이다.
<夫??之翔 ?以論垂天之凌夫之翔 ??之遊 無以知絳?之騰 鈞天之庭 豈伶人之所? 無航之津豈蒼?之所涉 非天下之至通 難與言山海之義矣 嗚呼 達觀博物之客 其鑒之哉 >
아.?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於? 群惑者其可以少寤乎>
산해경서 중에서
위 그림을 의심을 품고 새롭게 해석해 보기로 한다.
복희여와도를 천문관련 그림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는이유
1. 별그림이 있다.
2. 손에든 콤파스와 곱자는 천문도 작성에 필요한 도구다.
3. 수례바퀴 모양은 천문적으로는 적경의 의미로 해석된다.
4. 끈에 사람의 잘린 머리를 매달고있다. 그 추구하는 바가 천문이다.
5. 꼬여있는 뱀문양은 윤회. 진행의 이미지이다.
먼저! 아주 먼 옛날 복희 와 여와의 시대에 지동설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과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으며 우리은하의 틀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감상하시길 바립니다.
훌륭한 천문이 존재했다는 사실로.........
위 그림은 그동안 증명사진만한 그림들뿐이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복희와 여와에 관련된 문헌 내용에서 항상 의문을 갖고 있었기에 관심의 대상이었던 그림이었다.
몇 년 전 커다란 확대 사진을 보는 순간 한눈에 天文에 관련된 그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림에 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전체 그림을 살펴보면,
상하 두 개의 바퀴살과 별자리를 그린 점들이 있고, 둘이 한 몸을 이뤄 아래 부분은 터럭이 붙은 뱀 문양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복희와 여와는 어깨동무를 한체,
여와의 오른 손에는 콤파스를 들고 있고
복희는 왼 손에는 곱자를 들고,
오른손은 여와의 어깨 뒤로 줄에 매달린 사람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다.
이 그림의 줄에 매달린 것이 사람의 잘린 머리라는 증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단지 옛이야기를 추론하여 내린 본인의 이론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보아도 사람의 잘린 머리이다.
<사람의 잘린 머리>는 서양의 별자리 신화와 동양의 신화에서 똑같이 등장한다.
먼저 <사람의 잘린 머리>에 관한 동서양신화의 이야기를 연관지어본다.
그리스 신화 “메두사”를 보는 자는 모두 돌로 변한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자르고. 돌아오는 도중 바다괴물의 먹이가 될 뻔했던 안드로메다를 구하여 아내로 삼는 이야기다. 모두가 잘 아는 별자리이름이기도하다.
또한 서양의 천문에는 우리은하의 북극점이 있는 곳에 <머리털>이라는 별자리가 있다.
동양의 신화에는“형천”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형천> 염제의 신하로 황제와 권좌를 다투다 목이 잘렸다. 그 후 젖꼭지로 눈을 삼고 배꼽을 입으로 삼아 싸움을 계속했다.
위 내용을 연관 짖기 위해 고대에 동서양신화의 뿌리는 하나였다는 개념부터 도입한다.
성경에서 그 옛날 언어가 하나였다고 하듯이...
그 근거가 될 만한 내용 하나를 간략 한다.
----이때 효선제(孝宣帝)는 크게 놀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朝廷)의 선비들은 山海經을 기이하게 생각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 후로는 문학(文學)을 하는 학자나 유학(儒學)을 하는 대학자들 모두 산해경을 읽고 배웠습니다.
이때부터 상서로운 일이나 괴이한 일에 대해서는 상세히 살폈으며, 먼 나라 다른 사람들의
노래나 풍속도 연고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 <산해경유수교상표(山海經劉秀校上表)>--
<上大驚朝士由是多奇山海經者文學大儒皆讀學以爲奇可以考禎祥變怪之物見遠國異人之謠俗故易曰言天下之至?而不可亂也博物之君子其可不惑焉 >
劉秀유수가 산해경을 교정할 시기에 이미
“먼 나라 다른 사람들의 노래나 풍속도 연고가 있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동서양의 교역이 있음을 의미하는 글이다.
이제 추론을 바탕으로 이 그림을 천문적 이야기로 해석한 그림을 그려본다
여와가 들고 있는 콤파스로는 둥근 圓원을 그린다.
천문도상의 적위선분을 그린다는 의미이다.
복희의 곱자는 천문도상의 황도를 기준으로 하는 시간값인 28수의 적경의 수치를 나타낸 것이다.
이제 천문도상 복희의 오른손 줄에 매달린 머리의 의미를 분석해보자.
천문도상 하늘에는 세 개의 극점이 있다.
북극, 황극, 그리고 은하의 북극이 있다.
여와는 지구의 자전 축이다. 지도리라는 의미의 그림이다.
여와의 머리를 북극의 의미로 보고
복희의 머리를 황극으로 보면
매달린 머리는 우리은하의 북극이 된다.
북극을 의미하는 여와의 모습을 자세히 보자.
북극점은 지구의 자전축으로 밤하늘에서 항상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황극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지구축의 기울기인 23.5도 만큼 북극에서 떨어진 위치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자.
움직이지 않는 북극의 의미를 여와의 옷매무새 속에 그리고 있다.
가슴 아래로 내려 그어진 선분은 수직선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복희 가슴 선분은 여와 쪽을 향해 사선의 기울기를 가지고 있다.
다름아닌 공전괘도면 수직축에 약 23.5도 기울기를 표현한 것이다.
천문 프로그램: http://astronote.org/ 자료실/ 천문 프로그램/ skymap3.2
2005.5.30 22:37 밤하늘의 모습이다.
원의 중앙은 천정, 관측자의 머리위에 떠있는 별자리 위치이다.
위쪽이 북쪽으로 북두칠성 위에 북극이 있다.
그 아래 황극점이 있고 천정 가까이 우리은하의 북극점자리가 보인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황극과 우리은하의 북극점의 위치는 변한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은 북극점을 중심으로 돌고 있음으로 북극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돼있다.
복희의 곱자로는 거리를 계산하는 의미인 천문상의 각거리 시간값 적경赤經을 의미한다.
여와가 그리는 둥근 원은 지구에서 인간이 설정한 중심축 북극을 중심으로 그리는 赤緯이다.
천문도상의 황도(해의 진행로)는 적위0도를 중심으로 춘분과 추분을 기점으로 안팎으로 그려진다.
복희와 여와가 뱀의 형상으로 꼬여있는 모습,
지구가 도는 한 끝 없이 이어지는 황도와 적도의 또아리이다.
춘분 하지 추분 동지등의 위치점을 나타내고 있는 진행 과정이다.
뱀의 터럭 또한 깃털이 아닌 천문도상의 시간값을 의미한다
360의 원의 내각과 365,25일의 역법적 수치를 의미하며 지금의 천문도와도 다르지 않은
의인화擬人化한 천문도 그림이다.
그 황도의 주변으로 28宿圖가 그려진다.
의인화된 여와와 복희 그러니까 지구의 축과 해의 축이 한데 어울려 신나게 돌아보자 끈에 메달린 머리 은하는 더 멀리 큰 동심원을 그리며 돌아가지않는가.
이제 치마 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와의 동전선은 치마 아래단 까지 이여져있다.
그러나 복희의 동전선은치마속에 뭍히고 여와의 동정선이 그 밑을 받치고 있다.
여와의 치마폭에 쌓여있는 모양이다.
지구축을 의미하는 여와가 태양의 축을 감쌓고 있다. 거꾸로 된 모양이다.
그림의 이미지인 지구가 해를 감쌓안을 수있는 표현은 천문에서 어떻게 나타낼수있는가?
그것은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돌고있다는 의미이고 이를 천문도상에 나타낸 것이다.
아래의 뱀문양과 어우러져 또아리지는 치마폭이 황도를 감쌓안은 문양이다.
천문도를 보자
천문도안에는 황극과 황도가 그려진다.
실상 지구는 천문도에 그려지지 않는다.
천문도의 가장자리는 인간의 시선이 머무는 땅끝이다.
천문도 둥근 원 밖이 땅이다.
지구가 해를 감쌀 수있는 것은 천문도의 그림 뿐이다.
다음은 위아래에있는 2개의 수례바퀴 문양이다.
위쪽의 수례는 18개의 바퀴살을 그렸고 아래쪽의 수례는 16개의 바퀴살로 그려있다.
18과 16의 숫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천문상수로 이해 되어야한다.
해와 달의 운행,역법과 치윤의 의미를 갖는 그림이다.
갑골문자 車자의 그림을 보면 소 달구지의 그림보다. 천문기구와 흡사한 그림이 더 많이있다.
우리고구려 벽화에도 <수례바퀴여신>의 그림이 있다.
거기에도 16개의 바퀴살이 그려있다.
360/16=22.5 365.25/16=22.828 18*16=288 글세? 무슨 ? 천문상수?
어째든 고려해 볼 일이다.
집안 오회분 4호묘 수레바퀴만드는 神으로 알려진 그림
나는 천문 관측기구를 만드는 천문학자 "여와"라고 말하고 싶다.
여인의 오른손에 들고있는 연장이 망치가아닌 콤파스라면 나의 주장은 더욱 신빙성을 갖는다. 더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또한 그림을 태양으로 본다면 주변의 10개의 둥근 별모양은 태양의 위성으로 보아야하는가?
18*10=180 16*10=160 180+160=340 ? 역법상수????????
아니면 달과 해의 천문 상수로 보아야하는가?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합니다.(댓글 많이)
아직도 그림 속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으나 이만 마무리합니다.
형천과 매달려있는 머리모양
복희의 오른 손 줄에 매달려 있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황도의 변화에 따라 밤하늘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리은하의 북극점의 이동을 의미하는 그림이다.
복희가 형천의 머리를 줄에 매달아 쥐불놀이를 한다고 가상하자.
불통은 복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즉하늘에서 황극의 위치변화에따라 은하의 북극점도 따라서 돌아간다는 말이다.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황도가 변하고 이에 따라서 우리은하의 북극의 위치는 변한다.
동쪽에서 은하북극이 떠오를 때 황극은 북쪽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일주운동의 시간변화에따라 26일 4시43분경 은하의 북극이 서쪽산넘어로질 때 황극은
북극의 아래쪽에 있다.
이때 은하수의 모양도 그림에서 보듯 함께 바뀐다.
우리은하의 북극이 서산넘어로 사라지면 은하수만이 하늘이 보이게된다.
위 내용을 擬人化(의인화)하면 은하계의 모양은
머리는 잘려나간 몸통만이 존재하는 <형천>의 모양이되는 것이다.
서양의 별자리 중 우리은하의 북극방향이 있는 곳에 <머리털>이라는 별자리 이름이있고,
고대 은하수를 의인화한 천문그림이 있다.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은 은하수를 의미하고 배는 사람이 살고있는 지구를 의미한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우리은하에 떠있는 일옆편주에 불과하다.
고대에 우리은하의 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없지 않은가?
본인이 고문자 舟字를 배가아닌 땅끝의 의미로 해석하는 연유이기도하다.
--天文解字에서---
서양에서는 은하수를 젖줄이라고도하여 여인에 비교했다.
<페가스수> 별자리가 높이 떠오르면 머리털 자리는 밤하늘에서 사라져 보이지않는다.
이때의 모양은 목이 달아난 <刑天형천>의 모습이다.
<刑天> 형천 문자적의미 그대로 뜻이 "하늘에서 형벌을 받았다"는말이다.
하늘에서 벌을 받아 밤하늘에서도 사라져야하는 벌을 받은 것이다.
북극을 돌고있는 황극은 주극성위치 그러니까 밤하늘에서 언제나 볼 수있는 반면 우리은하의 북극 <형천>은 나타났다 사라지게된다.
바로 고대 동양의 신화가 형천. 전욱. 황제. 치우.복희 등의 의인화된 천문이 포함되있음이다.
저 영웅들의 피터지는 싸움을 천문의 북극과 황극의 자리를 두고 싸웠다고 가상해보자.
멋진 신화의 재창출일 것이다.
신화는 글이 없던 시절 천문의 방법을 역사의 인물 속에 담아 전하기위한 이중적언어 수단이었다.
이는 서양의 별자리 신화와 같은 뿌리에서 각색된 것이다.
꽃신장사
林慶業임경업
林慶業임경업
조선 중기의 명장(名將)으로, 본관은 평택(平澤), 자(字)는 영백(英白), 호(號)는 고송(孤松)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7대손으로, 임황(林 )의 아들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 충주 달천(達川)과 평안도 개천(价川)이 언급되고 있으나, 충북도지(忠北道誌)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평촌마을의 전설과 현지 주민, 그리고 임씨 문중에서는 손곡리 태생임을 밝히고 있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무인(武人)으로서의 길이 열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한 뒤에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관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중군(中軍)으로 강화도까지 군사를 몰아갔으나 조선(朝鮮)과 후금(後金)은 이미 형제의 의(義)를 맺은 뒤였다. 당시 건주위(建州衛)에서 일어난 후금은 명(明)나라를 합병할 야심을 갖고 있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원조와 대의명분 때문에 정객(政客)이나 친명파(親明派)들은 후금과 싸울 각오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후금으로 투항하였고, 이들 반장(叛將)을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병(援兵)을 청했을 때 임경업이 나아가 토벌하여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는 총병(摠兵) 관직을 주기까지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데 진력하였다. 1638년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어 안주(安州)에 병영(兵營)을 설치하고 청나라의 동태를 살폈다.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錦州)를 치게 되어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하게 했다. 그러나 친명파(親明派)인 그는 대릉하 앞 석성도(石城島) 근처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조선의 형세를 알리고 명군(明軍)과 협력하여 청군을 치려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모의는 청군에게 탄로되어 책망이 대단하여지자 조정은 그를 잡아 올리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머리를 깎고 장삼(長衫)을 걸친 후 스님 행세를 하였고, 한양 마포를 출발하여 중국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여서는 명나라에서 평로장군(平虜將軍) 벼슬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시켰고, 청 태종은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임경업은 석성(石城)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남경으로 옮긴 명나라는 곧 망하였고,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어 청나라 황제는 임경업에게 편발(編髮)하고 청에 귀순하라고 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북경옥(北京獄)에 갇히게 되었다. 1646년 6월 죄인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어 그해 6월 20일 심기원(沈器遠) 옥사(獄事)의 연루와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졌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肅宗)의 특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는데, 이 비는 임경업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8월 원주문화원에서 고증을 찾아 장군의 출생지인 생가 터에 세운 것이다.
관직활동〕
1618년(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 : 새로이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부과했던 일정기간의 赴防)을 위해 나갔다가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부임해 군량과 군기 구비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31년 검산산성(劒山山城)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龍骨)·운암(雲暗)·능한(凌漢) 산성 등을 수축했으며, 정주목사에 승진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묘호란 이후 청천강 북쪽인 서북로의 군사력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한 때 청북 포기의 의논이 일어났다.
즉, 그 방어선을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안주 중심의 방어를 펴는 동시에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해 수도권 방어에 전념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청천강 북쪽의 백성들은 맹렬한 반대를 했는데, 이와 같은 청북인의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뒤에서 조종했다 하여 탄핵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2월 기복(起復 : 상중에 벼슬에 나감.)해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 때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 해 4월 명나라의 반장(叛將)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가장(牛家莊) 앞 바다를 경유해 구련성(九連城)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尹進卿)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朱文郁)에게 연락해 이를 협격, 섬멸했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반장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공로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금화(金花)와 많은 상을 받았고, 명나라의 총병(摠兵) 벼슬을 받아 이 때부터 임총병으로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졌다.
그 뒤 아버지의 탈상을 위해 고향에 왔다가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 곧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까지 겸하였다. 그러나 그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는 인적·물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으로부터 백금(白金 : 銀을 말함.) 1,000냥과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 상인과 무역을 해 이(利)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민(流民)을 모아 12곳에 둔전을 개설해 안집해 살도록 하였다. 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무역거래가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했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했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켰다.
〔반청활동〕
이에 수군장(水軍將)에 발탁된 그는 철저한 친명배금파(親明排金派)로서 선봉에 서는 것을 주저하며 명나라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내통, 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였다.
한편, 피폐한 의주의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상인들을 다시 심양에 보내 물화 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다가 청인에게 발각되어 인조의 노여움을 사,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청나라에서는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의 동원을 여러 차례 다시 요청해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것이 조약에 명시된 사항이라면서 질책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임경업의 죄를 용서하고 마침내 조방장(助防將)으로 기용해 그로 하여금 명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나가 진격하는척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들어 심양으로 나가 이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숙마(熟馬) 한 필이 하사되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했다가 9월 평안병사·수군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승진하였다.
1639년 말부터 청나라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 : 지금의 盛京지방)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병력 동원과 군량미의 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임경업을 주사상장(舟師上將), 황해병사 이완(李浣)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듬해 4월 그는 전선(戰船) 120척, 격군(格軍 : 조선시대 水夫의 하나로 沙工의 일을 돕던 사람) 1,323명, 사수(射手) 1,000명, 포수(砲手) 4,000명, 화약 1만근, 철환(鐵丸) 4만 2000개, 조총(鳥銃) 4,170정, 군량미 1만 7160석, 그리고 세공청국미(歲貢淸國米) 1만석을 싣고 안주를 출발해 금주위로 향하였다.
한편, 재상 최명길과 밀의해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이 사실을 등주의 명군문 홍승주(洪承疇)에게 통고하고 애써 싸우게 하지 않았다. 그 해 7월 청나라는 범문정(范文程)을 통해 심양에 있는 세자에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임경업의 함대가 전진시키려 하나 전진하지 않고, 세폐미를 요하 입구까지 운반하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또한 명나라 배를 만났으나 싸우지 않았으며, 배가 표류했다고 속여 두 사람을 몰래 명나라로 보내 내통했으므로 우리 조정과 짜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라고 힐책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극부 부인하였다.
이에 따라 범문정은 그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재삼 임경업을 달랬으나 듣지 않았다. 7월 14일 임경업은 부장 이완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50척의 배와 1,500명의 선군 및 격군을 이끌고 개주위(蓋州衛)에 이르러 배에 있던 세폐와 군량미를 모두 버리고, 다시 해주위(海州衛)·이주위(伊州衛)·금주위·대승보(大勝堡) 등지로 진주했다.
그러나 다만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했을 뿐, 그 동안 한번도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명나라로의 망명〕
1641년 정월 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요양·심양·압록강까지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눈치챘으나 확증을 잡지 못해 고민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는 정주의 고충원(高忠元)이 심양 감옥에서 이 사실을 목격했다고 증언해 그가 청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죄상이 드러났다.
청나라에서 이러한 확증으로 압력을 가하자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에게 임경업을 체포해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압송 도중 11월 6일 일행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그는 붙잡히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만나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 및 체도(剃刀)를 얻어 기회를 노리다가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명나라로 망명할 기회를 잡기 위해 처음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던 승복을 찾아 포천과 가평의 경계지대에서 중이 되어 양구현의 어느 골짜기에서 초막을 치고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정월 양양으로 갔으나 복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양구로 돌아왔다가 사잇길로 상원(祥原)으로 갔다가 다시 회암사로 숨어들어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 이겨 그의 처를 비롯해 형제 등 가족을 체포해 청나라로 압송했으며, 그의 처 이씨는 이듬해 9월 심양옥에서 자살하였다.
한편,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 일명 孝元)의 주선으로 배 한 척과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李亨男)·박수원(朴守元 : 일명 車自龍)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林成己)·최수명(崔守明)의 두 승려(일설에는 知明·小明이라고도 함)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해 서울의 마포(麻浦 : 일설에는 泰安이라고도 함)를 출발해 황해로 나갔다.
그 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였다. 그곳에서 명나라의 수비대 군관인 곽이직(郭以直)의 조사를 받고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 군문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갔다.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평로장군(平虜將軍 : 일설에는 부총병)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하고 청 태종이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도독 황종예마저 남경으로 도망쳤다.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石城)으로 들어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명나라 조정은 남경으로 갔으나 그곳도 곧 함락되자 마등고도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본국에서는 후원자인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독보에게 배의 주선을 부탁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는 당시 섭정자 예친왕(睿親王)이 집권하면서 대사령을 내리고 임경업에 대해서도 재략(才略)을 아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그리고 조신 김자점 등 반역 부청배(附淸輩)가 결탁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조선으로의 송환과 죽음〕
1646년 6월 임경업은 죄인이 되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8일 서울에 도착해 인조의 친국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심기원의 옥사에 관련시키려 하였다.
그는 심기원으로부터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받은 것은 시인했으나 역모 가담은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달아날 당시 형조판서로 있다가 그 사건으로 파직된 원두표와, 임경업과 지난날 가장 가까웠던 김자점이 그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서북면의 방어에 전 책임을 졌고 임경업은 막하로서 그를 따랐다. 또한 임경업이 상인 잠송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해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임경업을 죽여야 된다고 주장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결국, 임경업이 문초를 받으면 무금의 처도 문초해야 되고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며, 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었다.
그 해 6월 20일 임경업은 심기원사건의 연루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해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53세였으며 고향인 충주의 달천에 장사지냈다.
〔평 가〕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대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하고 고집 센 무장이었지만, 당시 실제적인 국제정세 즉 역사의 흐름에는 어두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능이 아니라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조국이 무능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망해 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해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했지만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당시의 국민이나 조정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 그리고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했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 충주의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의 현충사(顯忠祠) 겸천(兼川)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참고문헌≫ 瀋陽狀啓
≪참고문헌≫ 瀋陽日記
≪참고문헌≫ 恕菴集
≪참고문헌≫ 宋子大全
≪참고문헌≫ 明陪臣考
≪참고문헌≫ 林忠愍公實記
≪참고문헌≫ 朝鮮名將傳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참고문헌≫ 顯忠祠誌
≪참고문헌≫ 林慶業傳(京枝本)
≪참고문헌≫ 林慶業(張德順,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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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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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제2대 황제
아이신줴뤄 홍타이지(愛新覺羅皇太極[애신각라황태극], 만주어:아이신교로 홍타이지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청나라의 2대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 이다. 아바하이(阿巴海)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며 부황인 천명제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清)으로 바꾸었다.
중국 청나라의 제2대 황제(1592~1643). 이름은 황태극(皇太極). 태조(太祖)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여덟째 아들로, 몽골 등을 복속시키고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재위 기간은 1626~1643년이다.
여러 국가 조직들을 정비하는데 힘써 청나라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침공,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1636년 12월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중원 본토에도 침공을 하였지만, 중원 제패의 꿈은 끝내 달성하지 못한 채 뇌출혈로 죽었다.
龍骨大용골대
융알다이(英俄爾岱 : 조선의 각종 기록에는 용골대로 표기
중국 청나라의 장군(?~?). 본명은 영고이대(英固爾垈). 인조 14년(1636)에 사신으로 와서, 청나라 황제의 존호를 쓰고 군신의 의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그해 12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馬夫大마부대
마푸다馬福塔, 瑪福培 : 조선의 각종 기록에는 마부대로 표기
병자호란 때 조선에 침입한 중국 청나라의 장군. 1636년(인조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선에 침입한 장수로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 때부터 사신으로 여러 차례 조선을 왕래했다. 1635년에는 후금의 친서(親書)를 가지고 조선에 오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청태종(淸太宗)의 막료(幕僚)로서 행패가 심하였다.
陽九記事(奎11509), 編者未詳.
4卷 4冊 筆寫本 35×25.7cm.
四周單邊 半郭:24×17cm.
有界 10行 20字.
版心:上下紋魚尾.
丙子胡亂과 그후 淸과 강화한 전말을 기록한 책. 병자호란 이전 淸使가 내왕하는 등
明·朝鮮·淸 3국의 외교관계에서부터 丙子胡亂 후의 여러사실도 기술했다. 序·跋이
없는 編者 미상의 필사본으로 1662년(顯宗 3)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丙子胡亂
의 과정을 凝川日記·朝野記聞·丙子錄·日月錄 등에서 뽑아, 권 {1}:丙子胡亂, 丁酉
南漢出城, {권2}:丙子胡亂, 南漢出城, {권3}:丙子胡亂, 江都敗沒, {권4}:그후의 사실
등으로 엮었다. 각권의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1631년(仁祖 9) 淸兵들이
압록강 일대에 來侵하여 노략질한다는 사실을 적고, 이에 李敏求가 明兵과 합세공격해
야 한다는 상소와, 禁聖龜가 조정에서 출병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1632년(仁祖 10)
에는 胡差使新道里등이 黃金·白金 각 萬냥, 五色布 5만, 白苧布 1만, 精兵 3만, 戰馬
3천필 등을 요구해 온 사실이 기재되었다. 이를 申得淵이 접대하여 끝내 거절하여 돌
려 보냈다. 1636년 龍骨大가 왔고 또 李浚·林慶業 등이 狀啓로 淸의 來侵을 예고하였
다. 이에 崔鳴吉은 主和를 다시 들고 나왔다. 동년 12월 9일 淸兵 12만은 압록강을 건
너, 16일에는 南漢山城을 포위했다. 仁祖와 조정대신은 江華島로 갈 겨를이 없어 南漢
山城에서 對峙하였다. 南漢山城에서 金尙憲 등의 斥和派와 崔嗚吉 등의 主和派가 예리
하게 대립, 입씨름만 벌리고 있었다. {권2}:아무 준비없는 南漢山城은 기근이 격심하
여 王자신도 「無寢具 不解衣而寢 御供只用鷄一脚」 한 참상을 기재하고 있다. 또 적
은 강간·방화·약탈을 수없이 자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主和派의 주장
이 관찰되어 洪瑞鳳 등이 강화를 청하였고, 이에 淸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왔다. 여기에서 淸太宗은 자신을 「朕」·「皇帝」, 仁祖를 「爾」·「朝鮮國王」이라
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崔嗚吉·李植·張維 등에 撰書케 하여 答書를
보냈다. 내용은 치욕을 극한 글을 보냈으나, 淸은 兄弟의 표현 등 미흡한 점이 많아서
이것을 받지 않아서 다시 撰書하여 보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로써 和議를 맺고, 昭
顯世子·鳳林大君 이하 많은 斥和派의 인사들을 볼모로 보내고 禮物도 함께 보낸 내용
을 적었다. 이 和議의 전말뒤에는 江華島 및 각지에서 활약한 忠義士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권3}:江華島의 官軍의 敗戰을 첫머리에 기재하고 각지의 義兵 활동과 招
募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江都殉節人」항엔金尙容·權順長·金益兼 등의 抗
戰·殉國 및 간략한 약력을 적고, 忠烈祠에 配享한 전말을 기재하였고, 「殉節婦女」
항엔 尹宣擧妻 李氏, 李聖求妻 權氏, 李廷龜妻 및 孫一和 등의 자결한 내용을 기재하
였다. 「諸將士事蹟」항엔 忠淸監司 鄭世規, 知兵使 李義培, 全羅監司 李時昉, 平安監
司 洪命耉 등 많은 장수들의 활약과 그 공로등을 略記하였다. 그리고 「亂後時事」항
은 亂後의 제반 사실을 적은 것이다. 여기엔 江華島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장수들의
失律의 죄에 관한 관계 사실을 기술하였고, 臺諫에서 主和派 張維, 江華檢察副使 李敏
求가 왕을 江華島로 移駕하지 못했다고 賜死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또 李景奭
이 撰한 三田渡碑文과 그 내력이 기재되어 있다. 끝에는 柳琳將軍의 記事가 있다. 柳
琳은 화의가 성립된 후 淸의 요청으로 淸軍과 함께 桭島를 공략, 明軍을 격파했었다.
이 공로로 瀋陽에 초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그 때문에 白馬城에 圍籬安置되었던
것이다. {권4}:첫머리에는 승려 獨步에 관한 記事가 나온다. 獨步는 明都督 沈世魁·
洪承疇의 휘하에 있을 때, 淸이 燕京을 침범하자 瀋陽에 잠입하여 적정을 정탐하였다.
崔鳴吉은 丙子胡亂 직후 獨步를 明에 보내 胡亂의 전말을 알린 전후 사실이 소재되어
있다. 다음은 林慶業장군에 관한사 실을 기록했다. 林慶業장군은 胡亂에 공을 세웠고,
그후 攻明의 전초로 淸이 가島의 明軍을 섬멸코자 할 때 水軍將이 되었으나, 明과 내
통, 피해를 최소로 줄이게 하였다. 이어 明의 쇠망과, 볼모로 간 朝鮮人士들의 사정,
그리고 金尙憲과 崔鳴吉의 主和·斥和에 관한 논쟁 등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吳達濟·
尹集 등 三學士의 사정과 世子·風林大君 및 嬪宮이 燕京을 왕래한 동정 등을 1661년
까지 기록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丙子胡亂에 관한 전후 사실을 망라한 것이다. 丙子胡
亂 이후 朝鮮이 韓末까지 淸을 宗主國으로 섬기게 되었고 그로 하여 淸의 來侵을 막았
었다. 당시의 主和·斥和의 대립을 살피는 데《南漢紀略》·《丙子錄》등과 함께 좋은
문헌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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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史 稿 卷 二 / 太 宗 本 紀
淸 史 稿 卷 二
本 紀 二
太 宗 本 紀 一
太 宗 應 天 興 國 弘 德 彰 武 寬 溫 仁 聖 睿 孝 敬 敏 昭 定 隆 道顯 功 文 皇 帝 , 諱 皇 太 極 , 太 祖 第 八 子 , 母 孝 慈 高 皇 后 。上 儀 表 奇 偉 , 聰 睿 絕 倫 , 顏 如 渥 丹 , 嚴 寒 不 栗 。 長 益 神勇 , 善 騎 射 , 性 耽 典 籍 , 諮 覽 弗 倦 , 仁 孝 寬 惠 , 廓 然 有大 度 。
天 命 元 年)1616) , 太 祖 以 上 為 和 碩 貝 勒 , 與 大 貝 勒 代 善、 二 貝 勒 阿 敏 、 三 貝 勒 莽 古 爾 泰 為 四 大 貝 勒 。 上 居 四 ,稱 四 貝 勒 。
太 祖 崩 , 儲 嗣 未 定 。 代 善 與 其 子 岳 託 、 薩 哈 廉 以上 才 德 冠 世 , 與 諸 貝 勒 議 請 嗣 位 。 上 辭 再 三 , 久 之 乃 許。
天 命 十 一 年 丙 寅 九 月 庚 午 朔 , 即 位 於 瀋 陽 。 詔 以明 年 為 天 聰 元 年 。 初 , 太 祖 命 上 名 , 臆 制 之 , 後 知 漢 稱儲 君 曰 「 皇 太 子 」 , 蒙 古 嗣 位 者 曰 「 黃 台 吉 」 , 音 並 闇合 。 及 即 位 , 咸 以 為 有 天 意 焉 。
辛 未 , 誓 告 天 地 , 以 行 正 道 , 循 禮 義 , 敦 友 愛 ,盡 公 忠 , 勗 諸 大 貝 勒 等 。 甲 戌 , 諭 漢 官 民 有 私 計 遁 逃 及令 奸 細 往 來 者 , 雖 首 告 勿 論 , 後 惟 已 逃 被 獲 者 論 死 。 丙子 , 諭 曰 : 「 工 築 之 興 , 有 妨 農 務 , 前 以 城 郭 邊 牆 , 事關 守 禦 , 有 勞 民 力 , 良 非 得 已 。 茲 後 止 葺 頹 壞 , 不 復 興築 , 俾 民 專 勤 南 畝 。 滿 洲 、 漢 人 , 毋 或 異 視 , 訟 獄 差 徭, 務 使 均 一 。 貝 勒 屬 下 人 , 毋 許 邊 外 行 獵 。 市 稅 為 國 費所 出 , 聽 其 通 商 貿 易 , 私 往 外 國 及 漏 稅 者 罪 之 。 」 丁 丑, 令 漢 人 與 滿 洲 分 屯 別 居 。 先 是 漢 人 十 三 壯 丁 為 一 莊 ,給 滿 官 為 奴 。 至 是 , 每 備 禦 止 留 八 人 , 餘 悉 編 為 民 戶 ,處 以 別 屯 , 擇 漢 官 廉 正 者 理 之 。 設 八 固 山 額 真 , 分 領 八旗 。 以 納 穆 泰 為 正 黃 旗 固 山 額 真 , 額 駙 達 爾 漢 為 鑲 黃 旗固 山 額 真 , 額 駙 和 碩 圖 為 正 紅 旗 固 山 額 真 , 博 爾 晉 為 鑲紅 旗 固 山 額 真 , 額 駙 顧 三 泰 為 鑲 藍 旗 固 山 額 真 , 托 博 輝為 正 藍 旗 固 山 額 真 , 徹 爾 格 為 鑲 白 旗 固 山 額 真 , 喀 克 篤禮 為 正 白 旗 固 山 額 真 。 又 設 十 六 大 臣 , 贊 理 庶 政 , 聽 八旗 訟 獄 。 又 設 十 六 大 臣 , 參 理 訟 獄 , 行 軍 駐 防 則 遣 之 。乙 未 , 蒙 古 科 爾 沁 土 謝 圖 汗 奧 巴 遣 使 來 弔 。
冬 十 月 己 酉 , 以 蒙 古 喀 爾 喀 札 魯 特 部 敗 盟 殺 掠 ,私 通 於 明 , 命 大 貝 勒 代 善 等 率 精 兵 萬 人 討 之 , 先 貽 書 聲其 罪 , 上 送 至 蒲 河 山 而 還 。 癸 丑 , 別 遣 楞 額 禮 、 阿 山 率輕 兵 六 百 入 喀 爾 喀 巴 林 地 , 以 張 軍 勢 。 丙 辰 , 科 爾 沁 土謝 圖 汗 奧 巴 及 代 達 爾 漢 等 十 四 貝 勒 各 遣 使 來 弔 。 達 朱 戶征 卦 爾 察 部 , 獲 其 人 口 牲 畜 以 歸 。 明 寧 遠 巡 撫 袁 崇 煥 遣李 喇 嘛 及 都 司 傅 有 爵 等 來 弔 , 並 賀 即 位 。 甲 子 , 大 貝 勒代 善 等 大 破 札 魯 特 , 斬 其 貝 勒 鄂 爾 齋 圖 , 獲 貝 勒 巴 克 及其 二 子 並 拉 什 希 布 等 十 四 貝 勒 而 還 。
十 一 月 辛 未 , 上 發 瀋 陽 迎 大 貝 勒 代 善 , 師 次 鐵 嶺樊 河 界 。 癸 酉 , 行 飲 至 禮 , 論 功 , 頒 賚 將 士 。 戊 寅 , 上還 瀋 陽 。 察 哈 爾 阿 喇 克 綽 忒 部 貝 勒 圖 爾 濟 率 百 戶 來 歸 。乙 酉 , 遣 方 吉 納 、 溫 塔 石 偕 李 喇 嘛 往 報 袁 崇 煥 , 且 遺 書曰 : 「 頃 停 息 干 戈 , 遣 使 弔 賀 , 來 者 以 禮 , 故 遣 官 陳 謝。 昔 皇 考 往 寧 遠 時 , 曾 致 璽 書 言 和 , 未 獲 回 答 。 如 其 修好 , 答 書 以 實 , 勿 事 文 飾 。 」 崇 煥 不 以 聞 , 而 令 我 使 齎還 。 卓 禮 克 圖 貝 勒 之 子 衛 徵 巴 拜 攜 其 家 屬 來 歸 。 科 爾 沁貝 勒 青 巴 圖 魯 桑 阿 爾 齋 、 台 吉 滿 珠 什 哩 各 齎 鞍 馬 牛 羊 來弔 。
十 二 月 庚 子 , 禁 與 蒙 古 諸 藩 售 賣 兵 仗 。 壬 戌 , 黑龍 江 人 來 朝 貢 。
天 聰 元 年(一六二七) 春 正 月 丙 子 , 命 二 貝 勒 阿 敏 , 貝 勒 濟 爾哈 朗 、 阿 濟 格 、 杜 度 、 岳 託 、 碩 托 率 兵 征 朝 鮮 。 上 曰 :「 朝 鮮 累 世 得 罪 , 今 明 毛 文 龍 近 彼 海 島 , 納 我 叛 民 , 宜兩 圖 之 。 」 復 遣 方 吉 納 、 溫 塔 石 遺 書 明 袁 崇 煥 , 言 興 師由 七 大 恨 , 並 約 其 議 和 , 及 每 歲 餽 報 之 數 。
二 月 己 亥 , 以 書 招 諭 蒙 古 奈 曼 部 袞 出 斯 巴 圖 魯 。
三 月 壬 申 , 阿 敏 等 克 朝 鮮 義 州 , 別 遣 兵 搗 鐵 山 ,明 守 將 毛 文 龍 遁 走 。 又 克 安 州 , 進 至 平 壤 城 , 渡 大 同 江。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迎 師 。 阿 敏 等 數 其 七 罪 , 仍 遣 使 趣和 。 倧 懼 , 率 妻 子 遁 江 華 島 , 其 長 子 李 遁 全 州 。 阿 敏復 遣 副 將 劉 興 祚 入 島 面 諭 倧 。 倧 遣 其 族 弟 原 昌 君 李 覺 獻馬 百 匹 、 虎 豹 皮 百 、 錦 苧 各 四 百 、 布 一 萬 五 千 。 庚 子 ,與 朝 鮮 盟 , 定 議 罷 兵 。 壬 申 , 明 袁 崇 煥 遣 杜 明 忠 偕 方 吉納 等 以 書 來 , 並 李 喇 嘛 書 , 欲 釋 恨 修 好 。 惟 請 減 金 幣 之數 , 而 以 我 稱 兵 朝 鮮 為 疑 。 辛 巳 , 阿 敏 等 遣 使 奏 捷 。 乙酉 , 命 留 滿 洲 兵 一 千 、 蒙 古 兵 二 千 防 義 州 , 滿 洲 兵 三 百、 蒙 古 兵 一 千 防 鎮 江 城 。 並 諭 李 倧 曰 : 「 我 留 兵 義 州 者, 防 毛 文 龍 耳 。 」 阿 敏 等 旋 師 , 以 李 覺 歸 。
夏 四 月 甲 辰 , 遺 袁 崇 煥 書 曰 : 「 釋 恨 修 好 , 固 所願 也 。 朝 鮮 自 尊 輕 我 , 納 我 叛 亡 , 我 遲 之 數 年 , 彼 不 知悔 , 是 以 興 討 。 天 誘 其 衷 , 我 軍 克 捷 。 今 已 和 矣 , 而 爾詭 言 修 好 , 仍 遣 哨 卒 偵 視 , 修 葺 城 堡 。 我 國 將 帥 , 實 以此 致 疑 。 夫 講 信 修 睦 , 必 藉 物 以 成 禮 , 我 豈 貪 而 利 此 ,使 爾 國 力 不 支 ? 可 減 其 半 。 歲 時 餽 答 , 當 如 前 議 , 則 兩國 之 福 也 。 」 書 成 , 聞 崇 煥 方 築 塔 山 、 大 凌 河 、 錦 州 等城 , 遂 罷 遣 使 , 而 以 書 付 杜 明 忠 還 。 更 責 崇 煥 曰 : 「 兩國 修 好 , 當 分 定 疆 域 。 今 又 修 葺 域 垣 , 潛 圖 侵 逼 。 倘 戰爭 不 息 , 天 以 燕 、 雲 畀 我 , 爾 主 不 幸 奔 竄 , 身 敗 名 裂 ,為 何 如 也 。 自 古 文 臣 不 更 事 者 徒 為 大 言 , 每 喪 師 殃 民 ,社 稷 傾 覆 。 前 者 遼 左 任 用 非 人 , 而 河 東 西 土 地 盡 失 , 今尚 謂 不 足 戒 而 謀 動 干 戈 耶 ? 」 癸 丑 , 阿 敏 等 自 朝 鮮 凱 旋, 上 迎 於 武 靖 營 , 賜 阿 敏 御 衣 一 襲 , 餘 各 賜 馬 一 匹 。 乙卯 , 論 征 朝 鮮 將 士 功 , 擢 賞 有 差 。 戊 辰 , 上 還 瀋 陽 。 乙丑 , 以 書 諭 察 哈 爾 台 吉 濟 農 及 奈 曼 袞 出 斯 巴 圖 魯 來 和 。
五 月 戊 辰 , 遣 朝 鮮 國 王 弟 李 覺 歸 國 , 設 宴 餞 之 ,並 賜 鞍 馬 裘 帶 等 物 。 辛 未 , 上 聞 明 人 於 錦 州 、 大 凌 河 、小 凌 河 築 城 屯 田 , 而 崇 煥 無 報 書 , 親 率 師 往 攻 之 。 乙 亥, 至 廣 寧 , 乘 夜 進 兵 。 丙 子 , 明 大 凌 河 、 小 凌 河 兵 棄 城遁 , 遂 圍 錦 州 。 明 臺 堡 兵 二 千 餘 人 來 降 , 悉 縱 之 歸 。 丁丑 , 明 鎮 守 遼 東 太 監 紀 用 、 總 兵 趙 率 教 遣 人 詣 師 請 命 。上 開 誠 諭 之 , 并 許 紀 用 親 來 定 議 。 用 不 答 , 遂 攻 錦 州 。垂 克 , 明 援 兵 至 , 退 五 里 而 營 , 遣 人 調 瀋 陽 兵 益 師 。 庚寅 , 固 山 額 真 博 爾 晉 等 以 兵 至 。 癸 巳 , 攻 寧 遠 城 , 殲 其步 卒 千 餘 人 。 既 , 明 總 兵 滿 桂 出 城 而 陣 , 上 欲 擊 之 , 三大 貝 勒 均 諫 止 。 上 怒 , 趣 諸 將 戴 兜 鍪 , 率 阿 濟 格 疾 馳 而進 , 敗 其 前 隊 , 追 至 寧 遠 城 下 , 盡 殪 之 。 諸 貝 勒 不 及 冑而 從 , 濟 爾 哈 朗 、 薩 哈 廉 、 瓦 克 達 俱 被 創 。 錦 州 守 兵 亦出 城 合 戰 , 我 軍 復 迎 擊 之 。 游 擊 覺 羅 拜 山 、 備 禦 巴 希 陣歿 , 上 臨 其 喪 , 哭 而 酹 之 。 我 軍 還 駐 雙 樹 鋪 。 乙 未 , 復至 錦 州 。
六 月 己 亥 , 攻 錦 州 , 值 天 溽 暑 , 士 卒 死 傷 甚 眾 。庚 子 , 班 師 。 丁 未 , 上 還 瀋 陽 。 是 歲 , 大 饑 , 斗 米 值 銀八 兩 , 銀 賤 物 貴 , 盜 賊 繁 興 。 上 惻 然 曰 : 「 民 饑 為 盜 ,可 盡 殺 乎 ! 」 令 鞭 而 釋 之 , 仍 發 帑 賑 民 。
秋 七 月 己 巳 , 蒙 古 敖 漢 瑣 諾 木 杜 稜 、 塞 臣 卓 禮 克圖 、 奈 曼 袞 出 斯 巴 圖 魯 舉 國 來 附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報謝 , 並 獻 方 物 , 命 阿 什 達 爾 漢 等 往 報 之 , 尋 以 義 州 歸 朝鮮 。 是 月 , 明 袁 崇 煥 罷 歸 。
八 月 辛 亥 , 察 哈 爾 阿 喇 克 綽 忒 部 貝 勒 巴 爾 巴 圖 魯、 諾 門 達 賚 、 吹 爾 扎 木 蘇 率 眾 來 歸 。 是 月 , 明 熹 宗 崩 ,其 弟 信 王 嗣 位 , 是 為 莊 烈 帝 。
九 月 甲 子 朔 , 諭 國 家 大 祀 大 宴 用 牛 外 , 其 屠 宰 馬騾 牛 驢 者 悉 禁 之 。
冬 十 一 月 庚 午 , 察 哈 爾 大 貝 勒 昂 坤 杜 稜 來 降 。 辛巳 , 薩 哈 爾 察 部 來 朝 貢 。
十 二 月 甲 午 朔 , 察 哈 爾 阿 喇 克 綽 忒 貝 勒 圖 爾 濟 伊爾 登 來 降 。
二 年一六二八 春 正 月 戊 子 , 格 伊 克 里 部 長 四 人 率 其 屬 來 朝。
二 月 癸 巳 朔 , 以 額 亦 都 子 圖 爾 格 、 費 英 東 子 察 哈尼 俱 為 總 兵 官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其 總 兵 官 李 蘭 等 來 獻 方物 , 並 米 二 千 石 , 更 以 一 千 石 在 中 江 平 糶 。 庚 子 , 以 往喀 喇 沁 使 臣 屢 為 察 哈 爾 多 羅 特 部 所 殺 , 上 率 師 親 征 。 丁未 , 進 擊 多 羅 特 部 , 敗 之 , 多 爾 濟 哈 談 巴 圖 魯 被 創 遁 ,獲 其 妻 子 , 殺 台 吉 古 魯 , 俘 萬 一 千 二 百 人 還 。 丁 巳 , 以戰 勝 , 用 八 牛 祭 天 。
三 月 戊 辰 , 上 還 瀋 陽 , 貝 勒 阿 敏 等 率 群 臣 郊 迎 ,行 抱 見 禮 。 以 弟 多 爾 袞 、 多 鐸 從 征 有 功 , 賜 多 爾 袞 號 墨爾 根 戴 青 , 多 鐸 號 額 爾 克 楚 虎 爾 。 庚 寅 , 以 賜 名 之 禮 宴之 。 戊 子 , 給 國 人 無 妻 者 金 , 使 娶 。 以 貝 勒 多 爾 袞 為 固山 貝 勒 。
夏 四 月 丙 辰 , 巴 林 貝 勒 塞 特 爾 , 台 吉 塞 冷 、 阿 玉石 、 滿 朱 習 禮 率 眾 來 歸 。 明 復 以 袁 崇 煥 督 師 薊 、 遼 。 崇煥 素 弗 善 毛 文 龍 。 時 文 龍 據 皮 島 , 招 集 遼 民 , 有 逃 亡 則殺 以 冒 功 , 遂 得 擢 總 兵 , 便 宜 行 事 。 後 更 致 書 與 我 通 好。 上 遣 科 廓 等 賚 書 往 報 。 既 , 文 龍 執 科 廓 等 送 燕 京 。 崇煥 以 文 龍 私 通 罪 紿 殺 之 。
五 月 辛 未 , 明 人 棄 錦 州 。 貝 勒 阿 巴 泰 等 率 兵 三 千略 其 地 , 隳 錦 州 、 杏 山 、 高 橋 三 城 , 毀 十 三 站 以 東 墩 台二 十 一 。 先 是 顧 特 塔 布 囊 以 其 眾 自 察 哈 爾 逃 匿 蒙 古 地 ,遇 歸 附 者 輒 殺 之 。 辛 巳 , 命 貝 勒 濟 爾 哈 朗 、 豪 格 率 兵 討顧 特 塔 布 囊 。 乙 酉 , 顧 特 伏 誅 , 俘 其 人 口 牲 畜 以 萬 計 。長 白 山 迤 東 濱 海 虎 爾 哈 部 頭 目 里 佛 塔 等 來 朝 。
八 月 辛 卯 , 與 喀 喇 沁 部 議 和 定 盟 。 乙 未 , 賜 奈 曼貝 勒 袞 出 斯 號 達 爾 漢 , 札 魯 特 喀 巴 海 號 衛 徵 。 乙 卯 , 朝鮮 來 貢 。
九 月 庚 申 , 徵 外 藩 兵 共 征 蒙 古 察 哈 爾 。 癸 亥 , 上率 大 軍 西 發 。 丙 寅 , 次 遼 陽 。 敖 漢 、 奈 曼 、 喀 爾 喀 、 札魯 特 、 喀 喇 沁 諸 貝 勒 、 台 吉 各 以 兵 來 會 。 己 巳 , 駐 師 綽洛 郭 爾 。 甲 戌 , 宴 來 會 諸 貝 勒 。 科 爾 沁 諸 貝 勒 不 至 。 土謝 圖 汗 額 駙 奧 巴 、 哈 談 巴 圖 魯 、 滿 朱 習 禮 如 約 , 請 先 侵掠 而 後 合 軍 。 上 怒 , 遣 使 趣 之 。 時 奧 巴 違 命 , 徑 歸 。 滿朱 習 禮 及 台 吉 巴 敦 以 所 俘 來 獻 , 上 賜 滿 朱 習 禮 號 達 爾 漢巴 圖 魯 , 巴 敦 號 達 爾 漢 卓 禮 克 圖 , 厚 賚 之 。 丙 子 , 進 兵擊 席 爾 哈 、 席 伯 圖 、 英 、 湯 圖 諸 處 , 克 之 , 獲 人 畜 無 算。
冬 十 月 辛 卯 , 還 師 。 丙 申 , 諭 敖 漢 、 奈 曼 、 巴 林、 札 魯 特 諸 貝 勒 , 毋 得 要 殺 降 人 , 違 者 科 罰 。 壬 寅 , 上還 瀋 陽 。 以 劉 興 祚 詐 稱 縊 死 , 逃 歸 明 , 繫 其 母 及 妻 子 於獄 。
十 二 月 丁 亥 朔 , 遺 土 謝 圖 汗 額 駙 奧 巴 書 , 數 其 罪。 巴 牙 喇 部 長 伊 爾 彪 等 來 朝 貢 。 蒙 古 郭 畀 爾 圖 、 札 魯 特貝 勒 塞 本 及 其 弟 馬 尼 各 率 部 來 歸 。
三 年 春 正 月 庚 申 , 土 謝 圖 汗 奧 巴 來 請 罪 , 宥 而 遣之 。 辛 未 , 敕 科 爾 沁 、 敖 漢 、 奈 曼 、 喀 爾 喀 、 喀 喇 沁 諸部 悉 遵 國 制 。 丁 丑 , 諭 諸 貝 勒 代 理 三 大 貝 勒 直 月 機 務 。
二 月 戊 子 , 諭 三 大 貝 勒 、 諸 貝 勒 、 大 臣 毋 得 科 斂民 間 財 物 , 犯 者 治 罪 。 己 亥 , 合 葬 太 祖 高 皇 帝 、 孝 慈 高皇 后 於 瀋 陽 之 石 嘴 頭 山 , 妃 富 察 氏 祔 。 喀 爾 喀 札 魯 特 貝勒 戴 青 、 桑 土 、 桑 古 爾 、 桑 噶 爾 寨 等 率 眾 來 附 。 甲 辰 ,上 南 巡 , 閱 邊 境 城 堡 , 圮 薄 者 修 築 之 。 戊 申 , 次 海 州 ,有 老 人 年 一 百 三 歲 , 妻 一 百 五 歲 , 子 七 十 三 歲 , 召 見 賜牛 種 。 辛 亥 , 上 還 瀋 陽 。
三 月 戊 午 , 申 蒙 古 諸 部 軍 令 。
夏 四 月 丙 戌 朔 , 設 文 館 , 命 巴 克 什 達 海 及 剛 林 等繙 譯 漢 字 書 籍 , 庫 爾 纏 及 吳 巴 什 等 記 注 本 朝 政 事 。
五 月 丁 未 , 奈 曼 、 札 魯 特 諸 貝 勒 越 界 駐 牧 , 自 請議 罰 。 上 宥 之 。
六 月 乙 丑 , 議 伐 明 , 令 科 爾 沁 、 喀 爾 喀 、 札 魯 特、 敖 漢 、 奈 曼 諸 部 會 兵 , 並 令 預 採 木 造 船 以 備 轉 餉 。 丁卯 , 喀 喇 沁 布 爾 噶 都 戴 青 、 台 吉 卓 爾 畢 , 土 默 特 台 吉 阿玉 石 等 遣 使 朝 貢 。 辛 巳 , 土 默 特 台 吉 卓 爾 畢 泰 等 來 朝 貢。
秋 七 月 辛 卯 , 喀 爾 喀 台 吉 拜 渾 岱 、 喇 巴 泰 、 滿 朱習 禮 自 科 爾 沁 來 朝 。 甲 午 , 孟 阿 圖 率 兵 征 瓦 爾 喀 。 乙 未, 庫 爾 喀 部 來 朝 貢 。
八 月 庚 午 , 頒 八 旗 臨 陣 賞 罰 令 。 乙 亥 , 諭 曰 : 「自 古 及 今 , 文 武 並 用 , 以 文 治 世 , 以 武 克 敵 。 今 欲 振 興文 教 , 試 錄 生 員 。 諸 貝 勒 府 及 滿 、 漢 、 蒙 古 所 有 生 員 ,俱 令 赴 試 。 中 式 者 以 他 丁 償 之 。 」
九 月 壬 午 朔 , 初 試 生 員 , 拔 二 百 人 , 賞 緞 布 有 差, 免 其 差 徭 。 癸 未 , 貝 勒 濟 爾 哈 朗 等 略 明 錦 州 、 寧 遠 諸路 還 , 俘 獲 以 三 千 計 。 丙 戌 , 阿 魯 部 杜 思 噶 爾 濟 農 始 遣使 來 通 好 。 癸 卯 , 喀 喇 沁 布 爾 噶 都 來 朝 貢 。
冬 十 月 癸 丑 , 上 親 征 明 , 徵 蒙 古 諸 部 兵 以 次 來 會。 庚 申 , 次 納 里 特 河 , 察 哈 爾 五 千 人 來 歸 。 壬 戌 , 次 遼河 。 丙 寅 , 科 爾 沁 奧 巴 以 二 十 三 貝 勒 來 會 。 上 集 諸 貝 勒大 臣 議 征 明 與 征 察 哈 爾 孰 利 , 皆 言 察 哈 爾 遠 , 於 是 征 明。 辛 未 , 次 喀 喇 沁 之 青 城 。 大 貝 勒 代 善 、 三 貝 勒 莽 古 爾泰 止 諸 貝 勒 帳 外 , 入 見 密 議 班 師 。 既 退 , 岳 託 等 入 白 諸將 在 外 候 進 取 。 上 不 懌 , 因 曰 : 「 兩 兄 謂 我 兵 深 入 , 勞師 襲 遠 , 若 糧 匱 馬 疲 , 敵 人 環 攻 , 無 為 歸 計 。 若 等 見 及此 , 而 初 不 言 , 朕 既 遠 涉 , 乃 以 此 為 辭 。 我 謀 且 隳 , 何候 為 ! 」 岳 託 堅 請 進 師 。 八 固 山 額 真 詣 代 善 、 莽 古 爾 泰議 , 夜 半 議 定 。 諭 曰 : 「 朕 承 天 命 , 興 師 伐 明 , 拒 者 戮, 降 者 勿 擾 。 俘 獲 之 人 , 父 母 妻 子 勿 使 離 散 。 勿 淫 人 婦女 , 勿 褫 人 衣 服 , 勿 毀 廬 舍 器 皿 , 勿 伐 果 木 , 勿 酗 酒 。違 者 罪 無 赦 。 固 山 額 真 等 不 禁 , 罪 如 之 。 」 乙 亥 , 次 老河 , 命 濟 爾 哈 朗 、 岳 託 率 右 翼 兵 攻 大 安 口 , 阿 巴 泰 、 阿濟 格 率 左 翼 兵 攻 龍 井 關 。 上 與 大 貝 勒 代 善 、 三 貝 勒 莽 古爾 泰 率 大 兵 繼 之 。 丁 丑 , 左 翼 兵 克 龍 井 關 , 明 副 將 易 愛、 參 將 王 遵 臣 來 援 , 皆 敗 死 。 漢 兒 莊 、 潘 家 口 守 將 俱 降。 戊 寅 , 上 督 兵 克 洪 山 口 。 辛 巳 , 上 至 遵 化 。 莽 古 爾 泰率 左 翼 兵 自 漢 兒 莊 來 會 。 遺 書 明 巡 撫 王 元 雅 勸 降 。
十 一 月 壬 午 朔 , 右 翼 諸 貝 勒 率 師 來 會 。 先 是 濟 爾哈 朗 等 克 大 安 口 , 五 戰 皆 捷 , 降 馬 蘭 營 、 馬 蘭 口 、 大 安營 三 城 , 明 羅 文 峪 守 將 李 思 禮 降 。 山 海 關 總 兵 趙 率 教 以兵 四 千 來 援 , 阿 濟 格 迎 擊 斬 之 。 甲 申 , 諸 貝 勒 攻 遵 化 ,正 白 旗 小 校 薩 木 哈 圖 先 登 , 大 兵 繼 之 , 遂 克 其 城 。 明 巡撫 王 元 雅 自 經 死 。 上 親 酌 金 卮 賜 薩 木 哈 圖 , 擢 備 禦 , 世襲 罔 替 , 賜 號 巴 圖 魯 , 有 過 赦 免 , 家 固 貧 , 恤 之 。 蒙 古兵 擾 害 羅 文 峪 民 。 令 曰 : 「 凡 貝 勒 大 臣 有 掠 歸 降 城 堡 財物 者 斬 , 擅 殺 降 民 者 抵 罪 , 強 取 民 物 , 計 所 取 倍 償 之 。」 己 丑 , 敘 克 城 功 , 將 士 賞 賚 有 差 。 壬 辰 , 參 將 英 俄 爾岱 、 文 館 范 文 程 留 守 遵 化 , 大 軍 進 逼 燕 京 。 有 蒙 古 兵 殺人 而 褫 其 衣 , 上 命 射 殺 之 。 甲 午 , 徇 薊 州 。 乙 未 , 徇 三河 。 丙 申 , 左 翼 貝 勒 赴 通 州 視 渡 口 。 明 大 同 、 宣 府 二 鎮援 兵 至 順 義 , 貝 勒 阿 巴 泰 、 岳 託 擊 敗 之 。 順 義 降 。 上 至通 州 , 諭 明 士 民 曰 : 「 我 國 夙 以 忠 順 守 邊 , 葉 赫 與 我 同一 國 耳 , 明 主 庇 葉 赫 而 陵 我 , 大 恨 有 七 。 我 知 終 不 相 容, 故 告 天 興 師 。 天 直 我 國 , 賜 我 河 東 地 。 我 太 祖 皇 帝 猶願 和 好 , 與 民 休 息 。 爾 國 不 從 , 天 又 賜 我 河 西 地 。 及 朕即 位 , 復 徇 爾 國 之 請 , 遂 欲 去 帝 稱 汗 , 趣 製 國 印 , 而 爾國 不 從 。 今 我 興 師 而 來 , 順 者 撫 , 逆 者 誅 。 是 爾 君 好 逞干 戈 , 猶 爾 之 君 殺 爾 也 。 天 運 循 環 , 無 往 不 復 , 有 天 子而 為 匹 夫 , 亦 有 匹 夫 而 為 天 子 者 。 天 既 佑 我 , 乃 使 我 去帝 號 。 天 其 鑒 之 ! 」 辛 丑 , 大 軍 逼 燕 京 。 上 營 於 城 北 土城 關 之 東 , 兩 翼 營 於 東 北 。 明 大 同 總 兵 滿 桂 、 宣 府 總 兵侯 世 祿 屯 德 勝 門 , 寧 遠 巡 撫 袁 崇 煥 、 錦 州 總 兵 祖 大 壽 屯沙 窩 門 。 上 率 右 翼 大 貝 勒 代 善 , 貝 勒 濟 爾 哈 朗 、 岳 託 、杜 度 、 薩 哈 廉 等 , 領 白 甲 護 軍 、 蒙 古 兵 進 擊 桂 、 世 祿 ,遣 左 翼 大 貝 勒 莽 古 爾 泰 、 阿 巴 泰 、 阿 濟 格 、 多 爾 袞 、 多鐸 、 豪 格 等 , 領 白 甲 護 軍 、 蒙 古 兵 迎 擊 崇 煥 、 大 壽 , 俱敗 之 。 癸 卯 , 遣 明 歸 順 王 太 監 賚 書 與 明 議 和 。 乙 巳 , 屯南 海 子 。 戊 申 , 袁 崇 煥 、 祖 大 壽 營 於 城 東 南 隅 , 樹 柵 為衛 , 我 軍 偪 之 而 營 。 上 率 輕 騎 往 視 。 諸 貝 勒 請 攻 城 , 諭曰 : 「 路 隘 且 險 , 若 傷 我 士 卒 , 雖 得 百 城 不 足 多 也 。 」因 止 弗 攻 。 初 , 獲 明 太 監 二 人 , 令 副 將 高 鴻 中 , 參 將 鮑承 先 、 寧 完 我 等 受 密 計 。 至 是 , 鴻 中 、 承 先 坐 近 二 太 監耳 語 云 : 「 今 日 撤 兵 , 乃 上 計 也 。 頃 上 單 騎 向 敵 , 敵 二人 見 上 語 良 久 乃 去 。 意 袁 都 堂 有 約 , 此 事 就 矣 。 」 時 楊太 監 佯 臥 竊 聽 。 翌 日 縱 之 歸 , 以 所 聞 語 明 帝 , 遂 下 崇 煥於 獄 。 大 壽 懼 , 率 所 部 奔 錦 州 , 毀 山 海 關 而 出 。 諸 貝 勒大 臣 請 攻 城 , 上 曰 : 「 攻 則 可 克 , 但 恐 傷 我 良 將 勁 卒 ,余 不 忍 也 。 」 遂 止 。
十 二 月 辛 亥 朔 , 大 軍 經 海 子 而 南 , 且 獵 且 行 , 趣良 鄉 , 克 其 城 。 壬 子 , 總 兵 吳 訥 格 克 固 安 。 辛 酉 , 遣 貝勒 阿 巴 泰 、 薩 哈 廉 以 太 牢 祀 金 太 祖 、 世 宗 陵 。 丙 寅 , 復趨 燕 京 , 敗 明 兵 於 盧 溝 橋 , 殲 其 眾 。 明 總 兵 滿 桂 、 孫 祖壽 、 黑 雲 龍 、 麻 登 雲 以 兵 四 萬 柵 永 定 門 之 南 。 丁 卯 黎 明, 師 毀 柵 入 , 斬 桂 、 祖 壽 及 副 將 以 下 三 十 餘 人 , 擒 黑 雲龍 、 麻 登 雲 , 獲 馬 六 千 , 分 賜 將 士 。 戊 辰 , 遣 達 海 賚 書與 明 議 和 。 壬 申 , 貝 勒 阿 巴 泰 、 濟 爾 哈 朗 略 通 州 , 焚 其舟 , 攻 張 家 灣 , 克 之 。 達 海 賚 議 和 書 二 分 置 安 定 、 德 勝門 外 。 乙 亥 , 復 遣 人 賚 書 赴 安 定 門 。 俱 不 報 。 丙 子 , 駐師 通 州 。 丁 丑 , 岳 託 、 薩 哈 廉 、 豪 格 率 兵 四 千 圍 永 平 。遂 克 香 河 、 馬 蘭 峪 諸 城 , 復 叛 去 。 己 卯 , 大 軍 趣 永 平 。
四 年 春 正 月 辛 巳 朔 , 大 軍 至 榛 子 鎮 、 沙 河 驛 , 俱降 。 壬 午 , 至 永 平 。 先 是 , 劉 興 祚 自 我 國 逃 歸 , 匿 崇 煥所 。 至 是 , 率 所 攜 滿 洲 兵 十 五 人 、 蒙 古 兵 五 百 欲 往 守 沙河 。 聞 大 兵 至 , 改 趣 永 平 之 太 平 寨 , 襲 殺 喀 喇 沁 兵 於 途。 上 怒 其 負 恩 , 遣 貝 勒 阿 巴 泰 等 禽 斬 之 , 裂 其 屍 以 徇 。癸 丑 , 上 授 諸 將 方 略 , 乘 夜 攻 城 。 城 中 火 藥 自 發 , 敵 軍大 亂 , 黎 明 克 之 。 貝 勒 濟 爾 哈 朗 等 入 城 安 撫 。 丙 戌 , 上率 諸 將 入 城 , 官 民 夾 道 呼 萬 歲 。 貝 勒 濟 爾 哈 朗 、 薩 哈 廉守 永 平 。 以 降 官 白 養 粹 為 永 平 巡 撫 , 孟 喬 芳 、 楊 文 魁 為副 將 , 縱 鄉 民 還 其 家 。 是 日 , 上 率 大 軍 趣 山 海 關 。 敖 漢、 奈 曼 、 巴 林 、 札 魯 特 諸 部 兵 攻 昌 黎 , 不 克 。 臺 頭 營 、鞍 山 堡 、 遷 安 、 灤 州 以 次 降 。 建 昌 參 將 馬 光 遠 來 歸 。 丁酉 , 明 兵 攻 遵 化 , 貝 勒 杜 度 擊 敗 之 。 明 兵 入 三 屯 營 , 先所 下 漢 兒 莊 、 喜 峰 口 、 潘 家 口 、 洪 家 口 復 叛 。 庚 子 , 達海 等 復 漢 兒 莊 , 貝 勒 阿 巴 泰 守 之 。 辛 丑 , 喀 喇 沁 布 爾 噶都 為 明 兵 所 圍 , 遣 軍 往 救 , 未 至 , 布 爾 噶 都 自 擊 敗 之 。其 帥 明 兵 部 尚 書 劉 之 綸 領 兵 至 , 樹 柵 。 我 軍 砲 毀 其 柵 。之 綸 屯 山 中 。 大 貝 勒 代 善 圍 之 , 勸 之 綸 降 , 不 從 。 破 其營 , 之 綸 被 箭 死 。 壬 寅 , 移 師 馬 蘭 峪 , 毀 其 近 城 屯 堡 。丙 午 , 喀 喇 沁 蘇 布 地 上 書 明 帝 , 論 和 好 之 利 , 且 勸 以 愛養 邊 民 、 優 恤 屬 國 之 道 。 不 報 。 樂 亭 復 叛 。
二 月 辛 亥 朔 , 諭 貝 勒 諸 臣 , 凡 將 士 驍 勇 立 功 者 ,勿 與 攻 城 之 役 。 甲 寅 , 宴 明 降 將 麻 登 雲 等 於 御 幄 , 謂 之曰 : 「 明 主 視 爾 等 將 士 之 命 如 草 芥 , 驅 之 死 地 。 朕 屢 遣使 議 和 , 竟 無 一 言 相 報 , 何 也 ? 」 登 雲 對 曰 : 「 明 帝 幼沖 , 大 臣 各 圖 自 保 , 議 和 之 事 , 儻 不 見 聽 , 罪 且 不 測 ,故 懼 不 敢 奏 。 」 上 曰 : 「 若 然 , 是 天 贊 我 也 , 豈 可 棄 之而 歸 。 但 駐 兵 屯 守 , 妨 農 時 為 可 憫 耳 。 且 彼 山 海 關 、 錦州 防 守 尚 堅 , 今 但 取 其 無 備 城 邑 可 也 。 」 己 未 , 遺 書 明帝 , 仍 申 和 好 , 並 致 書 明 諸 臣 , 勸 其 急 定 和 議 , 至 是 凡七 致 書 矣 。 甲 子 , 明 榆 林 副 將 王 世 選 來 降 。 上 班 師 , 貝勒 阿 巴 泰 、 濟 爾 哈 朗 、 薩 哈 廉 及 文 臣 索 尼 、 寧 完 我 等 守永 平 , 鮑 承 先 守 遷 安 , 固 山 額 真 圖 爾 格 、 那 木 泰 等 守 灤州 , 察 喀 喇 、 范 文 程 等 守 遵 化 。 駐 灤 三 日 , 論 功 行 賞 。壬 申 , 諭 曰 : 「 天 以 明 土 地 人 民 予 我 , 其 民 即 吾 民 , 宜飭 軍 士 勿 加 侵 害 , 違 者 治 罪 。 」 上 至 永 平 , 降 官 郎 中 陳此 心 謀 遁 , 事 覺 論 斬 , 上 赦 之 , 聽 其 所 往 。
三 月 壬 午 , 上 還 瀋 陽 。 庚 寅 , 遣 二 貝 勒 阿 敏 、 貝勒 碩 託 率 兵 五 千 往 守 永 平 四 城 , 貝 勒 阿 巴 泰 等 還 。 庚 子, 阿 魯 四 子 部 遣 使 來 盟 。
夏 四 月 壬 子 , 明 兵 攻 灤 州 , 不 克 。 己 卯 , 貝 勒 阿巴 泰 、 濟 爾 哈 朗 等 自 永 平 還 。 上 問 是 役 俘 獲 較 前 孰 多 ,對 曰 : 「 此 行 所 獲 人 口 甚 多 。 」 上 曰 : 「 財 帛 不 足 喜 ,惟 多 得 人 為 可 喜 耳 。 」
五 月 己 丑 , 諭 諸 臣 厚 撫 俘 眾 。 壬 辰 , 阿 敏 、 碩 託等 棄 永 平 四 城 歸 。 時 明 監 軍 道 張 春 、 錦 州 總 兵 祖 大 壽 等合 兵 攻 灤 州 。 那 穆 泰 、 圖 爾 格 、 湯 古 代 等 出 戰 , 屢 敗 明兵 , 然 兵 少 , 阿 敏 、 碩 託 畏 不 往 援 , 明 兵 用 砲 攻 灤 州 ,那 穆 泰 等 不 能 支 , 棄 城 奔 永 平 。 會 天 雨 , 我 軍 潰 圍 出 ,無 馬 被 創 者 死 四 百 餘 人 。 阿 敏 、 碩 託 聞 之 恐 , 遂 殺 降 官白 養 粹 等 , 盡 屠 城 中 士 民 , 收 其 金 幣 , 乘 夜 出 冷 口 。 察哈 喇 等 亦 棄 遵 化 歸 。 上 方 命 貝 勒 杜 度 趨 永 平 協 守 , 且 敕阿 敏 善 撫 官 民 , 無 侵 暴 , 將 整 兵 親 往 。 庚 子 , 聞 阿 敏 棄城 , 且 大 肆 屠 戮 , 乃 止 。
六 月 甲 寅 , 收 繫 棄 城 諸 將 , 數 其 罪 。 乙 卯 , 御 殿宣 阿 敏 十 六 罪 。 眾 議 當 誅 。 上 不 忍 致 法 , 幽 之 。 碩 託 、湯 古 代 、 那 穆 泰 、 巴 布 泰 、 圖 爾 格 等 各 奪 爵 、 革 職 有 差。 諸 將 中 有 力 戰 殺 敵 者 釋 之 。 先 是 阿 敏 既 屠 永 平 官 民 ,以 其 妻 子 分 給 士 卒 。 上 曰 : 「 彼 既 屠 我 歸 順 良 民 , 又 奴其 妻 子 耶 ! 」 命 編 為 民 戶 , 以 房 舍 衣 食 給 之 。
秋 九 月 戊 戌 , 申 諭 諸 大 臣 滿 、 漢 官 各 勤 職 業 。
冬 十 月 辛 酉 , 諭 編 審 各 旗 壯 丁 , 隱 匿 者 罰 之 。
十 一 月 甲 午 , 那 堪 泰 部 虎 爾 噶 率 家 屬 來 歸 , 阿 魯四 子 部 諸 貝 勒 來 歸 。 壬 寅 , 阿 魯 伊 蘇 忒 部 聞 上 善 養 民 ,留 所 部 於 西 拉 木 輪 河 , 而 偕 我 使 臣 察 漢 喇 嘛 來 朝 。
十 二 月 戊 辰 , 科 爾 沁 貝 勒 圖 美 衛 徵 來 朝 。
五 年 春 正 月 庚 辰 , 諭 已 故 功 臣 無 後 者 , 家 產 給 其妻 自 贍 。 壬 午 , 鑄 紅 衣 大 砲 成 , 鐫 曰 「 天 祐 助 威 大 將 軍」 。 軍 中 造 砲 自 此 始 。 乙 未 , 以 額 駙 佟 養 性 總 理 漢 人 軍民 事 , 漢 官 聽 其 節 制 。 己 亥 , 幸 文 館 , 入 庫 爾 纏 直 房 ,問 所 修 何 書 。 對 曰 : 「 記 註 所 行 政 事 。 」 上 曰 : 「 如 此, 朕 不 宜 觀 。 」 又 覽 達 海 所 譯 武 銓 , 見 投 醪 飲 河 事 , 曰: 「 古 良 將 體 恤 士 卒 , 三 軍 之 士 樂 為 致 死 。 若 額 駙 顧 三台 對 敵 時 , 見 戰 士 歿 者 , 以 繩 曳 之 歸 , 安 能 得 人 死 力 乎! 」 庚 子 , 朝 鮮 貢 物 不 及 額 , 卻 之 , 以 書 責 其 罪 。
二 月 庚 申 , 敕 邊 臣 謹 斥 堠 。 甲 戌 , 孟 阿 圖 征 瓦 爾喀 , 奏 捷 。
三 月 乙 亥 朔 , 鑲 藍 旗 固 山 額 真 、 額 駙 顧 三 台 罷 ,以 太 祖 弟 之 子 篇 古 代 之 。 書 諭 大 貝 勒 代 善 、 三 貝 勒 莽 古爾 泰 及 貝 勒 諸 大 臣 , 求 直 言 過 失 。 丁 亥 , 閱 漢 兵 。 甲 午, 誅 劉 興 祚 、 興 治 家 屬 , 赦 其 母 。 丁 酉 , 朝 鮮 復 遣 使 來貢 。 辛 丑 , 遣 滿 達 爾 漢 、 董 訥 密 遺 朝 鮮 王 書 , 索 戰 船 助攻 明 。 不 許 。
六 月 癸 亥 , 定 功 臣 襲 職 例 。 黑 龍 江 伊 札 訥 、 薩 克提 、 伽 期 訥 、 俄 力 喀 、 康 柱 等 五 頭 目 來 朝 。
秋 七 月 甲 戌 , 黑 龍 江 虎 爾 哈 部 四 頭 目 來 朝 貢 。 庚辰 , 始 設 六 部 , 以 墨 勒 根 戴 青 貝 勒 多 爾 袞 , 貝 勒 德 格 類、 薩 哈 廉 、 岳 託 、 濟 爾 哈 朗 、 阿 巴 泰 等 管 六 部 事 。 每 部滿 、 漢 、 蒙 古 分 設 承 政 官 , 其 下 設 參 政 各 八 員 , 啟 心 郎各 一 員 , 改 巴 克 什 為 筆 帖 式 , 其 尚 稱 巴 克 什 者 仍 其 舊 。更 定 訐 告 諸 貝 勒 者 准 其 離 主 例 , 其 以 細 事 訐 訴 者 禁 之 。諭 貝 勒 審 事 冤 抑 不 公 者 坐 罪 。 除 職 官 有 罪 概 行 削 職 律 ,嗣 後 有 罪 者 , 分 別 輕 重 降 罰 有 差 。 並 禁 官 民 同 族 嫁 娶 ,犯 者 男 婦 以 姦 論 。 又 諭 貝 勒 諸 大 臣 省 過 改 行 , 求 極 諫 。甲 申 , 鬧 雷 虎 爾 哈 部 四 頭 目 來 朝 貢 。 癸 巳 , 定 小 事 賞 罰例 , 令 牛 彔 額 真 審 理 , 大 者 送 部 。 明 總 兵 祖 大 壽 等 築 大凌 河 。 檄 諸 蒙 古 各 率 所 部 來 會 征 之 。 己 亥 , 大 軍 西 發 ,命 貝 勒 杜 度 、 薩 哈 廉 、 豪 格 留 守 。 庚 子 , 渡 遼 河 , 申 誡諸 將 恤 士 卒 。
八 月 壬 寅 朔 , 次 舊 遼 河 而 營 , 蒙 古 諸 部 率 兵 來 會。 癸 卯 , 集 蒙 古 諸 貝 勒 , 申 前 令 , 無 擅 殺 掠 。 於 是 分 兵兩 路 , 貝 勒 德 格 類 、 岳 託 、 阿 濟 格 以 兵 二 萬 由 義 州 入 屯錦 州 、 大 凌 河 之 間 , 上 自 白 土 場 入 廣 寧 。 丁 未 , 會 於 大凌 河 , 乘 夜 攻 城 。 令 曰 : 「 攻 城 恐 傷 士 卒 , 當 掘 壕 築 壘困 之 。 彼 若 出 , 與 之 戰 , 外 援 至 , 迎 擊 之 。 」 乃 分 八 旗兵 合 圍 , 令 蒙 古 兵 承 其 隙 。 辛 亥 , 明 馬 步 兵 五 百 人 出 城, 達 爾 哈 擊 敗 之 。 壬 子 , 射 書 城 中 , 招 蒙 古 人 出 降 。 癸丑 , 明 兵 出 城 誘 戰 。 圖 賴 先 入 , 達 爾 哈 繼 之 , 四 面 環 攻, 貝 勒 多 爾 袞 亦 率 兵 入 。 城 內 砲 矢 俱 發 , 圖 賴 被 創 , 副將 孟 坦 、 屯 布 祿 、 備 禦 多 貝 、 侍 衛 戈 里 戰 歿 。 上 以 圖 賴等 輕 進 , 切 責 之 。 以 紅 衣 砲 攻 明 臺 , 兵 降 者 相 繼 。 乙 卯, 遺 祖 大 壽 書 曰 : 「 往 者 我 欲 和 , 爾 國 君 臣 以 宋 為 鑑 ,不 我 應 。 爾 國 非 宋 , 我 亦 非 金 , 何 不 達 若 此 。 朕 今 厭 兵革 , 更 以 書 往 , 惟 將 軍 裁 之 。 」 大 壽 不 答 。 丁 巳 , 明 松山 兵 二 千 來 援 , 阿 山 、 勞 薩 、 土 魯 什 擊 敗 之 。 甲 子 , 貝勒 阿 濟 格 、 碩 托 遮 擊 明 援 兵 。 丁 卯 , 明 錦 州 兵 六 千 來 攻阿 濟 格 營 。 會 大 霧 , 覿 面 不 相 識 。 忽 有 青 氣 衝 敵 營 , 闢若 門 , 我 軍 乘 霧 進 , 大 戰 , 敗 之 , 擒 游 擊 一 , 盡 獲 其 甲仗 馬 匹 。 辛 未 , 上 詣 貝 勒 阿 濟 格 營 , 酌 金 卮 勞 諸 將 。 明兵 突 出 , 師 夾 擊 , 又 大 敗 之 。
九 月 丁 亥 , 上 以 兵 趨 錦 州 , 見 塵 起 , 上 命 諸 軍 勿行 , 自 率 擺 牙 喇 兵 二 百 , 與 貝 勒 多 鐸 緣 山 潛 進 。 明 錦 州兵 七 千 突 出 進 上 前 。 上 甫 擐 甲 , 從 者 不 及 二 百 人 , 渡 河衝 敵 軍 。 敵 不 能 當 , 潰 走 。 諸 軍 繼 至 , 又 大 敗 之 , 斬 一副 將 而 還 。 己 丑 , 復 以 書 招 祖 大 壽 。 庚 寅 , 上 設 伏 山 內, 誘 大 壽 出 , 將 擒 之 , 大 壽 驚 遁 , 自 是 閉 城 不 出 。 時 城中 穀 止 百 石 , 馬 死 盡 , 煮 馬 肉 為 食 , 以 鞍 代 爨 。 乙 未 ,明 太 僕 寺 卿 監 軍 道 張 春 , 總 兵 吳 襄 、 鍾 緯 等 , 以 馬 步 兵四 萬 來 援 , 壁 小 凌 河 。 戊 戌 , 明 援 兵 趨 大 凌 河 , 距 城 十五 里 。 上 率 兩 翼 騎 兵 衝 擊 之 , 不 動 。 右 翼 兵 猝 入 張 春 營, 敵 遂 敗 , 吳 襄 及 副 將 桑 阿 爾 寨 先 奔 。 張 春 等 復 集 潰 兵立 營 , 會 大 風 , 敵 乘 風 縱 火 , 將 及 我 軍 , 天 忽 雨 , 反 風, 復 戰 , 遂 大 破 之 , 生 擒 張 春 及 副 將 三 十 三 人 。 春 不 屈, 乞 死 , 上 赦 不 殺 。 是 役 也 , 祖 大 壽 仍 以 我 為 誘 敵 , 故城 中 無 應 者 。 是 夕 黑 雲 龍 遁 去 。
冬 十 月 丁 未 , 以 書 招 祖 大 壽 、 何 可 剛 、 張 存 仁 。己 酉 , 再 遺 大 壽 書 。 壬 子 , 以 紅 衣 砲 攻 于 子 章 臺 。 臺 最固 , 三 日 臺 毀 , 守 臺 將 王 景 降 , 於 是 遠 近 百 餘 臺 俱 下 。甲 寅 , 遣 降 將 姜 新 招 祖 大 壽 。 大 壽 亦 遣 游 擊 韓 棟 來 會 。癸 亥 , 議 三 貝 勒 莽 古 爾 泰 上 前 持 刃 罪 , 降 貝 勒 , 奪 所 屬五 牛 彔 。 乙 丑 , 祖 大 壽 約 我 副 將 石 廷 柱 議 降 。 丙 寅 , 大壽 遣 其 子 可 法 為 質 。 戊 辰 , 大 凌 河 舉 城 降 , 獨 副 將 何 可剛 不 從 。 大 壽 掖 可 剛 至 軍 前 殺 之 , 夜 至 御 營 , 上 優 遇 之, 大 壽 遂 獻 取 錦 州 策 。 己 巳 , 遣 兵 隨 大 壽 夜 襲 錦 州 , 會大 霧 , 失 伍 , 還 。
十 一 月 庚 午 朔 , 縱 大 壽 還 錦 州 。 戊 寅 , 毀 大 凌 河城 。 己 卯 , 班 師 。 乙 酉 , 上 還 瀋 陽 。 丙 戌 , 察 哈 爾 侵 阿魯 西 拉 木 輪 地 , 貝 勒 薩 哈 廉 、 豪 格 移 師 征 之 , 會 察 哈 爾已 去 , 乃 還 。
閏 十 一 月 庚 子 朔 , 諭 曰 : 「 我 兵 之 棄 永 平 四 城 ,皆 貝 勒 等 不 學 無 術 所 致 。 頃 大 凌 河 之 役 , 城 中 人 相 食 ,明 人 猶 死 守 , 及 援 盡 城 降 , 而 錦 州 、 松 、 杏 猶 不 下 , 豈非 其 人 讀 書 明 理 盡 忠 其 主 乎 ? 自 今 凡 子 弟 年 十 五 歲 以 下、 八 歲 以 上 , 皆 令 讀 書 。 」 遣 庫 爾 纏 等 責 朝 鮮 違 約 罪 。庚 戌 , 禁 國 中 不 得 私 立 廟 寺 , 喇 嘛 僧 違 律 者 還 俗 , 巫 覡星 士 並 禁 止 之 。
十 二 月 壬 辰 , 參 將 寧 完 我 請 設 言 官 , 定 服 制 。 上嘉 納 之 。 丙 申 , 用 禮 部 參 政 李 伯 龍 言 , 更 定 元 旦 朝 賀 行禮 班 次 。
六 年 春 正 月 癸 亥 , 閱 漢 兵 。
二 月 壬 申 , 定 儀 仗 制 。 丁 丑 , 謁 太 祖 陵 , 行 時 享禮 。 戊 子 , 諭 海 州 等 處 城 守 官 三 年 一 赴 瀋 陽 考 察 。 丁 酉, 諭 戶 部 貝 勒 德 格 類 以 大 凌 河 漢 人 分 隸 副 將 以 下 , 給 配撫 養 。 給 還 貝 勒 莽 古 爾 泰 所 罰 人 口 。
三 月 戊 戌 , 賚 大 凌 河 諸 降 將 有 差 。 命 達 海 分 析 國書 音 義 。 庚 戌 , 定 訐 告 諸 貝 勒 者 輕 重 虛 實 坐 罪 例 , 禁 子弟 告 父 兄 、 妻 告 夫 者 , 定 貝 勒 大 臣 賜 祭 葬 例 。 丁 巳 , 征察 哈 爾 , 徵 蒙 古 兵 , 頒 軍 令 。
夏 四 月 戊 辰 朔 , 上 率 大 軍 西 發 , 阿 巴 泰 、 杜 度 、揚 古 利 、 伊 爾 登 、 佟 養 性 留 守 。 己 巳 , 次 遼 河 。 丙 子 ,次 西 拉 木 輪 河 。 己 卯 , 次 札 滾 烏 達 , 諸 蒙 古 部 兵 以 次 來會 。 乙 酉 , 次 哈 納 崖 。 察 哈 爾 汗 林 丹 聞 我 師 至 , 大 懼 ,驅 歸 化 城 富 民 牲 畜 渡 河 西 奔 , 盡 委 輜 重 而 去 。 庚 寅 , 次都 勒 河 , 聞 察 哈 爾 林 丹 遠 遁 , 上 趨 歸 化 城 。 丙 申 , 大 軍自 阿 濟 格 和 爾 戈 還 趨 察 哈 爾 。
五 月 癸 卯 , 諭 諸 部 貝 勒 大 臣 勿 輕 進 , 勿 退 縮 , 勿殺 降 , 勿 分 散 人 妻 子 , 勿 奪 人 衣 服 財 物 。 甲 辰 , 次 布 龍圖 布 喇 克 。 丁 未 , 勞 薩 奏 報 察 哈 爾 遁 去 已 久 , 逐 北 三 日無 所 見 。 上 自 布 龍 圖 旋 師 。 戊 申 , 定 議 征 明 。 丙 辰 , 次朱 兒 格 土 。 時 糧 盡 , 忽 逢 黃 羊 遍 野 , 遂 合 圍 殺 數 萬 , 脯而 食 之 。 無 水 , 以 一 羊 易 杯 水 而 飲 。 上 命 各 牛 彔 持 水 迎給 之 。 庚 申 , 次 木 魯 哈 喇 克 沁 , 貝 勒 阿 濟 格 率 左 翼 略 宣府 、 大 同 , 貝 勒 濟 爾 哈 朗 率 右 翼 略 歸 化 城 , 上 與 大 貝 勒代 善 、 貝 勒 莽 古 爾 泰 統 大 軍 繼 進 。 甲 子 , 上 至 歸 化 城 ,兩 翼 兵 來 會 。 是 日 , 大 軍 馳 七 百 里 , 西 至 黃 河 木 納 漢 山, 東 至 宣 府 , 自 歸 化 城 南 至 明 邊 境 , 所 在 察 哈 爾 部 民 悉俘 之 。
六 月 丁 卯 朔 , 蒙 古 部 民 竄 沙 河 堡 , 上 以 書 諭 明 守臣 索 之 。 明 歸 我 男 婦 三 百 二 十 、 牲 畜 千 四 百 有 奇 。 辛 未, 寧 完 我 、 范 文 程 、 馬 國 柱 合 疏 言 : 「 伐 明 之 策 , 宜 先以 書 議 和 , 俟 彼 不 從 , 執 以 為 辭 , 乘 釁 深 入 , 可 以 得 志。 」 上 嘉 納 之 。 甲 戌 , 大 軍 發 歸 化 城 , 趨 明 邊 。 丁 丑 ,明 沙 河 堡 守 臣 使 賚 牲 幣 來 獻 。 己 卯 , 庫 爾 纏 等 自 得 勝 堡, 愛 巴 禮 等 由 張 家 口 , 分 詣 大 同 、 宣 府 議 和 。 書 曰 : 「我 之 興 兵 , 非 必 欲 取 明 天 下 也 。 遼 東 守 臣 貪 黷 昏 罔 , 勸葉 赫 陵 我 , 遂 嬰 七 恨 。 屢 愬 爾 主 , 而 遼 東 壅 不 上 聞 。 我兵 至 此 , 欲 爾 主 察 之 也 。 及 攻 撫 順 , 又 因 十 三 省 商 賈 各遺 以 書 , 慮 其 不 克 徑 達 , 則 各 以 書 進 其 省 官 吏 , 冀 有 一聞 。 乃 縱 之 使 去 , 寂 焉 不 復 。 語 云 : 『 下 情 上 達 , 天 下罔 不 治 ; 下 情 上 壅 , 天 下 罔 不 亂 。 』 今 所 在 征 討 , 爭 戰不 息 , 民 死 鋒 鏑 , 雖 下 情 不 達 之 故 , 抑 豈 天 意 乎 ? 我 今聞 誠 相 告 , 國 雖 褊 小 , 惟 欲 兩 國 和 好 , 互 為 貿 易 , 各 安耕 獵 , 以 享 太 平 。 若 言 不 由 衷 , 天 其 鑒 我 。 前 者 屢 致 書問 , 憤 疾 之 詞 , 固 所 不 免 。 此 兵 家 之 常 , 不 足 道 也 。 幸速 裁 斷 , 實 國 之 福 。 我 駐 兵 十 日 以 待 。 」 庚 辰 , 駐 大 同邊 外 。 庫 爾 纏 偕 明 得 勝 堡 千 總 賚 牲 幣 來 獻 。 上 不 納 。 復遺 書 明 守 臣 曰 : 「 我 仰 體 天 意 , 願 申 和 好 。 爾 果 愛 民 ,宜 速 定 議 。 若 延 時 不 報 , 縱 欲 相 待 , 如 軍 中 糧 盡 何 。 至書 中 稱 謂 , 姑 勿 論 , 我 遜 爾 國 , 我 居 察 哈 爾 之 上 可 耳 。」 癸 未 , 趨 宣 府 , 守 臣 以 明 主 所 給 察 哈 爾 緞 布 皮 幣 一 萬二 千 五 百 歸 我 。 庚 寅 , 駐 張 家 口 外 , 列 營 四 十 里 。 癸 巳, 明 巡 撫 沈 棨 、 總 兵 董 繼 舒 遣 人 賚 牛 羊 食 物 來 獻 。 上 宴之 , 遂 定 和 議 , 大 市 於 張 家 口 。 科 爾 沁 部 兵 三 人 潛 入 明邊 , 盜 牛 驢 , 斬 其 首 者 , 鞭 二 人 , 貫 耳 以 徇 。 甲 午 , 明巡 撫 沈 棨 遣 使 來 請 盟 。 命 大 臣 阿 什 達 爾 哈 等 蒞 之 , 刑 白馬 烏 牛 , 誓 告 天 地 。 禮 成 , 遣 啟 心 郎 祁 充 格 送 明 使 歸 。明 以 金 幣 來 獻 。 晉 封 皇 子 豪 格 為 和 碩 貝 勒 。 是 月 , 遼 東大 水 。
秋 七 月 丁 酉 朔 , 復 以 書 約 明 張 家 口 守 臣 信 誓 敦 好, 善 保 始 終 , 且 謂 和 議 遼 東 地 方 在 內 , 爾 須 遣 官 往 告 。上 率 大 軍 還 。 庚 子 , 至 上 都 河 , 明 以 和 議 成 , 來 餽 禮 物, 酌 納 之 。 辛 丑 , 蒙 古 諸 貝 勒 辭 歸 。 庚 戌 , 次 擺 斯 哈 兒。 游 擊 巴 克 什 達 海 卒 。 庚 申 , 上 還 瀋 陽 。
八 月 丁 卯 , 召 明 諸 生 王 文 奎 、 孫 應 時 、 江 雲 入 宮, 問 以 和 事 成 否 。 三 人 皆 言 , 明 政 日 紊 , 和 議 難 必 。 且中 原 盜 賊 蜂 起 , 人 民 離 亂 。 勸 上 宣 布 仁 義 , 用 賢 養 民 ,乘 時 弔 伐 , 以 應 天 心 。 癸 酉 , 六 部 署 成 , 頒 銀 印 各 一 。甲 午 , 命 固 山 額 真 察 民 疾 苦 , 清 理 刑 獄 。 察 哈 爾 檮 納 楚虎 爾 來 歸 。
九 月 癸 卯 , 修 復 蓋 州 城 , 移 民 實 之 。 甲 寅 , 命 戶部 貝 勒 德 格 類 、 兵 部 貝 勒 岳 託 展 耀 州 舊 界 至 蓋 州 迤 南 。
冬 十 月 乙 丑 朔 , 幸 開 原 。 甲 戌 , 還 瀋 陽 。 遣 衛 徵囊 蘇 喇 嘛 赴 寧 遠 , 賚 書 致 明 帝 曰 : 「 我 國 稱 兵 , 非 不 知足 而 冀 大 位 , 因 邊 臣 欺 侮 , 致 啟 兵 釁 。 往 征 察 哈 爾 時 ,過 宣 府 定 和 議 , 我 遂 執 越 境 盜 竊 之 人 戮 之 塞 下 , 我 之 誠心 可 謂 至 矣 。 前 邊 臣 未 能 細 述 , 今 欲 備 言 , 又 恐 疑 我 不忘 舊 怨 , 如 遣 信 使 來 , 將 盡 告 之 。 若 謂 已 和 , 不 必 語 及往 事 , 亦 惟 命 。 」 又 與 明 諸 臣 書 曰 : 「 宣 府 守 臣 與 我 盟時 , 約 我 毋 侵 遼 東 , 誓 諸 天 地 。 今 爾 乃 有 異 議 , 天 可 欺乎 ? 執 政 大 臣 宜 通 權 變 , 慎 勿 徒 事 大 言 , 坐 失 事 機 。 若堅 執 不 從 , 惟 尋 師 旅 , 生 靈 荼 毒 , 咎 將 誰 歸 ? 」
十 一 月 壬 寅 , 明 寧 遠 守 臣 以 我 所 遺 書 封 固 , 不 敢以 陳 , 請 露 封 , 許 之 。 辛 亥 , 阿 祿 部 都 思 噶 爾 濟 農 所 屬祁 他 特 吹 虎 爾 台 吉 來 附 。 壬 子 , 遣 使 往 朝 鮮 定 歲 貢 額 。
十 二 月 乙 丑 , 定 朝 服 及 官 民 常 服 制 。 三 貝 勒 莽 古爾 泰 卒 。 乙 亥 , 吳 巴 海 征 兀 札 喇 遣 使 告 捷 。
七 年 春 正 月 庚 子 , 諭 各 牛 彔 額 真 以 恤 貧 訓 農 習 射。 辛 丑 , 朝 鮮 來 貢 , 不 及 額 。 丁 未 , 復 書 責 之 。 戊 申 ,皇 長 女 下 嫁 敖 漢 部 貝 勒 都 喇 爾 巴 圖 魯 子 台 吉 班 第 。 乙 卯, 征 兀 札 喇 師 還 。
二 月 癸 亥 朔 , 阿 魯 科 爾 沁 汗 車 根 率 固 木 巴 圖 魯 、達 爾 馬 代 袞 等 舉 國 來 附 。 己 卯 , 庫 爾 纏 有 罪 , 誅 。 癸 未, 土 魯 什 、 勞 薩 等 略 寧 遠 。
三 月 丁 酉 , 築 場 、 攬 盤 、 通 遠 堡 、 岫 巖 四 城 。辛 丑 , 郭 爾 羅 斯 部 台 吉 固 木 來 朝 。 丙 辰 , 明 故 總 兵 毛 文龍 部 將 孔 有 德 、 耿 仲 明 遣 使 來 約 降 。
夏 四 月 乙 丑 , 察 哈 爾 兩 翼 大 總 管 塔 什 海 虎 魯 克 寨桑 來 附 。 乙 亥 , 使 參 將 英 俄 爾 岱 等 借 糧 朝 鮮 濟 孔 有 德 軍, 不 從 。
五 月 乙 未 , 吳 喇 忒 台 吉 土 門 達 爾 漢 等 來 朝 。 壬 子, 貝 勒 濟 爾 哈 朗 、 阿 濟 格 、 杜 度 率 兵 迎 孔 有 德 、 耿 仲 明於 鎮 江 , 命 率 所 部 駐 東 京 。
六 月 壬 戌 , 諭 將 士 毋 侵 擾 遼 東 新 附 人 民 , 違 者 孥戮 之 。 癸 亥 , 召 孔 有 德 、 耿 仲 明 入 覲 , 厚 賚 之 。 丙 寅 ,遣 英 俄 爾 岱 遺 朝 鮮 王 書 曰 :「
往 之 借 糧 , 貴 國 王 以 孔 有 德 等 昔 隸 毛 氏 , 無 輸 糧 養 敵之 理 。 今 有 德 歸 我 , 糧 已 足 給 。 惟 兵 卒 守 船 , 輓 運 維 艱, 近 距 貴 國 , 以 糧 給 之 甚 便 。 朕 思 王 視 明 為 父 , 視 朕 為兄 , 父 兄 相 爭 數 年 , 而 王 坐 觀 成 敗 , 是 外 有 父 兄 之 名 ,而 內 懷 幸 禍 之 意 。 若 力 為 解 勸 , 息 兵 成 好 , 不 惟 我 兩 國樂 見 太 平 , 即 貴 國 亦 受 其 福 。 若 仍 以 兵 助 明 , 合 而 禦 我, 則 搆 兵 實 自 王 始 。 」 己 巳 , 諭 官 民 冠 服 遵 制 畫 一 。 癸酉 , 以 孔 有 德 為 都 元 帥 , 耿 仲 明 為 總 兵 官 , 並 賜 敕 印 。戊 寅 , 英 俄 爾 岱 奏 報 朝 鮮 用 明 人 計 , 借 兵 倭 國 , 又 於 義州 南 嶺 築 城 備 我 。 集 諸 貝 勒 大 臣 議 之 , 皆 言 宜 置 朝 鮮 而伐 明 。 己 卯 , 貝 勒 岳 託 、 德 格 類 率 右 翼 楞 額 禮 、 葉 臣 ,左 翼 伊 爾 登 、 昂 阿 喇 及 石 廷 柱 、 孔 有 德 、 耿 仲 明 將 兵 取明 旅 順 口 。 甲 申 , 東 海 使 犬 部 額 駙 僧 格 來 朝 貢 。 丁 亥 ,諭 曰 : 「 凡 進 言 者 , 如 朕 所 行 未 協 於 義 , 宜 直 言 勿 諱 。政 事 或 有 愆 忌 , 宜 開 陳 無 隱 。 六 部 諸 臣 , 奸 偽 貪 邪 , 行事 不 公 , 宜 行 糾 劾 。 諸 臣 有 艱 苦 之 情 , 亦 據 實 奏 聞 。 苟不 務 直 言 , 遠 引 曲 喻 , 勦 襲 紛 然 , 何 益 於 事 ? 」
秋 七 月 辛 卯 朔 , 諭 滿 洲 各 戶 有 漢 人 十 丁 者 授 棉 甲一 , 以 舊 漢 軍 額 真 馬 光 遠 統 之 。 壬 辰 , 阿 祿 部 孫 杜 稜 子台 吉 古 木 思 轄 布 , 寨 桑 吳 巴 什 、 阿 什 圖 、 巴 達 爾 和 碩 齊等 , 吳 喇 忒 部 台 吉 阿 巴 噶 爾 代 皆 來 朝 貢 。 甲 辰 , 貝 勒 岳託 等 奏 克 旅 順 口 。
八 月 庚 申 朔 , 英 俄 爾 岱 等 自 朝 鮮 還 , 以 復 書 允 糧濟 我 守 船 軍 士 。 壬 戌 , 貝 勒 阿 巴 泰 、 阿 濟 格 、 薩 哈 廉 、豪 格 等 略 明 山 海 關 外 。 庚 辰 , 貝 勒 德 格 類 、 岳 託 師 還 。丁 亥 , 以 副 將 石 廷 柱 為 總 兵 官 。
九 月 庚 子 , 貝 勒 阿 巴 泰 等 師 還 。 上 以 其 不 深 入 ,責 之 。 癸 卯 , 英 俄 爾 岱 等 往 朝 鮮 互 市 。 庚 戌 , 明 登 州 都司 蔡 賓 等 來 降 。
冬 十 月 壬 戌 , 遣 使 外 藩 蒙 古 各 部 , 宣 布 法 令 。 丙寅 , 大 閱 。 丁 卯 , 發 帑 賚 八 旗 步 兵 。 己 巳 , 諭 曰 : 「 置官 以 來 , 吏 、 戶 、 兵 三 部 辦 事 盡 善 , 刑 部 訊 獄 稽 延 , 罔得 實 情 , 禮 部 、 工 部 皆 有 缺 失 。 夫 啟 心 郎 之 設 , 欲 其 隨事 規 諫 , 啟 乃 心 也 。 乃 有 差 謬 而 不 聞 開 導 , 何 耶 ? 」 又曰 : 「 爾 等 動 以 航 海 取 山 東 攻 山 海 關 為 言 。 航 海 多 險 ,攻 堅 易 傷 , 是 以 空 言 相 賺 , 不 啻 為 敵 計 耳 。 兵 事 無 藉 爾言 , 惟 朕 與 諸 貝 勒 有 過 , 當 極 言 耳 。 」 又 諭 文 館 諸 儒 臣曰 : 「 太 祖 始 命 巴 克 什 額 爾 德 尼 造 國 書 , 後 庫 爾 纏 增 之。 慮 有 未 合 , 爾 等 職 司 紀 載 , 宜 悉 心 訂 正 。 朕 嗣 大 位 ,凡 皇 考 行 政 用 兵 之 大 , 不 一 一 詳 載 , 後 世 子 孫 何 由 而 知, 豈 朕 所 以 盡 孝 道 乎 ? 」 丙 子 , 授 明 降 將 馬 光 遠 為 總 兵官 , 王 世 選 、 麻 登 雲 為 三 等 總 兵 官 , 馬 光 先 、 孟 喬 芳 等各 授 職 有 差 。 癸 未 , 明 廣 鹿 島 副 將 尚 可 喜 遣 使 來 約 降 。
十 一 月 甲 辰 , 英 俄 爾 岱 復 賚 書 往 朝 鮮 , 責 以 違 約十 事 。 戊 申 , 遣 季 思 哈 、 吳 巴 海 往 征 朝 鮮 接 壤 之 虎 爾 哈部 。 辛 亥 , 上 獵 於 葉 赫 。
十 二 月 辛 未 , 上 還 瀋 陽 。
八 年 春 正 月 庚 寅 , 諭 蒙 古 諸 貝 勒 令 遵 我 國 定 制 。黑 龍 江 羌 圖 里 、 嘛 爾 干 率 六 姓 來 朝 貢 。 癸 巳 , 詔 宗 人 自興 祖 直 皇 帝 出 者 為 六 祖 後 , 免 其 徭 役 。 乙 未 , 正 黃 旗 都統 、 一 等 總 兵 官 楞 額 禮 卒 。 癸 卯 , 漢 備 禦 訴 漢 人 徭 役 重於 滿 洲 , 戶 部 貝 勒 德 格 類 以 聞 。 上 命 禮 部 貝 勒 薩 哈 廉 集眾 諭 其 妄 。 漢 總 兵 官 石 廷 柱 等 執 備 禦 八 人 請 罪 , 上 曰 :「 若 加 以 罪 , 則 後 無 復 言 者 。 」 並 釋 之 。 戊 申 , 塔 布 囊等 征 察 哈 爾 潰 眾 於 席 爾 哈 、 席 伯 圖 。 己 酉 , 蒿 齊 忒 部 台吉 額 林 臣 來 歸 。 丁 巳 , 免 功 臣 身 故 無 嗣 者 丁 之 半 , 妻 故始 應 役 , 著 為 令 。
二 月 壬 戌 , 定 喪 祭 例 , 妻 殉 夫 者 聽 , 仍 予 旌 表 ;逼 妾 殉 者 , 妻 坐 死 。 遣 貝 勒 多 爾 袞 、 薩 哈 廉 往 迎 降 將 尚可 喜 , 使 駐 海 州 。 丁 卯 , 都 元 帥 孔 有 德 劾 耿 仲 明 不 法 狀, 諭 解 之 。 戊 辰 , 遣 阿 山 等 略 錦 州 。
三 月 丁 亥 朔 , 日 有 食 之 , 綠 虹 見 。 辛 卯 , 命 譚 泰、 圖 爾 格 略 錦 州 。 壬 辰 , 副 將 尚 可 喜 率 三 島 官 民 降 , 駐海 州 。 己 亥 , 大 閱 。 甲 辰 , 遣 英 俄 爾 岱 往 朝 鮮 互 市 。 令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幟 用 白 鑲 皂 , 以 別 八 旗 。 壬 子, 考 試 漢 生 員 。
夏 四 月 辛 酉 , 升 授 太 祖 諸 子 湯 古 代 等 副 將 、 參 將、 備 禦 有 差 。 又 以 哈 達 、 烏 喇 二 部 之 後 無 顯 職 , 授 哈 達克 什 內 為 副 將 , 烏 喇 巴 彥 為 三 等 副 將 。 詔 以 瀋 陽 為 「 天眷 盛 京 」 , 赫 圖 阿 喇 城 為 「 天 眷 興 京 」 。 改 定 總 兵 、 副將 、 參 將 、 游 擊 、 備 禦 滿 字 官 名 。 丁 丑 , 尚 可 喜 來 朝 ,命 為 總 兵 官 。 乙 亥 , 以 太 祖 弟 之 子 拜 尹 圖 為 總 管 。 辛 巳, 初 命 禮 部 考 試 滿 洲 、 漢 人 通 滿 、 漢 、 蒙 古 書 義 者 , 取剛 林 等 十 六 人 為 舉 人 , 賜 衣 一 襲 , 免 四 丁 。 乙 酉 , 金 繼孟 等 自 明 石 城 島 來 降 , 以 隸 尚 可 喜 。
五 月 丙 戌 朔 , 黑 龍 江 巴 爾 達 齊 來 貢 。 庚 寅 , 察 哈爾 台 吉 毛 祁 他 特 來 朝 。 定 滿 、 漢 馬 步 軍 名 。 丙 申 , 議 征明 , 諸 貝 勒 請 從 山 海 關 入 。 上 曰 : 「 不 然 , 察 哈 爾 為 我軍 所 敗 , 其 貝 勒 大 臣 將 歸 我 , 宜 直 趨 宣 、 大 以 逆 之 。 」乃 集 各 都 統 部 署 軍 政 , 遣 國 舅 阿 什 達 爾 哈 徵 科 爾 沁 兵 ,以 書 招 撫 遺 眾 之 在 明 境 者 。 壬 寅 , 定 百 官 功 次 , 賜 敕 書, 其 世 襲 及 官 止 本 身 者 , 分 別 開 載 有 差 。 甲 辰 , 季 思 哈、 吳 巴 海 征 虎 爾 哈 部 奏 捷 。 命 貝 勒 濟 爾 哈 朗 留 守 盛 京 ,貝 勒 杜 度 守 海 州 , 吏 部 承 政 圖 爾 格 等 渡 遼 河 , 沿 張 古 臺河 駐 防 , 並 扼 敵 兵 , 俱 授 方 略 。 畢 , 上 率 大 軍 前 發 。 己酉 , 次 都 爾 鼻 , 諸 蒙 古 外 藩 兵 以 次 來 會 。 甲 寅 , 次 訥 里特 河 。
六 月 辛 酉 , 頒 軍 令 於 蒙 古 諸 貝 勒 及 孔 有 德 、 耿 仲明 、 尚 可 喜 , 曰 : 「 行 軍 時 勿 離 纛 , 勿 諠 譁 , 勿 私 出 劫掠 。 抗 拒 者 誅 之 , 歸 順 者 字 之 。 勿 毀 廟 宇 , 勿 殺 行 人 ,勿 奪 人 衣 服 , 勿 離 人 夫 婦 , 勿 淫 人 婦 女 。 違 者 治 罪 。 」先 是 , 察 哈 爾 林 丹 西 奔 圖 白 特 , 其 部 眾 苦 林 丹 暴 虐 , 逗遛 者 什 七 八 , 食 盡 , 殺 人 相 食 , 屠 劫 不 已 , 潰 散 四 出 。至 是 , 絡 繹 來 附 者 前 後 數 千 戶 。 辛 未 , 次 庫 黑 布 里 都 ,議 覺 羅 布 爾 吉 、 英 俄 爾 岱 擅 殺 察 哈 爾 布 顏 圖 部 眾 罪 , 並奪 其 賜 。 甲 戌 , 次 喀 喇 拖 落 木 , 命 貝 勒 德 格 類 率 兵 入 獨石 口 , 偵 居 庸 關 , 期 會 師 於 朔 州 。 戊 寅 , 諭 蒙 古 諸 貝 勒曰 : 「 科 爾 沁 噶 爾 珠 塞 特 爾 等 叛 往 索 倫 , 為 其 族 兄 弟 等追 獲 被 殺 , 朕 心 惻 然 。 朕 欲 宣 布 德 化 , 使 人 民 共 登 安 樂。 今 諸 貝 勒 雖 以 罪 誅 , 亦 朕 教 化 所 未 洽 也 。 」 又 命 減 阿魯 部 達 喇 海 等 越 界 駐 牧 罪 。 壬 午 , 察 哈 爾 土 巴 濟 農 率 其民 千 戶 來 歸 。 喀 爾 喀 部 巴 噶 達 爾 漢 來 歸 。 甲 申 , 命 大 貝勒 代 善 等 率 兵 入 得 勝 堡 , 略 大 同 , 西 至 黃 河 , 副 都 統 土魯 什 、 吳 拜 等 逕 歸 化 撫 察 哈 爾 逃 民 , 俱 會 師 朔 州 。
秋 七 月 己 丑 , 命 貝 勒 阿 濟 格 、 多 爾 袞 、 多 鐸 等 入龍 門 , 會 宣 府 , 上 親 統 大 軍 自 宣 府 趨 朔 州 , 期 四 路 兵 剋期 並 進 。 辛 卯 , 毀 邊 牆 。 壬 辰 , 入 上 方 堡 , 至 宣 府 右 衛, 以 書 責 明 守 臣 負 盟 之 罪 , 仍 諭 其 遣 使 議 和 。 癸 巳 , 駐城 東 南 。 時 阿 濟 格 攻 龍 門 , 未 下 , 令 略 保 安 。 丁 酉 , 營東 城 , 遺 明 代 王 書 , 復 約 其 遣 使 議 和 。 代 善 攻 得 勝 堡 ,克 之 。 明 參 將 李 全 自 縊 死 。 進 攻 懷 仁 、 井 坪 , 皆 不 克 ,遂 駐 朔 州 。 丙 午 , 上 圍 應 州 , 令 代 善 等 趣 馬 邑 。 土 魯 什至 歸 化 城 , 察 哈 爾 林 丹 之 妻 率 其 八 寨 桑 以 一 千 二 百 戶 來降 。 庚 戌 , 阿 濟 格 等 攻 保 安 州 , 克 之 。 壬 子 , 德 格 類 入獨 石 口 , 取 長 安 嶺 , 攻 赤 城 , 不 克 , 俱 會 師 於 應 州 。
八 月 乙 卯 , 命 諸 將 略 代 州 。 薩 哈 廉 襲 崞 縣 , 拔 之。 丙 辰 , 碩 托 入 圓 平 驛 。 甲 子 , 阿 巴 泰 等 取 靈 丘 縣 之 王家 莊 , 克 之 。 禮 部 承 政 巴 都 禮 戰 歿 。 又 攻 應 州 之 石 家 村堡 , 克 之 。 丙 寅 , 上 發 應 州 , 聞 明 陽 和 總 督 張 宗 衡 、 大同 總 兵 曹 文 詔 駐 懷 仁 , 度 是 夜 必 奔 大 同 , 令 土 魯 什 、 吳拜 伏 兵 邀 之 。 師 行 遲 , 宗 衡 等 逸 去 。 上 怒 責 之 。 戊 辰 ,上 至 大 同 , 遺 書 文 詔 , 令 贊 和 議 。 又 遺 書 眾 官 , 索 察 哈爾 餘 孽 之 在 明 者 。 文 詔 挑 戰 , 擊 敗 之 。 貝 勒 阿 巴 泰 等 拔靈 丘 。 明 代 王 母 楊 氏 與 張 宗 衡 、 曹 文 詔 以 書 來 請 和 。 辛未 , 遣 使 以 書 報 之 。 壬 申 , 代 善 率 師 來 會 。 癸 酉 , 駐 師大 同 , 遣 明 宗 室 朱 乃 廷 及 俘 獲 僧 人 入 城 。 三 索 報 書 , 俱不 答 。 縱 乃 廷 妻 子 及 朱 乃 振 還 。 丁 丑 , 營 四 十 里 鋪 , 得明 間 諜 書 北 樓 口 , 為 書 報 之 曰 : 「 來 書 以 滿 洲 為 屬 國 ,即 予 亦 未 嘗 以 為 非 也 。 惟 遼 東 之 官 欺 凌 我 國 , 皇 帝 惑 於臣 下 之 誑 , 雖 干 戈 十 數 年 來 , 無 一 言 詢 及 , 使 我 國 之 情不 達 , 若 遣 一 信 使 判 白 是 非 , 則 兵 戈 早 息 矣 。 欲 享 太 平, 只 旦 暮 間 事 。 不 然 , 爾 國 臣 僚 壅 蔽 欺 罔 , 虛 報 斬 伐 ,以 吾 小 國 果 受 傷 夷 , 詎 能 數 侵 , 豈 皇 帝 之 聰 明 獨 不 能 一忖 度 耶 ? 願 和 之 誠 , 黑 雲 龍 自 知 之 , 慮 其 恐 結 怨 於 大 臣不 盡 告 耳 。 」 己 卯 , 大 軍 至 陽 和 。 明 總 兵 曹 文 詔 詭 以 書誑 張 宗 衡 , 偽 言 砲 傷 我 兵 , 得 纛 一 桿 等 語 , 為 我 邏 者 所獲 。 上 乃 遺 宗 衡 書 曰 : 「 予 謂 爾 明 當 有 忠 臣 義 士 實 心 謀國 者 , 乃 一 旦 虛 誑 至 此 , 豈 不 愧 於 心 乎 ? 今 與 公 等 約 ,我 兵 以 一 當 十 , 能 約 期 出 戰 , 當 勒 兵 以 俟 。 若 誑 言 欺 君, 貽 害 生 靈 , 禍 櫱 將 無 窮 矣 。 」 壬 午 , 次 懷 遠 。 癸 未 ,駐 左 衛 。
閏 八 月 丙 戌 , 以 書 責 明 宣 府 太 監 欺 君 誤 國 罪 。 丁亥 , 副 都 統 土 魯 什 被 創 卒 。 攻 萬 全 左 衛 , 克 之 。 庚 寅 ,班 師 。 察 哈 爾 噶 爾 馬 濟 農 等 遣 使 乞 降 , 言 其 汗 林 丹 病 殂, 汗 子 及 國 人 皆 欲 來 歸 , 於 是 命 阿 什 達 爾 哈 等 往 偵 之 。丁 酉 , 移 軍 舊 上 都 城 。 庚 戌 , 移 軍 克 蚌 。 辛 亥 , 察 哈 爾寨 桑 噶 爾 馬 濟 農 等 率 其 國 人 六 千 奉 豆 土 門 福 金 來 歸 。
九 月 戊 辰 , 留 守 貝 勒 濟 爾 哈 朗 疏 報 季 思 哈 、 吳 巴海 征 虎 爾 哈 俘 一 千 三 百 餘 人 。 阿 魯 部 毛 明 安 舉 國 來 附 。辛 未 , 渡 遼 河 。 壬 申 , 上 還 盛 京 。
冬 十 月 己 丑 , 建 太 祖 陵 寢 殿 , 樹 松 , 立 石 獸 。 壬辰 , 論 征 宣 、 大 將 士 功 罪 。 己 亥 , 科 爾 沁 台 吉 吳 克 善 來歸 其 妹 , 納 之 。 庚 戌 , 以 八 年 征 討 克 捷 , 為 文 告 太 祖 。壬 子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以 書 來 。 上 以 其 言 不 遜 , 復 書切 責 之 。
十 一 月 乙 丑 , 六 部 官 考 績 陞 授 有 差 。
十 二 月 癸 未 朔 , 朝 鮮 國 王 以 書 來 謝 罪 。 壬 辰 , 命副 都 統 霸 奇 蘭 、 參 領 薩 木 什 喀 征 黑 龍 江 未 服 之 地 。 丙 申, 分 定 宗 室 、 額 駙 等 專 管 佐 領 有 差 。 丁 酉 , 墨 勒 根 喇 嘛以 嘛 哈 噶 喇 金 像 來 貢 , 遣 使 迎 至 盛 京 。 癸 卯 , 察 哈 爾 祁他 特 車 爾 貝 、 塞 冷 布 都 馬 爾 等 各 率 所 部 人 民 來 歸 。 遣 吳巴 海 、 荊 古 爾 代 征 瓦 爾 喀 。 甲 辰 , 佐 領 劉 學 誠 疏 請 立 郊壇 , 勤 視 朝 。 上 曰 : 「 疏 中 欲 朕 視 朝 勤 政 是 也 。 至 建 立郊 壇 , 未 知 天 意 所 在 , 何 敢 遽 行 , 果 成 大 業 , 彼 時 議 之未 晚 也 。 」
九 年 春 正 月 丁 卯 , 上 親 送 科 爾 沁 土 謝 圖 濟 農 等 歸國 。 癸 酉 , 免 功 臣 徭 役 。 丁 丑 , 詔 太 祖 庶 子 稱 「 阿 格 」, 六 祖 子 孫 稱 「 覺 羅 」 , 覺 羅 繫 紅 帶 以 別 之 。 有 詈 其 祖父 者 罪 至 死 。
二 月 壬 午 , 令 諸 臣 薦 舉 居 心 公 正 及 通 曉 文 藝 可 任使 者 。 丁 亥 , 編 喀 喇 沁 部 蒙 古 壯 丁 為 十 一 旗 , 每 旗 設 都統 一 員 , 下 以 副 都 統 、 參 領 二 員 統 之 。 戊 子 , 諭 曰 : 「邇 來 進 言 者 皆 請 伐 明 , 朕 豈 不 以 為 念 。 然 亦 須 相 機 而 行。 今 察 哈 爾 新 附 , 人 心 未 輯 , 城 郭 未 修 , 而 輕 於 出 師 ,何 以 成 大 業 。 且 大 兵 一 舉 , 明 主 或 棄 而 走 , 或 懼 而 請 和, 攻 拒 之 策 , 何 者 為 宜 ? 其 令 高 鴻 中 、 鮑 承 先 、 寧 完 我、 范 文 程 等 酌 議 以 聞 。 」 己 丑 , 沈 佩 瑞 請 屯 田 廣 寧 、 閭陽 , 造 舟 輓 粟 , 為 進 取 計 。 上 嘉 納 之 。 乙 未 , 范 文 程 、寧 完 我 請 薦 舉 不 實 宜 行 連 坐 法 。 丁 未 , 命 多 爾 袞 、 岳 託、 豪 格 、 薩 哈 廉 將 精 騎 一 萬 , 收 察 哈 爾 林 丹 之 子 額 爾 克孔 果 爾 額 哲 。
三 月 戊 辰 , 諭 曰 : 「 頃 民 耕 耨 愆 期 , 蓋 由 佐 領 有事 築 城 , 民 苦 煩 役 所 致 。 嗣 有 濫 役 妨 農 者 治 其 罪 。 」 庚午 , 察 哈 爾 寨 桑 巴 賴 都 爾 等 一 千 四 百 餘 人 來 歸 。
五 月 乙 卯 , 霸 奇 蘭 、 薩 木 什 喀 征 黑 龍 江 虎 爾 哈 部, 盡 克 其 地 , 編 所 獲 人 口 以 歸 , 論 功 陞 賞 有 差 。 癸 亥 ,上 以 西 征 諸 貝 勒 經 宣 、 大 境 , 度 明 必 調 寧 、 錦 兵 往 援 ,遣 貝 勒 多 鐸 率 師 入 寧 、 錦 撓 之 。 己 巳 , 命 文 館 譯 宋 、 遼、 金 、 元 四 史 。 壬 申 , 貝 勒 多 鐸 奏 報 殲 明 兵 五 百 人 於 錦州 松 山 城 外 , 殺 其 副 將 劉 應 選 。 丙 子 , 貝 勒 多 爾 袞 、 岳託 、 薩 哈 廉 、 豪 格 等 奏 報 兵 至 西 喇 朱 爾 格 , 遇 察 哈 爾 囊囊 太 妃 暨 台 吉 瑣 諾 木 等 以 一 千 五 百 戶 降 , 遂 抵 額 爾 克 孔果 爾 額 哲 所 居 , 其 母 率 額 哲 迎 降 。
六 月 乙 酉 , 貝 勒 多 鐸 凱 旋 , 賜 良 馬 五 , 賞 從 征 將士 有 差 。 丁 酉 , 吳 巴 海 、 荊 古 爾 代 師 還 , 論 功 亦 如 之 。明 登 州 黃 城 島 千 總 李 進 功 來 降 。 辛 丑 , 諭 曰 : 「 太 祖 以人 民 付 朕 , 當 愛 養 之 。 諸 貝 勒 非 時 修 繕 , 勞 苦 百 姓 , 民不 得 所 , 寖 以 逃 亡 , 是 違 先 志 而 長 敵 寇 也 。 今 朝 鮮 賓 服, 察 哈 爾 舉 國 來 附 , 苟 不 能 撫 輯 其 眾 , 後 雖 拓 地 , 何 以處 之 ? 貝 勒 大 臣 其 各 戢 驕 縱 以 副 朕 意 ! 」 壬 寅 , 察 哈 爾台 吉 瑣 諾 木 率 其 屬 六 千 八 百 人 來 歸 。 癸 卯 , 諭 曰 : 「 太祖 禁 貝 勒 子 弟 郊 外 放 鷹 , 慮 其 踐 田 園 、 擾 牲 畜 也 。 今 違者 日 眾 。 語 曰 : 『 涓 涓 不 塞 , 將 成 江 河 。 』 其 嚴 禁 之 。」
秋 七 月 癸 酉 , 論 漢 人 丁 戶 增 減 , 擢 參 領 李 思 忠 等六 員 官 , 高 鴻 中 等 十 一 員 黜 罰 有 差 。
八 月 庚 辰 , 貝 勒 多 爾 袞 、 岳 託 、 薩 哈 廉 、 豪 格 以獲 傳 國 玉 璽 聞 。 先 是 元 順 帝 北 狩 , 以 璽 從 , 後 失 之 。 越二 百 餘 年 , 為 牧 羊 者 所 獲 。 後 歸 於 察 哈 爾 林 丹 汗 。 林 丹亦 元 裔 也 。 璽 在 蘇 泰 太 妃 所 。 至 是 獻 之 。 時 岳 託 以 疾 留歸 化 城 , 多 爾 袞 等 率 兵 略 明 山 西 , 自 平 虜 衛 入 邊 , 毀 長城 , 略 忻 州 、 代 州 , 至 崞 縣 。 甲 申 , 繪 太 祖 實 錄 圖 成 。乙 巳 , 上 率 大 貝 勒 代 善 及 諸 貝 勒 多 爾 袞 等 師 次 平 虜 堡 。丁 未 , 渡 遼 河 , 閱 巨 流 河 城 堡 。
九 月 癸 丑 , 貝 勒 多 爾 袞 等 師 還 , 獻 玉 璽 , 告 天 受之 。 額 爾 克 孔 果 爾 額 哲 及 其 母 來 朝 。 庚 午 , 上 還 宮 。 壬申 , 召 諸 貝 勒 大 臣 數 代 善 罪 。 眾 議 削 大 貝 勒 號 及 和 碩 貝勒 , 奪 十 佐 領 , 其 子 薩 哈 廉 奪 二 佐 領 , 哈 達 公 主 降 庶 人, 褫 其 夫 瑣 諾 木 濟 農 爵 號 。 上 皆 免 之 。
冬 十 月 己 卯 , 以 明 議 和 不 成 , 將 進 兵 , 遣 使 賚 書諭 明 喜 峰 口 、 董 家 口 諸 邊 將 。 管 戶 部 事 和 碩 貝 勒 德 格 類卒 。 癸 未 , 命 吳 巴 海 、 多 濟 里 、 札 福 尼 、 吳 什 塔 分 將 四路 兵 征 瓦 爾 喀 。
十 一 月 丁 未 朔 , 命 額 爾 克 孔 果 爾 額 哲 奉 母 居 孫 島習 爾 哈 。
十 二 月 辛 巳 , 哈 達 公 主 莽 古 濟 之 僕 冷 僧 機 首 告 貝勒 莽 古 爾 泰 生 時 與 女 弟 莽 古 濟 、 弟 德 格 類 謀 逆 , 公 主 之夫 瑣 諾 木 及 屯 布 祿 、 愛 巴 禮 與 其 事 。 會 瑣 諾 木 亦 自 首 。訊 得 實 , 莽 古 濟 、 莽 古 爾 泰 子 額 必 倫 及 屯 布 祿 、 愛 巴 禮皆 伏 誅 。 莽 古 爾 泰 餘 子 、 德 格 類 子 俱 為 庶 人 。 瑣 諾 木 自首 免 罪 。 授 冷 僧 機 三 等 副 將 。 丁 酉 , 謁 太 祖 陵 。 甲 辰 ,貝 勒 薩 哈 廉 與 諸 貝 勒 及 大 貝 勒 代 善 盟 誓 , 請 上 尊 號 。 上不 許 。 會 蒙 古 貝 勒 復 來 請 。 上 曰 : 「 朝 鮮 兄 弟 國 , 宜 告之 。 」
十 年 春 正 月 壬 戌 , 皇 次 女 下 嫁 額 爾 克 孔 果 爾 額 哲。
二 月 丁 丑 , 八 和 碩 貝 勒 與 外 藩 四 十 九 貝 勒 各 遺 書朝 鮮 , 約 其 國 王 勸 進 尊 號 。 戊 子 , 遣 使 至 明 邊 松 棚 路 、潘 家 口 、 董 家 口 、 喜 峰 口 、 賚 書 致 明 帝 , 索 其 報 書 。 定諸 臣 帽 頂 飾 。 庚 寅 , 寧 完 我 以 罪 免 。
三 月 丙 午 朔 , 清 明 節 , 謁 太 祖 陵 。 辛 亥 , 改 文 館為 內 國 史 、 內 祕 書 、 內 弘 文 三 院 。 乙 卯 , 遣 貝 勒 阿 濟 格、 阿 巴 泰 築 噶 海 城 。 庚 申 , 吳 什 塔 等 征 瓦 爾 喀 , 遣 使 奏捷 。 諭 曰 : 「 蒙 古 深 信 喇 嘛 , 實 乃 妄 人 。 嗣 後 有 懸 轉 輪結 布 旛 者 , 宜 禁 止 之 。 」 乙 丑 , 英 俄 爾 岱 等 自 朝 鮮 還 ,言 國 王 李 倧 不 接 見 , 亦 不 納 書 , 以 其 報 書 及 所 獲 倧 諭 邊臣 書 進 。 諸 貝 勒 怒 , 欲 加 兵 。 上 曰 : 「 姑 遣 人 諭 以 利 害, 質 其 子 弟 , 不 從 , 興 兵 未 晚 也 。 」 丁 卯 , 外 藩 蒙 古 十六 國 四 十 九 貝 勒 及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俱 以 請 上 尊號 至 盛 京 。
夏 四 月 己 卯 , 大 貝 勒 代 善 , 和 碩 貝 勒 濟 爾 哈 朗 、多 爾 袞 、 多 鐸 、 岳 託 、 豪 格 、 阿 巴 泰 、 阿 濟 格 、 杜 度 率滿 、 漢 、 蒙 古 大 臣 及 蒙 古 十 六 國 四 十 九 貝 勒 以 三 體 表 文詣 闕 請 上 尊 號 曰 : 「 恭 維 我 皇 上 承 天 眷 祐 , 應 運 而 興 。當 天 下 昏 亂 , 修 德 體 天 , 逆 者 威 , 順 者 撫 , 寬 溫 之 譽 ,施 及 萬 姓 。 征 服 朝 鮮 , 混 一 蒙 古 。 遂 獲 玉 璽 , 受 命 之 符, 昭 然 可 見 , 上 揆 天 意 , 下 協 輿 情 。 臣 等 謹 上 尊 號 , 儀物 俱 備 , 伏 願 俞 允 。 」 上 曰 : 「 爾 貝 勒 大 臣 勸 上 尊 號 ,歷 二 年 所 。 今 再 三 固 請 , 朕 重 違 爾 諸 臣 意 , 弗 獲 辭 。 朕既 受 命 , 國 政 恐 有 未 逮 , 爾 等 宜 恪 恭 贊 襄 。 」 群 臣 頓 首謝 。 庚 辰 , 禮 部 進 儀 注 。 壬 午 , 齋 戒 , 設 壇 德 盛 門 外 。
清 史 稿 卷 三
本 紀 三
太 宗 本 紀 二
崇 德 元 年(1636년) 夏 四 月 乙 酉 , 祭 告 天 地 , 行 受 尊 號 禮 , 定有 天 下 之 號 曰 大 清 , 改 元 崇 德 , 群 臣 上 尊 號 曰 寬 溫 仁 聖皇 帝 , 受 朝 賀 。 始 定 祀 天 太 牢 用 熟 薦 。 遣 官 以 建 太 廟 追尊 列 祖 祭 告 山 陵 。 丙 戌 , 追 尊 始 祖 為 澤 王 , 高 祖 為 慶 王, 曾 祖 為 昌 王 , 祖 為 福 王 , 考 諡 曰 承 天 廣 運 聖 德 神 功 肇紀 立 極 仁 孝 武 皇 帝 , 廟 號 太 祖 , 陵 曰 福 陵 ; 妣 諡 曰 孝 慈昭 憲 純 德 貞 順 成 天 育 聖 武 皇 后 。 追 贈 族 祖 禮 敦 巴 圖 魯 為武 功 郡 王 , 追 封 功 臣 費 英 東 為 直 義 公 , 額 亦 都 為 弘 毅 公, 配 享 。 丁 亥 , 群 臣 上 表 賀 。 諭 曰 : 「 朕 以 涼 德 , 恐 負眾 望 。 爾 諸 臣 宜 同 心 匡 輔 , 各 共 厥 職 , 正 己 率 屬 , 克 殫忠 誠 , 立 綱 陳 紀 , 撫 民 恤 眾 , 使 君 明 臣 良 , 政 治 咸 熙 ,庶 克 荷 天 之 休 命 。 」 群 臣 頓 首 曰 : 「 聖 諭 及 此 , 國 家 之福 也 。 」 以 受 尊 號 禮 成 , 大 赦 。 己 丑 , 多 濟 里 、 扈 習 征瓦 爾 喀 師 還 , 賞 賚 有 差 。 朝 鮮 使 臣 歸 國 。 初 , 上 受 尊 號, 朝 鮮 使 臣 羅 德 憲 、 李 廓 獨 不 拜 。 上 曰 : 「 彼 國 王 將 搆怨 , 欲 朕 殺 其 使 臣 以 為 詞 耳 , 其 釋 之 。 」 至 是 遣 歸 , 以書 諭 朝 鮮 國 王 責 之 , 命 送 子 弟 為 質 。 丁 酉 , 敘 功 , 封 大貝 勒 代 善 為 和 碩 兄 禮 親 王 , 貝 勒 濟 爾 哈 朗 為 和 碩 鄭 親 王, 多 爾 袞 為 和 碩 睿 親 王 , 多 鐸 為 和 碩 豫 親 王 , 豪 格 為 和碩 肅 親 王 , 岳 託 為 和 碩 成 親 王 , 阿 濟 格 為 多 羅 武 英 郡 王, 杜 度 為 多 羅 安 平 貝 勒 , 阿 巴 泰 為 多 羅 饒 餘 貝 勒 ; 諸 蒙古 貝 勒 巴 達 禮 為 和 碩 土 謝 圖 親 王 , 吳 克 善 為 和 碩 卓 禮 克圖 親 王 , 固 倫 額 駙 額 哲 為 和 碩 親 王 , 布 塔 齊 為 多 羅 札 薩克 圖 郡 王 , 滿 朱 習 禮 為 多 羅 巴 圖 魯 郡 王 , 袞 出 斯 巴 圖 魯為 多 羅 達 爾 漢 郡 王 , 孫 杜 稜 為 多 羅 杜 稜 郡 王 , 固 倫 額 駙班 第 為 多 羅 郡 王 , 孔 果 爾 為 冰 圖 王 , 東 為 多 羅 達 爾 漢 戴青 , 俄 木 布 為 多 羅 達 爾 漢 卓 禮 克 圖 , 古 魯 思 轄 布 為 多 羅杜 稜 , 單 把 為 達 爾 漢 , 耿 格 爾 為 多 羅 貝 勒 , 孔 有 德 為 恭順 王 , 耿 仲 明 為 懷 順 王 , 尚 可 喜 為 智 順 王 。 辛 丑 , 朝 鮮使 臣 置 我 書 於 通 遠 堡 , 不 以 歸 。 札 福 尼 征 瓦 爾 喀 師 還 。
五 月 丙 午 , 以 希 福 為 內 弘 文 院 大 學 士 , 范 文 程 、鮑 承 先 俱 為 內 秘 書 院 大 學 士 , 剛 林 為 內 國 史 院 大 學 士 。壬 子 , 貝 勒 薩 哈 廉 卒 , 輟 朝 三 日 。 癸 丑 , 始 薦 櫻 桃 於 太廟 。 丁 巳 , 設 都 察 院 , 諭 曰 : 「 朕 或 奢 侈 無 度 , 誤 誅 功臣 ; 或 畋 獵 逸 樂 , 不 理 政 事 ; 或 棄 忠 任 奸 , 黜 陟 未 當 ;爾 其 直 陳 無 隱 。 諸 貝 勒 或 廢 職 業 , 黷 貨 偷 安 , 爾 其 指 參。 六 部 或 斷 事 偏 謬 , 審 讞 淹 遲 , 爾 其 察 奏 。 明 國 陋 習 ,此 衙 門 亦 賄 賂 之 府 也 , 宜 相 防 檢 。 挾 讎 劾 人 , 例 當 加 罪。 餘 所 言 是 , 即 行 ; 所 言 非 , 不 問 。 」 壬 戌 , 追 封 薩 哈廉 為 和 碩 穎 親 王 。 己 巳 , 以 張 存 仁 為 都 察 院 承 政 , 祖 澤洪 為 吏 部 承 政 , 韓 大 勳 為 戶 部 承 政 , 姜 新 為 禮 部 承 政 ,祖 澤 潤 為 兵 部 承 政 , 李 雲 為 刑 部 承 政 , 裴 國 珍 為 工 部 承政 。 都 統 伊 爾 登 罷 。 以 圖 爾 格 為 鑲 白 旗 都 統 。 庚 午 , 武英 郡 王 阿 濟 格 、 饒 餘 貝 勒 阿 巴 泰 、 公 揚 古 利 等 率 師 征 明。 上 御 翔 鳳 閣 面 授 方 略 , 且 誡 諭 之 。 癸 酉 , 師 行 。
六 月 甲 戌 朔 , 授 蒙 古 降 人 布 爾 噶 都 等 世 職 有 差 。己 卯 , 命 豫 親 王 多 鐸 管 禮 部 事 , 肅 親 王 豪 格 管 戶 部 事 。甲 申 , 封 薩 哈 廉 子 阿 達 禮 為 多 羅 郡 王 。 丙 戌 , 以 國 舅 阿什 達 爾 漢 為 都 察 院 承 政 , 尼 堪 為 蒙 古 承 政 。
秋 七 月 己 未 , 檄 外 藩 蒙 古 兵 征 明 。 辛 酉 , 阿 濟 格等 會 師 出 延 慶 州 , 俘 人 畜 一 萬 五 千 有 奇 。
八 月 丁 丑 , 遣 官 祭 孔 子 。 辛 巳 , 成 親 王 岳 託 、 肅親 王 豪 格 以 罪 降 多 羅 貝 勒 。 癸 未 , 睿 親 王 多 爾 袞 , 豫 親王 多 鐸 , 貝 勒 岳 託 、 豪 格 舉 師 征 明 。
九 月 戊 申 , 明 兵 入 場 , 命 吳 善 、 季 思 哈 率 兵 禦之 。 己 酉 , 阿 濟 格 等 奏 我 軍 經 保 定 至 安 州 , 克 十 二 城 ,五 十 六 戰 皆 捷 , 生 擒 總 兵 巢 丕 昌 等 人 畜 十 八 萬 。 庚 申 ,伊 勒 慎 等 追 明 兵 至 娘 娘 宮 渡 口 , 見 敵 船 甚 眾 , 不 敢 進 ,奏 聞 。 命 宜 蓀 往 援 , 復 遣 杜 度 率 師 助 之 。 辛 酉 , 蒙 古 達賴 、 拜 賀 、 拜 音 代 等 自 塔 山 來 降 。 己 巳 , 阿 濟 格 等 師 還。
冬 十 月 癸 酉 , 多 爾 袞 等 師 還 。 丁 亥 , 遣 大 學 士 希福 等 往 察 哈 爾 、 喀 爾 喀 、 科 爾 沁 諸 部 稽 戶 口 , 編 佐 領 ,讞 庶 獄 , 頒 法 律 , 禁 奸 盜 。 戊 戌 , 朝 鮮 國 王 李 倧 以 書 來。 卻 之 。
十 一 月 戊 申 , 復 命 岳 託 管 兵 部 事 , 豪 格 管 戶 部 事。 己 酉 , 衛 寨 桑 等 自 蒙 古 喀 爾 喀 部 還 , 偕 其 使 衛 徵 喇 嘛等 來 貢 。 辛 亥 , 徵 兵 外 藩 。 癸 丑 , 諭 曰 : 「 朕 讀 史 , 知金 世 宗 真 賢 君 也 。 當 熙 宗 及 完 顏 亮 時 , 盡 廢 太 祖 、 太 宗舊 制 , 盤 樂 無 度 。 世 宗 即 位 , 恐 子 孫 效 法 漢 人 , 諭 以 無忘 祖 法 , 練 習 騎 射 。 後 世 一 不 遵 守 , 以 訖 於 亡 。 我 國 嫻騎 射 , 以 戰 則 克 , 以 攻 則 取 。 往 者 巴 克 什 達 海 等 屢 勸 朕易 滿 洲 衣 服 以 從 漢 制 。 朕 惟 寬 衣 博 袖 , 必 廢 騎 射 , 當 朕之 身 , 豈 有 變 更 。 恐 後 世 子 孫 忘 之 , 廢 騎 射 而 效 漢 人 ,滋 足 慮 焉 。 爾 等 謹 識 之 。 」 乙 卯 , 太 祖 實 錄 成 。 乙 丑 冬至 , 大 祀 天 於 圜 丘 。 以 將 征 朝 鮮 告 祭 天 地 、 太 廟 。 己 巳, 頒 軍 令 , 傳 檄 朝 鮮 。
十 二 月 辛 未 朔 , 外 藩 蒙 古 諸 王 貝 勒 率 兵 會 於 盛 京。 鄭 親 王 濟 爾 哈 朗 留 守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駐 牛 莊 備 邊 ,饒 餘 貝 勒 阿 巴 泰 駐 噶 海 城 收 集 邊 民 防 敵 。 壬 申 , 上 率 禮親 王 代 善 等 征 朝 鮮 , 大 軍 次 沙 河 堡 , 睿 親 王 多 爾 袞 、 貝勒 豪 格 分 兵 自 寬 甸 入 長 山 口 。 癸 酉 , 遣 馬 福 塔 等 率 兵 三百 為 商 賈 裝 , 潛 往 圍 朝 鮮 國 都 , 多 鐸 及 貝 子 碩 託 、 尼 堪以 兵 千 人 繼 之 , 郡 王 滿 朱 習 禮 、 布 塔 齊 引 兵 來 會 。 己 卯, 貝 勒 岳 託 、 公 揚 古 利 以 兵 三 千 助 多 鐸 軍 。 上 率 大 軍 距鎮 江 三 十 里 為 營 , 令 安 平 貝 勒 杜 度 、 恭 順 王 孔 有 德 等 護輜 重 居 後 。 庚 辰 , 渡 鎮 江 至 義 州 。 壬 午 , 上 至 郭 山 城 。其 定 州 遊 擊 來 援 , 度 不 敵 , 自 刎 死 。 郭 山 降 。 癸 未 , 至定 州 。 定 州 亦 降 。 乙 酉 , 至 安 州 , 以 書 諭 朝 鮮 守 臣 勸 降。 己 丑 , 多 鐸 等 進 圍 朝 鮮 國 都 。 朝 鮮 國 王 李 倧 遁 南 漢 山城 。 多 鐸 等 復 圍 之 , 並 敗 其 諸 道 援 兵 。 辛 卯 , 瓦 爾 喀 葉辰 、 麻 福 塔 居 朝 鮮 , 聞 大 軍 至 , 以 其 眾 來 歸 。 丁 酉 , 上至 臨 津 江 , 會 天 暖 冰 泮 , 不 可 渡 , 忽 驟 雨 , 冰 結 , 大 軍畢 渡 。 己 亥 , 命 都 統 譚 泰 等 搜 剿 朝 鮮 國 都 , 留 蒙 古 兵 與俱 。 上 以 大 軍 合 圍 南 漢 城 。
是 歲 , 土 默 特 部 古 祿 格 楚 虎 爾 , 鄂 爾 多 斯 部 額 林臣 濟 農 、 台 吉 土 巴 等 俱 來 朝 。
二 年(1637년) 春 正 月 壬 寅 , 朝 鮮 全 羅 道 總 兵 來 援 , 岳 託 擊走 之 。 遣 英 俄 爾 岱 、 馬 福 塔 齎 敕 諭 朝 鮮 閣 臣 , 數 其 前 後敗 盟 之 罪 。 甲 辰 , 大 軍 渡 漢 江 , 營 於 江 滸 。 丁 未 , 朝 鮮全 羅 、 忠 清 二 道 合 兵 來 援 , 多 鐸 、 揚 古 利 擊 走 之 。 揚 古利 被 創 卒 。 庚 戌 , 多 爾 袞 、 豪 格 軍 克 長 山 , 連 戰 皆 捷 ,以 兵 來 會 , 杜 度 等 運 砲 車 亦 至 。 朝 鮮 勢 益 蹙 , 李 倧 以 書數 乞 和 。 上 許 其 出 降 。 倧 上 書 稱 臣 , 逡 巡 不 敢 出 。 壬 戌, 多 爾 袞 軍 入 江 華 島 , 得 倧 妻 子 , 護 至 軍 前 。 復 諭 倧 曰: 「 來 則 室 家 可 完 , 社 稷 可 保 , 朕 不 食 言 , 否 則 不 能 久待 。 」 倧 聞 江 華 島 陷 , 妻 子 被 俘 , 南 漢 城 旦 夕 且 下 , 乃請 降 。 庚 午 , 朝 鮮 國 王 李 倧 率 其 子 及 群 臣 朝 服 出 降 於漢 江 東 岸 三 田 渡 , 獻 明 所 給 敕 印 。 上 慰 諭 賜 坐 , 還 其 妻子 及 群 臣 家 屬 , 仍 厚 賜 之 。 命 英 俄 爾 岱 、 馬 福 塔 送 倧 返其 國 都 , 留 其 子 、 淏 為 質 。
二 月 壬 申 , 班 師 。 貝 子 碩 託 、 恭 順 王 孔 有 德 等 率朝 鮮 舟 師 取 明 皮 島 。 朝 鮮 國 王 李 倧 表 請 減 貢 額 。 詔 免 丁丑 、 戊 寅 兩 年 貢 物 , 自 己 卯 秋 季 始 , 仍 貢 如 額 。 甲 戌 ,諭 多 爾 袞 等 禁 掠 降 民 , 違 者 該 管 官 同 罪 。 辛 卯 , 上 還 盛京 。 癸 巳 , 諭 戶 部 平 糶 勸 農 。
三 月 甲 辰 , 殺 朝 鮮 臺 諫 官 洪 翼 漢 、 校 理 尹 集 、 修撰 吳 達 濟 , 以 敗 盟 故 。 丁 未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率 師 助 攻皮 島 。 戊 午 , 罷 蓋 州 城 工 。
夏 四 月 己 卯 , 睿 親 王 多 爾 袞 以 朝 鮮 質 子 李 、 李淏 及 朝 鮮 諸 大 臣 子 至 盛 京 。 辛 巳 , 阿 濟 格 師 克 皮 島 , 斬明 總 兵 沈 世 魁 、 金 日 觀 。 甲 申 , 安 平 貝 勒 杜 度 率 大 軍 後隊 還 。 丁 酉 , 命 固 山 貝 子 尼 堪 、 羅 託 、 博 洛 等 預 議 國 政。 增 置 每 旗 議 政 大 臣 三 人 , 集 群 臣 諭 之 曰 : 「 向 者 議 政大 臣 額 少 , 或 出 師 奉 使 , 而 朕 左 右 無 人 , 卑 微 之 臣 , 又不 可 使 參 國 議 。 今 特 擇 爾 等 置 之 議 政 之 列 , 當 以 民 生 休戚 為 念 , 慎 毋 怠 惰 , 有 負 朝 廷 。 前 蒙 古 察 哈 爾 林 丹 悖 謬不 道 , 其 臣 不 諫 , 以 至 失 國 。 朕 有 過 失 , 爾 諸 臣 即 當 面諍 。 使 面 從 而 退 有 後 言 , 委 過 於 上 , 非 純 臣 也 。 」 又 諭曰 : 「 昔 金 熙 宗 循 漢 俗 , 服 漢 衣 冠 , 盡 忘 本 國 言 語 , 太祖 、 太 宗 之 業 遂 衰 。 夫 弓 矢 我 之 長 技 , 今 不 親 騎 射 , 惟耽 宴 樂 , 則 武 備 寖 弛 。 朕 每 出 獵 , 冀 不 忘 騎 射 , 勤 練 士卒 。 諸 王 貝 勒 務 轉 相 告 誡 , 使 後 世 無 變 祖 宗 之 制 。 」
閏 四 月 癸 卯 , 蒙 古 貢 異 獸 , 名 齊 赫 特 。 壬 子 , 武英 郡 王 阿 濟 格 師 還 。
五 月 庚 午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奉 表 謝 恩 贖 俘 獲 。丁 亥 , 遣 朝 鮮 從 征 皮 島 總 兵 林 慶 業 歸 國 , 以 敕 獎 朝 鮮 王。 丁 酉 , 章 京 尼 堪 等 征 瓦 爾 喀 , 降 之 , 師 行 逕 朝 鮮 咸 鏡道 , 凡 兩 月 始 達 , 至 是 還 。
六 月 辛 丑 , 授 喀 喇 沁 歸 附 人 阿 玉 石 等 官 。 明 千 總王 國 亮 、 都 司 胡 應 登 、 百 總 李 忠 國 等 自 海 島 來 降 。 莽 古爾 泰 子 光 袞 獲 罪 , 伏 誅 。 乙 卯 , 諭 曰 : 「 頃 朝 鮮 之 役 ,兵 行 無 紀 , 見 利 即 前 , 竟 忘 國 憲 。 自 今 宜 思 所 以 宣 布 法紀 修 明 典 制 者 。 」 丙 辰 , 以 臣 朝 鮮 , 克 皮 島 , 祭 告 太 廟、 福 陵 。 丁 巳 , 朝 鮮 國 王 李 倧 請 平 值 贖 俘 , 不 許 。 甲 子, 論 諸 將 征 朝 鮮 及 皮 島 違 律 罪 。 禮 親 王 代 善 論 革 爵 , 宥之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以 下 論 罰 有 差 。
秋 七 月 己 巳 , 遣 喀 凱 等 分 道 征 瓦 爾 喀 。 癸 酉 , 戶部 參 政 恩 克 有 罪 , 伏 誅 。 辛 巳 , 誡 諭 漢 官 以 空 言 欺 飾 者。 智 順 王 尚 可 喜 自 皮 島 師 還 。 壬 午 , 大 赦 。 癸 未 , 優 恤朝 鮮 、 皮 島 陣 亡 將 士 揚 古 利 等 , 贈 官 襲 職 有 差 。 乙 酉 ,明 都 司 高 繼 功 等 自 石 城 島 來 降 。 庚 寅 , 追 封 皇 后 父 科 爾沁 貝 勒 莽 古 思 為 和 碩 福 親 王 。 壬 辰 , 以 朝 鮮 及 皮 島 之 捷宣 諭 祖 大 壽 。 乙 未 , 分 漢 軍 為 兩 旗 , 以 總 兵 官 石 廷 柱 、馬 光 遠 為 都 統 , 分 理 左 右 翼 。
八 月 丙 申 朔 , 再 恤 攻 皮 島 、 朝 鮮 陣 亡 將 士 洪 文 魁等 , 贈 官 襲 職 有 差 。 癸 丑 , 貝 勒 岳 託 以 罪 降 貝 子 , 罰 金, 解 兵 部 任 。 丙 辰 , 命 睿 親 王 多 爾 袞 、 饒 餘 貝 勒 阿 巴 泰築 都 爾 鼻 城 。 己 未 , 遣 阿 什 達 爾 漢 等 往 蒙 古 巴 林 、 札 魯特 、 喀 喇 沁 、 土 默 特 、 阿 魯 諸 部 會 理 刑 獄 。
九 月 辛 未 , 出 獵 撫 安 堡 , 以 書 招 明 石 城 島 守 將 沈志 祥 。 己 丑 , 兵 部 參 政 穆 爾 泰 以 罪 褫 職 。 貝 勒 豪 格 以 逼勒 蒙 古 台 吉 博 洛 罪 , 罰 金 , 罷 管 部 務 。
冬 十 月 乙 未 朔 , 初 頒 滿 洲 、 蒙 古 、 漢 字 曆 。 丙 午, 厄 魯 特 顧 實 車 臣 綽 爾 濟 遣 使 來 貢 , 厄 魯 特 道 遠 , 以 元年 遣 使 , 是 年 冬 始 至 。 庚 申 , 遣 英 俄 爾 岱 、 馬 福 塔 、 達雲 齎 敕 冊 封 李 倧 為 朝 鮮 國 王 。
十 一 月 庚 午 , 祀 天 於 圜 丘 。 朝 鮮 國 王 李 倧 遣 使 來貢 , 復 表 請 歸 其 世 子 , 並 陳 國 中 變 困 窮 狀 。 上 不 許 ,敕 諭 賜 賚 之 。 丁 丑 , 烏 朱 穆 秦 濟 農 聞 上 善 養 民 , 率 貝 勒等 舉 國 來 附 。 癸 未 , 追 封 揚 古 利 為 武 勳 王 。 庚 寅 , 出 獵打 草 灘 。
十 二 月 甲 辰 , 葉 克 書 、 星 訥 率 師 征 卦 爾 察 。 癸 丑, 征 瓦 爾 喀 諸 將 奏 捷 。 戊 午 , 蒿 齊 忒 部 貝 勒 博 羅 特 、 托尼 洛 率 屬 來 歸 。 阿 濟 格 遣 丹 岱 等 敗 明 兵 於 清 河 。
是 歲 , 虎 爾 哈 部 托 科 羅 氏 、 克 益 克 勒 氏 、 耨 野 勒氏 , 黑 龍 江 索 倫 部 博 穆 博 果 爾 , 黑 龍 江 巴 爾 達 齊 , 精 格里 河 扈 育 布 祿 俱 來 朝 。
三 年 (1638년)春 正 月 辛 未 , 命 貝 子 岳 託 仍 為 多 羅 貝 勒 , 管領 旗 務 。 丁 亥 , 以 德 穆 圖 為 戶 部 承 政 。 甲 午 , 皇 第 九 子生 , 是 為 世 祖 章 皇 帝 。
二 月 丁 酉 , 親 征 喀 爾 喀 , 豫 親 王 多 鐸 、 武 英 郡 王阿 濟 格 從 , 禮 親 王 代 善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 睿 親 王 多 爾袞 、 安 平 貝 勒 杜 度 居 守 。 丁 未 , 次 喀 爾 占 , 外 藩 諸 王 貝勒 等 以 師 來 會 。 喀 爾 喀 聞 之 , 遁 去 。 上 行 獵 達 爾 那 洛 湖西 , 駐 蹕 。 乙 卯 , 次 奎 屯 布 喇 克 。 庚 申 , 明 東 江 總 兵 沈志 祥 率 石 城 島 將 佐 軍 民 來 降 。 壬 戌 , 遣 勞 薩 以 書 告 明 宣府 守 臣 趣 互 市 , 且 以 歲 幣 歸 我 。
三 月 甲 子 朔 , 次 博 碩 堆 , 命 留 守 諸 王 築 遼 陽 城 。甲 戌 , 次 義 奚 里 。 庚 辰 , 至 登 努 蘇 特 而 還 。 壬 午 , 次 上都 河 源 , 河 西 平 地 湧 泉 高 五 尺 。
夏 四 月 甲 午 朔 , 次 布 克 圖 里 , 葉 克 書 等 征 黑 龍 江告 捷 。 乙 未 , 至 遼 河 。 丁 酉 , 次 杜 稜 城 , 明 山 海 關 太 監高 起 潛 遣 人 詭 議 和 。 戊 戌 , 次 札 哈 納 里 忒 。 己 亥 , 次 察木 哈 。 庚 子 , 次 俄 岳 博 洛 。 都 爾 鼻 城 工 竣 , 改 名 屏 城 。辛 丑 , 杜 爾 伯 特 部 卦 爾 察 札 馬 柰 等 來 朝 貢 。 壬 寅 , 至 遼陽 , 閱 新 城 。 乙 巳 , 上 還 盛 京 。 葉 克 書 、 星 訥 征 黑 龍 江師 還 。 癸 丑 , 命 明 降 將 沈 志 祥 以 其 眾 居 撫 順 。 甲 寅 , 尼噶 里 等 征 虎 爾 哈 師 還 。
五 月 癸 酉 , 修 盛 京 至 遼 河 道 路 , 以 睿 親 王 多 爾 袞、 饒 餘 貝 勒 阿 巴 泰 董 其 役 。 乙 亥 , 禮 親 王 代 善 屬 下 人 覺善 有 罪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等 請 誅 之 , 議 削 代 善 爵 。 以 細故 不 許 , 並 貸 覺 善 。
六 月 庚 申 , 始 設 理 藩 院 , 專 治 蒙 古 諸 部 事 。
秋 七 月 壬 戌 朔 , 諭 諸 王 大 臣 曰 : 「 自 古 建 國 , 皆立 制 度 , 辨 等 威 。 今 親 王 、 郡 王 、 貝 勒 、 貝 子 、 公 主 、額 駙 名 號 等 級 , 均 有 定 制 , 乃 皆 不 遵 行 , 違 棄 成 憲 , 誠何 心 耶 ? 昔 金 太 祖 、 太 宗 兄 弟 一 心 , 克 成 大 統 。 朕 當 創業 之 時 , 爾 等 顧 不 能 同 心 體 國 恪 守 典 常 乎 ? 」 諸 王 皆 引罪 。 丁 卯 , 喀 爾 喀 使 臣 達 爾 漢 囊 蘇 喇 嘛 歸 , 諭 之 曰 : 「朕 以 兵 討 不 庭 , 以 德 撫 有 眾 。 天 以 蒙 古 諸 部 與 朕 , 爾 喀爾 喀 乃 興 兵 犯 歸 化 , 甚 非 分 也 。 爾 不 獲 已 , 有 逃 竄 偷 生耳 。 爾 所 能 至 , 我 軍 豈 不 能 至 ? 其 速 悔 罪 來 歸 , 否 則 不爾 宥 也 。 」 壬 申 , 達 雅 齊 等 往 明 張 家 口 議 歲 幣 及 互 市 。丁 丑 , 諭 禮 部 曰 : 「 凡 有 不 遵 定 制 變 亂 法 紀 者 , 王 、 貝勒 、 貝 子 議 罰 , 官 繫 三 日 , 民 枷 責 乃 釋 之 。 出 入 坐 起 違式 , 及 官 階 名 號 已 定 而 仍 稱 舊 名 者 , 戒 飭 之 。 有 效 他 國衣 冠 、 束 髮 裹 足 者 , 治 重 罪 。 」 又 諭 大 學 士 希 福 等 曰 :「 朕 不 尚 虛 文 , 惟 務 實 政 。 今 國 家 殷 富 , 政 在 養 民 。 凡新 舊 人 內 窮 困 無 妻 孥 馬 匹 者 , 或 勇 敢 可 充 伍 、 以 貧 不 能披 甲 者 , 許 各 陳 訴 , 驗 實 給 與 。 」 禁 以 陣 獲 良 家 子 女 鬻為 樂 戶 者 。 丙 戌 , 更 定 部 院 官 制 , 專 設 滿 洲 承 政 , 以 阿拜 為 吏 部 承 政 , 英 俄 爾 岱 為 戶 部 承 政 , 滿 達 爾 漢 為 禮 部承 政 , 宜 蓀 為 兵 部 承 政 , 郎 球 為 刑 部 承 政 , 薩 木 什 喀 為工 部 承 政 , 貝 子 博 洛 為 理 藩 院 承 政 , 阿 什 達 爾 漢 為 都 察院 承 政 。 命 布 顏 為 議 政 大 臣 。
八 月 甲 午 , 禮 部 承 政 祝 世 昌 以 罪 褫 職 , 謫 戍 邊 外。 丙 申 , 吳 拜 、 沙 爾 虎 達 連 擊 敗 明 兵 於 紅 山 口 、 羅 文 峪, 又 敗 其 密 雲 兵 , 殲 之 。 丁 酉 , 地 震 。 戊 申 , 授 中 式 舉人 羅 碩 等 十 名 佐 領 品 級 , 免 四 丁 , 一 等 至 三 等 秀 才 授 護軍 校 品 級 , 免 二 丁 , 各 賜 朝 衣 綢 布 有 差 , 未 入 部 者 免 一丁 。 庚 戌 , 阿 魯 阿 霸 垓 部 額 齊 格 諾 顏 等 、 蒿 齊 忒 部 博 洛特 諾 木 齊 等 並 來 朝 貢 。 癸 丑 , 以 睿 親 王 多 爾 袞 為 奉 命 大將 軍 , 統 左 翼 兵 , 貝 勒 豪 格 、 阿 巴 泰 副 之 , 貝 勒 岳 託 為揚 武 大 將 軍 , 統 右 翼 兵 , 貝 勒 杜 度 副 之 , 分 道 伐 明 。 諭之 曰 : 「 主 帥 為 眾 所 瞻 , 自 處 以 禮 , 而 濟 之 以 和 , 則 蒙古 、 朝 鮮 、 漢 人 之 來 附 者 , 自 心 悅 而 誠 服 。 若 計 一 己 之功 , 而 不 恤 國 之 名 譽 , 非 所 望 焉 。 」 丁 巳 , 岳 託 、 杜 度師 行 。 己 未 , 以 巴 圖 魯 準 塔 為 蒙 古 都 統 。
九 月 癸 亥 , 多 爾 袞 、 豪 格 、 阿 巴 泰 師 行 。 壬 申 ,上 親 向 山 海 關 以 撓 明 師 。 徵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兵。 丁 丑 , 定 優 免 人 丁 例 。 丁 亥 , 幸 演 武 場 , 閱 兵 較 射 。
冬 十 月 丁 酉 , 岳 託 師 自 牆 子 嶺 入 , 遇 明 兵 。 明 總兵 官 吳 國 俊 敗 走 。 戊 戌 , 多 爾 袞 軍 入 青 山 關 。 己 亥 , 上統 大 軍 發 盛 京 。 甲 辰 , 次 渾 河 , 科 爾 沁 、 喀 喇 沁 各 率 兵來 會 。 丙 午 , 遣 沙 爾 虎 達 等 率 師 趣 義 州 。 己 酉 , 命 濟 爾哈 朗 、 多 鐸 各 率 師 分 趣 前 屯 衛 、 寧 遠 、 錦 州 , 上 親 向 義州 。 辛 亥 , 索 海 率 師 圍 大 凌 河 兩 岸 十 四 屯 堡 。 壬 子 , 上次 義 州 , 遣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 石 廷 柱 、 馬 光 遠以 砲 克 其 五 臺 。 乙 卯 , 次 錦 州 。 丙 辰 , 多 鐸 克 桑 噶 爾 寨堡 , 殺 其 守 將 。 孔 有 德 等 攻 石 家 堡 、 戚 家 堡 , 並 克 之 。戊 午 , 孔 有 德 等 攻 錦 州 西 臺 , 臺 中 砲 藥 自 發 , 臺 壞 , 克之 。
十 一 月 己 未 朔 , 多 鐸 將 與 濟 爾 哈 朗 合 師 徑 中 後 所, 會 祖 大 壽 往 援 北 京 , 乘 夜 襲 我 師 。 庚 申 , 多 鐸 、 濟 爾哈 朗 還 至 中 後 所 。 大 壽 懼 , 不 敢 出 。 石 廷 柱 、 馬 光 遠 攻李 雲 屯 、 柏 士 屯 、 郭 家 堡 、 開 州 、 井 家 堡 , 俱 克 之 。 孔有 德 招 降 大 福 堡 , 又 攻 大 臺 , 克 之 。 辛 酉 , 大 軍 入 山 海關 。 壬 戌 , 上 次 連 山 。 癸 亥 , 攻 五 里 河 臺 , 明 守 備 李 計友 等 率 眾 降 。 丁 卯 , 上 至 中 後 所 , 遇 祖 大 壽 收 兵 入 城 。使 告 之 曰 : 「 別 將 軍 數 載 , 甚 思 一 見 。 至 於 去 留 , 終 不相 強 。 將 軍 與 我 角 勝 , 為 將 之 道 應 爾 。 朕 不 以 此 介 意 ,亦 願 將 軍 勿 疑 。 」 戊 辰 , 再 遣 使 諭 大 壽 , 皆 不 答 。 己 巳, 濟 爾 哈 朗 克 摸 龍 關 及 五 里 堡 屯 臺 。 庚 午 , 班 師 。 庚 辰, 次 圖 爾 根 河 , 遣 蒙 古 軍 各 歸 其 部 。 丙 戌 , 上 還 京 。 丁亥 , 地 震 。
十 二 月 戊 戌 , 刑 部 承 政 郎 球 有 罪 解 任 , 以 都 察 院參 政 索 海 代 之 。
是 歲 , 土 默 特 部 古 祿 格 , 杜 爾 伯 特 部 卦 爾 察 札 馬奈 , 席 北 部 阿 拜 、 阿 閔 , 兀 札 喇 部 井 瑙 、 馬 考 、 札 柰 、桑 吉 察 , 鄂 爾 多 斯 部 額 林 臣 濟 農 , 阿 魯 阿 霸 垓 部 額 齊 格諾 顏 , 蒿 齊 忒 部 博 洛 特 諾 木 齊 , 黑 龍 江 博 穆 博 果 爾 、 瓦代 噶 凌 阿 均 來 朝 貢 。
四 年1639년) 春 正 月 乙 丑 , 貝 子 碩 託 以 罪 降 輔 國 公 。 甲 戌, 皇 第 三 女 固 倫 公 主 下 嫁 科 爾 沁 額 駙 祁 他 特 。 己 卯 , 封沈 志 祥 為 續 順 公 。 蒙 古 喇 克 等 自 錦 州 來 歸 。 丁 亥 , 蘇 尼特 部 台 吉 噶 布 褚 等 率 部 人 來 歸 。 是 月 , 明 以 洪 承 疇 總 督薊 、 遼 。
二 月 丁 酉 , 命 武 英 郡 王 阿 濟 格 率 師 征 明 。 壬 寅 ,上 親 統 大 軍 繼 之 。 丙 午 , 次 翁 啟 爾 渾 。 阿 濟 格 遣 使 奏 捷。 蒙 古 奈 曼 等 部 率 十 三 旗 兵 來 會 。 庚 戌 , 營 松 山 。 孔 有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 石 廷 柱 、 馬 光 遠 以 砲 擊 城 外 諸 臺, 克 之 。 遣 塔 布 囊 布 顏 率 師 防 烏 欣 河 口 。 壬 子 , 上 登 松山 南 岡 , 授 諸 將 方 略 。 癸 丑 , 列 砲 攻 城 , 雉 堞 悉 毀 。 明副 將 金 國 鳳 拒 守 不 下 。 上 命 豎 雲 梯 急 攻 之 。 代 善 請 俟 明日 , 上 從 之 。 明 人 復 完 城 堞 , 我 軍 不 得 入 。 乙 卯 , 命 阿濟 格 、 尼 堪 、 羅 托 等 師 圍 塔 山 、 連 山 。
三 月 戊 午 朔 , 明 軍 援 杏 山 , 我 兵 邀 擊 之 , 斬 五 十人 。 己 未 , 穿 地 道 攻 松 山 城 。 乙 丑 , 命 納 海 等 馳 略 杏 山。 石 廷 柱 、 馬 光 遠 攻 觀 民 山 臺 , 降 之 。 丙 寅 , 多 爾 袞 、杜 度 等 疏 報 自 北 京 至 山 西 界 , 復 至 山 東 , 攻 濟 南 府 破 之, 蹂 躪 數 千 里 , 明 兵 望 風 披 靡 , 克 府 一 州 三 縣 五 十 七 ,總 督 宣 、 大 盧 象 昇 戰 死 , 擒 德 王 朱 由 、 郡 王 朱 慈 、奉 國 將 軍 朱 慈 黨 、 總 督 太 監 馮 允 昇 等 , 俘 獲 人 口 五 十 餘萬 , 他 物 稱 是 。 是 役 也 , 揚 武 大 將 軍 貝 勒 岳 託 、 輔 國 公瑪 瞻 卒 於 軍 。 上 聞 震 悼 , 輟 飲 食 三 日 。 乙 亥 , 多 爾 袞 、杜 度 又 報 自 遷 安 縣 出 青 山 關 , 遇 明 兵 , 二 十 四 戰 皆 勝 。己 卯 , 復 攻 松 山 城 。 明 太 監 高 起 潛 、 總 兵 祖 大 壽 自 寧 遠遣 副 將 祖 克 勇 、 徐 昌 永 等 率 兵 趨 錦 州 。 阿 爾 薩 蘭 等 擊 敗之 。 上 聞 , 馳 赴 錦 州 督 師 , 斬 徐 昌 永 於 陣 , 擒 祖 克 勇 。甲 申 , 解 松 山 圍 。 乙 酉 , 駐 錦 州 。 多 爾 袞 等 師 還 盛 京 。
夏 四 月 戊 子 朔 , 阿 濟 格 略 連 山 。 壬 辰 , 會 於 錦 州。 癸 巳 , 渡 大 凌 河 駐 蹕 。 己 亥 , 杜 度 等 師 還 。 辛 丑 , 上還 盛 京 , 哭 岳 託 而 後 入 , 輟 朝 三 日 。 戊 申 , 以 庫 魯 克 達爾 漢 阿 賴 、 馬 喇 希 為 蒙 古 都 統 。 甲 寅 , 以 索 渾 、 薩 璧 翰為 議 政 大 臣 。 丙 辰 , 追 封 多 羅 貝 勒 岳 託 為 多 羅 克 勤 郡 王。
五 月 戊 午 , 以 貝 子 篇 古 有 罪 , 削 爵 。 己 未 , 鄭 親王 濟 爾 哈 朗 率 兵 略 錦 州 、 松 山 、 杏 山 。 辛 酉 , 蘇 尼 特 台吉 莽 古 斯 、 俄 爾 寨 率 眾 來 歸 。 丁 卯 , 席 特 庫 、 沙 爾 虎 達等 敗 明 兵 於 錦 州 。 辛 未 , 濟 爾 哈 朗 奏 入 明 邊 , 九 戰 皆 捷。 丙 子 , 濟 爾 哈 朗 師 還 。 庚 辰 , 以 鎮 國 公 艾 度 禮 為 都 統。 辛 巳 , 召 豫 親 王 多 鐸 數 其 罪 , 宥 之 , 惟 坐 其 征 明 失 利, 及 不 親 送 睿 親 王 出 師 , 降 多 羅 貝 勒 。
六 月 戊 子 , 蒙 古 阿 蘭 柴 、 桑 噶 爾 寨 等 告 岳 託 生 前與 其 妻 父 瑣 諾 木 謀 不 軌 。 代 善 、 濟 爾 哈 朗 、 多 爾 袞 皆 請窮 治 。 上 以 岳 託 已 死 , 不 問 , 並 貸 瑣 諾 木 勿 治 。 庚 寅 ,遣 馬 福 塔 、 巴 哈 納 冊 封 朝 鮮 國 王 李 倧 妻 趙 氏 為 朝 鮮 王 妃, 其 長 子 為 世 子 。 丙 申 , 分 漢 軍 為 四 旗 , 以 石 廷 柱 、馬 光 遠 、 王 世 選 、 巴 顏 為 都 統 , 改 纛 色 。 辛 亥 , 焚 哈 達、 葉 赫 、 烏 喇 、 輝 發 前 所 受 明 敕 書 於 篤 恭 殿 。 壬 子 , 以伊 爾 登 、 噶 爾 馬 為 議 政 大 臣 , 星 訥 兼 議 政 大 臣 。
秋 七 月 丁 巳 , 遣 官 賚 書 與 明 帝 議 和 , 並 令 朱 由 等 各 具 疏 進 , 許 其 議 成 釋 還 。 辛 未 , 朝 鮮 國 王 李 倧 克 熊島 , 執 加 哈 禪 來 獻 。 乙 亥 , 諭 滿 、 漢 、 蒙 古 有 能 衝 鋒 陷陣 先 登 拔 城 者 , 以 馬 給 之 。
八 月 己 丑 , 授 宗 室 固 山 貝 子 、 鎮 國 公 、 輔 國 公 、鎮 國 將 軍 、 奉 國 將 軍 等 爵 有 差 。 甲 午 , 命 貝 勒 豪 格 管 戶部 事 , 杜 度 管 禮 部 事 , 多 鐸 管 兵 部 事 , 薩 爾 糾 等 率 兵 征庫 爾 喀 部 。 乙 巳 , 歸 化 城 土 默 特 諸 章 京 以 所 得 明 歲 幣 來獻 。
九 月 乙 卯 朔 , 以 孫 達 理 等 八 十 三 人 從 睿 親 王 入 關有 功 , 各 授 官 有 差 , 賜 號 巴 圖 魯 。 乙 丑 , 都 統 杜 雷 有 罪, 褫 職 。 己 巳 , 復 封 貝 勒 豪 格 為 和 碩 肅 親 王 。 癸 酉 , 阿濟 格 、 阿 巴 泰 、 杜 度 率 兵 略 錦 州 、 寧 遠 。 甲 戌 , 封 岳 託子 羅 洛 宏 為 多 羅 貝 勒 。 丙 子 , 以 宗 室 賴 慕 布 、 杜 沙 為 議政 大 臣 , 英 俄 爾 岱 為 都 統 , 馬 福 塔 為 戶 部 承 政 。
冬 十 月 丙 戌 , 豪 格 、 多 鐸 率 兵 復 略 錦 州 、 寧 遠 。庚 寅 , 蘇 尼 特 部 墨 爾 根 台 吉 騰 機 思 等 率 諸 貝 勒 、 阿 霸 垓部 額 齊 格 諾 顏 等 各 率 部 眾 , 自 喀 爾 喀 來 歸 。 辛 卯 , 出 獵哈 達 。 癸 丑 , 以 劉 之 源 為 都 統 , 喀 濟 海 為 議 政 大 臣 。
十 一 月 甲 寅 朔 , 豪 格 疏 報 參 領 阿 藍 泰 率 蒙 古 人 來歸 , 遇 明 兵 於 寧 遠 北 岡 , 擊 敗 之 , 斬 明 總 兵 金 國 鳳 。 辛酉 , 遣 索 海 、 薩 木 什 喀 等 征 索 倫 部 。 丁 卯 , 出 獵 葉 赫 。
十 二 月 甲 午 , 上 還 京 。
是 歲 , 黑 龍 江 額 納 布 、 墨 音 、 額 爾 盆 等 , 喀 爾 喀部 土 謝 圖 、 俄 木 布 額 爾 德 尼 等 , 喀 爾 喀 、 蘇 尼 特 、 烏 朱穆 秦 、 科 爾 沁 、 克 西 克 騰 、 土 默 特 諸 部 , 遣 使 俱 來 朝 貢。
五 年 春 正 月 甲 子 , 命 朝 鮮 質 子 李 歸 省 父 疾 , 仍令 遣 別 子 及 子 來 質 。 遣 翁 阿 岱 、 多 濟 里 等 戍 錦 州 。
閏 正 月 癸 未 朔 , 令 各 旗 都 統 分 巡 所 屬 屯 堡 , 察 窮民 , 理 冤 獄 。
二 月 丙 辰 , 遣 多 濟 里 以 寧 古 塔 兵 三 百 往 征 兀 札 喇部 。 丁 巳 , 戶 部 承 政 馬 福 塔 卒 , 以 車 爾 格 代 之 , 覺 羅 錫翰 為 工 部 承 政 。 丙 寅 , 朝 鮮 國 王 第 三 子 來 質 。
三 月 丙 戌 , 遣 勞 薩 、 吳 拜 等 略 廣 寧 。 己 丑 , 勞 薩、 吳 拜 以 逗 遛 議 罰 有 差 。 薩 木 什 喀 等 征 虎 爾 哈 部 , 克 雅克 薩 城 。 己 亥 , 命 濟 爾 哈 朗 、 多 鐸 築 義 州 城 , 駐 兵 屯 田, 進 逼 山 海 關 。 辛 丑 , 戶 部 參 政 碩 詹 徵 朝 鮮 水 師 糧 米 赴大 凌 、 小 凌 二 河 。 乙 巳 , 索 海 、 薩 木 什 喀 征 索 倫 部 奏 捷。
夏 四 月 壬 子 朔 , 罷 元 旦 、 萬 壽 諸 王 貝 勒 獻 物 。 乙亥 , 索 海 、 薩 木 什 喀 征 索 倫 師 還 , 上 宴 勞 於 實 勝 寺 。 庚辰 , 上 視 師 義 州 。
五 月 癸 未 , 渡 遼 河 。 乙 酉 , 碩 詹 以 朝 鮮 水 師 至 。癸 巳 , 上 至 義 州 。 丁 酉 , 蒙 古 多 羅 特 部 人 蘇 班 代 等 自 杏山 遣 人 約 降 。 上 命 濟 爾 哈 朗 等 率 軍 迎 之 , 戒 曰 : 「 此 行勿 領 多 人 , 敵 見 我 兵 少 , 必 來 拒 戰 。 我 分 兵 為 三 , 以 前隊 拒 戰 , 後 二 隊 為 援 。 」 至 杏 山 , 祖 大 壽 果 遣 劉 周 智 、吳 三 桂 列 陣 逼 我 。 濟 爾 哈 朗 等 偽 卻 , 縱 兵 反 擊 , 大 敗 之。 戊 戌 , 命 勞 薩 、 吳 拜 等 略 海 邊 。 索 倫 部 三 百 三 十 七 戶續 來 降 。 壬 寅 , 上 率 師 攻 克 五 里 臺 。 乙 巳 , 以 紅 衣 砲 攻錦 州 。 丁 未 , 刈 其 禾 而 還 。 庚 戌 , 駕 還 京 。
六 月 乙 丑 , 多 爾 袞 、 豪 格 、 杜 度 、 阿 巴 泰 、 濟 爾哈 朗 等 屯 田 義 州 。 戊 辰 , 朝 鮮 世 子 李 至 。 先 是 , 朝 鮮遣 總 兵 官 林 慶 業 等 載 米 同 我 使 洪 尼 喀 等 自 大 凌 河 運 三 山島 , 遇 風 , 覆 沒 者 半 , 與 明 兵 戰 又 失 利 , 乃 命 陵 輓 至 蓋州 、 耀 州 , 留 其 兵 千 五 百 人 於 海 州 。 癸 酉 , 多 濟 里 、 喀柱 征 兀 札 喇 部 師 還 。 遣 朝 鮮 王 次 子 李 淏 歸 省 。
秋 七 月 庚 辰 朔 , 敘 征 索 倫 功 , 索 海 等 賞 賚 進 秩 有差 。 癸 未 , 定 征 索 倫 違 律 罪 , 薩 木 什 喀 等 黜 罰 有 差 。 乙酉 , 多 爾 袞 等 奏 克 錦 州 十 一 臺 , 請 分 兵 為 兩 翼 屯 駐 。 癸巳 , 明 總 督 洪 承 疇 以 兵 四 萬 壁 杏 山 , 遣 騎 挑 戰 , 多 爾 袞等 擊 敗 之 。 乙 未 , 遣 吳 拜 往 助 多 爾 袞 軍 。 丙 午 , 席 特 庫、 濟 席 哈 等 率 師 征 索 倫 部 。 上 幸 安 山 溫 泉 。 己 酉 , 多 爾袞 奏 敗 明 兵 於 錦 州 , 杜 度 又 敗 之 寧 遠 。
八 月 己 未 , 遣 希 福 等 至 張 家 口 互 市 。 乙 亥 , 多 爾袞 奏 敗 明 兵 於 錦 州 , 又 敗 之 大 凌 河 。
九 月 乙 酉 , 上 還 宮 。 丙 戌 , 命 濟 爾 哈 朗 、 阿 濟 格、 阿 達 禮 、 多 鐸 、 羅 洛 宏 代 圍 錦 州 、 松 山 。 辛 卯 , 多 爾袞 奏 敗 明 兵 於 松 山 。 癸 卯 , 重 修 鳳 凰 城 。
冬 十 月 壬 戌 , 遣 英 俄 爾 岱 等 往 朝 鮮 責 罪 。 壬 申 ,萬 壽 節 , 大 赦 。
十 一 月 戊 寅 朔 , 詔 免 朝 鮮 歲 貢 米 十 之 九 。 乙 酉 ,濟 爾 哈 朗 奏 敗 明 兵 於 塔 山 、 杏 山 及 錦 州 城 下 。 癸 巳 , 阿敏 卒 於 幽 所 。 戊 戌 , 朝 鮮 國 王 次 子 李 淏 來 質 。
十 二 月 庚 戌 , 命 多 爾 袞 、 豪 格 、 杜 度 、 阿 巴 泰 代圍 錦 州 。 己 未 , 遣 朝 鮮 國 王 三 子 李 歸 。 席 特 庫 、 濟 席哈 征 索 倫 部 , 擒 博 穆 博 果 爾 , 俘 九 百 餘 人 。 壬 申 , 英 俄爾 岱 等 至 自 朝 鮮 , 械 繫 其 尚 書 金 聲 黑 尼 等 四 人 以 歸 。
是 歲 , 喀 爾 喀 部 查 薩 克 圖 遣 使 來 朝 貢 。
六 年 春 正 月 庚 辰 , 朝 鮮 國 王 李 倧 上 表 謝 罪 。 壬 辰, 席 特 庫 、 濟 席 哈 等 師 還 。 癸 巳 , 晉 席 特 庫 為 三 等 總 兵官 。 甲 午 , 皇 四 女 固 倫 公 主 雅 圖 下 嫁 科 爾 沁 卓 禮 克 圖 親王 吳 克 善 子 弼 爾 塔 噶 爾 額 駙 。 丁 酉 , 二 等 副 將 勞 薩 有 罪, 革 碩 翁 科 羅 巴 圖 魯 號 , 降 一 等 參 將 。
二 月 己 未 , 以 八 旗 佐 領 下 人 多 貧 乏 , 令 戶 部 察 明奏 聞 。 諭 佐 領 毋 沉 湎 失 職 。 其 有 因 飲 酒 失 業 者 四 十 八 人並 解 任 。 諭 諸 王 大 臣 教 子 弟 習 射 。 丙 寅 , 多 爾 袞 等 奏 敗明 兵 。
三 月 己 卯 , 濟 爾 哈 朗 等 代 圍 錦 州 。 丁 酉 , 降 和 碩睿 親 王 多 爾 袞 、 肅 親 王 豪 格 為 多 羅 郡 王 , 多 羅 貝 勒 阿 巴泰 、 杜 度 以 下 罰 銀 有 差 。 是 時 , 祖 大 壽 為 明 守 錦 州 , 屢招 之 不 應 。 上 令 諸 王 迭 出 困 之 。 而 多 爾 袞 等 駐 營 錦 州 三十 里 外 , 又 時 遣 軍 士 還 家 , 故 有 是 命 。 己 亥 , 遣 朝 鮮 總兵 柳 琳 等 率 兵 助 濟 爾 哈 朗 軍 。 壬 寅 , 濟 爾 哈 朗 奏 克 錦 州外 城 。 初 , 我 軍 環 錦 州 而 營 , 深 溝 高 壘 , 絕 明 兵 出 入 ,城 中 大 懼 。 蒙 古 貝 勒 諾 木 齊 、 台 吉 吳 巴 什 等 請 降 , 且 約獻 東 關 為 內 應 。 祖 大 壽 覺 之 , 謀 執 吳 巴 什 等 。 於 是 諸 蒙古 大 譟 , 與 明 兵 搏 戰 。 我 軍 自 外 應 之 , 遂 克 其 外 城 。 大壽 退 保 內 城 。 甲 辰 , 諾 木 齊 、 吳 巴 什 等 以 蒙 古 六 千 餘 人來 歸 , 至 盛 京 。
夏 四 月 丁 未 , 遣 阿 哈 尼 堪 等 率 兵 詣 錦 州 助 濟 爾 哈朗 軍 。 濟 爾 哈 朗 奏 敗 明 援 兵 於 松 山 。 庚 戌 , 遣 孔 有 德 、尚 可 喜 助 圍 錦 州 。 多 爾 袞 等 聞 錦 州 蒙 古 降 , 請 效 力 贖 罪。 不 許 。
五 月 丁 丑 , 明 總 督 洪 承 疇 以 兵 六 萬 援 錦 州 , 屯 松山 北 崗 。 濟 爾 哈 朗 等 擊 走 之 , 斬 首 二 千 級 。 丁 亥 , 索 倫部 巴 爾 達 齊 降 。 己 丑 , 遣 希 福 等 閱 錦 州 屯 營 濠 塹 。 壬 寅, 諭 駐 防 歸 化 城 都 統 古 祿 格 等 增 築 外 城 , 建 敵 樓 , 浚 深濠 , 以 備 守 禦 。
六 月 丁 未 , 命 多 爾 袞 、 豪 格 代 圍 錦 州 。 辛 酉 , 濟爾 哈 朗 、 多 爾 袞 等 合 軍 敗 明 援 兵 於 松 山 。 丙 寅 , 遣 學 士羅 碩 以 祖 澤 潤 書 招 祖 大 壽 。 庚 午 , 多 爾 袞 等 又 奏 敗 明 援兵 於 松 山 。
秋 七 月 戊 寅 , 賜 中 式 舉 人 滿 洲 鄂 謨 克 圖 、 蒙 古 杜當 、 漢 人 崔 光 前 等 朝 衣 各 一 襲 , 一 二 三 等 生 員 緞 布 有 差。 甲 申 , 遣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下 副 都 統 率 兵 助 圍錦 州 。 乙 酉 , 議 圍 錦 州 功 罪 , 親 王 以 下 賞 罰 有 差 。
八 月 甲 辰 朔 , 敘 克 錦 州 外 城 諸 將 功 , 晉 鼇 拜 、 勞薩 、 伊 爾 登 等 秩 , 復 勞 薩 碩 翁 科 羅 巴 圖 魯 號 。 乙 巳 , 我軍 與 明 合 戰 , 明 陽 和 總 兵 楊 國 柱 敗 死 。 祖 大 壽 自 錦 州 分所 部 為 三 , 突 圍 不 得 出 。 丁 未 , 封 烏 朱 穆 秦 部 多 爾 濟 濟農 為 和 碩 蘇 勒 親 王 , 阿 霸 垓 部 多 爾 濟 額 齊 格 諾 顏 為 卓 禮克 圖 郡 王 。 丁 巳 , 上 以 明 洪 承 疇 、 巡 撫 邱 民 仰 等 援 錦 州兵 號 十 三 萬 , 壁 松 山 , 上 親 率 大 軍 禦 之 。 濟 爾 哈 朗 留 守。 諸 王 、 貝 勒 、 大 臣 以 明 兵 勢 眾 , 勸 上 緩 行 。 上 笑 曰 :「 但 恐 彼 聞 朕 至 , 潛 師 遁 耳 。 若 不 去 , 朕 破 之 如 摧 枯 拉朽 也 。 」 遂 疾 馳 而 進 。 戊 午 , 渡 遼 河 。 洪 承 疇 以 兵 犯 我右 翼 , 豪 格 擊 敗 之 。 壬 戌 , 上 至 戚 家 堡 , 將 赴 高 橋 , 召多 爾 袞 以 兵 來 會 。 多 爾 袞 請 駐 蹕 松 、 杏 間 。 上 從 之 , 幸松 山 。 明 以 一 軍 駐 乳 峰 山 , 由 乳 峰 至 松 山 , 列 步 軍 七 營, 騎 兵 則 環 城 東 西 北 , 壁 壘 甚 堅 。 我 師 自 烏 欣 河 南 山 至海 , 橫 截 大 路 而 軍 。 上 謂 諸 將 曰 : 「 敵 眾 , 食 必 不 足 ,見 我 斷 其 餉 道 , 必 無 固 志 , 設 伏 待 之 , 全 師 可 覆 也 。 」癸 亥 , 明 兵 來 犯 , 擊 卻 之 。 又 敗 之 塔 山 , 獲 其 積 粟 十 二屯 。 甲 子 , 明 兵 再 犯 , 又 卻 之 。 時 承 疇 以 餉 乏 , 欲 就 食寧 遠 。 上 知 其 將 遁 , 分 路 設 伏 , 戒 諸 將 嚴 陣 以 待 , 扼 其歸 寧 遠 及 奔 塔 山 、 錦 州 路 。 是 夜 , 明 吳 三 桂 等 六 總 兵 果潛 師 先 奔 , 昏 黑 中 為 我 伏 兵 所 截 , 大 潰 。 惟 曹 變 蛟 、 王廷 臣 返 松 山 。 乙 丑 , 又 克 其 四 臺 。 王 樸 、 吳 三 桂 奔 杏 山。 曹 變 蛟 棄 乳 峰 山 , 乘 夜 襲 上 營 , 力 戰 , 變 蛟 中 創 走 。己 巳 , 吳 三 桂 、 王 樸 自 杏 山 奔 寧 遠 , 遇 我 伏 兵 , 又 大 敗之 , 三 桂 、 樸 僅 以 身 免 。 是 役 也 , 斬 首 五 萬 , 獲 馬 七 千, 軍 資 器 械 稱 是 。 承 疇 收 敗 兵 萬 餘 人 入 松 山 , 嬰 城 守 ,不 能 戰 。 我 軍 遂 掘 壕 圍 之 。 是 日 , 札 魯 特 部 桑 噶 爾 以 兵至 。
九 月 乙 亥 , 科 爾 沁 卓 禮 克 圖 親 王 吳 克 善 以 兵 至 。命 多 爾 袞 、 豪 格 分 兵 還 守 盛 京 。 戊 寅 , 略 寧 遠 。 乙 酉 ,關 雎 宮 宸 妃 疾 。 上 將 還 京 , 留 杜 度 、 阿 巴 泰 等 圍 錦 州 ,多 鐸 、 阿 達 禮 等 圍 松 山 , 阿 濟 格 等 圍 杏 山 。 丙 戌 , 駕 還。 庚 寅 , 宸 妃 薨 。 辛 卯 , 上 還 京 。
冬 十 月 癸 卯 朔 , 日 有 食 之 。 甲 辰 , 遣 阿 拜 駐 錦 州南 乳 峰 山 。 丁 未 , 遣 孔 有 德 、 耿 仲 明 、 尚 可 喜 等 助 圍 錦州 。 己 巳 , 追 封 宸 妃 為 元 妃 , 諡 敏 惠 恭 和 。 壬 申 , 封 蘇尼 特 墨 爾 根 台 吉 騰 機 思 為 多 羅 墨 爾 根 郡 王 。
十 一 月 乙 亥 , 命 多 爾 袞 、 羅 託 、 屯 齊 駐 錦 州 , 豪格 、 滿 達 海 等 駐 松 山 。
十 二 月 甲 寅 , 濟 爾 哈 朗 、 多 爾 袞 奏 敗 洪 承 疇 於 松山 。
七 年 春 二 月 癸 卯 , 上 出 獵 葉 赫 。 戊 申 , 明 德 王 朱由 卒 , 以 禮 葬 之 。 戊 午 , 阿 濟 格 奏 敗 明 兵 於 寧 遠 。 辛酉 , 豪 格 、 阿 達 禮 、 多 鐸 、 羅 洛 宏 奏 拔 松 山 , 擒 明 總 督洪 承 疇 , 巡 撫 邱 民 仰 , 總 兵 王 廷 臣 、 曹 變 蛟 、 祖 大 樂 ,遊 擊 祖 大 名 、 大 成 等 。 先 是 , 承 疇 援 絕 , 屢 突 圍 不 得 出, 其 副 將 夏 承 德 約 降 , 且 請 為 內 應 , 以 子 夏 舒 為 質 。 戊午 夜 半 , 豪 格 等 梯 城 破 之 。 捷 聞 , 上 以 所 俘 獲 分 賚 官 軍, 收 軍 器 貯 松 山 城 。 壬 戌 , 上 還 宮 。
三 月 癸 酉 , 殺 邱 民 仰 、 王 廷 臣 、 曹 變 蛟 。 諭 洪 承疇 、 祖 大 樂 來 京 , 而 縱 大 名 、 大 成 入 錦 州 。 己 卯 , 克 錦州 , 祖 大 壽 以 所 部 七 千 餘 人 出 降 。 乙 酉 , 阿 濟 格 等 奏 明遣 職 方 郎 中 馬 紹 愉 來 乞 和 , 出 明 帝 敕 兵 部 尚 書 陳 新 甲 書為 驗 。 上 曰 : 「 明 之 筆 札 多 不 實 , 且 詞 意 夸 大 , 非 有 欲和 之 誠 。 然 彼 真 偽 不 可 知 , 而 和 好 固 朕 夙 願 。 朕 為 百 萬生 靈 計 , 若 事 果 成 , 各 君 其 國 , 使 民 安 業 , 則 兩 國 俱 享太 平 之 福 。 爾 等 以 朕 意 傳 示 之 。 」 乙 未 , 諭 多 爾 袞 、 豪格 駐 杏 山 、 塔 山 , 濟 爾 哈 朗 、 阿 濟 格 、 阿 達 禮 等 還 京 。
夏 四 月 丁 未 , 敕 諭 吳 三 桂 等 降 。 庚 戌 , 大 小 二 日並 出 , 大 者 旋 沒 。 辛 亥 , 濟 爾 哈 朗 、 多 爾 袞 、 豪 格 等 奏克 塔 山 。 甲 子 , 奏 克 杏 山 。 毀 松 山 、 杏 山 、 塔 山 三 城 。濟 爾 哈 朗 等 班 師 。 以 阿 巴 泰 守 錦 州 。
五 月 己 巳 朔 , 濟 爾 哈 朗 等 奏 明 遣 馬 紹 愉 來 議 和 ,遣 使 迓 之 。 癸 酉 , 洪 承 疇 、 祖 大 壽 等 至 , 入 見 請 死 。 上赦 之 , 諭 以 盡 忠 報 效 , 承 疇 等 泣 謝 。 上 問 承 疇 曰 : 「 明帝 視 宗 室 被 俘 , 置 若 罔 聞 。 陣 亡 將 帥 及 窮 蹙 降 我 者 , 皆孥 戮 之 。 舊 規 乎 ? 抑 新 例 乎 ? 」 承 疇 對 曰 : 「 昔 無 此 例, 近 因 文 臣 妄 奏 , 故 然 。 」 上 曰 : 「 君 暗 臣 蔽 , 枉 殺 至此 。 夫 將 士 被 擒 乞 降 , 使 其 可 贖 , 猶 當 贖 之 , 奈 何 戮 其妻 子 ! 」 承 疇 曰 : 「 皇 上 真 仁 主 也 。 」 戊 寅 , 禁 善 友 邪教 , 誅 黨 首 李 國 梁 等 十 六 人 。 壬 午 , 明 使 馬 紹 愉 等 始 至。
六 月 辛 丑 , 都 察 院 參 政 祖 可 法 、 張 存 仁 言 : 「 明寇 盜 日 起 , 兵 力 竭 而 倉 廩 虛 , 征 調 不 前 , 勢 如 瓦 解 。 守遼 將 帥 喪 失 八 九 , 今 不 得 已 乞 和 , 計 必 南 遷 。 宜 要 其 納貢 稱 臣 , 以 黃 河 為 界 。 」 上 不 納 。 以 書 報 明 帝 曰 : 「 向屢 致 書 修 好 , 貴 國 不 從 , 事 屬 既 往 , 其 又 何 言 。 予 承 天眷 , 自 東 北 海 濱 以 訖 西 北 , 其 間 使 犬 、 使 鹿 產 狐 產 貂 之地 , 暨 厄 魯 特 部 、 斡 難 河 源 , 皆 我 臣 服 , 蒙 古 、 朝 鮮 盡入 版 圖 , 用 是 昭 告 天 地 , 正 位 改 元 。 邇 者 兵 入 爾 境 , 克城 陷 陣 , 乘 勝 長 驅 , 亦 復 何 畏 。 余 特 惓 惓 為 百 萬 生 靈 計, 若 能 各 審 禍 福 , 誠 心 和 好 , 自 茲 以 往 , 盡 釋 宿 怨 , 尊卑 之 分 , 又 奚 較 焉 。 古 云 : 『 情 通 則 明 , 情 蔽 則 暗 。 』使 者 往 來 , 期 以 面 見 , 情 不 壅 蔽 。 吉 凶 大 事 , 交 相 慶 弔。 歲 各 以 地 所 產 互 為 餽 遺 , 兩 國 逃 亡 亦 互 歸 之 。 以 寧 遠雙 樹 堡 為 貴 國 界 , 塔 山 為 我 國 界 , 而 互 市 於 連 山 適 中 之地 。 其 自 海 中 往 來 者 , 則 以 黃 城 島 之 東 西 為 界 。 越 者 各罪 其 下 。 貴 國 如 用 此 言 , 兩 君 或 親 誓 天 地 , 或 遣 大 臣 蒞盟 , 唯 命 之 從 。 否 則 後 勿 復 使 矣 。 」 遂 厚 賚 明 使 臣 及 從者 , 遣 之 。 後 明 議 中 變 , 和 事 竟 不 成 。 癸 卯 , 諭 諸 王 貝勒 , 凡 行 兵 出 獵 , 踐 田 禾 者 罪 之 。 甲 辰 , 設 漢 軍 八 旗 ,以 祖 澤 潤 等 八 人 為 都 統 。 以 貝 子 羅 託 為 都 察 院 承 政 , 吳達 海 為 刑 部 承 政 , 郎 球 為 禮 部 承 政 。 乙 巳 , 多 羅 安 平 貝勒 杜 度 卒 。
秋 七 月 庚 午 , 諭 諸 王 、 貝 勒 、 大 臣 曰 : 「 爾 等 於所 屬 賢 否 , 當 已 詳 悉 。 知 而 不 舉 , 何 以 示 勸 ? 太 祖 時 ,蘇 完 札 爾 固 齊 費 英 東 等 見 人 有 善 , 先 自 獎 勵 , 然 後 舉 之; 見 人 不 善 , 先 自 斥 責 , 然 後 劾 之 。 故 人 無 矜 色 , 無 怨言 。 今 未 有 若 斯 之 公 直 者 矣 。 」 王 貝 勒 等 皆 謝 罪 。 辛 未, 承 攻 索 海 以 罪 褫 職 。 壬 申 , 以 紐 黑 為 議 政 大 臣 。 丙 子, 敘 功 , 晉 多 羅 睿 郡 王 多 爾 袞 、 肅 郡 王 豪 格 復 為 和 碩 親王 , 多 羅 貝 勒 多 鐸 為 多 羅 郡 王 , 鄭 親 王 濟 爾 哈 朗 以 下 賞賚 有 差 。 戊 寅 , 遣 輔 國 公 博 和 託 代 戍 錦 州 。 乙 酉 , 議 濟爾 哈 朗 以 下 諸 將 征 錦 州 違 律 罪 。 上 念 其 久 勞 , 悉 宥 之 。諭 刑 部 慎 讞 獄 。 己 丑 , 命 多 羅 郡 王 阿 達 禮 管 禮 部 事 。
八 月 己 亥 , 鑄 砲 於 錦 州 。 癸 卯 , 鎮 國 將 軍 巴 布 海有 罪 , 廢 為 庶 人 。 癸 丑 , 論 克 錦 州 、 松 山 、 杏 山 、 塔 山諸 將 功 , 晉 秩 有 差 。
九 月 , 敘 外 藩 諸 王 、 貝 勒 、 大 臣 從 征 錦 州 功 , 賞賚 有 差 。 丁 丑 , 遣 貝 子 羅 託 等 代 戍 錦 州 。 壬 午 , 命 沙 爾虎 達 等 征 虎 爾 哈 部 。
冬 十 月 癸 卯 , 遣 英 俄 爾 岱 等 鞫 朝 鮮 閣 臣 崔 鳴 吉 等罪 。 辛 亥 , 以 阿 巴 泰 為 奉 命 大 將 軍 , 與 圖 爾 格 率 師 伐 明。 壬 子 , 師 行 。 丁 巳 , 上 不 豫 , 赦 殊 死 以 下 。 己 未 , 令多 鐸 、 阿 達 禮 駐 兵 寧 遠 。 以 敕 諭 吳 三 桂 降 。 又 命 祖 大 壽以 書 招 之 。 三 桂 , 大 壽 甥 也 。 甲 子 , 命 鄭 親 王 濟 爾 哈 朗、 睿 親 王 多 爾 袞 、 肅 親 王 豪 格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裁 決 庶政 , 其 不 能 決 者 奏 聞 。
十 一 月 丁 丑 , 多 鐸 奏 擊 敗 吳 三 桂 兵 。 丙 申 , 阿 巴泰 奏 自 牆 子 嶺 入 克 長 城 , 敗 明 兵 於 薊 州 。
閏 十 一 月 甲 辰 , 上 還 京 。 己 酉 , 沙 爾 虎 達 等 降 虎爾 哈 部 一 千 四 百 餘 人 。 丙 辰 , 遣 巴 布 泰 等 更 戍 錦 州 。 己未 , 以 宗 室 韓 岱 為 兵 部 承 政 。 定 圍 獵 誤 射 人 馬 處 分 例 。
十 二 月 丁 卯 , 上 出 獵 葉 赫 。 乙 亥 , 遣 金 維 城 率 師戍 錦 州 。 丁 丑 , 駐 蹕 開 庫 爾 。 上 不 豫 , 諸 王 貝 子 請 罷 獵, 不 許 。 丙 戌 , 月 暈 生 三 珥 。 丁 亥 , 日 暈 生 三 珥 。 癸 巳, 上 還 京 。
是 歲 , 杜 爾 伯 特 部 札 薩 克 塞 冷 來 朝 。
八 年 春 正 月 丙 申 朔 , 上 不 豫 , 命 和 碩 親 王 以 下 ,副 都 統 以 上 , 詣 堂 子 行 禮 。 辛 亥 , 沙 爾 虎 達 等 師 還 , 論功 賞 賚 有 差 。 甲 寅 , 明 寧 遠 總 兵 吳 三 桂 答 祖 大 壽 書 , 猶豫 未 決 , 於 是 復 降 敕 諭 之 。 乙 卯 , 遣 譚 布 等 更 戍 錦 州 。辛 酉 , 多 羅 貝 勒 羅 洛 宏 以 罪 削 爵 。
二 月 乙 丑 朔 , 日 有 食 之 。 甲 戌 , 葬 敏 惠 恭 和 元 妃。 庚 寅 , 禁 建 寺 廟 。
三 月 丙 申 , 敕 朝 鮮 臣 民 毋 與 明 通 。 丙 午 , 地 震 ,自 西 隅 至 東 南 有 聲 。 庚 戌 , 上 不 豫 , 赦 死 罪 以 下 。 遣 阿爾 津 等 征 黑 龍 江 虎 爾 哈 部 , 葉 臣 等 更 戍 錦 州 。 辛 酉 , 更定 六 部 處 分 例 。
夏 四 月 癸 酉 , 遣 金 維 城 等 更 戍 錦 州 。 甲 戌 , 多 鐸請 暫 息 軍 興 , 輟 工 作 , 務 農 業 , 以 足 民 用 。
五 月 丙 申 , 復 封 羅 洛 宏 為 多 羅 貝 勒 。 先 是 , 圖 白忒 部 達 賴 喇 嘛 遣 使 修 聘 問 禮 , 留 京 八 月 , 至 是 , 遣 還 ,並 賚 其 來 使 。 庚 子 , 努 山 敗 明 兵 界 嶺 口 。 癸 卯 , 阿 巴 泰奏 我 軍 入 明 , 克 河 間 、 順 德 、 兗 州 三 府 、 州 十 八 、 縣 六十 七 , 降 州 一 、 縣 五 , 與 明 大 小 三 十 九 戰 , 殺 魯 王 朱 衣珮 及 樂 陵 、 陽 信 、 東 原 、 安 丘 、 滋 陽 五 郡 王 , 暨 宗 室 文武 凡 千 餘 員 , 俘 獲 人 民 、 牲 畜 、 金 幣 以 數 十 萬 計 , 籍 數以 聞 。 丁 巳 , 阿 爾 津 征 虎 爾 哈 奏 捷 。
六 月 癸 酉 , 多 羅 饒 餘 貝 勒 阿 巴 泰 師 還 , 鄭 親 王 濟爾 哈 朗 、 睿 親 王 多 爾 袞 、 武 英 郡 王 阿 濟 格 郊 迎 之 。 甲 戌, 賜 阿 巴 泰 及 從 征 將 士 銀 緞 有 差 。 己 卯 , 諭 諸 王 貝 勒 曰: 「 治 生 者 務 在 節 用 , 治 國 者 重 在 土 地 人 民 。 爾 等 勿 專事 俘 獲 以 私 其 親 。 其 各 勤 農 桑 以 敦 本 計 。 」 艾 度 禮 代 戍錦 州 。 丁 亥 , 朝 鮮 國 王 李 倧 請 戍 錦 州 兵 歲 一 更 。 庚 寅 ,諭 戶 、 兵 二 部 清 察 蒙 古 人 丁 , 編 入 佐 領 , 俱 令 披 甲 。
秋 七 月 戊 戌 , 阿 爾 津 等 師 還 , 論 功 賞 賚 有 差 。 諭諸 王 勿 以 黃 金 飾 鞍 勒 。 定 諸 王 、 貝 勒 、 貝 子 、 公 第 宅 制。 壬 寅 , 定 諸 王 貝 勒 失 誤 朝 會 處 分 例 。 丙 辰 , 定 外 藩 王、 貝 勒 、 貝 子 、 公 等 與 諸 王 、 貝 勒 、 貝 子 、 公 相 見 禮 。丁 巳 , 以 征 明 大 捷 , 宣 諭 朝 鮮 。 辛 酉 , 命 滿 達 海 掌 都 察院 事 。
八 月 丙 寅 , 貝 子 羅 託 有 罪 論 辟 , 免 死 , 幽 之 。 戊辰 , 以 宗 室 鞏 阿 岱 為 吏 部 承 政 , 郎 球 為 禮 部 承 政 , 星 訥為 工 部 承 政 。 庚 午 , 上 御 崇 政 殿 。 是 夕 , 亥 時 , 無 疾 崩, 年 五 十 有 二 , 在 位 十 七 年 。 九 月 壬 子 , 葬 昭 陵 。 冬 十月 丁 卯 , 上 尊 諡 曰 應 天 興 國 弘 德 彰 武 寬 溫 仁 聖 睿 孝 文 皇帝 , 廟 號 太 宗 , 累 上 尊 諡 曰 應 天 興 國 弘 德 彰 武 寬 溫 仁 聖睿 孝 敬 敏 昭 定 隆 道 顯 功 文 皇 帝 。
論 曰 : 太 宗 允 文 允 武 , 內 修 政 事 , 外 勤 討 伐 , 用兵 如 神 , 所 向 有 功 。 雖 大 勛 未 集 , 而 世 祖 即 位 期 年 , 中外 即 歸 於 統 一 , 蓋 帝 之 詒 謀 遠 矣 。 明 政 不 綱 , 盜 賊 憑 陵, 帝 固 知 明 之 可 取 , 然 不 欲 亟 戰 以 勦 民 命 , 七 致 書 於 明之 將 帥 , 屈 意 請 和 。 明 人 不 量 強 弱 , 自 亡 其 國 , 無 足 論者 。 然 帝 交 鄰 之 道 , 實 與 湯 事 葛 、 文 王 事 昆 夷 無 以 異 。嗚 呼 , 聖 矣 哉 !
칠곡 가산산성
칠곡 가산산성
길지 않은 세월 무성한 함성만 가산을 뒤덮고
인조 17년(1639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은 왕에게 부임인사를 하면서 경상도 예순 고을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 금오, 천생의 세군데밖에 없으므로 적당한 곳을 골라 산성을 쌓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4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명웅은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다시 조정에 보고하였고,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많은 남정을 징발하여 험한 지형을 따라 성을 �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내성을 준공하였다. 그러나 이 성을 쌓기 위해 10만여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고 감사의 가혹한 독려로 공사 도중 많은 사람이 죽기까지 하여 민심이 동요하였다.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이명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640년 7월 체직되고 말았다. 그대 쌓은 내성의 규모는 성벽의 둘레가 약 4km에 달하는 4710보, 여장이 1887첩이었으며, 동.서,북문의 세 성문이 설치되고 암문도 여덟개가 있었다. 산성 안에는 네 곳의 포루, 한 군데에 장대, 산성에 필수적인 샘이나 우물이 스물 하나, 기타 많은 부속시설이 들어서고 절도 넷이나 자리잡고 있었다.
내성이 완공된 지 60년이 지난 숙종 26년(1700년)에 외성을 축조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의 장계를 받아들이면서 이룩되었다. 성벽 길이 602보에 여장 402첩, 중문 하나 문루 하나, 별장(別將)이 머무르는 건물 등이 설치되었다. 4년 뒤에는 중성 안에 빙고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1640년 성이 완성되면서 종 3품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칠곡도호부를 여기에 설치하고 군위, 의흥, 신녕, 하양지방이 칠곡도호부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관아가 산성 안에 있다 보니 여러가지로 불편한 저이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순조 19년(1819년) 당시 경삼감사로 있던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장계를 올리면서 칠곡도호부는 팔거현으로 옮겨졌다. 산성 안에 객사, 인화간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 포루,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행정적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성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성에는 네 개의 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영남제일루라고 쓰여진 진남루에 올라 바라본 칠곡 일대는 따가운 여름 햇살이 내려 쬐고 성 안쪽에서 뻗어 올라온 담쟁이 넝쿨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쪽으로 올라갈 것인가 생각하다가 산성을 따라 오른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에 걸쳐 복원한 남문과 문루, 성곽의 일부는 주로 옛 돌을 이용해 복원했으나 솜씨가 거칠고, 조금 지나자 산성은 허물어진 그대로다.
길가에는 새카만 오디 열매가 검은 낙엽처럼 떨어져 뒹굴고 있다. 그뿐인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인 아카시아 꽃잎들이 누렇게 변색된 채로 길을 뒤덮고 있다.
아! 가고 오는 것들이여 가는 계절을 서러워할 사이도 없이 또 다른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그 꽃들이 진 자리에 열매들이 또 다른 탄생을 준비하고 있고, 붉은 딸기 몇 개가 유혹하는 한 켠에 새빨간 나리꽃이 피어 있구나. 싸리꽃 무리지어 피어 있는 길을 돌아가서 성터에 앉는다. 바람은 제법 선선하게 불고 나는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먼 산을 바라본다. 그래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칠곡, 대구 일대와 이 가산산성이 한국전쟁 당시 피바람 불어제치던 전쟁터였었지. 한국전쟁 당시 가산산성의 전투를 <한국전쟁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어 뒤를 이어 미군 및 사단 야전포병의 일제사격이 집중되자 가산산성 안은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름드리 낙엽송이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고 성벽 위에 웅크린 적병들이 밤송이 떨어지듯 아래로 곤두박질했다. 가장 치열한 교전을 치른 제4중대는 180명이던 병력 중 몸이 성한 자는 장교 1명과 병사 10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감소되어 있었다. 가산산성에 침투한 북괴군 제14연대도 1950년 8월27일 전투에서 와해, 약 400여 명만이 탈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산산성 전투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8월12일에는 미군이 제1기병사단과 공군이 입체작전을 벌여 백병전을 무릅쓰고 인민군 이천오백 명쯤을 살상하여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진입하려는 적의 기세를 꺾었다. 8월13일에는 가산 면학산에 있는 328고지에서 전투가 전개되었고 328고지에서는 하루에도 주인이 두번씩 바뀔 정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8월16일 오전 11시58분에 일본 요꼬다와 가네다에서 출발한 B29 비행기 98대는 왜관에 있던 북한군 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26분 동안에 퍼부은 폭탄이 무려 960톤에 이르렀다. 이 폭격으로 강을 건너기 위해 있던 북한군 사만 명 중에 적어도 삼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낙동강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1초에 스무명, 1분에 1150명 꼴로 폭사한 셈이다. 바로 이 폭격으로 국군과 미군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람은 나무들을 흔들리게 하고 길은 계속 오르막길이다. 어디 한 군데 트인 데 없는 작은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들어선 길을 한없이 올라서다가 윤영숙, 오현신 선생은 "그늘 속에서 수도나 하겠다"고 뒤쳐진다. 얼마쯤 올랐을까 큰 바위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진재인씨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을 진실로 깨달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동문으로 해서 가산바위로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옛 천주사 터에 세워진 해인정사에선 잘 익은 앵두나무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소창청기>에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 관게를 허락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우리들에게 이 가산과 가산산성은 무슨 질문을 던질 것인가?
*교통
서울에서 대구터미널까지 06:00~20:30까지 10분 간격으로 있고, 요금은 우등 17,900원, 일반 12,100원이다. 대구 북부터미널(053-743-4464)에서 동명을 거쳐 송림사 가산산성으로 가는 버스가 06:20, 06:40, 08:30, 10:30, 12:00, 15:00, 17:00 등 많이 있다.
*잘 데와 먹을 데
가산산성 아래에 숙식할 곳들이 많이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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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의 주인공, 홍어장사 '문순득'
'표해록(漂海錄)' 이라는 제목의 책은 현재까지 3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탐진출신의 최부가 남긴 것과 제주출신의 장한철이 남긴 표해록, 그리고 정약전 선생이 저술한 표해록이다. 최부의 표해록이나 장한철의 표해록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약전 선생이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표해록은 비교적 늦게 그 존재가 알려져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표해록의 주인공이 '문순득(文淳得)'이란 사람으로 홍어장사였다. 정약전 선생이 홍어장사인 문순득의 표류생활을 생생하게 엮은 책으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대대로 우이도에 살고있는 문순득의 5대손인 문채옥씨 집에 소장되어 내려온 여러 문건 중에 단지 저술되었다는 사실 외에 원본의 실체가 없었던 표해록이 뒤 늦게 발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鄭雷卿정뇌경
鄭雷卿정뇌경
1608(선조 41)∼1639(인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지사.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을사삼간(乙巳三奸) 순붕(順朋)의 현손으로, 생원 환(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고, 그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대간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자핵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갈 때 교리로 호종(扈從)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게 되자 자청하여 수행하였으며, 1639년에 필선으로 승진하여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게 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하였다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http://koreandb.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person_view.html?n=3610
雲溪先生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 정뇌경의 시문집이다.
정뇌경은 을사삼간(乙巳三奸) 순붕(順朋)의 현손으로 생원 환(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0(인조 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그 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대간(大諫)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자핵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 갈 때 교리로 호종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게 되자 자청하여 수행하였으며, 1639년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여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광해군 10)년 건주위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 등이 우리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줌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양국간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을 업신여기는 한편,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호를 엿보던 중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는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게 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자기 옷을 벗어 염(斂)을 하였다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나중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문집은 1969년 9세손 건영(乾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10수 중 3수를 제외하고 모두 심양(瀋陽)에서 지은 것이다. 저자는 1637(인조 1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에 잡혀가게 되자 그를 배행(陪行)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그때의 심경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위국단충(爲國丹衷)과 이국 땅에서의 고독, 원분(怨憤) 등으로 표현되는 저자의 정신세계가 잘 그려져 있다. 소(疏)에는 「이윤방사진열소(以尹昉事陳列疏)」가 있는데, 윤방(尹昉)의 사건 전말을 진술한 것이다. 윤방이 강화로부터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이르렀을 때, 자신이 세자에게 배알 중지를 건의한 일을 해명한 내용이다. 「문학시대죄소(文學時待罪疏)」에서는 문학으로 심양에 있으면서 본국 사신을 만나 반가운 나머지 술을 마시고 왕세자에게 실수를 범한 뒤 대죄(待罪)한 내용이다. 차(箚)에는 1636년 봄에 교리로서 척화를 주장한 글이다. 이 세 편의 글은 조선 중기 대청(對淸)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1630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복수책(復?策)」과 「몽양책(蒙養策)」이 있다.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5월 1일(정사)
청나라에서 정뇌경을 죽이고, 재신 박노와 신득연이 치계하다
청나라에서 시강원 필선 정뇌경(鄭雷卿)을 죽였다. 재신 박노(朴)·신득연(申得淵) 등이 치계하기를,
“4월 18일에 용골대(龍骨大)·마부달(馬夫達) 두 장군이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정뇌경 등의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며, 조선에서도 이미 자문을 보내왔으니, 지금 처치해야 할 것이다.’ 하므로, 신들이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속바치기를 청하는 뜻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장군이 말하기를 ‘국왕이 재신으로 하여금 속바치는 것을 도모하게 하였는가, 재신이 스스로 속바치기를 도모하였는가? 재신이 당초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처럼 그를 구하려는 것인가?’ 하므로 신들이 말하기를 ‘국왕의 본뜻은 자문 안에 다 들어 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세자와 대군도 모르는 바이다. 다만 우리들이 같이 있은 지 오래되어 그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이 계책을 내었을 뿐이다.’ 하고, 반복하여 간절히 말하였더니, 두 장군이 말하기를 ‘우리를 해치고자 도모한 자를 구원하는 것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우리 두 사람과 두 역관의 살고기를 먹은 뒤에야 마음에 쾌하겠는가?’ 하므로, 신들이 부득이 세자에게 가서 고하겠다고 말하고 물러났습니다.
세자가 구원하고자 하여 재삼 물었으나 다른 계책이 없으므로 친히 아문에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이 여러 통사(通事)와 함께 말 앞에 늘어서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머리가 부서져야 앞으로 갈 수 있다.’ 하므로, 세자가 말을 멈추고 주저하는데 아문의 재촉이 성화보다 급하므로 세자가 부득이 도로 관소로 들어왔습니다. 정역(鄭譯)의 무리가 정뇌경을 나오라고 독촉하자, 정뇌경이 새옷으로 갈아 입고 관문 밖에서 하직하니, 세자가 인견하고 술을 하사하였습니다. 정뇌경이 하직하고 나가 대문 안에서 동쪽으로 본국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그 어미를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나가니, 청인이 목졸라 죽였습니다. 서리 강효원도 일시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신들이 용골대·마부달에게 말하여 겨우 시체를 거두어 염습(斂襲)하였는데, 옷과 이불은 모두 대내에서 내었으며, 강효원에게도 염할 옷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관 박지영(朴之榮)으로 하여금 관을 호위하여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정뇌경의 죽음은 몹시 놀랍고 참혹하다.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하게 하라. 그리고 그의 어미와 아내에게 달마다 양식과 찬거리를 주어 나의 애처로워 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 강효원에게도 일체로 시행하라.”
하고, 또 정뇌경에게 증직(贈職)하도록 명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順菴集, 瀋陽日記. 〈申解淳〉
沈演심연
沈演심연
【생몰년】 1587(선조 20)∼1646(인조 24)
【본 관】 청송(靑松) 심(沈)
【자·호】 윤보(潤甫), 규봉(圭峰)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87(선조 20)∼1646(인조 2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峰)으로 진사 심대형(沈大亨)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 4년(161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에 호송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26년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여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 의금부 도사를 역임, 그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에 임명되었다. 지평 · 정언 · 교리를 거쳐 1633년에는 호란으로 파괴된 창덕궁의 보수공사를 벌일 때 도청(都廳)이 되어 총괄하였다. 같은 해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현을 주로 승격시키고, 그 목사가 되었다. 1635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雙嶺)에서 싸우다 패하여 재기를 꾀하던 중 화의가 성립되자,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 1638년 제주 목사로 덕정을 인정받아 비변사 당상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 판윤 · 승지 · 대사간, 황해도 · 평안도의 순찰사, 평안도 ·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시 죽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관련항목】 심택(沈澤)
崔鳴吉최명길
崔鳴吉최명길; 1586~164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영흥부사 기남(起南)의 아들이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과 교유하였다.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사마시의 생원, 진사시와 문과를 모두 통과하고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는 가장 화려한 경로로 정부에 진출하였다. 광해군대에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중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에서 삭직되었으며, 북인의 독주가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 이르게 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류(金) 계열과의 연합을 통한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이조참판과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녹훈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였는데 특히 정묘호란 때는 강화를 주장하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도록 했다. 1632년(인조 10) 이후 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와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조판서에 다시 올라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하였다. 난중의 일처리로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음으로써 1637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대청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일찍 사이가 벌어진 김류 ·김자점(金自點) 세력과의 경쟁으로 1640년에 일단 물러났다가 2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1643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사상은 당시의 대세인 신유학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성리학 원론이나 번다한 예설 자체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고 명분론 일변도로 흐르지도 않았다. 또한 양명학(陽明學)에 호감을 보이고 그 소양을 몸에 익혀 장유 등과 더불어 그 사상을 후대에 이어준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인조반정 때 길흉을 점쳐 거사 시기를 정했을 만큼 점술을 인정받았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다양하고 현실적인 사상은 실제 생활과 정치에 반영되었다. 사족들에 대해 청군에 끌려갔던 부녀들과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외롭게 주장하였고, 늦게 생자를 얻었으나 그 전에 조카를 양자로 삼은 것을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후사로 삼도록 특별히 청해 조정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를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는 무신이 아닌데도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 건너 원수 장만(張晩)을 찾아갔고, 계책을 세워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나라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하여 나갔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주로 정적들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도 곳곳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구체적인 정책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하되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후금 및 그 뒤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인조가 대원군 신분인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는 정책을 펼 때 대부분의 사림들이 공과 사의 분별을 내세워 반대하였으나 임금의 입장을 존중하는 소수 의견에 가담하여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임금만을 따른 것은 아니어서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빈을 처형할 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사류들과 함께 그녀를 용서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관직체계 ·토지제도 ·군사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출한 데 나타난 개혁 의지는 병자호란 후 국정을 주도할 때 실행에 옮겨졌다. 정치운영에 대해서는 관인들 사이의 분란 가능성을 줄이고 재상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정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민생에 대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민간의 부담을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붕당정치의 폐단이 이조낭관(吏曹郎官)의 자천권(自薦權)과 삼사(三司)의 서사법(署事法) 및 피혐(避嫌)에서 온다고 인식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낭관의 권한을 제한하며 양사에서의 쟁단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주화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인조 말년 이후 거의 모두 부정되고 자신도 소인배나 불길한 인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생을 위해 개인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과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간 공로에 대한 찬사도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손자이자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지도자인 최석정(崔錫鼎) 등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문집으로 《지천집》과 《지천주차(遲川奏箚)》가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
金乭屎(김돌시) 매맞아 죽다
金乭屎김돌시
정명수(鄭命壽, ?~1653) 등과 같은 매국
청나라 말을 배우고 조선의 사정을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 청나라 장수의 역관으로 들어와
동포를 괴롭히고
매국행위를 일삼았다.
"용담록"에는
김돌시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 빌붙어 작당질한 무리이다.
김돌시가 의주에서
못생긴 기생을 들어 보냈다고
임경업에게 투정을 부리자
분노한 임경업이 청나라 사신에게 항의하니
청사신이 말하길
"청나라를 욕되게한 김돌시에게 곤장 40대를 치라" 하니
몇 대 맞다가 즉사하여 밖으로 끌어내니 모두가 쾌자를 불렀다.라고 기록돼있다.
--- 곤장을 치는 집장사령(執杖使令)이 얼마나 열을 받아 내리쳤으면 단 몇대에 즉사 했을까. ???????????????----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 7)1월 22일(경인)
윤훤이 함락된 능한 산성을 정탐하여 치계하다
“신이 군뢰(軍牢) 임의경(任義京)·김돌쇠(金乭屎) 등으로 하여금 능한 산성을 정탐하도록 하였더니, 대장 정주 목사 김진, 곽산 군수 박유건은 포로가 되었고 선천 부사 기협은 굴복하지 않고 죽었으며, 세 고을의 군병들은 다 살해당하고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 자는 단 수십여 명뿐이며, 의주(義州)·용골(龍骨) 두 성은 다 함락당하였고 정주(定州)에 주둔하고 있는 적은 현재 진격하거나 퇴각할 의사가 없으며 우리 백성들 중 붙잡혀간 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였다고 합니다.”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 3) 10월 13일(무오)
금나라에서 아지호 등이 추신사로 오다
금나라에서 보낸 아지호(阿之戶)·동남명(東南明)·김돌시(金乭屎) 등이 추신사(秋信使)로 왔다. 동남명은 우리 나라 북도(北道) 토병(土兵) 박중남(朴仲男)이다.
인조 16년 무인(1638, 숭정 11)
1월 16일(경진)
우의정 신경진, 병조 판서 이시백을 인견하여 산성의 증축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우의정 신경진과 병조 판서 이시백을 인견하고, 산성도(山城圖)를 펴놓고 수축할 곳을 물었다. 이시백에게 이르기를,
“만약 이대로 증축한다면 성이 완전하고 견고할 것이다.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는 몇 명쯤 있어야 하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2만 명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산성의 공사를 일체 경에게 맡기겠다.”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약조 가운데 ‘산성을 축조하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혹시라도 이로 인해 힐책하는 단서가 있게 되면 매우 우려할 만합니다. 먼저 청나라에 알려 그들이 답하는 것을 보고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했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승지 신득연(申得淵)이 아뢰기를,
“다른 도적을 대비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면 저들이 어찌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축조한 뒤에 저들이 혹시 듣고서 헐으라고 하면 일이 매우 낭패이니, 통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경진은 아뢰기를,
“신이 지금 들어가니, 배종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심양에서 보내온 편지를 보니, 김돌시(金乭屎)가 빈말을 만들어 내어 ‘왜인들이 「조선이 청나라에 병화를 당했으니 이웃 나라와 교유하는 도리에 있어 서로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금패(金牌) 세 자루를 세우고서 나가면 청나라 군사들이 머지 않아 역시 물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였다. 김돌시가 비록 어떤 사람에게 들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가 왜적을 대비한다는 뜻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다. 이로써 말을 하면 저들도 반드시 우리가 성을 쌓는 일에 대해 의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저들이 다시 혼인 및 시녀에 대한 일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혼인하는 일은 이미 성명을 써서 보냈으니, 반드시 다시 물어올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전후로 사행(使行)이 심양에 들어갔던 때의 일을 듣건대, 따라갔던 사람들이 속환(贖還)하러 간다고 하였지만 실은 모두 장사꾼들로서 돌아올 때 저들에게 자기들의 말을 파는 자가 많았다고 하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말미를 받고 왔다가 임소(任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마침 이날 하직 인사를 올리러 왔다. 상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경이 국가를 위하여 부지런히 수고하고 자식처럼 백성들을 사랑하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의주의 호구는 얼마나 되며, 폐단은 어떤 일인가?”
하니, 아뢰기를,
“호구는 4백여 명이고 심양을 왕래할 때 인부와 말을 제공하는 일이 큰 폐단입니다.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그들을 잘 어루만져 안집시키는 것이 부윤의 책임이니, 더욱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가도(椵島)에서의 패배에 심 도독(沈都督)이 사절(死節)했다고 하던데, 그런가?”
하니, 아뢰기를,
“도독이 처자로 하여금 배를 타고 피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였다니, 그가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도망쳐 살 길이 있었는데도 목숨을 바치면서 떠나지 않았으니, 중국에도 사람이 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이어 경업에게 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원전】 35 집 3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2월 6일(갑오)
심양의 재신 신득연·박노 등이 정뇌경이 두 역관을 모해한 일에 대해 밀계하다
심양(瀋陽)의 재신(宰臣) 신득연(申得淵)·박노(朴) 등이 비밀히 치계하기를,
“정월 21일에 심지상(沈志祥)을 봉작(封爵) 하는 일로 조회하는 일이 있었는데,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이 가서 참여하였습니다. 궁궐 밖에 막 나아가자, 형부(刑部)의 관원이 5∼6인을 거느리고 와서 강원(講院)의 관원을 만나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사서(司書) 김종일(金宗一)이 나가서 만나보았더니, 형부의 관원이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비밀히 묻기를 ‘조선이 은 2천 6백 냥 및 잡물 7바리를 정명수(鄭命壽)와 김돌시(金乭屎) 등에게 뇌물로 주어 칙사의 행차가 돌아온 뒤에 뒤따라 실어서 들여보냈으며, 또 황제에게 헌납하는 감과 배 각 1천 개를 두 역관이 훔쳐 축냈다고 한다. 심가(沈哥) 성을 가진 사람이 이미 이런 내용으로 아문에 고하였다.’ 하고, 이어서 물목(物目)을 열록(列錄)한 것을 내어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참말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김종일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득연이 정뇌경(鄭雷卿)과 궁을 지키고 있었는데, 하인이 홀연히 ‘형부의 관원 등이 문밖에 와서 강원(講院)의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을 불러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강효원이 나간 뒤에 하인이 또 ‘강효원이 형부의 관원이 묻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답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뇌경이 자리에 있다가 놀라더니 이윽고 웃으며 말하기를 ‘강효원이 반드시 스스로 담당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형부의 관원이 강원의 관원을 만나보려 하자, 정뇌경이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본원(本院)에서 서로 만나 보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무슨 말로 답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정뇌경이 답하지 않고 갔습니다. 사람을 시켜 비밀히 탐지해 보았더니, 정뇌경이 형부의 관리와 들어가 앉아서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히 말하였는데, 일체 강효원의 말한 바와 같이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참 뒤에 들어오기에 비로소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정뇌경이 말하기를 ‘포로로 잡힌 심천로(沈天老)란 자가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의 일로써 아문에 고발하였는데, 강효원이 그들의 물음으로 인하여 이미 입증하였으므로 나도 굳이 속이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세자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내관(內官) 나업(羅嶪), 선전관 구오(具鰲)에게 명령을 내려 강효원에게 비밀히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 일은 강효원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정뇌경과 김종일이 실제로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 두 사람 및 관중(館中)의 대소 사람이 모두 알고 있지 못하였으니 장차 헤아릴 수 없는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기에 위아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이틀이 지난 뒤에 형부의 관원이 정명수·김돌시 두 역관을 거느리고 또 관문 밖에 와서 정뇌경 등 3인을 불러 다시 전일의 일을 물었으나, 김종일은 처음에 이미 모른다고 답하였으므로 도로 들어가게 하고, 정뇌경 및 청역(淸譯) 최막동(崔莫同) 등만 남게 하였습니다. 정뇌경의 답한 바는 전일에 비해 더욱 자세하여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형부의 관원이 ‘전후에 증여한 물건을 정뇌경이 직접 보지 아니하였고, 또 증명할 만한 문서가 없으며, 이른바 전해준 사람도 나갔다고 말하니, 이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하고, 드디어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신들이 세자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두 역관과 용장(龍將) 등이 몹시 성나 있으니 형세가 장차 헤아리기 어렵다. 급히 먼저 서리 강효원을 중죄로 다스리고, 이어서 정뇌경을 출송(黜送)하며 본조(本朝)에 죄를 청하여 그들의 뜻을 풀어야 한다.’ 하였더니, 세자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에 신들이 관문(館門)에 같이 좌정하여 강효원을 잡아내어 대중이 보는 한길에서 되도록 중하게 곤장을 쳤습니다. 형부에서 곧바로 정뇌경과 강효원 등을 불러가고, 얼마 뒤에 또 신 등 두 사람을 부르기에 곧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정뇌경과 두 역관이 뜰 가운데 꿇어앉아 바야흐로 마주 대면하여 따지고 있었는데, 형부의 왕(王)인 질가(質可)와 용장(龍將) 이하 10여 인이 양편으로 나누어 벌여 앉아 있기에 신들이 그 끝에 앉았습니다. 질가가 말하자, 용장이 신들에게 전하기를 ‘정뇌경 등이 두 역관을 모해한 일을 세자 및 재신(宰臣)도 모두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정뇌경은 「그 문서를 박시랑(朴侍郞)이 머무는 곳에서 태웠다.」 하고 강효원은 「강원(講院)에서 태웠다.」 하는데, 두 사람의 말이 틀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국가에 그지없는 화를 끼칠까 두려워 부득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는데, 질가 이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세자에게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얼마 뒤에 용장 및 형부의 관원 2인이 갑자기 관문 밖에 이르러 신들 및 정뇌경·강효원을 불러 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정뇌경이 두 역관을 모해한 정상은 이미 다 드러났다. 세자와 재신도 알고 있었는가? 국왕이 설사 증여한 바가 있더라도 신하가 고하였다면 이것은 국왕을 모함한 것이다. 조선 백성도 우리 백성이니, 우리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하고, 곧 사람을 시켜 정뇌경과 강효원의 손을 뒤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세자가 만일 모르고 있었다면 반드시 맹세하고 이곳에서 죽여야 실정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에 세자가 나가서 보고 말하기를 ‘오로지 황제의 은덕을 입어 편안히 있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도 지금 거느리고 있는 신료가 그 모르는 바를 어거지로 우겨 이러한 망령된 일을 하여 황제의 명을 내리게 하였으니, 더욱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신들도 모두 모르고 있었으니, 맹세는 할 수 있으나, 다만 본국의 법에 죽이고 살리는 일을 세자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국왕에게 아뢴 뒤에 처치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27일에 용장 등 3인이 또 와서 세자로 하여금 꿇어앉아서 황제의 명을 듣게 하고 다시 어제 저녁 때 말한 바를 거듭 이르고 더욱 힐책하며 말하기를 ‘칙서 가운데 「절대로 사사로이 서로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국왕이 만일 과연 주었다면 이것은 국왕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설사 준 바가 있다 하더라도 그 신하가 고하였다면 이것은 신하가 임금을 고발한 것이며, 관중의 사람 및 세자가 알고 있는데 고발하였다면 이것은 세자도 죄가 있는 것이다. 고발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이것은 국왕 및 세자가 서로 의논하여 한 것이다. 발명하고자 한다면 맹세하고 죽여야 한다. 세자가 스스로 천단하지 못하여 국왕에게 여쭙겠다는 말은 아주 옳다. 고발한 자를 구류하였다가 사람을 보내 온 뒤에 처단하라.’ 하였습니다. 세자가 답하기를 ‘황제의 명을 진실로 감히 어길 수는 없으나, 다만 여기에서 죽이면 나라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경계가 되겠는가. 우리 나라로 내보내어 엄히 국문해 죄를 바르게 다스려야만 체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못 믿겠으면 청나라 사람이 함께 가도 된다.’ 하였더니, 세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국왕이 이 일을 알고 있는데 고발하였다면 내보내어 죽이는 것이 가하다. 지금 정뇌경이 여기에 있으면서 스스로 계책을 꾸몄으니, 이곳에 관계된 일이므로 내보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대개 핍박하여 반드시 유감을 푼 뒤에야 그만 두려는 것으로, 말하자니 목이 메입니다.
세자가 영을 내리기를 ‘정뇌경은 시강(侍講)한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 산성을 나와 용감하게 배종(陪從)한 이래로 갖은 고난을 겪으며 공로가 매우 많았는데, 이런 망극한 화를 당하니 몹시 불쌍하다. 몸소 궐하에 나아가서 대죄하고 변명하고자 한다.’ 하므로 신들이 상의하고 들어가 아뢰기를 ‘이 나라의 습속은 죄인을 신구(伸救)하면 문득 동참한 것으로 의심합니다. 저들이 현재 본국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으니 결코 가벼이 입을 열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그만두었습니다.
정뇌경의 계획은 본래 이룡(李龍)·이성시(李聖詩)·김애수(金愛守) 등이 두 역관에게 원한을 맺어 보복하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니, 정뇌경이 먼저 스스로 계획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무리들을 이끌어대면 정뇌경의 화가 조금은 풀어질 듯하였으므로 세자가 또 신들로 하여금 이들을 이끌어대어 다시 변명하도록 권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뇌경이 말하기를 ‘이룡 등 전에 실패당한 사람을 서로 고발하여 이끌어대어 옥사가 퍼지게 되면 국가의 화를 거듭 끼칠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이끌어대도록 강권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종일은 질자관(質子舘)에 내보내 놓고 조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뇌경·김종일 등이 별도로 소 한 장을 작성하여 시말을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모두 별지로 치계합니다.”
하였는데, 그 별지는 다음과 같다.
“신들은 어리석고 망령되어 스스로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보건대, 청나라가 우리를 대접하는 도리가 대개 관후하였는데, 중간에서 날조하여 반드시 해를 입히려 한 것은 오로지 두 역관의 소위였습니다. 그들은 천부적으로 악독한 성품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뇌물을 많이 받아서 사람들의 말이 점차 성해지자, 혐의를 멀리할 계책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신들이 서로 비분해 하면서 말하기를 ‘국력과 백성의 목숨이 두 역관의 손에서 다하게 되었다. 칙사의 행차 때 횡포를 부린 것과 사람을 속바칠 때 농간을 부린 것은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근심거리가 됨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현재 이와 같은 상황이니, 끝내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나라의 모든 모의는 제왕(諸王) 이외에는 용골대(龍骨大)나 마부달(馬夫達)처럼 신임받는 사람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문(衙門)의 한 역관이 어찌 이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겠는가. 그러나 양쪽 사이에 말을 전하는 것은 오로지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만일 은혜를 보여 그들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힘을 다해 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두 역관은 그렇지 않아서, 뇌물을 많이 받으면 해를 심하게 끼치는데, 자신들의 힘이 다만 모자라서 그러한 것이다. 우리를 해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려는 마음에서 온갖 방법을 다하고 있으니, 뇌물을 주고서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도모하여 비록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청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두 역관이 행중(行中)에 현저히 틈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의 망녕된 의견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작년에 예부(禮部)의 통사(通事) 김애수(金愛守)란 자가 두 역관의 부정 장물(贓物)을 적발하였습니다. 필선(弼善) 민응협(閔應協)이 행중의 노자를 관장하였으므로 형관(刑官)이 민응협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김애수의 장사(狀辭)에 용골대와 마부달까지 겸해 언급하였으므로 부득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황제의 명을 일컫고 다시 힐문한다면 민응협도 사실대로 말하려 하였습니다. 형부에서 김애수에게만 태벌(笞罰)을 가하고 두 역관은 풀어주었습니다. 그 후에 역관들 사이에서 두 역관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적발하고자 하여 신들에게 와서 뜻을 탐색하였는데, 신들은 허술함을 염려하여 모두 응낙하지 않았습니다.
이룡과 이성시는 모두 관서(關西)의 사족으로 본국을 잊지 않은 자입니다. 황제가 서방으로부터 돌아온 지 수일 만에 이성시가 용장(龍將)의 뜻으로 신들에게 와서 말하기를 ‘두 역관이 본국에 온갖 해독을 끼치는데도 공들이 이렇게까지 비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쉽지 아니한 일을 어찌 가벼이 응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성시가 말하기를 ‘이 일은 공들의 한마디 승낙만 얻으면 이루기가 나무가지 꺾어오는 것보다 쉽다. 우리들이 스스로 해내겠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들은 다만 말없이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성시가 비밀히 통지하기를 ‘금번 무역해 온 배와 감은 팔고산(八高山)이 공동으로 분배하는 물품인데, 두 역관이 이처럼 도적질하여 줄었다. 이곳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고발하는데, 하물며 이것은 들은 자가 많은데이겠는가. 어떤 사람이 「두 역관이 관중(館中)과 의논하고 줄여서 바쳤다.」라고 한다면, 팔고산의 뭇 노여움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우리들의 이 거사는 오로지 본국 및 공들을 위한 것이니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해를 깊이 따져 보지 않고 다만 일이 팔고산이 일제히 분노한 뒤에 발각된다면 관중에서도 스스로 밝히기 어렵다고 여겨 그대로 허락하였습니다. 이성시가 말하기를 ‘반드시 강원(講院)의 하인을 증인으로 삼아야 장사(狀辭)에 증거가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강원의 아전 강효원(姜孝元)이 항상 두 역관이 하는 짓을 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은미한 뜻으로 탐색하였더니, 강효원이 불끈 일어나 담당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강효원으로 하여금 한두 번 이룡의 집에 왕래하게 하여 심천로(沈天老)란 자와 면대하여 언약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두 이씨(李氏)에게 자주 경계하여 절대로 급히 발론하지 말도록 한 것은, 대개 문안사(問安使)가 일을 마치기 전에 어지러운 바가 있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사행(使行)이 떠나가던 날 신 김종일(金宗一)이 세자를 모시고 대궐에 나아가고 신 정뇌경이 궁을 지키며 관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부의 관원 4인이 몽서(蒙書) 1첩(帖)을 가지고 와서 강원의 관원을 여럿이 모인 곳에 불러내었습니다. 재신 박노가 신을 재촉하여 나가서 대답하게 하였습니다. 신 김종일은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응대하기가 불편하여 모른다고 답하였더니, 형부의 관원이 말하기를 ‘강원의 관원은 문서를 맡은 사람이 아닌가? 어찌하여 모른다고 하는가.’ 하므로, 신이 ‘동료가 그 일을 관장한다. 내가 맡은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형관이 관문 밖으로 물러가서 매우 엄하게 사람들을 물리치고 아전 강효원을 불러 물은 뒤에 이어서 신 정뇌경을 불렀습니다. 신이 나가보았더니 ‘황제가 묻는 것이니 숨겨서는 안 된다.’ 하고, 이어서 칙사의 사행 때 두 역관이 의주(義州)에다 복물(卜物)을 유치하였다가 추후에 실어온 곡절 및 배와 감을 훔쳐 축낸 일 등을 가지고 단단히 죄어 들면서 따져 물었습니다. 신이 처음에 누설하기 어려운 기색을 보였더니, 형관이 재삼 재촉하기를 ‘받은 자에게 죄가 있지 준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그때 내가 마침 명령을 받아 본국 의주에 나갔더니, 통사(通事) 최득남(崔得男)이란 자가 과연 그 말을 하였으나, 유치한 것이 무슨 물품인지는 나도 묻지 않았다. 배와 감은 차원(差員)이 수령해 오던 날 두 역관이 관소에서 감 1천 개 배 1천 개를 덜어내었다. 세자가 말하기를 「국왕이 헌상한 물품을 어찌하여 마음대로 줄이는가.」 하니, 두 역관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일체 내 말을 믿어야 한다. 설이 가까워지면 저절로 처치될 것이다.」 하였는데, 설 하루 이틀 전에 과연 가져갔다. 이것은 관중에서 아는 바가 아니며, 봉황성(鳳凰城)에서 훔쳐 축낸 물건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사신이 선사한 일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입을 빌어 말을 전하니 인정물(人情物)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였더니 4인이 일어나 나갔습니다.
하루 뒤에 또 3인이 와서 물었는데, 신의 답한 바는 일체 전일과 같았습니다. 그 3인 가운데 윗자리에 앉은 자는 자못 두 역관을 편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비록 장물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다 써버려서 현재 잡을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황제께서 묻는 일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나와 두 역관은 모두 본국 사람으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본 지가 지금 3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서로 친애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두 역관이 죄를 면한다면 우리들도 다행이다.’ 하였더니, 세 형관이 말하기를 ‘감과 배의 수효는 필시 아문에 치부해 두었을 것이니 내가 가서 상고해 보겠다.’ 하였습니다.
26일에 아문의 역관들이 와서 신 정뇌경과 강효원을 불러 형부에 가서 전의 일을 물었는데, 신이 대답한 바는 대개 전일의 말과 같았습니다. 곧 또 두 재신(宰臣)을 불러 물었는데, 두 재신이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어두워진 뒤에 용장(龍將)과 형부의 관원이 와서 말하기를 ‘정뇌경의 말이 재신과 같지 아니하니, 이것은 반드시 혐원으로 인해서 고발한 것이다.’ 하고, 왕복하며 힐책하였는데 일이 마침내 이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본성이 광망스럽고 경박하여 관중의 위아래 사람에게 의논하지 않고 갑자기 이룡 등의 감언에 속아서 작은 분을 참지 못하고 국가에 큰 욕을 끼친 것입니다. 원하건대, 신들의 죄를 바르게 다스리어 뒷사람들을 경계하소서.”
【원전】 35 집 48 면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주D-001]용장(龍將) : 용골대를 말함.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2월 7일(을미)
대사헌 이현영이 사직하나 윤허하지 않다
대사헌 이현영(李顯英)이, 볼모로 가 있는 아들 이휘조(李徽祚)가 정뇌경의 모의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감히 입시하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대죄하고 체직시켜 주기를 애걸하니, 상이 따뜻하게 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휘조는 포로로 잡혀간 이룡(李龍)과 사이가 좋았다. 정뇌경과 김종일이 이성시(李聖詩)의 모의를 받아들이고는 작은 쪽지로 이휘조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이룡과 서로 잘 아는가? 여기에서는 형세상 바로 통하기 어려우므로 강효원(姜孝元)을 그대에게 보내겠으니, 그대는 지시해 보내라.”
하니, 이휘조가 응낙하고 갔다. 정뇌경·김종일이 강효원을 불러 깨우쳐 말하기를,
“청역(淸譯) 정명수·김돌시(金乭屎)가 해독을 끼침이 무궁하다. 너도 국가의 늠료를 먹고 있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이미 제거할 만한 방도를 얻었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정문(呈文)하여 아문(衙門)에서 와서 네게 물으면 우리들이 기록해 준 내용대로 답하라.”
하였다. 이어서 심천로(沈天老)가 고발한 일로 쪽지에 써서 보여 주고, 강효원을 질자관소(質子館所)에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휘조에게 서책이 있어 고쳐 쓰고자 하니 네가 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휘조가 거짓말로 말하기를,
“네게 분(粉)이 있어 사려는 자가 있으니 우리 종과 함께 가라.”
하였다. 강효원이 그 종을 따라 어떤 곳에 이르렀는데, 바로 무오년에 포로로 잡혀온 이룡의 집이었다. 5∼6인이 같이 앉아 있었는데, 이룡이 말하기를,
“전일 김애수(金愛守)가 우리 나라를 위해 일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죄를 받았고, 나도 우리 나라를 위해 일을 도모하다가 죄를 받았으므로 우리 두 사람은 감히 다시 도모할 수 없다. 지금 이공(李公)이 말한 바로 인하여 심천로란 사람을 구하였다. 이 사람은 평소에 송사(訟事)를 잘하였으므로 강원(講院)에서 이미 결정하였다. 조만간에 아문에서 네가 출납한 문서에 대해 불러 물을 것이니, 모름지기 일찍부터 자세히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라. 심천로가 여기에 있으니 지금 얼굴을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강효원이 돌아와서 관중(館中)에 보고한 뒤 수일이 지나서 이휘조가 정뇌경에게 말하기를,
“이룡이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강효원을 다시 보내면 답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 하였다.”
하니, 정뇌경이 강효원을 보내어 그의 말을 듣고 형부의 관리가 와서 물을 때에 이것으로써 답하게 하였는데, 왕복하며 서로 통한 것은 실로 이휘조가 소개함으로 인한 것이라 한다.
【원전】 35 집 50 면
【분류】 *외교-야(野)
[주D-001]무오년 : 1618 광해 10년.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3월 14일(신미)
재자관 이응징이 정뇌경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재자관(齎咨官) 이응징(李應徵)이 치계하였다.
“신이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아문에 통보하였더니, 청역(淸譯) 김돌시(金乭屎)가 신의 맡은 일을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필선 정뇌경이 공이 있는 사람을 모함한 것 때문에 성상이 진노하여 속히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라고 명하셨으므로 내가 형관(刑官)으로서 명을 받들어 자문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김종일은, 모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한 방에 같이 거처하면서 일이 나기 전에 발각하지 못한 죄는 면하기 어려우니 또한 잡아갈 것이다. 다만 형살(刑殺)은 막중한 일이므로 황지(皇旨)를 여쭈어서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황제가 멀리 나가서 내가 머물러서 기다려야 하니, 참으로 답답하다.’ 하였더니, 김역(金譯)이 말하기를 ‘황제가 행차하실 적에 반드시 결정한 말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다시 용장(龍將)에게 여쭈어서 알려주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뇌경은 우리들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동궁(東宮)을 속였으니 실로 죄가 크다. 처단을 쾌히 허락한다는 말을 들으니 자못 기쁘게 여겨진다.’ 하였습니다.
청역 하사남(何士南)이 재신에게 몰래 통보하기를 ‘용골대·마부달 두 장군의 말을 들어 보았더니 「조선에서 정뇌경을 구원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재자관을 몰아내려고 하였는데, 지금 그 말한 바를 들어보니, 머물러 두고서 황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원전】 35 집 52 면
【분류】 *외교-야(野)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6월 28일(갑인)
신경진이 정역 등에게 상주기를 청하다
신경진이 정역에게 몰래 통하여 관직으로 상주는 뜻으로 말하였더니, 정명수가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관교(官敎)에 지난해의 날짜로 써주기를 원하였으며, 또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또 그의 처남인 정주(定州) 사람 봉영운(奉永雲)을 서로(西路)의 변장에 제수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김돌시(金乭屎)도 그의 족속 2인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벼슬을 주고 한 사람은 사은사의 일행과 같이 보내기를 원하였다.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원전】 35 집 63 면
【분류】 *외교-야(野) / *인사-관리(管理)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7월 20일(을해)
청나라 칙사의 횡포에 대한 평안 감사 민성휘의 치계
평안 감사 민성휘가 치계하였다.
“칙사 등이 연로의 여러 고을에서, 벌여 놓은 기물들을 모두 빼앗아가고 쇠붙이·가죽·쌀·찹쌀·꿀 등의 물건을 더욱 요구하여 짐바리가 날로 늘어나 지금 이미 5백여 바리나 됩니다. 아울러 역마를 빼앗아간 수효도 대동역(大同驛)의 말이 6필, 어천역(魚川驛)의 말이 1필, 황해도의 역마가 2필이나 됩니다. 또 정명수(鄭命守)는 동지부사(同知府事)의 고신첩(告身帖)을 얻은 까닭으로 자못 기뻐하는 빛이 있으나, 김돌시(金乭屎)는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원전】 35 집 66 면
【분류】 *외교-야(野
鄭命壽(정명수) 온 백성이 그가 죽길 바랬으니
鄭命壽정명수
정명수(鄭命壽, ?~1653)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의 군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청나라 말을 배우고 조선의 사정을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 청나라 장수의 역관으로 들어와
동포를 괴롭히고
매국행위를 일삼았다.
그뒤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영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여 뇌물을 주고, 그의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그는 또 1639년 그의 처족인 정주의 관노 봉영운(奉永雲)을 정주군수로 임명하도록 강청하고, 이어 병조의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그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를 노략질하였다. 1653년(효종 4) 심양에서 시강원서리 강효원(姜孝元), 성주포수 이사용(李士用), 시강원필선 정뇌경(鄭雷卿) 등에게 모살되었다.
인조 15년 정축(1637, 숭정 10) 11월 8일(임신)
청의 사신과 정명수가 기생 바치길 요구하니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하다
이때 청나라 사신과 정명수(鄭命壽)가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 방기(房妓)
바치기를 요구하였는데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묘당이 아뢰기를,
“그 뜻을 맞추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17년 기묘(1639, 숭정 12) 12월 2일(갑신)
역관 정명수가 병조 좌랑 변호길을 폭행하다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변란(卞蘭) 등이 병조 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끌고 들어
와 큰 몽둥이로 때렸다. 이때 변호길은 관소(館所)를 파수하는 낭청(郞廳)으로 관소
문 밖에 있었는데, 정명수의 방기(房妓)가 문을 나와 폐단을 일으키므로 변호길이 통
렬히 금지하자 방기가 정명수에게 호소하여 욕보인 것이었다.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8월 23일(임인)
청나라에서 준 은자를 가로챈 혐의로 최득남을 사형에 처하게 하다
沈大孚심대부
沈大孚심대부
생몰년 1586-1657(선조19-효종8)
본관 청송(靑松)
자 신숙(信叔)
호 가은(嘉隱)/범재(泛齋)
심대부(沈大孚)
1586(선조 19)∼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신숙(信叔), 호는 가은(嘉隱)·범재(泛齋). 영천군수 의검(義儉)의 손자이고, 경기도 관찰사 대(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라감사 최홍한(崔弘僩)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1) 선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중림찰방(重林察訪)을 거쳐, 1630년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32년 형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관직에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사사(賜死)된 인성군(仁城君)의 세 아들이 절도에 위리안치된 것을 왕이 관용을 베풀어 방면하자 이에 찬성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반대파의 탄핵으로 보령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뒤 1634년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는데, 가도(椵島)에 진을 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여러 고을을 횡행하며 민폐를 끼치자, 이들 대표와 횡포를 금하는 조약을 엄중히 체결하여 민폐방지에 공헌하였다.
뒤에 서로(西路)의 행정이 부패한 데 혐오를 느껴 한때 사직하였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이어 수찬·교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1638년 또다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삼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삼남도사 겸 진정사를 택정할 때 경상도사로 뽑혔으며, 이어서 수찬·헌납·종부시정을 지냈다.
1643년 성산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응교·시강관·필선 등을 역임하였다.1649년 인조가 죽자 유계(兪棨) 등과 조(祖)자의 묘호를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회양으로 귀양갔다가 1657년에 풀려났다. 이해에 죽었는데, 사후 신원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http://koreandb.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person_view.html?id=0006603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13권
애사(哀詞)
사간(司諫) 심대부(沈大孚)에게 드리는 애사 병서(幷序)
슬프다, 우리 신숙공(信叔公 심대부(沈大孚))이 평생 고서(古書)를 읽어 옛사람의 도를 즐기더니, 벼슬하여 요직에 올라서는, 옛사람의 도대로 그 임금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언사(言事) 때문에 배척을 당하여, 객지에서 시름하고 빈궁하게 곤욕을 당하면서 성내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고 이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은 바른 도 때문에 드러났고, 바른 도 때문에 빈궁하게 되었다.’ 하며, 그 도를 슬퍼하고 그 운명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나는 ‘운수가 트이고 막히는 것은 천명이다. 대장부의 심사(心事)는 마땅히 이와 같이 뜻하는 바가 크고 뛰어나야 한다. 다만 슬퍼하는 것은 세도(世道)가 처량하여 착한 사람이 날로 다 없어져서 갈팡질팡 갈 곳 몰라 하는 나를 깜깜한 속에서 원망하며 한없이 울게 할 뿐인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애사를 지어 슬퍼합니다.
그 애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못가를 거닐고 읊조리며 / 行吟澤畔
상루를 슬퍼하노니 / 哀湘纍些
여추가 추악하고 / 謂閭娵醜
모모가 곱다 하네 / 嫫母媚些
지란은 꺾어져도 / 芝蘭萎折
꽃다움 없어지지 않으니 / 芳不滅些
이름은 백대토록 영원히 빛나는데 / 百代之名永輝光些
혼백은 서글퍼 고향을 슬퍼하노라 / 魂魄悽愴悲故鄕些
[주D-001]상루(湘纍) : 상은 소상강을 말하고 루는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닌 것으로 인하여 죽는다는 뜻으로 이 사실은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보인다. 여기서는 심대부(沈大孚)가 쫓겨난 것이, 굴원(屈原)이 쫓겨나 못가에서 읊조리다가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은 일과 같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2]여추(閭娵)가 …… 곱다 하네 : 간신을 가까이하고 어진 이를 멀리 한다는 뜻이다. 여추는 옛날 미인으로 《초사(楚辭)》 동방삭(東方朔) 칠간원세(七諫怨世)에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하고 어진 이를 멀리하며, 여추를 헐뜯어 추악하다 하네.” 하였다. 모모(嫫母)는 추한 여인으로 《열녀전(列女傳)》에 “황제(黃帝)의 제4비가 모모인데, 외모는 제일 추하지만 가장 어질었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추하다는 뜻만 취하였다.
李敬輿 이경여
李敬輿 이경여
감사 이경여는 병란 중에도 학문을 세우고 퇴폐한 풍속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였다.
2월에 사임하고 떠나가니 남쪽의 백성들이 기대가 무너져 실망하였다. ---용담록--
1585(선조 18)∼1657(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목사 수록(綬祿)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하여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하였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하여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으나,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1 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15 尹承勳의 딸 海平尹氏와 혼인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17 司馬試에 합격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25 10월, 增廣試에 乙科로 합격, 승문원에 分館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26 12월, 검열이 되다. 이후 설서, 대교를 지내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28 4월, 봉교가 되다. ○ 11월, 공조 좌랑이 되다. ○ 12월, 정언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다.
광해군 6 1614 임인 萬曆 42 30 1월, 直講이 되다. ○ 9월, 司書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31 4월, 京畿 都事가 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32 4월, 金剛山을 비롯한 關東 지방을 유람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33 3월, 부인상을 당하다. ○ 4월, 忠原 縣監이 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34 8월, 豐川任氏와 혼인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35 벼슬을 버리고 興元江 가에 우거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36 8월, 부친상을 당하다. 驪江에서 居喪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39 3월, 反正 뒤 부수찬이 되다. 이후 교리, 헌납,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40 1월, 李适의 난에 扈駕하여 公州로 가다. 體察府 從事官을 겸하다. 평정 후 隨駕하여 還都하다. ○ 3월,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 10월, 이조 정랑이 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41 2월, 暗行御史로서 嶺南을 다녀오다. ○ 6월, 體察府 從事官으로서 南漢山城을 순찰하고 오다. ○ 8월, 명을 받들고 西沿의 邊備를 시찰하다. ○ 10월, 사간이 되다. 성균관 사예, 응교를 역임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42 7월, 號牌御史로서 嶺南을 다녀오다. ○ 12월, 賜暇讀書하다. 곧 號牌御史로서 湖南을 다녀오다. 호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43 1월, 胡亂이 일어나자 扈駕하여 江都로 들어갔다가 4월에 돌아오다. ○ 5월, 동부승지가 되다. ○ 9월, 충청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4 10월, 대사성이 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45 윤4월, 이조 참의가 되다. ○ 가을, 扶餘 白馬江 가에 定居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46 2월, 淸州 牧使가 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47 7월, 부제학이 되다. ○ 10월,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휴가를 받아 扶餘로 돌아와 상소, 사직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48 8월, 우승지로 소명을 받들고 올라와 곧 부제학이 되다. ○ 11월, 휴가를 얻어 扶餘로 돌아와 상소하여 사직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49 1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50 봄, 부제학이 되다. 곧 上箚하고 扶餘로 돌아오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52 봄, 우승지로서 入對하여 時事를 진달하다. ○ 12월, 호란이 일어나자 南漢山城으로 扈駕하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53 3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54 1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扶餘로 돌아오다. ○ 3월, 동지중추부사로서 상소하여 御留山城의 수축을 청하다. 곧 부제학으로 올라오다. ○ 5월, 대사헌이 되다. 얼마 후 휴가를 얻어 扶餘로 돌아와 상소, 사직하다. ○ 12월, 우승지가 되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55 2월, 부제학 겸 대사성이 되다. ○ 3월, 이조 참판이 되다. ○ 11월, 형조 판서가 되다. ○ 12월, 모친의 병환으로 扶餘로 돌아오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56 2월, 모친상을 당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58 6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申翊聖, 李明漢 등과 함께 淸 나라로 잡혀가 瀋陽에 구류되다.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59 3월, 還國하여 扶餘로 돌아가다. ○ 11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右議政이 되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60 2월, 瀋陽으로 사신 갔다가 다시 구류되다. 金尙憲, 崔鳴吉과 만나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61 3월, 세자를 모시고 돌아오다. 영중추부사가 되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62 2월, 姜嬪의 賜死를 반대하다가 削奪官職, 門外黜送당하고, 珍島로 遠竄, 圍籬安置되다.
인조 26 1648 무자 順治 5 64 3월, 三水로 移配되다. ○ 5월, 인조가 승하한 뒤 7월에 牙山으로 量移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66 1월, 석방되어 돌아오다. ○ 3월, 領議政이 되다. ○ 겨울, 嶺南 儒生의 疏斥으로 解職을 청하다.
효종 2 1651 신묘 順治 8 67 봄, 청 나라 사신의 압력으로 영의정 직을 떠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69 3월, 영중추부사로서 인재를 천거해 올리다. ○ 7월, 재이로 인하여 召命을 받들어 入對한 뒤 萬言箚를 올리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70 겨울, 청 나라 사신이 다시 와서 문제 삼자 물러나 忠州 田家로 피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71 5월, 耆社會에 나아가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73 8월 8일, 明禮洞 집에서 졸하다. 遺疏를 자손이 올리다. ○ 10월, 交河 月籠山 아래에 장사 지내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 4월, 抱川 鑄金山 아래 安陽洞으로 移葬하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 家狀(李敏敍 撰) 및 諡狀(金錫胄 撰)을 완성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 6월, ‘文貞’으로 시호를 내리다. ○ 9월, 珍島 鳳巖祠宇가 낙성되어 배향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 아들 李敏敍와 손자 李師命이 문집을 간행하다. (宋時烈의 序) 이민서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 神道碑銘(宋時烈 撰), 墓表(李頤命 撰)를 짓다.
기사전거 : 年譜, 家狀(李敏敍 撰, 西河集 卷15),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아들 李敏敍에 의하여 정리, 편차되었다. 1684년(숙종 10)에 宋時烈이 지은 序文에 의하면, 李敏敍가 大提學으로 있을 때 奏御文字를 모으고 정리하여 편차하였는데 여기에 여러 작품을 합쳐 간행하려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여러 작품이란 곧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정리한 시문을 뜻하는 것으로, 1681년에 李敏敍가 지은 家狀에서 ‘詩文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다.’ 한 그 시문을 말한다. 李敏敍는 이렇게 奏御文字와 家藏 草稿를 모아 편차해서 15권의 定稿本을 만들었던 것인데, 「肅宗實錄」에 의하면 李敏敍의 大提學 재임은 1680년(숙종 6) 5월~1683년(숙종 9) 4월 사이였다. 따라서 李敏敍는 대제학 재임 중 1681년에 諡號를 청하기 위하여 家狀을 지은 시기를 전후하여 유고의 간행을 도모하여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행은 宋時烈의 序文이 쓰여진 1684년에 이루어졌는데, 「白江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저자의 손자 李師命이 全羅道 觀察使로 나가게 되면서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李師命은 「肅宗實錄」에 의하면, 1682년 8월에 제수되고 1684년 7월에 仍任되어 임기를 채웠다. 따라서 李敏敍가 대제학으로 있고 李師命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간 1682년경에 문집 간행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1684년에 15권 7책의 목판본으로 완성된 것이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6275)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409)에 소장되어 있고, 장서각(4-6036),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l-A238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같은 판본으로 15권 8책본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본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목판본으로 된 「白江年譜」 1책이 전해지고 있다. 그 凡例를 통해 보면, 家狀과 諡狀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고, 補遺를 붙여 狀碑나 여타 文字 가운데 年譜에 다 실을 수 없는 것이나 遺聞, 瑣錄에 나오는 기록들, 家藏 手筆帖 가운데 子侄을 訓戒한 書와 箴 등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이 연보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英宗大王 32년’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正祖 연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장서각(2-744)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문집의 重刊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본서의 저본은 1684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권10의 제17판과 제27판이 잘못 結冊되어 있어 바로잡았다.
丁丑年 仁祖15年 1637년 --윤4월 듬
역사보기/
1월 강화도 함락.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 항복함.
2월 후금군 철수.
3월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에 잡혀가 심양에서 살해됨.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감.
4월 이경여를 경상 감사로 관직을 제수하다.
戊寅年 仁祖16年
正月朔日(甲寅月 乙丑日) 대월 평달 양력/ 1638 년2월 14일 房
역사보기/
1월 5일(기사)경상 감사 이경여가 사직하니 윤허하다
8월 8일(무술)평안도 철산부에 우박이 내리다
8월 26일(병진) 흉년의 백성 구제에 대해 의논하다
8월 29일(기미) 전라도에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손상되다
9월 1일(경신) 함경도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4천 3백여 명이다
10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효종)이 청태종의 서정(西征)에 동행함.
고귀한 생명
현종 14권 8년 6월 21 일 (갑오) 1667년
임인관 등 명나라 상인 95명이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飄風(표풍)속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그들은
또 다른 죽음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될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로 압송되어 불귀의 객이 될 것인지?
[현종]임금의 결정이 내려지기 까지 100일 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압송되는 동안
당도한 고을의 현관들에게 애걸복걸하였고,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길 바라는 간절한 글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건네주기도 하였다.
한편 그들을 구하기위해
동몽 교관(童蒙敎官) 이상익(李商翼)이 상소하기를,
“오늘날의 국사는 말하자니 통곡스럽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한갓 이해 관계의 소재만을 알고 구제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모르니, 역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도리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직함 하나를 주어 제주도로 달려가서 압송해 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어찌 별도로 잘 처리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신이 그들을 놓쳐버렸다고 청나라에 보고하면 신에게만 죄가 내릴 것이고, 나라에까지 화가 미칠 리는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미천한 신 하나를 아껴 의리상 차마 하지 못 할 짓을 차마 하여 스스로 천하 후세에 기롱을 받으시려 하십니까. 더구나 신의 아비 이흘(李忔)이 지난 숭정(崇禎) 기사년793) 에 중국에 갔다가 불행히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하였는데, 상구(喪柩)가 돌아올 때 특별히 황조(皇朝)에서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은전을 입었으므로, 그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하늘처럼 가이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주신 그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이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청을 허락하시어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고을의 현관들은 한 잔 술로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적인 말을 전했으나 !
길고긴 100일
현종 14권 8년 10월 03 일 (갑술) 002 / 표류해 온 중국인 95명을 북경으로 압송하다.
조정에서 ‘이미 청나라에 통보하여 다시는 변통할 뜻이 없다.’고 하자, 인관 등이 모두 울부짖으며 죽어도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그들을 내몰아 압송해 가니, 연도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비분강개하였으며,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말하는 자도 있었는데, 그 시에,
남쪽 나라 귀한 손 바다 건너 왔는데
붉은 구름 한 떨기 해 곁에 떠있네
천추의 큰 의리 아는 이 없어
석실산 앞에서 통곡하고 돌아왔네
라고 하였다.
일행 중 한사람이 분통하여 강물에 뛰어들었다.
고귀한 생명은 명분의 희생양이되었다.
뒷날 역사는
정조 49권 22년 7월 23 일 (을유) 003
유민(遺民) 임인관(林寅觀) 등을 봄과 가을에 똑같이 현충사(顯忠祠)에서 제사지내라고명하였다.
○若林寅觀等九十五人之事, 固出於迫不得已之意, 而故副學李端相之詩, 故洗馬尹以健之疏, 可以無愧於千秋。 彼九十五人之一時竝戮, 慘傷錯愕, 何嗟及之。 其來泊雖在耽羅, 其回程必由灣上。 而于今一百三十有二年之間, 尙未有宣鬱疏冤之擧, 其爲闕典欠事, 莫有過此。 適當二十一義士竝享之時, 九十五人, 亦一體造牌同祭, 題曰: ‘皇朝遺民林寅觀等九十五人。’ 若是, 則禮似有據, 義亦有辭。 竝以此意, 分付。
임인관 등 95인의 일은 그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 절박한 심정[迫不得已]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故)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시나 고 세마(洗馬) 윤이건(尹以健)의 소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가히 천추(千秋)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95인이나 되는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죽임을 당하다니 처참하고 경악스러워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이 와서 정박한 곳은 탐라(眈羅)라 할지라도 돌아갈 때에는 필시 의주(義州)를 거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1백 32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는 일을 행하지 않았으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마침 21의사를 함께 제향(祭享)하는 때를 만났으니 95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위패를 만들어 같이 제사를 올리되 위패에는 ‘황조 유민 임인관 등 95인’이라고 써넣게 하라. 이와 같이 하면 예(禮)에도 의거하는 바가 있게 될 듯하고 의리상으로도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모두 이런 뜻으로 분부하라.”
[스크랩]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외교승 겐포(玄方)를 곁에서 떠나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건부 승리’이기도 했다. 바쿠후(幕府)는 요시나리를 선택하면서 그의 역량을 시험하고, 동시에 조선을 떠보는 조건을 달았다. 조선은 쓰시마의 소오를 다독거리며 바쿠후와의 관계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했다.
●바쿠후의 의도 ‘조선과 주고받은 국서를 멋대로 고쳤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처벌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바쿠후는 점차 쇄국(鎖國)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長崎)로 집중시키고, 동남아 등지로 가는 무역선(朱印船)의 출항과 일본인의 도항(渡航)을 금지시키는 조처를 구상했다. 바쿠후는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조선과의 관계도 다시 정비하려고 했다. 무역을 유지하면서도 유럽 국가들을 통한 기독교 유입을 차단하려 했던 바쿠후에게 조선과의 관계는 중요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유일하게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였다.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과 국교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데 필수적이었고, 조선과의 교역 또한 매우 중요했다.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선택’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가까스로 재개시켜 놓은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에 대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진 데다, 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는 조선을 상대해 왔던 소오 가문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쿠후는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주면서 ‘1636년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通信使)를 초치(招致)하라.’고 명한 것은 요시나리의 조선에 대한 교섭 역량과 조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조건이었다.1635년 8월, 바쿠후는 향후 겐포를 대신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할 승려들을 직접 선택했다. 교토(京都) 동복사(東福寺)의 승려 인서당(璘西堂)과 소장로(召長老), 천룡사(天龍寺)의 승려 선장로(仙長老)가 그들이었다. 이제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 쓰시마로 들어가 머물면서 조선으로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을 맡게 되었다. 교토에서 온 외교승들이 바쿠후의 지휘 아래 쓰시마의 대조선 외교를 직접 관장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야나가와 이켄’이 종료된 뒤 인서당이 맨 먼저 쓰시마로 건너왔다. ●‘일본위협론’이 다시 제기되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나가와 이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바짝 긴장했다. 후금의 위협과 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또한 소오 요시나리를 매개로 유지되어 왔던 조일(朝日)관계에 변동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퍼지고 있었다. 특히 1635년 연말에 재이(災異)가 거듭되면서 ‘일본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창덕궁 정전(正殿)에 벼락이 내리치고, 한성부 연못의 물빛이 붉게 변하는 변고가 나타났다.11월6일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사간 민응형(閔應亨)은 “옛날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괴상한 변고가 이어지는 법”이라며 “선조의 능침(陵寢)이 무너지고, 큰바람 때문에 나무가 뽑힌 것은 장차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무렵을 예로 들었다. 신묘년(1591년)에 풍재(風災)가 극심하더니 이듬해 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재이가 거듭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는 민응형의 발언에 조정은 술렁였다. 누가 쳐들어 온다는 것인가? 민응형을 비롯한 삼사(三司) 신료들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목했다.11월7일, 인조는 비변사 당상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일본이 과연 위험하냐고 물었다. 오윤겸(吳允謙)은, 뚜렷하게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성정(性情)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만일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조선이 일본보다 후금을 우대하고 있다.’고 쇼군에게 참소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계했다. 또 시게오키가 비록 패했지만 쇼군 주변에 시게오키를 두둔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이홍주(李弘胄)와 신경진(申景 )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수군을 잘 정비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했다. 11일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차자(箚子)를 올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거론했다. 그는 조정이 오로지 서변(西邊)을 막는 데만 급급하여 남변(南邊)의 방어는 거의 팽개쳐 버렸다고 비판했다. 남쪽의 군병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무기도 엉성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 조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백성들을 유사시에 전장으로 내모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상헌은 남변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통제사영(統制使營), 경상 좌수영(左水營)과 우수영(右水營)에 감군어사(監軍御史)를 파견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위협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조정은 후금의 동향이 불온하다고 느낄 때마다 주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삼남에서 수군과 전선(戰船)을 차출해 강화도 방어에 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사(明使) 노유녕(盧維寧)을 접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 수군의 입방(立防)을 면제해 주고 대신 포(布)를 받기도 했었다. 일본의 위협을 고려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방책이었다. ●신료들과 달리 인조는 日에 대해 낙관론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일본에 대해 대체로 낙관론을 폈다. 그는 ‘관백(關伯)이 전쟁에 싫증을 내서 백성들에게 총포를 쏘지 못하게 하는 데다, 반란을 걱정하여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고 있으니 다른 나라를 넘볼 근심은 없다.’며 ‘일본위협론’을 일축했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조정은 수군을 점검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하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거의 모든 신경이 서북변 쪽으로 가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고식책(姑息策)이었던 셈이다. 이제 일본에 대한 대책은 유화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아 차렸는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왔다. 겐포를 대신하여 쓰시마에 부임한 인서당은 1635년 12월,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분은 ‘일본은 명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 연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쓰시마가 조선의 예조를 ‘합하(閤下)’라고 부르던 것도 ‘족하(足下)’로 바꾸겠다고 했다.‘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나라이고 쓰시마 역시 예조와 동등하니 합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인서당이 기초한 문서를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비변사 신료들은 일본과 사단이 생길까 우려하여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일본은 합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조선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은 결국 이후부터 쓰시마 도주를 ‘족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도 수락하고, 바쿠후가 요청한 마상재(馬上才, 말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유희)를 벌일 인원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측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 준 것이었다. 모두 소오 요시나리의 낯을 세워 주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기사일자 : 2008-04-16 28 면 |
[스크랩] 홍승주(洪承疇) : 명청 교체기의 이신(貳臣)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청나라의 개국과 관련하여, 범문정을 이야기하면, 홍승주를 빠트릴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한족이고, 청나라건국에 공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범문정은 동정하지만, 홍승주는 좋아할 수 없다.
청사고에서 :홍승주는 자는 형구(亨九)이고, 복건 남안(천주) 사람이다. 명나라 만력44년에 진사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숭정황제가 아주 총애하고 믿던 명나라의 중신이다. 그는 일생동안 명나라주씨황가의 은덕을 입었고, 그 깊이는 바다처럼 깊었다. 이 점에 대하여 그 자신도 부인하지 않았다. 홍승주는 대련을 하나 지어서 자기집에 걸어둔 적이 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글이어?.
군은심사해(君恩深似海)
신절중여산(臣節重如山)
임금의 은혜는 바다처럼 깊고,
신하의 절개는 산처럼 무겁다.
홍승주의 벼슬길은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록 명문집안출신이지만, 그의 증조부때 집안이 몰락했고, 홍승주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집안이 빈한했다. 그리하여 그가 11세때 부득이 공부를 중단해야 했고, 모친을 도와 두부를 만들어 거리에 가지고 나가 팔았다. 그러나, 홍승주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두부를 팔면서도 빈시간을 이용하여 자주 친족인 홍계윤이 연 학관에서 강의를 청강하곤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도와서 대자(對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홍계윤은 홍승주가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포부를 가졌음을 알고, 학비를 면제해주고 제자를 삼아주었다. 홍승주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어 스승의 칭찬을 들었다. 스승인 홍계윤은 일찌기 그의 문장에 평가를 하면서 "가구천리, 국석만균(家駒千里, 國石萬鈞)"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또 한번은 그가 홍계윤 선생과 대련을 만들면서 벼루를 주제로 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검은 벼루, 벼루는 검다. 관리의 철골은 단단하게 검게 싸여 있다". 이는 그가 청렴하고 성취를 거두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큰 포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만력43년(1615년)에 홍승주는 향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북경의 회시에 참가하여 진사가 된다. 홍승주는 벼슬길에 나간 이후, 계속 강서, 절강, 섬서등지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모두 하급관리였다.
홍승주가 드러나게 된 것은 숭정제때였다. 명나라말기의 정치부패로 농민반란이 계속되었다. 숭정원년(1628년)에서 숭정3년의 기간동안 고영상, 장헌충, 이자성이 선후로 반란을 일으켰다. 홍승주는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의 정치, 군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참정, 순무를 거쳐 섬서삼변총독을 거쳐, 태자태보, 병부상서의 직함을 지니고 하남,산서,섬서,호광,사천의 5개성의 군사총독을 지냈다. 홍승주의 최대공로는 고영상을 포로로 잡아 죽이고, 이자상을 대파한 일이다. 일시에 홍승주의 명성은 크게 떨쳤고, 그의 군공으로 "홍군(洪軍)"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때부터 숭정황제는 홍승주를 특히 아끼고, 계속 상을 내렸다. 숭정11년(1638년) 9월, 청태종이 의주를 점령하고 금주를 포위공격하여, 관외의 사정이 아주 다급해졌다. 청사고에 의하면, "장열제(숭정)는 홍승주를 불러서 보위하게 하였다. 다음 해 봄, 홍승주를 계요군무총독으로 전보했다" 숭정12년(1639년) 봄에 숭정제는 부득이하게 홍승주를 계료총독에 임명하고 관외의 군무를 담당하게 한다. 숭정이 보기에 만청의 위협이 농민반란군의 위협보다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부득이 동쪽담장을 헐어서 서쪽담장을 메우는 식으로 홍승주를 농민반란집압업무에서 빼서, 관외의 청나라를 대응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홍승주는 숭정제의 이런 은덕을 배신한다. 송산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붙잡힌다. 동시에 포로로 잡힌 사람은 구민앙(邱民仰), 조변교(曹變蛟), 왕정신(王廷臣)등이 있었다. 청사고에 의하면, "승주, 민앙, 변교, 정신 및 여러 장수를 붙잡고, 항복한 잔졸이 3천이 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청태종은 구민앙, 조변교, 왕정신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오로지 홍승주는 성경으로 호송하라고 지시한다. 청태종의 뜻은 분명했다. "황상은 홍승주를 거두어 쓰고 싶어했다" 처음에 홍승주는 두려움 없이 죽음으로 숭정제의 은혜에 보답할 뜻을 나타냈다. 일찌기 "목을 내밀어 칼날을 맞이하고자" 하였고, 시종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홍승주의 이런 행위는 완전히 살아남기 위한 지혜였다고 말한다. 이로써 자기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설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청태종이 홍승주의 항복을 받아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청궁희에서 여러번 언급되고, 소설로도 쓰여졌다. 예를 들면, 홍승주가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십수명의 미녀를 보내어주었다든지, 장비(후의 효장태후)로 하여금 직접
홍승주를 설득하게 하였고, 친히 인삼탕을 먹여주었다든지 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바로 범문정이 홍승주의 항복을 권유한 일일 것이다. 청사고의 기재에 의하면, 청태종은 범문정에게 항복권유를 명한다. 범문정은 처음에 항복얘기를 꺼냈다가 홍승주가 큰 소리로 욕을 했다. 그러자, 범문정은 꾹참고 항복 얘기는 꺼내지 않고 그저 고금의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야기하는 중에 서까래에서 먼지가 떨어져서 홍승주의 옷에 묻었다. 홍승주는 말하면서 그것을 털어냈다. 범문정을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홍승주는 죽지 않습니다. 옷도 아끼는데 하물며 자기의 몸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음 날, 청태종이 친히 태묘로 갔다. 홍승주는 서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청태종은 이것저것 불편한데가 없는지 물으며, 홍승주가 옷을 �게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담비가죽옷을 벗어서 홍승주에게 입혀주었다. 이때 홍승주는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탄식하며, "진명천자이구나"라고 하고는 바로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청태종은 아주 기뻐서 "이제 길안내자를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라고 했다고 한다. 길안내라라 함은 청나라가 중원으로 들어가는데 길을 안내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때, 북경의 숭정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숭정제는 홍승주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원래 홍승주가 변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청사고의 기재에 의하면, "숭정은 홍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16단에 제사를 지내고, 도성바깥에 사당을 만들어서, 구민앙과 나란히 놓았으며, 숭정제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나중에 홍승주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는 제사를 그만두었다." 원래 숭정제는 홍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조회를 멈추었고, 왕후의 규격으로 16단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7일의 제사 즉 5월 10일에는 친히 제사를 주재해서, "도홍경락문"을 써서 천하에 반포했다. 동시에 제사지낸 것은 피살된 순무 구민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제9단에 제사를 지낼 때, 홍승주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숭정제는 깜짝 놀랐다. 홍승주의 인품은 숭정제때 아주 이름이 높았다. 홍승주가 가장 충성스럽다는 것이 보편적인 평가였다. 이처럼 충성스런 사람이 어찌 변절한단 말인가? 숭정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 제사는 슬쩍 중단되고 말았다. 여러해후, 청나라가 북경에 들어온 후에야 백성들은 비로소 홍승주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놀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또 한가지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있는 건이다.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비록 청태종이 후대했지만, 그는 관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왜인가? 청사고에 의하면, "홍승주는 항복하고, 상황기한군에 예속외었다. 태종은 그를 후하게 대해주었지만, 태종이 죽을 때까지 관직을 명받지 않았다" 홍승주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홍승주가 여전히 그의 품격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즉, 명나라가 망하지 않고, 숭정제가 살아있는 한 그는 관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그래도 절개를 지닌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나라조정은 홍승주와 같은 투항한 신하들에 대하여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고, 안심하지 못했다. 이것이 청태종의 진실한 생각이다. 그가 중시한 것은 홍승주의 계책이어ㅆ고, 명나라의 정치군사에 대한 정보였다. 그에게 실권을 쥐어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숭정제에 대하여 미안한 감이 있어서라면, 그것은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섭정왕 도르곤이 북경에 들어올 때, 홍승주는 이미 말을 타고 아주 공을 많이 세웠다. 숭정제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매산에서 목을 맬 때, 홍승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도르곤을 도와서 천군만마로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가 미안해 했다고? 그럴 가능성은 없다. 도적(남명)을 체포하고, 평정했다. 나중에 다시 초,월,전,검제성경략을 맡아서 서남을 평정했으니, 모두 그의 공이다" 이에 이르러 그는 공로가 크게 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점은 청나라의 주군은 여전히 홍승주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도도의 후임으로 남경에 있을 때, 밀고사건을 겪게 되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다. 한번은 남명 노왕의 부하로부터 온 항복권유서신사건이고, 또 한번은 승려인 함가의 사건이다. 후자는 승려가 지니고 다니던 반청복명의 서신초고일 뿐이었다. 다행히 도르곤이 여전히 홍승주를 중용하여 더 이상 추궁받지 않았다. 홍승주는 청나라에 대한 공이 컸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순치18년(1661년) 정월에 순치제가 죽고 강희제가 죽위한 후 홍승주는 그만 쉬겠다고 상소를올린다. 조정은 논쟁을 거쳐 3등아달하하번(경차도위)의 세습작위를 내리고 끝낸다.
또 하나의 일도 홍승주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건륭황제는 청나라건륭41년 12월 초3일에 조서를 내려, 국사관에 <<명계이신전>>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명청의 교체기에 홍승주등 명나라말기의 신하들은 바람의 흐름을 보고 의탁해왔는데, 당시 청나라는 "천하통일의 규모를 생각하여 부득이 그대로 임용하였고, 이로써 인심을 안정시키고, 순과 역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승리국의 관료로서,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서, 그 주인의 위기에 도움을 주지 아니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구하여 항복한 것이니 어찌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이는 분명히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신하들을 멸시하는 내용이었다. 건륭은 충군을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신하를 모조리 "이신(貳臣, 두 황조를 섬긴 신하)"으로 불렀다. 충군사상에서 보면 이들은 절개를 지키는데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홍승주 등은 모두 청사고의 <<이신전>>에 들어가게 된다.
홍승주는 은혜를 저버리고 절개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그의 친구들도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도 적지 않게 전해진다. 한가지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홍승주가 청나라조정에서 관직을 지낸 이후 한번은 음력 곡우(穀雨)때 친구와 바둑을 두었다. 그 동안에내왔고 시녀가 차를 보내왔고, 손님이 마셨다. 마시니 향기가 입과 코에 가득했다. 그래셔, "차향이 좋다고 싶었더니 원래 우전차(雨前茶, 곡우이전에 난 새순으로 만든 차로 최고급차임)이군" 그러자 홍승주는 바로 대구를 내었다.
"일국기평, 차일기호망곡우(一局棋枰, 此日幾乎忘穀雨)"
바둑을 한 판 두다보니, 이 날이 곡우인지도 거의 잊어버렸네.
그러자, 친구가 아랫구를 말했는데, 아주 의미가 깊다.
"양조영수, 타년하이별청명(兩朝領袖, 他年何以別淸明)"
두 왕조의 영수인데, 이후 어떻게 청(淸)과 명(明)을 구분할 것인가?(청명은 곡우처럼 절기이기도 함)
또 어떤 사람은 예전에 홍승주가 썼던 대련을 가지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군은심사해의(君恩深似海矣)!
신절중여산호(臣節重如山乎)?
임금의 은혜는 바다처럼 깊구나!
(그런데) 신하의 절개도 산처럼 중한가?
강희4년(1665년) 홍승주는 병사하니 향년73세이다. 홍승주는 북경시 해전구 차도구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묘지는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는 그저 석사자 한 쌍만 전해질 뿐이라고 한다. 홍승주와 같이 극히 총명한 사람도 결국은 이런 결말을 맞이하였다.
[스크랩] 열하를 가다
' 연암 박지원과
열하를 가다'
청 (清) 지도
작가 최정동. 41새. <중앙일보> 사진기자. 작가는 20년 동안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며 온 세상을 구석구석 떠돌았다. 이제 한 자리에 눌러앉아 있는 것보다 여행하는 것이 더 편해졌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혼자 배낭여행을 하며 글 쓰고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했다. 대상이 된 곳들은 신화의 땅 그리스, 괴테와 바흐의 고향 독일, 고대 로마의 장대한 유적이 남아 있는 이베리아 반도 등이었다.
<열하일기>의 현장을 걸으며 연암 박지원과 대화하는 일이나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철인 황제의 대리석 흉상을 쓰다듬는 일이 흥분되고 재미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되, 스쳐지나가는 여행이 이니라 그 시대의 '인문'과 '예술'까지 느끼며 즐기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을 기록으로 남겨 길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되고 싶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필자는 <중앙일보>가 2002년 여름 한.중 수교 10주년 기획의 하나로 조선시대 사신들의 발길을 따라 중국 현지를 답사해 보고, 두 나라 교류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연재물을 싣기로 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 3대 연행록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담헌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노가제 김창업의 <노가제연행록>을 연구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답사팀이 구성되어 '2002년 연행단'이 탄생되었다. 당시 연행팀을 구성했던 사람들은 아래와 같다.
* 박세균 선생 : 69세. 명지대 LG연암문고 연구위원.한.러 문명교류사 전문가.기억력 비상하며 역사 연대를 줄줄이 외우며 일행을 놀라게 함
* 박태근 교수 : 63세.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조선 후기 한문학 연구자. 담헌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을 현대어로 번역.중국 여행 경험 많아 '의무려산'이나 '북진묘' 답사시 선도 안내.
* 안병욱 교수 : 54세. 가톨릭대 사학과 교수. 조선 후기사 연구가.대통령 의문사진상조사위원을 맡는 등 참여,실천 강골파.
* 유홍준 교수 : 53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 연행팀단장 역임. 버스속에서 움직이는 강의장 마련. 대단한 입심으로 교육방송 전담.
* 이광호 교수 : 53세. 연세대 철학과 교수.동양철학 전공.한문해석 대가로 답사지 비문해석 전담.
* 박지선 선생 : 53세. 여.노가제 김창업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 임옥상 화백 : 52세. 전 대학 강사 및 전업 작가로 활동 중.퍼포먼스 화백으로 명성. 활달한 성격으로 답사기간 내내 시종 즐거움 줌.
* 김혈조 교수 : 48세. 영남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조선 후기 한문학 전공. 연암 박지원에 정통한 학자. 매일 중국 밤거리를 안내, 중국의 참모습을 보여줌.
* 한명기 교수 : 40세.명지대 사학과 교수. 조선 중.후기, 한.중 관게사 전공. 광해군 재조명으로 주목. 병자호란 전후사에 정통함.
* 배영대 기자 : 38세.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인문.역사 분야 전공 기자.
* 김효민 씨 : 33세. 김태준 교수 아들로 북경대학에서 명.청시대의 소설 연구로 박사과정. 연행팀 안내 담당
답사는 2002년 8월 4일부터 8월 13일까지 열흘에 걸쳐 이루어 졌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한 이래 222년 만이었다. 당시 조선 시대 사신들은 5-6개월 씩 걸리던 여행길을 단 열흘만에 주파해 버렸으니 수박 겉할기라고도 할 수 있으나 작가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기록했다.
답사 경로는 사신들이 숙식한 곳을 재구성한 일정표를 참고해서 작성되었다. 북한의 신의주 맞은편 중국의 단동을 출발하여 요양-심양-을 거쳐 요동벌을 가로지른 다음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북경에서 다시 만리장성을 벗어나 열하까지 가는 2,800리의 먼 길이었다.
답사팀이 열하까지 간 것은 연암이 갔던 그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었으며 <열하일기> 현장을 보기 위함이었다. 연암은 조선 사신으로서는 최초로 열하를 방문하였는데, 연암이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도중의 광경을 쓴 <일야구도하기>와 <야출고북구기>의 현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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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1737년(영조 13년) 한양에서 부친 박사유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반남 박씨 가는 영조 당시 노론측 일원으로 명문거족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뒤 집안사람이 연암의 사주를 중국에 가져가 점쟁이한테 물었는데 그 점쟁이는 " 이 사주는 마강굴에 속하는데 한유와 소식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 났지만 까닭 없이 비방을 당한다"고 했다 한다. 짧은 사주풀이지만 엄청난 인물이 등장한다. 당송 8대가 중 두 사람인 당나라의 한유와 송나라의 소동파, 그리고 한나라의 위대한 역사가들인 반고와 사마천이 일컬어진다. 사주에서부터 남의 비방을 많이 받는다고 했으니 연암이 나중에 <열하일기>의 저자로서 겪어야 했던 '거국적' 비판은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연암은 성장한 뒤 자신의 문장에 대한 꿈을 꾸는데, 꿈에 서까래만한 크기의 붓을 다섯 자루를 얻었는데 붓대에는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오악이란 백두산,묘향산,금강산, 지리산, 삼각산 등 우리나라 명산을 말하는 것이니, 결국 나라의 필명을 떨치게 된다는 꿈이다. 이렇게 사주도, 자신의 꿈도 모두 그의 비범한 글재주를 예언하고 있다.
연암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산 부친보다 영조 즉위 후 고위직 벼슬을 역임한 조부 박필균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다.열여섯 살에 전주 이씨인 부인과 결혼하는데, 장인 이보천과 그 아우인 처숙 이양천은 연암의 학문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이보천은 사마천의 글을 통해 문장 짖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손아래 처남 이재생은 평생의 지기이자 글벗이 되었다. 결혼을 해서 아내뿐 아니라 스승들과 친구를 얻었으니, 연암은 장가 하나는 잘 든 셈이었다.
20세를 전후하여 연암은 절친한 친구들과 절간을 �아다니면서 과거시험 준비에 전념한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며칠씩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이는 당시 비정하고 혼탁한 정치 현실과 양반사회의 타락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면서 자신의 장래 거취 문제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인 듯하다. 자신이 과거시험을 통해 진입하려고 하는 세계가 너무 부정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당시 과거시험제도의 형편없는 모습도 그로 하여금 시험장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조선 후기가 되면 과거 응시자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다보니 시험관리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연암의 친구가 과거에 급제하자 축하는 커녕 이제는 그런 난장판에 끼지 않아도 된 것만을 축하한다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적도 있다. 연암은 과거시험의 혼탁한 모습에 냉소적으로 보았다. 당시의 과거시험은 요즘 사극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영화당 뜰에서 질서정연하게 본 것이 아니라 연암이 묘사한 대로 난장판이었다.
연암은 33세 되던 1770년 생원,진사를 뽑는 시험인 감시에서 1등으로 뽑힌다. 방이 붙던 날 저녁 영조는 침전으로 연암을 불렀고, 도승지로 하여금 연암의 답안지를 읽게 하고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가며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해 본 시험인 문과를 포기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자신의 정통성에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던 영조는 말년에는 노론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갖혀 죽게 하는 등 혼탁한 파당정국이 그런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각 정치세력들은 명문가 출신인데다 왕의 총애까지 받고 있는 연암을 어떻게 해서라도 과거에 합격시켜 자신들의 당파로 끌여들이려 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연암은 번번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시험장에 나갔을 때는 답안지를 제출하지도 않고 퇴장하기도 했다. 한번은 답안지에 소나무와 괴석을 그리고 나와 세상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연암은 철저하게 벼슬길을 외면하려 하였다.
이후 연암은 한양 전의감동의 한 셋집에 혼자 살면서 많은 인사들과의 사귐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심화해 나갔다. 특히 당시 중국을 다녀온 홍대용,이덕무,박제가 등 실학자들과 교제하며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탄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발전상을 연구하면서 중국 여행의 꿈을 키워갔다.
1778년 연암은 돌연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금천의 연암동에 은둔한다. 자신의 호로도 사용하게 되는 이 연암동으로 간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정조 즉위 직후 사도세자 처벌에 찬성하고 정조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던 인물들인 노론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정조의 즉위에 공이 큰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는데, 연암은 홍국영 일파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으므로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를 피신시킨 것이다. 연암동은 송도(개경)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외진 골짜기였다. 동구 좌측의 절벽에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어 이를 제비바위라는 뜻의 연암(燕巖)이라 불렀다.
이 일대는 일찍이 고려 말에 목은 이색, 익제 이재현 등의 선비들이 살던 곳으로, 부근에는 익제의 묘와 서원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연암이 이곳을 �았을 당시에는 황폐해져 이웃집이라고 해야 가난한 숯쟁이 집 서넛이 있을 뿐이고, 호랑이와 사슴이 출몰하는 대단히 외진 곳이었다. 연암은 여기에다 초가삼간을 짓고 돌밭을 일구어 뽕나무도 심고 송도를 오가며 청년 문사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색하고 집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한 은둔은 오래가지 않았다. 1780년 권력 10년 여만에 당대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홍국영이 마침내 실각하자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로 돌아오자 행운이 연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촌 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금성위 박명원이 청나라 견륭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하여 특별사행의 정사로 임명된 것이다. 연암은 박명원의 권유에 따라 정사의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 자격으로 숙원이던 중국 여행을 하기로 한다. 당시에는 사신이 아들이나 동생을 개인 수행원으로 삼아 중국으로 데려가 견문을 넓히고 문물을 익히게 하였다. 이들은 편의상 군인 신분의 수행원으로 분류하여 자제군관이라 불렀다.
시잘단 일행은 6월 하순에 압록강을 건너 8월 초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절단에게 당시 건륭제가 여름별장인 열하에 머물고 있어 축하행사를 그곳에서 진행되니 참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연암은 이렇게 해서 조선 사신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열하를 여행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는 열하에서 천하의 형국을 파악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 역사,정치,음악,천문,풍속 등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필답을 나누면서 안목을 키웠다.
열하에서의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은 북경을 거쳐 10월 말에 한양에 도착했다. 귀국 즉시 연암은 중국 여행중에 써 두었던 방대한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해 약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열하일기>라는 제목의 연행록을 집필한다. 그러나 이 <열하일기>는 필자 자신이 완성본을 발표하기도 전에 일부 필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유포되면서 당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의 명성을 높혀주었다. 반면 그의 자유로운 문체를 문제 삼는 인사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나중에는 임금인 정조도 그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던 '문체반정' 사건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1786년 쉰 살이 된 연암은 음보(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로 선공감 감역(토목.건축직 종9품)에 임명되어 벼슬을 시작한다. 벼슬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그 또한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연암은 경남 안의 현감, 충청도 면천 군수, 강원도 양양 부사 등의 지방 수령을 역임했는데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고 자신의 실학적 소양을 두루 시험해 보기도 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서울 북촌 재동에 계산초당이라는 집을 짓고 살다가 1805년 향년 69세로 서거했다. 장손 박규수가 출세한 덕분에 후일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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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록
연암은 압록강변의 의주 통군정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진왜란시 의주까지 피난온 선조를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비가내려 홍수진 압록강물을 바라보며 통한의 세월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겨우 강을 건너 야영을 하루 하고서 사흘만에 국경선인 책문에 도착하여 또 하루밤을 보내게 된다. 이동중 대열에서 같이 말을 타고 가는 정진사를 연암은 좋은 대상으로 삼아 모든 질문에 답변을 조선의 양반에 비유하여 앞뒤가 막힌 사대부를 조롱하고 있다.
흙벽돌로 반듯하고 깨끗한 중국 건축물을 보면서 흙벽돌로 지은 중국 건축과 조선의 건축을 비교하고 축성술도 비교한다. 그들의 흙벽돌은 무게도 가볍고 생산하기도 쉽다. 재료를 구하기도 좋으며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집과 축성이 가능한 그들의 흙벽돌의 찬사를 서로 토론하기도 하지만 정진사는 관심도 없다. 연암은 눈뜬 장님에 비유하고 있다.
연암은 청국을 되눔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조선의 사대부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이동중 주변의 풍광에 대한 소감을 읊으며 조선의 산세와 비교한다. 봉황산성이 안시성이라는데 연암은 산성의 넓이가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치기에는 내부가 좁아 안시성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수일이 걸려 마운령과 청석령을 넘어 요동벌에 들어선 연암은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요동벌을 보면서 "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이 한번 울만 하구나!" 라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연암은 정진사의 멍청한 우문우답에 울음에 대한 이론을 편다.
" 희노애락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지정 즉, 지극한 상태에 이르면 웃고 우는 것의 구분조차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라고 하면서 요동벌판의 광대한 지경을 접하고 마음속 지극한 감정을 울음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태중에 있는 아기" 이는 연암 자신을 가리키며 답답하고 부조리하고 낙후된 조선사회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그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터져 나오듯이, 오늘 이 넓은 요동에 와보니 마음과 몸이 지극한 해방감을 느끼며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요동 백탑기>를 쓴 연암은 " 요동은 왼편에 창해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리가 아득히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지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로 만든 북세개가 놓여 있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는 물통만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려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을 진동한다." 고 하였다.
[* 조선 사신 구타사건]
병자호란이 일이나기 직전인 1636년 봄. 조선은 심양에 사신을 파견한다.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로 후금을 이어받은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면서 즉위식 자리였다. 즉 이가 바로 청태종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그를 홍태시 즉 '붉고 큰 돼지'라고 부르며 경멸했는데 오랑캐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 축하사절로 참석한 조선의 사신은 나덕현과 이곽이란 사람이었다. 행사 순서에 따라 인근 각국에서 온 사신들이 황제에게 배례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 사신들만 몸을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군졸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허리와 목을 구부리게 하였으나 이들은 끝까지 거부하자 군사들이 무자비하게 구타를 해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불사이군의 유교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청태종은 "이는 조선 국왕이 우리 청나라를 원수로 삼고자 나로 하여금 이 사신들을 죽이게 하여 그 구실을 만드려는 수작이다. 거기에 내가 넘어갈 내가 아니다"라며 그들을 석방하여 보내면서 조선왕을 꾸짖고 왕세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자 이를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은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다.
계속 내리는 비는 강물이 불어 가는 길을 더디게 하고 있으며 수일간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날짜를 맞추지 못할까봐서 구수회의도 하고 저녁에는 민가에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연암은 여행도중 중국인들의 생활을 두루 살피면서 저녁이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무곳이나 들러 그들의 실상을 살폈다. 이동중에는 마상에서 졸기도 하고 옆 정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말을 끄는 종과도 우스게 소리도 잘 하였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상에 잠기기도 하고 심양에서 소현세자의 추억도 생각하며 울분을 삼키기도 하였다. 비가 내리는 요동벌판을 수도 없는 강을 건너고 산해관을 거쳐 중국땅에 들어가면서 거대한 중국의 성벽과 문물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조선의 선비들이 동쪽의 반도에서 허례허식만 추구하고 대륙의 선진문물에 배타적인 양반들을 은유적으로 비꼬집는 글을 쓰고 있다.
"비록 지금은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의 성곽과 건물,인민들이 예와 같이 남아 있고, 정덕,이용,후생의 도구도 파괴된 것이 없으며, 역대 중국의 저명한 문벌과 성리학도 사라지지 않았고, 한,당,송,명의 아름다운 법률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지만 역대 중국의 제도가 자기들에게 이로움을 알고 이를 빼앗아 마치 본시부터 자기들이 지녔던 것 같이 하고 있다.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아야 되는데, 하물며 한,당,송,명 여러 나라의 고유한 것임에랴" 고 하면서 조선사회의 주류인 상사(上士), 중사(中士)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지금의 청나라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청나라가 오랑캐니,북벌을 해야 한다느니 따위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백성을 위해 청나라를 철저히 벤치마킹하자는 이야기이다.
연행팀은 요동벌을 지나 우뚝솟은 의무려산의 자태에 감탄하면서 북진묘에 당도하였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산신령을 모시는 도교 사원이다. 연암도 이곳에 들러 두루 살피면서 북진묘를 보고 "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정교함이나 조각의 세밀함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복을 기원한 말들이다."고 했다. 의무려산은 요동벌이 끝나는 곳에 우뚝 솟아 고대 순임금 시절부터 청나라에 이르기 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전국 열두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북진 시내는 명나라 장수 이성량의 폐루이다. 이성량은 본래 조선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20년 동안이나 요동.요서 지역의 군벌로 군림했다. 임진왜란때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온 이여송은 그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명나라 200년 역사상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만주 전역의 군사권 뿐만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는데, 모든 교역은 이성량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고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당시 만주 동편에서는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누르하치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토벌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조선에 임진왜란이 터져 명 조정의 지시로 이성량은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조선에 투입하게 되자, 누르하치는 힘의 공백을 틈타 세력을 키워 쇠퇴기에 접어든 명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결국에는 아들 홍타이지에 의해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이래저래 일본은 우리 역사에 항상 가장 나쁜 대상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지만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청의 발흥은 어렵지 않았을까?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에 대릉하라는 강이 있고 근방에 금주가 있다. 고조선의 발흥지가 바로 이곳 대릉하 부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관제묘기'에 대해서 나오는데 관우를 모신 시당이다. 관우는 죽은 뒤 중국인들이 신의 반열에 올려 전국에 걸쳐 사당이 있다.연암은 이 사당을 보고 "묘당이 우장 화려해 복전과 중각에 금빛.푸른빛이 휘황찬란하다. 그 정전에는 관공의 소상을 모셨고 동쪽에는 징비,서쪽에는 조자룡을 배향�으며, 또 촉의 장군 엄안의 굴복하지 않은 상을 설치했다. 뜰가운데는 튼 비석이 몇 개 서 있는데 모두 사당의 창건과 증수한 사실의 시말을 적은 것이다. 사당속에는 노는 거달 수천 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무슨 놀이터 같다." 이러한 관제묘는 마오쩌뚱 시절 문화대혁명기에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민간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영원성.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청나라는 중원정벌의 야망을 품고 명나라 정벌에 나선다. 명군과 청군의 결전은 산해관 밖 4개 성에서 벌어졌는데, 금주,행산,탑산,송산이다. 지금 심양-북경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는 지역이다. 명나라 장수 홍승주는 이곳 영원성에서 대패하게 되는데 연암이 이곳을 지날 당시는 이미 전쟁이 끝난 지 140년이 지난 시기이다. 마을이 황량하였던 모양이다. " 송산에서 행산,탑산까지의 100여 리사이에는 동리나 점포가 있기는 하나 가난하고 쓸쓸해 그들은 조금도 붙박이 생활을 할 의사가 없다. 아 아, 이곳이 그 옛날 명과 청이 싸워 피 흘리던 마당이다. 이제 이미 10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 채 숨 돌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그당시 용과 범들의 싸움이 격렬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고 했으며 마지막에는 건륭제가 지은 글을 소개하고 있다.
" 이 싸움에서 명나라 병사 53,700명을 죽이고 말 7,400필,낙타 60여 필, 갑옷과 투구 9,300벌을 노획했다. 행산의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이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우리 군사는 잘못해 다친자가 겨우 여덟 뿐, 그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청나라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명나라는 이곳 4성 전투에세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남으로 물러난다. 이때 심양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종군시켜 청군의 막강함과 명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은 조선군도 대려와서 전투에 참가시켰는데 바로 이시영 장군이 송산전투에 참가했다. 조선군은 수백 년간 상국으로 모시던 명나라군에 총칼을 겨누어야 했으니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연암의 <열하일기>의 관련 대목을 보자.
" 황명 숭정 11년(1638년) 조선 장수 이시영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청에 들어가니 청인은 시영을 협박해 앞장을 서 명의 도독 조대수와 송산에서 싸우게 했다. 조선군은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서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대에 명하기를 청병의 머리 하나에는 은 50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100냥을 준다고 했다. 조선 군사 중에 경상도 성주 사람으로 이사룡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차마 명군에게 총을 쏠 수가 없어 공중으로 공포만 쏘아 명군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본국 조선의 속마음을 밝히려 함이었다. 이를 발견한 청의 군사가 사룡의 목을 베어 진중에 높이 내 걸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조대수는 깃발에 큰 글씨로 "대명충신 조선의사"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했다. 지금 충주 옥천에 충렬사가 있으니 곧 사룡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나는 송산을 지나면서 글을 지어 사룡의 혼을 위로했다."
이사룡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청나라 장수에게 욕을 퍼부었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한다. 청태종도 이사룡을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그의 주검을 운구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조선 왕 인조는 지나는 길에 감사에게 예를 표하게 하고 고향에 안장하게 하였다. 그 뒤 숙종 때는 고향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고, 정조 때는 성주목사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지어 충렬사란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으로 연암은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산해관은 북쪽의 각산 정상에서 장성이 바다쪽으로 흘러내려 가다가 거대한 관문과 관성으로 뭉쳐진 곳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남쪽 바닷가에는 만리장성이 발해만에 발을 담그고 멈춰서는 '노룡두'가 있다. 산과 바다사이에 있는 관문이라 해서 산해관이라 했다. 만리장성은 이곳 발해만에서 시작해서 서쪽 끝인 감숙성의 가욕관까지 만 리가 넘도록 뻗어 있는데, 그 중간에 설치된 여러 관문들 가운데 이 산해관이 가장 웅장하기에 관문은 '천하제일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해관은 관성의 둘레가 10리나 되고 성문이 넷이다. 네 성문 중 천하제일관에 설치된 진동문은 벽돌로 쌓아 올린 12미터 높이의 거대한 성벽 위에 다시 13미터의 2층 성루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성루 몸통에는 3면에 모두 68개 총구가 뚫려 있어 문 자체가 하나의 요새처럼 삼엄해 보였다. 문 좌우의 성벽은 말 다섯 필이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중간 중간의 포대에는 청에 대항해 사용하던 신위대장군이라는 이름의 홍이대포가 아직 남아 있다. 관 바깥에는 해자가 접근을 가로막고 있으니 아무리 청의 기마병이 철기라 한들 이곳에서 말발굽을 멈출수 밖에 없었다.
산해관은 만주 등 동북 지역 유목민족의 공격으로 부터 중원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요, 동시에 요동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전진기지의 성격을 지닌다. 처음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전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 진시황제였다. 그러나 12,700리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한 것은 명나라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건국 이후 대장군 '서달'을 시켜 북경 북쪽에 몽고족을 막기 위하여 거용관을 세운뒤 1381년 이곳에 산해관을 쌓았다.
1644년 명나라 말기, 세상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이자성'이 농민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해 이자성은 백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킨다. 명의 마지막 황제 '승정제'는 자금성 뒷산 경산에서 목메 자살한다. 그는 어린 아이들은 변장시켜 도망가게 하고, 황후가 목을 매 자결하는 것을 지켜본뒤, 방년 17세의 공주를 자신이 직접 칼로 찔러 죽인 뒤 자신도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망해가는 명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산해관 총병이었던 '오삼계' 뿐이었다. '오삼계'는 황제가 자결하고 '이자성'이 대권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북경으로 진격하고 싶었으나 코 앞까지 와 있는 청나라 대군 때문에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이자성'은 북경에 있던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을 통해 '오삼계'에게 항복을 권유한다.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오삼계는 항복할 결심을 하게 되나 그의 결심을 바꾸는 계기가 된 정보를 듣게 된다. 바로 북경에 두고 온 그의 애첩 '진원원'을 이자성의 부하 장수인 '유종민'이라는 자가 가로챘다는 것이다. 분노가 치민 오삼계는 마음을 바꿔 이자성과 일전을 준비하고, 이자성은 선수를 치기 위하여 오양과 진원원을 앞세우고 산해관으로 북상한다. 그러자 오삼계는 '난신적자' 이자성을 치기 위해서 청나라 군대와 손을 잡고 청군에게 산해관의 성문을 열자 청나라 철기군은 노도같이 달려가 이자성의 주력부대를 격멸하고 북경에 무혈 입성하게 된다. 이자성은 명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때를 잘 못 만나 그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지고 말았던 불운한 사람이었다.
연암은 " 진나라 서달 장군이 이 관을 쌓아 되눔을 막고자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적을 맞아 들이기에 급급하였으니, 천하가 평온할 때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의 비웃음을 사고만 있으매 내 이 관에 대해 다시 무어라 족히 말할 것이 있으리오" 라고 했다.
연행팀은 만리장성,강녀묘,노룡두,백이숙제 사당터를 둘러보고 북경에 도착한다. 당시 사신들이 묵던 자리는 없어지고 아파트가 건립중이며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나 천주학과 서양문물을 배우던 남당 천주교회를 방문한다. 연암은 남당 천주교회의 벽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여자가 무릎에 5,6세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는데, 어린애가 병든 얼굴로 흘겨서 보니 그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옆에는 시중꾼 5,6명이 병난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참흑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다. 좌우 바람벽 위에는 구름이 덩이덩이 쌓여 한여름의 대낮풍경 같기도 하고, 비가 갓 갠 바다 위 같기도 하고,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끝없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고, 수없는 구름 꽃봉오리가 �발에 비치어 무지개가 뜨고, 멀리 바라보이는 데는 까마득 하고 깊숙해 끝 간 곳이 없는..."
색상이 다채롭고, 사실적이며,원근감이 구사된 서양 종교화를 처음 보는 연암의 놀란 얼굴이 보니는 듯하다. 천장을 바라보다 모두 깜짝 놀라는데, 아기 천사들이 하늘을 나는 그림이었다. 연암 왈,
" 천장을 우러러보니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하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 만지면 따뜻할 것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놀라 어쩔바를 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그 후 남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불타버린 후 1904년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나 연암이 본 그림들은 다 소실되어 없어졌다.
북경 천안문 광장 남쪽, 정양문과 선무문 바깥쪽의 다섯 거리를 유리창(琉璃廠)이라고 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이 거리에는 서적,골동품,지필묵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연암은 이곳을 둘러보며 갖가지 진귀한 물건을 구경했다. 연암은 이미 15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담헌 홍대용의 여행기를 보았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담헌이 이곳에서 만난 청나라 선비들과 교류를 통해 우정을 쌓고 많은 신지식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특히 의학 서적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산속에 홀로 살아가는 동안 민간 처방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곳에서 허준이 쓴 <동의보감> 필사본을 발견한다. 그 책이 중국까지 유행해 중국인의 손에 의해 발간된 것이었다. 연암은 그 책이 탐이나서 책값을 물어보았으나 다섯냥이 없어서 아쉽게 그냥 발길을 돌린다.
북경에 도착한 지 닷새 째 되는날 8월 5일이 되자, 갑자기 열하로 떠나게 된다. 예부에 표문을 바치고 기다리던 중, 예부에서 황제에게 문의를 늦게 하는 바람에 황제가 진노하여 조선인 사신을 당장 열하의 피서궁전으로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연행팀은 비상회의가 소집되고 만수절인 8월 13일이지만 9일까지는 열하에 도착해야 한다. 250명 인원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는지라 열하까지 700리 길을 5일만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었다. 인원은 정사,부사,서장관의 삼사와 역관셋,비장넷,하인은 64명등 74명으로 말은 55필로 줄였다. 나머지 인원은 그대로 잔류하기로 한다.
이제 동생 내원이와 하인 장복이를 북경에 남겨두고 떠나기 때문에 생이별을 해야하는 연암의 마음은 슬픔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연암은 이별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하면서 가장 슬픈 이별은 물가에서 하는 이별이 가장 슬픈 이별이라고 했다. 연암은 먼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비 내용도 강에서 상여를 실은 배가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연암은 이렇게 '가장 슬픈 이별'과 '가장 슬픈 이별의 장소'를 논하고 나서는 이별에 대한 사유를 끝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의 기억은 병자호란 후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소현세자와 청나라를 오가던 조선 사신들의 만남과 이별에 다다른다. 연암의 '슬픈이별'에 대한 글이다.
"아아, 슬프다! 그 옛날 소현세자께옵서 심양의 저택에 계실 적에, 당시 신하들이 머물다가 떠날 때나, 사신들이 왔다가 갈 적마다 그 심회 어떠하였을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로서는 죽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에 속하거늘, 누구는 머물고 누구는 떠나며, 누구는 참고 견디며 누구는 버려둔단 말인가? 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통곡해마지 않을 때이다. 아아, 슬프다! 내 비록 이와 벼룩과 같은 미천한 신민이건만 백 년이 지난 오늘에 그저 한번 생각해보아도 오히려 정신이 연기처럼 싸늘하게 사그라지고 뼈가 저리어 부러질것 같거늘, 하물며 그 당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절하고 하직할 즈음이리요. 하지만 그 당시는 두려운 제약이 한이 없었으며, 듣고 보는 귀와 눈이 많아 눈물을 참고 소리를 머금으며, 얼굴엔 슬픈 표정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리요...."
연암은 열하로 가는 도중 많은 강을 건너는 등 강행군을 하면서 극도로 피로한 가운데 이동간 느낌을 <일야구도하기>를 통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연암의 문학적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대목들이다.
"강물은 두 산에서 나와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구슬피 원망하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르렁대고 소리 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꺽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만 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말, 만 대의 대포와 만 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한이 저만치 떨어져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해 마치도 물밑에 잇던 물귀신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할 것만 같고, 양 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채려는 듯하다. 어떤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듣는 소리가 다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단지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를 펼쳐놓고서 귀가 소리를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이제 나는 한밤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번 건넜다."
연암 일행은 동북 방향으로 길을 재촉하여 드디어 '고북구'라 불리는 만리장성 관문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산해관까지는 700리 길이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는 거리는 280리 길이다. 고북구는 산해관과 거용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곳이다. 예로부터 몽고군이 중원으로 쳐들어 올 때는 이곳 고북구 관문을 통하여 침공하였기에 그 중요성으로 세 겹으로 된 관문이 설치되어 있다. 연암은 관문 입구 성벽 벽돌에 칼로 글씨를 새기고 먹물을 입힌다. "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라고 새겼다. 연암은 이곳이 역대로 치열한 전장터임을 떠올리며 쓴 글이 바로 <야출고북구기>이다. 이 글은 구한말 1900년<연암집>을 발간했던 창강 김택영씨가 '조선 5천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격찬한바 있다.
청의 강희제는 열하지역에 피서산장을 건설했다. 그는 몽고의 침공을 항상 두려워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침공을 사전 예방하고 황제가 친히 북경 근방 요지에 기거함으로써 주변 소수민족의 침공 의도를 사전 분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열하는 티베트의 라마 사원이 즐비하고 라마승들이 대거 기거하고 있으며 하나의 대도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북경의 황궁생활은 규정과 관습이 복잡하여 황제라도 마음대로 무엇이던지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곳 피서산장에서는 그러한 격식과 관습을 벗어나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열하에 도착한 연암은 열하에 가까워 지자 사방에서 조공행열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연암은 이러한 장관을 <만국진공기>로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열하는 강희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잇는데, 강희제는 통일된 제국을 물려받았으나 그기에 만족하지 않고 남방의 오삼계 난을 8년만에 평정하고, 북방으로 눈을 돌려 만리장성밖 그들의 조상들이 일어난 땅에 대규모 '목란위장'이라는 목장을 조성하여 매년 가을이면 왕공 대신과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대규모 포위사냥에 나셨다. 그것은 군사기동훈련이며 용맹하고 강인한 황제상을 보여주며, 주변 북방 변경의 부족들에게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황제는 열하에 대규모 황궁을 세우게 하였는데, 그후 90년 동안 계속 증축되고 확장되었다. 건륭제 때에는 전체 넓이가 564만 평방미터에, 둘레를 감싼 성벽의 둘레가 10킬로미터에 달하였다. 전체가 궁궐,호수,초원,산간의 네 지역으로 나뉘어 마치 거대한 중국을 수축해 놓은 모습으로 변했다.
1793년 영국의 사절단이 피서산장에 도착했다. 연암이 다녀간 지도 13년의 세월이 흐른뒤, 건륭제 나이 83세 때의 일이다. 황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환영했다. 영국 사절단은 노쇠한 황제에게 여러가지 외교적 제안을 했는데, 영국 사신 북경 상주, 세 무역항 개방, 영국 거주지 제공,영국화물 감세 혜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런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건륭제가 죽고 13년이 지난후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에게 이리저리 물어 뜯기는 형세가 되었다. 노쇠한 황제는 영국 사신들에게 고함치며 오만을 피웠지만, 이미 청나라는 건륭제 이후 이미 몰락의 길을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한 번영이란 없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연행팀은 황제의 명으로 당시 그곳에 와 있던 티베트의 법왕 '반선'라마를 만나는 '반선알현'소동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인 사절이 불교의 법왕을 만난다는 자체가 문제였으나, 황제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알현하는 사태를 맞게 되고 선물로 받은 불상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 볼 만하다.
연암이 중국을 방문할 무렵은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었다. 미국의 독립전쟁,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여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던 시기였다. 연암이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를 일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조선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는 있었다. 청년기에 연암은 홍대용,박제가를 비롯한 실학자들과 교우하면서 북학자로 변모했다. 정조 당시 조선은 문예부흥기였고, 문맹률이나 행정서비스 면에서 선진국이었다는 분석도 있으나, 사회는 닫혀 있었고 지식인은 창백한 유교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어 있어 국가와 백성은 빈곤하고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간파하 연암은 중국을 배워 나라가 강하고 백성들이 부유해야 된다고 믿었다.
정조는 개혁군주였으나 그 개혁이 기존세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그들에게 경세론을 듣기는 했으나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노론 총수 집안 출신으로 노론들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조에게 간하자 혜경궁 홍씨는 친정 집안을 위하여 자신의 남편을 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 정조를 후일 임금에 등극시키는 밀약(?)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그녀의 친정 집안이 역적이 아니라는 항변이 주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세자 죽음후에 어렵게 노론측의 동의하에 자신의 아들을 임금에 앉힐 수 있었던 시기였다. 정조는 즉위 후 측근 홍국영을 등용하여 사도세자 죽음과 관련된 노론인 어머니 친정 집안을 모조리 처단하는 등 관련 세력을 타도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대왕대비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불효스런 심경, 노론 잔존세력들의 반대, 정조를 후원할 수 있는 지지세력 기반의 약화 등으로 단호한 개혁을 시행할 수가 없었으며 그런만큼 왕권은 약화되어 있었다. 1800년 정조가 의문시 되는 죽음(독살?) 이후 조선은 다시 반동으로 되돌아가 개혁의 싹은 짓밟혔으며, 숙종대 이후에는 사색당파와 싸움과 외척의 세도정치가 본격화 되면서 망국의 빠른 길을 걷고 있었다. 5년후인 1805년 연암은 세상을 떠났지만 열강 제국들은 식민지 개척에 집중하고 있었고, 일본은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부국강병의 발돋움하던 시기였으나, 조선은 정치.경제.사회적 불안을 겪으면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암이 죽은 지 꼭 100년 후, 1905년 조선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결국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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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열하일기>전편에 유머와 해학이 가득찬 이야기로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데,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나, 예리한 국제정세 분석이라던가,심오한 철학적 사유 등이 풍부하였고 현대의 연행팀 구성원들이 자아내는 유머와 해학이 겻들여져 있어 재미도 있었고, 구석구석 말랑말랑한 인생론도 연결되어 있어 이 책은 일기에도 좋았고 느낌도 심오하였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유익한 책이었다.
- 서초동-
[스크랩]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는 천문학자인
이 책은 그 동안 한국사에 기록된 수많은 천문기록, 즉 일식, 오로라, 달과 혜성의 움직임,
유성과 운석의 낙하 등 각종 천문기록을 통해 단군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강역과 기존 정사인 ‘삼국사기’의 진위여부 등에 대해 과학적 데이터를 이용하여 연구해온 저자의 생생한 연구의 성과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책이 발행되자 역사학계는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고대사 논쟁이 더욱 확산되었고 반론과 재 반론 등 학계의 연구가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천문학에 대해 문외한이고 역사학 또한 일천한지라 이 책에 내용에 대해 시비를 논할 능력이 없지만 최소한 천문학자가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걸고 오랫동안 연구해온 내용이기에 기존 사학자들도 최소한 박창범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과학적 데이터들에 대해 진지한 연구와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한 고 천문학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은 차차 기회가 되는 데로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 제가 설명하고자 하고 싶은 부분은 지난번 새
만원권의 도안으로 채택된 혼천시계에 이어 한번 소개하겠다고 블러그 친구들에게 약속했던
[천상분야열차지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경복궁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들어서면 아주 커다란 비석모양의 돌 하나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돌에는 양쪽으로 여러 모양과 글이 적혀져 있는데 한쪽은 매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고(편의상 이쪽을 뒷면으로 부른다) 앞쪽에는 누가 봐도
하늘의 별자리를 새겨놓은 것이란 걸 알 수 있을 만한 도형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국보
제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조선 태조본) 탁본. 200.9×122.8cm,
찍어논 사진이 없어 탁본을 보여드립니다. 원래는
흑요석
이 각석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가 새 왕조의 표상으로 천문도를 갖길 원해 서운관(書雲觀)에서 〈중성기 中星記〉를 편찬한 다음 그에 따라 이 천문도를
석각한 것입니다.
원 안에는 전통적으로 동양 천문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삼원(三垣)·28수(宿)·12차(次)가 모두 새겨져 있고, 그 둘레에는 천문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간단하게 적혀 있습니다.
원형 아래에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이 머리부분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천문 현상을 12차로 나누고 분야를 밝혀놓았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그 밑에는
천문도의 제작과정과 참가자의 이름, 1395년(태조 4)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것은 권근(權近)이 쓴 것입니다.
이 각석은 세월이 지나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쉽지 않아 1687년(숙종 13)에 똑같이 다시 새긴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보물 제837호, 세종대왕기념관)을 새겼고 그것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전시 되어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숙종본). 위 사진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복사본
푸른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은하수 입니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천문도는 대부분 이 각석의 탁본 또는 필사, 모방 한
것이니 현존하는 대부분의 천문도의 기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천문석각의 전체적인 구성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윗부분에는 12국분야 성수분도(星宿分度), 일수(日宿), 월수(月宿), 천(天) 그리고 8개 방향에 대한 짧은 설명이 사방에 있고, 석판의 중앙에 지름 76cm의 3중원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안에 모두 1,464개의 별들이 점으로 표시되어 있고, 별자리의 이름이 해당한 위치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랫부분에서는 논천(論天)과 28수 거극분도(去極分度), 천문도 작성의 역사적 배경과 경과, 제작에 참가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적고 맨 끝에 홍무(洪武) 28년 12월에
제작하였다는 제작년도를 새겼습니다.
이 석각의 중심 부분인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ㆍ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고 북반구에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 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이 그림으로
해ㆍ달ㆍ5행성(수성ㆍ금성ㆍ 토성ㆍ화성ㆍ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석각은 당대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여러 가지 역사적 귀중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석각에는 그 제작유래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조선 초 유학자인 권근이 적은 것으로 내용을 보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석각 천문도의 인본을 원본으로 삼고, 당시의 하늘의 모습을 참조하여 천문도 일부를 고쳐 새긴 것이라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귀중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한가지는 고구려 시대에 이미 이와
같은 천문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조선 초에 그 내용을 수정할 수 있을만한 천문학 지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비판이 가해졌는데 특히 중국은 삼국사기에 중국에서 천문도가 고구려에 전해졌다는 기록을 가지고 중국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에 천문도를 하사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말도 안된 주장입니다.
첫째는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는 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적대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적대국에 당시의 황제-고구려에서는 태왕-의 고유한 권한인 천문학의 집약인 천문도를 하사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두번재로는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기록이 고구려가 망한지 24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입니다.
자 그렇다면 권근의 말을 부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일단 고구려의 천문도를 근거로 만들었다는 말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조선 초의 하늘에 맞게 수정했다는
부분인데 이것이 사실이란 점을 바로 박창범 교수가
밝혀내었는데 이는 천문학자가 아니라면 밝혀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컴퓨터의 발달로 지구의 자전과 공전, 북극이
2만 5천 8백 년 주기로 옮겨가는 세차운동을
컴퓨터에 입력시켜놓고 천문도에 그려진 별자리들의 위치를 북극과 적도의 위치와 비교하면 어느 시대의 하늘의 별자리인지, 어느 지역에서 관찰한 하늘의 별자리인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박창범 교수는 이러한 실험을 통해 천문도의 중앙부인 북극 주변은 조선시대 초의 하늘의 모습이고 그 바깥에 있는 별들은 서기 1세기경인 고구려시대 초기로 밝혀내었습니다. 관측자의 위치도 조선
초 천문도 중앙부의 별자리는 한양의 위도 38도로 나왔고 고구려시대의 바깥쪽의 관측지점은
위도 39~40도 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로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의 1세기에 작성된 천문도를 기본으로 조선 초에 수정된 하늘의 별자리임이 확인된 것입니다. 또한 북극에서 남극까지 온 하늘의 별자리를 한데 모아놓은 관측연대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성도 인 것입니다.
서기 1세기에 하늘의 모습이 이렇게 정확하게 그려놓았다니.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가 남송때 [순우천문도]
에 비취어 볼 때 하느님의 자손이라 생각한, 즉 천손의 나라인 고구려 선조들의 위대함에
다시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우수한 천문학적 지식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확연히 들어나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립 역사박물관에서 기획 전시중인 고구려 고분벽화 전에서 고분벽화에 새겨진 별자리의 내용을 보면서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덕흥리 고분 천장에 그려진 별모양, 역사박물관 고분벽화전에서 촬영
고분벽화에 표현된 동방과 서방의 쌍삼성, 남방의 남두육성,
북방의 북두칠성 등은 고구려 식 천문방위 관념을 나타내는 별자리이고 하늘의 28개
별자리는 방위 별로 7개씩 나뉘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형상화 되었는데 이 사신(四神)이 고분벽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도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벽화에 새겨진 하늘과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하늘을 대비시켜놓았는데 거의 흡사한 모습
역사박물관 고분벽화전에서 촬영. 삼각대를 사용하던지 수전증을 치료하던지...
또한 별자리를 표시함에 있어 밝은 별은 크게 새겼고 어두워질수록 크기를 작게 새기는 것은 우리나라의 천문도에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이기에 고구려의 천문기법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만의 것이며 당대의 하늘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고구려의 천문도를 기본으로 조선 초에 새로운 연구를 통해 새롭게 천문도를 계산해낸 학자는 누구였을까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문에는 모두 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권근이 글을 짓고, 유방택이 천문계산을 하고, 설경수가 글을 썼다고 돼 있습니다. 권근은 문필가,
천문계산을 했다고 기록된 유방택은 어떤 인물일까요?
유방택에 대해서는
또 유방택은 죽는 날 두 아들에게 “ 나는 고려사람으로 개성에서 죽으니, 내 무덤을 봉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
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왕조가 시작되자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공주 동학사
삼은각을 짓고, 포은
유방택. 고려의 충신으로서 조선 개국이 못 마땅했지만 새로운 천문도를 통해 널리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농사에 밀접하여 백성에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는 일에는 기꺼이 동참했던 유방택.
자신의 정견을 넘어 나라와 백성의 이로움에 관계된 일이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아낌없이 내놓았던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지난 4월 우리나라에서 새로 발견한 소행성 두 개에
우리나라의 학자 이름이 세계적으로 공인된 기쁜 뉴스를 들었습니다. 태양계의 한 구성원인 소행성은 주로
화성의 공전궤도와 목성의 공전궤도 사이에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천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날 한국천문연구원(원장
왼쪽이 유방택 별, 오른쪽이 이원철 별
빨강,파랑 두개로 보이는 이유는 촬영된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유방택은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 제작 천문계산부분의 총 책임자였으며
연구인력 수와 과학기술을 단순 비교하면 천문학 선진국에 비하면 보 잘 것 없는
우리가 새로운 학문적 쾌거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별자리들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이란 조선시대 천문학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우리는 이미 고대 때부터 관측이 가능한 별자리들의 우리나라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 아주 일부분을 되찾아 오는 것일 뿐입니다.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우수한 천문학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고대부터 내려온 우수한 천문학의 전통이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은 아닐까요?
집현전에서 학자들이 잠든 모습을 보고 자신의 곤룡포를 벗어 덮어주던 따뜻한 세종대왕도 관상감에서 보고한 일식현상이 10여분 가량 지연되었다고 하늘의 지켜보는 일을 맡은 관리를 곤장을 때릴 만큼 하늘에 대한 관찰에 철저했던 우리 선조들의 빛나는 과학정신이 있기에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경이적인 속도로 과학입국을 실현해 세계 경제 10대국 안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지폐에 과학유물을 세가지나(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보현산 광학망원경) 삽입할 만큼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이러한 우리 과학의 우수성에 대한 기록이며 2000년 전 우리 하늘에 새겨놓은 우리 역사인 것입니다.
참고자료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박창범, 김영사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박영규, 들녁
연합뉴스 대전 2006 4월 18일자 기사
국민일보 2006 4월 20일자 기사
기타 문화재청 사이트 및 몇몇 블러그..
2006 . 9 . 25
금강안金剛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