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形解析자형해석

   

 

1. 고대문자를 이해하는 방법

      

甲骨文字(갑골문자),金文字(금문자), 고문자의 이해는 그 당시 상형을 그릴 때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문자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때의 情緖라 함은 天文을 의미하며,

     

문자는 최초 천문기록을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 이해하면 고문자의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자 상형은 인간이 그린 것이므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의미"가 들어 있어야하고,

     

"보편타당한 의미"는 그 쓰임새에 있어서 반복적으로 똑같은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편타당하고, 반복적으로 합치" 할 때, 그것은 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古文字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형에서 "보편타당한 의미"를 찾고,

     

그 문자의 쓰임새가 "반복적으로 합치" 할 때,

     

그 해석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 질서의 법칙인 과학이론이 아닌 "인간이 만든 고대 문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고대 상형문자를 해석하기 전에

 그 상형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보여주고

 각자의 느낌을 취합했었는데 실로 놀랍다.

 도통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인가 보다.         -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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器 기   (0) 2010.11.06

귀신 鬼神

 

 

 

 

 

 

 

천문적의미 : 鬼귀: 반대쪽, 낮은 곳.

                  神신: 최고점, 가장높은 곳.
                                                 

鬼귀

 

 

 

 

 

神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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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동이의 어원은 큰 활을 쓰는 동방인을 이르는 말이란다.

글로 쓰다보니 한문으로 東夷이라고 쓰고 동이라고 읽는다.

 

 

동이

동이

동이의 어원은 그대로 동이이다.

 

석기 시대부터 그냥 동이라 불렀다.

동이

동이

양동이

물동이 말이다.

 

그러니까

석기시대

우리 조상이 처음 질그릇을 만들고

그 이름을 동이라 불렀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순 우리말이다.

 

글쟁이들이 발음 나는데로 글로 적다가 보니

東夷라 적은 것인데

활이 어떠니...

오랑케가 어쩌니한다.

 


桶: 1. [명] (물건을 담는 원형의) 통. 초롱.  물동이     tǒng

 

 

 

1.東夷(동이)

東夷(동이)는 "통"이라는 말의 漢文字(한문자) 표기이다. "통"이란 그릇의 의미이고,

夷(이)字는 "커다란 물레"를 이르는 말이다.

 

질그릇을 만들 때 진흙을 올려놓고 돌리는 "물레"를 말한다.

 

東夷(동이)란 질그릇을 인류 최초로 만든 부족의 이름이다.


"통"이라는 말은 물을 담는 "물통" "보시기"등의 질그릇을 말한다.
漢文字(한문자)에서 "그릇"의 의미를 가진 문자부터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다.
器(기)자는 물을 담는 "물통"이고, 其(기)자는 별을 담는 그릇 "별통"이다. 따라서 고대의
器(기)자와 其(기)자의 "그릇"은 우리식 발음으로 "통"이라는 말이다.

器(기) 夷(이)의 古代(고대) 文字(문자)를 분석해 보자.

 

 

 

器(기): "그릇"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  상세설명 바로가기

 

그림은 金文字(금문자)의 器자의 상형이다.
상형의 의미대로라면, 그릇을 짐승이 지키고있는 모양이다.
그릇을 짐승이 지키고있다면, 그 그릇은 온전할 리 없다.
고대의 문자가 만들어 질 때로 거슬러 오르면, 그 당시 구구석기시대(?)에서 그릇의
의미는 재산 목록 1호쯤 되는 귀한 것 이였을 터인데, 짐승의 주변에 늘어놓은 것은 어떤 연유인가?

그릇에 짐승이 딸려있는 연유를 고찰하면, 위 상형은 그릇을 만든 과정의 설명이다.

고대 빗살무늬토기 이전에도 질그릇은 존재했었고, 토기를 만드는 방법 또한 시대마다 달랐을 것
이다. 사냥한 짐승은 불에 구어 먹었을 것이고 나머지 가죽과 밥통(胃)과 뿔은 다양한 생활도구로
이용했다. 토끼털로 옷을 지어 입었고 개의 가죽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짐승의 가죽이나 짐승의 胃(위)밥통은 바람을 불어넣으면 공이 되고, 그 공의 둘레에 진흙을 바르
고 말린 연후에 불에 구우면 질그릇이 된다. 진흙을 말리는 과정에서 질그릇이 터지지 않도록 대
나무 까치를 촘촘히 박아두고 질끈 동여매고 말리면 질그릇이 터지지 않고 제대로 구워질 것이다.

 

“빗살무늬토기
인류최초의 질그릇을 만드는 과정이고, 이것이 고대문자 상형 속의 그릇 안에 들어있는 짐승의 의
미이다.


빗살무늬토기의 제조방법은 날로 발전해서 질그릇을 만드는데 “물레”를 사용하게 된다.
질그릇을 최초로 만든 東夷의 文字속에서 “물레”의 의미를 보자.

 

夷 자의 古文字 상형을 보자.

 


說文解字에 말하길
平也。从大从弓。東方之人也。
“동방의 큰사람”이라했고 金文編상형에도 그려있다.
또한 “像韋束矢形” 큰 활을 들고 있는 상형으로써
동이족이 큰활을 최초로 만들어 사용했고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배워왔다.

 


그러나.
고대문자의 상형을 자세히 보면 “물레”가 돌아가는 모양을 볼 수 있다.
또한


說文解字에 말하길
夷 = 平,平坦이라 했다.
平자의 고문자에서도 “물레”의 의미를 볼 수 있다..

                                                                                          東夷 동이

 

 

 

 

東夷동이의 어원은 큰 활을 쓰는 동방인을 이르는 말이란다.

글로 쓰다보니 한문으로 東夷이라고 쓰고 동이라고 읽는다.

 

동이

동이

동이의 어원은 그대로 동이이다.

 

석기 시대부터 그냥 동이라 불렀다.

동이

동이

양동이

물동이 말이다.

 

그러니까

석기시대

우리 조상이 처음 질그릇을 만들고

그 이름을 동이라 불렀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순 우리말이다.

 

글쟁이들이 발음 나는데로 글로 적다가 보니

東夷라 적은 것인데

활이 어떠니...

오랑케가 어쩌니한다.

 

 桶: 1. [명] (물건을 담는 원형의) 통. 초롱.  물동이     tǒng

 

 

 

1.東夷(동이)

東夷(동이)는 "통"이라는 말의 漢文字(한문자) 표기이다. "통"이란 그릇의 의미이고,

夷(이)字는 "커다란 물레"를 이르는 말이다.

 

질그릇을 만들 때 진흙을 올려놓고 돌리는 "물레"를 말한다.

 

東夷(동이)란 질그릇을 인류 최초로 만든 부족의 이름이다.


"통"이라는 말은 물을 담는 "물통" "보시기"등의 질그릇을 말한다.
漢文字(한문자)에서 "그릇"의 의미를 가진 문자부터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다.
器(기)자는 물을 담는 "물통"이고, 其(기)자는 별을 담는 그릇 "별통"이다. 따라서 고대의
器(기)자와 其(기)자의 "그릇"은 우리식 발음으로 "통"이라는 말이다.

器(기) 夷(이)의 古代(고대) 文字(문자)를 분석해 보자.

 

 

 

器(기): "그릇"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  상세설명 바로가기

 

그림은 金文字(금문자)의 器자의 상형이다.
상형의 의미대로라면, 그릇을 짐승이 지키고있는 모양이다.
그릇을 짐승이 지키고있다면, 그 그릇은 온전할 리 없다.
고대의 문자가 만들어 질 때로 거슬러 오르면, 그 당시 구구석기시대(?)에서 그릇의
의미는 재산 목록 1호쯤 되는 귀한 것 이였을 터인데, 짐승의 주변에 늘어놓은 것은 어떤 연유인가?

그릇에 짐승이 딸려있는 연유를 고찰하면, 위 상형은 그릇을 만든 과정의 설명이다.

고대 빗살무늬토기 이전에도 질그릇은 존재했었고, 토기를 만드는 방법 또한 시대마다 달랐을 것
이다. 사냥한 짐승은 불에 구어 먹었을 것이고 나머지 가죽과 밥통(胃)과 뿔은 다양한 생활도구로
이용했다. 토끼털로 옷을 지어 입었고 개의 가죽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짐승의 가죽이나 짐승의 胃(위)밥통은 바람을 불어넣으면 공이 되고, 그 공의 둘레에 진흙을 바르
고 말린 연후에 불에 구우면 질그릇이 된다. 진흙을 말리는 과정에서 질그릇이 터지지 않도록 대
나무 까치를 촘촘히 박아두고 질끈 동여매고 말리면 질그릇이 터지지 않고 제대로 구워질 것이다.

 

“빗살무늬토기
인류최초의 질그릇을 만드는 과정이고, 이것이 고대문자 상형 속의 그릇 안에 들어있는 짐승의 의
미이다.


빗살무늬토기의 제조방법은 날로 발전해서 질그릇을 만드는데 “물레”를 사용하게 된다.
질그릇을 최초로 만든 東夷의 文字속에서 “물레”의 의미를 보자.

 

夷 자의 古文字 상형을 보자.

 

 

說文解字에 말하길
平也。从大从弓。東方之人也。
“동방의 큰사람”이라했고 金文編상형에도 그려있다.
또한 “像韋束矢形” 큰 활을 들고 있는 상형으로써
동이족이 큰활을 최초로 만들어 사용했고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배워왔다.

 


그러나.
고대문자의 상형을 자세히 보면 “물레”가 돌아가는 모양을 볼 수 있다.
또한


說文解字에 말하길
夷 = 平,平坦이라 했다.
平자의 고문자에서도 “물레”의 의미를 볼 수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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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 기원

記憶力(기억력)의限界(한계) 극복


文字(문자)의 起源(기원)은 의사 전달에 있어서 言語(언어)의 時間(시간)空間的(공간적)制約(제약)의 克復(극복)을 위함이다.

그에 앞서서 꼭 기억해두어야 할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표시를 해두는 방법의 일환으로 상형을 만들어 그려놓은 것이며,

인간의 記憶力(기억력)限界(한계)의 극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문자이다.

인간 기억력의 한계를 넘어선 방대한 량의 기억해야할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이든 기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대에 가장 기록을 필요로 하는 방대한 정보량은

治民(치민)과 歷史記錄(역사기록)또는 의사전달에 앞서서 당대의 弘益(홍익)에 필요한 天文記錄(천문기록)인 것이며

이 때의 기록은 일반적 의사전달 수단이 아닌 천문학적 전문용어로 쓰여진 것이다.

세계에는 많은 종류의 고대문자가 있다.

많은 부분 해석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잃어버린 고대의 역사만큼이나 미해독 문자가 많다.
본인은 미해독의 원인은 문자를 만들 당시의 정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단계에서 문자의 상형에 무슨 과학적 의미를 부여했겠는가? 하는 식의 접근은 영원히 문자해석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을 보게되고 하늘의 별을 머리에 이고 살아간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와 같이 인간의 내면에는 天文(천문)본능이 존재한다.
농경, 수렵, 항해, 고대인들의 삶은 자연순응이며, 거기서 자연의 질서를 밝혀 弘益(홍익)을 위한 과학을 한 것이고 과학의 시작은 곧 天文(천문)을 의미한다.

천문은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과거의 기록이 없는 천문은 뱃전에 표시를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고대문자의 상형 그것은 천문기록이며, 고대의 문자는 천문학자가 만들은 것이다.

미해독 문자해석의 접근은 천문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며, 이미 완역된 세계의 모든 문자의 많은 부분 천문 기록으로 다시 해석 되어야한다.
무당의 주술기록, 역사의 서술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고대과학이 제자리를 찾는 일이며 7대 불가사이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고대 인류의 문자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돌판 위에 별자리 좌표를 그리면서 시작됐다.
그 상형이 사슴의 모양이든 고래의 모양이든, 새의 발자국이든 모두 별자리 모양을 그렸다는 말이다.
문자의 기원이 천문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다.
 
漢字 또한 근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문자의 상형에서는 천문학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따라서 현재 쓰이고있는 문자의 의미와는 또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이다.
고대 천문학은 왕권을 유지하는 도구였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부쳐진 프로잭트였다.
그것으로 天子의 지위를 유지해 간 것이다.   
고대 문자속에는 천문의 의미가 스며있을 뿐만아니라
전해지는 신화와 고서 속의 이상스러운 이야기들은 문자의 원류로 분석해보면
天文에 관련된 기록으로 다시 읽히게 되는 것이다.


 2003 꽃신

  

제작자는 오길순 선생님입니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로

 

자비를 들여

 

전세계의 고대 천문도를 발굴 복원중이십니다.

 

무료제공하고 계십니다.

 

이용하시는 분은 감사의 뜻으로

 

제작자의 출처는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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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와 낙서

 

진정 무슨 의미인지 아는 자 있을까?


뭐라 아는체는 한다마는....

 

못된 말이 수레를 뒤 없어 놓고는

나자빠져서

네발로 하늘을 휘저으며

나 몰라라 한다.

 

 

 

   列子가 밝힌 洛書낙서 그리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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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MBC 특집HD 다큐멘터리 1부. 삼족오. 한민족의 코드로 부활하다 -삼족오를 통해 단절된 고대사를 조명하다. -민족 상징의 재발견, 삼족오 -고대의 한류의 비밀을 밝히는 DNA,삼족오 -역사는 미래를 만든다. 독창적인 삼족오를 통한 민족의 뿌리밝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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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體字字典 이체자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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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140.111.1.40/?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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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重編國語辭典修訂本


존 한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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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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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과의 대화 CHINA TV   http://www.openchina21.com/program/pros/program_17/story.php

갑골문자 상형을 검색할 수있습니다. 중국어 번체(Bi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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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s.nthu.edu.tw/NewWww/Exhibition/1994-11-14/fonts/index.html


甲骨 金文 楚文 小篆등 古文字
http://www.ideograms.org/database/sample.htm#

한문원전 한문원전 한문원전 한문원전 한문원전
http://www.chinapage.com/main2.html
http://www.sinica.edu.tw/~tdbproj/handy1/
http://www.sinica.edu.tw/
http://www.doksunjai.net/technote/library.cgi
http://www.hanja365.com.ne.kr/_booksdata.htm
http://chunhoj.new21.org/pds/wonjun.html
http://www.yasue888.net/hon_lo.html
http://www.yasue888.net/si_gei.html 05/01/22 11:09 PM 史記
http://www.hanjawa.com/

http://www.angelibrary.com/

http://art.westcn.com/gdwx/index.htm 문집등 다양 간체


국가 문물국 / 資料信息   http://www.nach.gov.cn/

26史 http://www.nach.gov.cn/datainfo/sachbook/

동경대학 http://shanben.ioc.u-tokyo.ac.jp/

남경박물원 원문자료 http://www.njmuseum.com/


http://www.njmuseum.com:5000/zh/8wbsk.htm

                중국어로 읽어주기는 하는데, 귀어둡고 눈어둡고..... 어쨓든 참고


방대한량의 원전 중화 문화망
http://www.yjsy.ecnu.edu.cn/jszj/jszj.htm 중국 간체

http://ef.cdpa.nsysu.edu.tw/ccw/


중국언어문자세계
http://www.sinolingua.net/old/home.htm


搜文解字 고문자의세계(古文字的世界):甲骨文,金文,東周文字
http://cls.admin.yzu.edu.tw/swjz/index.html

중국 도서관
http://www.sdlib.com/library/reslinkservlet?at=getResLinkSmall&bigid=8

중국문예
http://www.wenyi.com/

서법 書法
http://www.wenyi.com/art/shufa/xianqing/shiguwen.htm

http://www.cc5000.com/zhishi/shufa/jiaguwen1.htm

http://www.sivs.chc.edu.tw/www2root/ox_view/

http://myweb.hinet.net/home5/a84308537/index.htm


한시 한문
http://blog.naver.com/osj1952.do


남경박물원
http://www.njmuseum.com/

http://www.njmuseum.com:5000/zh/8wbsk.htm

東京大學校合圖書館漢籍目錄
http://www.l.u-tokyo.ac.jp/GT/kanseki/sakuin/index.html


甲骨學概論 갑골학계론
http://nuhm.pccu.edu.tw/p4_12_m.htm#01


殷墟 YINRUINS
http://jgw.ayinfo.ha.cn

http://jgw.ayinfo.ha.cn/20030523/more.asp?ttt=12&sss=甲骨字? 甲骨字庫

http://jgw.ayinfo.ha.cn/20030523/more.asp?ttt=11&sss=大??? 大衆話題

http://jgw.ayinfo.ha.cn/20030523/more.asp?ttt=10&sss=著名?人 著名學人

http://jgw.ayinfo.ha.cn/20030523/more.asp?ttt=9&sss=甲骨?? 甲骨釋讀
甲骨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台灣國立成功大學圖書館:
http://cdnet.lib.ncku.edu.tw/doc/old.htm (下載看圖程式 다운로드 후)
http://cdnet.lib.ncku.edu.tw/doc/old.htm

甲骨文全文影像資料庫
影像資料를 보실 수 있습니다.

 

中國甲骨文獻庫
http://www.cn-oracle.com/index.php


香港中文大學漢達文庫:

http://www.chant.org


殷墟史話은허사화
http://www.sinica.edu.tw/~dmuseum/2/toolbox.htm

殷墟博物范은허박물원
http://www.ayyx.com/
http://www.ayyx.com/jgw1.htm


甲骨卜辭와 古文字 도서
http://www.bjkgsd.com.cn/jiaguwenzi.htm


슬라이드식으로 갑골문자를 검색
http://mcw.hkcampus.net/~mcw-lwl/mcw-hkw/chinese/3.htm
http://mcw.hkcampus.net/~mcw-lwl/mcw-hkw/chinese/text.ppt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http://www.kaogu.net.cn/


言語, 甲骨文 -참고 사이트, 정석근
http://www.npm.gov.tw/english/exhbition/eyin0701/intro.htm
http://www.npm.gov.tw/english/exhbition/eyin0701/read.htm
http://www.npm.gov.tw/english/exhbition/ewen0630/intro.htm

 

甲骨文 -참고 사이트, 정석근
http://www.antiquus.co.kr/webzine11/main10.html

 

최영택의 야한 까페 / 고문자 폰드 자료실
http://user.chollian.net/~cytchoi/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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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 소장자료검색 에서 <설문해자>의 고문자 상형을 볼 수있습니다.
검색< 說文解字篆韻譜 / 徐鉉(宋) 述 種善堂 貴 411.32 ㅅ224ㅅ >
http://www.nanet.go.kr/dl-web/hp/k04_sojangsearch.html?nav=040100in_mng.html


김시연의 힌자학 강의실
갑골학및 중국 문자에 대한 간략한 개괄: 김시연 한자학강의실 /자료실 31,30, 29번 파일
http://yscecvod.hananet.net:87/users/chungha/default.asp?cid=476

 

한자의 세계

http://www.gomunza.net/index02.html


http://hanja.pe.kr/han_4/h4-a/h4a_main.htm
이야기 한자여행

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중국학부 이인호
http://pendar.hanyang.ac.kr/html/2002_2/common/shuti/jiaguwen.htm
http://pendar.hanyang.ac.kr/html/2002_2/21china/index.htm
http://www.lib.cuhk.edu.hk/uclib/bones/bones.htm

 

인명 지명등 검색

사마천의 사기
http://giant.x-y.net/sagi/man/man_main.htm
http://www.yangco.net/
http://www.china10k.com/trad/main/index.htm
http://cls.admin.yzu.edu.tw/ORIG/all_people.asp

고금지명대비
http://astronote.org/board/index.php?menu=7&table_name=b_astro_pds&job=보기&idx=50&page=1&search_title=&search_word=


新校本晉書 漢書/등의 열전에서 인명검색
http://www.sinica.edu.tw/~tdbproj/handy1/

고사성어 출전 및 인물 목록
http://www.sosok.hs.kr/~gosa/cj/chuljun.htm

 

중국신화
http://www.chinesemyth.net

신화인명사전
http://www.newmurim.com/newmurim/main1-1/main407-2.htm


중국 링크
http://web2.kwangju.ac.kr/~xiang/info/chinabaike.htm
http://cd.openfind.com.tw/cgi-bin/CD/GCd?Fun=sb&Fn=55 검색
http://www.yeesan.co.kr/readers/chinalink.html 일본 중국등 관련링크 <도서 이산>


중국학@쎈타

열혈강의 이야기 중국사 35강

http://www.sinology.org/study/study_sub02_01_view.asp?BID1=2&BID=8&idx=59


일본학자가 쓴 「중국문학사」  (번역 : 全弘哲·文承勇)

http://www.sinology.org/study/study_sub03_01_view.asp?BID=1&idx=16

 

 

중국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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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ungshin.ac.kr/%7Eyjcho/frame1.htm


대만국립박물관/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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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立自然科學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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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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簫堯〖藝文〗網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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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중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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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学在线 >> 哲学资源 >> 中国古代典籍 >> 先秦文献 >> 正文철학자료집성http://philosophyol.com/pol04/resource/china/tangsong/200407/351.htmlhttp://www.sinica.edu.tw/~hantomb/index3.html


中華龍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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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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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국일본각지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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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csun57.cc.ntu.edu.tw/~hroklga/teahc.htm#idx-teahc
문물도감 書信格式漫談 儀禮宮室圖 商周秦漢文物圖鑑

중국사 임병덕의 홈페이지
http://web.chungbuk.ac.kr/~limbd3/main_frame1.htm

 

중국 검색


www.sina.com

www.sohu.com

www.yahoo.com.cn

http://www.163.com

http://www.3721.com

http://www.baidu.com

http://www.21cn.com

http://www.chinaren.com

http://www.china.com

http://www.tencent.com


중국고천문 사이트를 소개합니다. 작성 /오길순 --- 펌

미국에 살고 있는 고천문애호가 곽상식씨로 부터 정보를 받고 들어가 보았는데 요즘들어 중국(대만과 본토)에도 좋은 고천문 사이트가 많이 생기는 군요. 한번 들어가 보세요. 글자가 한문이라 보기 어려운 분도 있겠지만 그림은 만국공통어이니까 이해할수 있을거예요.

http://juns.uhome.net/big5/ast-date/indexA.htm
http://www.hss.nthu.edu.tw/~NHCS/ylhuang/branches/personal/huang_menu.htm
http://members.fortunecity.com/wankawo/
http://hometown.aol.com/lklstars1/year2.htm
http://info.nmns.edu.tw/obser/02/china-frame.htm
http://vm.nthu.edu.tw/history/shows/show01/astronomical.chart/contents/chart.html


天文同盟중국천문싸이트
http://qbtw.lamost.org/

中國古代星座簡介
http://www.phys.ncku.edu.tw/~astrolab/e_book/astron_chinese/captions/chinese_stars.html

中國天文學發展簡史
http://www.phy.ncku.edu.tw/~astrolab/e_book/astron_chinese/astron_chinese.html


고고천문학 관련 사이트 링크 모음

http://newton.kias.re.kr/~sha/public_html/orient.htm


고전 천문서 漢書 天文志 漢書 律曆志 後漢書 天文志 後漢書 律曆志 史記 天官書史記등
http://kimoon.hihome.com/ImportedFiles/cosmos/jaryo.htm


成功大學物理學系 天文學實驗室
http://www.phy.ncku.edu.tw/~astrolab/e_book/

충북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http://web.chungbuk.ac.kr/~history1/5.htm

 


고대천문학

http://cosmos.es.pusan.ac.kr/~hbann/ancient/

 

사이토구니치의 古天文學
http://astronote.org/note/?idx=434&menu=4


한국고대사학회

http://www.hongik.ac.kr/~kosa/


역사천문학회
http://cafe.daum.net/oldhistory

산해경 관련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곳>
http://user.chol.com/~jtm71/


천문프로그램
http://astronote.org/note/files/pds/program/skymap3.zip
skymap3

http://astronote.org/note/files/pds/program/skymap5.exe
skymap5


고대화폐
http://blog.naver.com/coinman1492


세계 각국의 지도 세계 각국의 유적지
http://ynucc.yeungnam.ac.kr/%7Ehistory/hmapworld.html


장서각
http://lib.aks.ac.kr/

한국학전자도서관
http://lib.aks.ac.kr/solarsweb4/main.asp?txtMMenu=7


한국금석문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홈페이지 입니다.

고문서 고도서

http://koreanhistory.or.kr/front/index.jsp

                                    이곳은 생긴지 얼마 안됬는데 볼게 많고 편리합니다.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박민우

국사편찬위원회

http://210.125.185.205/front/addservice/addFrameSet.jsp?pUrl=/front/addservice/qna/listQnaBoard.jsp

고문헌 검색 http://library.bok.or.kr/cms/oldbook/category_search.php

 


국립 중앙도서관 http://www.nl.go.kr/

 


국가전자도서관 http://www.dlibrary.go.kr/

 


국회도서관 http://www.nanet.go.kr/

 


대학레포트 http://www.reportworld.co.kr/

 


규장각 http://kyujanggak.snu.ac.kr/

 


대학도서관 http://delias.dongeui.ac.kr/links/links.html#col

 

박물관 http://blog.naver.com/kimskims21/40013177111

 


문화유산 전문싸이트 http://www.coeo.net/menu4/gihag/list.asp?PageTitle=기획/중점기사&PageID=gihag

 


고고학사전 http://www.nricp.go.kr/korean/dic/diclist.asp?From=가&To=나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kh2.koreanhistory.or.kr

 

국가기록유산 http://www.memorykorea.go.kr/

 

국가문화유산 종합써비스 http://www.heritage.go.kr/

 


서지검색 http://www.hongik.ac.kr/~khc/

 

역사관련 http://www.kyungnam.ac.kr/yujang/kangui/in&his-chp3.htm
             http://www.chinaknowledge.de/index.html

 

 

조경 속의  역사가  보이는 곳

http://www.ahngb.com/bbs/zboard.php?id=notic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

 

 

 

 


한국상고사학회

http://www.sanggo.or.kr/

 


상고사학회

http://sanggosa.or.kr/index.php

 


서울대학교고고미술사학과

http://www.archaeology-arthistory.or.kr/introduce/professor03.htm

 


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josunsangosa.htm

 


우리역사의 비밀

http://coo2.net/

 


상고사 http://www.bc8937.pe.ne.kr/

 

 

 

 


삼족오 솟대 장승

5050clinic (오공오공)
http://theologia.pe.kr/zeroboard/zboard.php?id=sam_foot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3joko.htm

 

 

 

동양신화

http://allblog.net/GoPage/goPageFrame.aspx?http%3A%2F%2Fwww.daehan777.co.kr%2Ftt%2Findex.php%3Fpl%3D133

 

대만은 백제 속국

http://www.bc8937.pe.ne.kr/technote/read.cgi?board=FREE_BOARD&y_number=10&nnew=2

 

 

 

 

 

 

 

 


고구려 관련http://my.netian.com/~ulpang/관련.htm

고구려연구회http://www.koguryo.re.kr/

아!고구려http://www.chosun.com/culture/ahkorea.html

고구려 벽화http://visart.hihome.com/page-50.html
http://myhome.naver.com/jangdr/kor900.htm


동영상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2/200402020034.html
사진

고구려연구회 자료실/ 서적 및 논문/ 영상자료http://www.koguryo.org/Frame.htm /


고구려 天文http://db2.dbchosun.com/cgi-bin/photo/photoSlide.cgi?s1=cybr1&s2=00001&pg=0

 

고구려 고분벽화의 북극성 별자리에 관한 연구 김일권99/08/23
http://www.koguryo.org/old_board/board.cgi?db=board2&mode=read&num=3&page=2&ftype=6&fval=%c3%b5%b9%ae&backdepth=1

고구려 고분벽화의 天文思想 특징 '三重 天文 方位 標指 體系'를 중심
http://www.koguryo.org/old_board/board.cgi?db=board2&mode=read&num=63&page=2&ftype=6&fval=%c3%b5%b9%ae&backdepth=1


四神圖 형식의 성립 과정과 漢代의 天文星宿圖 고찰
http://www.koguryo.org/old_board/board.cgi?db=board2&mode=read&num=81&page=2&ftype=6&fval=%c3%b5%b9%ae&backdepth=1

고구려벽화와 고대동아시아의 벽화천문 전통고찰(국제학술대회2일A그룹)
http://www.koguryo.org/old_board/board.cgi?db=board2&mode=read&num=179&page=1&ftype=6&fval=%c3%b5%b9%ae&backdepth=1

壁畵를 통해서 본 高句麗의 天文學과 과학
http://www.koguryo.org/old_board/board.cgi?db=board2&mode=read&num=183&page=1&ftype=6&fval=%c3%b5%b9%ae&backdepth=1

 

백제금동대향로
http://hyangno.net/

암각화


글모음 ㅡ동방의 빛

http://blog.naver.com/h7197/100013347251

 


반구대 암각화
http://www.bangudae.pe.kr/bangudae2000/ban-4.htm

반구대 등 암각화
http://myhome.naver.com/jangdr/kor900.htm
http://my.dreamwiz.com/synoria/ban1.htm
http://my.dreamwiz.com/synoria/site.htm

 


일본

http://enjoyjapan.naver.com/japanweb/ 한일어 번역
http://www.clickq.com/trans/jkkj/web.php 한일웹 번역

 

검색Web情報資源集

http://shinji50.sakura.ne.jp/resource/conv.cgi?ndc=1

 

동경대학 전자도서관 귀중자료화상
http://ddb.libnet.kulib.kyoto-u.ac.jp/exhibit/index.html

 

http://www.musicaderosa.com/kitora5.html 기토라고분

http://www2.gol.com/users/stever/kitora.htm
http://www.asahi-net.or.jp/~nr8c-ab/jpnkitora.htm 기토라고분(キトラ古墳の星宿圖)
http://www.asahi-net.or.jp/~nr8c-ab/ktmain.htm 天文民俗 古天文


高松塚古墳(たかまつづかこふん)
http://www.asukanet.gr.jp/ASUKA2/TAKAMATUTUKA/takamatutuka.html
http://wakineko.cside9.com/visit_report/asuka_village/takamatsuzuka.shtml
http://www5e.biglobe.ne.jp/~hakuga/rekisi/kohun.htm

飛鳥資料館
http://www.asukanet.gr.jp/index.html

 

http://www.asahi-net.or.jp/~nr8c-ab/kttyokoseizu1.htm 東洋の古墳と天文
http://www.actv.ne.jp/~yappi/tanosii-sekaisi/07_china/07index.htm 中國史
http://applepig.idv.tw/kuon/furu/text/syoki/syokitop.htm 新編 日本書紀


http://310sci.net/hotaru/hotaruinfo.htm 일본 삼족오 관련
http://katori.adam.ne.jp/karasu/karasu-1.htm
http://mx.miho.or.jp/booth/html/artcon/00002323.htm

http://www.asahi-net.or.jp/~xx8f-ishr/hozonpage.htm
http://www.asahi-net.or.jp/~nr8c-ab/tanabata.htm
http://home.att.ne.jp/sea/g100club/weekly97.htm

 

 

 

http://record.museum.kyushu-u.ac.jp/index2.html<=일본 구주대학박물관


http://record.museum.kyushu-u.ac.jp/kinmou/contents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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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탄 이승소는 조선조 초기 집현전 출신 학자로 대표적 관각문인이다. 公의 묘는 본래 서울 상도동에 있었으나 1968년 도시계획 확장으로 천장하게 되어 직계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충주시 이류면 완오동으로 옮기고 이류면 매현리 서당동에 제실인 청간사(淸簡祠)를 지었다.

한편 이승소는 충청도관찰사 시절 충청 일대를 돌며 많은 시를 남겼다.  

공의 유고문집인 삼탄집에는 500여편의 시와 문장이 실려 있는데 현재 국역된 것은 50여편 정도다.

 

 

三灘集序(삼탄집서)
三灘先生은 文章으로 世上을 울린 분이다(以文章鳴干世). 같은 시대의 文章大家에는 金守溫(字는 文良, 號는 乖崖), 徐居正(字는 剛中, 號는 四佳亭), 姜希孟 (字는 景醇, 號는 私淑齊) 같은 이가 있는데 모두 문단(文壇)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문장의 특징을 들면 괴애(김수온)는 雄渾(웅장하고 막힘이 없음)하고 사가정(서거정)은 圓滑(매끄러움)하며 사숙제(강희맹)는 淸頸(맑고 힘참)하여 각기 그 아름다움을 專有하고 있지만 정밀하고 뜻이 깊으며 따스하고 넉넉하며 훈훈하고 문장의 법도가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점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삼탄(三灘)을 추앙하며 그에 미치지 못함을 자인하였다. 나는 나이 어려 그 어른의 모습을 직접 뵙고 음성을 들어보지는 못했으나 선비들 사이에서 그 어른의 풍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훤칠한 키에 얼굴은 白玉같이 희고 수염은 신선 같았으며 善을 실천함에 부지런하고 즐겼으며 사람을 끌어올려 씀에 지칠 줄을 몰랐다 하니 참으로 儒林의 泰山北斗이셨다. 내 壯年이 되어 四方에 노닐 때 곳곳에서 題詠(제목을 정하여 詩歌를 지음)하는 사이에 선생의 작품을 얻어볼 수 있었는 바 읽어본즉 처음에는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으나 생각을 펼쳐 적절한 표현을 해보려고 온종일 사색에 잠겨 신음해도 선생의 措辭(적당한 문구사용과 배치)에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음을 알고 선생의 높은 재주를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선생께서는 文藝의 극치에 이미 도달하였음에도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시고 작품을 이룩하시고는 곧 원고를 버리곤 하셨는데 마침내 선생이 세상을 뜨시매 上(成宗大王)께서 문장의 모범을 보고자 사신을 집으로 보내어 선생의 遺文을 求하매, 선생의 아들 熙가 흩어져 있던 若干編을 수습하여 정리해 올리니 上께서 깊이 歎賞(감탄하고 칭찬함)하시고 간행하려 하던 차에 미처 그 말씀을 내리지 못하시고 승하하시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더구나 문집의 소재마저 알 길이 없어 識者들 모두 몹시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甲戌年에 선생의 外孫으로 현재 함경도 都事로 있는 李君이 任地로 떠남을 알리려 나에게 와서 청하여 말하기를 나의 外祖父님 詩文이 아직 발간되지 못하였으니, 이름을 내세워 後世에 전함이 비록 外祖父의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子孫된 자로는 차마 그 시문이 아주 없어져 버려 전해지지 못하게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요. 나의 外叔(삼탄공의 장남 李熙)은 현재 杆城郡守로 있고 나 또한 함경도 수군절도사의 幕僚로 있어 相去가 불과 수백리라. 외숙과 생질이 힘을 합치면 成事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대 한마디 베풀어주시면 編首의 머리말로 삼겠오(序文을 부탁한 말) 내 응하여 말하되 선생의 문장은 人口에 膾炙(사람들 입에 오르내린지)된지 오래요. 굳이 간행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 序文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오? 그러나 刊出하지 않으면 永傳할 수 없고 서문은 간행하게된 사유를 기술하는 것이니 내 어찌 굳이 사양하겠오? 우리나라 문헌은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바 있으니 저 文昌侯 催致遠같은 이는 아주 오래전 인물이요. 文烈公 金富軾이하 名文章家도 열분이나 되고 小說類까지도 간출되지 않음이 없고l 지금까지도 세상에 유포되어 일반인이 얻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당시의 문학 崇尙熱을 알 수 있도다. 朝鮮朝의 文治의 盛함은 高麗朝에 비해서도 몇배나 높아 뛰어난 큰 재주들이 앞뒤 연이어 일어나 그 작품이 인쇄되어 널리 전해지는 책이 날로 뒤섞여 나오니 지금 三灘集이 李君의 勞苦를 기다려 출판되려는 것도 이 추세의 한 증거이다. 今世의 재주 후세에 전할만한 이 어찌 적다 할 수 있으랴 또한 지금 세상의 관습이 점점 옮겨가 옛날로 가는 것은 아닐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文章은 世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와 함께 오르내린다 하였으니 때문에 세상의 治亂(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을 占치려는 자 반드시 문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이 삼탄집이 전해짐으로써 조선조 文明의 다스림이 중국의 당(唐)나라 송(宋)나라 보다도 우뚝 솟아있고 久久한(오랜 역사의) 고려 보다도 뒤지지 않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리니 李君의 출판의 공적 세상에 裨益됨이 어찌 많지 않으랴! 李君의 이름은 壽童이요. 나와는 두 번이나 같은 관직에 있었는 바 그릇이 크고 취향이 高遠하며 글 또한 잘하는 분이다. 外家의 법도를 지켜 선생의 외손된 직분을 멋지게 수행한 이 바로 이분이 아니겠는가?
甲戌年 十月上旬에 宜寧 南袞 삼가 序하노라

[註]: 삼탄집 서문은 申用漑의 서문과 南袞의 서문이 있는데 이는 남곤의 서문이다. 남곤은 佔畢齊 金宗直의 문인이며 대제학, 영의정을 지낸 문필이 뛰어난 인물인데 이 서문에서 삼탄공의 시문은 일견 쉬운 것 같으나 생각을 펼쳐 표현함에 있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다고 격찬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삼탄집을 읽어봄으로써 조선조의 문학(文明) 수준이 중국의 문학 황금기였던 당, 송 보다도 오히려 높고 고려시대 문인들 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높은 수준임을 깨닫게 되리라고 자부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 서문을 쓴 甲戌년은 1514년 中宗9년이다.

 


 

世宗挽詞五首(세종만사5수)

三聖(太祖, 定宗, 太宗) 이어받아 王位에 오르니
그 어른들 서로 전해주심은 오직 한마음
(中庸의 大德으로 天下를 다스려야 한다는)
民心은 德있는 이를 사모하고 따르며
하늘 또한 진심으로 도우셨지요.
다만 千歲누리시기만 기원하였는데
八音 고요히 멎을 줄 어찌 알았으랴
백성들 靈前에 너도나도 눈물 흘리니
大王의 恩澤 마음속 깊이 사무침일세

周나라는 代代로 德을 쌓아 國運 오래 이어졌고
商나라도 德을 닦아 상서로움 나타났듯
公子들 모두 厚德하시고
子孫들 많이 멀리 퍼지셨네
대왕은 진심으로 九族과 敦睦하시고
三聖의 陵寢찾아 政事 물으셨는데
마침내 아드님께 왕도정치 물려주시니
그다지도 빨리 가심은 세상일 싫어지셨나이까

千고개 넘어 太平盛代 여시고
在位 30여년에
나라 경영의 아름다운 계책 확실히 세우셨네
事大의 정책 항상 독실하였고
交隣에는 信義 베풀어 믿음 얻으셨지
부지런하고 검소함은 禹임금 본받았고
周文王의 大謨 크게 드러냈지요.
五月喪期 임박하니
힌 상복에 지팡이 짚고
높은 山(대왕릉) 바라보며 달려가네

箕子의 洪範九疇 가슴에 안고
백성들 五福 누리도록 힘쓰셨으며
대왕의 光革은 堯 임금과 合致(합치)하셨네
태평에 기여하는 농사의 功(공) 익히 알으시고
꼴꾼 나무꾼에게도
물으셨다오.
禮樂은 주나라 雅樂같은
아름다운 음악 일으키시고
衣冠제도는 漢나라를 앞질렀다네
위대한 이름 아름다운 책에 실려
햇빛 별빛처럼 萬古에 빛나오리

대왕의 학문은 하늘이 내린 재주로 이룩하셨으며
神妙한 功德은 조화의 中樞를 잡으셨네
天文보아 天機에 맞는 政事 베푸셨고
사냥그물 칠 때에도 한쪽은 열어놓고
세 방위만 그물로 막으셨다네
德은 하늘과 땅만큼 넉넉하셨고
恩惠는 깊어 雨露처럼 백성들 적셔주셨네
小臣 생각할 수록 망극하여
피눈물 흘리면서
먼 하늘 바라보며 긴 한숨짓네

[註]: 八音은 金, 石, 絲, 竹, 匏(박), 土, 木, 革 등 재료로 만든 8종의 악기 즉, 모든 악기를 말함. 書經舜典에 “帝乃殂落커시늘 百姓은 如喪考妣하고 三載를 四海遏密八音하니라”하였다. 즉, 堯 임금이 승하하자 백성은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고 三年동안 온 세상에 음악소리가 끊어져 고요하였다.
箕範: 箕子가 周나라 武王에게 일러준 洪範九疇(홍범구주는 禹가 曉舜 이래의 사상을 집대성한 천지의 大法, 즉 정치 도덕의 기본적 九法
삼탄공은 세종대왕의 陵을 지금의 여주 영릉으로 옮길 때 遷陵誌石文을 썼고(왕의 묘지문은 당대의 최고문장이 쓰는 법) 또 이 만장 다섯수를 지었는 바 세종대왕의 정치는 중국의 聖君 堯, 舜, 禹王, 湯王, 文王, 武王의 善治에 비유하고 학문은 天縱之聖 孔子에 비유했다
.


立石釣魚(漢都十詠中一)/立石浦에서 고기 낚으며

우뚝 솟은 큰바위 강물을 굽어보고
바위아래 강물은
百頃(백경)의 澄潭(징담)되어 유리처럼 푸르렀네
물가 이끼 낀 돌 위에 앉아
한가로이 낚시대 드리우면
노니는 물고기들 미끼를 희롱하며
잠겼다 뛰었다 오르내리고
옥빛 쌀가루 나물죽 먹음직 해도
아무렴 맛있는 회무침을 어이 당하리
좋은 술 가득가득 銀병 기울여
강가에 흠뻑취해 누어 밝은 달 바라보니
酒德頌 이름높은 伯倫의 멋 닮았구료

[註]: 漢都十泳은 서울 十勝을 읊은 詩.
藏義尋僧(장의심승), 濟川翫月(제천완월), 楊花踏雪(양화답설), 盤松送客(반송송객)
木覓賞花(목멱상화), 箭串尋芳(전관심방), 麻浦泛舟(마포범주), 興德賞蓮(흥덕상련)
鍾街觀燈(종가관등), 立石釣魚(입석조어)를 일컬음인데 箭串(전관)은 ‘살곶이’
立石浦는 지금의 성수대교 북단 응봉 아래쪽의 깍아지른듯한 岩石이 있는 곳.
頃(경)은 전답의 면적단위 一頃은 百畝(백묘), 一畝는 百步, 步는 坪, 즉 一頃은 萬坪. 劉伶(유령) 字는 伯倫, 晋의 詩人 술을 즐겼으며 玩籍(완적), 嵆康(혜강)과 교유, 竹林七賢의 한사람, 酒德頌의 作者, 그는 주덕송에서 ‘幕天席地(하늘을 막으로 땅을 자리로 삼다’라 하였다.
[감상]: 낚시터에서 갓 잡아올린 농어회쯤 안주하여 좋은 술에 흠뻑 취해 강가에 누어 明月을 바라보니 劉伶이 酒德頌에서 幕天席地라 읊은 심정 가슴에 와 닿아 卽吟한 詩이다. 大自然과 하나되는 醉中仙趣 아니런가


無 題

老境에 詩狂되니
술과 어울리면 더욱 미쳐버리지
醉中에 神仙되는 우와한 멋
진정 가히 없어라
그대의 집 술 익거들랑
모름지기 날 부르게나
하루에 千잔을 기울이며
人生百年 보내리라.

[감상] : 三灘公의 詩는 씹으면 씹을수록 단 맛을 더한다더니 과연 그렇도다. 어려운 말 하나 쓰지 않고 平淡하게 쓴 글인데 어쩌면 훈훈한 뒷맛이 이렇게도 오래갈까? 특히 끝귀 ‘日飮千杯 送百年’은 李太白의 ‘會須一飮 三白杯’를 능가하는 멋과 여운을 남기는 絶唱이 아닐수 없다.
이 시는 사위 學正 李孟思의 詩에 次韻한 詩인데 翁壻간의 훈훈한 情까지 담겨있다. 學正은 성균관 8品職.

 

매미그림에 붙여(題 畵蟬)

비 개인 시냇가 수양버들엔
파란 내 가로 껴있고
매미들 높은 가지에서
늦게나마 날개임 즐기며 노래하네
일평생 바람과 이슬만 먹고
깨끗하게 살 줄 스스로 아니
伯夷의 淸白함에 비길만 하네
古書앞에 香피우고 쓸쓸이 앉아
黃庭經(황정경) 內外篇 다 읽고나니
오직 자연의 天眞속에 빠져들어
말 나눌 상대없이
다만 그림 속에서
바람만 마시고 사는 저 神仙(蟬)과 마주 대할 따름일세.

[註] : 黃庭은 黃庭經, 道敎의 경서.
[감상] : 바람과 이슬만 먹고사는 매미의 깨끗함을 伯夷의 청백함에 비기고 道敎的인 無慾이 無我境에서 그림속의 風露神仙 매미와 상대한다는 詩畵一如의 仙風넘치는 詩이다.


매 화(梅花)

羅浮山 神仙이런가
눈 서리같은 하얀 자태
해 저문 싸늘한 하늘아래
대나무 가지에 기대있네

마지막 물총새 梅花 香氣속에서
아름다운 노래 부르다 그치고
뜰 가득 매화가지 성긴 그림자
달 서쪽 하늘에 기우러가네

[註] : 羅浮山은 廣東省 增城山 동쪽에 있는 산으로 그 산록은 매화의 명소로 유명하다. 라부산 신선이란 바로 梅花나무를 뜻한다.
[감상]: 눈이나 서리같은 淸楚한 매화의 자태며 달 아래 성긴 가지 그림자 고요한 대지위에 아른거리는 광경. 마음 가라앉히고 명상에 잠기게 하는 꿈같은 詩境늘 불과 28字로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題 畵屛(그림병풍에 붙여)
1. 騰王閣(등왕각)
山顚傑閣俯江堧(산전걸각부강연) 更向高秋敞綺筵(경향고추창기연)
座上何人揮彩筆(좌상하인휘채필) 盡收佳景八詩聯(진수가경팔시련)
강가를 굽어보는
산마루 웅대한 殿閣에서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큰 잔치 벌렸구려
좌상에 고운 붓 휘두르는 이 누구이런가
아름다운 경치
모조리 붓으로 쓸어담아
멋진 詩句로 펼쳐놓았네.
[註]: 등왕각은 唐高祖 李淵의 아들 元嬰이 江西省 南昌縣의 洪州刺史로 있을 때
지은 전각인데 그때 원영은 勝王에 봉작되었으므로 등왕각이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그 뒤 당고조 咸亨2年에 閻伯嶼(염백서)가 洪州守護가 되었을 때 등왕각을 중수하고 구월구일에 빈객을 초대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염백서는 미리 그의 사위 吳子章에게 序文을 짓게하여 놓고 당일 연석에서 사위자랑을 하려고 하였다. 좌중의 빈객들에게 紙筆을 내어주고 등왕각 서문을 짓도록 청하였으나 아무도 지어내는 이 없었다. 이 때 最年少靑年 王勃은 아버지 王福畤의 任所인 交趾로 가다가 이 잔치에 참석하였는데 紙筆이 자기 손에 들어오자 一筆揮之로 써내려 간 것이 그 유명한 만고의 명문 ‘등왕각 서문’이며 다음 詩로 끝맺음 하였다.

騰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畫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物換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勝王의 高閣 강가에 臨해 있으나
몸에 佩玉 차고 수레에 방울 단
貴人들의 歌舞는 그친지 오래다.
아침에는 丹靑의 기둥에 나드는 남포의 구름
저녁이면 주렴밖에 흩뿌리는 서산의 비
한가로운 구름 물에 비추는 그림자
날로 유유한데
세사는 바뀌고 성상은 흘러
몇 춘추가 지났느냐
각중의 帝子는 지금 어느곳에 있는가
난간 밖의 장강만
하염없이 흘러가누나
[감상]: 삼탄공은 이 畵題에서 天才文士 王勃(왕발)이 승왕고각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一筆揮之로 名文名詩를 쏟아내는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듯 생동감 있게 묘사해냈다.

2. 廬山瀑布
煙起香爐接五峯(연기향로접오봉) 飛流直下掛長紅(비류직하괘장홍)
驚雷殷殷鳴幽壑(경뢰은은명유학) 冷雨蕭蕭새半空(냉우소소새반공)

향로봉에 雲煙 이니
五老峯에 이어지고
나는 듯 떨어지는
긴 냇물 붉게 걸려있네
폭포의 우람한 우뢰소리
그윽한 골자기에 울려퍼지고
싸늘한 비(폭포수의 泡沫)
쓸쓸히 반공간에 뿌리네
[註]: 려산은 강서성 성자현 서북에 있는 山. 최고봉인 오로봉은 절경으로 이름남. 향로봉은 려산 서북에 있는 봉우리.

[참조]: 李 太白의 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前川(요간폭포괘전천)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낙구천)

햇살 향로봉을 비추니
붉은 煙霧 일고
멀리 폭포수 바라보니
앞에 냇물 걸려있는 듯
나는 듯 三千尺을 곧장 흘러내리니
혹시 은하수 구만리 장천에서
떨어짐이 아닐는지

[감상]: 이태백의 廬山瀑布詩는 시각적인 면만 거시적으로 묘사하였으나 삼탄공의 시는 시각적인 면 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면도 또한 폭포수의 포말이 사늘한 빗방울처럼 半空에 뿌려지는 섬세한 부분까지도 묘사하였다.

 

畫 四景

一江春水碧於藍(일강춘수벽어람) 江上靑山削玉簪(강상청산삭옥잠)
隔岸桃花開處處(격안도화개처처) 武陵桃園正難尋(무릉도원정난심)

山色空濛翠欲流(산색공몽취욕류) 村家依約樹陰稠(촌가의약수음조)
風帆萬里隨潮落(풍범만리수조락) 興入江南白鷺州(흥입강남백로주)

秋容如洗碧天高(추용여세벽천고) 楓落吳江湧雪濤(풍락오강용설도)
一陣西風吹正急(일진서풍취정급) 似聞山木響颼颼(사문산목향수수)

千林萬壑白皚皚(천림만학백애애) 天地中間絶點埃(천지중간절점애)
想得剡溪明月夜(상득섬계명월야) 有人乘興棹船回(유인승흥도선회)

사계절 풍경을 그림

봄 강물 쪽빛보다 푸르고
강가에 있는 푸른 산은 옥비녀 깍아놓은 듯
저 건너 강기슭 곳곳마다 복사꽃 피니
어드매 무릉도원이런가 진정 찾기 어려웠네

비 갠 뒤 산색은 푸르름이 흘러내릴 듯
마을 속 집집마다 약속이나 한 듯 녹음 져 우거졌네
물때 맞추어 순풍에 돛달면 만리도 금방 갈 듯
흥이 난 김에 강남의 백로주나 찾아볼거나

가을하늘 모습 씻은 듯 푸르고 높아
단풍잎 오강에 지고 파도는 눈발처럼 용솟음 치네
한바탕 서녁바람(추풍) 급히 불어오니
산골 나무들 쉬쉬 흔들리는 소리 들려오는 듯

千숲 萬골짜기 하얗게 눈덮이니
하늘과 땅 사이 티끌 한점 없어라
剡溪의 달 밝은 밤 생각에 떠오르니
뉘 있어 달밤의 흥 못이겨 노저어 돌아올까

 

題壻李學正藏 八畫二篇(사위 이학정 집에 있는 여덞 그림중 두편)

1. 伯牙彈琴(백아탄금)
松陰滿地坐彈琴(송음만지좌탄금) 流水高山趣自深(류산고산취자심)
物我從來同一理(물아종래동일리) 當時六馬亦知音(당시육마역지음)

지면 가득한 솔그늘 아래 앉아 거문고 타니
흐르는 물 높은 산 곡조에 담긴 뜻 깊기도 하여라
사물이나 사람이나 본래 이치는 같은 것.
곡조의 깊은 뜻 어찌 鍾子期만 알았으랴
당시 임금의 수레 끌던 여섯 말도 알았다 하네
[註] : 六馬-임금의 수레를 끌던 여섯 마리의 말. “六馬不和하면 造父(周나라 穆王의 마부로 말을 잘 부리던 사람)도 不能以致”란 말이 있는데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流水高山”은 다음 글을 참조
列子曰 伯牙善鼓琴(백아선고금) 鐘子期善聽(종자기선청) 伯牙鼓琴(백아고금) 志在高山(지재고산) 子期曰 善哉(선재) 峨峨乎若泰山(아아호약태산) 志在流水(지재류수) 子期曰 善哉 洋洋兮若江河(양양혜약강하) 伯牙所念(백아소념) 子期必得之(자기필득지) 呂氏春秋曰 鍾子期死(종자기사) 伯牙破琴絶絃(백아파금절현) 終身不復彈琴(종신불복탄금) 爲無足爲鼓琴者(위무족위고금자)
‘열자’에 이르기를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듣기를 잘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에 뜻이 ‘높은 山’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높고 높은지고 태산과 같음이여’라 하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넓고 넓은지고 江河같구나’라고 하니 백아가 생각하는 바를 종자기가 반드시 해독했던 것이다. ‘여씨춘추’에 이르기를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를 부수어 줄을 끊고 종신토록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하니 누군가를 위하여 거문고를 탈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이 ‘知音’의 출전. 즉 知音은 음악의 곡조를 잘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2. 太白邀月(태백요월-이태백의 달맞이)
寀石江頭艤酒船(채석강두의주선) 更邀明月上靑天(갱요명월상청천)
雖然江月兩奇絶(수연강월량기절) 爭似金鑾殿上仙(쟁사금란전상선)
채석강에 배대어 술 싣고 푸른 하늘에 떠오르는 달맞이 하러가네
강과 달 모두 기막힌 절경이지만 허나 강과 달은
금방울 울리며 殿上에 오르는 酒仙의 멋진 모습 하도 맘에 들어
다투어 닮으려 시샘하였다 하네
이태백은 한말 술에 詩 百篇, 마시다 취하면 長安거리 술집에서 잠들어 天子께서 부르셔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일컬어 臣은 酒中仙이라 하였다네.

李白이 술꾼들과 시중에서 취해 술집에서 잠들었는데 白蓮池에서 宴樂中인 唐玄宗이 이백으로 하여금 樂章을 짓게 하려고 불렀다. 그러나 이백은 만취상태라 좌우에서 물을 뿌렸다. 自稱 臣是酒中仙이라 하며 이끌려 천자앞에 나아가 단숨에 十四章의 시를 지었다 한다.
[감상] : 三灘公의 詩는 겉보기엔 쉬운 것 같으나 故事가 담기지 않은 것이 거의 없어 古今을 왕래하며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특히 종자기만 知音했으랴!
六馬도 知音했다며 物我一致 사상을 일깨워 줌이라할지 강과 달, 自然美의 극치이지만 萬物의 靈長인 사람의 멋이 보다 더 우월하다는 기상천외의 발상을 그려내니 참으로 상상력 풍부한 大詩人이다.


領議政朴文憲公行壯(抄)-영의정 문헌공 박원형의 행장

公의 諱는 元亨 字는 之衢(지구) 號는 晩節堂(만절당)이니 신라의 宗姓이다. 遠祖 三重大匡 諱 奇悟가 계림에서 竹山으로 이거하여 자손들이 연이어 번연하여 드디어 죽산의 大姓이 되었다. 曾祖의 諱는 文瑤이니 고려에 벼슬하여 通直郞 起居郞 知制敎에 이르고 純誠佐理功臣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竹山君에 追贈되었으며 祖父의 諱는 永忠이니 우리 태조(이성계)를 섬겨 原從功臣 正憲大夫 判漢城府事를 지내고 물러나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아버님의 諱는 翶(고)이니 通政大夫 兵曹參議를 지내고 純忠補祚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延興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陽城李氏 通政大夫 判司僕寺事 澣(한)의 따님으로 貞敬夫人에 봉해진 분이다. 永樂九年辛卯(1411 태종11년)八月初十日己亥에 公을 낳으시니 총명함이 월등하였다. 네 살 때에 유모가 이웃집 책읽는 소리를 듣고 공에게 말하기를 ‘남자는 장차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는데 네 일이 걱정이구나’ 하였더니 공이 말하기를 ‘남들이 모두 읽으면 나도 읽을 것인데 무얼 걱정하오’ 라 하였으니 공의 기지와 총명이 이와 같았다.
성장하여 학문에 나아가매 한번 보면 곧 외우고 詩文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특히 科文에 뛰어나니 지금까지도 과거공부를 하는 이 모두 전해 외우며 모범으로 삼고 있다. 아버지 연흥군이 두 번 귀양가니 공이 모시고 따라가 아침 저녁 곁에서 떠나지 않고 요리를 스스로 담당하여 가장 맛있고 영양있는 음식을 마련해 드리도록 전력하니 고을 사람들 칭찬하지 않은 이 없었다.
[註] : 李澣 陽城李氏 八世孫으로 侍中公 諱 春富의 第四子, 孫子에 세종조 최고의 천문학자인 靖平公 諱 純之와 曾孫에 刑曹判書 弘文館提學을 지낸 文質公 諱 芮를 두셨으며 박원형은 본문에 기술된 바와 같이 이 어른의 外孫이다.
世宗十四年壬子春(1432)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權採가 名儒로 大司成이 되어 공을 보고는 공의 도량과 능력을 퍽 존중하여 通鑑 綱目 宋元播芳 杜詩 등 서책을 주니 관중제생이 영광으로 여겼으며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떨쳤다. 甲寅春(1434)에 上께서 성균관에 납시어 先聖들을 뵙고 諸生들에게 친히 시험을 보였는데 公이 三等으로 뽑혀 啓功郞 禮賓直長 벼슬을 받고 여러차례 옮겨 宣敎郞 都梁暑令에 이르렀다. 丙辰(1436)에 아버지 延興君의 상을 당하니 禮를 넘을만큼 심히 슬퍼하여 몸을 상할 지경이었다. 아우 元貞과 三年 시묘하니 무릇 장례와 제사 법도는 모두 朱子家禮에 다라 행하였다.
戊午六月(1438)에 탈상하여 의금부도사가 되고 己未(1439)에 사헌부감찰로 正朝使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가니 사신이하 모두가 공의 淸直함을 거려했다. 庚寅(1440)에 先務郞 承文院副校理에 오르고 辛酉(1441)에 병조좌랑으로 옮기고 壬戌(1442)에 承訓郞이 가자되었는데 임기가 차 바뀔 무렵 나라에서 長城을 쌓고 백성들을 城邊으로 이주시킬 때 兵曹사무가 몹시 바빠졌다. 判書 鄭淵이 공이 아니면 능히 다스릴 수 없다고 여겨 공을 머무르게 해달라고 특별 상계를 올렸다.
공이 판서의 거처로 들어와 일을 의논할 때면 판서가 반드시 얼굴 모습을 가다듬어 큰 손님 대하듯 하였고 물러갈 때에도 目送의 禮를 갖추었으며 ‘이 사람은 우리들이 한발짝 비켜주어야 할 사람이다’라고 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伊川에 호종하였을 때 임금의 수레가 막 귀로에 올랐는데 돌아보니 行宮이 불에 타 화염이 솟구쳤다. 상께서 크게 놀라 공을 보내어 조사케 하였다. 공이 돌아와 아뢰기를 ‘밭갈이 하던 농부가 밭에 불을 지른 것이 뜻밖에 번진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께서 공을 침실 안까지 불러들여 이르시되 ‘나는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가 너무 자주 있어 이를 싫어한 나머지 불을 지른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네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너의 명석함이 아니였으면 어찌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겠느냐’ 라 하셨다. 癸亥(1443)에 議政府 司僕提調로 임명되니 馬政을 능히 맡을 만한 사람을 천거할 때 모두가 공을 적임자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承議郞에 가자되고 司僕判官이 제수되었다. 이 해에 북경간 사신이 장계를 급히 올려 ‘우리나라 羅州사람이 표류하여 蘇州 杭州에 이르렀는데 중국 황제가 본토로 환국할 것을 명하였다 합니다’ 라 하니 상께서 공에게 명하여 羅州官吏가 상계하지 않은 죄를 국문하라 하시었다. 공이 가서 조사해 보았으나 처음에는 실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再審해 본 결과 표류한 사람의 이름이 濟州사람과 같았다. 즉시 상계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濟州사람인데 처음에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지금 敬差官 鄭光元이 濟州로 돌아가니 그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케 하소서’라 하니 상께서 윤허하셨다. 공은 또 전라도 사람들은 遠行할 때에 반드시 錦城堂에 訴願狀을 바친다는 점을 상기하여 사람을 시켜 이 訴願狀을 모두 거두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한 訴願狀에 漂流人 이름이 나오고 특히 이 사람이 제주사람임이 확인되니 사람들 모두 그 神明함을 칭찬하였다. 표류인이 도착하자 상께서 ‘너 무슨 까닭으로 처음에 나주사람이라 하였는가’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제주는 본시 중국땅이라 들었습니다 만일 사실대로 말하면 또 달리 추궁당할까 걱정스러워 그리 하였던 것입니다’ 라 하였다. 上께서 公을 불러 기뻐하시며 ‘너의 조사가 잘 이뤄졌다’ 라고 하시었다. 李思儉이 下三道牧場(충청 전라 경상의 목장)을 순찰할 때에 공을 추천하여 從事官으로 삼았다. 乙丑(1445)에 吏曹正郞 으로 전직되었다. 상께서 馬政을 중요시하여 다시 司僕判官을 제수하고 奉訓郞에 特加되었다.
[주]: 李思儉, 양성이씨 九世孫으로 靖節公 諱沃의 第三子 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양성부원군에 추증되고 諡號는 恭昭이다. 朴元亨은 이 어른의 숙부의 외손자.
景泰二年 辛未(1451)에 文宗이 즉위하여 朝敬大夫司僕寺尹으로 특가되었다. 상께서 공을 중히 여겨 공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으셨다. 壬申(1452)에 威毅將軍大護軍 知司僕院事 知製敎가 되고 癸酉(1453)에 中直大夫 守判僕寺事에 올랐다. 이해 十月에 世祖가 내란을 평정하고 공을 副承旨로 명하면서 宰相에게 이르기를 ‘朴아무개는 公事가 아니면 私門에 이르는 일이 없고(사사로이 나를 찾는 일 없고) 正道로만 다니는 사람이다’라 하였다. 물망에 오른대로 여러 벼슬을 거쳐 左承旨가 되었는 바 모두 知刑曹事를 겸하니 당시 죄를 논하여 아룀이 분명하고 진실하다는 칭을 받았기 때문이다. 乙亥(1455)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아 都承旨에 오르고 推忠左翼功臣에 책훈되었으며 田80結 노비8口 白銀20兩 채단1表裏(겉옷과 속옷) 내구마 한필을 하사 받았다. 丙子三月(1456)에 공이 상계하기를 ‘매년 宰相과 耆老(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문신원로)들이 3월3일과 9월9일에 宴會를 갖는 바 이를 耆英會라 하며 여기에서 마음껏 마시고 즐김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례입니다. 老臣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위로의 예의를 폐할 수 없사옵니다’ 하니 상께서 그 말을 쫒아 司僕寺에 명하여 날짐승을 많이 사냥하여 하사하도록 하고 공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 후하게 위로하라 명하시니 이 모임에 참석한 원로들 모두 感泣하였으며 耆英會에 內相(도승지)을 파견함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壬午(1462)에 吏曹判書로 癸未에 禮曹判書로 옮겼으며 새로 弘文館을 설치하여 공이 大提學을 겸하였다. 甲申(1464)에 명나라 給事中 金湜과 舍人 張城이 왔을 때 공이 또 接伴使가 되었는데 湜이 篆書로 晩節堂이라 써주고 城이 記를 지어 이로 인하여 호를 만절당이라 하게되었다.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에 오르고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成化元年乙酉(1465)에 知成均館事, 丙戌(1566)에 義禁府判事를 겸직하고 모두 贊成도 겸하였다. 하루는 상께서 묻기를 ‘요즘 학자들 취향이 어떻한가?’ 공이 대답하기를 ‘상께서 자주 諸生들을 끌어올려 經書를 講하게 하니 이는 近古에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九流(아홉갈래의 학파)의 서적을 講하는 자도 있어 학자들이 자못 孔孟之道 외의 길로 가는 의혹이 있습니다’ 라 하니 상께서 한참 묵묵히 듣다가 이르기를 ‘이는 나의 죄이다’ 하시고 또 盧思愼을 불러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박원형의 말이 맞습니다 선비들 심지어는 佛書를 읽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또한 어느땐가 술이 얼큰하게 오르자 공에게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인가?’ 하고 물으시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상께서 ‘梁武帝와 비교하면 어떻한가’ 라고 또 물으시니 공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께서 또 다구쳐 물으시니 좌우가 모두 불안해 하던 차에 공이 서서히 대답하였다. ‘전하는 양무제 처럼 捨道奉佛 하고 神에 빠지는 제물을 식물성 일색으로 하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라 하니 상께서 웃으셨다. 四月初에 大匡輔國 崇?相梭? 議政府右議政 世子傅(세자의 스승)를 제수하였으며 공에게 전라 경상도 목장을 살펴보고 아울러 경상도 굼비상황도 고찰해보라고 명하였으며 延城君으로 君號를 바꾸고 예조판서를 겸하도록 하였다. 丁亥(1467)夏에 咸吉道 이시애가 군중을 모아 역모를 꾸며 절도사 관찰사 수령 등을 모조리 죽이고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반역하니 상께서 장수를 파견하여 토평케 하였으나 유언비어가 그치지 않고 반란군 측에 붙는 자가 많아 특별히 공을 파견하여 순무하게 하면서 말씀하시되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려 유리,방황하고 있으니 구휼대책을 크게 펼치지 않으면 군민간에 사망자가 한없이 나올 것 같으니 경은 감사이하를 상벌함에 상황에 알맞도록 조치하되 반드시 나의 뜻을 물어 할 필요는 없느니라’ 하셨다. 戊子三月(1468)에 좌의정을 배수하였다. 四月에 明皇帝가 姜沷, 金浦 등을 파견하니 상께서 太平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파하자 更衣室로 가셨는데 공이 그 때에도 접반사직을 맡고 있어 사무보고하러 들어가던 차에 상께서 冠帶를 하고 있지 않음을 보고 머뭇거리며 어전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께서 이를 바라보시고는 곧 좌우에게 관대를 가져오도록 명하면서 ‘이 사람은 나의 波黯(漢武帝의 諫臣, 직간으로 유명함)이다’ 라 하시며 공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좌의정의 높은 자리에 있는 경을 굽히게 하여 접반사의 낮은 직책을 맡게 하였는데 경은 이를 어찌 생각하오’ 하시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내세울 만한 것 없는 사람이오나 三公의 벼슬자리에 있는 몸입니다.(그러하니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리는 알고 있습니다) 중국 조정에서 만약 조선의 좌의정이 접반사를 맡았다는 들으면 전하의 事大之誠을 더욱 믿게될 것입니다’ 상께서 ‘사람들 이를 바꾸고자 하였으나 내 굳이 듣지 아니한 것도
또한 이 뜻이오‘ 하셨다.
乙丑(1469)정월초팔일 저녁에 아들 安性을 등잔아래 불러 이르기를 ‘오늘이 너의 생일이니 나에게 祝壽의 잔을 올릴만 하구나’ 하며 絶句 한수를 부르니
今夜燈前酒數巡(금야등전주수순) 汝年三十六靑春(여년삼십육청춘)
吾家寶物唯淸白(오가보물유청백) 好把相傳無限人(호파상전무근인)

‘오늘밤 등잔앞에서 술을 몇순배 들며 생각하니
너도 이젠 36세의 청춘나이 되었구나
우리집 보물은 오직 ‘淸白’ 뿐이니
내가 너에게 줄 것 이 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고히 간직하여 자손만대 무궁토록 전할지어다

하였는데 公의 詩가 바로 公의 마음이로다. 그달 二十二日 丁丑에 正寢에서 卒하니 五十九世였다. 부고 전해지자 상께서 몹시 슬퍼하시고 三日동안 저자와 조정을 닫고 禮官과 弔祭官을 파견하여 葬事를 감싸고 도왔다. 公은 품성이 엄격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도량이 넓고 너그러웠다. 평소에는 말을 빨리하지 않고 느긋하고 태연한 얼굴빛이였으며 따듯하고 훈훈하여 사람들 모두 친해질 수 있었으나 큰일 에 임하여 큰 결정 내릴 때에는 의젓하게 정의롭게 위협에 굴하지 않고 이익에 흔들림 없이 우람한 바위처럼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매양 어전에서 군신들이 문제를 논의할 때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시비가 날카로울 무렵 공이 천천히 한마디로 실정과 이치에 맞는 결정을 내리니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였다.
비록 세조와 같이 활달하고 常規에 구애받지 않은 호걸이라 할지라도 관대를 하지 않고서는 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汲黯이라 까지 찬양하였으니 公의 사람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도다.


題 三灘集後(삼탄집 뒤에 부치는 跋題)

文筆은 국가의 氣脈이다. 사람이 기맥이 없으면 그 몸을 보존할 수 없어 病이 날로 깊어갈 것이요. 나라에 기맥이 없으면 그 기강을 잡을 수 없어 다스림이 날로 저하될 것이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文章의 순수함과 조잡함으로 世道의 興衰를 가늠하였던 것이니 治世의 音은 조화롭고 평온하며 衰世(쇠망해가는 세상)의 音은 衰傷에 차고 답답하며 亂世의 音은 원망이 턱까지 치밀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나니 이는 사람의 가슴속에 쌓여있는 것은 가릴 수가 없어서 呻吟(신음)하거나 글을 읽으면서도 읽기만 하고 듯을 몰라 답답해하는 心情들이 부지부식간에 言語와 文字 사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公은 文治의 全盛期 에 詩文짓기를 배워 詩와 文의 어느쪽도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며 同輩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 四佳亭 서거정, 乖崖 김수온, 私淑齊 강희맹 등 三大家와 한 時代를 함께 달리며 名聲이 서로 오르내렸지만 문학의 여러 분야와 流派를 集大成한 면에 이르러서는 세 분 모두가 公을 으뜸이라 칭하였다. 나는 後進으로 공의 문하에서 공의 훌륭한 빛을 받들며 공의 餘香을 은혜 입음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 바, 공의 몸가짐과 행동은 한가로우면서도 우아하시고 風貌는 白玉, 白雪처럼 하얀 光彩를 발하여 마치 神仙界에 사는 사람과 같았다. 사람들이 敬慕하여 精鍊된 金이나 美玉과도 같은 公의 一言半句라도 얻으면 모두 읊조리며 玩賞하여 손에서 놓아버릴 수기 없었다.
애석하도다! 사람이 떠나면 주변의 사물도 함께 가버리고 그 멋진 풍류와 담론도 다시는 접할 수 없음이여! 다만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은 오직 메아리 번지는 遺作 뿐인데 전술한 三代家의 詩文은 모두 선발의 혜택을 입어 이미 세상에 간출되었지만, 오직 공의 작품은 收錄하는 이 없었으니 어찌 識者의 큰 한탄이 아니랴! 이제 公의 詩稿 若干帙을 보니 온화하고 담백하며 넉넉하고 훈훈하며 語句 한 걸음마다 윤택하고 大篇은 태연 침착하고 短韻(짧은 시)도 정밀하고 아름다워 이를 읽으면 마치 사탕수수를 씹듯 씹을 수록 그 맛을 더하고 야들야들하여 싫증이 나질 않는다. 그 시를 보면 공의 높은 理想을 想起하게 되고 공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도다. 다행히 없어지지 않았던 것을 널리 들추어내어 간행하게 되면 그 아름다운 소리 笙簧(생황)이나 큰 종소리처럼 사람들 귀에 울려퍼질 것이고 사람들 입에 膾炙되어 儒道를 닦는 後生들로 하여금 그 위대한 본보기를 우러러 바라보며 詩經의 雅(아)와 頌(송)같은 正樂을 짓게되리니 국가의 氣脈을 북돋는데 기여하는 바 적지 않으리라
弘治 壬戌(1502년 연산8년)九月下旬에 昌寧 成俔 謹書하노라.
[註] : 成俔은 조선 성종때 예조판서 공조판서 대제학을 지내고 慵齊叢話(용제총화)를 지은 학자. 용제총화는 조선초기의 정치, 사회, 제도, 문화를 두루 살피는데 필수 불가결한 중요한 문헌.
西紀 二千三年癸未秋  李民成謹譯

출처 : 문화사랑 오솔길
글쓴이 : 맥결 이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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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簡牘 서예와 帛書 및 盟書

 

1. 盟書

 

  盟書는 玉冊의 한 형식으로 簡帛 서체와 함께 先秦시대의 墨跡 서체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玉은 주술적 의미를 지닌 귀중하고 상서로운 보석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을 근거로 할 때 玉이 사용된 시기는 신석기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사회에서 옥은 재산과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심미적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문자가 사용된 후부터는 부족이나 개인의 휘장이나 신앙의 대상을 새겨 종교 활동이나 증표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玉石 문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商나라 시대의 것으로 묵서와 각서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玉書의 내용은 玉器와 주인의 이름이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초기의 甲骨文이나 刻石 그리고 陶器의 내용과 비슷하다.

  殷商시대 이후 簡冊은 문서를 기록하는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甲骨文에 나타난 ‘示冊’, ‘冊至’, ‘乙典’ 등의 문자와 西周시대의 金文에 나타난 冊命을 근거로 할 때 殷商시대에 簡冊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簡冊의 재료로는 骨片, 玉片, 石片, 竹片, 木片 등 다양하며 지금까지 발견된 완전한 형태의 簡冊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春秋시대의『侯馬盟書』이다. 盟書는 문헌에서『載書』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고대 사회에서 개인이나 국가간에 공약을 정하고 하늘에 맹세한 내용을 기록한 문장이다.『周禮‧司盟』에 “司盟, 掌盟載之法.”(司盟은 盟約의 법을 주관한다.)이라 하였는데 鄭玄은 注에서 “載, 盟辭也. 盟者書其辭於策(冊), 殺牲取血, 坎其牲, 加書於上而埋之, 謂之載書.” (載는 盟約의 글귀이다. 盟約하는 사람은 그 내용을 策(冊)에 기록하는데 짐승을 죽여 그 피를 사용하여 盟約하고 盟約한 내용을 적어 땅에 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載書라 한다.)라 하여 載書가 盟約하는 글귀를 적은 盟書라고 설명하였다.『周禮‧司盟』,『左傳‧定公十三年, 僖公五年』 등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盟書는 모두 같은 형식을 두 개로 나누어 하나는 司盟의 관청인 盟府에 보관하고 하나는 땅에 묻거나 강속에 넣었다고 한다. 春秋시대에는 중요한 일을 도모하고 처리하는데 盟書가 매우 유행하였다.『左傳』의 魯隱公원년부터 襄公27년까지(서기전 722-서기전 468) 250여 년의 기록에 제후국 사이의 盟約이 약 200차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에 晋나라에 관한 盟約이 가장 많은 50여 차례이다.

  『侯馬盟書』는 1965년 山西省 侯馬市 春秋시대의 晉나라 유적지에서 출토되었으며 山西省 文物管理委員會에 보관되어 있다. 학자들은 기록된 내용으로 春秋 시내 후기의 秦나라 定公15년에서 23년까지(서기전 497-서기전 489)의 盟書로 고증하였다. 侯馬에서 출토된 玉冊은 모두 5천 점이 넘고 있으며 그 중에서 판독할 수 있는 문자가 쓰여져 있는 것도 600점이 넘는 매우 많은 수량이다. 글씨는 붓으로 쓴 墨書와 朱書의 두 가지이며 墨書는 詛呪文과 卜筮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朱書는 宗盟文, 委質文, 納室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玉片의 크기는 길이 18-32㎝, 넓이 2-3.8㎝, 두께가 약 1㎝ 정도이며 위가 뾰족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은 晋나라 宰相인 趙鞅과 卿大夫사이에 신의를 盟約한 것으로 春秋시대의 盟約에 관한 제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侯馬盟書』의 서체는 蝌蚪書로 불리며 西周시대의 金文과 簡帛 서체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古體에서 今體로 변화하는 隸變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부분의 글자가 당시의 金文 서체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筆劃을 간략하게 것이 많으며 같은 글자가 여러 형태로 쓰여진 異體字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起筆을 무겁게 運筆하였으나 형태는 蝌蚪형, 丁字형, 삼각형 등 다양하며 行筆과 收筆을 빠른 속도로 運筆한 흔적이 역력하다. 結字와 결구에 있어서 가로획과 세로획이 수평과 수직의 직선을 이루지 않고 곡선이 많으며 비교적 자유스러운 형세이다. 章法에 있어서도 행간만 유지하고 자간은 筆劃의 많고 적음과 글자의 크기에 따라 자유롭게 布置 하였으나 산만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玉片에 먹이나 朱砂로 글자를 써넣은 재료의 특성으로 심미적 특징이 簡帛 서체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簡牘과 비단은 먹물이 조금씩 번지고 깊숙이 스며드는 성질 때문에 세월의 부드럽고 온화한 맛이 있으나 玉片은 먹이 잘 스며들지 않을 뿐 아니라 미끄럽기 때문에 運筆이 빨라지게 되어 날카롭고 강인한 맛이 나타난다.

  『溫縣盟書』는 1980년에서 1982년 사이에 河南省 溫縣에서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河南省 文物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 이 盟書는 春秋시대의 후기 秦나라 定公15년(서기전 497)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溫縣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1930년, 1935년, 1942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盟書가 출토된 지역이다.『溫縣盟書』 이전에 출토된 盟書는『沁陽玉簡』 혹은『沁陽盟書』로 불리며 현재 中國社會科學院에 소장되어 있다.『溫縣盟書』는 약 5천 점에 달하는 매우 많은 수량으로 대체로 길이 25㎝, 넓이 3㎝, 두께 1㎜정도의 玉片에『侯馬盟書』와 비슷한 蝌蚪書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晋나라 六卿 가운데 한 사람이 중심이 된 盟約書로서『侯馬盟書』와 함께 당시의 제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溫縣盟書』는『侯馬盟書』와 같이 楚나라 簡牘 서체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盟書나 簡牘 서체가 모두 실용의 과정에서 탄생한 서체이기 때문에 꾸밈이 적고 자연스러운 미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실용의 서사 행위에서는 당시에 사용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筆劃과 자형이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盟書와 簡牘 서체를 연구하면 春秋 戰國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서체와 그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다.『溫縣盟書』는 붓으로 쓴 墨書이며 전체적으로 篆書의 자형을 갖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간략하게 한 筆劃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여러 사람이 쓴 까닭에 서풍이 매우 다양하다. 筆劃은 가는 것과 굵은 것, 布置는 정제된 것과 자유스러운 것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자형과 筆法은『侯馬盟書』의 특징과 비슷하여 起筆은 무겁고 굵으며 收筆은 가볍고 뾰족하다. 이와 같은 서체를 蝌蚪書라 부르기도 하는데 戰國시대의 簡牘 서체에까지 조금씩 보이다가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한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2. 竹簡과 木牘

 

  先秦시대의 서체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분류하면 새겨진 서체, 鑄造되어진 서체, 쓰여진 서체의 세 가지이다. 새겨지거나 鑄造되어 이루어진 서체는 甲骨文, 金文, 刻石, 陶文, 印章 등이 있으며 쓰여진 서체는 簡牘, 帛書, 盟書 등이 있다. 그리고 일부의 甲骨文이나 陶文에도 쓰여진 문자가 있으나 숫자가 매우 적다. 先秦시대의 鑄刻되어 있는 서체는 대부분이 大篆 계통의 古體字인 반면에 簡牘이나 帛書 그리고 盟書는 고체와 今體가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매우 큰 특징이다. 先秦시대에는 아직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禮樂의 행사와 목적으로 사용되던 金文이나 刻石 서체 이외에 일상의 기록은 簡牘이나 비단을 주로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簡牘 작품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戰國시대의『曾侯乙墓竹簡』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簡牘이 사용된 시대는 이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다만 簡牘이 목재로 이루어진 까닭에 청동이나 석재보다 쉽게 썩기 때문에 春秋시대 이전의 작품이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추정하는 근거는 甲骨文과 金文에 이미 ‘冊’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고문헌에도 簡牘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尙書·多士篇』에 “惟殷先人有冊有典”(殷나라 先王은 사실을 기록한 典冊이 있었다.)이라는 기록이 있으며『墨子‧明鬼篇』에는 “故書之竹帛, 傳遺後世子孫”(竹帛에 써서 후세의 자손에게 전한다.)이라 하였으며 또한『韓非子‧安危篇』에도 “先王寄理於竹帛”(先王은 竹帛의 기록에 의거하여 다스렸다.)이라 기록하여 春秋시대 이전부터 竹帛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戰國시대 簡牘의 출토에 관하여 기록한 옛 문헌이 몇 가지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문헌은『漢書』,『晉書』,『南齊書』 등이다.『漢書‧藝文志』에는 漢나라 武帝때 魯恭王이 孔子의 옛집을 허물 때 簡牘에 기록된『尙書』,『禮記』,『論語』,『孝經』 등을 얻었다고 기록하였고『晉書‧束晳傳』에는 晉나라 武帝 太康 2년(281)에 戰國시대의 魏나라 襄王의 무덤에서 竹簡 수 십 점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南齊書‧齊惠太子傳등』에는 建元 원년(499)에 戰國시대의 楚나라 昭王의 무덤에서 簡牘의『周禮‧考工記』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簡牘 서체는 모두 蝌蚪書라 전해지고 있으나 실물은 모두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簡牘 서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이며 1970년대 이후에 매우 많은 양의 簡牘이 출토되어 서예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예 작품의 창작에 훌륭한 소재가 되고 있다.

  漢나라 시대의 許愼은『說文解字』에서 “簡, 從竹, 間聲”이라 하였고 “牘, 書版也, 從片”이라 하여 簡은 대나무를 재료로 하고 牘은 나무를 재료로 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竹簡書에 관하여『儀禮·聘禮‧疏』에는 “連編爲策, 不編爲簡.”(연결된 編을 策이라 하고 단 編을 簡이라 한다.)이라 하였고 孔潁達은『左傳‧序』에서 “單執一札謂之簡, 連編諸簡乃名爲策.”(한 쪽의 竹片을 簡이라 하고 簡이 연결된 것을 策이라 한다.)이라 하여 하나의 竹片을 簡이라 하였으며 竹片이 연결되어 한 권으로 이루어진 것을 策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策’자는 ‘冊’으로 쓰기도 하며 그 형상은 竹簡을 끈으로 묶은 형태의 象形字이다. 古文에서는 ‘冊’의 머리에 ‘竹’자를 더하여 冊의 재료는 대나무이었으며 여러 편의 竹簡을 끈으로 묶어 이루어진 것을 策(冊)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牘은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한 이후의 명칭으로서 그 이전에는 板(版)이라 불렀으며 보통 하나의 판에 여러 줄의 글씨를 쓰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竹簡書과 같이 冊으로 묵어 사용한 것은 매우 적다. 木牘에 관하여 王充은『論衡·量知篇』에서 “斷木爲槧, 析之爲板, 力加刮削乃成奏牘”(나무를 자른 것을 槧이라 하고 쪼갠 것을 板이라 하며 깎고 다듬은 과정을 거친 것을 牘이라 한다.)이라 하였고『論衡‧慂力傳』에서 “書五行之牘.”(다섯 행의 글씨를 쓴 牘.)이라 하였으며『漢書‧循吏傳』에는 “一札十行, 細書成文.”(하나의 목판에 10행의 작은 글씨로서 문장을 이루었다.)이라 하여 牘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 서사 재료이었으며 하나의 목판에 여러 줄의 글씨를 쓰는 용도로 사용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또 현재까지 발견된 簡牘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簡은 대나무로 만들었고 牘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竹簡과 木牘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폭이 좁고 한 줄로 글씨를 써 내려간 木片이 있으며 여러 줄의 글씨가 있는 竹片도 있기 때문에 竹牘이나 木簡 등의 이름도 사용되며 비단에 쓰여진 서체인 帛書와 함께 簡帛 문자나 서체로 불리기도 한다.

  先秦시대의 竹簡書는 1930년 湖南省 長沙의 戰國시대 楚나라 墓誌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문자가 지워져 판독할 수 없었다. 1951년 長沙의 五里牌에서 戰國시대 후기의 竹簡書 38점이 발견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簡牘은 약 20여 곳에서 5000점이 넘고 있으며 그 내용과 형식은 經書, 遣策, 法律, 占卜등의 기록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건과 역사 등 매우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글씨가 분명하고 서체의 筆劃과 결구 그리고 章法이 다양하여 書藝學은 물론 문자학의 분야에서도 史料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인정된다. 先秦시대의 簡牘 가운데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戰國시대 초기의『曾侯乙墓竹簡』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楚나라의 것으로『仰天湖楚簡』,『信陽楚簡』,『望山楚簡』,『包山楚簡』,   『郭店楚簡』 등이 있으며 秦나라의 것으로『靑川木牘』,『睡虎地秦簡』 등이 있다.

  『曾侯乙墓竹簡』은 1978년 湖北省 隨縣의 戰國시대 曾나라 제후의 묘지에서 수많은 靑銅器, 漆器, 玉器 등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발견된 竹簡書은 모두 240점이고 글자 수는 약 6700자 이르며 현재까지 발견된 竹簡書 가운데 가장 오래된 戰國시대 초기 曾나라 시대의 작품으로 고증되고 있다. 曾나라는 문헌에서 隨나라로 기록되기도 하며 戰國시대 초기에 西陽(지금의 河南省 光山縣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발전하였다.『曾侯乙墓竹簡』의 시대는 함께 발견된 청동기의 형태와 명문 그리고 방사성 탄소 실험을 근거로 서기전 433년에서 서기전 400년으로 고증하고 있다. 중국 社會科學院의 李學勤 교수는『東周與秦代問名』에서 청동기 명문을 근거로 楚나라 惠王 56년(서기전 433)의 것이라 하였다.

  『曾侯乙墓竹簡』은 길이가 72-75cm 정도이고 넓이는 1cm 정도이며 하나의 대나무 편에 쓰여진 글자 수는 적게는 4자부터 많은 것은 60자를 넘는다. 문장의 내용은 曾나라 군주를 장례 지낼 때 순장한 말과 수레, 병기, 청동기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竹簡書의 내용과 순장된 청동기의 명문을 근거로 하면 曾侯 乙의 장례에 楚나라 王公 귀족들이 많은 예물을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竹簡書에 기록된 관직의 이름이 楚나라 관직과 같거나 비슷한 것이 많이 있어서 曾나라는 楚나라의 제도를 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楚나라와 曾나라 문화를 근거로 하여 학자들은 曾나라는 楚나라의 附庸國이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曾나라 시대의 金文 서체는 거의 楚나라 서체와 비슷하여 당시에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曾侯乙墓竹簡』의 서체도 楚나라 竹簡書 서체와 비슷하여 起筆은 무겁고 굵으며 收筆은 가볍고 뾰족하다. 서체의 형태는 大篆과 비슷하나 筆劃은 篆書보다는 隸書의 느낌이 훨씬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信陽楚簡』은 1957년 河南省 信陽市 부근 長臺關의 戰國시대 楚나라 묘지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河南省文物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고대의 문장을 기록한 竹書이며 또 하나는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물건을 기록한 遣策이다. 竹書는 190점, 470여자로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모두 殘簡으로 남아 있어서 그 내용에 관하여는 周公의『刑書』라는 학설과『墨子』라는 학설 등 여러 가지로 통일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信陽楚簡』의 죽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서적의 기록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竹書의 竹簡書은 넓이 0.7-0.8㎝, 두께 0.1-0.15㎝, 길이30㎝ 정도이며 竹簡書의 중간과 양쪽 끝의 세 군데에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遣策은 29점, 957자로 길이가 비교적 길어 70㎝에 가깝고 넓이도 거의 1㎝에 가까워 竹書의 竹簡書에 비해 길이가 훨씬 길다.

  『信陽楚簡』의 연대에 관하여 郭沫若은 春秋시대 후기의 竹簡이라 하였고 河南省文物硏究所는『信陽楚墓』에서 戰國시대 초기의 竹簡이라 하였으며 中山大學의 古文字硏究室은『戰國楚竹簡槪述』에서 戰國시대의 중 후기의 竹簡이라 하는 등 많은 학설이 존재하였다. 1984년 출판된『楚文化考古大事記』에서 戰國시대 曾侯乙墓에서 출토된 유물과 楚墓의 유물을 비교하고 분석한 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戰國시대 중기의 목간으로 결론지었다.『信陽楚簡』은 古體에서 今體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로 大篆과 隸書의 筆劃과 結字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起筆에서 藏鋒과 露鋒을 동시에 구사하고 있으며 결구는 비교적 빽빽하나 글자와 글자 사이를 넓게 布置하였다. 이와 같은 筆法과 章法은 秦漢시대의 簡帛과 刻石 隸書의 결구와 章法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仰天湖楚簡』은 1953년 湖南省 長沙의 仰天湖에서 출토되어 현재 湖南省 文管會에 소장되어 있다. 戰國시대 竹簡이 발견되었다. 이 竹簡은 모두 43점으로 길이가 약 22cm 넓이가 1cm정도이며 내용은 각종 기물의 이름과 수량을 기록한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양이 의복과 견직물의 명칭이며 청동기, 철기, 옥, 나무 등으로 만든 기물의 이름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竹簡은 戰國시대의 문자를 연구하는 중요한 재료가 될 뿐 아니라 당시의 방직 기술과 의복 제도 등 문화 전반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仰天湖楚簡』의 서체는『信陽楚簡』과는 달리 露鋒의 筆法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結字와 결구는 楚나라 金文 서체와 일맥상통한다. 筆劃의 시작과 끝은 가늘고 중간은 굵으며 곡선의 부드러움을 많이 응용하였으며 偏方形의 橫勢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서체를 후세 사람들은 蝌蚪書에서 변화한 서체로 이해하였다.『晉書』에 “蝌蚪文者, 周時古文也, 其頭粗尾細似蝌蚪之蟲, 故俗名之焉.”(蝌蚪文은 周나라 시대의 古文으로 그 시작은 굵고 끝은 가늘어 마치 올챙이와 닮았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 불렀다.)이라 하여 蝌蚪書에 관해 설명하였다. 현재 완전한 모양의 蝌蚪書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보통 春秋 戰國시대의 盟書류 서체에서 蝌蚪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包山楚簡』은 1986년과 1987년 사이에 湖北省 荊門市 부근 包山의 戰國시대 楚나라 묘지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문자가 있는 竹片은 278점이며 전체의 글자는 일만 자를 넘고 있다. 竹簡書의 크기는『信陽楚簡』과 비슷하여 길이는 약 55㎝-73㎝이며 폭은 약 0.7㎝-0.9㎝정도로 하나의 竹簡書에 보통 50-60자의 글씨가 쓰여져 있으며 많은 것은 90여자에 이른다. 내용은『老子』,『周禮』 등 經書를 기록한 竹書와 점을 치거나 제사 지낸 기록 그리고 遣策 등의 세 종류이다.『包山楚簡』은 내용이 다양하면서도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연대를 기록하고 있어서 楚나라의 역사와 법률과 관직 제도 등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包山楚簡』 가운데에는 한 편의 대나무에 두 줄 이상의 글씨가 쓰여져 있는 竹牘이 발견되고 있어서 簡牘의 연구에 새로운 轉機를 마련하게 되었다.『包山楚簡』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한 쪽의 대나무에는 한 줄의 글씨만 적혀 있는 竹簡書만 출토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었으나 한 쪽의 대나무에 여러 줄의 글씨를 써넣은 竹牘의 발견은 竹簡書과 木牘의 고정된 개념을 깨트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信陽楚簡』과『包山楚簡』은 戰國시대 楚나라 竹簡書 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古體에서 今體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로 그 예술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筆劃, 결구, 章法 등이 다양하여 한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쓰여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楚나라 竹簡書 서체의 고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다른 楚簡에 비해 간략하게 한 筆劃이 많이 나타나며 隸書의 형태로 더욱 진행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예로 든 簡牘 작품은 모두 戰國시대의 楚나라 竹簡으로 출토된 양이 많을 뿐 아니라 그 범위도 매우 넓다. 先秦시대의 簡牘은 楚나라와 秦나라의 작품만 발견되고 있을 뿐 다른 나라의 簡牘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木牘은 戰國시대 秦나라의 것만 발견되었을 뿐 다른 六國의 것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秦나라의 簡帛 작품으로는『靑川木牘』,『睡虎地秦簡』,『放馬灘秦簡』,『楊家山秦簡』 등이 있다.

  『靑川木牘』은 1979년 四川省 靑川縣의 戰國시대 秦나라의 묘에서 출토되었으며 四川省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靑川에서 발견된 木牘은 두 점이지만 한 점은 글씨가 거의 모두 지워져 서체와 내용을 알 수 없고 다른 한 점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이다. 길이 46cm, 넓이 2,5cm, 두께가 4mm 정도의 녹나무 판의 앞면과 뒷면에 모두 글씨가 있으며 앞면은 3행으로 모두 121자이고 뒷면은 4행으로 모두 33자이다. 내용은 秦나라 武王2년에서 4년(서기전309-서기전 307)의 丞相인 甘茂 등에게 명하여 農田法을 수정하게 하는 법률문이다. 따라서 이 木牘의 田律을 연구하면 戰國시대 秦나라의 田畝 제도와 토지를 관리한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靑川木牘』은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木牘으로 大篆에서 隸書로의 변천이 거의 모두 진행된 형태의 서체이다. 象形性의 篆書 형태는 몇 글자밖에 없으며 대부분이 隸書의 筆劃과 結字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미 波磔의 筆劃이 탄생하고 있다. 隸書의 특징인 偏方形의 字勢를 취하고 있으며 필순이 현재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漢隸와 같이 筆劃에서 波磔이나 撇捺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자형에도 象形性이 남아 있어서 완전한 隸書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波磔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非篆非隸의 형태인 서체를 일반적으로 古隸라 부른다.『靑川木牘』과 같은 古隸 서체의 출현은 隸變의 시기를 戰國시대 중기 이전으로 주장하는 학설에 큰 힘이 실리는 증거가 되었다.

  『睡虎地秦簡』은 1975년 湖北省 雲夢縣 睡虎地의 秦나라 시대의 墓에서 출토되어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秦簡은 1155점, 수 만 자에 달하는 많은 양으로 戰國시대 후기의 昭襄王 원년에서 始皇 5년(서기전306-서기전217)에 이르기까지의 작품으로 고증되었다. 문장의 내용과 형식은 매우 다양하여 昭襄王시대부터 秦始皇시대까지의『編年紀』,『語書』,『秦律』,『效律』,『秦律雜抄』,『日書』 등이 기록되어져 있다. 특히 睡虎地에서는 竹簡書 이외에 두 점의 木牘이 함께 출토되어『靑川木牘』 이후의 木牘 서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木牘의 내용은 戰線의 병사가 집으로 보낸 書信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최초의 편지글이다.

  『睡虎地秦簡』의 書體는 정방형, 장방형, 偏方形 등 매우 다양하고 筆劃도 가는 것, 굵은 것, 강한 것, 부드러운 것 등 형태가 다채롭고 변화가 풍부하다. 筆劃에서 이미 起伏과 굵기의 변화가 생겨나고 있으며 특히 波磔이 거의 완성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또한 훗날 漢隸에서 완성된 隸書의 結體와 字勢가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金文과 같은 大篆의 결구와 자형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隸書가 小篆에서 변천한 서체가 아니라 小篆과 함께 大篆에서 변천하였으며 동시에 사용된 서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漢隸는 秦나라의 隸書를 계승하여 완성한 서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天水放馬灘秦簡』은 1986년 甘肅省 天水市 放馬灘의 戰國시대 후기의 秦나라 묘에서 출토된 竹簡으로 현재 天水市 文化館에 보존되어 있다. 모두 73점의 竹簡書 가운데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8점이 있어서 그것을 근거로 秦나라 嬴政8년(서기전239) 이전의 작품으로 고증한다. 竹簡書의 내용은 墓地 주인의 일을 기록한 墓主記, 하루의 일을 점친 내용을 기록한 日書 등이다. 서체는 세로로 긴 結字와 字勢를 갖추고 있으며 글자의 크기와 자형이 들쭉날쭉 변화가 많고 筆劃과 筆劃 사이가 넓게 결구하고 있다. 간혹 大篆의 형태를 갖춘 글자가 있으나 대부분 筆劃을 간략화 하였으며 비록 波磔이 성숙되지는 않았으나 隸書의 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의 筆劃은 무겁게 逆入하여 가늘게 뽑아 낸 釘頭鼠尾의 형태이고 꺾이는 부분을 둥글게 運筆하여 전체적으로 圓筆의 느낌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3. 帛書

 

  帛書는 일반적으로 비단에 글씨가 쓰여진 서체를 일컬으며 繒書, 絹書, 縑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언제부터 비단이 사용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서기전 3000년경에 嫘祖라는 사람이 織造法를 발명했다는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을 뿐이다. 비단이 사용되었던 증거는 殷商시대의 甲骨文에서 찾을 수 있다. 甲骨文에 ‘絲’, ‘蠶’, ‘帛’, ‘桑’, 등의 글자가 사용되어진 것으로 보아 商나라 때 이미 양잠과 직조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殷商시대 이전의 견직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최초의 견직물은 長沙의 楚나라 묘에서 출토된 비단으로 戰國시대 이전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비단이 書寫의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최초의 증거는 고대 문헌의 기록이다.『墨子』에 “書之竹帛, 傳遺後世子孫.”(竹簡書과 비단에 적어서 후세의 자손에게 전하였다.)이라 하였고『晏子春秋』에 “著之於帛.”(비단에 기록하다.)이라 하였으며『越絶書』에 “越王以丹書帛.”(越王은 丹砂로 비단에 썼다.)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帛書가 春秋시대에 이미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春秋시대 이전의 帛書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시대가 가장 빠른 帛書는『子彈庫楚帛書』로 戰國시대 중기의 楚나라 작품이다.

  竹簡書 木牘은 재료를 구하기가 쉬운 반면에 부피가 많아 휴대하거나 보관하기가 곤란한 단점이 있다. 진시황이 六國을 통일한 후 매일 처리한 공문서가 한 섬이 넘었으며 西漢시대에 東方朔이 武帝에게 올린 상소문이 3천 점의 木牘으로 두 명의 장정이 皇宮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簡牘의 불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비단은 簡牘과 달리 보관하거나 휴대하기가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단점이다.  

  漢나라 시대에 한 필의 비단은 여섯 섬의 쌀값과 비슷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일반인의 서사 재료로는 簡牘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비단은 특별한 계층에서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출토된 帛書의 내용을 살펴볼 때 비단을 서사 재료로 사용한 계층은 당시의 王公 귀족이나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살펴볼 때 先秦시대의 서사 재료로는 비단보다 簡牘이 많이 사용되었을 것은 당연하며 또 방직물이 쉽게 훼손되고 썩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남겨진 자료도 簡牘보다는 훨씬 적은 편이다. 20세기 이전에는 帛書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1908년 甘肅省 敦煌부근에서 최초로 東漢시대의 帛書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았으며 1940년대에 이르러 湖南省의 長沙에서 戰國시대 중기 楚나라의 帛書가 2점 발견되면서 考古學界와 書藝學界에 帛書에 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帛書는『子彈庫楚帛書』,『子彈庫楚帛書殘片』,『馬山楚墓絹書』 등으로 그 수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子彈庫楚帛書』는『楚繒書』로 불리기도 하는 戰國시대 중기의 楚나라 帛書로 1942년 湖南省 長沙의 子彈庫에서 출토되어 현재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帛書는 길이가 47cm 넓이가 38.7cm의 비단에 900여자의 글씨가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서로 반대로 배열되어져 있으며 사면의 가장자리에는 12개월의 神象이 그려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채색된 식물 그림이 布置되어 있다. 원본은 이미 낡아서 겨우 270여자의 문자만 읽어 낼 수 있고 자외선으로 촬영한 사진에 의해 그 내용을 판독 할 수가 있다.『子彈庫楚帛書』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帛書이며 先秦시대의 것으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帛書로서 내용은『四時』,『天象』,『帝名』,『神名』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帛書는 陰陽五行에 관련된 문헌 자료이며 동시에 비교적 원시 형태이나 고대의 천문 저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고대 사람들의 하늘관, 제사의 禁忌, 역법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楚나라 민족의 형성 및 중국 고대의 신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子彈庫楚帛書』는 楚나라의 簡牘 서체와 매우 닮은 형태로 篆書에서 隸書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글씨이다. 筆劃의 起筆은 굵고 收筆은 가늘게 運筆 하였으며 특히 가로획을 시작할 때는 큰 점을 먼저 찍은 다음 運筆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로획에서 직선의 사용을 피하고 있으며 마치는 부분을 아래고 향하게 하여 筆意를 연결되게 하였다. 行筆에서 누르거나 들고 멈추는 흔적이 없이 運筆하였으며 곡선을 많이 사용한 圓筆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結字에서는 ‘天’, ‘下’, ‘可’, ‘丙’, ‘辰’자 등의 머리에 가로로 한 획씩을 추가하는 등 羨劃(글자에 추가로 획을 더한 것)을 사용하여 문자에 예술적 꾸밈을 더하였다. 結體와 결구에서는 가로로 긴 偏方形을 취하여 隸書의 字勢가 느껴지며 행간을 가지런하게 布置하였고 자간에서도 균일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郭沫若은 논문『古代文字之辨證的發展』에서 이 帛書를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당시의 민간 巫俗人이 틀림없다. 字體는 비록 篆書이나 金文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筆劃이 간략하게 변화하고 偏方形의 자형은 후대의 隸書에 접근하고 있다. 당시의 簡牘과 陶文의 서체와 비슷하여 민간의 俗書라고 할 수 있다.”라 하여『子彈庫楚帛書』가 篆書에서 隸書로 변천하는 과정의 서체라 평가하였다.

  『子彈庫楚帛書』와 함께 출토된『子彈庫楚帛書殘片』은 모두 14편으로 글자가 가장 많은 것이 14자이며 篆書와 隸書사이의 서체이다. 殘片으로 남아 있으나 글자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당시의 서체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馬山楚墓絹書』는 1982년 湖北省 江陵縣에서 출토된 楚나라 시대의 帛書로서 모두 3자이다. 1985년 출판된『江陵馬山一號楚墓』에서 이 帛書를 서기전 278년 이전의 戰國시대 중 후기의 글씨로 고증하고 있다.『子彈庫楚帛書』와 같이 起筆을 굵게 하고 收筆을 가늘게 運筆하였으며 轉折에서 곡선을 사용하는 등 서체는 다른 帛書와 비슷하나 공간의 안배가 매우 돋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 帛書가 비록 3자 밖에 안되지만 다른 帛書와 비교하여 서체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출전:중국서법예술사 /저자 배규하
출처 : 서예사랑 호학당
글쓴이 : 예전 이영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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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殷商시대의 甲骨文

 

1. 甲骨文의 槪況

 

  甲骨文字가 새겨진 재료는 龜甲과 獸骨이 가장 많기 때문에 甲骨文이라 불리고 있으며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11세기 중엽인 殷商시대에 주로 사용된 한자를 가리킨다. 甲骨文이 발견되어 문자학계와 서예계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淸나라 시대 光緖 25년(1899년)에 甲骨文은 비로소 수 천년의 잠 속에서 깨어나 학계에 그 신비스러운 모습을 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甲骨文이 학계에 주목을 받기까지는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899년 겨울 北京의 國子監인 王懿榮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한약방에서 그 당시 ‘龍骨’이라고 불리는 오래된 짐승의 뼈를 사 오게 하였다. 그 때 마침 그의 친구인 劉鶚이 병 문안 와 있었는데 龍骨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그곳에 무엇인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龍骨에 새겨진 것이 그때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고대의 한자임을 깨닫고서 龍骨이 출토된 지점을 역 추적하여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이후 1903년 劉鶚은 자신의 雅號를 넣은『鐵雲藏龜』라는 甲骨文을 수록한 최초의 서적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甲骨文이 출토된 지점은 河南省의 安陽市의 小屯村이다.『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小屯村은 서기전 14세기 商나라 열 아홉 번째 왕인 盤康이 도읍으로 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한 땅으로 그 이후부터는 나라이름을 殷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 후로부터 이곳은 殷나라 마지막 紂王이 周나라에 멸망하기까지 273년 8代 12王이 통치한 殷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며 지금은 殷墟라 부르고 있다. 殷墟의 甲骨文이 발견된 후 河南省 鄭州의 二里岡, 山東省 洪越坊堆村, 陝西省 長安의 張家坡, 北京의 昌平 白浮村 등에서도 西周시대의 甲骨片이 다량 발견되었는데 총수가 1만 7천 편을 넘고 있다. 殷墟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甲骨편에서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적어 약 3백 편이 조금 넘고 있으나 周나라 시대의 甲骨文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殷墟 이외의 지역에서도 甲骨文이 발견되므로 하여 殷商을 이어받은 周나라 시대에서도 甲骨文이 광범위하게 쓰여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었으며 文字學, 考古學, 考證學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볼 때도 중요한 연구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殷墟에서 출토된 甲骨편 총수는 15만 편이 넘으며 글자 수는 총 일 백만 자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총 단어 수는 4500자 정도이며 그 가운데 현재까지 읽어서 판독되는 글자는 1500자를 조금 넘고 있다. 현대 중국어도 3천자 이상의 한자만 알고 있으면 의사 소통에 기본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甲骨文이 널리 사용된 殷商시대에 이미 한자의 사용이 매우 광범위했으며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기록하고 전달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甲骨文이 매우 성숙되고 발전된 문자와 문장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甲骨文이 사용된 殷商시대 이전에도 좀 덜 진화된 문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한다.

 

2. 甲骨文의 내용 및 형식

 

  甲骨文은 거북의 배나 등 껍질 그리고 소의 어깨뼈뿐만 아니라 사슴의 머리뼈, 사람의 해골 등 많은 재료에 새겨진 문자로 일종의 점술 문장인 卜辭이다. 따라서 甲骨文을 甲骨刻寫, 貞人文字, 殷墟書契, 殷墟卜辭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甲骨文의 內容은 매우 다양하여 역대 殷商 왕조의 각종 활동 및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농사의 생산 및 왕실과 가까운 가족 등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형태별로 나누어 귀납해 보면 대체로 다음 몇 종류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祭祀: 조상신과 자연신에 대한 제사에 관한 내용.

② 天時: 風, 雨, 水, 天 등 날씨와 하늘의 움직임에 대한 내용.

③ 農事: 농사와 사냥 등의 수확에 관한 내용.

④ 征伐: 이웃 나라와의 전쟁과 외교 등에 관한 내용.

⑤ 王事: 출생, 질병, 사망 등 왕실의 사건에 관한 내용.

⑥ 豫言: 하늘에 대한 바램과 미래의 예언에 관한 내용.

 

  이상과 같은 甲骨 문의 문장을 살펴보면 殷商의 왕이 내용의 중심이 되어 왕실의 편안함과 농사와 사냥의 풍년 등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이 주목적이며 조상신과 자연신에 대한 숭배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은 점을 쳐서 내용을 기록한 것 이외에 왕실에서 일어난 일들의 단순한 기록이나 干支를 새긴 것 그리고 글씨를 쓰고 새기는 연습을 한 것 등 비교적 다양한 형식이 있다. 殷商시대에 이미 干支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 어떤 甲骨편에는 干支의 60甲子를 순서대로 새겨 놓아 점을 칠 때에 필요에 따라서 참고로 삼은 흔적도 보이고 있다.

  殷商시대에 신을 섬기고 점을 쳐서 큰일을 결정하였다는 것은 문헌의 기록에도 나타난다.『禮記·表記』편에 “殷人尊神, 率民以事神, 先鬼而後禮”(殷나라 사람들은 神을 존중하여 백성들과 함께 神을 섬겼다. 먼저 영혼을 불러온 후 예를 행하였다.)라 하여 殷商시대에는 신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말해 주듯 殷나라 시대의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 구체적 표현으로 점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건을 처리하거나 재앙이 닥치거나 기쁜 일이 생겨도 먼저 점을 쳐 신에게 물어 본 다음 처리할 방향을 결정하는 풍습과 전통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중대한 사건이나 큰 재앙을 당하면 몇 명의 점술사가 반복하여 점을 쳤고 그 중에서 가장 확률이 많은 점괘 쪽으로 일의 방향을 결정한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의 상태로 殷나라 시대의 점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먼저 글씨를 새기는 甲骨의 반대쪽에 송곳으로 구멍을 낸 후 불에 구우면 구멍을 따라서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점술사인 貞人이나 왕이 이 균열을 근거로 하여 길흉을 판단하게 된다. 그 후 신에게 점쳐 물었던 內容과 점괘를 균열이 생긴 甲骨의 주위 공간에 새겨 넣었다. 문장의 내용은 비교적 상세하였으며 점을 친 사람과 점의 내용뿐만 아니라 일이 발생하고 난 후 점괘가 맞았는지 아니면 틀렸는지 까지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한편의 완전한 甲骨文이 완성되었으며 이후 이 甲骨片들을 버리지 않고 한곳에 모아 보관하였다. 淸나라 후기에 甲骨文이 한 자리에서 대량으로 발견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 한곳에 모아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甲骨文을 새기는 전통 속에서 문장의 고정된 격식과 규칙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의 완전한 甲骨文의 형식은 대체로 前辭, 問辭, 占辭, 驗辭 등 네 부분으로 조성되어져 있다. 前辭는 敍辭라고 불리는데 점을 친 날짜와 장소 그리고 貞人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問辭는 命辭라고 불리며 신에게 점을 쳐 물은 內容들이 적혀 있다. 占辭는 점을 친 결과인 점괘가 적혀 있으며 길흉의 예언과 목적의 成敗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驗辭는 일이 발생한 후 그 결과와 점괘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등의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래에서 완전한 한편을 甲骨文 문장을 예로 들어 보편적 형식과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 釋文

 

① 戊子卜, 嗀貞; 帝及四夕令雨? (前辭)

② 貞; 帝弗其及今四夕令雨? (問辭)

③ 王占曰: 丁雨, 不?? 혜辛. (占辭)

④ 旬丁酉允雨. (驗辭)

 

* 飜譯

 

①. 戊子날에 占을 치다, 嗀(貞人의 이름)이 묻습니다. 上帝이시어 4일째 되는 저녁에 비를 내려 주시겠습니까?

②. 다시 묻습니다, 상제이시어 4일째 되는 저녁에 비를 내려 주시지 않습니까?

③. 王(武丁)이 점괘를 보고 말한다: 丁酉날에 비가 오며 辛卯날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④. 10일이 지난 후 丁酉날에 과연 비가 내렸다.

위 甲骨文은 董作賓의『小屯·殷墟文字·乙編』에 실려 있으며『甲骨文合集』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殷商의 제 4대 왕인 武丁시대의 卜辭로서 상제에게 비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점치고 기도한 기록이다. 시간, 인물, 사건, 경과, 결과 등 완전한 격식을 갖춘 전형적인 甲骨文이다.

 

3. 甲骨文의 시대 구분과 특징

 

1) 甲骨文의 시대 구분

 

淸나라 시대의 光緖 연간인 1899년 殷墟의 甲骨文이 처음 발견된 후 학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甲骨文이 어느 시대의 문자이며 어떤 뜻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考古學, 歷史學, 文字學 등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한 결과 甲骨文이 殷商시대에 사용된 문자였음을 판명하였고 그 내용도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에 甲骨學에 종사하여 큰 성과를 거둔 학자는 羅振玉, 董作賓, 王國維, 郭沫若 등으로 甲骨學 四大家라 불린다. 이들과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고대 商나라와 周나라의 역사적 실체가 밝혀질 수 있었으며 한자의 탄생과 서체의 변천에 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書藝學界에서도 새로운 한자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甲骨文의 筆劃과 結字法을 근거로 하는 창작 행위가 성행하게 되었다.

  甲骨文이 殷商시대에 사용되었던 한자라는 사실은 비교적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甲骨片이 어느 시대의 것이며 시대별로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에 관한 내용은 문자학자의 더 많은 연구를 거친 후에 이루어졌다. 15만 편에 일 백만 자가 넘는 甲骨文에서 같은 글자끼리 분류하고 글자의 뜻을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甲骨文에 사용된 한자가 약 4500자 정도로 집계되고 있으나 현재까지 연구하여 판독되는 글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500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의 문자학계에서는 甲骨文의 한 글자만 밝혀 내도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이니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이 간다.

  甲骨文을 판독하고 시대별로 분류하는 연구에 羅振玉, 王國維, 董作賓, 郭沫若 등이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 가운데 董作賓은 甲骨文의 특징을 시대별로 나누어 분류하는 업적을 남겼다. 董作賓은『甲骨文斷代硏究例』에서 甲骨文의 시대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 때부터 甲骨文의 시대 구분은『甲骨文斷代硏究例』를 근본으로 연구하게 되었으며 이 저술은 甲骨文의 시대 구분에 가장 권위 있는 저서가 되었다.

 

항목

殷墟 문화의 분기

甲骨文의 분기

대표자

왕명

鄒衡

考古所

胡厚宣

董作賓

盤庚

제 1 기

제 1 기

제 1 기

제 1 기

小辛

小乙

武丁

제 2 기

祖庚

제 2 기

제 2 기

제 2 기

祖甲

廩辛

제 3 기

제 3 기

제 3 기

康丁

제 3 기

武乙

제 4 기

文丁

帝乙

제 4 기

제 4 기

제 4 기

제 5 기

帝辛

 

  董作賓은『甲骨文斷代硏究例』에서 殷商시대의 盤庚이 都邑을 옮기고 난 후 紂王이 周나라에 망하기까지 273년 8代 12왕 시대의 甲骨文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제1기; 盤庚, 小辛, 小乙, 武丁 (4世 4王)

제2기; 祖庚, 祖甲 (1世2王)

제3기; 廩辛, 康丁 (1世2王)

제4기; 武乙, 文丁 (2世2王)

제 5기; 帝乙, 帝辛 (2世2王)

 

  이상의 甲骨文의 시대 구분은 ① 世系 ② 稱謂 ③ 貞人 ④ 坑位 ⑤ 方國 ⑥ 人物 ⑦ 事類 ⑧ 文法 ⑨ 字形 ⑩ 書體 등의 10가지 표준과 방법에 의하여 연구 조사로 귀납해 낸 것이다.

  世系는 殷商 왕조의 왕실과 그 친척들의 계보를 위주로 연구한 것이다.

  稱謂는 殷王과 관계되는 사람들을 호칭한 것을 중심으로 연구 한 것으로 왕은 主, 형은 兄某, 아버지는 父某 등으로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貞人은 점을 치는 행위를 주관한 점술사를 연구한 것으로 爭, 充, 古, 賓, 永 등 많은 貞人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坑位는 甲骨文이 출토된 장소의 연관성과 특징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분류하였다.

  方國은 시대에 따라서 殷나라와 외교 관계가 있거나 정벌한 나라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분류한 것으로 武丁 시대에 苦方과 土方을 정벌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인물은 殷商 왕조의 관료와 諸侯등을 연구하여 분류한 것으로 시대를 추정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事類는 甲骨文에 기록된 사건과 중심으로 연구하여 분류한 것으로 武乙 시대에 사냥에 관한 기록이 60번 정도가 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文法은 甲骨文의 문법이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을 밝혀 내고 분류한 것이다.

  字形과 書體는 시대에 따라 甲骨 문자가 조금씩 다르게 쓰였으며 그 서풍도 다르다는 것을 밝혀 내 분류한 것으로 甲骨文 서예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래에서 각 분기별 甲骨文 서체의 특징을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제1기; 盤庚, 小辛, 小乙, 武丁 (약100년)

 

商나라 제19대 왕인 盤庚이 도읍을 殷墟로 옮긴 후 武丁시대까지를 제1기로 분류하였다. 이 시대는 殷나라가 경제와 군사 그리고 문화의 여러 방향에서 가장 발전한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로 왕실의 활동이 가장 많았다. 현재까지 발견된 甲骨文도 이 시기의 것이 가장 많으며 그 가운데서도 武丁시대의 것이 가장 많다.

  이 때의 甲骨文字는 비교적 字形이 큰 편이며 筆劃이 굵은 편이다. 글자가 비교적 큰 甲骨文은 강건하면서도 질박한 심미적 특징이 있다. 筆劃과 결구가 마치 종횡으로 거침없이 달리는 준마의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結字와 결구가 비교적 크고 넓으며 글자와 글자 사이의 뚝 떨어져 있으며 布置와 章法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탁 트이는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제1기 甲骨文의 심미적 특징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웅장하고 강건하며 씩씩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의 유명한 貞人으로는 嗀, 賓, 爭, 丙, 亙, 吏, 邑, 등이 있다.

 

제2기 祖庚, 祖甲 (약40년)

 

  이 시기는 殷나라가 제1기의 치적으로 인하여 국가가 부강해지고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인근 부족 국가와의 전쟁도 감소됨에 따라 농업과 사냥 등의 생산성도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 내부의 행사가 많아졌으며 甲骨文字의 자형과 서체의 심미적 특징이 많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武丁시대의 웅장하고 강건한 書風은 방정하고 유창하며 미려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結字와 결구는 가지런하며 글자의 중심을 향하여 모여들게 하였고 布置와 章法도 매우 규칙적이고 규범화되었다. 행간과 자간이 균일하면서도 공간의 안배가 자연스러워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기 한다. 이 시기의 甲骨文 서체와 내용은 당시의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적으로 풍요로웠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때에 많이 등장하는 貞人으로는 旅, 出, 行, 喜, 洋, 尹, 逐 등이 있다.

 

제3기; 廩辛, 康丁期 (약14년)

 

이 시기의 殷나라는 사회 각 부분의 안정이 깨어지기 시작하여 점점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초기 단계로 평가한다. 殷商의 문화적 분기 중에서 가장 짧은 시기로 발견된 甲骨文의 수량도 가장 적다. 甲骨文의 내용도 제 1기와 2기에 비해 생활상의 사사로운 일을 기록한 정도의 일반적이며 서체의 크기도 들쭉날쭉 불규칙하고 변화가 심하다. 행간과 자간의 배치가 산만하고 字形이 균형을 잃은 작품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전대의 전통을 이은 방정하고 수려한 작품도 함께 섞여 있다. 이와 같은 서체의 특징을 미루어 甲骨文 시대에도 정치와 경제 등 사회의 변화가 서체와 서풍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서체도 안정되고 사회가 혼란하고 국력이 한 약해진 시대에는 서체도 안정감을 잃고 있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의 貞人으로는 何, 寧, 彘, 彭, 狄, 敎, 弔등이 있다.

 

제4기; 武乙, 文丁시기 (약17년)

 

  이 시기는 甲骨文 서예의 百花齊放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서풍이 다양하다. 武乙시대에는 큰 글자의 甲骨文이 비교적 많이 나타나며 서풍이 매우 씩씩하고 엄숙하며 호방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서풍의 甲骨文의 미감은 ‘銅筋鐵骨’ 즉 뼈는 쇠와 같고 근육은 구리와 같이 강인하고 건강하다고 표현된다. 文丁시대의 甲骨文에서는 자형이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武乙시대의 심미적 특징을 계승하였으나 작은 글자에서 정교하고 수려한 맛을 많이 표현하였다. 結字와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甲骨에 글자를 새기는 기술이 발전하여 筆劃에 기교가 풍부한 것이 이 시대의 甲骨文 서예의 特徵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甲骨文은 殷商과 周나라 시대 甲骨文 서풍의 공통된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전체 甲骨文 서풍을 대표한다고 인정되며 예술적 수준이 가장 높은 시기로 평가된다. 제 4기는 貞人의 이름도 가장 많이 등장하며 史, 車, 歷, 萬, 中 등의 이름이 자주 나타난다.

 

제5기; 帝乙, 帝辛시기 (약 89년)

 

  殷商의 가장 후기에 속하는 이 시기의 甲骨文은 문장이 매우 성숙하여 한편의 완성된 서사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서체는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글자의 크기가 가지런하고 규칙적이며 행간과 자간의 배열이 일정한 규율 속에서 정제되어져 있다. 筆劃이 세밀하고 기교가 무르익어 있으며 結字와 결구가 엄격하고 좌우와 상하의 대칭을 완벽하게 안배하여 통일되고 안정된 조화의 미를 창출해 내었다. 布置와 章法은 규율과 법칙 속에서도 활동적인 움직임을 간직하고 있어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대의 貞人으로는 黃, 泳, 立 등이 있다.

  하나의 서체가 정리되고 통일되어 완성되는 것은 또 다른 서체의 탄생을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甲骨文을 서체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지만 甲骨文이 완성되는 시기에 甲骨이외에 새로운 서사 재료가 많이 사용되고 서체와 서풍도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殷商이 멸망하고 뒤를 이은 周나라 시대에는 청동기를 서사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甲骨文과는 다른 서풍과 심미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한 서체가 완성되고 난 후에는 그 주도적 위치를 다른 새로운 서체에게 내어 주는 것이 서체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甲骨文이 완성된 후 金文에게 그 자리를 내어 준 것은 小篆이 隸書, 隸書가 또 楷書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과 같은 서체 변천의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 甲骨文의 심미적 특징

 

  甲骨文은 칼을 사용하여 이루어진 서예의 한 영역으로 그 심미적 범주와 특징이 붓을 사용한 서예 작품과는 많이 다르다. 딱딱한 甲骨에 칼로서 새기는 행위가 甲骨文字의 형상과 서풍 그리고 筆劃의 심미적 범주를 결정하였다. 가로와 세로가 기본적으로 직선을 취하여 날카로우면서도 강건한 甲骨文 筆劃의 기본 미감을 형성하였으나 무겁고 가벼움, 빠르고 느림, 굵고 가는 筆劃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심미적 범주를 확대하였다. 청동기나 옥으로 만든 칼을 사용한 도법은 매우 숙련되어 方筆과 圓筆의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起筆과 收筆은 가볍고 빠르게 運筆하였으며 行筆은 굵기와 속도에 많은 변화를 구사하여 한 筆劃 안에서도 깊은 운율과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다. 筆劃이 꺾이고 굽은 轉折의 筆法에서는 方筆과 圓筆을 골고루 취하였으며 方筆은 날카롭고 강건하며 圓筆은 부드러우면서 윤택한 아름다움을 주로 표현하였다.

  甲骨文은 長方形의 結字와 위에서 아래로의 순서를 기본으로 하여 한자의 형태와 서사 순서의 특징을 결정하였다. 甲骨文에서 사용한 사각형의 結字와 세로로의 필순과 布置는 한자 서사 행위의 법칙이 되었으며 수 천년 동안 변하지 않는 기본 규칙이 되었다. 이와 같은 甲骨文의 사각형 구도는 평형과 대칭을 기본으로 하는 篆書의 심미적 범주를 창조해 내었고 이것은 한자 결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筆劃과 結字, 布置와 章法은 서예 작품의 심미적 특징을 탐구하는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甲骨文의 심미적 특징도 이와 같은 범주를 중심으로 고찰 할 수 있다.

  甲骨文 筆劃의 대표적 미감은 웅장하고 중후한 미감, 튼튼하고 방정한 미감, 부드럽고 수려한 미감, 자유롭고 개성적인 미감 등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웅장하고 중후한 미감을 특징으로 하는 甲骨文은 筆劃이 대체로 굵으나 起筆과 收筆이 상대적으로 가늘어 풍만하고 안정된 형태를 갖추었다. 行筆의 중심이 굵기 때문에 원만하고 편안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시 사람들의 너그러운 인정미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筆劃은 甲骨文 분기의 제 1기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으로 金文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튼튼하고 방정함을 심미적 특징으로 하는 甲骨文은 날카로우면서도 강건하여 당시의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음을 상징한다. 筆劃의 起筆과 收筆 그리고 行筆이 거의 비슷한 굵기로 運筆하였고 筆劃과 筆劃 사이를 가지런하게 안배하였다. 또 筆劃이 서로 만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간 굵게 처리하여 균일하고 안정된 가운데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筆劃은 제 2기의 심미적 특징을 대표하며 가장 성숙한 甲骨文의 筆劃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럽고 수려한 미감을 대표로 하는 筆劃은 甲骨文이 매우 성숙한 시기인 제 3기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것으로 도법의 뛰어난 기교를 요구하였다. 이런 종류의 筆劃은 대체로 가늘기는 하지만 結字와 결구의 조화를 잘 이루어 결코 약하지 않으며 완곡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行筆에서도 굵기의 조화를 이루었고 곡선의 轉折을 많이 선택하였을 뿐 아니라 筆劃이 비교적 길어서 현대적인 미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甲骨文의 초기와 후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자유스럽고 개성적인 筆劃과 결구이다. 아직 완성되기 이전의 甲骨文 筆劃은 질박하고 천진한 미감이 대표적이고 후기의 자유스러운 筆劃은 각 작품마다의 개성이 특징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筆劃은 점차 통일되고 완성되는 길로 접어들고 완성된 이후에는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서체 변천의 일반적 규율일 뿐 아니라 한 작가의 창작 행위에서도 이와 같은 규율이 상존 하고 있다. 甲骨文의 후기에 나타나는 자유와 개성은 당시의 서사 행위에서도 이미 작자 자신만의 심미적 요구를 표현하였으며 甲骨文이 예술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에는 사물이나 동작의 행위 그리고 형태나 위치를 형용하는 象形文字가 매우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은 甲骨文이 초기의 완전한 문자로서 象形의 造字규칙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간단한 筆劃으로서 사물의 형상이나 사건을 표현해 내었음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의 象形字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象物, 象事, 象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은 六書法에서 말하는 象形과 指事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許愼이『說文解字· 敍』에서 象形字를 “畵成其物, 隨體詰詘.”(사물의 각각 다른 형태에 따라서 물상을 그렸다.)이라 하였는데 ‘隨體詰詘’(물체 형태를 따르다.)이라 한 것은 畵論의 ‘應物象形’(만물의 형상을 본받다.)과 같은 뜻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형태를 따른 것은 그림과 그 성질이 같음을 알 수 있다. 指事字도 추상을 형상화 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象形字의 범주에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다.

  甲骨文은 象物, 象事, 象意의 象形性을 기본으로 하는 結字法을 취하여 자형에 회화적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象物의 象形字는 형체가 있는 객관적 사물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사실적 미감과 筆劃의 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象事의 象形字는 사물이 움직이는 형상을 묘사한 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상황을 筆劃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尙意의 象形字는 추상적 생각이나 형상을 묘사한 것으로 사물의 본성, 시간과 공간 개념, 위치와 방위의 개념을 표현하여 의미를 상상하며 감상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形聲에 의한 甲骨文의 結字도 모두 상형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甲骨文 結字의 심미적 범주는 사실적 미감, 운동성의 미감, 추상성의 미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상형을 기본 結字로 한 甲骨文의 결구는 대칭을 가장 중요한 형식과 심미적 범주로 선택하였다. 대칭의 심미적 특징은 평형과 조화이다. 평형과 조화는 사람들에게 평화롭고 안정된 심리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甲骨文에서 선택한 대칭의 결구는 인류의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음과 양을 바탕으로 암과 수,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 등의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조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그것을 심미적 범주로 인지하게 하였으며 고도의 이성 인식으로서 승화시켜 조화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甲骨文의 대칭에 의한 결구도 대자연의 만물에서 그 심미적 특징을 찾아내어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사물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사물 자체에 존재하고 있는 대칭의 결구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고 또 표현할 수 있었다. 甲骨文에서 표현한 대칭은 한 글자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布置와 章法 그리고 문장 속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형식의 심미적 범주이다. 이러한 대칭의 형식은 甲骨文의 서사 재료인 거북의 배 껍질과 소의 어깨뼈 자체의 대칭과도 관련이 깊으며 심지어 甲骨의 균열된 무늬까지도 대칭의 형식을 유도해 내었다. 이와 같이 甲骨文은 글자와 章法, 문장 등 여러 방면에서 대칭의 형식과 심미적 범주를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칭에 의한 결구는 甲骨文 서예의 가장 특출한 심미적 범주 가운데 하나로서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등 모든 방향에서 대칭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文의 대칭은 結字와 결구뿐 아니라 布置와 章法의 구성 영역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채택한 심미적 범주이다. 대칭의 형식 이외에 甲骨文 布置와 章法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세로 줄은 맞추고 가로줄은 맞추지 않는 ‘縱有行, 橫無列’의 기본 구조이다. 초기와 후기의 몇 작품은 가로와 세로에 아무런 격식이 없이 자유 자재로 布置하였거나 혹은 가로 세로를 매우 질서 정연하며 단정하게 布置하였으나 완전한 형태의 대부분의 甲骨文은 ‘縱有行, 橫無列’의 章法을 취하고 있다. 甲骨文에서부터 출발한 서예사에서 서체를 분류 할 때 가장 큰 분류법으로 正體와 草體의 두 산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篆書, 隸書, 楷書는 正體이고 行書와 草書는 草體라 한다. 正體는 일반적으로 가로와 세로의 행간과 자간을 정확하게 맞추는 章法을 취하고 草體는 세로는 행간은 맞추나 가로의 자간은 맞추지 않는 章法을 취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草體와 正體의 이러한 章法은 최초의 문자이며 서예 작품인 甲骨文에서부터 탄생하였으며 몇 천년을 흘러온 현재도 계속하여 지켜지고 있다.

  甲骨文은 기본적으로 평형과 대칭의 布置와 章法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추구하였으나 형식상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변화를 모색하였다. 결구와 章法에 있어서 좌우 편방을 일반적으로 위치를 교환하거나 위치에 따른 크기를 자유롭게 변화시켜 직선의 筆劃과 형태의 통일에서 나타나는 단순함을 최소화하였다. 甲骨文의 筆劃은 전체적으로 직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가 바로 변화와 생동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殷商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창조적이며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심미적 탐구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甲骨文은 꾸밈이 적은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원시 문화의 정취를 물씬 풍겨 주는 서예 작품으로 가장 선명한 색깔과 미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甲骨文이 오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가장 원시적 서체이지만 20세기의 서예가들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서체로 느껴질 뿐 아니라 가장 신비로운 미감을 간직하고 있는 서체로 평가된다.

 출전:중국서법예술사 /저자 배규하
출처 : 서예사랑 호학당
글쓴이 : 예전 이영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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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cles(甲骨文jia gu wen) - Jongo Knows - Encyclopedia of Ch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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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bsoluteastronomy.com/topics/Oracle_bone

 

 

 http://books.google.co.kr/books?id=74NbRyWOXJQC&pg=PA43-IA8&lpg=PA43-IA8&dq=Oracle+Bone++Menzies&source=bl&ots=FpKoJKeHCC&sig=f5gcoMx5JZqIoJRsizFiJVld8A0&hl=ko&ei=XhV0S4SPJ4acsgPq66yWBg&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4&ved=0CCIQ6AEwAzgK#v=onepage&q=Oracle%20Bone%20%20Menzies&f=false

 

 

Yin Xu

From New World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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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rdinates: 36°07′17″N 114°19′01″E / 36.12139, 114.31694

Yin Xu*
UNESCO World Heritage Site

Yinxu, the ruins of Yin, the capital (1350 - 1046 B.C.E.) of the Shang (Yin) Dynasty.
State Party China
Type Cultural
Criteria ii, iii, iv, vi
Reference 1114
Region** Asia-Pacific
Inscription history
Inscription 2006  (30th Session)
* Name as inscribed on World Heritage List.
** Region as classified by UNESCO.
Yin Xu is located near Anyang in Henan province, People's Republic of China.
Yin Xu is located near Anyang in Henan province, People's Republic of China.

Yin Xu (Chinese: 殷墟; pinyin: Yīnxū; literally "Ruins of Yin") is the ruins of the last capital of China's Shang Dynasty (1600 B.C.E.-1046 B.C.E.), also known as the Yin dynasty. It is located in the central Henan province, near the modern city of Anyang. King Pangeng established Yin on the Huan River during the fourteenth century B.C.E. From the capital, twelve kings in eight generations took the Shang dynasty to its peak before its fall to the Zhōu (周) dynasty in 1046 B.C.E. From that time, Yin had been abandoned and lost until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Rediscovered in 1899, Yin Xu numbers among the oldest and largest archaeological sites in China. The site became famous as the original source of oracle bones and oracle bone script, the earliest recorded form of Chinese writing. Wang Yirong, director of the Imperial College, discovered the first oracle bones, leading to the discovery China's earliest ideograms. In the process, he verified the authenticity of the Shang dynasty. In 1929, the first excavations of Yin Xu began, leading to the unearthing of a palace, tombs, and 100,000 oracle bones. The ongoing excavations since 1950 set the standard for archeology throughout China. Eighty sites confirm Yin Xu as the spiritual and cultural center of the Yin Dynasty. The Tomb of Fu Hao and the Exhibition Hall of Chariot Pits stand out among the excavation sites.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declared Yin Xu one of the Historical capitals of China in 1988, while UNESCO designated it a World Heritage Site in 2006.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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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At the beginning of the fourteenth century B.C.E. King Pangeng of the Shang Dynasty established his capital on the banks of the Huan River. The city, known as Yin, also gave it's name to the dynasty of that time, the Yin Dynasty.[1] King Wu Ding continued to use Yin as his capital, from that base launching numerous military campaigns against surrounding tribes securing Shang rule. Fu Hao, his wife, led many of the campaigns. King Wu Ding and Fu Hao took the dynasty to its zenith.

Later rulers, pleasure-seekers, took little interest in state affairs. Internal strife escalated as social differences within the slave-owning society increased. King Zhòu (紂), the last of the Shang Dynasty kings, especially earned a reputation as a ruthless and debauched ruler. His increasingly autocratic laws alienated the nobility until King Wu of the Zhōu Dynasty (周) overthrew the Shang dynasty with popular support from the people. The Zhōu (周) established their capital in Feng and Hao near modern day Xi'an, Yin abandoned to fall into ruin. Sima Qian, in hi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2] mentioned those ruins, but soon they were lost and their location forgotten. The once-great city of Yin had been relegated to legend along with the dynasty that founded it.

Archaeological discoveries

Oracle Bone Inscriptions on display, Yin Xu site, Anyang, Henan, China
Oracle Bone Inscriptions on display, Yin Xu site, Anyang, Henan, China

Yinxu won renown for the oracle bones, discovered in 1899 by Wang Yirong, director of the Imperial College.[3] Director Wang, suffering from malaria at the time, had been prescribed Longgu (dragon bones) at a traditional Chinese pharmacy. He noticed strange carvings on those bones and concluded that they could have been some of China’s earliest ideograms. Sending his assistant in search of the source of those bones, he traced to the small village of Xiaotun just outside of Anyang.[4] In 1917, Wang Guowei deciphered the oracle bone inscriptions, identifying the names of the Shang kings and constructing a complete Shang genealogy. That decipher perfectly matched those in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5] confirming the historical authenticity of the legendary Shang Dynasty and the archaeological importance of Yinxu.[6]

Li Chi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sophy from 1928-1937 led the first excavations at Yinxu.[7] They uncovered the remains of a royal palace, several royal tombs, and more than 100,000 oracle bones that showed the Shang had a well-structured script with a complete system of written signs.[4] Since 1950, ongoing excavations by the Archaeological Institute of the Chinese Social Sciences Academy have uncovered evidence of stratification at the Hougang site, remains of palaces and temples, royal cemeteries, oracle bone inscriptions, bronze and bone workshops and the discovery of the Shang city on the north bank of the Huang River.[8] one of the largest and oldest sites of Chinese archaeology, excavations in Yin Xu laid the foundation for work across the country.

Excavation sites

Tomb of Fu Hao), wife King Wu, Shang dynasty ruler. Anyang, Henan, China
Tomb of Fu Hao), wife King Wu, Shang dynasty ruler. Anyang, Henan, China

At 30 square kilometers (12 sq mi), Yin Xu measures as the largest archaeological site in China and excavations have uncovered over eighty rammed-earth foundation sites including palaces, shrines, tombs and workshops. From those remains, archaeologists have confirmed that Yin Xu served as the spiritual and cultural center of the Yin Dynasty.[9]

Chariots of the Shang dynasty excavated in Yin Xu represent the earliest example of animal-drawn carts discovered in China.
Chariots of the Shang dynasty excavated in Yin Xu represent the earliest example of animal-drawn carts discovered in China.

The Tomb of Fu Hao stands out as the best preserved of the Shang Dynasty royal tombs unearthed at Yinxu. The extraordinary Lady Hao had been a military leader and the wife of Shang King Wu Ding. Discovered in 1976, the tomb has been dated to 1250 B.C.E. Completely undisturbed, the tomb escaped the looting that had damaged the other tombs on the site. In addition to the remains of the Queen, six dog skeletons, sixteen human slave skeletons, and numerous grave goods of huge archaeological value had also been discovered in the tomb. Thoroughly excavated and extensively restored, Fu Hao's tomb has been opened for public viewing.

The Exhibition Hall of Chariot Pits, also located on site, displays the earliest animal-driven carts discovered by Chinese archaeologists.[10] The Anyang Working Station of the Archaeological Institute of the Chinese Social Science Academy and the Historical Relics Working Team of Anyang Municipality excavated those artifacts. They unearthed them in the northern and southern lands of Liujiazhuang village and the eastern land of Xiaomintun village, putting on the artifacts display within the hall.[11] The six pits each contain the remains of a carriage and two horses. Five of the pits contained the remains of a human sacrifice (four adult males and one child). The remains of an 8.35 meters (27.4 ft) wide Shang Dynasty road discovered at Anyang Aero Sports School in 2000.[12]

In 1988, Yinxu became the oldest of the seven Historical capitals of China while in 2006 UNESCO designated Yin Xu a World Heritage Site.[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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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cle b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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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cle bones (Chinese: 甲骨; pinyin: jiǎgǔ) are pieces of bone or turtle plastron (underside) bearing the answers to divination chiefly during the late Shang Dynasty. They were heated and cracked, then typically inscribed using a bronze pin[1] in what is known as oracle bone script. The oracle bones are the earliest known significant[2] corpus of ancient Chinese writing, and contain important historical information such as the complete royal genealogy of the Shāng dynasty[3]. These records confirmed the existence of the Shāng dynasty, which some scholars, until then, had doubted ever existed.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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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Dating

The vast majority of the inscribed oracle bones date to the last 230 or so years of the Shāng dynasty; oracle bones have been reliably dated to the fourth and subsequent reigns of the kings who ruled at Yīn (modern Ānyáng)—from king Wu Ding (武丁) to Di Xin (帝辛).[4] However, the dating of these bones varies from ca. the 14th -11th centuries BCE [5][6] to ca. 1200-1050 BCE[7] because the end date of the Shāng dynasty is not a matter of consensus. The largest number date to the reign of king Wǔ Dīng[8] . Very few oracle bones date to the beginning of the subsequent Zhōu Dynasty.

[edit] Discovery

A Shang Dynasty oracle bone from the Shanghai Museum

The Shāng-dynasty oracle bones are thought to have been unearthed periodically[9] by local farmers, perhaps starting as early as the Hàn dynasty,[10] and certainly by 19th century China, when they were sold as dragon bones (lóng gǔ 龍骨) in th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rkets, used either whole or crushed for the healing of various ailments.[11] The turtle shell fragments were prescribed for malaria[12], while the other animal bones were used in powdered form to treat knife wounds[6]. They were first recognized as bearing ancient Chinese writing by a scholar and high-ranking Qing dynasty official[6], Wáng Yìróng (王懿榮; 1845-1900) in 1899. A legendary[6] tale states that Wang was sick with malaria, and his scholar friend Liú È (劉鶚; 1857-1909) was visiting him and helped examine his medicine. They discovered, before it was ground into powder, that it bore strange glyphs, which they, having studied the ancient bronze inscriptions, recognized as ancient writing. As Xǔ Yǎhuì (許雅惠 2002, p. 4) states:

"No one can know how many oracle bones, prior to 1899, were ground up by traditional Chinese pharmacies and disappeared into peoples’ stomachs."

It is not known how Wang and Liu actually came across these “dragon bones”, but Wang is credited with being the first[6] to recognize their significance, and his friend Liu was the first to publish a book on oracle bones[13]. Word spread among collectors of antiquities, and the market for oracle bones exploded. Although scholars tried to find their source, antique dealers falsely claimed that the bones came from Tāngyīn (湯陰) [6] in Hénán. Decades of uncontrolled digs[14] followed to fuel the antiques trade, and many of these pieces eventually entered collections in Europe, the US, Canada and Japan[15]. The first Western collector was the American Rev. Frank H. Chalfant[16], while Presbyterian minister James Mellon Menzies (明義士) (1885-1957) of Canada bought the largest amount[17]. The Chinese still acknowledge the pioneering contribution of Menzies as "the foremost western scholar of Yin-Shang culture and oracle bone inscriptions." His former residence in Anyang was declared in 2004 a "Protected Treasure" and the James Mellon Menzies Memorial Museum for Oracle Bone Studies was established[18][19][20]

[edit] Official excavations

By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headed by Fù Sīnián at the Academia Sinica in 1928, the source of the oracle bones had been traced back to modern Xiǎotún (小屯) village at Ānyáng in Hénán Province. Official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1928-1937 led by Lĭ Jì (李濟; 1896-1979), the father of Chinese archaeology[21], discovered 20,000 oracle bone pieces, which now form the bulk of the Academia Sinica's collection in Taiwan and constitute about 1/5 of the total discovered[22] . The inscriptions on the oracle bones, once deciphered, turned out to be the records of the divinations performed for or by the royal household. These, together with royal-sized tombs[23], proved beyond a doubt for the first time the existence of the Shāng Dynasty, which had recently been doubted, and the location of its last capital, Yīn. Today, Xiǎotún at Ānyáng is thus also known as the Ruins of Yīn, or Yīnxū (殷墟).

[edit] Materials

In this Shang Dynasty oracle bone (which is incomplete), a diviner asks the Shang king if there would be misfortune over the next ten days; the king replied that he had consulted the ancestor Xiaojia in a worship ceremony.

The oracle bones are mostly tortoise plastrons (ventral or belly shells, probably female[24]) and ox scapulae (shoulder blades), although some are the carapace (dorsal or back shells) of tortoises, and a few are ox rib bones[25], scapulae of sheep, boars, horses and deer, and some other animal bones[26]. The skulls of deer, ox skulls and human skulls[27] have also been found with inscriptions on them, although these are very rare, and appear to have been inscribed for record-keeping or practice rather than for actual divination[28]; in one case inscribed deer antlers are reported, but Keightley (1978) reports that they are fake[29]. Neolithic diviners in China had long been heating the bones of deer, sheep, pigs and cattle for similar purposes; evidence for this in Liáoníng has been found dating to the late fourth millennium BCE[30]. However, over time, the use of ox bones increased, and use of tortoise shells does not appear until early Shāng culture. The earliest tortoise shells found which had been prepared for oracle bone use (i.e., with chiseled pits) date to the earliest Shāng stratum at Èrlĭgāng (Zhèngzhoū, Hénán)[31]. By the end of the Èrlĭgāng the plastrons were numerous[32], and at Ānyáng scapulae and plastrons were used in roughly equal numbers[33]. Due to the use of these shells in addition to bones, early references to the oracle bone script often used the term 'shell and bone script', but since tortoise shells are actually a bony material, the more concise term "oracle bones" is applied to them as well.

The bones or shells were first sourced, and then prepared for use. Their sourcing is significant because some of them (especially many of the shells) are believed to have been presented as tribute to the Shāng, which is valuable information about diplomatic relations of the time. We know this because notations were often made on them recording their provenance (e.g. tribute of how many shells from where and on what date). For example, one notation records that “Què (雀) sent 250 (tortoise shells)”, identifying this as, perhaps, a statelet within the Shāng sphere of influence[34]. These notations were generally made on the back of the shell's bridge (called bridge notations), the lower carapace, or the xiphiplastron (tail edge). Some shells may have been from locally raised tortoises, however.[35] Scapula notations were near the socket or a lower edge. Some of these notations were not carved after being written with a brush, proving (along with other evidence) the use of the writing brush in Shāng times. Scapulae are assumed to have generally come from the Shāng’s own livestock, perhaps those used in ritual sacrifice, although there are records of cattle sent as tribute as well, including some recorded via marginal notations[36].

[edit] Preparation and usage

The bones or shells were cleaned of meat, and then prepared by sawing, scraping, smoothing and even polishing to create convenient, flat surfaces.[37][38] The predominance of scapulae and later of plastrons is also thought to be related to their convenience as large, flat surfaces needing minimal preparation. There is also speculation that only female tortoise shells were used, as these are significantly less concave[39]. Pits or hollows were then drilled or chiseled partway through the bone or shell in orderly series. At least one such drill has been unearthed at Èrlĭgāng, exactly matching the pits in size and shape[40]. The shape of these pits evolved over time, and is an important indicator for dating the oracle bones within various sub-periods in the Shāng dynasty. The shape and depth also helped determine the nature of the crack which would appear. The number of pits per bone or shell varied widely.

[edit] Divination

Replica of an oracle bone -- ox scapula

Since divination (-mancy) was by heat or fire (pyro-) and most often on plastrons or scapulae, the terms pyromancy, plastromancy[41] and scapulimancy are often used for this process. Divinations were typically carried out for the Shāng kings, in the presence of a diviner. A very few oracle bones were used in divination by othe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or nobles close to the king. By the latest periods, the Shāng kings took over the role of diviner personally.[42]

During a divination session, the shell or bone was anointed with blood [43], and in an inscription section called the 'preface', the date was recorded using the Heavenly Stems and Earthly Branches, and the diviner name was noted. Next, the topic of divination (called the 'charge') was posed[44], such as whether a particular ancestor was causing a king's toothache. The divination charges were often directed at ancestors, whom the ancient Chinese revered and worshiped, as well as natural powers and Dì (帝), the highest god in the Shāng society. A wide variety of topics were asked, essentially anything of concern to the royal house of Shāng, from illness, birth and death, to weather, warfare, agriculture, tribute and so on. one of the most common topics was whether performing rituals in a certain manner would be satisfactory.[45]

An intense heat source[46] was then inserted in a pit until it cracked. Due to the shape of the pit, the front side of the bone cracked in a rough 卜 shape. The character 卜 (pinyin: bǔ or pǔ; Old Chinese: *puk; "to divine") may be a pictogram of such a crack; the reading of the character may also be an onomatopoeia for the cracking. A number of cracks were typically made in one session, sometimes on more than one bone, and these were typically numbered. The diviner in charge of the ceremony read the cracks to learn the answer to the divination. How exactly the cracks were interpreted is not known. The topic of divination was raised multiple times, and often in different ways, such as in the negative, or by changing the date being divined about. one oracle bone might be used for one session, or for many[47], and one session could be recorded on a number of bones. The divined answer was sometimes then marked either "auspicious" or "inauspicious," and the king occasionally[48] added a “prognostication”, his reading on the nature of the omen. on very rare[48] occasions, the actual outcome was later added to the bone in what is known as a “verification”. A complete record of all the above elements is rare; most bones contain just the date, diviner and topic of divination,[48] and many remained uninscribed after the divination[49].

This record is thought to have been brush-written on the oracle bones or accompanying documents, later to be carved in a workshop. As evidence of this, a few of the oracle bones found still bear their brush-written records[50], without carving, while some have been found partially carved. After use, the shells and bones which had seen ritual use[51] were buried in separate pits (some for shells only; others for scapulae only), in groups of up to hundreds or even thousands (one pit unearthed in 1936 contained over 17,000 pieces along with a human skeleton)[52

 

 

 

 

Bone divination

From The Book of THoTH (Leaves of Wisdom)

Oracle bones (甲骨片 jiǎgǔpiàn) are pieces of bone or turtle shell used in royal divination in the mid Shāng to early Zhoū dynasties in ancient China, and often bearing written inscriptions in what is called oracle bone script.

The Shāng oracle bones were unearthed in 19th century China, and were sold as dragon bones in th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rkets, used either whole or crushed for the healing of various ailments, including knife wounds. They were not recognized as bearing ancient Chinese writing until 1899, when they fell into the hands of two scholars, Wáng Yìróng (王懿榮 Wang I-jung, 1845-1900), who according to tradition was sick with malaria, and his friend Liú È (劉鶚), who was visiting and helped examine his medicine. They discovered, before it was ground into powder, that it bore strange glyphs, which they recognized as ancient writing. Word spread among collectors of antiquities, and the market for oracle bones exploded. Decades of uncontrolled digs followed, and many of these pieces eventually entered collections in Europe, the US and Japan.

Upon the establishment of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at the Academia Sinica in 1928, the source of the oracle bones was traced back to modern Xiǎotún (小屯 Hsiao-t’un) village near Ānyáng in Hénán Province. Official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1928-1937 led by led by Lĭ Jì (李濟 Lee Chi) discovered twenty thousand oracle bone pieces, which now form the bulk of the Academia Sinica's collection in Taiwan. Along with the oracle bones were discovered eleven royal-sized tombs. Traditional history recorded that twelve Shang kings ruled at Yīn (殷), the last of the Shang capitals. Since the last king died in the Zhou conquest and would not have received a normal royal burial, this was strong evidence that Xiaotun was indeed the site of Yīn Xū (殷墟 Yin Hsu), the Ruins of Yīn. The inscriptions on the oracle bones, once deciphered, turned out to be the records of the divinations performed for or by the royal household. These together proved beyond a doubt for the first time the existence of the Shang dynasty and the location of its last capital. The writing on them is also the earliest significant corpus of Chinese writing, and is essential for the study of Chinese etymology, as it is directly ancestral to the modern script.

The oracle bones are mostly ox scapulae (shoulder blades) and turtle shells, although some other animal bones, and even the skulls of deer and humans were sometimes used. Both the dorsal or back shell (carapace) and ventral or belly shell (plastron) of turtles were used, and since these are actually a bony material, the term oracle bones is applied to them as well.

After preparation involving sawing or splitting, and drilling pits partway through the bone, a topic was divined upon during a ceremony, and a heated rod was inserted into one of the pits until the bone cracked at that point. Due to the shape of the pit, the front side of the bone cracked in a rough 卜 shape; the character 卜 bǔ or pǔ (meaning "to divine") is a pictogram of such a crack. A number of cracks were typically made in one session, and the diviner in charge of the ceremony, who was sometimes the Shang king himself, then read the crack to learn the answer to the divination. It is not known exactly how the cracks were interpreted, however. The topic of divination was raised multiple times, and often in different ways, such as in the negative, or by changing the date being divined about. one oracle bone might be used for one session, or for many, and one session could be recorded on a number of bones.

The inscriptions are fairly formulaic, generally "(on) AB date (using the sexagenary cycle), divination was performed by person C regarding (topic)". Additional inscriptions include notations as to provenance of the bones or shells, numbering of the cracks made, annotations as to their auspiciousness, proclamations as to the conclusion of the divination session, and sometimes verifications of whether a future event indeed came to pass. The topics, and sometimes the answers, are then thought to have been brush-written on the oracle bones or accompanying documents, to later be carved in a workshop. A few of the oracle bones found still bear their brush-written records, without carving, while some have been found partially carved.

This kind of divination, involving the application of heat or fire, is called pyromancy; when applied to a scapula or plastron, it is also termed scapulomancy or plastromancy respectively. The divination questions or topics were often directed at ancestors, whom the ancient Chinese revered and worshipped, as well as natural powers and Dì (帝 Ti), the Shang high god. A wide variety of topics were asked, essentially anything of concern to the royal house of Shang, from illness, birth and death, to weather, warfare, agriculture, tribute and so on. one of the most common topics was whether performing rituals in a certain manner would be satisfactory.

Evidence of pyromancy and scapulomancy in ancient China extends back to the 4th millennium BC, with finds from Liáoníng Province (遼寧), but these were not inscribed. Evidence of scapulomancy with inscriptions may date back to the pre-Shang site of Èrlĭgāng (二里崗) in Zhèngzhoū (鄭州), Hénán, where burned scapula of oxen, sheep and pigs were found, and one bone fragment from a pre-Shang layer is inscribed with a graph (ㄓ) corresponding to Shang script. By the mid Zhèngzhoū period, the shells of turtles were in use as well.

However, significant quantities of inscribed oracle bones date only to the middle of the Shāng Dynasty, probably in the reign of Pángēng, around 1350 BC when the Shāng capital was moved to Yīn at modern Ānyáng. The vast majority date to around the 13th to 11th centuries BCE, or late Shāng. The oracle bones are not the earliest writing in China. A few Shāng bronzes with extremely short inscriptions predate them. However, the oracle bones are considered the earliest significant body of writing, due to the length of the inscriptions, the vast amount of vocabulary (very roughly 4000 graphs), and the sheer quantity of pieces found (now well over 100,000). There are also graphs found inscribed or brush-written on Neolithic period pottery shards, but whether or not these constitute writing or are ancestral to the Shāng writing system is currently a matter of great academic controversy.

After the Zhou conquest, the Shang practices of bronze casting, pyromancy and writing continued. Oracle bones found in the 1970s have been dated to the Zhōu dynasty, with some dating to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However, very few of those were inscribed. It is thought that other methods of divination supplanted pyromancy, such as numerological divination using milfoil (yarrow) in connection with the hexagrams of the Yijing (I Ching).

See also

  • Oracle script

References

  • Keightley, David N. (1978). Sources of Shang History: The Oracle-Bone Inscriptions of Bronze Age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Hardcover, ISBN 0-520-02969 (out of print); Paperback 2nd edition (1985) ISBN 0520054555.
  • Keightley, David N. (2000). The Ancestral Landscape: Time, Space, and Community in Late Shang China (ca. 1200 – 1045 B.C.). China Research Monograph 53,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 Berkeley. Paperback, ISBN 1-55729-070-9.
  • Qiú Xīguī (裘錫圭, 2000). Chinese Writing. Translation of 文字學概論 by Gilbert L. Mattos (Chairman, Dept. of Asian Studies, Seton Hall University) and Jerry Norman (Professor Emeritus, Asian Languages & Literature Dept., Univ. of Washington). Early China Special Monograph Series No. 4. Berkeley: The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China and the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Hardcover, ISBN 1-55729-071-7..
  • Xǔ Yǎhùi (許雅惠 Hsu Ya-huei). Ancient Chinese Writing, Oracle Bone Inscriptions from the Ruins of Yin, 2002. Illustrated guide to the Special Exhibition of Oracle Bone Inscriptions from the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Academia Sinica. English translation by Mark Caltonhill and Jeff Moser.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Govt. Publ. No. 1009100250.
  •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Yin_Xu

 

http://www.amazon.com/gp/community-content-search/results?ie=UTF8&flatten=1&search-alias=community-reviews&query=Oracle%20b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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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조와 서주왕조의 역사 | 중국사
전체공개 2008.05.08 11:50
 

제2장 상(商)․주(周)의 정치와 사회


1. 상왕조의 건립과 통치구조


1) 갑골문의 발견과 신정통치 : 前期 - 河南省 偃師縣 二里頭 偃師商城:(B.C 1700경)

                               中期 - 河南省 鄭州 二里崗 정주상성(B.C 1600경)

                               後期 - 河南省 安陽縣 小屯村(B.C 1300경) : 은허


* ?사기?「은본기」에는 시조: 契(帝嚳의 둘째 부인 簡狄이 玄鳥의 알 먹고 잉태(동북아시아지역 일대의 난생설화? 요순시대에 司徒가 되어 백성교화, 우의 치수에도 공헌, 商에 봉해짐)- 14대 대을(大乙 : 成湯)때 하의 桀을 몰아내고 건국(안휘성 박(亳)현 부근, 하남성 언사현?), 19대 盤庚때 은허(하남성 안양부근)로 천도.


* 잦은 천도의 의미 : 전기(契에서 湯王; 8차), 後期(5차) :유목민의 풍습? 종족간 충돌? 홍    수의 범람? 농경지 개간 필요?


* 갑골문의 발견 : 1899년 劉鶚이 발견 : “龍骨”, 卜辭를 통한 왕위세계 : ?사기?와 비교.

                1920년대 말부터 15차례 발굴, 상의 궁전유지, 왕묘추정 대묘 등 1000개 묘                  가 발굴, 대량의 갑골문자

  유악(劉鶚)의 ?찰운장구(鐵雲藏龜)? - 세상에 알려짐. 10여만 편이 출토.

  갑골문 : 한자의 形聲 원칙이 갖추어짐. 제사, 전쟁, 수렵, 재해 등에 관한 내용

  내용은 시기적으로 22대 武丁이후 30대 帝辛까지

  문자발전: 篆體-隸書-楷書-行書-草書로)(한자:象形․指事․會意․假借․形聲․轉注): 문자는 교역을 위한 목적보다는 씨족을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등장. 통치자는 문자체계를 통제함


2) 신정통치와 그 변화 : 上帝 - 최고의 신 : 원시적인 태양숭배와 관련 (태양+선조)


 * 상왕조의 통치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신정국가의 성격


 * 거대한 왕성과 왕묘, 순장자와 貞人집단의 존재

① 전기: 이리두 궁전유적(동서와 남북이 약 100미터 길이: 정치권력의 발생), 偃師商城(거대한 권력의 중심지 기능, 대형건축군, 성안에 작은 성이 배열됨. 상조 건립시기와 일치된다는 견해도. B.C 1700경은 成湯의 시기와 비슷. 


② 중기: 二里崗 鄭州商城 - 한 쪽 벽 길이 -1,700-1,870미터, 높이 10미터, 폭 30미터 - 매일 1만명 이상의 인력이 약 18년 정도의 노동력을 필요. 순장자(갑골문- 14,000명 이상 확인)


* 정인집단 : 왕의 신정적 성격 보좌, 부족연합적 성격 반영(정인집단→왕 一人으로 대표됨)

강력한 왕권의 형성 - 세속적 왕권의 강화 - 청동기와 문자의 장악

청동기 주조기술의 발달 - 상왕의 권위 상징(행정통치와 의식의 필요)


3) 씨족의 사회조직과 누층적인 邑制國家(혈연중심 씨족공동체) -고고학 성과

사회계층 - 지배층(상왕, 왕실귀족, 지방의 씨족장 : 총칭하여 百姓), 평민(농민 -공물과 요역의 부담), 노예(전쟁, 약탈의 경과 - 순장, 제사의 희생물로 구성


  小邑(屬邑)→族邑→大邑(王都) : 族邑(기본단위)의  연합으로 국가가 성립

* 호북성 황피현 반룡성(1974년 발견) 유적 - 남북 290미터, 동서 260미터. 이리강 규모의 약 9분의 1에 해당. 이후 大邑商, 天邑商의 경우 읍의 규모가 반경 약 20킬로미터.


읍의 외부는 封으로 표시. 읍의 외부에는 別邑이 있는 경우, 野(原野) -夷蠻戎狄의 거주지

그 외 方(商의 통치권 바깥에 존재 : 人方, 土方, 羌方 등


商代에 이미 봉건제의 시작 : 갑골문에 甸, 伯, 侯, 子, 南 등의 명칭. 朝覲과 공납의 의무

출정과 제사의 의무(제후)


4) 상의 사회와 경제


 ① 경제발달

당시의 중원지역: 적당한 기후, 王土사상과 族을 기반으로 한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 경작방식. 농기구의 개량(청동기보다 석기가 많음)보다는 집단적, 조직적 노동력의 동원, 동물 사역(개․소 등), 관개와 시비법․수수․고량․기장․피․맥․조․벼 등의 생산, 상업의 발달(子安貝․주석 등이 화폐로 사용), 일부 공납과 교역과 약탈의 성격이 모두 보임.

 ② 사회구조

지배층-평민, 노예(피지배 하층민)으로 구성. 商王(‘余一人’이라 자칭: 전제군주), 다음으로 百姓(왕실귀족이나 작위소유층을 총칭, 엄청난 부장품과 순장을 통한 지배력 행사), 小人 혹은 王人 등은 평민을 가리킴. 공물, 병역과 요역의 의무. 부장품이 보이지 않는 묘의 주인. 노예(전쟁포로, 가내노예의 성격, 순장이나 제물로도 사용. 소, 양 등과 함께. 이후 점차 순장자의 숫자가 감소됨. 노동력으로 인식했다는 증거. 

 ③ 종교

자연신, 조상신 가운데 최고의 신은 帝 혹은 上帝 : 商王이 죽으면 帝가 되어 우주와 인간의 질서에 간여. 이후 帝는 周의 天의 개념에 의해 주왕과 천의 관계가 상왕과는 달라짐. 이 시기에 있어서 神․天․帝 등과 관련된 고대 중국인의 종교적 관념의 변화는 제사․의례 등 현실적인 필요와 깊은 관련. 이후 정치적 추이에도 밀접하게 작용.  


2. 서주왕조의 성립과 봉건체제


1) 상․주의 교체와 주공의 동방경영


 * 중국사에 있어서 西周의 위치 : 특히 周公과 봉건제가 美化 - 春秋戰國은 봉건을 파괴함

 * 특히 信古와 疑古派의 대립

  西周의 이상화 : 시호제도, 봉건제도, 종법질서, 가부장제도의 확립, 渭水분지( 西周의 鎬                     京, 秦漢隋唐의 수도 장안부근)

* 西周(B.C 1122-770), 東周(B.C 770-221) : 春秋(B.C 770(노 은공 원년)-403(애공 14년)

                                         戰國(B.C 403-221), 그 이전 B.C453 說

* 周의 건국(?사기?「주본기」) : 시조 后稷(제곡의 왕비 姜原이 들에서 거인 발자국 밟은 후 잉태, 기(棄)를 낳음. 요순시대 農師로 공을 세워 섬서성 무공현에 분봉됨. 후일 농업신으로 추앙; 族姓은 姬)- 12대후 古公亶父때 섬서성 岐山- 季歷거쳐-文王때 豐으로 천도, 발전의 기틀, 은과 갈등 : 武王- 牧野의 싸움에서 승리(B.C1067?, B.C1046?)

* 殷周혁명 : 원시적 종교관에 기초한 신정적 성격의 商을 멸망 -봉건제도, 종법제도 실시 등 새로운 통치원리 부여. 주는 상과 끊임없이 갈등(거역과 복속을 반복함)

  武王의 鎬京으로 천도 : 은의 故土 감시(周初의 봉건제도 : 管叔, 蔡叔 등- 후일 三監의                             반란 : 주공의 진압(3년 만에)

* 周公 旦이 成王 보좌 : 宗周(鎬京)와 成周(洛陽)의 兩京제도 - 영토분할에 의한 동방경영?

* 西周초기의 주변민족 :

  황하하류와 산동지역 - 東夷

  淮水유역: 淮夷(齊, 魯건설)

  남방의 楚,  서북의 犬戎, 玁狁

* 宗周는 B.C771년 융적의 침입 - 낙양(成周)로 천도. 그 이전을 西周라 칭함


2) 天命사상과 봉건제․종법제의 채용

* 周族이 숭배한 최고의 신은 天 - 우주 창조, 천지와 자연의 법칙 주재, 인간사 규제의 절대신. 문왕에게 천명을 내림(?서경?) 상의 토벌이 하극상이 아닌 천명을 받아 天의 의미를 수행한 것. 주 왕조 창업의 정당성 강조


* 周代의 天 : 인간의 노력, 즉 德의 실천으로 천명이 좌우. 인간이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였음을 의미, 제한된 자유는 신의 응보


* 天命사상 : 새로운 정치사상과 세계관을 형성. 天命-天子-천하통치(華夷를 망라한 세계질서의 주재자. 통일제국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적 기반, 왕권의 절대성, 전제지배의 근거. 德治가 중심 - 文治우위의 통치이념 (문왕이 무왕보다 존중되는 배경) 관료제도에도 영향

→ 무력적 왕조교체의 합리화, 상왕조 유민의 제어, 주왕의 절대성 확보, 주왕실의 신성한 성격규정, 주 통치의 유일성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도덕의 실천, 예의 중시 등)

* 상의 마지막 주왕(紂王)을 악정의 상징으로 주의 문왕과 대비시킴. 오랜 전쟁에 대한 염증, 지배층의 부패, 인심의 이반 등.


* 周公 단(旦) : 무왕의 상 멸망 후, 紂의 아들 무경으로 하여금 상왕조의 유민통제, 상의 王畿지역에 무왕의 동생 管叔․蔡叔․霍叔 등 소위 ‘三監’의 설치, 무경 감시.

무왕의 아들 成王 즉위- 주공이 섭정, 보좌. 관숙, 채숙과의 갈등, 삼감의 반란, 주공의 동방정벌, 3년여에 걸친 원정의 성공, 왕위분쟁의 문제가 확대된 것이 아닌가?


* 봉건제와 종법제


봉건제 : 전체 제후국이 주초에는 약 130-180개 국, 동성제후 약56개국, 이성제후 약 70여개국. 제후에게는 조근과 공납의 의무가 요구됨. 魯․晉․宋․衛․燕․齊 등 주요 제후국.

주왕의 직할지 王畿를 제외하고 분봉한 땅을 國이라 함. 경제적 자립성을 지님. 都와 다시 봉건관계. 즉 國은 제후의 근거지, 都는 제후에게 분봉 받은 卿, 대부의 근거지. 전체적으로는 王土사상. 주공을 거쳐 康王․昭王․穆王을 거쳐 계속 시행됨.

* 수도: 宗周(종묘의 존재)와 함께 成周(낙읍;낙양)건설. 정치군사적 요충지에 동방지역지배의 거점. 당시 세계의 중앙이라고 인식. 주왕조가 당시의 세계지배를 완성함을 의미. 경제적으로도 중요, 조세인 곡물의 집적지 기능. 주 6군의 상비군 주둔.

* 주 왕실의 군사조직(?周禮?) : 伍(5명)→兩(5伍)→族(4兩)→師(5族)→旅(5師)→軍(5旅)로 구성, 1군의 병력 12,500명, 보병과 전차대로 구성, 주력은 농민중심의 보병.


봉건제를 매개로 광대한 지역에서의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함.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천명사상과 종법제도. 천명사상의 경우 주왕과 봉건제후의 관계를 보다 보편적인 규범의식으로 강화해 줌. 천명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개인적 덕능에 기초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


종법제 : 주왕을 정점으로 한 주왕조 전체가 한 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지배이념. 최고권력자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른 누층적 신분질서. 적장자상속.

종족(氏族)은 총본가인 大宗을 중심으로 단결, 그 支派인 小宗은 대종에 예속. 대종의 적장자를 제외한 別子는 모두 각각 다시 小宗을 구성.

* 결국 서주는 혈연조직에 바탕을 두고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연합체. 이러한 도시국가간의 연결관계를 봉건제․종법제를 통해 유지했으며, 그것을 이념적으로 지탱해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3) 서주의 발전과 관료제도 정비

* 成王․康王에 걸친 장기간의 평화시대-세력범위의 확대, 특히 昭王의 南征과 穆王의 西征주목할 필요. 주와 남방의 楚, 주와 서방의 犬戎의 대립. 주의 문화적 범위는 양자강 중하류 지역인 호남과 江西일대까지 영향. 최근의 발굴 성과로는 남쪽의 광동, 북의 요녕지방까지. 그러나 후일 특히 남방과의 교류가 불분명, 자연조건이나 농경조건이 서주의 진출에 방해요소가 됨.

* 관료제도 : ?주례?의 6官 : 天官(宮中諸官)․地官(地方行政,교육)․春官(제사)․夏官(軍政)․秋官(司法)․冬官(製作)로 구성. 그 이하에 270여 관직의 직제와 관원수, 직무내용 기재. 그러나 이 ?주례?는 전국시대 후반의 기록이라는 것이 통설. 청동기 명문의 자료에 보면, 서주의 중앙관직 기구를 경사료(卿事寮)라고 하며, 장관은 卿士, 그 아래 司土(토지)․司馬(군사)․司空(조세, 노역관리) 중심.


4) 서주시대의 경제


  * 정전제(井田制)의 실시문제: 이후 토지제도(阡陌制-限田制-屯田制-占課田制-均田制-莊園制 등)

* 맹자에 의해 이상화. 공전과 사적, 노동력 형태의 租.


씨족공동체하의 가능한 제도, 勞役地貸(助法), 농업생산기술의 발전, 퇴비상용, 제초를 위한 호미의 사용, 배수, 관개시설의 확충


* 정전제 실시상의 문제 : 휴경농법(당시 기술로는 필수)이 안 보임,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 토지의 지급과 환수규정 없음, 정기적인 재분배가 안 보임, 경지내의 수로인 구혁(溝洫) 조직이 안 보임, 농사철에 오두막(廬)거주 농한기 읍거주 변화가 안 보임 등

   

* 정전제의 이해 : 맹자의 주장대로 토지국유로 보기보다는 토지사유나 영구점유 이전의 촌락사회 내부의 토지분배 관행과 수취관계로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 (씨족장의 지휘아래 집단경작방식, 공납 노역의무 부담 등 확인.


* 정전제의 의의 : 위정자들이 그 시행을 믿고 이상시대로의 복귀를 희망할 수 있었다는 것. 이후 역대 국가에서는 소농민의 생활보호와 대토지 소유의 억제를 위하여 빈번하게 정전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추진.


* 제후의 농민에 대한 지배는 씨족장을 통해 읍 단위로 이루어짐. 이후 제후들은 산림개간 등을 통해 새로운 경지 확보. 농민과 제후의 직접적인 지배관계.

결국 씨족공동체는 서주 일대를 통해 해체되어 갔고, 이는 혈연을 기반으로 한 종법적 봉건제에 균열을 가져옴. 혈연관계 필연적으로 소원해짐. 토착세력과의 협력이 더욱 필요. 자립적 경향이 더욱 강해짐.


4) 서주왕조의 쇠락


* 토지의 규격화 : 경제적 기반의 약화

* 주 왕실과 夷狄 : 정벌과 항쟁. 

* 幽王과 褒姒 : 厲王의 폭정과 國人의 저항 - 共의 伯인 和에 의한 춘자 업무 대행 공화시대(B.C841-828)의 전개. 14년간의 주왕 공백시대. 宣王의 즉위와 일시적 中興, 幽王의 폭정과 후사문제로 인한 내분, 견융의 침입→平王(유왕의 태자 의구(宜臼)의 成周(낙읍)천도 (B.C 771) : 서주의 멸망과 동주시대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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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 주나라 역사

상왕조의 건립과 통치구조

2.1.1. 갑골문의 발견과 신정통치

기록에 의하면 상족의 조상은 설(契)인데, 요순시대에 백성을 교화하고 후에 우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워 상땅에 봉건되었기 때문에 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설에서 14대째에 탕왕(湯王)이 등장해 하왕조의 폭군 걸왕을 물리치고 상왕조를 개국했다. 이후 수차례 도읍을 옮겼다가 19개째인 반경(盤庚) 때에 은(殷)으로 옮겨 마지막 주왕(紂王)까지 273년간 유지되었다. 상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문헌에는 은이라는 칭호도 보이는데, 이것은 상왕조 멸망 후에 주족(周族)이 상의 주민들을 경멸해 사용하던 호칭이라고도 하고,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가 은이었던 데서 연유한다.

전통시대에 하, 상, 주의 삼대(三代)에 대해 아무도 그 실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고, 이상적인 시대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상고관에 대한 부정이 의고학파에 의해 시작되면서 상왕조도 그 실재를 의심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조 멸망 직전에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되고, 이곳이 상왕조에서 만들어진 복점의 기록 즉 복사(卜辭)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후 왕위세계도 전해지던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그 실재성에 대해 적극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갑골문은 1899년에 유악(劉악, 鐵雲)이 학질의 한방약으로 쓰이던 '용골(龍骨)'이라는 뼈를 발견한 데서 비롯되었다. 뼈에는 옛 문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고문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그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오래된 시기의 문자라는 것을 알아채고 그것의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여 1903년에 『철운장귀(鐵雲藏龜)』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갑골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갑골이란 주로 거북의 복갑(腹甲)이나 소의 어깨뼈(견갑골)를 말하며, 갑골문이란 갑골의 이면에 불에 달군 가는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국부적으로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의 상태로 점을 친 후에 그 주변에 점을 친 날짜와 점을 친 사람의 이름, 점친 내용 및 그 결과 등을 새겨넣은 글을 말한다.

이후 고고학자들은 갑골문이 주로 출토된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이 은허(殷墟)임을 밝혀내고, 이 지역을 발굴을 통해 다량의 갑골문을 획득하였다. 중일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꾸준히 발굴조사가 행해진 결과 지금까지 약 10만여 편에 달하는 갑골문이 출토되었으며, 궁전의 유적과 왕묘라고 추정되는 대묘를 포함한 1천여 개의 묘가 발굴되었다. 갑골문은 이미 육서(六書)에 의한 한자의 형성원칙이 갖추어져 있어 현대 중국어의 원형을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가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여행시의 재해 유무, 10일이나 매일의 재해 유무, 질병이나 임신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은 제사에 관한 것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출토된 갑골문은 대개 22대 무정(武丁) 이후 마지막 30대인 제신(帝辛, 紂王) 때까지의 것이고, 점복의 기록이라는 자료상의 한계는 있지만 이를 통해 상대 특히 후기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2.1.2. 신정통치와 그 변화

상대에는 상제(上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갑골문은 바로 상대인이 그 의향을 묻기 위해 행한 행위의 기록이었기 때문에 제사와 관련된 기록이 유난히 많으며, 그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선왕(先王)과 선비(先 )에 대한 제사였다. 상대인은 태양은 지중에 10개가 있어 그것이 매일 하나씩 교체하여 천상에 나타나 10일마다 한 번씩 돈다고 생각하였다. 10개의 태양에는 이름이 붙어져 있는데, 일갑(日甲)부터 일계(日癸)까지 10간(十干)이 이것이다. 결국 상대인의 정신구조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이처럼 원시적인 태양숭배였다. 이러한 왕조제사의 원형은 원시적인 태양관과 씨족 내부의 선조숭배였고, 이 양자가 결합하여 왕조의 제사의 중핵을 이루었고, 따라서 상은 신정국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거대한 규모의 왕성·왕묘와 다수의 순장자 및 정인(貞人)이라는 존재이다. 상문화는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전기(B.C. 1700년경), 중기(B.C. 1600년경), 후기(B.C. 1300년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갑골문을 포함한 은허유적은 후기의 것이다. 전기의 대표적 유적은 이리두에서 발견되었는데 용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리두 후기에 동서와 남북이 각각 약 100m에 달하는 대궁전의 유적과 상대의 성터(偃師商城)가 발견된 바 있다. 중기인 이리강(二里崗)시기에는 한쪽 벽의 길이가 1,700-1,870m, 높이 10m, 폭 30m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이 발견되었는데(鄭州商城), 축성에 필요한 인원과 기간을 추산해보면 매일 1만명 이상의 인원이 약 18년 정도 걸렸을 정도이다. 이것은 엄청난 정치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결국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의미하며, 초기의 왕과는 달리 후기가 되면 다른 씨족장급들과는 현격하게 구별되는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리강기 후기부터 순장자가 발견되는데, 안양기에는 300명 이상의 순장자가 발견된 곳도 있다. 더욱이 노예를 제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많았는데(伐祭), 갑골문에는 무려 2,500명 이상의 희생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발견된 갑골문에서 확인된 희생은 모두 14,000명 이상에 달한다.

초기 지배씨족에서 교대로 선출된 상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왕은 당시 점복에서 길흉을 판단할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존재였다. 갑골을 가지고 점을 치는 사람은 정인이라는 전문직이지만 그 의미의 판단은 왕 혼자였고, 왕은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유일한 매개자였다. 정인은 명칭에 지명이나 씨족 혹은 부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왕이 지배하는 소국가나 부족으로부터 대표자 겸 봉사자로 파견된 자로 보인다. 갑골문에서 확인되는 정인은 120명 정도인데이들은 정인기구를 구성해 상왕의 측근으로서 우대를 받았으며, 왕이 바뀌면 정인의 명단 또한 바뀌어 왕의 신정적인 성격을 보좌하는 한편 상의 신정통치가 지닌 부족연합적 성격을 반영한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인 성격은 약화되고 전제적인 세속왕권을 지닌 상왕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된다. 이는 왕위의 계승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초기에 형세상속이었던 것이 말기 4대에는 부자상속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보인다. 물론 형제라고는 해도 육친관계보다는 광범하다. 일족이던가 아니면 일족이 아니어도 의제적(擬制的)인 혈연관계를 통해 충분히 계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부자, 형제관계는 보다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인기구는 상대를 통해 계속 축소·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상 말기에는 왕권에 예속되어 버린다. 이것은 상대의 신정적인 성격의 왕권이 세속적 왕권이 강화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고 결국 왕권에 흡수되었음을 뜻한다. 강한 왕권과 그것이 지닌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자와 청동기의 장악 역시 중요하다. 상대는 정신문화의 신정적인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물질문명은 오히려 후대인 주대보다 발달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청동기인데, 이리두문화 후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청동기의 주조는 중국의 독자적인 자생적인 발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주조기술이나 정교함에서 현재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이리강기에는 높이 1m에 달하는 대형 방정(方鼎)이 주조되기도 하였다. 이 청동기는 바로 권위의 상징이었고, 상왕의 권위를 대표한다. 문자는 이미 갑골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왕권이 강화되면서 행정통치와 의식에서의 필요에 따라 크게 증가하였다. 이리강기에 겨우 몇 개에 지나지 않던 갑골문이 안양기에 대규모로 출토된 것은 바로 이를 뒷바침하는 것이다.


2.1.3. 씨족 사회조직과 누층적 읍제국가

상대의 계층은 대체로 지배층, 평민, 노예로 구성되었다. 지배층은 상왕을 중심으로 왕실귀족이나 지방의 씨족장들을 포함한다. 상왕은 정치적인 지배자이자 종교적인 수장이었다. 상왕과 더불어 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배층으로서 이들을 총칭하여 백성(百姓)이라 불렀다. 이들의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순장자로 추정컨대 막강한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평민은 대개 농민으로서 국가에 대해 공물과 요역의 의무를 졌다. 노예는 전쟁이나 약탈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순장이나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되었다.

상의 지배씨족은 이념적으로 10개로 배열된 내혼조직을 갖고 있어서 각 군도 갑, 을, 병, 정…계의 태양명으로 불려졌다. 각 군이 태양의 손자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나 왕비는 불규칙하지만 교대로 이 갑군, 을군, 병군… 등에서 선출되었다.

이를 보면 상은 혈족집단을 핵으로 하는 읍(邑)을 기반으로 한 소국가의 연합적 성격으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읍을 서아시아나 그리스·로마와의 유사성 때문에 도시국가라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읍제국가라 부른다. 대읍-족읍-속읍(소읍)이 누층적으로 맺어진 것이 상의 기본적인 국가조직이었다. 국가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족읍이었고 이것은 신석기시대의 취락에서 발달한 것이라 보인다. 이런 족 사이의 연합·협력 관계가 점차 통합조직을 형성하고 국가가 형성되었고, 지배씨족과 그 거주지로서의 대읍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상의 초기에는 대읍이 족읍을 지배했다기 보다는 족읍의 연합에 의한 국가였다고 보는 편이 신정국가적인 성격으로 보아도 자연스럽다. 족읍의 크기는 1974년에 발견된 호북성 황피현의 반룡성(盤龍城)에서 추정할 수 있는데, 남북 290m, 동서 260m의 크기이다. 규모로 볼 때 족읍의 전형적인 크기 중의 하나이며 시기적으로는 상 중기 이리강기의 것이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정주성과 비교할 때 면적으로 약 1/9 크기였다.

읍은 기본적으로 집락(集落)으로 구성되지만, 집락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읍이란 단순한 거주지만이 아니라 경작지나 산림지역을 포함한 지역적인 영역을 의미하고 있었고, 따라서 읍이란 주민과 주민의 생활기반인 토지 전체를 일컫는 용어였다. 갑골문에서는 상의 수도를 '읍'이라 불렀다. '대읍상(大邑商)', '천읍상(天邑商)'이 그것이다. 이 읍의 규모는 반경이 약 20㎞에 달한다. 또한 이후 서주의 성주(成周)인 낙읍(洛邑)도 대략 한 변이 28㎞ 정도의 크기이기 정방형이기 때문에 상읍(商邑)의 크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성벽이란 읍의 내부를 구획하는 것이고 읍 전체를 둘러싼 것은 아니다. 성벽은 대략 한변 2㎞ 정도가 왕도로서 보통이다.

읍의 바깥은 바로 '봉(封)'으로 표시한다. 봉이란 흙쌓기인데,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면서 어떤 경우는 하천에 의해, 어떤 경우는 구릉에 의해, 어떤 경우는 도로에 의해 경계가 지워지면서 요소요소에 흙쌓기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읍의 경계는 봉(封)에 의해 구분되며, '봉건(封建)'이란 바로 이러한 경계를 세우는 작업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읍의 외측에는 별읍(別邑)이 있는 경우도 있고, 야(野)가 있는 경우도 있다. 야란 원야(原野)를 의미하는데, 이른바 이만융적(夷蠻戎狄)에 속하는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생각되며 읍인과 야인의 차이는 씨족제에 있었다.

당시에는 도시국가로서의 읍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갑골문에는 방(方)이라는 존재가 자주 등장하는데, 방은 상왕실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어느 정도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면서 상왕의 통치권밖에 있는 소국가를 가리킨다. 이들은 반드시 단일한 세력만은 아니며 몇 개의 부족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보아도 좋다. 대표적인 방은 인방(人方), 토방(土方), 강방(羌方) 등이 존재했으며, 주족(周族)도 초기에는 주방(周方)이라 불렸다. 이후 주후(周侯)의 기록으로 보아 후기에 상왕조의 정치질서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봉건제는 주왕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상대에도 이미 봉건제가 시행되어 갑골문에 '전(甸)', '백(伯)', '후(侯)', '자(子)', '남(男)' 등의 명칭이 확인되며, 제후는 상왕에게 조근(朝勤)과 공납(貢納)의 의무를 졌고, 왕의 명에 따라 출정(出征)과 제사에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각종 행정직을 담당한 관직명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주의 관료제에 뒤지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의 통치구조 역시 읍제국가에 기반한 봉건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잦은 천도와 초·중기에 우세했던 형제상속제를 본다면 왕권의 안정이 주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상제를 받드는 신정적인 성격이 강하였다는 점에 차이는 보인다.

모든 토지는 왕의 토지로 인식되었고(王土思想), 족(族)을 기반으로 한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 경작방식이 행해졌다. 경작자는 평민이었는데, 농업생산은 농기구의 개량보다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노동력의 동원, 개나 소 등 동물의 사역, 관개와 시비법 등 농업기술면에서의 진보에 의해 크게 발전되었다. 주된 생산물은 수수, 고량, 기장, 피, 맥, 조, 벼 등이었다.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대내외적인 상업이 발달하였는데, 그 예를 동방과 남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자안패(子安貝)와 주석 등이 화폐로 기능하였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공납이나 약탈의 결과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교역의 산물이었다.


2.2. 서주의 '봉건'체제

2.2.1.상주의 혁명과 주공의 동방경영

주족은 농업신인 후직(后稷)의 자손이라고 전해지는데, 위수(渭水) 유역에서 흥기하였다. 이곳은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감숙 방면에서 서방의 문화가 중국으로 통로에 위치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2대를 지난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기산(岐山)의 기슭, 이른바 주원(周原)으로 이주하여 융적(戎狄)의 풍속을 버리고 성곽과 궁실을 축조하여 읍락(邑落)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것이 맞다면 상의 무정(武丁) 시기부터 1-2세기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의하면 이미 무정시기부터 주후(周侯)롤 토벌하는 일에 대해 점을 치고 있어 고공단보 이전에 주는 상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공단보의 막내아들 계력(季歷)이 뒤를 이었는데, 당시의 상왕 문정(文丁)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계력이 살해되자 창(昌)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주왕조의 기초를 쌓은 서백(西伯)으로 후일의 문왕(文王)이다. 서백은 50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 기산의 기슭에서 풍(豊)으로 수도를 옮겼다. 풍은 관중(關中) 평야의 요충지로 이후 상을 무너뜨리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서백이 죽은 후 무왕(武王)이 즉위해 12년만에 서방의 제후를 규합해 상을 정복하였다. 이를 은주혁명(殷周革命)이라고 하는데, 이에 의해 6백년 이상 지속되었던 상왕조가 멸망했다. 시기적으로는 11세기 전반기의 일이다. 은주혁명의 의의는 단순히 왕조가 교대되었다는 것보다, 상왕조가 장기간에 걸친 읍제국가의 틀 속에서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세습화가 진행되면서 전제화가 이루어졌지만, 그 통치의 기반은 여전히 원시적인 종교관에 기초한 신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에 있고, 따라서 이후 등장하는 서주는 새로운 통치원리의 내용을 부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 은주혁명의 의의가 있다.

무왕은 상을 정복하고 주로 돌아와, 일족과 공신에 대한 봉건에 착수했고 수도를 풍에서 호(鎬)로 옮겼다. 무왕이 천도한 수도를 당시 종주(宗周)라 하였다. 무왕은 상을 정복한 지 2년만에 병사하고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攝政)이 되었다. 일설에는 주공 단이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상의 옛 땅에 봉해진 무왕의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상조의 후예인 녹보(祿父)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감(三監)의 난이라 하는데, 주공이 이를 진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일단 국가통치를 안정시키자 주공은 현재의 낙양(洛陽)에 상의 유민을 동원해 낙읍(洛)邑을 건설하고, 이를 동방통치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음과 동시에 대대적인 봉건을 실시하였다. 이 낙읍을 성주(成周)라 하는데, 성왕은 한때 수도를 종주에서 성주로 옮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왕은 종주로 돌아갔고, 주공이 성주에 남아 동방을 다스렸다. 아마 주의 영토는 실제로는 분할통치되었던 듯하다. 종주는 B.C. 771년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고 주는 성주로 수도를 옮겼다. 이 때까지를 서주라 부른다.


2.2.2. 천명사상과 봉건제·종법제의 채용

주족이 숭배한 최고의 신은 천(天)이었다. 천은 우주를 창조하고 천지와 자연의 법칙을 주재함과 동시에 인간사를 규제하난 절대신이었다. 『서경(書經』에 따르면 이 천이 주의 통치자였던 문왕 창에게 포악한 상을 멸망시키고 주를 건국하라는 천명(天命)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또한 주초에 상 유민의 반란을 진압한 주공으 원래 천명이 하왕조에 있었지만 걸왕(桀王)이 실정(失政)하여 상의 시조인 탕왕(湯王)에게 전수되었고, 다시 상왕조의 주왕(紂王)이 실정하자 주왕조의 문왕에게 천명이 내렸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주의 상 정벌은 제후가 왕을 무력으로 공격한 하극상이 아니라 천의 의지를 수행한 것이라고 강조하여 주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상대의 상제는 인간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존재이고, 점복을 통해 그 의지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대의 천은 인간의 노력 즉 덕(德)의 실천에 의해 천명이 좌우된다고 하는 관념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다만 그 자유에 일정한 제약을 둔 것이 신의 응보라는 논리이다.

천명사상으로 주의 무력정벌을 합리화시킨 주의 통치이념은 주왕실에 새로운 정치사상과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우선 주왕은 천명을 받은 군주이기 때문에 천자(天子)이고, 따라서 천자는 천을 대신해 천하를 지배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천자에게는 화이(華夷)를 망라한 세계질서의 주재자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념은 주왕조에 위엄과 권위를 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들에게도 공통되어 나타난다. 다만 화이를 불문하고 천자는 하나일 수밖에 없고 모든 정치질서는 천자가 주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후 나타나는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또한 왕권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 전제적인 지배가 가능하게 되는 기반도 제공하였다. 또한 천명의 이동은 통치자의 덕치(德治)에 절대적으로 좌우된다는 논리에서 자연적으로 문치(文治) 우위의 통치이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천명을 주고 받을 때는 비록 불가피하게 무력이 동원된다고 해도 천자로서의 통치는 무력이 아닌 문치여야 한다는 이념이 그것인데, 이 때문에 주왕조의 창업자로 실제 상을 무력으로 멸망시킨 무왕보다 천명을 받았다고 하는 문왕을 거론하게 된 것이다. 주의 천명사상은 또한 문치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서 중국 관료제도 발달에 기여하였다. 상대의 관직이 주로 제사와 군정과 관련된 것이 많은 데 반해 서주의 관직은 매우 다양하고 전문직이었으며 속관을 두어 업무를 처리하였다.

주왕조는 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광대한 영토와 선진적인 문화를 자랑하던 상왕조 계열의 제후국의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상대의 봉건제를 채용하는 한편 여기에 주왕실을 중심으로 한 종법제를 결합시켜 왕실과 제후와의 관계를 정치적인 면 이상으로 발전시켰다. 주초에는 공신과 왕실의 자제와 일족을 각지에 분봉하여 상의 유민과 상왕조에서 이어진 제후국 특히 동방의 제후들을 견제하였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상조 일족의 읍을 해체하여 종주로 데려가기도 하였다. 분봉된 제후들은 주왕실의 일족이 약 56개 국, 이성(異姓)제후가 약 70여개 국으로 추측되며,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 국이었다고 추산된다. 이들 제후의 통제책으로서 상대의 봉건제에서 사용되던 조근과 공압의 의무가 요구되었다.

당시 주왕의 직할지인 왕기(王畿)를 제외하고 분봉한 땅을 국(國)이라 불렀다. 국은 나름대로 경제적 자립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도(都)와 다시 봉건관계를 맺고 있다. 아마도 국은 제후의 근거지였을 것이고 도는 제후에게 분봉을 받은 경(卿)·대부(大夫)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도의 지배층인 경·대부가 제후에 대해 갖는 부담은 제후가 주왕에 대해 갖는 부감과 비슷했을 것이다. 봉건의 형태는 간단히 말해 주왕실에서 그 일족이나 친족을 파견해 새로운 읍을 건설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주의 지배층이 이제까지 상조와 연합하고 있던 읍제국가 위에 새로운 지배자로 밀고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여러 씨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당연 종주의 권위로 봉국에 들어온 지배층과 여러 문제가 야기되었다.

봉건제를 매개로 광대한 지역에서의 정치적 통합은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통합을 보다 효과적으로 유지시켜 준 것은 종법제(宗法制)와 천명사상이었다. 종법은 대대로 주왕은 적장자가 부친의 뒤를 이어 대종(大宗)이 되고, 적장자의 동생들은 소종(小宗) 된다. 제후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종이 제후가 되고 그 동생을 소종으로 삼는 것이다. 즉 주왕을 정점으로 한 주왕조 전체가 한 계통의 혈연조직에 포섭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국가지배이념이었다. 결국 종법제란 최고 권력자와의 혈연적인 친소에 따른 누층적인 신분질서가 그 특징이며 적장자상속이 원칙이었다. 이는 공동의 혈연의식(의제적 관계까지를 포함)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관계를 보다 보편적인 규범의식으로 강화해 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천명이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과 덕을 겸비한 인물에게 부여되고, 천명을 받은 인물이 천명에 따라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현하는 과정에 참여한 협력자를 봉건하여 제후로 삼는다는 점에서 천명을 매개로 성립된 정치질서는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개인적인 덕능(德能)에 기초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결국 서주는 혈연조직에 바탕을 두고 종묘와 사직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연합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도시국가간의 연결관계를 봉건제·종법제를 통해 유지했으며, 그것을 이념적으로 지탱해 준 것이 천명사상이었다.


2.2.3. 정전제(井田制)의 이상화

서주의 토지제도로서 실시되었다고 하는 정전제는 아직도 그 실시 여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맹자(孟子)가 전하는 정전제는 900무(畝)의 정사각형의 전토를 정(井) 자형으로 만들어진 두둑으로 9등분하고, 사면의 800무를 8가에게 100무씩 사전(私田)으로 경작하게 하여 생활의 근거를 제공한다. 중앙에 있는 나머지 100무는 공전(公田)으로 하여 8가의 공동경작에 의해 그 수확물을 조세로 납부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이며(王土), 사전은 다면 대여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댓가로 농민은 공전을 경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형태로 조(租)를 거두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맹자』에 나오는 정전제의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내용만으로는 실제 시행되었던 토지제도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의 농업기술상 휴경농법이 필수적이었을 터인데, 이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는 점,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한 토지의 수수(授受)와 환수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 토지의 정기적인 재분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경지내의 수로인 구혁(溝 )조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농사철에 여(廬)에 거주하다가 동한기에 읍에 거주하는 계절에 따른 거주지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점 등에서 제도적인 미비함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서주시대에는 정전제가 있었지만 맹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토지국유의 제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토지의 사유나 영구점유가 발생하기 이전에 촌락사회의 토지분급과 수취관계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즉 서주 초기의 농민의 씨족공동체적 생활을 하면서 씨족장의 지휘 아래 집단경작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씨족장을 통해 전토에 대한 공납과 노역의 의무를 집단적으로 지고 있었던 점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다만 맹자가 전하는 정전제 실제 시행되었는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이후의 위정자들은 실제 그것이 시행되었고, 따라서 정전제를 시행함으로써 이상시대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역대 국가에서는 소농민의 생활보호와 대토지소유의 억제를 위해 번번히 정전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추진하였다.

제후의 농민에 대한 지배는 개개의 농민이 아니라 씨족장을 통해 읍을 단위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제후들은 토지를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산림을 이용하거나 개간하여 새로운 경지를 확보하고 다른 영지의 농민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읍 단위를 통한 농민지배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농민들은 제후에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강한 비호를 요구하게 되었다. 서주 중기 이후 제후들 사이에 벌어진 토지의 쟁탈이나 유력제후에 의한 소제후의 병합은 주왕실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음과 동시에 춘추 이후 제후들의 자립성향을 잘 보여준다.

결국 씨족공동체는 서주 일대를 통해 해체되어 갔고 이것은 혈연은 기반으로 한 종법적 봉건제에 균열을 가져왔다. 이러한 제도는 세대가 내려감에 따라 주왕의 동생들을 제후로 분봉해줄 봉지가 부족하게 되었고, 혈연관계는 더욱 희박하게 되었다. 더욱이 제후는 봉국내에서 토착세력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주왕실의 쇠퇴를 가져왔고 결국 서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주왕실과 이적의 항쟁 역시 이러한 경향을 촉진시켰다. 주의 정치지배가 미치는 지역은 기산과 종주·성주를 잇는 지역이었고, 주왕조는 점과 선으로 이어진 국가구조에 불과하였다. 주의 봉국인 읍은 농업을 기반으로 성립하였지만, 농경지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 농경지 주변에는 융족(戎族)이나 이족(夷族)이라 불리는 이적(夷狄)이 아주 가까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왕실의 정치적 질서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이들의 위협은 곧 봉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주왕실의 무력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제후들은 토착세력과의 결합을 더욱 강화하면서 자립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또 서주 후기가 되면 씨족제적 규제가 현저히 이완되고, 제후나 경·대부·사 이외의 계층이 토지를 집적하면서 서주의 통치질서 밖에서 신흥 토지소유계층으로 성장한다. 이 역시 종법적 봉건제를 근본부터 흔드는 시대적 추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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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역사

경제적 기반이 점차 약화되어가던 서주말, 여왕(여王)은 왕실의 약체화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정책과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강한 저항을 받았는데, 특히 국인(國人)들은 여왕을 내쫓아 여왕은 체(산서성 곽현)로 망명하고, 이후 13년간 왕이 없는 공위(空位)시대가 출현하였다. 여왕이 망명한 해는 B.C. 841년인데, 이를 공화(共和) 원년이라 한다. 이 해는 중국 역사상 연대가 분명한 최초의 해이다. 공화라는 의미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2인이 상담하여 정치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실은 공백(共伯) 화(和)가 천자의 업무를 대신한 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공백은 여왕이 죽은 후 선왕이 즉위하자 봉국으로 돌아갔다. 선왕 때에 일시 주왕실은 권위를 회복하였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선왕의 뒤를 이어 유왕(幽王)이 등장하였는데, 그는 애첩인 포사(褒 )를 후로 삼고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정후(正后)의 오빠 신후(申侯)가 견융족(犬戎族))과 연합해 주를 공격하였다. 유왕의 태자인 의구(宜臼)가 평왕(平王)이 되었지만 견융의 난을 피해 동도인 낙읍으로 천도하여 서주는 멸망하였다. B.C. 770년 평왕이 천도할 때까지를 서주라 하며, 그 이후 진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를 동주라 하는데, 이를 다시 2분하여 전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 후반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한다. 춘추와 전국은 모두 이 시대를 대상으로 한 역사서에서 그 명칭을 땄다. 춘추는 공자가 편찬했다고 하는 노나라의 연대기이고 전국책(戰國策)은 유세지사(遊說之士)의 담론을 모은 서적이다. 춘추는 B.C. 722년부터 481년까지 밖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춘추시대는 그보다 약 반 세기 정도 소급하여 주의 동천부터 잡는 것이 보통이고, 전국시대의 개시는 한(韓)·위(魏)·조(趙)가 진(晉)을 3분한 B.C. 453년 혹은 주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부터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주 중기 이래 봉건제후에 대한 서주왕실의 통제력은 저하되어 있었다. 춘추시대가 되면서 이들 제후국은 독립하여 서로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결국 춘추시대란 약 20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이 점차 몇 개의 국가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읍제국가에서 영역국가로 이동하는 과정이고도 하였다. 주왕실은 동천하여 일단 명맥을 유지했지만 낙읍을 중심으로 한 소국에 불과하였다. 다만 처음에는 종주로서의 권위를 제후국이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춘추시대에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나라는 정(鄭)이었다. 낙읍 부근의 정은 주왕실과 가장 가까운 관계였지만, 점차 주왕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주왕실은 이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권위는 극도로 실추되었다. 그러자 춘추 중기부터 방대한 영토와 인구 및 강대한 무력을 지닌 강국이 등장해 쇠미해진 주왕실 대신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을 패자(覇者)라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5패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 5패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논이 분분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남방의 대국 초(楚)가 강국으로 대두했다. 이 남방 초의 위협에 대항해 중원의 제후를 규합해 대항한 것이 동방의 제(齊)였다. B.C. 7세기 경에 시행된 회맹(會盟)은 제를 중심으로 한 경우가 많았고, 이에 참가한 나라도 동방에 치우쳐 있었다. B.C. 658년에 초가 마침내 중원의 강국이었던 정을 침입해 춘추시대의 남북대립의 장을 열었다.

제의 환공(桓公)은 이에 대해 제후를 소집해 초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B.C. 651년 규구(揆丘)에서 회맹하여 첫번째 패자가 되었다. 제 환공이 죽은 후 패자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은 진(晉) 문공(文公)이었다. 그는 제후를 이끌고 북진해온 초에 승리를 거둔 후(B.C. 634) 돌아오는 길에 천토(踐土)에서 회맹하였다. 그러나 진 문공의 사후에 초가 패자가 되었다. 초는 중원의 제후국과 달리 본래 주왕실의 교화 밖에 있었고, 이민족 중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중원의 문화와는 다른 계통이며 아마 신석기시대 양자강유역의 문화계통을 이었을 것이다. 초는 장왕(莊王) 때에 중원 제후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패자들과는 달리 제후를 모아 회맹한다거나 주왕실을 받느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초가 패자가 됨으로써 남북항쟁이라는 춘추시대의 세력판도에서 양자강 유역의 국가들이 강대해졌다. 따라서 중원까지 진출한 초를 위협한 것은 중원의 세력이 아니라 초의 배후에서 세력을 구축한 오(吳)와 월(越)이었다. 오는 수몽(壽夢) 때부터 강력해져 진(晉)과 연합해 초를 공격하였다. 이후 합려(闔閭) 때에는 초의 수도인 영( )을 함락시켰고, 초는 이 때문에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오 역시 오의 남방에서 발흥한 월의 도전을 받았다. 월의 대두에는 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초가 적극 후원하였다. 이로써 오와 월의 사투가 벌어졌다. 오왕 부차(夫差)는 월에 승리한 후 중원으로 진출해 맹주의 지위를 다투었지만, 결국 월왕 구천(勾踐)의 공격을 받아 오는 멸망했다. 구천도 중원을 공격해 패자가 되었지만 이후 초가 다시 양자강 유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이후는 양자강 유역의 초와 중원의 중심인 진 사이의 각축을 기본으로 전쟁이 벌어졌고 여기에 산동의 제와 서주의 옛 땅에 자리잡은 진(秦)이 강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3.2. 춘추 중기 이후의 사회변동

대략 B.C. 600년경을 전후해 열국간의 겸병전이 치열해지고 그 결과 약소국이 대거 멸망하였다. 이는 주왕실이 권위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패자를 중심으로 회맹질서가 그를 대신하였고, 적어도 그 안에서 약소국은 굴욕을 받기는 했지만 국가로서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추 중기를 전후하여 진(晉)·진(秦)·초(楚) 등의 강대국은 종래의 회맹질서에서 탈피하여 소국을 멸망시킨 후 현(縣)을 설치해 직접 지배하는 새로운 지배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춘추 중기 이후 각국에서는 기존의 권력구조가 재편되면서 공실(公室)은 몰락하고 그 대신 유력한 세경가(世卿家)가 국권을 찬탈하게 되었다. 주왕실의 권위가 약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실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일부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국인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새로이 등장한 유력 세경가들은 전쟁의 격화에 따른 국가적 위기에서 난국을 타개하고, 그것을 계기로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공실을 누르고 권력의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를 위해 자신들의 채읍을 증대시키는 한편, 전제(田制)와 세제(稅制), 병제(兵制)를 개혁함으로써 세력을 강화시켰다. 이들 제도의 개혁은 대개 군역의 부담이 없던 농민에게 새로이 군역이나 군부(軍賦)를 부담지우거나 또는 수확물을 효율적으로 수취함으로써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확대시키는 방향이었던 듯하다. 농민을 병사로 편성함으로써 이들을 사병화하여 강력한 무력기반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들을 중앙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지휘권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농민에 대한 징병의 확대는 상·주의 읍제국가하에서 전사의 역할을 독점했던 국인의 특권을 위태롭게 하였고, 전통적인 상하관계를 허무는 계기를 만들었다. 세경가는 국인층의 불만을 강화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시혜(施惠)를 통해 구제하거나 핵심적인 가부장적 무력집단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주로 사 계층인 국인과 세경가 사이에는 혈연관계가 아닌 은혜와 그에 대한 충성이라는 새로운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계를 임협적(任俠的) 관계라고 부른다. 이후 세경가의 세력확대 과정에서 유력세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이들에 의한 권력 충돌이 벌어졌다. 진(秦)과 초와 같이 문화적 혹은 지역적 특수성 때문인지 귀족의 성장이 군주권을 위협할 만한 정도가 아니어서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단일혈통의 군주권이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고, 세경가가 국권을 분할하거나 찬탈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진(晉)은 6경이 투쟁하다가 결국 한·위·조의 유력 세족이 분할해 새로운 국가를 성립시켰고, 제는 전씨(田氏)에 의해 왕실의 혈통이 바뀌었다. 극심한 세족의 투쟁으로 인해 춘추시대의 유력세족은 일부 찬탈자를 제외하고 모두 몰락하였다. 가령 전국시대 각국의 상직(相職)을 맡은 인물 중 춘추시대 세족 출신이 없다는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세족의 대거 몰악에 따른 사회적 공백을 메운 것은 사(士)였다. 전국시대를 사인(士人)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사인은 정치의 각 부문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춘추 중기를 분수령으로 씨족제 질서도 붕괴되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춘추 중기를 전후하여 강대국은 소국을 멸망시킨 후 현(縣)을 설치해 직접 지배하는 새로운 지배방식으로 전환하였다. 현은 원래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확고한 지배가 요구되었다. 본래 현(懸)의 의미는 걸려 있다는 뜻으로, 현은 중앙의 직할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의 출현은 분권적인 봉건체제에서 전국 이후 확립된 군주에 의한 직접 지배방식으로서의 군현제(郡縣制)의 선구라 할 수 있다. 물론 춘추시대의 현의 설치가 권력의 집중도나 지배력의 관철도 면에서 볼 때 전국 이후의 현의 설치와 같을 수는 없다. 다만 현이 설치됨으로 인해 정복지 내부의 조상신을 매개로 한 씨족적 질서는 용이하지는 않았겠지만 철저히 파괴시키려 했을 것이다.

씨족제 질서가 파괴된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철제 농기구의 보급에 따른 생산력의 급격한 상승을 들 수 있다. B.C. 7-6세기경 제철업의 발전에 따른 철기의 출현으로 철제농기구와 우경(牛耕)이 보급되면서 이전에는 엄두를 낼 수 없던 심경(深耕)과 농경과정에서의 효율성으로 인해 단위면적 당 생산량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와 함께 노동생산성이 제고되어 광대한 황무지와 원야가 개간되어 공동체적인 토지소유의 제한을 받지 않는 농경지가 출현하였다. 이와 함께 토지소유의 불균형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낮은 생산수준 때문에 불가피하게 유지되던 공동경작이 사라지고 가족을 단위로 한 소농경영이 등장하였다. 다만 이러한 철기는 대개 국가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어서 전국 중·후기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보급의 단계에 접어 든다.


3.3. 전국 국가의 형성과 각축

3.3.1. 전국 국가의 형성과 그 과제

전국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타난 국가형태상의 변화는 읍제국가의 붕괴와 영토국가의 출현이다. 즉 종래 분권적 봉건질서 하에서 읍을 단위로 유지되던 중층적·거점적 지배가 군현제하의 영역에 의한 직접지배로 변화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현제적 지배의 관철이 순탄하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국시대 들어오면 대다수의 약소국은 이미 겸병을 통해 정리되고 소수의 강대국만 남게 되었다. 이들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하는데, 진, 초, 제, 한, 위, 조, 연(燕)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제후국간의 전쟁은 오히려 더욱 격화되었다. 춘추시대에 비해 전쟁의 발발 건수는 반 정도로 줄었지만 전쟁의 규모는 확대되었고, 전쟁기간도 장기화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부터는 전쟁에서의 전술의 중심이 차전(車戰)에서 보병전으로 전환되었다. B.C. 540년 최초로 보병이 사용된 이래 꾸준히 그 중요성이 확대된 결과였다. 차전일 경우는 국인층 이상만이 전쟁이 동원되고, 일단 교전에 들어가 한 편의 차진용이 무너지면 전쟁의 성패는 그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고작 하루나 이틀이면 끝났다. 또한 요새화된 성곽을 공격하는 데 차전은 효과적이지 못해, 공성전(攻城戰)은 아주 드물었다. 보병부대는 원래 강과 호수가 많았던 오·월에서 비롯되어 중원의 제국으로 전파되었는데, 전국시대에는 대규모의 보병이 주력이 되었다. 그 요인으로는 전쟁의 조건이 변화하여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된 데 있었다. 즉 전쟁규모의 확대에 의해 늪지와 산지와 같은 지형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의 장기화에 따라 악천후에서도 전투는 벌어졌다. 이런 조건에서는 기동성을 갖춘 보병이 효율적이었다. 보병보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은 기습공격이나 측면공격에 동원되었지만, 전면공격이나 포위공격망 돌파, 성의 함락 등은 보병이 담당하였다. 이로써 전국 중기 이후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수년간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한 병력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춘추 전기 강대국의 병력은 대략 3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춘추 말 10만 정도의 병력으로 증대되었고, 전국시대 7웅의 군사력은 약소국이었던 한과 위의 병력이 30만, 진과 초는 약 100만에 달했다. 이는 춘추 전기에 비해 10-30배나 증가한 수치이다. 전쟁에 투입되는 병력의 규모도 늘어나, 전국 초 10만 전후이던 것이 40만 정도로 증가했고, 전투도 지구전화하여 3-5년씩 걸리기도 하였다. 전쟁이 빈번해지고 격렬해짐에 따라 방어수단도 지하여 요츙지에 수비시설을 갖추고 병법과 군사학도 발전하였다. 물론 전쟁에 동원되는 민중의 고통은 말할 수도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쟁의 극복과 종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한 국가에 의한 완전한 승리 즉 통일뿐이었다.

전쟁애서의 패배로 인해 겸병될 지도 모른다는 제후들의 위기의식은 심화되었고 그 결과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를 위해서는 인적·물적 자원을 극대화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해야만 했다. 그 결과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국내체제의 정비와 부국강병의 추진이 요구되었다. 군주권의 강화는 종래 공동체의 규제하에서 이용되던 산림수택(山林藪澤)이 군주 개인의 재산으로 전화되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산립수택은 원래 제사와 군사를 공동으로 하는 씨족제적 읍공동체의 전렵(田獵) 장소였다. 그러나 춘추 중기 이후 전란이 격화되면서 산림수택은 직할상비군의 확대·강화를 위한 군사자재의 공급원으로서 과도기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후 전국시대가 되면 교역의 확대와 상업의 발달을 계기로 전제군주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제염과 제철을을 군주가 독점하고 이로 인한 수입을 얻거나 이를 개간하여 획득된 토지도 공전화(公田化)하여 수입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한편 춘추 중기 이후 재산의 사유화에 따른 읍 내부의 계층분화를 계기로, 다수의 읍민이 몰락하고 이산하였다. 국가로서는 이들의 취약한 재생산을 보장하고 토지에 안착시켜야 했다. 전국 이후 도시거주 인구가 급증했던 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적 분업화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지만 파산농민의 도시유입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와 아울러 상업의 발달로 인해 말업(末業)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역시 국가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 문제의 해결 역시 전국 국가가 직면했던 과제 중 하나였다.

군주권의 강화에는 군주의 수족 역할을 할 수 있는 관료집단의 충원과 관료제의 정비가 또한 요구되었다. 영토국가가 출현한 이후의 국가경영은 징세 중심의 간단한 행정과는 이미 차원을 달리 하였고, 군주 직할지의 확대는 행정사무의 복잡화와 전문화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전국시대가 되면 실제 행정능력과 정치적 식견을 갖춘 유능한 인재가 대거 필요하였고, 이제 신분의 귀천은 효율적인 관료선발을 저해하는 거추장스런 짐이었다. 더구나 찬탈과 배반의 위기를 느끼는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넘보지 않는 단순 기능인을 이상적 관료로서 측근에 두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이제 유력 세가라는 씨족적 배경은 오리혀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빈궁한 하층의 사인이 자신의 학식을 매개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이같은 능력지상주의와 출세주의 풍조는 사회전반의 신분상승 욕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들 관료 지망자들을 효율적으로 선발하고, 선발 이후 효율적인 운용을 하는 것 역시 주요 과제였다.


3.3.2. 변법과 제민지배의 성립

이상의 과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전국시대의 군주가 시행한 것이 바로 변법(變法)이다. 가장 먼저 변법을 실시한 것은 위나라의 문후(文侯)였다. 그는 법가의 시조라고 하는 이회(李 )를 등용해 법전의 편찬, 소농민 보호대책 등을 실시해 국내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적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전국 초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이어 B.C. 403년에는 조나라가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B.C. 390년 경에는 초나라가 오기(吳起)를 등용해 개혁을 주도케 하였다. 오기변법의 핵심은 세습 봉군의 특권을 배제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앰으로써 관리의 기강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왕의 사후에 오기가 처형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의 경우도 B.C. 354년에 신불해(申不害)를 상으로 기용하여 그의 주도하에 효율적인 관료제 운용방식을 도입해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신불해가 상으로 재임한 15년간 약소국 한이 타국으로부터 침입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에서도 B.C. 357년 추기(鄒忌)가 기용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다. 진에서도 상앙(商 )의 주도로 B.C. 356년과 350년에 2차에 걸친 변법을 추진하였고, 연에서도 B.C. 316년에 획기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결국 7웅은 B.C. 400년을 전후하여 약 100년간 경쟁적으로 변법을 단행하여 국내체제를 정비하였다. 변법의 주목적은 군주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법치의 관철에 있었다. 또한 소농민에게는 균등한 토지의 점유와 안정적인 재생산구조를 보장하면서 이들을 호적에 편입하여 제민(齊民)으로서 일률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국내체제를 안정시키고 군주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이들을 최대한 확보아형 군사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결국 변법의 최후 목적은 제민지배체제의 확립에 있었다.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국의 사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고, 관철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지만, 대개의 경우 구래의 특권층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였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자 성공적이고, 이후까지 계승되었으며, 변법의 구체적인 추진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상앙의 변법이다.

상앙은 1차 변법에서 십오제(什伍制)와 연좌제를 통해 인민을 빈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십오(什伍)로 편성하고 상호 감시케 함으로써 향리공동체의 내부질서를 파괴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2차 변법에서는 31현을 설치해 군현제적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렇게 중앙집권적인 군현지배를 관철시킨 후 본격적인 제민의 창출을 위해 수전체제(授田體制)를 시행해 토지의 균등 분배와 국가에 의한 소농민의 보호에 나섰다. 다음으로는 제민은 경전지민(耕戰之民)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활용한 군사체제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이것이 군공작(軍功爵)에 의한 20등작제(等爵制)의 실시이다. 신분제의 해체와 전쟁의 격화에 따라 전공에 의한 신분상승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고, 이 작위의 서열에 따라 모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결국 전국 변법에서 지향했던 것은 첫째, 폐쇄적인 씨족 질서와 대가족제를 해체하고, 관료제에 의한 군현제적 지배를 실시해 십오제와 연좌제를 수단으로 제민을 철저히 감시·감독함으로써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법치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둘째, 수전체제의 정비와 소농민의 보호를 통해 제민을 최대한 확보하고, 그들의 최대한의 노동과 봉사를 강요하는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셋째, 주요 산업을 관영화하거나 국가독점화하여 민영산업의 성장을 억제하여 빈부의 격차에 따른 소농민의 몰락과 부민(富民)의 출현을 막고자 하였다. 넷째, 군공서열에 의한 작제적(爵制的) 신분질서의 정립을 통해 제민의 전투욕구와 신분상승 욕구를 부추켜 효율적 지배를 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변법 중 진은 변법에 성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결국 중국을 통일하였다. 진은 원래 씨족제적 전통이 약하고 군권이 강했던 데다 진민의 문화적 후진성에 따른 순박한 기질이 제민지배의 관철도를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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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말약(郭沫若)【Guō Mòruò】1892.11~1978.6.12

 

원명(原名) 곽개정(郭開貞), 자(字) 정당(鼎堂, Dǐng Táng). 1892년 사천성 출생. 근대 중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시인, 역사학자, 고문자학가(古文字学家), 고고학자, 극작가(剧作家) 및 사회활동가이며 갑골학4당(甲骨学四堂)의 하나이다. 곽말약은 1914년 일본 구주제국대학(九州帝国大学)에 유학하여 일본여성과 결혼하고 1921년 첫 번째 시집(诗集) ‘여신(女神)’을 발표했으며, 1927년 장개석(蒋介石) 총사령(总司令) 지휘하의 북벌군(北伐军) 총정치부(总政治部) 주임(主任)으로 있었으나 이후 장개석을 성토하는 격문을 쓰고 남창(南昌) 봉기에 참여하며 중국공산당(中国共产党)에 가입하였다가 1928년 2월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일본에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을 연구하며 1930년 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会研究)를 편찬하였고 1937년 항일전쟁 발발 후 귀국하였으며 1948년 국공내전(国共内战) 기간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원사(院士)를 지냈다. 건국 후 중앙인민정부(中央人民政府) 위원, 정무원(政务院) 부총리(副总理) 겸 문화교육위원회(文化教育委员会) 주임(主任), 중국과학원(中国科学院)의 초대 원장(院长), 전인대(全人大) 상위회(常委会) 부위원장(副委员长), 중국과기대학(中国科技大学) 초대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혁명(文化革命) 전과 문화혁명 기간 중 다량의 작품을 발표한 극소수 인물의 하나로 장기간 작품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를 찬양해왔으며 문화혁명 기간 자기비판에서 자신의 업적을 부인함으로써 국내외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78.6.12 북경에서 사망하였으며 그가 거주하던 곽말약고거(郭沫若故居)는 북경 십찰해(什刹海) 서면에 위치하며 1963년부터 1978년 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1994년 곽말약기념관(郭沫若纪念馆)으로 지정되어 유품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곽말약고거(郭沫若故居)는 원래 건륭제의 신하 화신(和珅) 저택의 정원일부로 이후 공왕부(恭王府)에 편입되었다가 건국 후 몽고인민공화국(蒙古人民共和国)의 주중 대사관 및 송경령(宋庆龄)의 거주지였다가 1963년 송경령(宋庆龄)이 이사한 후에 곽말약(郭沫若)이 이곳에서 1978년 사망하기까지 거주하였고 1988년 제 3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은허에 대해

 

중국의 학술계에서 하()는 중국 고대 최초의 왕조로 인정된다. 그러나 하조에 관한 역사자료가 기본상 후세의 문헌에 의한 기술로써 현재까지 고고학적 발굴의 확실한 인증을 거치지 못하였다. 고고학 자료로 확실하게 실증할수 있는 중국 고대의 가장 이른 왕조는 상조(商朝)이다. 중국에서 역사 기재가 있는 가장 이른 왕조인 상조에 대해 소개드리겠다. 1

상조는 기원전 약 16세기에 창건되여 기원전 11세기경에 멸망하였으며 약 600여년의 역사가 있다. 상조는 초기 여러차례 수도를 이전하였으며 최후로 이전한 수도가 은()[오늘날 하남-河南 안양-安陽 부근]이다. 고고학적인 실증에 따르면 상조 초기 중국의 문명이 벌써 상당한 수준에서 발전하였는데 그 주요 특징이 바로 갑골문과 청동문화이다.

갑골문은 매우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였다. 20세기 초 당시 하남성 안양 서북부의 소둔(小屯)촌 농민이 우연한 기회에 얻은 귀갑과 수골(獸骨)을 약재로 팔려고 하던 중 한 학자가 그 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발견하게 되였으며 큰 힘을 들여 더 많은 귀갑을 찾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중국의 고대문자 학자들이 귀갑과 수골에 새겨진 문자가 상조문자라는것을 확정하였고 그뒤 소둔촌이 바로 옛 기재에서 나오는 상조 도성의 유적인 은허(殷墟)라는것을 확정하였다.

은허의 발견과 발굴은 20세기 중국 최대의 고고발견이다. 1928년 최초로 발굴한 이래 수둔촌에서는 갑골문과 청동기를 망라한 대량의 진귀한 문물이 출토되였다. 갑골문은 귀갑과 수골에 새겨진 고대문자이다. 상나라시기 국왕은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점을 치였다. 갑골은 점 칠때 사용되는 도구였다. 갑골은 사용전에 우선 가공을 하는데 먼저 갑골의 피와 고기를 깨끗이 제거한후 평평하게 간다. 그후 갑골의 안쪽 또는 수골의 반대쪽을 칼로 우묵하게 파낸다. 이런 우묵한 자국은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점치는 사람을 무당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름과 점치는 일자, 물으려는 문제를 모두 갑골에 새긴후 불로 갑골의 우묵한 자국을 태운다. 그러면 우묵한 자국이 열을 받아 금이 가는데 이때 나타난 금을 ()” 라 부른다. 무당은은 이런 무늬를 분석하여 점의 결과를 도출해 내고 점이 영험한지 여부도 갑골에 새긴다. 점이 영험하면 갑골문자를 새긴 갑골은 관아의 서류로 보존된다.

현재 은허에서 도합 16만여쪼각의 갑골이 발견되였다. 그중 일부는 완정하고 일부는 문자기재가 없는 쪼각들이다. 통계에 따르면 이런 갑골에는 여러가지 문자 도합 4천여개가 있는데 그중 학자들이 연구를 거쳐 고증한것이 3000개이다. 또 이 3000개중 학자들의 해석이 일치한것이 1000여자이며 나머지는 해석이 불가능하거나 학자들의 의견상이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000여자를 통하여 사람들은 이미 상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상황을 대체적 이해하였다. 갑골문을 연구하는 최초의 전문 저서는 1913년 출판된 유악(劉鄂) 철운장귀(鐵雲藏龜)”이다. 중국의 유명 사학자와 문학가인 곽말약(郭沫若) 1929년 출판한 갑골문자연구(甲骨文字硏究)”는 또 한 부의 중요한 저서이다. 현재 중국의 갑골문 연구분야의 권위인사는 베이징대학 구석규(裘錫圭)교수와 중국역사연구소의 이학근(李學勤) 교수 등이다.

글이 새겨진 갑골문과 마찬가지로 청동기도 상조시기 대표적인 기물이다. 상조의 청동기 제련은 이미 상당한 기술수준을 갖췄으며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만 수천점에 달한다. 그중 1939년 은허에서 출토된 사모무(司母戊) 대방정(大方鼎)은 무게가 875kg, 높이가 133cm., 길이 110cm, 너비 78cm로 모양이 웅위로운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 전성시기의 대표작품이 하나이다.

고고발굴 및 학술연구는 상조시기 이미 국가가 산생되였고 사유제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였으며 그 때로부터 중국역사가 문명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증명한다

데일리차이나] 천재학자 왕국유의 투신

청대 고증학을 집대성한 중국 국학계의 큰 스승 왕국유.
“천재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며 그가 받는 고통은 훨씬 심하다. 왜냐하면 천부적 능력으로 누구보다 세계를 깊게 통찰하고 세계의 본질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남다른 감수성으로 그것을 훨씬 더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 300년 학술 업적을 총결하고 그 이후 80년 학술계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중국 국학계의 큰 스승이자 천재학자였던 왕국유(王國維), 그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떠올리면 이 말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1927년 6월2일 오전, 칭화(淸華)대학교수였던 왕국유는 학교 근처에 있던 이화원의 곤명호(昆明湖)에 뛰어 들어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50년의 인생,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로다. 변해가는 세상, 의는 없고 치욕만 계속되는구나.(五十之年,只欠一死;經此世變,義无再辱) 라고 적혀 있었다.

1877년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난 왕국유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수재로 불렸다. 23세 되던 1899년 무술정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준비하던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시무보(時務報) 서기로 취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관념철학 등을 공부하고 평생 동지인 나진옥을 만나게 된다.

1901년 나진옥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병으로 인해  곧 귀국하여 강단활동과 함께 저술활동에 들어간다. 1906년 청나라 정부 산하의 연구소에서 재직하면서 부의(溥儀)에게 문학수업을 하였으며 한족이면서도 청의 유신(遺臣)을 자처하며 평소 장포와 변발 등 청조 복장을 즐겼다. 이 시기 왕국유는 문학비평의 규범으로 뽑히는 <인간사화人間詞話>를 집필하기도 한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갑골문과 고문 등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1916년 귀국한다.

1924년 풍옥상(馮玉祥)이 베이징정변을 일으켜 마지막 황제 부의를 몰아내자 왕국유는 그 치욕을 참지 못하고 나진옥과 청의 신하들과 함께 자금성 앞의 금수하에 투신하려 하였으나 주변사람들의 만류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죽음은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걷는 청조에 대한 비관이었으며 멱라수에 투신한 굴원과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에 견줄 만한 충신의 우국적 순국으로 평가받을만하다.

또한 왕국유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철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중국의 고문을 재해석해 내며 고전문학, 미학, 고고학, 음운학, 금석학, 갑골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광대한 학문적 성과를 남겼으며 고전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무술변법운동을 주도한 강유위(康有爲) 등을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늘 현실을 외면한 불가지론과 보수적인 사상을 견지하면서 끝까지 청조와 구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왕국유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급격한 시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믿던 진리를 끝까지 지키며 실천한 한 천재의 고뇌만이 아름다운 글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묻건데 그 어느 곳에 이 몸 의지할 수 있을까.
큰 길을 찾고자 하나 갈림길만 많아지는구나.
인생의 지나가는 곳곳마다 후회만 쌓이고
아는 것이 늘어 갈수록 의심만 더 생겨나는구나.’

베이징=국정넷포터 김대오 dae55555@hanamail.net

<김대오님은> 베이징에 살며 오마이뉴스, 뉴스메이커등에 중국관련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북경바닷가'] myhome.naver.com/jindawu <데일리차이나>는 그날 그날의 중국 소사(小史)를 전하며 중국 역사 속의 오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난입니다.

이름: 최영택
2002/10/25(금)
갑골문 연구자의 비운(悲運)-나진옥  
나진옥(羅振玉)은 선배인 왕의영, 유철운 두 사람과는 달리 골동품상에서 모아온 갑골에 대하여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갑골이 하남성 안양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현지로 찾아가 조사했으며, 갑골이 청동기와 옥기(玉器), 골기(骨器), 석기(石器) 등과 함께 소둔의 언덕에서 발굴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식견이었다.
나진옥은 선배들이 모은 갑골 외에 자기 손으로 많은 갑골을 모아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 당시 청나라는 1911년 신해(辛亥)혁명으로 멸망하였다. 청나라의 관리로서 북경 농과대학 학감(學監)이었던 나진옥은 가족 외에 젊은 제자인 왕국유를 데리고 교또오(京都)대학의 친구를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나진옥이 가지고 온 많은 짐짝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보관한 것은 전력을 다하여 모은 갑골이었다. 운반과 세관 검사 때문에 파손된 것도 많았으나, 나진옥은 교또에 정착하자 그 탁본(拓本)의 정리를 시작하여 1913년 <은허서계전편(殷墟書契前編)>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크로타이프인쇄를 이용한 것으로서 책도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의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계속하여 나진옥은 이 자료집에 낸 갑골문자의 해설서를 써서 이듬해 <은허서계고석(殷墟書契考釋)>으로 출판하였다. 이러한 책들의 출판으로 갑골문자는 처음으로 읽혀지게 되었다.

42. 갑골문을 가장 많이 수장했던 서예가


갑골문을 가장 많이 수장했던 서예가는 청나라 말의 나진옥(羅振玉)이다.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의 자는 숙온(叔蘊)ㆍ숙언(叔言)이고, 호는 설당(雪當)ㆍ정송(貞松)이며, 절강성 상우(上虞)사람이다.  후에 회안(淮安)으로 옮겨 살았으며 청나라 말에 학부참사(學部參事)를 지냈다.  그는 평생 학문에 힘써 자신의 키만큼 많은 책은 썼으며 특히 서화 감상과 금석 고고학에 정통했다.  그의 글씨는 꾸밈이 없고 수수하며 예스럽고 전아하면서 정취가 있다.  그는 『은허서결고석(殷墟書契考釋)』ㆍ『유사추간고석(流沙墜簡考釋)』ㆍ『삼대길금문존(三代吉金文存)』 등의 전문서적을 써서 갑골학에 대해 창조적인 공헌을 하였다. 

나진옥은 1901년 유악(劉鶚)의 처소에서 갑골문을 본 후 즉시 골동상인파견하고 직접 하남성 안양 소둔촌으로 가서 온 힘을 다해 수집하여 1년 안에 만 편 이상을 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동생인 나진상(羅振常)과 처남인 범조창(范兆昌)을 원양(洹陽)으로 보내어 이를 파게하여 다시 배를 얻었다.  통계에 따르면 그가 구한 갑골은 약 3만여 편인데 많은 정품이 있어 국내외 학술계에서 칭찬을 받았다.

나진옥은 갑골문을 가장 많이 수장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갑골 출토 지점을 고증해서 갑골학의 형성과 발전에 특출한 공헌을 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철운장귀(鐵雲藏龜)』의 출판은 그가 유악이 소장하고 있는 갑골 탁본을 발표하도록 권한 것이며 아울러 직접 갑골을 탁본하고 서언을 지어 갑골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는 또 갑골문자 571개를 고증하고 해석하였는데 이 방법은 후에 학자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었다.  그와 왕국유(王國維)는 갑골문 전래와 연구에 공헌을 하여 당시 갑골학의 대표가 되었으며 당시 갑골학을 ‘나왕지학(羅王之學)’이라 부를 정도였다.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은초김향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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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참(可興站) 
☞   可興가흥: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나라에 받치는 경상도의 세곡을 낙동강을 따라 상주까지 운반 후에 조령재를 넘어 가흥창으로 모였던 곳이다. 
일찍이 1477년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가흥참(可興站) 

嵯峨鷄立嶺            우뚝 솟은 계립령은 

終古限北南            예로부터 남북의 경계가 되었네. 

北人鬪豪華            북쪽사람들은 다투어 사치하는데

南人脂血甘            남쪽사람들의 기름과 피를 빠네 

牛車歷鳥道            우마차로 조령고개 넘는 길엔 

農野無丁男            농사철 들판에 일하는 장정 보이지 않고 

江干夜枕藉            강가에서 밤이면 서로를 베개 삼아 잠을 자네 
 
吏胥何婪婪            아전 서리들은 어찌하여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小市魚欲縷            시장의 생선 가늘게 회치고 

茅店酒如泔            주막에 술은 쌀뜨물처럼 하얀데 

醵錢喚遊女            돈 거두어 계집 불러 즐기니

翠翹凝紅藍            엉덩이를 살랑살랑 연지곤지는 덕지덕지

民苦剜心肉            백성들 심장이 깎이듯 괴로운데 

吏恣喧醉談            아전들 취해서 방자히 떠들며  

斗斛又討嬴            됫박질하면서 또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하니

漕司宜發慚            출납을 맡은 관리는 의당 부끄러워야 할 것이거늘 

官賦什之一            관가에 받치는 건 십분의 일인데 

胡令輸二三            어찌하여 두 곱 세 곱을 실으라고 호통을 치는가.

江水自滔滔            강물은 절로 도도히 흐르건만

日夜噓雲嵐            밤낮으로 탄식하는 구름 물안개

帆檣蔽峽口            배 돛대 그득한 좁은 강나루에서 
 
北下爭驂驔            북쪽서 내려와 다투어 슬쩍 슬쩍 빼내가니
 
南人蹙頞看            남쪽 사람들 도끼눈 뜨고 살펴보는 것을 

北人誰能諳            북쪽 사람들 누가 신경이나 쓴다던가.





200년이 지난 뒤  비안 박연에 살던 용담 김계선생의 시절에도 그 고통은 더욱 심해져만 간다.

1651년 효종 2年  용담 77세
칠곡 가산산성을 쌓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역의 고통에 시달렸다. 성을 쌓은 이후에도 쌀을 실어 올려야하는 고통과 산성의 보수 일에 노역은 계속되는 상황에 백성들의 원성이 쌓여 오죽하면 가산산성을 쌓은 관리들을 원망하며 그 살을 씹고 그 가죽으로 이불을 덮을 것이라 했을까. 거기에 더해서 농지세를 광목이 아닌 쌀로 정하여 멀리 충주까지 실어 날라야하는 고역을 치르니 원망이 극에 달한 때이다.   
용담 선생이 참다못해 붓을 들었다.  

-용담일기 중에서-

○田稅作木上疏草伏以臣等所居比安爲邑地偏民鮮水土淺滿少有澇旱先自阻飢常賦之役竭力供奉而每患不逮勅物之徵星夜措辦而每必生事民力竭盡儘合變通欲陳於方伯而非其檀裁來訴於該曺而又非自斷故遑遑間迫不得不呼顱於父母之前糞蒙採納伏惟遍下試垂憐察焉
농지세를 면포로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임금께 상소문을 올린다.  
엎드린 저희들은 땅과 물길은 적은 장마에도 물에 잠기며 가뭄에 앞서 먼저 굶주림에 허덕이고 항상 세금을 내지 못해 노역으로 진력을 다해 받들고 일하고도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받치는 공물을 징수하여 언제나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니 밤늦게 별을 보면서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살아남고자 하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있는 힘을 다해 모두 뜻을 모아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자 경상감사에게 하소연하였으나 저희들의 뜻을 어찌 헤아려줄 수 없다고 하여 또다시 담당중앙 관청인 해조에 고하였던 바 그 곳에서도 스스로 결정 할 수 없다고 함으로 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어 허둥지둥 부모님께 불쑥 볼을 들이 밀었으니 어린아이를 닦아 주듯 저희들의 뜻을 받아주소서. 
삼가 엎드려서 아래 글을 두루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시기 바리나이다. 

夫朝家賦役於民者一視同仁均有定式而本縣襡以至殘之邑兼他邑所無之役何者嶺南一道分爲上中下三道上都則年年田稅載輸於可興倉五日之程中道則田稅米太今數作木上納於京中而甹自架山城設立之後中道各邑盡屬於山城擬諸緩急保守故兵糧盡討於山城而本縣處於上都之下中道之上故謂之上都而轉輸米太於可興于謂之中道而儲峙糧械於架山以一縣而兼上中道之役則本縣獨不寃若乎
조정에서 부과하는 세금과 노역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하나같이 똑같이 정해지는 법인데 저희 고을에서만은 부역이 끝나기기 전에 다른 읍에는 없는 노역일이 또다시 겹치니 어쩐 일입니까. 
영남의 한도에 속하여 상중하로 3도로 나눈 上都상도에서는 년 년이 농지세를 충주에 있는 가흥 창고까지 마차에 실어 나르는데 5일이 걸립니다. 
中道중도에서는 농지세로 내는 쌀과 콩 대신에 최근에는 수차례 광목으로 서울에 받쳤는데 일이 꼬여 칠곡군 가산산성을 쌓은 이후에는 중도의 각 읍이 모두 가산산성에 소속된 것이 의문스럽습니다. 급히 성을 보수하는 일로 산성의 군량미로 모두 쓰였는데 본 현은 상도에 소속되어 있으니 下中道하중도가 상도가 된 꼴이라 하겠습니다. 
상도이니 쌀과 콩을 가흥 창고까지 실어서 나른다는 것이라 하고 중도에 속해 있으니 가산산성의 높은 고개에 군량과 곡식을 쌓아야하니 하나의 현이 이중으로 상중도의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니 오직 우리 현만의 억울함이 이와 갔습니다.  

臣等請先陳可興遠輸之艱與架山貯糧之斃焉鳴件田稅輸倉惟民所供如不有思宜苦之狀萬萬難堪者
저희 들이 청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계속해서 충주 가흥창고까지 멀리 실어 날라야하는 어려움과 칠곡 가산산성에 곡식을 지어 올려야하는 폐단입니다. 
이번 일은 농지세를 실어 나르는 창고는 백성들이 받치기 알맞은 곳으로 정해야하는데 적절한 고려 없이 정해진 것이니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난감합니다. 

臣等問敢百舍重滿凟擾於過災修省之日乎夫遠輸之難有三焉鳥嶺之險惡不必形容其危機石磴而民力之貧富不齊夫馬之有無不同貧而孤寡者典賣其田土富而有馬者索高其輸價督發及期之際南負女載必至顚仆而後己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一也 
저희들의 이 문제로 감히 멀리서 거듭하여 시끄럽게 소요하는 것은 지나가는 재앙에서 몸을 구한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멀리 실어 나를 때 세 가지 어려움이 있사오니 조령산맥의 길이 험난함을 형용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위험한 자갈 비탈길에서 백성들의 고생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차가 있거나 없거나 하나같사오며 자식 없는 과부들은 그 토지와 집을 저당 잡히거나 팔아 치우고 부자들은 마차를 구해 봐도 운임이 너무 비쌀뿐더러 관청에서 정한 기간 내에 실어오라고 재촉하여 날짜를 맞추느라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서 결국은 엎어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그 일을 마치게 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첫 번째 근심입니다.  

及夫踰嶺輸倉之際一碩所納米則幷計其運價行糧必費二碩有半然後可望准納則田結多而家甚貧者數三碩所納之米虛費其米者又幾多耶以此民困日甚而雇價日增民情所在必欲作木者誠可愍也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二也   
또 저 고개를 넘어 창고까지 실어 나르는 일을 마치려면 한가마를 바치는 데에 따른 추가 운임이 필히 두 가마 반이 들어야만 확실한 수납이 가능하니 논밭이 많은 집에서는 부담이 크고 가난한 사람들은 세 가마를 운송하는 비용으로 식량을 삼고 또 그 런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이곳 백성의 곤궁함은 날로 더해가서 노임은 날로 치솟아 갑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꼭 세금은 곡식 대신 광목으로 바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두 번째 근심입니다.  


不徒此也自從牛㿄之後民間富饒者常不能多畜牛馬初其貧無牛馬者乎以此田價賤而抛黃居多民生析而不尊厥居此臣等之所望於至上之軫念者三也 
이뿐만이 아니라. 소들이 마름병에 걸린 후로는 민가에서는 배불리 먹던 부자도 평소와 같이 많은 소와 말을 기르지 못하고 애초 소와 말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이리하여 농지는 헐값에 집어던지고 병들고 지친 많은 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집에선 제사도 올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바라는바 전하께 올리는 세 번째 근심입니다.
鳴呼本縣田三稅所納於可興者況是六百有奇則其數不靜而十室殘邑民力己竭一碩之運重若千斛侗蒙准十許於作木經費所需米布奚捀而民間專輸輕重自別矣 
아 아 우리 현에서 세 가지의 농지세를 내는 곳은 충주 가흥이니 더구나 지금 육백집이 지금의 법대로 한다면 안정하지 못하고 그 가구 수는 열 집이 쇠잔해질 것이고 읍민의 기력은 다해서 한번 나르는 무계는 천섬과 같으니 어리석은 아이라도 비교해보고 열 번이라도 광목으로 받칠 것입니다. 
거두어들이는 쌀과 면포의 경비가 어찌하여 받치는 백성들 간에 오로지 실어 나르는 무계로 구별되는 것입니까.

抑念臣等所謂本縣兼他邑所無之役者切近傍邑如軍威義城等官之距可興道里均於本縣而以其有貯糧械於架山之苦而猶在作木之列則本縣旣屬於架山恒儲七百餘祖及軍器什物而山嵐篜濕易致腐黑間年改色則民力之困亦己極矣更無一分餘力可堪搬輸故冀免遠輸於可興狎得專力於山城其情不其哀乎
문득 저희들은 소위 다른 읍에는 없는 노역을 겸해서 하는 것은 군위와 의성 등의 관청과  같이 가까이 있는 읍이 잘려나가 갔기 때문입니다. (경상도의 중앙인 칠곡에 가산산성을 쌓으면서 지역이 분리됨)  멀리 떨어진 가흥인근 지방과 균일한 방법으로써 본 현에서 그렇게 쌓아야하는 곡식과 군 병기라면 가산산성에 쌓는 고통이 오히려 더하니 면포로 받치는 것이 순리인 즉 본 현은 이미 가산산성에 소속되어있어 항상 7백여 석의 군량이 쌓여있고 사당과 또 군병기와 온갖 기구가 있는데 산속의 아지랑이와 찌는 듯한 습기로 검게 썩어버려서 한해 걸러마다. 다시 바꾸어야하므로 백성들의 곤욕이 역시 극에 달해 있으니 기력을 찾을 만한 일각의 여유도 없이 쌀을 실어내는 일을 감당해야하므로 멀리 가흥창고까지 실어 나르고서는 번갈아 맡아서 가산산성에 전력을 다해야하니 그 사정이 애석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敢疾呼之望其極濟於偏苦之閟乎伏乞天地父母哀憐臣等之訴如窮人無所於歸本縣田三稅全數作木永作恒規尊安一邑之民不勝幸甚臣等無任膽天懇祈之至謹昧死以呻
감히 급하게 호소하여 바라는 것은 남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받는 답답함에서 구제해 주십사 엎드려 바라오니 천지의 부모님이시여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소서. 신들의 하소연은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궁벽한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 현의 세금을 모두 광목으로 꾸준히 바칠 수 있도록 규정을 정해 주시어 편안히 따를 수 있게 돼오면 한 읍의 백성으로 전하의 깊은 은혜에 신들은 황공하여 어쩔 바를 몰라 하늘같은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읊조립니다.  

                                                                    --- 김계---

 

<만장사운무>

 

“비안!”그 이름만으로도 신비스러운 비밀을 간직한 듯 하다.
어쩌면 영어나 불어 인 듯한 어감이기도 하고,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하며 여러 사람들을 서로 아우르게 하는 지명을 가진 그 이름 비안!
이곳이 한때는 의성의 중심지로서 행정을 총괄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지명의 어감에 걸맞게 주변 산천의 지세도 만만찮다. 동으로는 막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를 형상하는 화장산이 있고, 서쪽에는 천하를 평정할 듯 청화산이 우뚝 자리해 있으며 북으로는 병풍을 두르듯 백학산과 해망산이 팔 벌려 비안을 안고 있다. 멀리 팔공산에서 발원한 위천의 물줄기를 휘감아 받아들이고, 금성산의 정기가 녹아 흐르는 쌍계천과 의성읍의 오토산 기운을 머금은 남대천 강줄기를 이곳 비안에서 한데 모아서 아우르고 버무려 비안 고을의 들판마다 기름진 젖줄이 된다. 이는 오곡을 풍성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어 아래로 흐르면서 구천 벌판과 안계평야를 적시며 용이 꿈틀대듯 휘감아 굽이굽이 흐른다.
비안은 현재 의성군의 전신인 비안현 이였던 곳으로 당시 비안현은 1423년(세종5년)에 비옥현과 안정현이 흡수되면서 비안현이라 불리어지게 됐다.
17세기 초에 현 의성군 행정 구역 내에 의성현과 비안현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1895년(고종32년) 전국 고을이 조정될 때 의성군과 비안군으로 개편되면서 비안군은 한때 상주와 예천까지 관장했던 큰 군세를 이루는 때가 있기도 했다.
당시 번성했던 비안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 곳의 흔적을 살펴보면 한때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먼저 청동기 문화를 읽을 수 있는 고인돌과 선돌, 성혈암이 여러 곳에서 100기가 넘게 볼 수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부족이 터를 잡고 살았음을 알 수 있고, 1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비안향교가 비안면과 경계지점인 안계면 교촌리에 오랜 세월을 참아온 듯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안면 동부리에는 굽이치는 위천을 내려다보며 날아갈듯 한,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자가 절벽위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병산정이다.
고려 문화시중을 역임하고 벽상공신으로서 병산군에 봉해졌던 박우(朴瑀)의 묘제를 지내던 곳으로 공은 비안(병산)박씨의 일세가 되는 중시조이며 고려 때 비안 호족으로 성세를 누려왔다.
공의 후예로서 조선 세종조에 이조참판 대사헌 안동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 된 박 서생(朴瑞生)은 세종을 도와 화폐경제로 전환을 위한 금납세제와 시장경제 형성을 제창하고 농사를 위한 수차를 손수 제작했고 후생과 실학정치를 실천한 대선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880년(고종17년)경에 학문과 의로 후학을 가르치고 예의범절을 힘쓰신 지암 김재경 공의 학덕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숭덕사(崇德祠)가 비안면 옥연1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1752년(영조28년)에 후학을 길러내기 위해 창건한 백학 서당이 비안면 이두2리에 소재하고 있다.
이렇게 오래전 역사부터 충과 효와 예를 강조한 후학들을 배출한 이유 때문인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 때 향병을 인솔하고 용감한 전투를 치루고 많은 공을 세운 박사숙(朴嗣叔)과 임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싸움에서 장렬이 전사해 머리는 적이 베어가고 시신만 말가죽에 싸여 돌아와 죽은 후에 나라에서 호조좌랑을 증하게 된 백공 김희공(金喜公)과 이름을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병활동을 하신 분들이 많다.
이후 일제시대에 와서도 독립운동을 선도한 애국투사 현호 박석홍 선생이 있고 경북도내에서 최초로 3.1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현재 비안면 서부리의 목단봉 주변에 3.1독립 만세운동 기념탑과 공원이 조성돼 있다.
비안에는 잘 보존된 문화재를 여러 곳 볼 수 있는데 산제리에 위치한 화장산성은 1592년(선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란 때 의병의 은신처로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한 요새지로서 비안과 안평 신평면의 경계지점에 축조돼 있으며 규모가 크며 아직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화장산성에 인접해 산중턱에 비밀스러운 만장사(卍藏寺)라는 사찰이 구름위에 보일 듯 말 듯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찰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불상을 10년 전 발굴 복원해 경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갈수록 찾는 사람이 많고 경관이 수려해 명승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곳 만장사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4㎞ 거리에 자락리 해망산 정상 절벽에 석굴사원인 석불사(石佛寺)가 있다.
자연 석굴을 법당으로 한 보기 드문 곳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산꼭대기에 'ㄱ'자형의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어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이밖에도 국도에 인접하고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춘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북도문화재 304호)이 있고 용천사 사찰과 구연석불, 후천석불, 자락리 석조여래좌상, 구천서원, 백천서원, 병호서원, 경덕사 등 수많은 유적이 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치신 훌륭한 인물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유적비가 유별나게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비안에 최근에는 굽이쳐 흐르는 위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찾는 고을 만들기 사업이 한창이다.
우선 봉양을 지나 비안의 경계지점에 들어서면 얼마 전 조성한 항아리 탑과 커다란 장승이 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곳에서 조금 지나 백사장이 펼쳐진 위천의 고수부지에는 파릇파릇한 기운이 한창인데 곧 봄이면 만발하게될 유채꽃과 청보리를 수만평 식재해 볼거리와 관광거리를 만들고 있다.
또한 면 소재지 앞 고수부지에도 수만평의 청보리를 식재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강모래는 오염이 적어 강조개가 많이 서식하는데 여름이면 피서와 조개 잡는 사람들로 비안강을 찾는 이가 많아 또 다른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아직 그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을 추억하고 조용한 산사에서 마음을 다독이고 싶은 사람이면 이곳 비안이 제격이라 여겨지며 한번쯤 걸음을 권하고 싶다.
정휘영기자 <일간대구경북 2009년 1월 22일>

출처 : 日刊 대구경북
글쓴이 : 정휘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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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鱗蟲長能幽能細能短能巨能長春分而登天秋分而潛淵想像神靈動物. 天子事物之用語----.

         星名. 馬高八尺曰--. 田中高處. 黑白雜色. 寵同. 壟同.

 

 

 

 

주역의 (潛龍勿龍잠용물용: 물에 잠긴 용은 쓸 수가 없다는 말은

위글에서 보았듯이 천문도구의 황도환 지침이  아래쪽 (수평물) 淵 쪽으로 향할 때는 동지 때이다.

고대 천문관측시 동지날 추운 한 밤중에는 산 위에서  천문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 겨울에는 토굴을 파고 하늘을 관측했다.

하늘을 우러러 仰 바라보는 것이 아나라

토굴 속에서 물동이를 놓고

구부려 俯 아래쪽 물동이 수면에 반사되는 별을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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